쟁점: 지금의 이슈들
여성 차별의 현실과 쟁점
이 글은 필자가 2017년 3월 5일 노동자연대가 주최한 ‘여성해방 하루학교’에서 발표한 내용이다.
우리 할머니 세대와 비교해 보면 오늘날 여성들의 삶은 많이 변했다. 여자가 배워서 뭐하냐면서 학교에 보내지도 않던 때가 있었다. 그러나 요즘은 남성보다 여성들이 더 우수한 성적으로 더 많은 비율로 대학에 간다.
옛날엔 딸 낳으면 시부모가 오던 길도 되돌아간다고 했다. 그러나 이제 오히려 아들만 있는 부모는 전생에 죄가 많아서라고 말한다. “딸 낳으면 금메달, 아들 낳으면 목메달”이란 말도 있다.
여성들은 사회 여러 분야에 진출해 있다. 많은 여성들이 노동자로 일하고 있고, 전체 노동인구의 44퍼센트가 여성이다. 노동자가 됐다는 것은 장시간 고된 일을 한다는 걸 의미하기도 하지만, 동시에 자본주의 사회를 멈출 수 있는 강력한 힘을 가지게 됐음을 의미하기도 한다. 특히 보건, 교육, 공무원 같은 공공부문에서 여성의 비율이 매우 높다.
여성들은 기존에 남성의 일이라고 여겨지던 부문에도 진출했다. 요즘 드라마를 보면, 여성의 직업이 꽤 다양하게 그려진다. 의사, 변호사, 소방관, 형사, 군인 등등. 여전히 성 역할에 대한 고정관념을 부추기는 드라마들도 많지만, 이는 변화된 현실을 반영하는 것이다.
이제 많은 젊은 여성들은 줄줄이 애 낳고 평생 자식과 남편 뒷바라지 하며 희생하기를 거부한다. 최근 저출산 현상에는 경제적 문제들이 결합돼 있지만, 동시에 종속적 삶을 거부하고 주체적으로 자기 삶을 살아가겠다는 여성들의 의지가 반영된 것이기도 하다. 그래서 행자부가 가임기 여성지도를 발표한 것이나 최근 국책연구원이 저출산 문제를 해결하겠다면서 고스펙 여성의 눈높이를 낮추게 해야 한다고 한 건 완전히 격분할 만한 일이다.
이런 변화 때문에 이제 무슨 여성이 차별받느냐, ‘역차별’이다 하는 얘기도 나왔다. 그러나 여성들이 차별받는다고 말하는 것은 괜히 엄살부리는 게 아니다.
분명, 어떤 여성들은 유리천장을 뚫고 사회의 높은 곳으로 올라갔다. 어떤 여성들은 판검사도 되고, CEO도 되고, 대통령도 됐다. 이 여성들의 삶은 분명 다수 남성 노동계급의 삶보다 낫다.
그러나 여전히 상층부로 진입하는 여성조차 상대적으로 소수인 것이 사실이다. 무엇보다 다수 여성들은 평생 사회 상층부의 언저리에도 가보지 못한다. 정확한 그림은, 여성이 더는 차별받지 않는다는 게 아니라 여성들 사이의 계급 격차가 더 뚜렷해졌다는 것이다.
박근혜 퇴진 집회 때 자유발언대에서 한 여성은 이렇게 말했다. “서민들은 배추 한 포기가 비싸서 들었다 놨다 하는데, 순실이랑 박근혜는 수백억을 들었다 놨다 했다!” 이는 박근혜-최순실 게이트가 드러낸 여성들 사이의 계급 격차를 재치 있게 표현한 것이다.
박근혜 대리인단이 “연약한 여성” 운운하면서 박근혜를 비호하는 것은 정말이지 열불나는 일이다. 여성을 연약한 성으로 규정한 것도 열받았지만, 무엇보다 박근혜가 임기 내내 다수 여성들의 삶을 공격했기 때문이다.
‘여성’ 대통령 시대라고 했지만, 평범한 여성들의 삶은 나아지지 않았다.
여성 노동 차별
여성들은 남성들보다 비정규직이 될 가능성이 더 높고, 그래서 저임금에 처할 가능성도 더 높다. 여성 노동자의 절반 넘는 수가 비정규직이다. 여성 노동자 다섯 명 중 한 명은 최저임금도 받지 못하며 일하는데, 이것은 남성 노동자의 두 배에 이르는 비율이다.
이런 이유로 한국은 16년째 OECD국가 중 성별 임금 격차가 가장 큰 나라라는 오명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여성의 월 임금 총액은 남성의 64퍼센트밖에 안 된다.
이것은 여성이 남성보다 능력이 모자라서가 결코 아니다. 대학 진학률이나 각종 고시 합격률을 봐도 여성의 능력이 남성보다 뒤쳐진다는 근거는 없다.
노동시장에서 여성이 차별받는 이유는 육아 부담이 여성에게 떠넘겨져 있기 때문이다. 여전히 많은 여성들이 출산과 육아 때문에 경력 단절을 경험하는데, 이때를 기점으로 여성과 남성 사이에 고용률과, 임금, 비정규직 비율 등 모든 측면에서 남성과 차이가 생긴다. 육아 때문에 여성들이 경력이 단절된 후 흔히 구할 수 있는 것은 비정규직 일자리이고, 이는 저임금의 원인이 된다.
육아휴직제도가 법적으로 보장돼 있고 사용률이 늘어나는 추세이긴 하지만, 여성 노동자들은 법보다 상사의 눈치가 더 영향력이 크다고 말한다. 특히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육아 휴직을 사용하기는 매우 어렵다. 지난해 서울대병원 간호사들은 관리자의 지시 하에 임신 순번을 정하는 일도 있었다고 폭로했다. 임신과 출산이 급여나 승진 등에서 불이익으로 작용하기 때문에 여성들이 임신을 하고도 숨기는 일도 많다.
여성의 육아 부담이 고용 불안정과 임금 차별 등 노동시장에서 여성의 차별을 낳는 핵심 요인 중 하나다. 그래서 오랫동안 여성운동과 노동운동은 공공보육시설과 질 좋은 일자리 마련하라고 요구해 왔다.
그런데 박근혜 정부가 ‘일-가정 양립’ 정책이랍시고 내놓은 것은 시간제 일자리 양산이었다. 이것은 반쪽짜리 저임금 일자리에서 일하면서 동시에 육아도 책임지라는 것이었다. 보육에 대한 약간의 지원이 있었지만, 보육시설 공급을 민간업자에게 맡긴 채 그 시장을 활성화하는 방식이다 보니, 보육의 질이 너무 낮아서 부모들의 필요를 만족시키지 못했다.
직장 내 성희롱 문제도 여전히 심각하다. 직장 내 성희롱은 여성 노동자들의 노동조건을 악화시키는 주요 요인이다. 직장 내 성희롱은 모든 여성 노동자가 겪을 수 있는 고통이지만, 특히 고용이 불안정한 비정규직 여성 노동자들이 피해를 보기가 더 쉽다.
성 상품화
여성들이 차별받는 것은 단지 경제적인 것만은 아니다. 여성은 단지 여성이라는 이유로 성적 억압을 받고 성적 대상화를 통해 천대받고 때로는 학대받는다.
특히 오늘날 많은 여성들을 격분하게 만드는 것 중 하나는 여성에 대한 성적 대상화다. 어딜 가나 여성의 성적 이미지를 이용한 이미지들 천지다.
대형 연예인 기획사들은 젊은 여성들을 거의 벌거벗겨 놓고 섹시 춤을 추게 해서 돈을 번다. 언론과 TV프로그램들은 그런 몸매와 섹시미를 갖는 것이 여성의 본분이라도 되는 양 치켜세운다. 한국의 아이돌들은 엄청 유명해서 다른 나라에까지 가서도 돈을 벌면서 ‘한류’, ‘문화 선진국’ 어쩌고 하는데, 사실 이건 그냥 성 상품화의 수출일 뿐이다.
게임에 등장하는 여성캐릭터들은 언제나 가슴과 엉덩이가 부각돼 있고, 허리는 잘록하고, 눈이 얼굴의 반이다. 현실에서는 거의 찾아볼 수 없는 이미지들뿐이다.
이런 상황에서 갈수록 여성들은 섹시해져야 하는 압력, 몸매와 얼굴을 가꿔야 한다는 압력에 시달린다.
이런 식의 성차별은 대학가 문화로도 확산이 됐다. 요즘 대학 축제의 주점들에서 여학생들이 짧은 옷차림에 호객 행위를 한다거나 여성의 몸을 대상화하는 일이 재미있는 것처럼 취급되는 경우를 볼 수 있다. 이런 문화는 10년 전만 하더라도 찾아보기 어려웠는데, 더욱 문제는 마치 이런 게 여성 자신감의 표현이고, 쿨한 거고, 여성해방이라도 되는 양 부추겨진다는 것이다. 그러나 여성의 몸을 마치 정육점 고기처럼 전시하고 등급 매기고 못쓰겠다고 잘라내고 하는 것은 결코 여성의 해방이라고 할 수는 없다.
물론 성을 숨겨야 한다거나 부끄러워해야 한다거나 금기시해야 한다는 식의 성적 보수주의에 반대한다. 그러나 성 상품화와 ‘야한 문화’는 성의 해방이 아니라 오히려 성이 소외된 상태를 보여 준다. 마르크스는 “자본주의가 인간성의 고유한 부분을 사고팔고 소유할 수 있는 소외된 사물로 변화시킬 수 있다”고 했다. 오늘날 성도 우리에게 낯설고 소외된 사물이 됐다. 이것은 모든 것을 이윤의 원천으로 바꾸는 자본주의의 속성을 보여 주는 것이다.
사실, 성적 이미지가 만연해 있지만 정작 성에 대한 진정한 토론과 논쟁, 성적 자유는 매우 부족할 뿐 아니라 제약되기도 한다. 간통죄가 지난해에야 폐지된 것, 동성결혼 등 성소수자들의 관계가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 대표적이다.
낙태
성에 대한 자기 결정권이 부정되는 사례 중 하나는 낙태 문제다. 얼마 전에 박근혜는 낙태 처벌을 강화하려 했었다. 많은 여성들이 반발했고, 특히 박근혜 퇴진 운동 벌어지면서 정부가 압력을 받아서 결국 철회됐지만, 한국에서 낙태는 여전히 불법이다. 한 해 30만 명이 낙태한다는 걸 감안하면 이는 현실과 매우 괴리된 것이다.
그러나 낙태가 불법인 상황에서는, 여성은 비싼 돈을 주거나 안전을 보장할 수 없는 곳에서 시술받아야 하고, 죄책감을 갖고 쉬쉬해야 한다. 드물지만 처벌받는 경우도 있다.
이명박 정권 때 낙태 단속이 강화되면서 낙태 비용이 엄청나게 올랐다. 어떤 곳에선 5백만 원까지 오른 곳도 있었다. 이것이 부유한 여성들에게는 문제가 안되겠지만, 노동계급 여성들과 청소년 여성들에게는 심각한 문제가 된다. 따라서 낙태권은 특히 노동계급 여성들에게 중요한 쟁점이다.
낙태를 할지 말지는 여성이 선택할 수 있어야 한다. 임신·낙태는 여성의 몸에서 벌어지는 일이고 여성의 몸은 여성의 것이기 때문이다. 여성에게 낙태를 선택할 권리가 없다면, 여성은 자신의 출산을 통제하지 못하고 자신의 인생도 계획할 수 없다.
낙태를 반대하는 우파들은 ‘태아의 생명권’을 운운하지만, 수정체와 아기는 구분해야 한다. 수정체는 인간이 될 잠재력이 있는 것이지 아직 독립적 인간은 아니기 때문이다. 게다가 낙태의 대부분은 8~12주 사이에 이뤄진다. 그렇기 때문에 후기 낙태도 방어해야 한다. 오랫동안 임신을 해 오다가 낙태를 결심했다는 것은, 여성이 고심 끝에 결정한 일일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여성의 요청에 의해 언제든 저렴하고 안전하게 시술받을 수 있도록 낙태를 전면 합법화해야 한다.
지난해 정부 처벌 강화 시도에 반발해서 여성들이 “나의 몸은 나의 것”이라고 외치면서 시위 벌인 것은 좋은 일이었다. 특히 그동안 주류 여성운동이 낙태권을 주요한 이슈로 다뤄 오지 못했다는 점을 비춰 보면, 낙태권이 여성운동의 주요 의제가 된 것은 진일보한 것이다. 물론 사유, 기간, 낙태권이 왜 부정당하는지는 쟁점으로 남아 있는 듯 보인다.
여성에 대한 폭력
성폭력, 데이트 폭력, 아내 구타 등 여성에 대한 폭력은 여성차별의 가장 흉측한 단면을 보여 준다. 얼마 전 남자친구에게 헤어지자고 했다가 협박을 당하고 경찰에 신고했는데, 경찰이 남성을 금세 돌려보내 결국 여성이 구타당해 죽음에 이른 일이 있었다.
여성에 대한 폭력은 주로 남편, 남자친구, 전 남편, 전 남자친구, 친척처럼 가까운 사이에서 벌어지다 보니 은폐되기가 쉽다.
어떤 사람이 길을 가다가 물건을 도둑맞았다고 해서, 왜 그런 물건을 들고 다녔느냐, 왜 그 시간에 거길 갔느냐, 왜 그렇게 있어 보이는 옷을 입어서 도둑을 유혹했느냐, 평소에 잘 베풀 것처럼 행동을 하고 다닌 거 아니냐는 비난을 듣는 경우는 거의 없다.
그러나 성폭력을 당한 여성들은 피해자인데도 오히려 비난받곤 한다. 옷차림이 어떻다느니, 평소 행실이 어떻다느니, 왜 거길 갔냐느니, 먼저 꼬리친 것 아니냐느니 등등. 범죄의 책임을 여성에게 돌리는 일들이 벌어진다.
성폭력 재판에서 해당 사건과 직접 관련이 없는 피해자들의 성 이력이 증거로 사용되는 경향도 여전히 존재한다. 2011년 한 재판에서, 가해자 측 변호인들이 성폭행이 아닐 수 있다는 근거로 피해자가 8년 전에 노래방 도우미를 한 일을 거론했다. 이 피해자는 재판에서 증언한 다음 날, 심한 모멸감을 느꼈다는 유서를 남기고 결국 자살했다.
이렇게 형사절차 과정에서 모욕을 당하는 일들은 성폭력 신고율이 낮은 주요한 이유 중 하나다. 최근 ‘여성의전화’ 출신의 민주당 정춘숙 의원과 정의당 노회찬 의원 등이 성폭력 수사와 재판 과정에서 피해자의 성 이력을 사용할 수 없게 하고, 성폭력 무고죄 수사 시기를 성폭력 사건의 법적 절차가 마무리된 뒤로 미루는 법안을 발의했다. 이런 법안이 문제를 완전히 해결해 주지는 못할지라도 수사기관과 재판부의 성차별 관행에 일부 제동을 걸 수 있다는 점에서 지지해야 한다.
분명 여성에게 폭력을 휘두른 개인들이 처벌받아야 하지만, 수사기관과 법원 같은 국가 기관의 행위가 여성을 비난하는 것은 그런 잘못된 행동을 해도 사회적으로 용인된다는 메시지를 주기 때문에 더 심각하게 다뤄져야 한다.
여성 차별의 근원
여성들이 집 안과 집 바깥 모두에서 차별받고, 여러 사회영역에서 다양한 형태로 차별받다 보니 마치 거스를 수 없는 힘이 작동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마치 여성 차별이 인간 본성인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정희진 씨는 여성이 5천 년 동안 차별받았음을 강조하면서 이런 뉘앙스를 풍긴다. 그러나 인간의 역사는 그보다 훨씬 길고, 인류 역사의 대부분의 기간 동안 여성에 대한 차별은 존재하지 않았다.
페미니스트들은 흔히 여성 억압의 원인이 남성의 성 차별적 의식과 행동이며, 남성이 여성 억압에 집단적 이해관계가 있다고 본다. 이런 관점은 남성 권력이나 가부장제 이론으로 불린다. 물론 요즘 ‘남성 권력’, ‘가부장제’라는 말은 여성이 차별받는 현실을 묘사하는 식으로 느슨하게 쓰이긴 한다.
여성들이 가부장제 이론에 공감을 보내는 것은 현실이 그만큼 차별적이고, 차별이 개인관계에까지 스며들어 있음을 반영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가부장제 이론은 약점이 있다. 남성이 늘 여성을 억압했다면 왜 그런지, 어떤 식으로 남성이 여성을 종속시킬 수 있었는지를 설명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많은 글들에서, ‘가부장제’라는 것은 설명되지 않고 전제돼 있는 경우가 많다. 그러다 보니, 이 이론은 남성이 본성적으로 폭력적이고 지배욕이 강하다라는 생물학적 결정론으로 이끌리기가 쉽다.
무엇보다 이 이론은 남성들이 신체적 공통점 말고도 무언가 공통의 이해관계가 있다고 본다. 그러나 박근혜와 여성 청소 노동자가 별로 공통점이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삼성 이재용과 삼성전자서비스 노동자들 사이에도 별 공통점이 없다.
마르크스주의는 여성 억압을 분석하는 데서 계급을 중요한 분석 도구로 사용한다.
계급이란, 착취 관계를 의미한다. 가령 자본주의에는 한편에 생계를 위해 자본가에게 자신의 노동력을 팔 수밖에 없는 노동계급이 있다. 그리고 다른 한편에 생산수단을 지배하고 있으면서 노동자들을 착취함으로써 이윤을 얻는 자본가 계급이 있다.
겉으로 보면 여성 억압은 계급과 무관해 보인다. 지배계급 여성도 차별받기 때문이다. 물론 우리는 지배계급 여성이라 할지라도 그가 여성이라는 이유로 차별받는다면 거기에 반대해야 한다. 그러나 그렇다고 억압과 계급이 무관한 것은 아니다.
같은 여성이라고 같은 정도의 억압을 받는 건 아니다. 퇴진 운동이 한창일 때 자유발언에서 한 여성 참가자는, 박근혜에게 이렇게 쏘아붙인 적이 있다. “당신이 밥상에 숟가락 한 번 놔 봤나, 남이 차려주는 밥 먹고 남이 씌워 주는 우산 쓰고, 당신이 서민 여성들의 삶을 아느냐!”
게다가 박근혜 정권 4년을 통해 목격한 것처럼, 여성이라고 여성 차별을 해결하는 데 이해관계가 있는 것이 아니다. 지배계급 여성들은 차별적 체제를 유지함으로써 부와 권력을 유지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눈에 보이는 이면에 작동하는 힘을 봐야 한다.
가족제도
여성차별은 소수의 사람들이 다수를 착취하는 계급 사회 등장과 함께 등장했는데, 특히 이때 가족제도가 출현한 것이 결정적이었다. 당시 가족제도는 사회의 부를 통제하게 된 사람들이 적법한 후계자를 원했기 때문에 생겨났고, 당시의 생산 방식 때문에 여성보다 남성의 노동이 더 중요해지면서, 여성은 집안에 종속되는 처지로 전락했다.
최초의 계급사회가 등장한 이래로 엄청난 변화가 있었고, 가족제도나 여성의 삶에 엄청난 변화가 있었다. 그러나 여전히 가족제도는 여성 차별을 존속시키는 핵심적인 물질적 기반이 되고 있다.
물론 가족제도를 통해 사람들이 위안을 얻기를 바란다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마르크스는 종교의 구실을 “냉혹한 세상 속의 보금자리”라고 표현한 바 있는데, 이것은 다수 사람들이 가족을 꾸림으로써 기대하는 바이기도 하다.
그러나 가족이 순전히 가족을 꾸리는 구성원들만의 공간이라고 볼 수는 없다. 그 안에서 이뤄지는 많은 일들은 자본주의가 작동되는 데서 중요한 구실을 한다.
최근 주요 대선 후보들이 여성의 육아와 돌봄 부담을 덜겠다고 많은 공약을 발표하고 있는데, 이는 노동계급 가족이 어떤 짐을 지고 있는지를 보여 준다. 자본주의에서 무엇보다 가족은 다음 세대의 노동력을 재생산하는 데서 중요한 구실을 한다. 즉, 노동력 재생산은 자본주의가 굴러가는 데서 꼭 필요한 것인데도, 개별 가족, 특히 가족 내 여성들에게 떠넘겨져 있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환자와 노인을 돌보는 일도 가족의 당연한 임무처럼 돼 있다.
만약 이런 일들을 기업주들이 비용을 대서 사회가 책임진다고 생각해 보면, 기업주들이 여성의 가정 내 무보수 노동을 통해 얼마나 많은 이득을 얻는지를 알 수 있다. 그리고 바로 이 때문에 ‘가정을 돌보는 책임자로서의 여성-부양자 남성’이라는 이데올로기가 유지되는 것이다. 앞서 살펴봤듯이, 가정 내에서 수행하는 여성의 역할은 가정 바깥에서의 차별로 이어진다.
사실 ‘가정 돌봄자 여성-부양자 남성’이라는 모델은 오늘날 현실과 많이 어긋난다. 오늘날 그 어느 때보다 많은 여성들이 집 바깥에서 일을 하고 있고, 이혼이나 1인 가구가 증가하고 있다. 그러나 이렇게 현실과 들어맞지 않는다는 점 때문에 이상적 모델로서 가족의 필요성은 자본주의 체제에 더 중요해졌다고 할 수 있다.
지배자들은 이성애자들 사이의 결혼이라는 특정한 삶의 방식을 장려하려고 엄청나게 노력한다. 신혼부부에게 임대주택 우선순위를 주고, 다출산 가정에 세금을 우대하는 식의 정책들이 그런 것들 중 하나다.
반대로 ‘이상적’ 모델에 어긋나는 관계들은 법률과 편견에 의해서 고통받는다. 얼마 전 영화배우 김민희 씨가 베를린 국제영화제에서 여우주연상을 받았다. 그런데 김민희 씨에게는 문화체육부가 문화훈장을 부여하지 않을 거라는 얘기가 있다. “사회적 물의를 일으켰다”는 이유다. 성소수자들이 그토록 차별을 받는 것, 다양한 가족구성권을 보장하지 않으려 하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사실 지배계급이 가족이 소중하다고 하면서도 정작 가족을 지탱할 수 있는 복지를 제공하지 않고, ‘무상보육’ 같은 쥐꼬리만 한 복지도 아까워하는 걸 보면, 이들의 ‘가족 사랑’은 매우 위선적이다.
가족제도가 사람들을 원자화시키고, 시야를 협소하게 만든다는 점에서도 지배계급에게 가족제도는 중요하다. “돈도 실력이다. 네 부모를 탓하라”는 정유라의 말은 지배계급이 퍼뜨리고 싶어 하는 생각을 노골적으로 드러낸 것이다. 지배계급은 평범한 사람들이 가난하고, 사는 데가 열악하고, 생활이 시궁창 같은 이유가 사회가 아니라 자신의 능력 부족 탓이라고 믿기를 바란다.
이처럼 자본주의 사회구조는 지배계급의 필요에 맞게 설계돼 있다. 그리고 바로 이런 구조 자체가 온갖 차별적 관념들도 만들어 내고 사람들의 의식에 영향을 미치는 것이다.
엄마들은 딸한테 ‘그렇게 자기 주장이 강하면 남자들이 싫어한다’고 말한다. 요리를 하고 있으면 와서 ‘이제 시집갈 때 다 됐네’ 하고 말한다. 육아 프로그램 보면, 꼭 여자아이에게는 인형을 남자아이에게는 로봇을 선물한다. 여성이 아이를 기르고 요리하는 데 적합하다는 관념들, 성의 문제에서도 여성은 적극적 주체가 아니라는 관념들 모두 이런 사회구조에 뿌리내리고 있다. 배우자의 조건에서 남성은 경제적 능력이 중요하지만, 여성은 능력이 아니라 외모나 친절함 따위로 평가받는 것도 마찬가지다.
분명 우리는 개인들의 차별적 태도와 관념에 도전해야 한다. 그런데 마르크스는 “의식이 존재를 규정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 존재가 의식을 규정한다”라고 말했다. 우리가 발 딛고 있는 물질적 구조 자체가 차별적 관념들의 근원이라는 것이다. 개인들의 차별적 태도와 관념에 도전하는 것은 중요하지만, 이런 차별 관념을 끊임없이 재생산하는 이 체제 자체를 바꿔야 한다.
여성해방과 혁명
여성이 육아와 가사를 부담하는 것은 결코 당연한 일이 아니다. 이 부담을 사회가 책임지도록 요구해야 한다. 그러려면 기업주들의 필요를 위해서 평범한 사람들의 필요를 ‘개무시’하는 자본주의 체제의 우선순위에 도전해야 한다. 또한 자본주의를 근본적으로 변혁해서 평범한 사람들의 필요에 따라서 완전히 재편해야 한다.
그런 점에서 박근혜 퇴진 운동처럼 지배자들을 궁지로 몰아넣는 투쟁이 중요하다. 우리 편의 힘이 커졌을 때, 여성들의 필요도 반영될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그런 점에서 여성해방을 쟁취하는 데서 노동계급의 투쟁을 중요하게 여겨야 한다. 여성차별에 맞선 모든 운동을 지지해야 하지만, 동시에 이런 운동이 남녀 노동계급의 운동과 연결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
지난 4개월간 벌어진 박근혜 퇴진 운동은 근본적 사회변혁을 통한 여성해방의 가능성을 언뜻 보여 줬다. 물론 이 운동은 혁명적 운동은 아니었고, 당장 이 운동의 정치적 수혜자는 민주당이 된 듯하다.
그럼에도 이 운동은 많은 잠재력을 보여 줬다. 여성들은 그야말로 이 운동의 주력부대였다. 여성들은 사회를 보거나 행진 차량을 이끌었고, 연단에서 분명하게 자기 주장을 펴는 등 주도적인 구실을 했다.
최순실에게 “염병하네”를 외쳤던 청소 노동자는 그 주 광화문 본무대 연단에 올라 발언을 했다. 얼마 전, 그 노동자는 한 언론사와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많은 시민들 앞에서 나도 한마디 할 수 있구나, 이것이 민주주의인가 보다” 하고 말했다.
그동안 이 사회에서 무시당하고 투명인간 취급받던 사람들도 이 운동의 중심에 있었다. 비정규직 여성 노동자들, 이주노동자, 성소수자들도 연단에서 자신들의 이야기를 했고, 이들의 목소리는 많은 지지를 받았다.
물론 운동 참가자들의 의식 수준은 동일하지 않고, 한 사람의 의식도 모순돼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우리가 겪은 문제들이 서로 연결돼 있고, 우리가 같은 적에 맞서 싸우고 있다는 연대감과 자신감이 충만할 때, 적절한 개입이 있다면 기존에 가졌던 여러 모순된 의식들도 바뀔 수 있다.
이 운동이 박근혜 개인의 퇴진에서 더 나아가 착취받고 차별받는 대중의 운동을 고무·자극할 수 있도록, 특히 여성, 남성 노동계급의 투쟁이 더 활성화될 수 있도록 노력하는 것이 지금 우리에게 중요한 과제일 것이다.
MARX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