쟁점: 지금의 이슈들
최근 20년 동안 북한식 ‘시장화’와 김정은 정권의 불안정
진보진영 내에서는 김정남 피살과 김정은 정권과의 연관성을 애써 부정하려는 기류가 있었다. 급진좌파들은 아예 북한 쟁점에 대해 침묵으로 일관했다. 김정남 피살을 북한 정권 불안정의 징표로 여길 수 없다는 견해도 있다. 박노자 교수는 자신의 SNS에서 ‘김정남 피살로 드러난 김정은 정권의 불안정성’이라는 제목의 〈노동자 연대〉 기사의 글을 다음과 같이 비판했다. “김정은 지배체제가 불안정하거나 경제적으로 실패하고 있다거나 등등의 말을 할 만한 그 어떤 근거도 도대체 보이지 않습니다. 꽤나 어려운 주어진 상황(미-일-남의 경제 봉쇄, 대중 관계의 난항 등) 치고는 북조선 관리자들은 비교적으로 잘 헤쳐 나갑니다.” 박노자 교수는 북한 전문가 란코프의 입장이 ‘김정은 체제의 안정성’에 무게를 두고 있다며 그의 견해를 자신의 논거로 삼기도 했다. 통일운동의 대표적 인물이라 할 수 있는 코리아연구원장 김창수도 김정은 정권의 안정성을 지적했다. 그는 〈오마이뉴스〉와의 인터뷰에서 “김정은 체제 6년째는 안정기에 들어섰”고, 경제 제재를 받으면서도 “김정은의 권력 기반이 탄탄해지고 있고, 북한 경제도 호전되고 있기 때문에 김정은 정권이 불안하지 않”다고 주장했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북한에 비해 남한을 우월한 체제로 보는, 보수적 성향의 소유자이지만 날카롭게 북한 사회를 조명하고 있는 안드레이 란코프 교수는 계층 갈등을 통한 붕괴와 중국의 속국화라는 두 가지 가능성을 언급한다.
과연 김정은 정권은 어디로 가고 있는가? 북한은 ‘고난의 행군’, 미국의 경제 제재, 3대 세습을 겪으면서도 뭔가 ‘북한만의 내재적인 방식’으로 안정화되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필자는 부족하나마 이 물음에 나름의 대답을 하고자 한다.
필자는 북한 김정은 체제를 분석하려면 ‘1990년대의 극심한 식량위기 이후 20년 동안의 북한 사회 변화’를 살펴야 한다고 본다. 개혁 개방은 진행되고 있는가? 조금이라도 진행됐다면 그 실체는 무엇인가? 불가능하다면 그 이유는 무엇인가? 북한의 시장개혁은 어찌됐든 민주화로 가는 데 도움이 되는 건 아닐까? 실제로 김정은 체제 이후 북한 사회는 안정화됐고 노동계급의 삶은 진보했는가? 북한 노동자들은 현재에 그럭저럭 만족하고 있을까? 과연 북한 사회를 분석하는 데서 우리는 어떤 나침반을 준비해야 하는가? 북한은 뭔가 특수한 기제에 따라 움직이는 사회 아닌가? 지금부터 필자와 함께 위 질문들에 대한 여행을 시작해 보자. 5
북한 경제의 성장과 안정화?
북한이 1990년대 ‘고난의 행군’ 이래 극심한 식량 위기와 경제 위기에서 벗어났다는 분석에는 나름의 근거가 있다. 실제로 식량생산량이나 경제성장 지표에서의 변화는 《조선중앙통감》뿐 아니라 KDI 북한 경제통계, 유엔식량기구FAO 지표 등에서 확인된다. 유엔, CIA, 북한, 한국은행 등 통계 주체마다 차이가 있기는 하지만 2002년부터 경제 지표들은 상승세를 나타낸다.
92 | 93 | 94 | 95 | 96 | 97 | 98 | 99 | 00 | 01 | 02 | 03 | 04 | |
1인당GDP (달러) | 990 | 991 | 722 | 587 | 482 | 464 | 458 | 454 | 464 | 478 | 490 | 524 | 546 |
명목GDP (억 달러) | 208.8 | 209.4 | 154.2 | 128.0 | 105.9 | … | … | 102.7 | 106.1 | … | … | … | … |
경제성장률 (퍼센트) | … | 00.3 | -26.3 | -17.0 | -17.3 | 0.5 | 0.1 | 3.2 | 3.9 | 3.2 | 7.1 | 4.1 | 0.8 |
그러나 북한 경제가 위기에서 벗어나 있지 않다는 점 또한 사실이다. 유엔의 통계를 보면, 1999년에 극적인 반전을 겪은 북한 경제는 2000년대 후반에 다시 마이너스 성장률을 보이기 시작했다. 이는 2006년 이후(특히 2009년 4월 북한 미사일 발사 이후) 한층 강화된 미국과 일본의 경제 제재와 깊은 관련이 있다. 2006년 일본은 송금 규제, 무역 제한, 항공기·선박의 통행 제한 등 제재 조처를 세분화해 확대했고, 2009년에는 아예 수출 금지에 가까운 조처들을 취했다. 이런 제재로 북한과 일본 간의 경제교류는 사실상 중단되다시피 했다. 미국의 경제 제재는 더 심각했다. 미국은 2005년 9월 소위 애국자법Patriot Act 311조를 적용해 마카오 소재 중국계 금융기관인 방코델타아시아BDA의 북한 자금을 동결시켰다. 이 조처는 만성적인 외화 부족를 겪은 북한 경제에 큰 충격을 주었다. 그 외에도 창광신용회사, 혜성무역회사, 룡각산무역회사, 부강무역회사, 조선종합장비수입회사, 조선국제화학합영회사, 백산연합회사, 조선광성무역회사, 단천산업은행, 통성기술무역회사 등 북한의 주요 무역회사에 대한 제재(미국인 개인의 거래금지와 미국 내 보유 자산 동결) 조처를 취했다.
연도 | 90 | 91 | 92 | 93 | 94 | 95 | 96 | 97 | 98 | 99 | 2000 | |
성장률 | -4.3 | -4.4 | -7.1 | -4.5 | -2.1 | -4.4 | -3.4 | -6.5 | -0.9 | 6.1 | 0.4 | |
연도 | 2001 | 2002 | 2003 | 2004 | 2005 | 2006 | 2007 | 2008 | 2009 | 2010 | 2011 | 2012 |
성장률 | 3.8 | 1.2 | 1.8 | 2.1 | 3.8 | -1.0 | -1.2 | 3.1 | -0.9 | -0.5 | 0.8 | 0.3 |
8 사실 이 주장은 국내의 많은 북한 연구자들의 논문에서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다.
그러나 2년 연속 감소했던 북·중 무역액이 2016년에 전년 대비 7.3퍼센트 증가하고 대중국 무연탄 수출단가가 회복되는 등 북한 경제가 다시 안정화 추세를 보이고 있다는 지적도 있다. ‘장마당’(북한의 비공식시장) 경제가 활성화돼 평양 시민들의 소비가 늘어남으로써 외부의 경제 제재를 이겨 낼 자체 동력이 생겼다는 것이다. 적지 않은 북한 연구자들은 시장개혁과 개방이 그래도 더 나은 미래를 가져오지 않겠냐는 전제를 갖고 있는 듯하다. 이는 북한 적대 정책을 비판해 왔던 노무현 정부 하의 북한 전문가 이종석 전 장관의 말에 잘 나타나 있다. “북한이 살아남기 위해서 자유시장 경제에의 적응을 연습할 수밖에 없”고, “북한 체제가 시장경제체제로 전환된다면 그것은 궁극적으로 권력 구조의 집체화와 정치사회 체제의 다원화와 함께 진행될 수밖에 없다. 이 전환과정에 북한 정치체제가 제대로 적응하면 전체 사회의 체제 전환이 비교적 성공적으로 이루어질 것이다.”그런데 북한의 장마당 확대를 용인해 주는 등 북한식 ‘시장화’ 조처들이 북한 경제에 활력과 안정성을 가져다주었을까? 이를 살펴보기 위해 김일성 사망 이후 1995년 ‘고난의 행군’으로 거슬러 올라갈 필요가 있다.
배급제 중단과 위계적 시장 구조의 형성, 그리고 ‘돈주’
10 에 따르면 1995∼2000년 사이 북한의 사망자 수는 약 49만 명이다. 이는 동아시아에서 수십 년 만에 처음으로 겪은 대재앙이라 할 수 있다. 11
1994년 김일성 주석의 사망, 1995년 큰 물난리, 1995년부터 1997년까지의 ‘고난의 행군’은 북한 역사상 최대의 비극이라 할 수 있다. 정확한 사망자 수는 통계 추출 방식마다 다르다. 그러나 2001년 미 인구센서스국 산하 국제데이터베이스IDB의 로레인 웨스트12 한때 칭송 받았지만, 지력을 지나치게 훼손하는 인공관개법에 의존하는 ‘주체농법’도 문제의 원인 중 하나였다. 13 김일성 사망 직후 관료들의 횡령과 약탈도 기아 사망자 수가 늘어난 부차적인 이유였다. 14
단지 수해 때문만이 아니었다.15 배급제 중단의 결정적 계기 중 하나는 구소련의 붕괴였다. 구소련 몰락으로 소련으로부터의 원조가 격감했고 원유 수입도 중단됐다. 16
그러나 결정적인 원인은 바로 배급제 중단이었다. 앞에서도 지적했듯이 당시 북한 정권은 자력갱생 정책을 주창했다. 사실 북한 정권이 큰 물난리 전부터 배급제 중단을 추진했다는 주장이 제기되고 있다. 많은 탈북자들은 중앙 정부가 식량 공급을 중단하고 자력갱생을 지시한 시기가 홍수 피해 이후가 아니라 대홍수 전인 1995년 4∼5월경이라고 주장한다. 북한의 재난은 자연재해라기보다는 북한 당국의 의도적인 살인이라는 지적도 있다.17 북한 관료는 식량배급 권한을 무책임하게도 지역과 직장단위로 이양했다. 각 단위들은 식량을 구입하기 위해 국경 지대에 가서 식량을 구입·운반해야 했다. 그 때문에 막대한 비용이 발생했다. 그 결과 전국의 기관과 기업소는 ‘쌀시리’(식량 구입)를 위한 재원 마련을 목적으로 외화벌이에 총력을 기울였다. 단둥 같은 국경 지대나 주민이 밀집된 대도시에서 쌀시리가 발달했기 때문에 기관·기업소(또는 개인)의 쌀시리는 유통과 정보 네트워크를 구축하는 토대가 됐다. 이러한 네트워크는 국경과 내륙시장의 연계를 촉진시켜 전국을 하나의 통일된 시장으로 만들었다. 국내외에서 유통 및 정보가 집중되는 지역을 중심으로 유동인구와 자본이 집중됐다. 18 무역회사를 통해 국내로 들여온 물품은 이전에는 외화상점에만 유통할 수 있었으나, 2003년 이후에는 외화상점 체계를 없애고 무역회사가 각 지역에 판매소(지사)를 설치했다.
배급제 철폐는 북한 사회에서 매우 중요한 분수령이 됐다. 배급제가 실시되는 과정에서도 구조적인 차별이 있었다는 사실은 이미 널리 알려져 있다. 다시 말해 김정일을 포함한 북한 관료들은 배급제를 철폐하고, 이를 외화벌이 합법화와 전국화로 대체한 것이다. 배급제 철폐 이후 약 5년 동안 가장 커다란 변화는 바로 이것이다. ‘당·내각·군 소속의 무역회사·외화벌이 회사와 자금을 가진 개인들’이라는 ‘외화벌이를 위한 위계 질서’가 형성된 것이다. 위계 질서의 꼭대기에는 기업소와 공장에 대한 지배권을 가진 조선로동당이 있다. 내각과 군대를 정치적으로 지도하는 권한을 가진 조선로동당은 방대한 전국적 조직망과 국제적 네트워크를 이용해 막대한 경제적 이익을 집중시켜 왔다. 특히 조선로동당 산하의 38호실과 39호실은 외화벌이 사업을 총괄하는 일종의 ‘성역’이다. 국가보위부, 무역성, 상업성, 체육성 등 내각 산하 각 기관들도 자체 운영에 필요한 재정을 충당하기 위해 그 산하에 무역회사를 설립하고 중국과의 합작 형태로 음식점과 문화산업 등에 진출하여 외화를 벌어들였다. 김일성 사망 이후 군대를 우선하는 통치 방식인 선군정치가 시작돼 군부 또한 이전 시기에 비해 더 큰 이익을 챙길 여지가 생겼다.주목할 점은 당·내각·군 소속의 무역회사 산하에 크고 작은 외화벌이 회사뿐 아니라 자금을 가진 일부 집단, 이른바 ‘돈주’가 형성됐다는 점이다. 소위 북한의 자산가들은 대체로 해외교포 출신, 중앙당, 외화벌이 기관 간부 등 세 그룹에 속해 있다. 그런데 이들은 1995년 이후 군부나 당 등 권력기관으로부터 ‘와크’라는 무역허가권을 받고, 각종 외화벌이 사업을 통해 부를 더욱 축적해 나갔다. 20 아래 그림 2에서 나타나듯 무역허가권을 중심으로 북한 권력집단과 돈주는 철저한 위계 질서를 맺고 있다.
오늘날 북한에서 돈주들은 단순한 영세상인들을 뜻하지 않는다. 장마당에서 형성됐다고 하는 돈주들은 단지 소매업과 도매업에서의 유통 차익을 얻는 집단인 것만도 아니다.
22 진출하는 업종도 식품·생필품, 화물운송업, 수산업, 광산업, 건설·차량·기계 등으로 다양해졌다. 심지어 평안남도 순천화력발전소 사업 등 국가건설 사업에도 돈주들이 참여하고 있다. “돈주들의 경쟁이 치열해지고 우열이 나타나기도” 하며 경쟁력 있는 돈주들은 과점적 지위를 누리기도 한다. 돈주들은 고리대금업에도 진출하고, 노동자들을 고용해서 기업소를 운영하기도 한다. 23
현재 이들 중 일부는 합작투자를 통해 조직화(분업화)·기업화(대형화)의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 임을출이 연구한 ‘돈주’에 대한 최근 분석을 보면, 사영기업의 확산과 다양한 업종으로의 확산도 두드러진 현상이다. 한 조사를 보면, 탈북자들의 70퍼센트가 농장과 공장 기업소에 대한 돈주들의 투자를 목격했다.그러나 이들을 국가와 결탁하면서도 갈등을 빚는 사적 자본가들과 다를 바 없다고 규정하는 것은 지나친 과장이다. 북한 관료는 일련의 시장화·사영화 확대를 자기 통제 하에서 추진하려 한다. 당·내각·군 휘하의 무역회사들의 이윤 활동의 범위를 넓히고, ‘돈주’들에게 와크를 부여하고, 이들의 ‘불법’ 행위들을 묵인하면서도 사적 자본가들이 세력화될 여지는 철저하게 차단해 왔다. 철저하게 규율되는 시장화, 관리되는 시장화를 추구하면서, 일부 돈주는 처벌하고 권력에 충성하는 돈주는 여전히 하위 파트너로 삼는 이중전략을 구사하고 있다. 2009년 화폐개혁이 이를 잘 보여 주는데, 돈주는 관료들에 충성하는 사업파트너로 생존할 것인가 아니면 사업을 포기해 하층민으로 전락하거나 숙청될 것인가 하는 선택권이 주어져 있다고도 할 수 있다.
1995년 고난의 행군 이래 ‘배급제 폐지→쌀시리→외화벌이 사업의 위계구조 확대→돈주의 등장’은 최근 북한 경제의 주요한 변화들을 나타낸다. 이 과정에서 북한 관료는 1998년부터 일련의 사영화 조처들을 추진하고 2002년에는 ‘7·1 경제 관리개선조처’(이하 7·1 조처)를, 2009년에는 화폐개혁을 실시했다.
북한식 사영화·시장화 확대는 어떻게 진행되고 있는가?
북한 관료는 시장을 단속하면서도 사실상 시장을 묵인·방조, 더 나아가 일련의 시장화 조처들을 지속적으로 추진하고 있다. 자신들의 통제력에서 벗어나지 않도록 하면서 말이다. 다시 말해 북한 내에서 시장화·사영화 현상은 당국의 규제 하에 확대되고 있는 추세다.
이는 북한 헌법의 경제조항 개정에도 어느 정도 반영돼 있는데, 국가의 배타적인 소유 대상에서 제외되는 부문이 생겨나기 시작한 것이 그 사례다. 예를 들어 국가의 배타적 소유대상인 교통 운수는 철도와 항공으로 한정됐다(헌법 21조 3항). 다시 말해 철도와 항공을 제외한 교통 운수 부문은 사영화의 대상이 됐다는 뜻이다. 그 결과 돈주들은 돈을 투자해 중국 측 사업 파트너를 통해 중고 버스나 화물차를 구입한 뒤 당국에 일정한 돈을 상납하고 평양 소속 명칭의 운송회사를 차리고 있다. 예를 들어 내각 산하 ‘평양운수무역회사’와 ‘평양운수총국’은 개별 돈주들과 ‘경제타산안(허가서)’을 작성하고, 일정 정도의 이익을 상납 받고서 운수업을 허가해 주고 있다. 물론 주요한 교통 운송 수단들인 철도와 무궤도전차, 평양지하철은 국가가 소유·운영하고 있다. 그러나 다양한 종류의 써비차(개인영업차)를 포함해 사영 버스·화물 운송업체들이 생겨나고 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24 임을출은 신의주 아파트 건설 사업 등을 예로 들어 북한 당국에 의해 관리돼 온 주택 부문에서 사영화가 확대되고 있다고 지적한다. 25
헌법 제22조 1항과 2항이 개정됨에 따라 건물도 공공소유 부문에서 삭제됐다. 북한에서 주택의 경우 개인은 주택 이용권만 가질 수 있다. ‘살림집 이용 허가서’ 명의를 바꾸는 방법의 주택 거래는 활성화되고 있으며, 자금력이 있는 돈주들은 최신식 아파트를 짓고 이를 다른 돈주나 간부들에게 분양하는 사례가 늘고 있다.26 이는 부동산을 이용한 자본 증식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는 증거다.
토지도 법률적으로는 국가 소유이지만 사용료를 ‘적정하게’ 내면 사실상 점유할 수 있는 대상이 됐다. 2000년대 초부터 북한 당국은 사경지에 대해 ‘토지 사용료’를 부과하기 시작했다. 이는 사경지 경작을 허용했음을 의미한다. 물론 나선지대 등 경제특구에서는 매매, 임대, 저당이 가능하다. 정은이의 연구에 따르면, 북한 주민들이 개인적으로 경작하는 소토지는 매매와 증여가 되고 있다. 또한 일부 부유층들은 뇌물을 주고 기관·기업소의 명의를 빌려 땅을 구입한 후 아파트를 건설하고 비싼 가격에 팔아 시세차익을 남길 수 있다. 기업소들의 이윤 추구를 장려하는 방식의 시장화 조처들도 북한 헌법 개정 내용에 반영돼 있다. 1998년에 제33조 2항의 ‘경제관리 운용 내용’에는 “독립채산제 실시, 원가·가격·수익성과 같은 경제적 공간 옳게 이용”이라는 언급이 추가됐다. 수익성을 더 분명하게 추구할 수 있는 내용이 헌법에 명시된 것이다. 그 결과 북한에서는 식당, 컴퓨터 상점 등 서비스업종, 물류운송 사업, 석탄 채굴업 등에서 여러 기업들이 이윤 경쟁을 하고 있다. 석탄 기지 기업들은 군과 당 등 권력기구 산하 기업의 간판을 빌려 설립되고 국영 석탄 광산의 채탄과 운반을 하청받아 운영되고 있다. 이 기업들은 직접 돈주들이 투자해서 시장경제 방식으로 운영되고 있다. 이 기업들은 노동자들도 직접 고용하고 설비도 구입하고 있다. 수십여 채의 살림집을 갖고 불법으로 월세 받는 임대업도 성행하기 시작했다.이와 같은 사영화·시장화 조처들은 외화벌이 사업에 국유 기업들이나 각 기업소들, 그리고 개인들이 더 많이 뛰어들도록 하는 효과를 냈다. 그리고 2002년 7·1 조처는 그 효과를 극대화하는 계기가 됐다.
‘2002년 7·1 조처’와 그 결과
2002년 7·1 조처 이후 ‘이밥에 고깃국을 먹게 해 주겠다’는 약속은 ‘공짜는 없다’는 표어로 바뀌었다. 종합시장이 합법화됐으며, 화폐개혁·무역사업권이 확대됐고, 기업소들은 ‘번 수입’을 보고하는 것을 전제로 수익 제고를 목표로 운영됐다. 이 7·1 조처의 핵심은 다음과 같다. 공장과 기업소가 더 많은 수익을 추구하는 독립채산제 확대, 개인 경작지 확대, 소비재에 대한 무상급부제 폐지와 각종 보조금 축소·폐지, 임금과 물가를 인상해 현실화.
독립채산제 확대를 계기로 당·군·내각 소유의 기업은 외화벌이 사업을 확대했다. 그러나 아래 그림 3에서 알 수 있듯이 당·군·내각이 실질적인 지배를 행사했다. 수천 개에 달하는 것으로 추정되는 무역허가권만이 아니라 무역기관들의 수입 품목과 수량, 가격 등을 결정하고 생산과 유통 전반을 통제한다. 29 또한 이익금뿐 아니라 각종 뇌물도 수취한다. 30
한마디로 7·1 조처로 국유기업들은 이윤 수취에 더 의존했다. 그 결과 노동자들의 실질임금은 하락하고 그나마 유지됐던 사회복지가 침식되는 결과를 낳았다.
31 문제는 대다수 노동자들은 임금으로 살림살이를 해 나갈 수가 없었다는 점이다. 공장 가동이 중단되거나 출근을 해도 일거리가 없는 경우가 허다했다. 급작스런 기업 독립채산제 실시와 국가보조금 축소, 은행 대출의 엄격화 등으로 기업에 대한 구조조정이 대폭 확대됐다. 지방의 경우 공장 가운데 통폐합 과정에서 없어지거나 가동을 중단한 경우가 전체의 절반을 넘었다. 32 일명 ‘8·3 노동자’ 제도가 광범하게 유포된 것도 그 때문이다. 33 개인은 사실상 생계를 위해서 필요한 기본적 재화들을 구하기 위해 장마당에 매달리는 처지가 됐다.
《조선신보》는 “각자가 받은 임금으로 살림살이의 모든 문제를 해결하지 않으면 안 되게 된다”고 강조하고, 이는 경제부흥을 위한 창조와 변혁이라고 칭송했다. 이는 각종 통계에도 반영돼 있다. 2010년까지 북한의 시장화 실태에 관한 각종 추계와 통계가 이뤄졌는데, 연구들을 종합하면 대체로 북한 주민의 80퍼센트가 시장에 의존하고 있으며, 국영기관을 대신하는 개인 위탁 경영이 서비스 분야에서는 50퍼센트를 넘어섰고, 무역회사는 40퍼센트, 제조업 분야는 20퍼센트를 차지하고 있다.무엇보다 7·1 조처로 임금이 올랐지만 물가는 더 올랐다. 물가는 25배, 임금은 18배, 환율은 70배 증가한 것으로 추정된다. 35 특히 소비재 무상급부제도 폐지로 곡물 가격이 급상승했다. 노동자 사무원의 실질생계비에서 식량이 차지하는 몫은 2002년 7·1 조처 전에는 3.5퍼센트였으나 7·1 조처 이후로 그 비중은 50퍼센트로 늘어났다. 36 기업 경영실적에 대한 평가 방법도 ‘번 수입’ 지표로 바뀌고 노동인센티브도 확대됐다. 37 이는 필연적으로 공장이나 기업소에서 근무하던 노동자들에 대한 착취율 제고로 이어졌을 것이다. 실제로 “긍정적인 물질적 인센티브도 확대·강화됐지만 부정적인 물질적 인센티브도 받게 됐다. 실적에 따라서 기본임금을 훨씬 웃도는 금액을 받을 수도 있지만 반대로 기본임금에 크게 미치지 못하는 액수를 손에 쥐게 되는 경우도 발생할 수 있게 됐다.” 38
구분 | 연금종류 | 보장 내용 |
연금제도 | 공로자연금 | 월 임금 100퍼센트 |
연로연금 | 남 60세, 여 55세 이상자에게 종신지급, 월임금의 60~70퍼센트 현금 외 현물 | |
노동능력상실연금 | 직종별, 질병종류에 따라 우월임금 23~90퍼센트 매월 지급 | |
유가족연금 | 가족 수에 따라 40~90퍼센트를 매월 지급 | |
보조금 제도 | 일시적 보조금 | 월임금 50~80퍼센트를 3개월 한도 지급 |
해산보조금 | 월임금의 90퍼센트를 지급 | |
장례보조금 | 사망자 10세 미만 5원, 10세 이상 10원(7.1개혁 임금인상 전 기준) | |
의료보조금 | 무상치료 원칙, 사회보장비 명목으로 월 1퍼센트 공제 |
임금 상승을 훨씬 웃도는 살인적인 물가 상승뿐 아니라 ‘명실상부하게’ 각종 보조금 제도를 폐지한 조처는 북한 주민의 삶에 큰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위의 표 3에서 보듯이 보조금 제도가 철폐되기 전, 북한 사회에서는 배급제, 각종 연금제도·보조금 제도들이 운영돼 왔다.
40 앞에서 지적했듯이 북한 주민들은 더 열악해진 구매력으로 장마당에서 필수품을 구해야 하는 처지에 내몰리고 있다. 평양 시내에서조차 전기 사용이 제약을 받는 등 그야말로 사회기반 시설의 낙후성으로 인한 고통까지 감내하고 있다.
현재 북한의 평범한 노동자들은 기존의 유용했던 각종 사회보장책들이 급작스럽게 사라진 환경에 처해 있다. 북한 사회보장 정책들의 변화 양상에 관한 한 연구는 “기존에 비해 법적 보호대상의 사각지대가 전문화되어 협소해짐과 동시에 보호대상이 보다 확고해졌다”고 요약하고 있다.따라서 북한의 ‘시장화’ 조처들이 북한 경제의 숨통을 트이게 했다는 진술은 돈주 그리고 그와 결탁한 관료들의 처지를 일부 반영했을 수는 있다. 그러나 국내의 적지 않은 북한 연구자들이 2002년 7·1 조처를 당시에 “의미 있는 제도개혁”이나 “전향적 영향을 미칠 것”이라고 기대감 섞인 평가를 했지만 결과적으로 이 조처는 북한 노동자들의 삶과는 무관하다는 것이 드러났다.
시장에 대한 북한 관료의 이중 전략
41 안드레이 란코프 교수에 따르면, “대부분의 경우 북한 주민들은 배급제에 퍽 만족하고 있었다.” 42 따라서 2005년 배급제 재개 조처는 피억압자들의 박탈감이 매우 컸음을 보여 주는 한편, 북한 관료들의 긴장감이 어느 정도였는지를 보여 주는 대목이다. 3년 전인 2002년에 이들은 ‘모든 무상배급제를 철폐’할 것을 7·1 조처에서 분명하게 명문화했기 때문이다.
여러 자료들을 종합하면 당시 이미 북한 관료들은 ‘시장화 조처’ 이후 돈주들의 등장 등을 통한 위화감이 북한 사회 내의 긴장감으로 연결되고 있음을 간파했다. 북한 관료는 2005년 10월 시장에 대한 단속을 강화하는 한편 배급제를 완전히 재개하겠다고 발표했다. 북한 주민들은 언론·출판·결사의 자유 등은 결코 보장받지 못했지만,43 ‘조촐했던’ 식량배분조차 우선순위가 분명했다. 당 중앙기관, 당 위원회 소속 구성원과 평양 중심 구역 거주 주민들이 1순위였고, 일반 노동자들과 농민들은 후순위였던 4순위였다. 44
그러나 2005년의 배급제는 북한 주민들이 기억했던 그 이전의 배급제가 아니었다. 북한 관료들에게는 주민들에게 복지를 제공할 여력이 없었다. 북한 관료들은 2002년 7·1 조처 이후에 ‘시장화’를 통해서 수취한 재정을 국방 부문에 투입해 왔기 때문이다.란코프 교수는 자신의 저서에서 여러 증거들을 바탕으로 당시 조처들에 반발하는 폭동이 벌어졌다고 주장했다. 정부가 다시 배급제를 시작하려 했을 때 몇몇 시장은 폐쇄됐고 지역 주민 상당수가 주요 생계 수단을 잃었다. 주로 중년 여성들이 시위를 주도했다. 이들은 ‘배급을 확실하게 주든지 아니면 장사를 계속할 수 있게 하든지 하라’고 외쳤다고 한다. 45
46 시장에 대한 물리적 단속은 자금력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북한 권력에 순응할 만한 돈주들은 살아남게 하고 그렇지 않은 돈주들을 솎아 내는 구실을 했다.
시장에 대한 물리적 단속은 시장 내의 ‘진입장벽’을 높이는 계기가 됐다. 일부 돈주의 퇴출, 권력과 유착한 돈주의 단속 회피→일부 돈주들의 사업권 확대가 지속됐다.한마디로 북한 관료는 배급제가 불가능한 상황에서 북한 주민의 삶을 ‘자력경생’에 맡겨 둬 장마당이 확대되면 다시 단속·처벌을 통해 시장 확대의 이익을 일정하게 수거하고 다시 시장을 묵인·방조하고 은연중에 확대하는 방식을 취해 왔다. 겉으로는 시장화 현상을 자본주의적이라고 비난하면서도 시장화를 조장하고 그 열매를 독식해 차지하는 지독히도 권위주의적이고 위선적이며 지독히도 반노동자적인 형태가 북한식 시장화의 진정한 얼굴이라고 할 수 있다.
실패로 끝난 2009년 화폐개혁
북한식 ‘시장화’를 이와 같은 의미로 이해해야만 2009년 화폐개혁의 본질을 분석할 수 있다.
2009년 화폐개혁을 단순히 지하 금융의 외부화라는 맥락에서 이해한다면 그것은 매우 일면적인 인식이다. 물론 자본축적을 위해 내자(내부자본)를 동원하려 했던 것도 주요 목적이었던 듯하다. 이는 2009년 조선중앙은행 조성현 책임부원이 《조선신보》와 인터뷰한 것에서도 잘 드러난다. “현금은 100 대 1로 바꾸어 주었지만 개인들이 은행에 저금한 몫은 10대 1로 바꾸어 주었다. 앞으로도 개인들이 돈의 여유가 생기면 저금할 것을 장려하고 국가로서는 경제건설에 필요한 돈을 동원·이용하게 될 것이다.” 즉 개인들이 은행에 맡긴 돈을 기업소에게 대출해 주면 기업소는 그 돈으로 생산설비에 투자해서 생산을 늘리고 이를 통해 국가의 재원을 확보한다는 계획이었던 셈이다. 이는 1962년 박정희 정권이 내자 마련을 목적으로 화폐개혁을 단행했던 목적을 연상시킨다.
또한, 북한 관료에게는 화폐개혁으로 얻으려 했던 정치적 목적도 있었다. 북한 관료는 화폐개혁을 돈주들을 확실하게 통제할 수단으로도 여겼다. 현금 보유자들을 약화시킴으로써 혹시 모를 이들의 세력화를 미연에 방지하려 했다. 구권 대 신권을 100:1로 교환하게 함으로써 실제로 현금 보유자들(돈주)을 통제하고자 했던 듯하다. 당과 군대의 지배에 충성하는 돈주들은 처벌을 피할 수 있겠지만 그렇지 않은 돈주들은 몰락하게 됨으로써 북한 관료의 지배력을 강화하려 했다.
47 당시 체제 불만이 낳을 파장을 두려워했던 북한 관료들은 전쟁 피해자 세대들에게 무역허가권을 나눠 주는 등 전통적 지지층을 달래는 모양새를 취한 까닭이다.
북한 관료가 화폐개혁을 통해 진정 더 얻으려 했던 목표는 시장화가 낳을 수 있는 계층 질서의 위기와 관련 있다. “시장화 확대 결과 북한의 기존 계층 질서에 위기가 발생했다는 사실은 2009년 단행한 화폐개혁에서 엿볼 수 있다. 시장화가 진행되면서 장사로 돈을 번 부유층이 형성됐고 이를 바라보는 주민들 사이에 박탈감과 불만이 생겨나는데, 화폐개혁은 이런 사회적 갈등을 해소하는 차원에서 단행해야만 했다. 화폐개혁을 통해 부를 축적한 돈주들의 재산을 어느 정도 박탈하고 사회적 지위를 약화시킴으로써 주민과 기득권 세력을 통합해야 할 필요성이 생겨났다.”48 화폐 가치가 떨어지자 실물 가치가 비할 데 없이 올랐기 때문에 미리 ‘윗선’으로부터 정보를 받아 기존 구권으로 실물을 확보해 놓거나 달러나 위안화로 미리 바꿔 놓았기 때문이다. 당시 상황에 관한 탈북자들의 증언에 따르면, “실제로 화폐개혁 직후 공산품이나 식량을 가진 상인들은 새로 분배받은 화폐를 가지고 물건을 구입하러 온 주민들에게 물건을 팔지 않으려고 군대와 인민보안부를 동원해 물건을 지켰다.” 49
그러나 2009년 화폐개혁으로 사회 위기와 긴장감은 결코 해소되지 못했다. 결과는 정반대로 흘러갔다. 무엇보다 화폐개혁으로 현금 보유자들 전체가 피해를 입지는 않았다. 오히려 화폐개혁으로 북한에서 법 기관이라 불리는 국가안전보위부·인민보안부·검찰소에게 뇌물을 바친 돈주들은 자산규모가 더 늘어났다.화폐개혁은 돈주들 사이에서도 일정한 양극화 현상을 가져왔다. 화폐개혁 이후 소규모 상인들과 일부 돈주들은 큰 손해를 보고 몰락해 하층민이 됐다고 한다. 화폐개혁은 중소 상인들을 쥐어짜서 돈주에 대한 노동자들의 불만을 달래려 했던 북한 관료들의 속셈을 읽을 수 있는 대목이다.
정작 피해는 고스란히 노동자들에게 지게 됐다. 주민들은 자신들이 보유하고 있던 내화와 외화를 상당 정도 몰수당하면서 소득의 대폭 감소를 겪어야 했다. 시행된 지 몇 시간도 지나지 않아 화폐개혁은 엉망이 되기 시작했다. 주민들은 자신이 번 돈과 모아둔 돈을 보전하기 위해 은행에 몰려들었고 패닉에 빠진 사람들이 사재기를 시작했다. 재화는 갑자기 사라졌고 물가는 폭등했다. 이른바 민심 이반이 심각한 상황에 이르렀다.
50 화폐개혁의 실패로 결국 당시 계획재정부장이었던 박남기가 해임되고 그 이듬해 3월 간첩혐의로 처형된 것으로 알려졌다. 51 북한 관료는 사상 처음으로 자신들의 정책 실패를 인정해야 했다.
남한이 북한에 비해 우월한 체제라고 보지만, 때때로 북한에 관한 풍부한 정보에 바탕을 둔 날카로운 분석을 내놓는 북한 전문가 안드레이 란코프 교수는 당시의 상황을 이렇게 전한 바 있다. “2010년 1∼2월 대규모 불만이 터져 나올 징조가 보였다. 수십 년 만에 처음으로 심지어 평양의 엘리트 특권층도 외국인들 앞에서 공개적으로 정부의 행동을 비판했다. 평양의 러시아 학생들은 같은 학교의 북한 학생들이 화폐개혁에 대한 분노를 감추지 않는 것을 보았고 북한 외교관은 타국 외교관들 앞에서 때때로 화폐개혁에 대해 신랄하게 비판하기도 했다. … 이런 시기에 북한의 붕괴가 임박했다는 소문이 퍼지기 시작한 것은 우연이 아니다. 소문은 일정 부분 남한에서 정권을 장악하고 있던 보수파들의 작품이지만 그 불안감은 평양에 직접적으로 접촉할 수 있었던 많은 이들이 실감하고 있었다.”자본축적의 일반법칙과 북한
52 둘째 해외로부터의 원조, 셋째 중국을 비롯한 해외로 노동력 수출, 넷째 기업소와 무역회사가 이익의 일부를 당·군대·내각에 납부하는 돈, 다섯째 각종 세금.
그렇다면, 일련의 북한식 시장화 조처들을 통해서 북한 관료가 얻으려는 것은 무엇이었을까? 북한 관료는 다섯 가지 방식에 의존해 재정을 확충하고 있다. 첫째, 광물 등의 원자재 수출(2010년 이래 북한에서 원자재가 수출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거의 70퍼센트에 이른다),그런데 셋째 방식까지는 일정한 한계가 따른다. 특히 원조의 경우에는 중국의 시진핑 정권 이후 비료 지원 중단 사태까지 벌어져 전반적 상황이 악화 일로에 있다.
그 결과 북한 관료는 경제 제재와 원조 중단 등으로 국가재정이 바닥 난 상태를 벗어나기 위해 넷째와 다섯째 조처에 더 매달렸을 것이다. 시장을 통해 일정하게 형성된 돈주를 통해서 일부 자금을 마련하고 이를 확대하기 위해 다양한 사영화 방식을 동원했다. 시장을 묵인·방조(주되게 당과 군대 산하의 기업소와 무역회사들의 사업권은 확대하면서)하면서도 일부 시장은 단속하는 이중전략을 통해 자본규모가 크고 권력에 대한 충성도가 높은 돈주들과의 네트워크를 강화해 수익금을 더욱 확대하기도 했다. 일정한 시장화 확대는 세수 확대라는 다섯째 방안과도 직결돼 있다. 북한 정권은 북한 주민들로부터 각종 잡부금을 징수한다. 북한에는 공식으로 세금이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준조세에 해당하는 각종 세금 납부로 주민들은 너무 피곤한 삶을 살고 있다. 우선 현물 납부와 노역이 있다. 북한 관료는 주민들에게 돼지고기와 세면도구 등을 현물로 납부할 것을 요구한다. 납부가 어려운 주민들은 문화주택 건설 등 주요 건설 사업에 동원된다. 건설사업에 동원되지 않으려면 그에 상응하는 현금을 납부하거나 외화벌이를 해야 한다. 아예 월급의 10퍼센트를 외화벌이 명목으로 공제하기도 한다. 토지사용료, 각종 부동산 사용료, 기업소의 부업지 경작 사용료 등 그 종류도 늘어나고 있다. 보호세 명목뇌물은 제쳐두고라도 위와 같은 각종 세금 덕분에 북한 정권의 재정은 늘어나고 있다.
그 결과 국가 재정은 최근 몇 년 동안 증가 추세를 보여 왔다. 미국의 경제 제재 속에서도 북한 정권의 안정성이 유지되고 있다는 증거로 북한의 국가예산 증대가 거론된다. 2006~12년 동안 예산수입 총액의 연평균 성장률은 7.6퍼센트에 달한다. 이는 《조선중앙통감》뿐 아니라 한국은행이나 KDI 통계에서도 확인된다. 그런데 위와 같이 확보된 재정을 통해 북한 관료는 북한 자본주의를 특정한 방향으로 끌고 가고 있다. 이른바 김정은 정권의 핵·경제 병진노선이 그것이다. 북한 관료가 과학기술 분야에 투자를 집중해 나가는 까닭이다. “과학기술 부문에 대한 자금 지출을 2009년보다 108.1퍼센트 늘려 정보기술, 핵기술, 생물공학을 비롯한 여러 과학기술 분야에서 최첨단을 돌파하고 인민 경제의 현대화를 실현하고 북한을 과학기술강국의 지위에 올려야 한다”는 대목에서 북한 관료의 목표가 잘 드러난다.
물론 과학기술 분야에 대한 집중적 투자는 무기 생산과 직결돼 있다. 한 가지 더 추가한다면 건설부문 투자에 대한 강조다. 김정은 정권은 소위 ‘과학기술 산업’과 함께 건설부문에 대대적인 투자를 단행했다. 마식령 스키장 건설에 약 5억 달러의 돈을 들였고, 대관령 삼양목장의 25배 달하는 세포등판 목장을 건설했다. 55 이 대목에서는 갑자기 이명박의 4대강 사업이 떠오른다.
마르크스의 표현을 잠시 빌리면, 북한에서 집합적 자본가로서의 관료는 노동자들이 생산한 잉여가치의 일부를 죽은 노동, 즉 생산수단(현재 북한의 경우에는 무기생산과 관련된 산업)에 집중 투자하고 있는 셈이다. 그 결과 죽은 노동에 대한 축적은 증대되는 반면, 살아있는 노동의 비중은 줄어들고 있다. 북한의 국가 예산 지출에서 과학기술 투자에 대한 비중은 대폭 증가해 42.3퍼센트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했지만 인민 경제비는 22.7퍼센트로 급감했다.식량조달이 어려워 2010년 4월 평양시의 면적을 약 40퍼센트로 축소해서 2백만 인구를 180만 명으로 줄이는 상황이었는데도 말이다(그 이후에도 동평양 지구에 광대한 슬럼가가 형성되자 2014년 4월 평양시의 인구는 더욱 축소해 실제로 150만 명이 됐다). 실제로 노동자의 처지는 더욱 열악해지고 있을 뿐 아니라 반실업 상태의 노동인구도 급속히 늘어나고 있다. 북한의 노동자들은 반실업 상태에 빠져 있고 비공식 노동시장은 급속하게 팽창하고 있다(공용철, 2010). 한마디로 북한의 자본축적은 남한에서와 마찬가지로 노동자들의 삶의 질 향상을 목표로 하고 있지 않다. 이야말로 마르크스가 말한 자본축적의 일반법칙이다. 죽은 노동에 대한 투자가 비할 데 없이 늘어나는 동시에 산업예비군이 증가하고 빈곤이 축적되는 자본주의 축적의 고유한 특징은 북한이라고 예외가 아니다.
사회주의는 아니지만 그렇다고 자본주의라고 할 수도 없어 주조한 듯한 용어가 적색 개발주의인데, 북한을 적색 개발주의 사회라 할 수도 없다. 필자에게 북한은 가장 날것의 자본주의 사회로 보인다. 북한에서는 전기도 구매의 대상이 됐다. 제한된 시간만 전기가 들어오는 평양 시내의 밤은 촛불을 켠 허름한 주택가와 변전소에 상당한 달러를 주고 전기를 받아 환한 고층 아파트 단지로 극명하게 나뉜다.
한편 시장에 대한 묵인과 방조·후퇴 그리고 처벌 조처를 수반함으로써 당·군·내각은 뇌물 구조를 공고히 하면서 국가재정을 확중하고 있다. 현물과 현금, 공공근로 노역, 월급에서 공제되는 외화벌이 세금, 보호세 등 각종 준조세의 확대로 북한 재정은 매해 5퍼센트 이상 늘어났다. 그러나 김정은 정권은 생활의 어려움 속에 있는 북한 주민의 삶을 뒤로 하고 늘어난 재원 사용의 우선순위를 무기생산에 두고 있다.
세 가지 교훈
지금까지 북한 경제의 변화를 통해 필자가 각별히 강조하고자 하는 바는 세 가지로 요약할수 있다.
57 국가자본주의 이론에 따르면 북한 관료들은 노동자를 착취하고 억압하는 기능을 수행하면서 해방 이후 줄곧 북한의 생산 전반을 통제했다. 소련의 한반도 분할 점령 후 지주와 자본가, 그리고 일부 보수적 기독교 세력들의 급격한 남하로 유리한 조건을 맞이한 58 북한 관료들은 20일 만에 토지개혁을 수행해 공업화의 초석을 만들고 노동규율을 확립했다. 국유기업에 고용된 노동자들은 생산한 가치 가운데 일부만을 임금으로 지급받고 나머지는 국가가 전유했다. 인민위원회 내각결정 196호에 따라 8등급으로 나눈 성과급의 일종인 도급제로 노동자들은 생산량 경쟁에 내몰렸다. 59 북한 관료의 생산 목표는 남한 자본주의와의 경쟁에 맞춰졌고 이를 위해 관료는 중공업 육성에 매달렸다. 노동자들은 그 목표에 종속됐다. 70일 전투라는 이름 하에 광산 갱도에서 초착취를 받으며 일했던 북한 노동자들이 이제 각종 외화벌이 사업에 동원되고 있다. 지금 김정은은 예전에 김정일이 운영했던 120여 개 무역회사(로동당 38호실과 39호실 소속)의 모든 외화벌이 사업을 직접 관리한다. 내각의 핵심 관료들뿐 아니라 선군정치 하에서 군부의 핵심인 인민무력부는 농장과 철도, 공장, 기업소를 이전 받아 각종 국책사업을 지배한다. 이들은 지난 20년 동안에도 노동자들이 동원된 각종 외화벌이 사업으로 막대한 이익을 챙겼다. 북한 관료들이 국가를 매개로 생산을 지배하는 자본가 계급이라는 사실은 최근 20년 전이나 지금이나 변함없다.
첫째, 북한 사회 분석에서 ‘사실의 바다’와 ‘정책의 홍수’에서 허우적대지 않고 또 실증주의와 불가지론에 빠지지 않으려면, 국가자본주의 이론의 분석력에 의존할 필요가 있다.둘째, 시장화를 어떻게 볼 것인가의 문제이다. 최근 북한 20년 동안 일련의 시장화(소유권의 부분적 변화, 소유는 여전히 국가소유일지라도 운영권의 실질적 사영화 등)가 북한 주민의 삶을 개선시키고 있는가?
북한에서 ‘시장화’가 당·군·내각에 연결된 무역회사와 기업소의 사업권 확장을 가져온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북한식 ‘시장화’는 민주주의의 확장을 가져오기는커녕 권위주의 통치방식에 대한 더한층의 의존을 가져왔다. 노동계급의 삶의 질 향상과는 더욱 거리가 멀었다. 평양 제2백화점의 1층 매장과 평양 적십자병원 앞에 있는 ‘100m 상점’이 개인들에게 임대됐지만 북한 노동자들은 이제 자신의 소득 가운데 절반을 식량 구입에 소비해야 한다. 이는 식량 구입에 소득의 3.5퍼센트만을 소비했던 지난 시기와는 대조되는 오늘날 북한 노동자들의 삶이다.
60 이들은 고급 자동차를 구입하고, 자녀들에게 고액 과외를 시키고, 10만 달러의 고급 아파트를 여러 채 보유하고, 주택 투기로 돈을 벌어들이고 있다.
더욱이 돈주의 등장은 북한 사회의 위화감을 조성하고 있다. 평양과 무역지대 주요 도시들에 살고 있는 이들의 삶은 일반 노동자들의 삶과는 갈수록 판이하게 달라지고 있다.일부 영세상인들은 돈주들이 누리는 이익에서 일정한 수혜를 받을 수도 있다. 하지만 영세상인들의 상당 부분은 가동이 중단된 공장에 출근은 하지만 임금을 거의 받지 못하는 남편을 대신해서 생활비를 버는 전업주부들이다. 외화벌이 합법화와 외화 유통구조 피라미드의 정점에 있는 무역회사와 그 산하의 외화벌이 회사 그리고 이들에게 사업권을 할당하고 뇌물을 받는 관료들이야말로 외화벌이 수익을 독차지하는 핵심들이다. 시장화와 사영화 확대 조처들은 북한 노동자들의 삶을 악화시키고 있다. 낡았지만 유용했던 각종 사회복지와 보조금 삭감으로 노동자들의 부담은 늘어만 가고 있다. 북한에서 공식적으로 세금은 존재하지 않지만 사용료라는 명목의 이용료가 존재하는데 이 이용료는 시장화·사영화 조처 확대 이후 계속 늘어나고 있다. 앞서 지적했듯이 교통 분야에서 일정한 사영화 현상 때문에 돈주들이 개인 운수업에 뛰어들었는데 운임도 시장경쟁 원리에 따라 책정되고 있다. 2년 전 청진 무산 간 버스 요금은 8000원이었는데 지금은 5만 원으로 올랐고 청진 김책 간 버스 요금은 10배 인상됐다.
만성화된 식량난으로 20년 넘게 ‘먹는 문제’를 해결하지 못해 주민들의 삶은 피폐해졌고, 민심의 이반은 심각한 상황이다. 경제 위기의 장기화, 시장화의 진전 등으로 기존 질서가 크게 동요하고 있다. 1970년대 중반부터 오일쇼크 등으로 인한 외채문제의 발생, ‘사회주의’ 경제시스템의 한계 노정 등으로 경제가 조금씩 어려워지기 시작했지만 (최근 20년 동안처럼) ‘먹는 문제’를 고민한다든지 내부자원이 고갈될 정도는 아니었다. 62
63 그뿐 아니라 더 열악해진 구매력으로 장마당에서 필수품을 구해야 한다. 그것도 모자라 평양 시내에서조차 전기 사용이 제약돼 있다. 그야말로 낙후된 사회기반 시설이 주는 고통을 감내하고 있다. 북한 경제의 일련의 변화는 북한 주민들의 삶을 불안정하게 만들었을 뿐이다.
그러나 지금 북한 위기의 대가를 치르는 쪽은 일반 주민들이다. 북한의 평범한 노동자들은 각종 사회보장책들이 급작스럽게 사라진 환경 속에 처해 있다. “기존에 비해 법적 보호대상의 사각지대가 전문화되어 협소해짐과 동시에 보호대상이 보다 확고해졌다.”64 권위주의적 통치 스타일의 강화는 사업권의 이익을 어떻게 배분할 것인가, 그리고 어느 수준으로 시장개혁을 할 것인가를 둘러싼 관료들 내부의 긴장이 낳은 결과일 수도 있다.
셋째, 시장화 조처들은 북한 사회를 안정화 추세로 이끌기는커녕 북한 내에서 긴장과 위기를 증폭시키고 있다. 사실 장성택 처형도 시장화의 이권 배분을 놓고 내각과 군부 사이의 갈등이 표출되는 시기에 벌어졌다. 2013년 말 장성택뿐 아니라 인민무력부장 현영철을 비롯해 고위간부들 80여 명이 처형당했다.공개 처형의 증가가 그 사례다. 공개 처형의 빈도수는 1990년대 초부터 점차 증가하기 시작해 1995년이 되면 122회로 전년도에 비해 2.5배 증가했으며, 1996년에는 227회로 다시 전년도의 1.9배로 증가했고, 1997년에 229회로 정점에 도달한 이후 1998년 151회로 0.7배로 감소했고, 1999년 93회로 0.6배로, 2000년에는 90회, 2001년은 42회로 다시 감소했다. 이후 2000년대에는 대체로 약간 줄어든 수준에 머물고 있다. 어쨌든 공개 처형의 숫자로 보면 북한의 내부 위기는 1995∼98년에 정점에 달했으며 2001년 이후 상대적으로 안정된 것으로 판단할 수 있다.(이 숫자에 관해서 강한 신뢰는 아니지만 어느 정도 추세는 보여 준다.) 65
김정남 피살은 북한과 중국 사이의 긴장이 서서히 고조되고 있다는 점과도 관련 있을 듯하다. 시진핑은 2014년 북한에 대한 경제 제재 권고를 받아들임으로써 북한에 대한 압박 수위를 높였다. 2013년 장성택 처형 이후에는 3대 원조를 동결했다. 구체적으로 연간 50만 톤의 원유 공급, 10만 톤의 식량원조, 2천만 톤의 비료 원조를 중단한 것이다. 북한은 전체 무역의 약 80퍼센트를 중국에 의존하고 있는 상황이었다(이에 대한 항의로 김정은 정권은 2014년 방북단을 비웃기라도 하듯 신형 방사포 KN09 4발을 동해로 발사했다. 이는 중국에 대한 강력한 항의의 뜻이기도 했다).
66 배급제 등과 전사자 통합의 기제는 북한 정권 유지에서 상당히 중요했다(물론 주체사상도 중요한 기제였다.) 67 그러나 현재 북한 정권에서 돈주의 등장으로 후자는 급속하게 약화되고 있다.
북한이 항상 권위주의 통치에만 전적으로 의존한 것은 아니었다. 단지 공개처형 방식만 있었다고 볼 수는 없다. 전자사 가족에 대한 푸짐한 예우는 북한 정권이 유지될 수 있었던 비결 가운데 하나다. 주민 20명 당 1명으로 조직돼 있는 인민보안원도 주민 감시의 주요한 수단이다. 그러나 이는 인민보안원에 대한 복지가 어느 정도 유지되는 한에서 유용하다. 그렇지 않다면 인민보안원과 주민은 배신보다는 공존 관계를 맺을 것이다. 그리되면 국가의 통제력은 약화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물론 북한 노동자들이 온갖 제약들을 뚫고 혁명적 저항에 나서리라 기대하는 건 얼핏 공상적으로 들릴지 모른다. 오랫동안의 경제난과 생존을 위한 힘겨운 나날들 속에서 북한 노동자들은 수십 년 동안 국가 억압에 의해 원자화돼 있다. 미국과 남한의 압박도 이데올로기적으로 부정적 구실을 했을 것이다.
그러나 더 중요한 사실은 자본주의는 자본주의 무덤을 파는 자를 만든다는 것이다. 수십 년 동안 아래로부터 도전을 받지 않고 지배 체제를 유지해 온 북한 사회도 근본적 모순을 피할 수는 없다. 이것이 바로 경직되고 획일적인 관료 지배 체제를 내부로부터 위기에 빠뜨리는 근본 동력이다. 북한 주민들 사이에서도 경제 위기와 시장화 과정에서 ‘사회주의’라는 이데올로기적 정체성이 흔들리기 시작했다는 연구결과도 있다. 69
이런 상황에서 북한 노동계급 의식의 정체성 형성을 먼 미래의 일로 여겨야 할까? 매우 흥미로운 사실은 국경을 접하고 있는 중국과 북한의 지배층은 상대방 내부에서 벌어질 격변이 자신들에게 미칠 영향을 모두 두려워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는 유력한 동아시아 전문가들의 정세 전망 곳곳에서 등장한다. 특히 중국 시진핑은 북한 내부의 격변이 국경선 인접 지역뿐 아니라 특히 신장 위구르 지역의 소수 민족을 자극할까 두려워한다.
북한 사회의 불안정의 뿌리는 바로 한반도 분단선만큼이나 또렷한 북한 내부의 계급 분단선이다. 남한의 혁명 좌파들은 남한과 북한 모두의 계급 분단선을 또렷하게 인식하고 남북한 노동자의 연대와 단결만이 그 분단을 해체할 수 있음을 인식해야 한다. 2등 시민 취급 당하고 있는 탈북자들을 이주 노동자 환영하듯이 환영해야 하며,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노동조건에 가슴 아파하는 것과 같은 이유로 개성공단 노동자들의 노동조건에 관심을 가져야 할 것이다. 침묵은 금이 아니다.
주
- 북한 관련 사건을 자신에게 유리한 정치 지형으로 활용하려는 남한 우익의 오래된 습관은 이번 사건에서도 여실히 드러났다. 정적 제거를 위해 암살과 처형을 마다하지 않은 남한 지배자들의 역사는 지면상 생략한다. ↩
- 박노자 교수는 란코프 교수의 한 인터뷰를 인용하면서 “다소 보수적인, 남한 우월주의적 입장에서 정리한 인터뷰지만, 기본 포인트 하나는 분명 유효합니다. 김정은 체제는 ‘붕괴’는커녕 흔들리지도 않고 있다”고 말한다. ↩
- 김창수 2017. ↩
- 란코프 2013. ↩
- 이 논문이 참고한 자료에 관해 먼저 밝히고자 한다. 주되게 국내외 북한 연구자들의 논문과 저서, 그리고 북한에서 출간된 《조선중앙통감》과 《경제연구》, 《근로자》, 재일본조선인총연합회가 발간한 친북 언론인 《조선신보》 등을 참고했다. 지독한 반북 성향 사이트의 자료는 지나친 과장 등 때문에 되도록 참고하지 않았음을 밝혀 둔다. 지난 10년은 북한 연구의 르네상스라 할 수 있다. 경남대학교 극동문제연구소가 전신인 북한대학원대학교에서 출간한 《현대북한연구》와 학위논문들, 서울대학교 평화통일연구원의 연구보고서 등이 대표적인 저서와 논문들이라 할 수 있겠다. 연구자들과 논자들(양문수, 김병연, 김병로, 정은이, 박후건, 임을출 등)은 상당히 많은 탈북자들에 대한 면접 조사를 토대로 여러 논문들을 발표하고 있다. 필자는 그들의 견해에 여러 이견들을 갖고 있음(때로 심각할 정도의)에도 관련 논문들이 최근 20년 동안 북한의 변화를 분석하는 데 유용한 자료라고 생각한다. ↩
- 문성민 2014, p12. 오히려 북한이 자체 발표한 경제성장률이 가장 낮다. PWT는 189개 국가의 구매력과 국민 소득을 수집해서 발표하는 펜 월드 도표(Penn World Table)의 약자로서 나름의 공신력을 가지는 국제데이터 가운데 하나다. ↩
- IMF 등이 북한 당국으로부터 제공받아 자체 보고서에 게재한 통계를 의미한다. ↩
- 이석 2016. ↩
- 이종석 2001, pp594-595. ↩
- 그의 통계 산출 방식이 가장 객관적이고 정확하다는 평가를 받는다. ↩
- 란코프 2013, p119. ↩
- 김일성 사망 1주기가 지난 직후인 1995년 7월 30일부터 8월 18일까지 일평균 300밀리리터의 폭우가 북한 전역에 쏟아져 하천이 범람했다. 농업 생산에 막대한 타격을 주었고 관개용 수로와 주택이 파괴됐으며 저장곡물을 쓸어버렸다(하루끼 2012, p247). ↩
- 덜 비옥한 땅에서까지 일명 차액지대를 추출하려는 자본주의적 농업이 자연을 얼마나 훼손하는지에 관해서는 일찍이 마르크스가 《자본론》 3권에서 언급한 바 있다. 주체농법의 문제점에 관한 좀더 자세한 지적은 하루끼 2002, p229를 참고하면 된다. ↩
- 정은이 2011, p218. ↩
- 김병로 2016, p242. ↩
- 1990년 시점에서 수출액 9억 5200만 달러, 수입액 16억 6900만 달러였던 대소 무역은 1994년이 되면 수출액은 4천만 달러, 수입액은 5천7백만 달러로 급감했다. 그 시기 중국 무역량은 약간 늘었다(하루끼 2012, pp226-227). ↩
- 노동자와 농민은 배급 순서에서 후순위인 4순위이다. ↩
- 김병로 2013, p221. ↩
- 박형중 2011, p224. ↩
- 김병로 2013, p194. ↩
- 김직수 2013. ↩
- 임을출 2016, p170. ↩
- 임을출 2016, p194. ↩
- 임을출 2016, p99. ↩
- 임을출 2016, p194. ↩
- 정은이 2014b; 2015. ↩
- 임을출 2016, pp112-113. ↩
- 이 조처는 갑자기 시작된 것이 결코 아니다. 애초에 북한 정권은 1984~85년부터 독립채산제를 강화하고 합영법 제정, 8·3 인민소비품 창조 운동 등을 통해 일련의 시장화 확대 조처를 추진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런 움직임은 일시적인 것에 그치고 1986년부터는 다시 보수적인 정책 기조로 돌아섰다. 하지만 경제적 상황이 더욱 어려워지자 1990년대 초부터 다시 개혁·개방적 분위기가 부활했다. ‘개인 부업’이 장려됐고 나진·선봉 자유무역지대(경제특구)와 같은 일련의 정책들이 추진됐다. ↩
- 임수호 2008, p149. 김병로 2013, p199에서 재인용. ↩
- 김병로 2013, p191. ↩
- ‘본격적으로 추진되는 경제관리개선-경제부흥을 위한 창조와 변혁’, 《조선신보》 2002, 7월 26일자. ↩
- 양문수 2010, pp293-295. ↩
- ‘8·3 노동자’ 제도는 자신이 속해 있는 공장·기업소에 대해 매달 일정 금액의 현금을 바치면 직장에 출근하지 않고 자유롭게 상행위를 할 수 있는 사람들을 가리킨다. ↩
- 김병연·양문수 2012. ↩
- 한기범 2010, p133. ↩
- 양문수 2010, p55. ↩
- 수익을 분명하게 기록하고 보고할 수 있게 하는 일종의 기업의 제무재표 같은 것이다. ↩
- 양문수 2010, p335. ↩
- 김병로 2016. ↩
- 정유석·이철수 2016, p31. ↩
- 란코프 교수는 자신이 김일성 종합대학에 있을 때 정기적으로 외국 자료들, 특히 모스크바의 〈프라우다〉와 중국의 〈인민일보〉를 〈조선일보〉와 마찬가지로 체제 전복 위험이 있는 자료로 여겨 물리적으로 파손하는 캠페인이 벌어졌다고 회고했다(란코프 2013, p77). ↩
- 란코프 2013, pp68-69. ↩
- 양문수 교수는 북한 내부 자료와 여러 증언들을 종합하여 2002년 7·1 조처의 주요 목적 중 하나가 국방부문에 투입할 재원의 마련이었다고 언급한다(양문수 2010, p48). ↩
- 양문수 2010, p49. ↩
- 란코프 2013, pp154-155. ↩
- 일부 당 간부들은 잘 알고 지내던 돈주에게 단속 정보를 주거나 단속 대상에서 제외해 주는 대가로 자신의 돈을 투자하기도 한다. 돈주와 간부와의 정략결혼도 적지 않다(곽인옥 2010, pp185-186). ↩
- 김병로 2013, p196. ↩
- 양문수 2012, p96. ↩
- 김병로 2013, p197. ↩
- 란코프 2013, pp182-183. ↩
- 김병연·양문수 2012, pp254-255. ↩
- 이 중에서도 석탄이 차지하는 비중이 50퍼센트에 이른다. 미국의 세컨더리 보이콧으로 가장 큰 타격을 입게 되는 분야가 바로 이 석탄 수출이다. ↩
- 양문수 2010, pp90-91. ↩
- 《조선중앙년감 2011》. ↩
- 건설사업에 동원돼 노역을 한 노동자들 사이에서 불만이 제기되고 있다. 탈북자들에 따르면, “실제로 그 유희장에 가 본 적은 없다. 국정 가격으로 입장권이 배당돼도 그럴 시간이 없다. 그런 모금과 원호 사업에 대한 불만이 많다. 일반 주민들은 이용할 형편이 되지 못한다”(정일영 2016, p29). 이것이야말로 자신이 생산한 생산물로부터 소외되는 노동의 소외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
- 박후건 2015, p208. ↩
- 1990년대 중후반 이후부터 북한이 자본주의로 이행한 것은 아니다. 필자는 북한 사회는 국가 관료가 집합적 자본가로 역할을 하는 관료적 국가자본주의였다는 분석을 전제로 한다. 생산수단을 소유할 뿐 아니라 생산과정 전반을 지배(운영·관리)하는 경제적 집단을 자본가 계급이라고 본다면, 관료는 국가를 통해 축적 과정을 지배하는 ‘가장 순수한 형태의 인격화’다. 관료의 권력은 생산과정에서 차지하는 지위에서 나온다. 구소련이나 북한에서의 관료들은 서방 자본주의와의 경쟁 하에서 생산수단과 노동력을 관리하고 운영하는 국가자본가 계급이었다. 이것이야말로 국가자본주의 이론의 요체다. 소련 관료에 대한 계급적 분석과 국가자본주의 이론의 등장 배경에 관해서는 최일붕(2010)을 참고하면 된다. 국가자본주의 이론에 입각해서 북한 관료를 자본가 계급으로 위치 짓는 중요한 연구로는 김하영의 책과 논문(2002; 2005)이 있다. ↩
- 당시 평안도 지역은 보수 성향의 기독교 세력들의 주요 근거지였고 또 식민지 시기 평양은 상업 자본가들이 많이 활동하고 있던 상업이 번창한 지역이었다. 스탈린은 이런 보수 성향의 주민들의 활동을 무시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북한 지역의 급속한 ‘사회주의화’는 보수세력들의 급격한 남하가 낳은 호조건과도 관련 있다(박태균 2005, p74). ↩
- 북한의 토지개혁과 국유화 조처, 중공업 우선 정책 등의 계급적 본질에 관해서는 김하영(2002, pp305-351)에 잘 서술돼 있다. ↩
- 돈주들은 초창기에는 중국과의 무역을 장악했던 화교(약 30만 명 추정)나 재일교포들(약 10만 명 추정)이었지만 1990년대 이후에는 ‘신세대 돈주’들도 적지 않다. 이들은 평양과 나선경제 무역지대뿐 아니라 나선과 가까운 청진, 신의주 같은 중국측 인근 도시들과 도매시장이 들어서 있는 평성, 남포 등에서 살고 있다(임을출 2016, p146). ↩
- 임을출 2016, p172. ↩
- 양문수 2011, p62. ↩
- 정유석·이철수 2016, p31. ↩
- 민영기, 2016. ↩
- 박형중 2013, p60. ↩
- 한국전쟁으로 북한이 입은 인적 손실 규모가 어느 정도인지 정확히 밝히기는 쉽지 않지만, 지금까지 연구된 자료로 볼 때 1백20만~1백30만 명 정도일 것으로 판단된다. 이는 남한의 인적 손실 85만 명을 넘는 규모이며, 당시 북한 전체 인구의 12∼14퍼센트에 이르는 규모다. 남한 인구의 절반도 안 되었던 북한의 인구수를 감안하면 북한 사회에 엄청난 충격을 주었으며, 가족 구조를 와해시키면서 사회 재편의 필요성을 야기했음을 알 수 있다. 사망자와 부상자를 합하면 북한 인구의 약 30퍼센트인 3백만 명이나 된다. 〈통일조선신문〉은 182만 명의 부상자가 생겨났다고 구체적으로 언급한다. 〈Toitsu Chosen Shimbun〉 June 27, 1970; Young Whan Kihl 1984, p42에서 재인용; 김병로 2013, p182에서 재인용. ↩
- 주체사상의 등장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중소분쟁이 가열되는 1960년대 초에 이르러 북한은 중국과 소련으로부터 원조가 감소되고 군사적 위기가 고조되자 군사 부문에 무게를 실은 지역자립체제를 확립하고 자위 국방 정책이 절정에 달했던 1960년대 중반 이후에는 중공업 우선 정책을 표면화했다”(김병로 2016, p168). 다시 말해 주체사상, 즉 북한의 주체적 발전모형의 이데올로기는 “한국전쟁에서의 막대한 피해 경험과 남북분단의 대결구조에서 태동함으로써 전시를 대비한 군사 중심적 특성”의 결과라고 봐야 한다(김병로 2016, p169). ↩
- 곽명일 2016, p55. ↩
- 윤철기 2016, pp155-18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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