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호를 내며
문재인 정부가 등장한 지 한 달도 되지 않았는데도 개혁에 대한 기대보다 실망이 앞선다. 제스처만 있을 뿐 실속은 없기 때문이다. 문재인 정부에 대한 우파의 공격에 대해서는 문재인 정부를 방어해야 하겠지만 문재인 정부가 개혁을 잘 추진하도록 지지하거나 응원해서는 안 된다. 문재인 정부의 어정쩡한 개혁은 좌우의 누구도 만족시키지 못하고 정치적 양극화를 심화시킬 공산이 크다. 이런 상황에 대비해 정치적 선명함과 예리함을 유지하면서도 정치적·이데올로기적 쟁점에 기권하지 말고 적절히 개입할 역량을 키우는 것이 우리 앞에 놓인 과제라 할 수 있다.
20호에는 모두 9편의 글을 실었다.
‘강남역 살인, 흉악범죄, 페미니즘’은 강남역 살인 사건을 여성혐오 범죄라고 규정하는 양성 분리적 여성주의자들을 비판하면서 오히려 이 범죄가 발생한 사회적 근원에 초점을 맞춰야 한다고 지적한다. 이 글은 강력 범죄 통계에 기반하여 남성을 잠재적 범죄자로, 여성을 피해자로 보는 잘못된 시각을 바로잡을 뿐 아니라 여성을 피해자화하는 것은 여성 차별의 원인을 남성 일반의 본성으로 여기게 하며 더 나아가 자본주의 체제의 문제라는 점을 보지 못하게 한다고 지적한다.
‘담론이 아니라 여성 억압의 물질적 조건을 근본적으로 바꿔야’는 정희진 등이 쓴 《양성평등에 반대한다》에 대한 꼼꼼하고 체계적인 서평이다. 이 책의 필자 중 한 명인 정희진은 양성 평등 담론을 반대하는데, 이 서평의 글은 담론을 형성한 객관적 현실을 부정하는 그녀의 관념론 때문이라고 지적한다. 더 나아가 이 글은 정희진의 관념론은 실체가 모호한 권력 개념과도 연결돼 있는데, 이 때 권력은 사회적 관계가 아니라 주관적인 의미를 지닌다고 지적한다. 이 글은 이런 입장이 해악적 영향을 초래하게 될 것이라고 비판한다.
‘페미니즘의 고전 《성의 변증법》의 의의와 한계’는 파이어스톤의 고전적 저작 《성의 변증법》에 대한 비판적 서평이다. 이 글은 파이어스톤이 이 책을 쓸 당시의 맥락과 그녀가 겪었을 성차별적 태도에 대한 좌절을 충분히 공감하면서도 이 책에서 제시한 성차별의 성격과 기원에 대해서는 날카롭게 비판한다.
‘최초의 성 해방 운동과 사회주의 운동’은 한 세기 전 혁명적 분위기의 독일에서 사회주의 운동과 성 해방이 어떻게 서로 얽혀 있었는지를 잘 보여 준다. 특히 이 글은 독일 사회민주당 내의 성소수자 운동을 살펴보고 있다.
‘트럼프 집권과 세계 자본주의: 체제의 불안정을 반영하고 동시에 키우고 있다’는 지난 넉 달 동안 트럼프가 기존 국제 질서를 변경하는 방향으로 발을 떼려 하고 있지만 유력한 지배자들이 그에게 반발하면서 체제의 불안정성이 커져가고 있는 상황을 다루고 있다. 또한 이 글은 트럼프를 둘러싼 미국 지배계급의 내분은 미국 제국주의가 직면한 더 근본적인 문제, 즉 미국의 경제력과 국제적 영향력 사이의 격차를 반영하고 있다고 지적한다.
올해는 1987년 6월 항쟁과 7~9월 노동자 대투쟁 30주년이 되는 해다. 이를 기념할 뿐 아니라 그 투쟁들이 오늘날 가지는 의미를 살펴보는 글 두 편을 실었다. ‘1987년 6월 항쟁 30주년 ─ 무엇을 계승할 것인가?’는 6월 항쟁의 과정을 간략하게 살펴보고, 30년 전의 투쟁과 박근혜 퇴진 운동을 비교하면서 부르주아 민주주의적 관점이 아니라 노동계급의 자력해방의 관점에서 교훈을 이끌어내고 있다. ‘1987년 7~9월 노동자 대투쟁 30주년 ─ 노동계급의 결정적 힘을 보여 주다’는 6월 항쟁을 이어받아 투쟁을 벌인 한국 노동자들의 대서사시 같은 사건을 다룬 글이다. 노동자들은 6월 항쟁 때문에 군부 정권이 양보한 상황을 이용해 전국적으로 투쟁을 확산했는데, 로자 룩셈부르크가 말한 경제투쟁과 정치투쟁의 상호작용이 그대로 나타났다. 1987년 7~9월 노동자 대투쟁은 민주화의 진정한 동력은 바로 노동자 투쟁이었다. 이런 점에서 이 글은 트로츠키의 연속혁명론이 이 투쟁에 적용된다고 지적한다.
러시아 혁명 100주년을 기념해 이번 호에는 ‘어떻게 레닌은 혁명이 10월 혁명으로 향하도록 했는가?’를 실었다. 이 글은 2월 혁명이 일어난 지 5주가 지났을 때 레닌이 러시아로 돌아와 ‘4월 테제’를 발표한 일을 다룬다. 레닌의 ‘4월 테제’의 내용은 혁명이 사회 최상층의 변화를 넘어 더 나아가야 한다는 것이었다.
마지막으로 ‘북한의 시장화와 “돈주”의 역할에 대한 보충’은 《마르크스21》 19호에 실린 ‘최근 20년 동안 북한식 “시장화”와 김정은 정권의 불안정’의 보완글이다. 이 글은 북한의 시장화와 돈주의 등장을 어떻게 볼 것인가 하는 문제에 대한 보충 설명을 담고 있다.
《마르크스21》의 독자들은 주변의 지인들과 정치적 대화를 하는 데 이 잡지를 적극 활용하기를 바란다. 그리고 독자들의 활발한 문제제기와 토론을 기대한다.
편집팀을 대표해 이정구
MARX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