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Ⅰ: 페미니즘과 성 해방
강남역 살인, 흉악범죄, 페미니즘
이 글은 필자가 강남역 살인 사건 이후 〈노동자 연대〉 신문에 쓴 관련 기사들의 일부를 종합하고 수정·보완한 것이다.
강남역 살인 사건이 벌어진 지 1년이 지났다. 지난해 5월 김모 씨는 강남역 인근 화장실에서 일면식도 없는 여성을 흉기로 찔러 무참히 살해하는 끔찍한 범죄를 저질렀다. 한국에서 유동 인구가 가장 많다는 강남역 부근에서 벌어진 이 일은 많은 이들에게 충격을 줬다.
이 사건이 ‘여성혐오 범죄’인지를 둘러싼 논쟁이 있었다. 페미니스트들은 이 범죄가 여성혐오 사회가 낳은 여성혐오 범죄라고 봤다. 지난해 1심 재판부는 이 사건을 “망상으로부터 영향받은 피해의식” 때문에 “상대적 약자인 여성을 대상으로 한 범죄”라고 규정했다. 당시 재판부는 김 씨가 오랫동안 조현병에 시달려 왔고 범행 당시에도 심신 미약 상태였음을 고려했다고 밝혔다.
당시 재판부는 김 씨가 여성을 대상으로 범행한 것은 ‘남성을 무서워해서이지 여성에 대한 혐오 때문은 아니’라고 하며 ‘여성혐오 범죄’ 주장은 인정하지 않았다. 대법원 판결에서도 이 판단은 유지됐다. 김 씨는 징역 30년형을 선고받았다.
강남역 살인 사건은 병든 이 사회의 단면을 보여 주는 사건이었다.
김 씨는 애먼 한 여성에게 분노를 표출했고, 그녀의 가족과 친구들에게 씻을 수 없는 상처를 남겼다. 그러나 김 씨는 재판 내내 자신이 한 행동으로 타인이 겪은 고통을 이해하거나 미안해 하는 감정을 느끼지 못하는 듯한 모습을 보였다. 김 씨가 반성하는 태도를 전혀 보이지 않아 유가족은 억장이 무너졌을 것이다.
김 씨가 반성하는 태도를 보이지 않았던 것은 그가 사이코패스여서라기보다, 자신은 ‘정당방위’를 했을 뿐이라고 여겨서인 듯하다. 그는 여성들이 자신을 해칠 거라는 망상에 시달렸다.
김 씨는 오랫동안 정신질환을 앓았고, 그 때문에 사회에서 환영받지 못하는 존재였다. 망상과 환청에 시달리면서 다니던 학교에서 쫓겨나고 아르바이트도 번번이 잘리는 불안한 생활을 반복했다. 그가 처한 조건들은 피해망상과 결합돼 그의 내면에 분노를 키웠던 듯하다.
주류 언론과 정부는 이 사건이 ‘한 정신질환자의 흉악 범죄’임을 부각하면서, 정신질환자들에 대한 편견을 부추겼다. 물론 이 사건의 경우 한 정신질환자가 범죄를 일으킨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정신질환자들이 모두 잠재적 범죄자라는 식의 편견 조장은 근거도 없을 뿐 아니라 문제를 더 악화시킨다. 범죄심리학자 이수정 교수는 이런 편견을 비판한다. 그는 “정신분열증을 가진 사람이 일반인보다 폭력범죄율은 낮지만 폭력적일 가능성은 높다”면서도 이렇게 지적한다. “정신분열증의 환각, 망상 등의 증상 자체가 직접적으로 폭력 행동을 유발하는 동기로 작용한다기보다는, 여러 증상의 상호 작용이나 상황적 요인에 의한 스트레스가 그들의 폭력 행위에 영향을 주는 것으로 해석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따라서 신체질환과 마찬가지로 정신질환도 적극적으로 치료해야 할 질병으로 인정하고, 정부가 치료와 관리를 위한 의료 복지 제도를 마련하는 게 중요하다. 정신질환자 낙인찍기는 질병을 쉬쉬하게 하거나 가정 내에 방치되도록 만들어, 치료·관리를 어렵게 하고 위험을 키울 수 있다.
지배자들은 흉악 범죄 위험과 공포를 부각해 공권력 강화의 명분을 쌓고 가족 가치관을 옹호하는 데만 관심 있을 뿐, 자본주의 사회가 사람들의 내면에 좌절과 분노를 키운다는 사실에 침묵한다. 그러나 이번 사건의 경우에도, 자본주의의 실업과 빈곤 같은 사회적 요인들이 내면에 분노와 좌절감을 키우고, 자존감을 떨어뜨려 피해망상을 악화시키는 데 일조했다.
마르크스주의자들은 강남역 사건과 같은 범죄가 개인적 요인들이 직접적으로 촉발했지만 그 근원에는 자본주의 사회의 소외(통제력 상실)가 있다고 본다. 물론 차별과 천대를 받는 사람들이 모두 범죄를 저지르지는 않는다. 그러나 그 끝없이 절망을 안기는 체제와 빈곤, 가난이라는 요인을 보지 않으면, 순전히 범죄자 개인의 문제로 여기거나 엉뚱한 문제(유전자, 성별, 인종 등)로 시선을 돌리게 하는 지배자들의 이간질에 말려들게 된다.
애먼 사람이 더는 희생되지 않기를 바란다면 비극의 사회적 근원에 초점을 맞춰야 한다.
여성혐오 범죄?
양성 분리적 여성주의자들은 강남역 살인 사건을 ‘여성혐오 범죄’라고 규정했다. 물론 이런 주장을 하는 여성주의자들은 여성이 차별받는 현실에 대한 경각심을 일으키고자 하는 의도에서 그럴 것이다. 그러나 좋은 의도였다 해서 언제나 올바른 결론을 이끌어 내는 것은 아니다.
“망상으로부터 얻은 피해의식”에서 비롯한 이번 사건은 가해가 한 여성에게 분노를 표출한 것일지라도 특정 집단에 대한 뚜렷한 차별 신념이 동기로 작용하는 증오범죄와는 구별된다. 또한 여성을 대상으로 범죄를 저질렀다 해서 모두 ‘여성혐오’ 범죄는 아니다.
양성 분리적 여성주의자들은 강남역 살인 사건이 ‘여성혐오 사회’의 발현이라고 본다. 이 사건이 단지 이례적인 사건이 아니라 남성에 의해 여성이 맞고 죽는 “일상”의 연장이라고 본다. 정희진 씨는 이렇게 말한다.
남자는 여자가 자기를 무시할까 봐 두려워하지만, 여자는 남자가 자기를 죽일까 봐 두려워한다. … 이 사건은 특이한 일이 아니다. 한국 사회의 일상인 여성 살해femicide다. … 인류의 반이 자신의 성별 때문에 평생을 공포 상태에서 살아가야 하는 구조 … 여성에겐 모든 곳이 ‘강남역’이다.
애초에 근본적으로 사회가 ‘가해자 남성 vs. 희생자 여성’으로 분열돼 있다고 보기 때문에 강남역 살인 사건도 그렇게 해석하는 것이다. 살인을 저지른 김 씨가 정신질환을 앓았다는 사실을 애써 보지 않으려는 것도, 그것을 인정하면 여성 차별의 근원인 “남성 지배 구조”의 중요성이 가려진다고 보기 때문이다.
물론 자본주의 사회에서 일부 남성에 의한 여성 폭력은 실재한다. 여성의 사회적 지위가 상승했지만, 일부 여성들은 성폭력과 가정폭력의 끔찍한 희생자가 된다. 여성에 대한 폭력은 여성 차별의 가장 흉측한 단면이다. 성폭력과 가정폭력에 희생된 여성들의 편에 서고, 이런 폭력에 맞서고자 하는 것은 정당한 일이다.
그러나 나아가 이 사회에서 살인 등 여성을 대상으로 한 흉악범죄가 만연해 있고, 남성이라면 누구든 그런 범죄를 저지를 수 있다는 인식은 사실과 다르고, 무엇보다 정치적으로 잘못된 메시지를 준다.
물론 남성들과 달리 많은 여성들은 홀로 밤길을 걸을 때 무섭다고 느낀다. 특히 강남역 살인 사건처럼 누구나 한 번쯤 가봤을 공간에서 벌어진 무차별 범죄 소식을 접하면, 당장 나에게도 그런 일이 일어날 것만 같다고 느낄 수 있다. 당시 언론들은 살인 전후의 상황을 담은 CCTV 영상을 반복적으로 내보내며 이런 공포심을 부추겼다.
그럼에도 심정에만 의존해서는 실제 현실을 제대로 파악할 수 없다.
강력 범죄 통계의 진실
여성 대상 흉악범죄가 사회에 만연해 있다는 근거로 제시되는 것은 ‘강력 범죄 피해자의 다수가 여성이고 그 비율이 계속해서 늘고 있다’는 것이다. 대검찰청 통계 자료에 근거해 ‘살인, 강도 등 흉악 강력범죄 피해자 10명 중 적어도 8명은 여성’이라는 보도가 쏟아졌다.
그러나 통계를 찬찬히 뜯어보면, 현실은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대검찰청의 ‘2016범죄분석’을 보면, 피해자 다수가 여성이라고 보고된 ‘강력(흉악) 범죄’에는 살인, 강도, 방화, 성폭력이 포함된다. ‘강력(흉악) 범죄’ 발생률(인구 10만 명당 범죄 발생 건수)은 68.2건이다. 그런데 이 범죄 중 다수를 차지하는 것은 성폭력 범죄다(88퍼센트). 성폭력 피해자의 다수가 여성(90퍼센트)이다 보니, 전체 흉악 범죄에서 여성의 피해자 비율이 높게 나타나는 것이다. 또한 다른 ‘강력(흉악) 범죄’와 달리 통계상 성폭력은 꾸준히 증가 추세이다. 그러다 보니, 전체 ‘강력(흉악) 범죄’ 건수 자체가 늘고 피해자 중에서 여성의 비율도 증가하는 추세로 나타난다.
그런데 공식 통계상 성폭력에는 수위가 다른 여러 범죄가 모두 포함돼 있다. 자세히 살펴보면, 지난 10년간 성폭력 범죄율을 끌어올린 가장 주요한 요인은 “카메라 등을 이용한 촬영”(이른바 ‘몰래카메라’)과 통신매체를 이용한 범죄였다. 즉, 스마트폰이나 인터넷을 이용한 신종 범죄들이다. 강간과 추행 건수도 다소 늘었지만, 이런 종류의 범죄는 신고율이 너무 낮아서 공식 통계 증가가 실제 범죄 발생 증가를 나타낸다고 단언할 수 없다.
4 도 같은 범주에 포함시키는 것이 합리적일 것이다. 대검찰청 통계에서 (성이 개입되지 않은) ‘폭력’은 ‘흉악’ 범죄와 따로 분류돼 있는데, ‘폭력’ 범죄 건수는 ‘흉악’ 범죄의 7배에 이르고, 남성 피해자 비율(54퍼센트)이 여성 피해자 비율(32퍼센트)보다 더 많다. 실제 피해 정도에서도 죽거나 상해를 입는 경우가 남성이 여성보다 두 배가량 많은 것으로 나타난다. 5 즉, 통상적인 폭행은 여성보다 남성이 더 많이 노출돼 있다.
물론 ‘몰래카메라’와 통신매체 이용 범죄도 처벌받아야 할 비행 중 하나다. 그러나 이런 종류의 비행을 살인과 같은 범주에 포함시킨 것은 합리적이라고 할 수 없다. 그럴 거라면 적어도 현재 통계상 따로 분류돼 있는 ‘강력(폭력) 범죄’그래서 ‘흉악’ 범죄와 ‘폭력’ 범죄를 합쳐서 남녀 피해자 비율을 계산하면, 남성이 55퍼센트 여성이 45퍼센트로 남성이 더 많다.(물론 신고율이 낮은 강간이나 가정폭력을 감안하면 실제 현실에선 여성 비율이 약간 더 늘어날 수 있다.) 이런 새로운 기준에 비춰 보면, ‘강력범죄 피해자의 절반 이상은 남성’이라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나머지 ‘강력(흉악) 범죄’들을 살펴봐도, 남녀 차이가 두드러지지 않는다. 살인(미수, 예비, 음모, 방조 포함) 발생률은 1.9건이다. 살인 범죄는 지난 10년 동안 소폭 감소 추세다.
6 강도, 방화의 경우에도 발생률은 10년 전에 견줘 꾸준히 감소 추세이거나 변함이 없다. 피해자는 강도, 방화 모두에서 여성보다 남성이 더 많다.
살인 피해는 오히려 남성 피해자(536명)가 여성 피해자(391명)보다 더 많은 것으로 나타난다.물론 살인, 강도, 방화 범죄에 따른 피해 정도를 놓고 보면, 사망하는 여성의 수가 남성보다 더 많은 것이 사실이다. 남녀 간 물리력의 차이가 반영됐을 것이다. 그럼에도 여성(51퍼센트)과 남성(49퍼센트)의 비율 차이가 두드러진다고 보기는 어렵다. 이 범죄들을 통해 상해를 입는 경우는, 남성(60퍼센트)이 여성(40퍼센트)보다 높다.
이런 통계들을 제시하는 이유는, 여성에 대한 범죄가 과장돼 있으니 차별로 인해 여성이 겪는 피해를 무시해도 되고 범죄 피해가 별로 끔찍하지 않다는 걸 보여 주기 위함이 아니다.
그러나 여성이라면 누구나 흉악범죄에 노출돼 있다거나 살인 같은 여성 대상 흉악범죄가 최근 엄청나게 늘고 있다는 것은 도덕적 공황을 일으키길 좋아하는 언론의 선정주의일 뿐이다.
범죄자 남성 vs. 피해자 여성?
‘남자라면 누구라도 흉악범죄의 가해자가 될 수 있고, 강남역 살인과 같은 범죄에도 책임이 있다’는 주장도 마찬가지로 커다란 과장이다. 이런 주장은 대부분의 남성은 여성을 살해하는 등의 범죄를 저지르지 않는다는 점을 완전히 무시하고 있다. 많거나 적게 여성 차별적 관념을 받아들이긴 해도 이런 끔찍한 범죄를 저지르는 남자는 극소수다.
물론 ‘흉악’ 범죄자의 대부분은 남성이다. 그러나 가장 심각하고 끔찍한 범죄인 살인은 다소 이야기가 다르다. 한 범죄 전문가는 이렇게 말한다.
살인범 가운데 남성은 77.4퍼센트에 불과(?)하다. 여성 살인범이 22.6퍼센트나 된다. 전체 범죄의 80퍼센트 이상을 남자들이 저지르는 것을 감안하면, 살인은 대단히 의외가 아닐 수 없다. 살인 피해자의 성별을 살펴보면 더 놀랍다. 살인 피해자의 46.8퍼센트가 남성이고 여성 피해자는 53.2퍼센트로, 거의 비슷하다. 흉악범죄 피해자의 대부분이 여성일 것이라는 추측을 빗나가게 하는 통계 결과라고 할 수 있다. … 사실 흉악범의 다수가 남성이고, 여성 피해자가 많은 게 사실이다. 그렇다고 흉악범은 곧 남자들이고 피해 대상은 여자들이란 단순 도식은 성립하지 않는다. 여성은 나약하다는 여성에 대한 편견과 언론 등이 만들어 낸 흉악범에 대한 이미지가 이런 잘못된 인식을 낳고 있는 셈이다.
최근 한 초등학생을 유괴·살인한 고등학생, 오피스텔에서 지인을 흉기로 수십 차례 찔러 살해하고 시신을 훼손한 사람도 여성이었다.
남성보다 적더라도 일부 여성이 흉악범죄를 저지른다는 점을 인정한다 해서 여성 차별의 심각성을 축소시켜 보는 것은 전혀 아니다. 그러나 정희진 씨가 암시하듯 ‘범죄자 남성 vs. 피해자 여성’ 도식과 달리 현실이 그렇게 단순하지는 않다는 것은 분명하다.
정희진 씨처럼 여성에 대한 위험과 피해를 과장하지 않고서도 여성 차별과 여성에 대한 폭력에 얼마든지 맞설 수 있다. 현실을 있는 그대로 보지 않으면, 여성들에게 불필요한 위축감과 무력감을 주고, 여성 차별의 원인을 엉뚱한 데(“남성 권력”)서 찾게 되기 십상이다.
여성에 대한 위험과 피해를 부각하고 과장하는 경향에 대해서는 페미니즘 내에서도 비판이 제기된 바 있다. 프랑스의 저명한 페미니스트인 엘리자베트 바댕테르는 강간 수치를 부풀리는 급진주의 여성운동을 비판하면서 이렇게 말한다:
왜 그렇게 분간하기도 어려운 강간의 통계 수치를 부풀리는가? ‘폭력적인 남성과 피해를 입은 여성의 이미지’를 필요 이상으로 이용하기 위해서가 아닌가? …
이런 식으로 통계 수치를 부풀려 가면서 여성운동을 진행하다 보니, 결과적으로 ‘여성은 피해자, 남성은 가해자’라는 생각을 일반화시키게 되었다. … 결국 여성은 점차적으로 ‘아동’과 같은 사회 신분으로 떨어지게 된다. 연약하고 무력한 어린아이. … 저항할 힘이 전혀 없는 아동, 성인에 의해 학대 받는 아동. 영원한 미성년자인 여성은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집안의 남자들을 불러 대는 ─ 옛날의 가부장적 시대의 ─ 상투적인 개념으로 되돌아온다. …
특별한 사건이 일어나 예외적으로 폭력이 행사된 경우 외에, 일상생활에서도 여자들은 죽이고, 모욕하고, 고문할 수 있다. 한편, 남편의 폭력에 대해 방어하기 위해서, 또는 사랑에 실패해서만 살인하는 것이 아니고, 이권 또는 사디즘 때문에 살인하기도 하고, 상식으로는 설명할 수 없고 단지 병리학적 현상으로 간주해야 할 여성 폭력들도 나타난다. … 우리는 차세대에 무엇을 제안하는가? 고작 ‘더 많은 여성 희생자 내세우기’와 ‘남성들에게 더 많은 처벌 내리기’가 아닌가? 열광을 불러일으킬 만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 무능력한 여성의 이미지를 강조함으로써 우리의 일상생활에 변화를 줄 만한 일도 전혀 없다. 여성을 단순히 무능력한 피해자로만 전제하고 있는 지금의 페미니즘은 오히려 남성을 상대로 소송을 걸어야 한다는 강박 관념에 사로잡혀 있고 여성 모두를 똑같이 희생자로 보는 문제점이 있다. 결국 최근의 페미니즘은 애초 목적이었던 투쟁에서 완전히 벗어나 버렸다.
분노의 배경: 모순된 현실
최근 몇 년간 차별에 대한 여성들의 분노가 커진 것은 여성에 대한 전에 없는 차별과 혐오가 생겨났거나 여성을 노리는 흉악범죄가 극심해져서가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다. 오늘날 여성들은 전의 어느 때보다 많이 대학에 진학하고(2015년 기준 74.6퍼센트) 노동자가 된다. 2009년에 여성의 대학 진학률은 남성을 앞지른 후 꾸준히 더 높았고, 그 차이가 더 벌어지고 있다. 여성들은 기존에 남성의 일로 여겨지던 분야에도 진출했다. 30년 전만 해도 법조계에서 여성은 찾아보기가 힘들었지만 2010년 이후 사법고시의 여성 합격자 비율은 40퍼센트를 웃돌았다.
바로 이를 배경으로 전의 어느 때보다 젊은 여성들의 자의식과 기대감이 커졌다. 결혼 연령이 갈수록 상승하고 있는 점은 이를 보여 주는 한 지표다. 여성들이 아이를 적게 낳는 것은 경제적 요인이 크지만 자의식의 성장과도 관련 있다. 여성도 성적 주체(대상이 아니라)라는 인식도 갈수록 커져 왔다. 강간이나 성추행, 성희롱 피해 여성들이 용기 있게 이를 고발하는 일이 많아지는 것도 이것의 반영이다.
그러나 사회에 진출한 여성들은 대부분 이내 큰 벽에 부딪힌다. 대부분의 여성들은 자본주의 노동인구의 일부가 됐음에도 여전히 차별받는다. 아이를 낳고 기르는 주된 책임은 여전히 여성의 몫이라고 여겨진다. 지속되는 경제 위기 때문에 자본주의는 더욱 여성들의 부담을 덜려 하지 않고, 오히려 더한층의 희생을 강요하려 한다.
즉, 사회 진출로 여성의 상대적 지위가 상승하고 자의식이 전의 어느 때보다 높아졌지만, 차별 구조와 이데올로기가 여전히 존재하는 모순된 현실이 젊은 여성들의 분노를 키운 배경이다. 기존에 없던 차별과 혐오가 생겼기 때문이 아니다. 여성 차별은 여전히 뿌리 깊지만, 여성의 사회적 지위가 심각하게 후퇴한 것은 아니다. 오늘날 여성 노동자들의 힘은 전에 없이 커졌다.
여성의 피해자화는 여성해방의 수단이 될 수 없다
자본주의에서 여성 차별이 유지되는 이유는 “남성 권력”이 아니라 자본주의 체제의 착취와 축적의 필요 때문이다. 자본주의는 현재와 다음 세대의 노동자를 길러 내고 사회화하는 임무를 개별 가족(특히 여성)에 떠넘기고 있다. 가정 내에서 수행하는 여성의 역할은 가정 바깥에서의 차별로 이어진다. 지배계급의 필요에 맞게 설계된 이런 물질적 구조가 여성 차별의 근원이다. 그리고 여기에 토대를 두고 온갖 차별적 관념들이 생겨나는 것이다. 따라서 여성 차별을 없애려면 여성과 남성 노동계급이 단결해 자본주의 체제에 도전하는 일이 필수적이다. 체제에 맞서 투쟁하는 과정에서 남성과 여성 모두의 의식도 변할 수 있다.
한국에서 여성의 다수는 노동자이고, 전체 임금 노동자의 절반가량(44퍼센트)이 여성이다. 오늘날 여성 노동자들은 어느 때보다 큰 힘 ― 사회적이고 집단적인 ─ 을 갖게 됐다. 이는 여성 노동자들이 자본주의를 변혁하는 투쟁에서 핵심적 일부가 됐음을 의미한다. 특히 교육·공공서비스·보건의료 등 중요한 공공부문에서 여성 노동자들이 차지하는 비중이 높다. 또한 최근 몇 년간 학교 비정규직, 대형 마트, 대학 청소 등 비정규직 여성 노동자들은 조직화돼 고용 안정이나 임금 인상 등 주요한 성과를 냈다. 여성들은 지난 박근혜 퇴진 운동에서도 주력 부대였다.
양성 분리적 페미니즘은 여성을 노동계급의 투쟁하는 일원이 아니라 ‘남성 지배’의 피해자임을 강조한다. 그러나 여성을 단지 피해자로만 부각하는 것은 여성에게 자신감을 부여해 집단적 주체로서 고무하지 못하고 기껏해야 개혁주의 여성 지도자(특히 국회의원)를 추앙하는 수동적 지지자로 놔 둘 공산이 크다.
또한 남성 일반을 (잠재적) 가해자로 취급하는 것은, 여성 차별의 원인을 남성 일반의 본성으로 치부하고 남성 개개인을 고발하는 데 주력하도록 만들어 사회에 만연한 여성 차별의 제도·사회구조 문제를 비껴가게 만든다.
물론 일상에서 부딪히는 개인들의 차별적 태도와 의식에 도전해야 한다. 그러나 거대한 체계적 차별에 맞서는 투쟁이 주로 개인들의 언행이나 태도의 변화와 자기 성찰에 의존할 수는 없다. 이런 강조점은 흔히 우리의 시선이 바깥이 아니라 내부를 향하도록 해, 이 사회 진정한 기득권층에 맞선 단결과 연대를 고무하기보다는 정반대로 분열과 파편화를 낳는 경향이 있었다. 노동운동 내에서 이런 경향이 발전하면 노동운동을 끊임없이 반목시키고 분열시키는 완전히 해악적 구실을 하게 된다.
시선을 바깥으로 돌려 지배자들에 맞서 무엇을 요구하고 그것을 어떻게 쟁취할 것인지를 함께 토론하고 투쟁해야 한다. 그런 점에서 강남역 살인 사건을 여성혐오 범죄로 보지 않으면 여성 차별 문제를 논할 자격도 없다는 식의 비난을 하는 일각의 분위기는 심각한 문제다.(앞서 살펴봤듯이 강남역 살인 사건을 보는 관점에는 여성 차별의 원인과 해방의 전략이 함의돼 있다.) 이런 분위기는 비민주적인 것일 뿐 아니라 운동의 발전을 위한 토론과 논쟁을 가로막고, 연대를 확대하는 데 결코 도움이 안 된다.
여성을 남성 지배의 희생자로 그리며 여성이 가장 강한 곳인 노동조합과 일터에 집중하기보다는 여성이 가장 약한 영역에 집중하는 여성운동은 주변적 운동에 머무를 수밖에 없다. 그리고 1968 반란 이후 서구 여성운동과 1990년대 이후 한국 여성운동의 역사는 이런 실천이 결국 여성운동이 자본주의 국가에 기대는 것으로 귀결된다는 점을 보여 준다.
9 자본주의 국가를 개혁 파트너로 삼는 전략은 국가기구를 강화하는 데 이용될 위험도 있다.
그러나 국가기구를 활용해 성평등을 달성하겠다는 전략은 일부 차별적 법·제도를 개혁하기는 했어도 여성의 다수인 노동계급 여성의 삶의 물질적 조건을 개선하는 데서 뚜렷한 한계를 보여 줬다. 이런 한계는 여성 차별적 체제의 핵심적 일부인 자본주의 국가를 성평등 실현의 주체로 삼는 데서 비롯하는 것이다.차별을 더는 참지 않겠다는 여성들이 많아진 것은 정말 좋은 일이다. 여성 차별을 약간이라도 완화시키려면 표적을 남성이 아니라 사회 체제와 국가 쪽으로 돌려야 한다.
주
- 1심 판결의 자세한 내용은 이현주 2016을 보라. ↩
- 이수정·김경옥 2016. ↩
- 정희진 2017. ↩
- 폭행, 감금, 주거침입, 협박 등이 포함돼 있다. ↩
- 범죄에 따른 신체 피해 결과를 나타낸다. 가령 살인(미수도 포함) 피해자라도 사망하는 경우가 있고 상해를 입는 경우가 있다. 강도, 방화, 성폭력, 폭행 범죄로도 사망하거나 상해를 입을 수 있다. ↩
- 다만, OECD 평균에 비해 한국의 남성 대비 여성 피해자 비율은 높은 편인데, 이는 한국이 다른 ‘선진국’들보다 여성 차별이 더 심각한 현실을 반영하는 듯하다. 남성과 여성 사이의 격차를 비교한 국제 보고서들을 보면, 한국의 성평등 지수 순위는 매우 낮다. ↩
- 이창무·박미랑 2016. 필자 이창무는 “뉴욕시립대학교 형사사법학 박사학위를 취득한 범죄·보안 전문가”다. 공저자 박미랑은 “데이트 폭력에 관한 범죄학 논문을 국내 최초로 발표했고, 청소년·여성범죄자와 피해자, 그리고 사회적 약자를 바라보는 형사사법기관과 사회구조를 범죄학적 관점으로 연구하고 있다.” ↩
- 바댕테르 2005. ↩
- 성주류화 전략의 모순에 대해서는 전주현 2017을 보라. ↩
참고 문헌
바댕테르, 엘리자베트, 2005, 《잘못된 길》, 중심.
이수정·김경옥 2016, 《사이코패스는 일상의 그늘에 숨어 지낸다》, 중앙엠앤비.
이창무·박미랑 2016, 《왜 그들은 우리를 파괴하는가》, 메디치.
이현주 2016, ‘강남역 살인 사건 판결에 부쳐 ― 비극의 근원에 초점을 맞춰야 한다,’ 〈노동자 연대〉 183호. 2016년 10월 19일자.
전주현 2017, ‘여성운동 ─ 노무현 정부의 여성 차별을 돌아보건대 문재인 정부로부터 독립성을 유지해야 한다,’ 〈노동자 연대〉 209호. 2017년 5월 23일자.
정희진 2017, ‘“강남역10번 출구” 그 후 1년,’ 〈경향신문〉 2017년 5월 14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