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Ⅰ: 페미니즘과 성 해방
《양성평등에 반대한다》
담론이 아니라 여성 억압의 물질적 조건을 근본적으로 바꿔야
올해 초 다소 도발적인 제목의 《양성평등에 반대한다》라는 책이 발간됐다. 이 책은 발간된 지 한 달 만에 2쇄를 인쇄하고, 3월에 있었던 저자들과의 북토크 좌석도 조기에 마감될 만큼 인기를 끌었다.
이 책에서 정희진 씨(이하 모든 필자 존칭 생략)를 포함한 5명의 저자들은 각각 양성평등 담론 비판, 성범죄, 미성년자 의제강간(만 13세 미만 미성년자와의 성관계는 동의 여부와 관계없이 강간으로 취급해 처벌하는 법 조항), 메갈리아 미러링, 한국 개신교의 동성애 혐오와 같은 주제들을 다루고 있다.
이 다양한 주제들을 한데 묶은 것은 각 사안을 바라보는 저자들의 관점에 유사성이 있기 때문이다. 저자들은 모두 성문화 연구 모임 ‘도란스’에서 활동하는데, 도란스는 “당대 한국 사회의 현실을 젠더와 섹슈얼리티, 탈식민주의 시각에서 재해석하고 변화를 추구”한다고 밝히고 있다.
‘들어가는 말’에서 정희진은 “필자들은 정체성의 정치, (남성 중심의) 평등, 여성의 사회 진출을 넘어 사회 정의로서 여성주의를 추구한다”고 밝히고 있다. 즉, 저자들은 공통적으로 배타적인 정체성 정치에 비판적 문제의식이 있고, 주류 여성운동과도 거리가 있다. 이들은 포스트모더니즘적(포스트구조주의, 포스트식민주의 등) 관점에서 여성 집단 내부의 차이를 인정·강조하고 교차성 개념과 퀴어 이론에도 친화적이다.
예컨대 정희진은 성소수자들의 존재를 적극 내세워 양성 개념을 공격하고 주류 여성운동의 양성평등 담론을 비판한다. 한채윤은 그 자신이 성소수자 활동가이고, 이 책에서 한국 기독교의 동성애 혐오 배경에 대해 다뤘다. 루인은 ‘○○○ 전 지검장의 공연음란행위 사건’을 ‘퀴어 범죄학’이라는 관점에서 재해석했고, 권김현영은 미성년자 의제강간을 다루면서 이 문제를 단지 연령이 아니라 젠더, 경제적·사회적·정치적 권리 등과의 교차점에서 사고해야 함을 주장한다.
2015년 8월 여성가족부가 대전시 성평등조례의 ‘성소수자 지원’ 항목을 ‘상위법인 양성평등기본법에 어긋난다’며 삭제하라고 권고한 이후, “양성평등”이 성소수자 배제 논리로 사용되는 것에 대한 비판이 있어 왔다. 이 책의 저자들은 물론 성소수자 운동에도 우호적이지만, 이 책의 주된 목적은 성소수자 배제를 비판하는 데 있다기보다는 기존 여성운동이 취해 온 양성평등 담론의 한계를 밝히는 것이라 할 수 있다.
1 나는 이 책의 해제라고 할 수 있는 정희진의 글을 중심으로 논평하고자 한다.
정희진은 이 책의 목표를 “‘여성주의feminism=양성평등gender equality’이라는 오해에 대한 구체적 분석”이라고 말한다. 즉, “양성평등은 여성에게 유리한 담론인가? … 당대 한국 사회의 첨예한 젠더 이슈들은 양성평등 개념으로 해석 가능한가? 여성에게 저항 가능한 논리를 제공하고 있는가? 아니, 오히려 여성의 노력과 저항을 방해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고 물음을 던진다.정희진의 ‘양성평등’ 담론 비판
정희진은 ‘양성평등에 반대한다’라는 글에서 ‘양성’과 ‘평등’이라는 개념에 각각 의문을 제기하며 ‘양성평등’ 담론을 비판한다. ‘양성’ 개념은 세 가지 문제가 있다고 한다. 첫째, 남녀 내부의 차이를 못 보게 한다. 둘째, 트랜스젠더나 인터섹스(간성) 등 실제로 ‘양성’으로 포괄할 수 없는 성이 존재한다. 셋째, 남성과 여성을 대칭적 개념으로 잘못 인식하게 해 그 사이에 있는 위계를 가린다.(“양성은 두 개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여성성 하나만 존재한다. … 남성적인 것은 … 보편적인 것으로 간주되기 때문이다.”) 정희진은 또한 ‘평등’ 개념에도 의문을 제기하며 주류 여성운동의 한계를 지적한다. 남성 중심 사회에서 ‘양성평등’은 결국 “남성과 같아지는 것(‘높아지는 것’)”을 의미하는데, 기존의 여성운동이 지향한 ‘양성평등’은 결국 “여성의 이해를 실현한다기보다 공적 영역 진출, 사회 참여, 여성의 노동과 역할의 확대였”고 이는 사실상 “여성 해방이 아니라 이중 노동일 뿐”이었다고 비판한다. 그리고 “남성 집단 전체 대對 여성 집단 전체의 평등은 불가능하기 때문에 실제 평등 논의가 전개되면 소수 여성을 대상으로 한 동원이나 포섭 형태”를 띠고 “이러한 평등이 현실화되면 남성의 반발은 필연적이다.” 즉, 양성평등 담론은 평등은커녕 남성의 반격만 부르는 논리라는 것이다. 그래서 정희진은 남성 중심의 “평등의 기준”을 바꾸는 “발상의 전환”을 대안으로 제시하는데, 이것은 남성들이 ‘사적’ 영역으로 들어오는 것, 즉 육아가 “남성의 성 역할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뜻한다.
유물론 거부
정희진의 ‘양성평등’ 담론 비판을 검토하기 전에 먼저 정희진의 방법론을 살펴보겠다. 정희진의 기본 견해는 포스트모더니즘의 일종인 포스트식민주의에 바탕을 두고 있다. 양성평등 담론을 비판하는 정희진의 논리의 기본 전제는 크게 두 축으로 이뤄져 있다. 하나는 언어가 현실을 만든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권력자가 언어를 만든다는 것이다. 권력이 없는 여성은 언어를 갖고 있지 않다고 본다.
4 포스트모더니즘의 반反유물론을 뚜렷이 드러낸다. 그는 “세상의 모든 지식은 오해, 오식誤識, 편견, 고정관념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고 말한다. 5
포스트모더니즘의 기본 사상 하나가 객관적인 지식 또는 진리가 없다는 주장이다. 실재reality는 언어를 통해 매개되기 때문에 우리가 실재를 정말로 알 수는 없다는 것이다. 정희진도 “실재란 존재하지 않으며 모든 현실present은 특정한 위치position에서 언어를 만드는 권력에 의해 구성된 재현re/present”이라며6 생물학적 범주로서 남성과 여성은 실재하지 않고, 성별은 단지 남성 중심 사회의 규범일 뿐이라고 한다.
담론 밖에 존재하는 객관적 현실을 부정하며 담론을 중심으로 현실을 해석하는 것은 순전한 관념론이다. 정희진은 “성별을 포함해서 모든 차이는 이미 존재했던 것이 아니라 언어를 만드는 사람에 의해 규정된 것”이라고 주장한다. 이런 논리에 따르면 여성 차별의 원인은 사실상 “남성의 언어”가 된다. 정희진은 《페미니즘의 도전》에서 “언어는 차별의 결과가 아니라 차별의 시작이다. 약 5천 년 동안 남성이 재현 주체였고 여성은 재현 대상이었다”라고 주장한 바 있다.그런데 정희진은 오직 남성만 언어를 가질 수 있게 된 이유가 무엇인지는 설명하지 않는다. ‘남성 언어’가 어떻게 생겨났는지는 설명하지 않은 채, 남성이 권력을 가졌으니 사회의 언어도 남성 언어라고 가정하고 담론 해체에 몰두한다. 모순적이게도, 남성과 여성을 구별하는 것이 그저 담론일 뿐이라면서 글 전반에서 ‘남성 권력’의 실재성을 가정한 채 ‘남성 언어’가 현실을 구성하는 힘을 부각한다.
정희진의 논리에는 ‘권력자인 남성이 여성을 지배하기 위해 언어를 만들었다’는 가정이 깔려 있는데, 이런 견해는 포스트식민주의 페미니즘 고유의 주장이 아니라 급진주의 페미니스트들이 수십 년 전부터 펼쳐 온 흔한 생각이다.
8 언어는 처음에 인간들이 자신들의 환경을 통제·변화시키기 위해 집단적 행동(노동)을 하면서 서로 상호작용해야 할 필요와 필연성에서 생겨났다. 남성과 여성 모두 집단적 노동에 참가했기 때문에 남성만이 언어를 가질 수는 없었다.
남성이 언어를 만들었고 남성이 언어 사용 전반을 좌지우지해 성별로 언어 사용이 확연히 구분된다는 생각은, 언어가 사회에서 기본적으로 의사소통 기능을 한다는 점을 무시한다.또, 언어가 사회의 물질적 조건 자체를 만들어 내는 것은 아니며 언어가 사회 구성원들의 의식에 영향을 끼친다고 해서 그 영향이 결정적인 것은 아니다. 유물론적 관점에서 보자면, 외부의 물질적 조건과 사회적 관계들이 인간의 사고와 언어에 좀 더 큰 영향을 끼치는 가운데, 이 모든 요소들이 상호작용한다고 봐야 한다. 정희진과 같이 언어가 사회와 사람들의 의식을 좌지우지하는 것처럼 과대평가하면, 언어를 둘러싼 투쟁이 가장 중요한 투쟁이 돼 경제적·정치적 투쟁을 대체하고 만다. (이 점은 뒤에서 좀더 서술하겠다.)
생물학적 성도 “문화적 구성물”?
정희진이 남성과 여성의 생물학적 차이를 부정하는 것도 관념론적이다. 이는 일부 페미니즘에서 유행하는 견해인데, 주디스 버틀러 같은 퀴어 이론가들은 섹스(생물학적 성)와 젠더(사회적 성)의 구분을 없애고 섹스도 사회적·문화적 구성물일 뿐이라고 주장한다(사회적 구성주의). 정희진도 “남성과 여성은 문화적 구성물이며 규범의 산물이지 생물학적 분류가 아니”라고 말한다.
물론 인간의 성이 양성으로만 구성돼 있지는 않다. 하지만 간성이나 트랜스젠더 등의 존재가 곧 남성과 여성의 생물학적 차이가 없음을 뜻하지는 않는다. 또한 간성의 존재를 무시·차별하지 않더라도 그보다 훨씬 더 많은 수가 남성이나 여성의 염색체와 생식기를 가지고 태어난다는 점은 부인할 수 없다.
인간의 성행위가 사회적 영향을 받는다고 해서 인간 성행위의 모든 측면이 사회적으로 결정되는 것은 아니다. 인간의 다양한 행동들은 생물학의 직접적 결과가 아닐지라도 생물학의 제약을 받는다. 사람들이 엄청나게 다양한 음식을 먹는다고 해서 먹는 것의 자연적 필요가 사라지는 게 아니듯 말이다. 인간이 다양한 성행위를 해 왔고 그에 대한 태도가 사회마다 달랐지만, 어떤 사회든 무시할 수 없는 규모로 이성애적 섹스가 존재해 왔다. 이것은 인간이 하나의 종으로서 재생산을 해야 한다는 점과 관련 있다.
또, 성역할이 사회적으로 구성된다고 해서 성역할에 아무런 생물학적 속성이 없는 것은 아니다. 많은 인류학자들이 보고한, 체계적 차별이 존재하지 않았던 원시 공산주의 사회에서도 남녀의 신체적 차이로 인한 성별 분업은 존재했다(물론 이 분업은 엄격하지 않아 개인이 원하면 바꿀 수 있었다.) 여성과 남성의 생물학적 차이는 단지 관념이 아니라 물질적 실체가 있는 것이고, 이것이 성별 분업에 영향을 끼쳤다. 성별 분업은 주로 여성이 생물학적으로 임신과 출산이 가능한 몸을 가지고 있다는 것과 깊은 관련이 있었다. 아이를 임신하거나 젖을 물려야 하는 여성은 사냥(수렵)보다는 채집을 주로 담당하는 식으로 말이다.
그래서 가족이 계급사회에서 중요한 구실을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여성 차별의 물질적 기초를 이해하는 동시에, 그 기초 위에서 어떻게 성역할이 사회적으로 구성되는지도 이해해야 한다.
남성과 여성의 생물학적 차이를 인정하는 것이 곧 차별이나 억압, 편견을 정당화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사회적 구성주의’는 차이를 구별하는 관념이 차별과 억압을 낳는다고 보니, 엄연히 존재하는 객관적 차이조차 무시하는 듯하다.
그러나 성차별·성소수자 차별 관념은 단지 차이 구별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물질적 뿌리가 있다. 마르크스주의자들은 그 근원에 계급사회의 가족 제도가 있다고 분석해 왔다. 그리고 사회의 물질적 조건이 변화하면서 가족 제도도 변화를 겪어 왔고 가족과 성에 대한 관념에도 변화가 생겨났다. 오늘날 젊은 여성들은 더는 줄줄이 애를 낳고 평생 자식과 남편 뒷바라지 하는 데에 만족하려고 하지 않는다. 그러나 자본주의가 사라지지 않는 한, 노동력 재생산 제도로서 가족은 임금노동 착취를 뒷받침하며 여성·성소수자 차별을 지탱하는 핵심 제도로 남을 것이다.
모호한 권력 개념
9 등이므로 이들은 모두 ‘권력자’이기도 한 것이다.
정희진의 관념론은 실체가 모호한 권력 개념으로도 이어진다. 정희진은 유물론적 분석을 거부한 결과, 사회의 근본적 분할선이 계급이라는 점을 무시한다. 그리하여 권력이란 계급관계와 분리된 주관적이고 자의적인 개념이 된다. 정희진은 ‘권력자가 언어를 만든다’고 보는데, 언어를 만든 사람은 “백인, 남성, 중산층, 이성애자, 서울 사람, 젊고 건강한 사람”이런 주관적인 권력 개념은 푸코의 권력 개념과 유사하다. 푸코는 “권력은 어디에나 존재한다. … 권력은 제도나 구조의 문제가 아니”고 “모든 사회 관계에 스며들어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처럼 권력을 계급이라는 사회적 관계와 분리시키면 권력이 무엇으로부터 비롯했는지 알 수 없고 권력의 실체는 모호해진다. 예컨대 의사나 교사는 다른 사람들에게 일정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다. 이것은 권력인가, 아닌가? 나이가 많은 사람은 언제나 나이가 적은 사람에 대해 권력을 행사하는가?
정희진 식의 논리라면 성별, 나이, 출신 국가, 건강, 외모 등을 기준으로 누구나 권력자가 될 수도 있고 누구나 억압받는 사람이 될 수도 있게 된다.(정희진은 실제로 그렇게 생각한다.) 그러나 이런 주관적 권력 개념은 자본가, 국가 관료, 군 장성 같은 지배계급의 권력이 평범한 개인들 사이의 불평등과 같은 성격인 양 취급하게 만들어, 자본주의 사회의 경제적·사회적 불평등을 지탱하는 주범이 지배계급이라는 점을 가리는 구실을 한다. ‘남성 권력’ 역시 모호한 용어인데, 생물학적 남성이 실재하지 않는다면서 어떻게 ‘남성’의 권력이 생긴다는 것인지 알 수가 없다. 또, 남성이 단일하지 않다고 인정하면서도 계속해서 남성 집단이 공통된 ‘남성 권력’을 가지고 있다고 주장하는 것도 모순이다. 정희진은 머리말에서 자신(과 다른 필자들)이 정체성 정치를 넘어서는 여성주의를 추구한다고 썼지만, 이런 주관적 권력 개념 때문에 정체성 정치의 도덕주의를 재현할 위험이 곳곳에 엿보인다.
그러나 정희진도 때로 인정하듯이 남성은 단일한 집단이 아니다. 그 모두가 권력을 가지고 있지도 않다. 그 핵심적 차이는 계급에서 나온다. 자본가나 국가 관료와 노동계급 남성의 삶은 완전히 다르다. 노동계급 남성은 “남을 복종시키거나 지배할 수 있는 공인된 권리와 힘”(국어사전)인 권력은 물론, 자신의 임금을 얼마로 할지, 노동과정에서 어떤 구실을 할지, 해고가 될지 안 될지 등 자신의 삶을 통제할 수 있는 힘도 가지고 있지 않다. 반면, 자본가와 국가 관료(주로 남성이지만 여성도 소수 있다)는 수많은 사람들의 삶을 좌지우지하는 최저임금을 결정할 수 있고, 생산과 노동과정을 통제할 수 있고, 노동자를 해고할 수 있고, 군대와 경찰 등 합법적 폭력을 행사해 자신의 의지를 관철시킬 수 있다. 즉, 자본가와 국가 관료들이 진정한 권력을 휘두른다.
‘양성평등’ 요구는 해악적인가? 정희진의 주장처럼 ‘양성 평등 담론’은 불가능할 뿐 아니라 해악적이기만 한가? 양성평등기본법은 ‘양성평등’을 “성별에 따른 차별, 편견, 비하 및 폭력 없이 인권을 동등하게 보장받고 모든 영역에서 동등하게 참여하고 대우받는 것”으로 정의한다.
첫째, 여성 집단이 단일하지 않고 그 내 상당한 격차가 존재한다고 해서 낱낱의 개인들만 남는 것은 아니다. 사실 정말로 그렇다면 ‘여성주의’나 ‘여성운동’이 존재할 필요가 없을 것인데, 이 점은 여성 범주를 해체하려는 포스트구조주의 페미니즘이 겪는 딜레마이기도 하다.
그러나 차별받는 집단으로서의 여성이 존재하고(권력층 여성들도 노동계급 여성들에 비해 그 정도는 현격하지만 차별은 받는다), 특히 여성의 다수인 노동계급 여성들은 차별 때문에 같은 계급 남성에 비해 더 열악한 처지를 강요받는다. 소득이나 고용 안정성 등에서 남녀 격차가 뚜렷이 존재하고 여성들은 ‘일과 가정’이라는 이중 부담을 안고 있다. 따라서 남녀가 평등해야 한다는 사상, 요구, 운동은 정당하다.
진정한 문제는 어떤 평등을 추구해야 하며, 그것을 어떻게 이룰 것이냐이다. 여성해방 운동의 목적은 단지 남성의 조건과 똑같아지는 것에 머무를 수 없다. 자본주의에서는 계급 사회 구조 때문에 남성 내에서조차 근본적 불평등이 해소될 수 없기 때문이다. 주류 페미니즘의 한계는 ‘양성평등 담론’을 추구해서가 아니라 계급 사회 구조를 건드리지 않은 채 자본주의 내에서 평등을 추구한 데서 연유한다.(자세한 내용은 아래에서 자세히 서술하겠다.)
12 이런 주장은 일면적인데, 정희진이 남성과 여성의 이해관계를 대립적으로만 이해하고 있기 때문인 듯하다.(“현실에서 평등은 남녀 모두에게 윈윈 게임이 될 수 없다.”)
둘째, 정희진은 양성평등 담론이 불가능하다고 보는 데서 더 나아가 이것이 “남성의 반발을 필연적”으로 불러와 “갈등, 대립의 논리일 수밖에 없다”고 주장한다.많은 페미니스트들은 남성이 여성에 견줘 상대적으로 나은 처지에 있다는 점을 보고 남성들이 “권력과 특권”을 가지고 있고 평등을 위해서 “권력과 특권”을 내려놓아야 한다고 본다. 이것은 노동계급 남성이 희생해서 여성의 삶을 개선해야 한다는 논리로 이어질 수 있고, 불필요한 “갈등과 대립”을 낳을 수 있다.
그러나 양성평등 확대의 방식이 부유층과 권력자들의 손아귀에서 개혁을 쟁취하는 것이라면 그것은 노동계급 여성과 남성 모두에게 이롭다. 예컨대 여성의 저임금은 남성들에게도 임금 인상을 제한하는 압력으로 작용한다. 또한, 어느 한 성별 노동자의 임금 상승이 다른 성별에게도 이롭다. 실제로 여성과 남성 노동자의 임금은 동반 등락하는 경향을 보인다(1998~2008년 통계). 자본주의에서 여성 차별이 온존하고 있는 중요한 이유인 육아와 가사노동의 문제에서도, 두 성별 노동자의 이해관계는 근본적으로 일치한다. 자본주의는 노동계급 가족의 두 성별 모두에게 파괴적인 영향을 미치고 있고(여성은 육아 독박, 남성은 생계부양자 압박), 이 부담을 사회가 온전히 짊어지게끔 바꾸는 것은 여성과 남성 노동자 모두에게 득이다.
요컨대, 자본주의 내에서도 비록 완전하진 않더라도 양성평등을 확대하는 것은 중요하고, 그 방식은 아래로부터의 투쟁이어야 한다. 그리고 이 투쟁은 자본주의 체제에 근본적으로 도전하는 데로 나아가야 한다.
주류 여성운동의 한계에 대한 피상적 설명
정희진이 주류 여성운동의 한계를 ‘양성평등 담론’에서 비롯했다고 보는 것 역시 피상적인 이데올로기주의적 설명이다. 여성의 사회 상층부 진입(‘성 주류화 전략’)을 추구했던 주류 여성운동이 한계를 보인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여성운동은 1990년대에 여러 개혁 입법을 성취했고 2000년대에 호주제 폐지 등이 이뤄졌다. 하지만 여성 대중의 삶에 끼친 영향은 제한적이었고, 신자유주의 정책 때문에 노동계급 여성들의 삶은 악화되기도 했다. 남녀고용평등법에는 동일임금 동일노동이 명문화돼 있지만, 한국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중 남녀 임금격차가 가장 큰 나라다(64퍼센트). 정희진의 지적처럼 여성 노동자 상당수가 저임금과 불안정한 일자리에 있고, ‘일과 가정’이라는 이중 부담을 지고 있다.
그러나 주류 여성운동이 이런 현실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한 것을 그저 ‘양성평등’ 담론 때문으로 설명하는 것은 문제의 본질을 흐리는 것이다. 한국여성단체연합이 주도한 여성운동의 최대 문제점은 신자유주의 정책으로 노동계급을 공격한 김대중·노무현 정부를 지지해 진보 진영 내에서 정치적 혼란을 자아내고, 페미니스트 각료 탄생이 여성해방을 성취할 동력인 양 주장하며 대중의 수동성을 부추겼다는 데 있다. 소수 여성주의자들이 기존 체제로 “포섭”된 것은 정희진의 서술처럼 (그가 보기에 부적절한) ‘평등’이라는 목표를 추구해서가 아니라, 여성 차별과 경제적 착취를 분리하고 자본주의적 국가기구를 활용할 수 있다고 본 그들의 개혁주의 노선과 출세 지향적인 중간계급적 배경에서 비롯한 것이다.
여성 차별은 소수 여성이 자본주의 국가기구에 들어간다고 해서 뿌리 뽑을 수 있는 게 아니다. 여성 차별은 자본주의 사회의 구조와 작동방식에 아로새겨져 있다. 예컨대 자본주의는 노동력 재생산(양육, 가사) 부담을 개별 가족, 특히 그 안의 여성들에게 떠넘긴다. 노동력 재생산은 사회 전체에서 필요한 일이지만, 이윤 제일주의 논리 때문에 자본주의는 재생산 부담을 충분히 사회화하려고 하지 않는다. 가족 제도의 이런 구실 때문에 지배자들은 오늘날 현실과도 맞지 않는 ‘가정 돌봄자 여성, 부양자 남성’이라는 모델을 끊임없이 부추긴다. 이는 여성 노동자들에게 저임금과 불안정한 일자리를 강요하는 데 이용된다. 여성의 몸이 쉽게 상품으로 취급되는 것도 자본주의 이윤 논리가 근본에서 작용한다. 자본주의는 인간의 성을 인간 본연의 감정과 떼어 내 사고파는 상품으로 만들고, 이 과정에서 여성의 신체에 대한 광범한 비하가 벌어진다.
자본주의에서 여성의 평등과 해방은 이루어질 수 없다. 자본주의 국가는 자본가 계급의 이해관계와 긴밀하게 얽혀 있어서, 자본주의 국가기구에 들어간 여성주의자들은 노동계급을 공격하는 정책에 이래저래 동조하는 모순에 처하게 된다.
그런데 정희진도 주류 여성주의자들처럼 자본주의 체제와 여성 차별의 구조적 관계를 무시하고, 자본주의 국가기구를 ‘남성의 국가’로 부르며 그 계급적 성격을 무시한다. 주류 여성운동의 약점을 ‘양성평등 담론’이라는 이데올로기로 환원하며 아주 협소한 대안만 제시하는 이유다.
가령 정희진은 ‘남성 중심적 담론의 변화를 위해 남성이 육아를 맡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남녀 간의 가사·육아 분담이야 당연히 필요하지만, 정희진은 “남성도 여성이 겪는 육아와 모성으로 인한 죄의식, 스트레스, 자기 분열, 커리어 포기 경험을 겪어야” 사회가 근본적으로 바뀔 수 있다는 식으로 남성의 육아 분담을 강조한다. “국가는 남성을 ‘따라갈’ 뿐”이므로 남성이 육아를 맡기 전까지는 가사노동의 사회화 요구도 쓸모 없다고 주장한다.
이렇게 자본주의에서 가족 제도가 하는 경제적·이데올로기적 구실을 보지 못하고 협소하게 가족 내부의 개인적 관계들에 초점을 맞추면 육아를 분담하지 않는 남성 개개인들을 비난하는 데서 그치기 쉽다. 그러나 가사노동의 사회화 요구조차 ‘진부하다’며 비판하는 것은 육아의 사회적 지원을 절실히 원하는 노동계급 여성들의 바람과는 동떨어져 있고 국가의 육아 지원 부담을 줄이는 데 이용되기에 딱 좋은 얘기다.
이명박·박근혜 정부가 매해 ‘무상보육’ 예산 문제로 앓는 소리를 하며 책임을 떠넘기고 그 알량한 약속마저 내팽개친 것은, 남성 대중이 육아로 고통받고 있지 않아서가 아니다. 질 좋고 값싼 국·공립 보육 시설을 제공하는 것이 그야말로 돈이 많이 들어서다. 충분한 복지 비용을 마련하려면 기업주들에게 더 많은 세금을 걷어야 하는데 자본주의 국가는 기업의 이윤을 한사코 침해하지 않으려 한다. 이것은 자본주의 국가가 단지 남성의 이익을 사후적으로 반영해서가 아니라, 국가의 계급적 성격 때문이다. 또한, 계급을 초월한 남성 집단 전체의 이익이라는 것도 허상이다.
따라서 육아를 사회가 책임지게 하려면 남성 대중이 여성과 똑같이 고통받아야 하는 것이 아니라, 육아의 사회화에 공통의 이해관계가 있는 남녀 노동계급이 함께 싸워야 한다. 이것이 ‘모든 남성이 양심의 의무를 지고 최소한 10년 이상은 집에서 아이를 키우는 것’보다 훨씬 더 현실적이고 효과적인 대안이다.
대안: 해체? 해방?
여성 차별이 사라지고 평등과 성적 자유가 보장되는 사회를 상상하는 것은 가슴 뛰는 일이다. 1917년 러시아 혁명부터 2011년 아랍 혁명까지 혁명적 시기에는 언제나 여성 차별과 성적 억압, 그리고 이를 지탱하는 낡은 고정관념이 도전받고 해방의 가능성이 열렸다. 여성·성소수자 해방은 인류가 쟁취할 수 있고, 쟁취해야 하는 과제다. 이를 위해서는 자본주의 체제에 대한 근본적 도전이 필요하다.
그러나 포스트모더니즘 조류는 우리가 이 사회를 전체적으로 이해하고 체제 전체를 변혁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부정한다. 인간은 경합하는 담론 안에서 세계를 부분적으로만 이해할 수 있을 뿐이고, 주류 담론에 균열을 내는 부분적·파편적 저항만 가능하다고 여긴다.
13 《양성평등에 반대한다》의 다른 저자인 루인 역시 “권력이 작동하는 방식과 권력 작동을 통해 발생하는 배제에 도전하고 이를 폭로하는 작업”을 중요한 실천으로 삼는 듯한데, 이는 많은 퀴어 이론가들의 특성이기도 하다. 이 책의 글들은 모두 이런 ‘담론 해체’의 관점에서 특정 이슈들을 다룬다.
정희진은 다른 글에서 사회운동의 역할이란 “이분법이 정해지고 행사되는 권력의 위치를 찾아내는 것 … A와 A가 아닌 것 외에 G, H, J, ▷, ≒, ∞, ∑, □, ▤ … 을 생각해 내는 것”이라고 말한다.이렇게 포스트모더니즘에서는 현실 세계가 아니라 담론(언어)이 주된 투쟁의 대상이 된다. 경제적·정치적 투쟁은 무시하고 이데올로기 투쟁을 특권화하는 포스트모더니즘 조류가 학계에 널리 수용되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그러나 이렇게 물질적 조건을 바꾸기 위한 투쟁을 무시하고 담론 해체에만 주력하는 방식으로는 주류 이데올로기조차 실제로 ‘해체’하지 못한다. 마르크스의 말을 다시 한 번 인용하면, “지배계급의 사상은 항상 지배적인 사상이다. 즉, 사회의 물질적 힘을 지배하는 계급은 동시에 지적인 힘도 지배한다. … 물질적 생산수단을 소유하고 마음대로 이용하는 계급은 동시에 정신적 생산수단도 통제한다. 그러므로 일반적으로 말해, 정신적 생산수단이 없는 계급의 사상은 지배계급의 사상에 종속된다.”
따라서 주류 이데올로기에 대한 완전한 극복은 결국 지배계급의 경제적·정치적 권력을 분쇄해야 가능하다. 그리고 노동계급이 낡은 관념과 단절하기 시작하는 것은 노동운동과 분리된 지식인들의 훈계에 의해서가 아니라, 자본주의 체제가 낳는 온갖 참상에 맞서 노동계급이 성별, 성적 지향, 국적 차이 등을 뛰어넘어 계급적으로 단결해 투쟁하는 과정에서 생겨나는 것이다. 혁명가들은 이 과정에 개입해 노동계급의 단결을 성취할 수 있는 전략과 전술을 제시함으로써 노동계급의 의식 발전을 도울 수 있다.
그러나 포스트구조주의, 포스트식민주의 등과 같은 포스트모더니즘 조류는 노동계급이 자본주의를 변혁할 수 있다는 사상에 적대적이다. 게다가 저항하는 주체들조차 세계를 전체적으로 이해할 수 없고 특정 담론의 수행자에 불과하다고 보는 포스트모더니즘 사상으로는 해방은 물론 현저한 사회 변화조차 이룰 수 없다. 이 책을 포함한 정희진의 여러 글에서 이런 비관주의가 곳곳에 묻어나는 까닭이다. “가부장제는 공기와 같다. 저항하면 진공 상태와 같이 되어서 질식사하게 된다. 여성주의는 남성중심주의에 반대하는 저항의 언어라기보다는 기존의 인식을 상대화하고자 노력하는 협상의 언어다. … 이런 것들[“학벌주의, 외모주의, 자본주의의 비인간성”을 말함]은 성찰해야 할 문젯거리지, 극복이나 청산해야 할 영역이 아니다.”
오늘날 성차별에 분노하고 저항에 나서기 시작한 새 세대들은 이런 비관적 인식 대신 해방의 가능성에 주목하기를 바란다. 역사유물론적 관점에서 여성·성소수자 해방의 전망을 보여 주는 마르크스주의가 그 길잡이 구실을 할 수 있다.
주
- 정희진 엮음 2017, p10. ↩
- 정희진 엮음 2017, pp53-54. ↩
- 정희진은 다른 글(정희진 2015a)에서 “남성의 삶과 기존 언어는 일치하지만 … 여성의 삶을 드러내는 언어는 없다. … 언어를 갖지 못한다는 것은 타인이 나를 규정하는 피식민 상태를 살아간다는 것”이라고 말한다. ↩
- 정희진 엮음 2017, p26. ↩
- 정희진 엮음 2017, p29. ↩
- 정희진 엮음 2017, p30. ↩
- 정희진 2005, p80. ↩
- 정희진은 “언어의 문법 자체가 성에 따라 나뉘어져 있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성에 따라 주로 쓰는 말이 다르고, 같은 말도 각자 생각하는 의미가 다르[다]”(정희진 2010)고 주장한다. ↩
- 정희진 엮음 2017, p33. ↩
- 최근 정희진이 〈경향신문〉에 기고한 ‘더러운 잠’ 비평에서 “진보든 보수든 남성은 폭력의 주체”라고 주장한 것이나 여러 강연에서 “한국 남성은 성폭력을 배설쯤으로 생각”한다며 모든 남성을 (잠재적) 강간범으로 취급한 것은 배타적인 정체성 정치의 전형적 사례다. 정희진의 성별 이분법 비판은 이렇듯 일관성이 없으며 그의 글들에는 포스트식민주의와 양성 분리적인 급진주의 페미니즘이 절충돼 있다. ↩
- 2014년 이 법이 논의됐을 때 명칭을 ‘양성평등기본법’으로 할 것이냐, ‘성평등기본법’으로 할 것이냐가 논쟁이 됐다. 전자를 지지한 쪽은 보수적 여성단체들이나 새누리당 의원들이었는데, 성소수자를 배제하려는 맥락이 있었다. 이 문제는 이 글의 논점이 아니기 때문에 별도로 다루지 않는다. ↩
- 정희진 엮음 2017, p47. ↩
- 정희진 2015b, p120. ↩
- 몰리뉴 2013에서 재인용. ↩
- 정희진 2015b, p116. ↩
참고 문헌
몰리뉴, 존 2013, ‘사람들의 의식은 어떻게 급진적으로 바뀌는가?’ 〈레프트21〉 104호. https://wspaper.org/article/13017
정희진 2005, 《페미니즘의 도전》, 교양인.
정희진 2010, ‘국가에 대한 명예훼손 ― 이 시대 소수자가 만들어지는 방식’, 《다시, 민주주의를 말한다》, 도정일 외, 휴머니스트.
정희진 2015a, ‘언어가 성별을 만든다’, 《여성 혐오가 어쨌다구?》, 윤보라 외, 현실문화.
정희진 2015b, ’”남성 혐오”는 가능한가: 여성주의와 양성평등’, 《인물과 사상》 2015년 10월호.
정희진 엮음 2017, 《양성평등에 반대한다》, 교양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