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Ⅰ: 페미니즘과 성 해방
《성의 변증법》
페미니즘의 고전 《성의 변증법》의 의의와 한계 *
에서 다음과 같이 썼다.
페미니즘의 고전인 슐라미스 파이어스톤의 《성의 변증법》이 시의적절한 때에 재출간됐다. 지금 새 세대의 젊은 여성들이 페미니즘 쟁점에 관심을 보이며 새로운 페미니즘 물결이 전 세계를 휩쓸고 있기 때문이다. 이 책은 1970년에 처음 출간됐다. 수전 팔루디는 2013년 《뉴요커》에 기고한 파이어스톤 조사弔辭《성의 변증법》은 하나의 서평에서조차 칭찬과 혹평을 동시에 듣는다. 《타임》은 이 책의 저자를 “명석하지만” “터무니 없는” 인물이라고 평했다. 이 책이 베스트셀러 목록에 올랐는데도 토크쇼에서는 조롱이 쏟아졌고, ‘여성에 대한 작은 불온한 책’이라고 했다. 하지만 이 책은 불온하지 않은 미국 여성들의 세계관을 바꿨다. 《성의 변증법》과 같은 해에 출판된 《성 정치학》의 저자 케이트 밀렛은 나에게 이렇게 말했다. “나는 노골적인 남성 우월주의자들과 대결했지만 슐리는 모두와 대결하고 있었다. 그녀는 훨씬 위험한 일을 하고 있었다.”
파이어스톤은 성차별의 성격과 그 기원을 심도 깊게 분석했다. ‘페미니스트 혁명’의 가능성과 그 성취 방안을 주장하기 위해서였다. 파이어스톤은 자신의 분석이 변증법이라는 마르크스주의적 방법을 기초로 했을 뿐 아니라 프로이트의 이론까지 활용해 업데이트했다고 주장했다. 또한 이 책은 아동 차별, 인종차별, 그리고 가능한 미래 사회까지 다루고 있다. 파이어스톤은 독자들로 하여금 심사숙고를 하게 하는 뛰어난 통찰력을 보여 주는데, 특히 아동에 관한 장이 그렇다. 이 책은 급진주의 페미니즘에 크게 이바지했고, 오늘날에도 여전히 영향력이 크다. 오늘날의 주류 자유주의 페미니즘에 견줘 파이어스톤의 연구는 ‘가부장제’와 자본주의의 완전한 파괴를 주장한다는 면에서 청량감을 준다. 하지만 섹슈얼리티에 관한 몇몇 개념이 꽤나 큰 혼란을 주는 등 그녀의 방법론과 결론에는 심각한 약점이 있다.
2 슐라미스 파이어스톤은 그런 여성 중 한 명이었다. 파이어스톤은 22살이었던 1967년에 시카고에서 열린 ‘새 정치를 위한 전국협의회’에 3 여성 권리에 관한 결의안을 제출했다. 하지만 협의회 의장은 말 그대로 파이어스톤의 “머리를 가볍게 쓰다듬고는” 이 제안을 완전히 무시했다. 4 몇 년 뒤 파이어스톤은 연설을 하다가 성차별적이고 모욕적인 아우성을 들으며 연단에서 내려와야 했다. 그러므로 파이어스톤이 좌파에게 등을 돌리고 레드스타킹the Redstockings이나 뉴욕급진여성New York Radical Women 같은 급진주의 페미니스트 조직들의 공동 창립자로 나선 것은 전혀 놀랍지 않다. 당시 좌파는 혀를 내두르게 하는 못된 태도를 보이고 페미니즘의 쟁점들을 잘 다루지 못하는 무능을 보였다. 이를 보며 파이어스톤은 좌파 사상들과 마르크스주의를 거부했다. 그래서 나는 파이어스톤의 연구에 꽤나 혹독한 비판을 제기하겠지만, 그녀 자신, 그리고 그녀가 이 책의 주장으로 이끌리게 된 과정에는 충분히 공감한다.
이 책을 본격적으로 평가하기 전에 파이어스톤이 이 책을 쓰던 시기의 맥락을 밝히는 것이 중요하겠다. 1960년대의 사회운동들은 미국에서 여성 단체들, 흑인 시민평등권 운동 단체, 극좌파 조직의 성장을 고무했다. 이 ‘신좌파’에는 학생 단체, 아나키스트, 히피 등 온갖 조류가 포함돼 있었는데, 그 지도자들의 다수는 마오쩌둥주의의 영향을 받았다. 하지만 1970년쯤 기성 체제에 반대하는 동맹 세력이 분열하기 시작했다. 일부는 테러리즘에 빠져들었고(‘웨더먼’이 그렇다) 다른 일부는 우경화해 민주당으로 이동했다. ‘신좌파’에 참여하던 많은 젊은 여성들이 끔찍한 성차별에 맞섰다. 그 여성들이 [운동 내에서 나타난] 성차별적 행태를 문제 삼기 시작하자, 그들은 무시당하거나 비난받았다.파이어스톤의 방법
이 책의 첫 부분에서 파이어스톤은 변증법적 방법을 이용하는 마르크스의 전통에 선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곧바로 마르크스 변증법의 토대인 역사 유물론을 거부해 버린다. 역사 유물론은 마르크스주의의 토대인데, 세계가 인간의 머릿속 바깥에 실제로 존재하며(유물론) 사회가 역사를 통해 변화하고 발전한다고 이해한다. 파이어스톤은 이 점을 일부 인정할 뿐 아니라 이 책의 어떤 부분에서는 강력히 주장하기까지 한다. 하지만 조야한 생물학적 결정론과 프로이트의 관념론을 뒤섞은 관점을 옹호하며 역사 유물론을 거부한다. 그녀는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우리는 더욱 큰 문제, 기록된 역사를 넘어서 동물계 그 자체로 거슬러 올라가는 차별의 문제를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분석을 만들어 내는 데 있어 우리는 마르크스와 엥겔스로부터 많은 것을 배울 수 있다. 여성에 대한 그들의 문자화된 견해가 아니라 ─ 그들은 차별받는 계급으로서 여성의 상황에 대해서는 거의 아는 바가 없었고, 그것이 경제와 겹치는 부분에서만 인식하였다 ─ 오히려 그들의 분석 방법이다.
6 여기서 그녀는 역사 유물론의 분석 방법을 옹호하지만 곧장 “음과 양의 구분은 모든 문화, 역사, 경제, 자연 그 자체에 스며들어 있다. 그러므로 근대의 서구식 성차별은 그저 가장 최근의 한 단면에 불과하다”고 말하며 7 완전히 상반된 주장을 편다. 파이어스톤은 역사와 차별의 역사적 전개 과정을 살펴봐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이내 성차별은 역사적인 것이 아니라 오히려 생물학적인 것이며 심지어 동물계에도 존재하므로 역사를 살펴본다고 그것을 설명할 수는 없다고 힘주어 강조한다.
파이어스톤은 어느 문장에서 이렇게 주장한다. “상황을 변화시키기 위한 행동에 앞서 우리는 성차별주의가 어떻게 생겨났으며 어떻게 진화되어 왔고 어떤 제도들을 통하여 현재 작동하는지를 알아야만 한다. 엥겔스의 말처럼 (우리는 반드시) 갈등을 종식시킬 수단을 만들어 냈던 조건들 속에서 발견하기 위하여 대립이 야기된 역사적인 사건들의 연쇄를 상세히 살펴봐야만 한다.”8 그녀는 책의 다른 곳에서는 초기 인류 사회에 대한 인류학 연구를 소홀히 여길 뿐 아니라 인간과 동물 사이의 차이도 무시한다. 인간에게는 사회적 성격이 있고 자연을 구성하고 변화시키는 능력이 있다는, 인간과 동물의 핵심적 차이 말이다.
파이어스톤은 엥겔스가 젠더의 위계화와 계급 사회 등장을 연결시키며 《가족, 사유재산, 국가의 기원》에서 발전시킨 이론을 전면 거부한다. 《성의 변증법》이 처음 출판된 이후로 엘리너 버크 리콕, 크리스틴 워드 게일리 등 인류학자들이 유의미한 조사연구를 수행해 엥겔스의 전반적 주장이 올바르다는 것을 입증했다. 아쉽게도 파이어스톤이 책을 쓸 당시에는 그 연구 성과들을 참고할 수 없었다. 그 대신 파이어스톤은 성차별은 남성과 여성의 생물학적 차이, 즉 아이를 낳을 수 있는 여성의 능력에서 비롯한다고 주장했다. “인간 가족의 생물학적 우연성들은 인류학적 궤변을 전부 뒤덮을 수 없다. 동물들이 교미하고 새끼를 낳고 새끼를 돌보는 것을 관찰한 사람은 누구라도 ‘문화적 상대성’ 노선을 받아들이기 어려울 것이다.”9 성차별을 몰역사적으로 이해하는 데로 이어지는 조야한 생물학적 결정론은 프로이트주의의 관념론 ─ 성적 억제에 의해 형성되는 인간의 정서와 심리가 사회의 권력 구조(와 나아가 차별)를 만들어 낸다는 이론 ─ 을 수반한다. 그녀의 생물학적 결정론은 책 전체에서 나타나는데, 특히 사랑, 문화, 과학을 다룰 때 두드러진다. 무엇보다 이렇게 주장한다. “남성들은 사랑할 수 없다.(남성호르몬 때문에?? 여성은 전통적으로 남성에게서 감정적 허약함을 기대하고 받아들인다. 그러나 남성은 여성의 감정적 허약함을 참을 수 없는 것으로 여길 것이다.)” 10 이렇게도 주장한다. “우리는 논의할 만한 가치가 있는 여성과 과학의 관계는 거의 발견할 수 없었는데,” 11 그것은 “과학자의 인격은 연구에서 제외되어야 한다고 분명하게 요구하는 경험적 방법론” 12 때문이다. 파이어스톤은 여성이 정서에 더 민감하고 그래서 ‘냉정한’ 과학적 방법을 사용할 수 없기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여성 과학자들이 사실상 ‘존재하지 않는다’는 그녀의 첫 번째 가정은 틀렸다. 핵분열을 발명한 마리 퀴리나 리제 마이트너처럼 특별히 재능 있는 여성 과학자 사례를 보기만 해도 알 수 있다. 두 번째 주장은 차별의 생물학적 기원에 대한 그녀의 이론에서 도출된 것인데, 최근의 좀더 흔한 표현으로는 ‘화성에서 온 남자, 금성에서 온 여자’가 있다. 파이어스톤이나 실제 대부분의 여성 혐오론자들은 젠더 역할이 사회보다는 생물학이나 호르몬의 결과라고 주장한다.
나는 파이어스톤이 역사 유물론의 역사적 측면을 거부한다는 점을 앞에서 지적했는데, 다음 문장은 그녀가 유물론적 측면도 거부한다는 사실을 보여 준다. “경제에서 직접 생겨나지 않는 현실의 단계가 있는 것이다. … 현실이 성심리적이라는 … [단계 말이다.]”13 적어도 이 말은 이 책이 생기를 되찾게 하는 희망과 가능성을 제공한다. 그러면 페미니스트 혁명과 미래 사회에 대한 그녀의 전망을 다루겠다.
이와 같은 생물학적 결정론(프로이트의 관념론과 결합된)은 차별을 없앨 가능성을 고려할 때 흔히 비관론으로 나아갈 수 있다. 차별이 생물학에서 비롯한다면 자유를 얻기 위해서는 우리의 생물학을 바꿔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파이어스톤은 “페미니스트 혁명을 위한 전제조건이 존재한다. 실제로 상황이 그러한 혁명을 요구하기 시작하고 있다”고 주장한다.여성 운동의 역사
14 그런 다음 다시 결혼이 대중화되던 ‘포효하는 1920년대’의 에로티시즘에서 1960년대에 이르는 시기의 전쟁 노력과 공장의 여성 등 운동의 역사를 간략하게 다룬다. 15 그러나 사건들을 꽤 흥미롭게 묘사하는 데서 두드러지게 놓친 것이 있다. 바로 계급투쟁이다. 파이어스톤은 성차별과 경제를 분리시키려 하다가 노동계급 투쟁, 노동계급 투쟁이 여성운동에 미친 영향을 완전히 빠트린다. 그녀는 여성의 투표권이 제1차세계대전을 뒤이은 노동계급 혁명과 반란의 시기가 여성운동과 함께 이룬 결과로 보기보다는 급진주의 페미니스트들의 개입이 이룬 것으로 본다. 그녀가 러시아 혁명 직후 일어난 여성의 삶의 거대한 변화에 대해 언급한 유일한 말은 다음과 같다. “그 당시 러시아는 가족을 없애는 실험을 하고 있었다.” 16 하지만 그 ‘실험’을 역사상 처음으로 가능케 한 노동계급 혁명에 대해서는 한마디도 말하지 않는다.
파이어스톤의 책은 페미니즘, 섹슈얼리티, 차별을 둘러싼 광범한 쟁점을 다룬다. 여성운동의 역사와 여성운동의 다양한 요소도 개략적으로 설명한다. 그녀는 여성운동의 역사 전체에서 나타나는 여러 보수적 페미니스트들을 올바르게 비판하면서, “성 역할로부터의 해방이나 가족의 가치에 대한 급진적 질문보다는 주어진 체제 내에서의 법적·경제적인 남성과의 평등을 강조”하는 것이 눈앞의 문제에 관한 실질적 결과를 획득하는 데서도 소용 없을 뿐 아니라 문제의 본질에도 접근하지 못할 것이라고 지적한다. 더 나아가 파이어스톤은 급진주의 페미니스트들이 전투적 행동에 참가해 여성 투표권을 쟁취하는 등 초기의 선거권운동이 어떻게 그들의 목표를 달성했는지를 개략적으로 설명한다.프로이트주의
프로이트와 프로이트주의를 다룬 3장은 이 책에서 가장 중요하고 가장 문제가 많은 부분이다. 3장에서 파이어스톤은 성차별을 이해하는 자신의 주요한 이론적 틀을 개괄적으로 설명한다. ‘가부장제적 가족’과 그로부터 생겨나는 성차별이 그것이다. 그녀는 프로이트의 아동기 오이디푸스콤플렉스/엘렉트라콤플렉스 이론을 차용해 성차별을 설명한다.
17 (‘오이디푸스콤플렉스’라는 말은 오이디푸스가 자기 아버지를 죽이고 어머니와 결혼한다는 내용의 고대 그리스 신화에서 생겨난 것이다.) 다른 한편 엘렉트라콤플렉스는 여자 아이와 관련 있다. 여자 아이가 처음에는 어머니에게 일체감을 느끼지만 곧 아버지에 대한 성적 욕망을 발전시키고 그와 함께 아버지의 자유를 갈망하지만, 끝내는 자신의 성적 욕망을 억제하면서 어머니와 함께 그들의 열등한 지위를 받아들이게 된다는 것이다.
오이디푸스콤플렉스는 기본적으로 남자 아이와 관련 있다. 남자 아이는 어머니에게 첫 번째 충성(과 일체감)을 보내면서 그녀와 차별(아버지에 의한)을 공유하고 어머니(가장 가까운 여성)에 대한 성적 욕망을 발전시키지만 이를 억누를 수밖에 없으며, 어른이 되면서는 어머니와 공유하던 차별은 내던져 버리고 어머니(와 모든 여성)의 열등감을 경멸하고 아버지(남자)의 억압자 역할을 본받게 된다.18 이 말에 그녀의 진정한 견해가 분명하게 제시되는지 아닌지와는 무관하게 동성애가 사회에서 어떻게 그리고 왜 비하당했고 정도는 덜하지만 현재에도 여전히 비하당하는지를 보여 주는 것이 그녀의 의도였으리라고 볼 수도 있다. 그런데 그녀는 계속해서 이렇게 말한다. “남성의 동성애는 아이가 다섯 살이나 여섯 살 때 ‘어머니 중심’으로부터 ‘아버지 중심’으로 이행하는 것을 거부함으로써 생길 수도 있는데, 이는 종종 어머니에 대한 진정한 사랑과 아버지에 대한 경멸에서 발생한다.” 19 이 말 뒤에 그녀는 또 이렇게 쓴다. “우리 시대의 동성애자들은 가족에서 발전한 왜곡된 성적 제도의 극단적인 희생자들일 뿐이다.” 20 바로 이 문장에 그녀의 견해가 잘 드러나 있는데, 그 논리적 결론은 다음과 같다: 동성애는 가족 내 이런 성차별의 ‘불발’의 결과이므로 ‘가부장제’ 가족의 파괴와 페미니스트 혁명에 뒤이어 동성애도 사라질 것이다. 다른 문장도 이를 확인해 준다. “… 근친상간 금기와 그것의 결과물인 오이디푸스콤플렉스 및 엘렉트라콤플렉스, 그리고 그들에게 공통적인 실패인 성적 기능 이상, 또는 심한 경우의 성적 도착이 그것이었다.” 21 동성애를 ‘희생자들’, ‘성적 기능 이상’, ‘성적 도착’ 등으로 묘사하는 그녀의 표현은 동성애 혐오 발언이라 할 수밖에 없고, 그 결론도 마찬가지다.
이 이론은 사회에 기원을 두고 있는 것을 가족 내 개인의 경험을 통해 설명하고자 한다는 점에서 문제가 있다. 더욱이 이 이론은 동성애와 관련해 혼란을 자아내는 결론을 내린다. 파이어스톤은 이렇게 주장한다. “동성애는 마땅히 억압해야 하는 것을 ‘받아들이지’ 않을 때에만 생긴다는 것이다. 즉, 철저하게 억압되는 대신 개인으로 하여금 사회에서 적어도 기능할 수 있게는 하면서, 개인의 성적 관계나 정신 전체까지도 심각하게 불구화하면서 표면적으로 남아 있다는 것이다.”3장에서 그녀는 주로 빅토리아 시기부터 최근까지의 성적 억제의 근저에 놓인 이유를 분명하게 밝히고자 한다. 그런데 그런 억제는 대부분 오늘날 사라졌(고 그 대신 성의 상품화로 대체됐)다. 그러나 다시 한번 몰역사적 방법과 프로이트주의 때문에 그녀는 차별의 기원을 자본주의 체제의 필요에 의해 형성된 사회 구조로서 가족에서 찾는 것이 아니라 개인 심리에서 찾고, 그래서 성차별에 대해 혼란을 크게 일으키며 결국에는 쓸모 없는 분석으로 나아간다.
동성애 비하와 범죄화를 포함해 성차별에 대한 마르크스주의의 설명은 자본주의에서 현재와 미래 세대 노동자들의 재생산이 이뤄지는 주요 장소로서 가족의 구실에 초점을 맞춘다. 산업화를 뒤이은 19세기에 노동계급 가족은 바뀌기 시작했다. 여성과 아이들이 공장에서 일을 했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유아 사망률이 높아지고, 평균수명이 극도로 낮아지고, 젊은 남녀가 공장에서 집단적으로 일하며 ‘전통적’ 가족 구조가 허물어지는 상황이 초래됐다. 안정적 사회 구조를 구축하고 미래의 노동력을 확보하기 위해 여성과 아동을 공장에서 내보내는 방안으로서 ‘가족 임금’이 도입됐다. 가족 임금은 전통적 성 역할, 즉 여성은 가정주부로서 수동적이고 아이를 기르는 역할을 하고, 남성은 공격적이고 적극적인 역할을 한다는 신화와 이로부터 생겨나는 지배계급의 성차별 이데올로기를 강화하는 목적에도 부응했다. 오늘날에는 동성 부모나 한부모 가정이 늘어나는 등 가족 형태가 바뀌는데도 가족은 여전히 다음 세대 노동자를 가능한 한 가장 값싸게 생산하는 목적에 이바지한다. 제2차세계대전 이후의 호황처럼 특수한 경제 발전기에야 가족의 구실과 관련한 변화가 조금 있었다. 무상 보육 시설이나 무상 공공 시설의 설치 같은 것 말이다. 하지만 ‘결혼, 2.5명의 자녀, 대출 받아 구입한 주택’이라는 이데올로기는 여전히 우리 모두(동성 커플을 포함해)가 추구해야 할 규범이다. 파이어스톤은 올바르게도 이렇게 지적했다. “오늘날 분리된 역할에 기반한 이러한 계약은 감정에 의해 위장되어 왔기 때문에 수백만의 신혼부부들이나 결혼한 지 오래된 대부분의 부부들조차 전혀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
하지만 마르크스주의자들은 가족이 노동자들에게 위안의 공간이 될 수도 있음을 이해한다. 가족은 남녀 노동자들이 자신의 삶을 통제한다는 느낌을 조금이나마 느낄 수 있는 유일한 장소이다. 작업장이라는 공적 생활에서는 이런 통제력을 박탈당하기 때문에 가족이라는 사적 생활에서라도 통제력을 가지고자 하는 것이다. 하지만 불행히도 가족은 찬양 신화대로만 유지될 수는 없다. 마르크스가 묘사했듯이 가족은 ‘천국이자 지옥’이다.
아동기
23 그녀는 근대 가족의 아동이 과거와는 다른 방식으로 차별당한다고 주장한다. 게다가 그녀는 아동이라는 개념이 매우 최근까지도 존재하지 않았다고 주장한다. 그녀는 이렇게 썼다. “중세 시대에는 아동기와 같은 것이 없었다. 아이들에 대한 중세의 관점은 우리의 관점과 무척 달랐다.” 24 그리고 계속해서 이렇게 주장한다. “아이는 어른과 거의 구분되지 않았기 때문에 그들을 묘사하는 특별한 용어가 없었다. 그들은 봉건적 종속의 용어를 공유했다. …” 25
아동기를 다룬 4장은 매우 흥미롭다. 파이어스톤의 많은 지적과 주장들이 내게는 완전히 새롭기 때문이다. 파이어스톤은 다음과 같은 말로 시작한다. “… 우리는 아동해방을 논의하지 않고는 여성해방에 관해 논의할 수 없고, 그 반대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한다.” 아동이라는 개념이 존재하지 않은 이유는 두 가지였다고 한다. 첫째는 아동이 대체로 성인과 같은 노동(주로 가벼운 농사일)에 참여했기 때문이다. 둘째는 아동이 크게 확장된 가족의 일원으로서 성인과 똑같은 일상생활에 참여했으며, 그 결과 아동은 학교나 ‘보육 시설’에 분리되지 않았고, 자기 부모에 의해서만 양육되지도 않았다. 이 때문에 부모와 아동의 관계는 지금과 완전히 달랐다. “부모는 부모대로 아이들을 ‘필요’로 하지 않았다. 확실히 아이들은 애지중지 자라지 못했다. 부모들이 유아 사망률에 낙담한 데다, 다른 사람들의 아이들을 어른으로 키웠기 때문이다. 또한 끊임없는 방문객들, 친구들, 손님들뿐만 아니라 원래 하인들로 가득 찬 가구의 규모가 너무 커서 아이들이 부모에게 의존하거나 접촉하는 것조차도 제한되었다.”28 그래서 아동이라는 근대적 개념은 자본주의 발전과 함께 등장했다. 16세기와 17세기가 돼서야 아동복이 발명되고 ‘아이들을 위한 특별한 놀이’가 생겨났다. 그전에는 성인과 아동이 같은 놀이를 했다.
그래서 파이어스톤은 아동이라는 개념이 자연스러운 것은 아니라고 주장한다. “아동기라는 개념이 현대 가족의 부속물로 발달된 것이다. 아이들과 아동기를 묘사하는 용어들이 만들어졌고, … (그 후로 그런 용어는 예술과 생활방식으로 확장되었다. 아기들 말을 현대적인 세련된 언어로 표현한 온갖 유형이 다 있었다. 어떤 사람들은 그런 언어 없이는 말하지 못했는데, 특히 여자친구를 다 자란 아이처럼 취급할 때 사용하곤 했다.)”29 노동계급 자녀에게 기초 학교 교육을 제공하는 것은 공장 노동에 필요한 최소한의 기술을 가르치기 위해서뿐 아니라 미래의 노동인구에게 규율을 심어 주기 위해 꼭 필요한 것이 됐다. 파이어스톤은 이렇게 주장했다. “그 결과 그들(아이들)은 점점 더 오랜 기간 동안 경제적으로 의존하게 되었으며, 따라서 가족이 파괴되지 않고 존속되었다.” 30
게다가 공장에 결박된 노동계급이 성장하며 생산성 증대뿐 아니라 기계의 제대로 된 작동을 위해 일정 수준의 규율이 필요해졌다. 파이어스톤은 이렇게 주장했다. “‘훈육’은 배움이나 정보의 전수보다 훨씬 더 중요한 근대 학교 교육의 핵심이었다.”31 이 지적은 1970년대에도 맞지만 오늘날엔 더욱더 그렇다. 오늘날에는 상품의 측면에서 성인과 아동을 분리시키는 것에서 더 나아가, 장난감, 의복, 심지어 사탕까지도 성별로 달리 만들어 아이들을 성별로 또 분리시키는 일이 벌어진다. 파이어스톤은 상품 물신성을 언급하지만 그것을 설명하지는 않는다. 그것을 이윤 증대를 위해 끊임없이 새로운 소비자 시장을 필요로 하는 자본주의 체제와 연결시키지도 않는다.
바로 앞의 인용문에서도 나타나듯이, 파이어스톤은 여성 차별과 아동 차별의 흥미로운 유사성을 지적하며 성차별적 언어 속에서 여성이 아동인 것처럼 무시당한다고 주장한다. 나중에 그녀는 이렇게도 주장한다. “사이비 아동해방은 사이비 여성해방에 그대로 대응한다. … 비록 우리가 모든 피상적인 억압의 징후들을 폐지했다고는 해도 아동기의 신화가 20세기식으로 대단히 번성하고 있다는 데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 모든 산업들이 특별한 장난감, 게임, 이유식, 아침 식사용 식품, 아동 서적과 만화책, 아이들이 좋아하는 사탕 등의 제조에 열을 올리고 있다.”32 그리고 이어서 이렇게 말한다. “자녀에게 기념할 만한 아동기를 주는 것이 모든 부모의 의무이다. … 이것이 아이가 자라서 그의 아버지와 같은 로봇이 되었을 때 기억할 황금시대이다. 따라서 모든 아버지는 가장 영광스러운 시기였어야 할 아동기에 자신이 가지지 못했던 것이라면 무엇이든 아들에게 주려고 노력한다.” 33
하지만 파이어스톤은 자본주의 하 가족과 아동을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한 것을 언급한다. 바로 소외의 구실이다. 그녀는 이렇게 말한다. “현대의 아동기를 이해하게 하는 핵심 단어는 행복이다.”34 그녀는 소외의 구실을 어느 정도 이해했음을 분명하게 표현하지만, 이 주제를 더 깊이 파고들거나 소외가 존재하는 이유를 밝히려 하지는 않는다.
자본주의 하에서 아동기는 자유를 향유할 유일한 기회로서 칭송된다. 파이어스톤은 다음과 같이 옳게 지적한다. “소외된 사람들의 문화에 있어서, 모든 사람들이 근심 걱정과 고된 일로부터 자유로운, 적어도 인생의 좋은 한때를 갖는다는 믿음은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그리고 그것을 노년기에 기대할 수 없다는 것은 명백하다.” 파이어스톤은 성인이 아동기를 이렇게 칭송하는 이유를 (부분적으로) 이해하면서 이런 신화로부터 아이들을 해방시키고 그들이 성인과 평등한 토대에서 사회에 참여하도록 해야 함을 힘주어 강조한다. 아동 노동을 지지한다는 비난을 미리 방지하기 위해 파이어스톤은 이렇게 주장한다. “우리는 아이들을 성인 생활의 공포로부터 몇 년간 구하는 것에 관해서가 아니라, 그러한 공포들을 제거하는 것에 관해서 말하기 시작해야 할 필요가 있다. 착취에서 해방된 사회에서 아이들은 어른 … 같을 수 있고 어른들은 아이 … 같을 수 있다.”미래
몇몇 대목에서 파이어스톤은 진정한 사회주의자인 것처럼 보인다. 착취와 차별로부터 해방된 세계를 보고 싶어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론과 방법 때문에 그녀는 자신이 ‘페미니스트 혁명’이라고 이름 붙인 것이 어떻게 벌어질 것인지, 그리고 어떤 종류의 사회가 그 자리에 들어설지를 논의할 때는 꽤 괴상한 방향으로 나아간다.
36 이런 새로운 재생산 기술들 덕분에 인류가 임신을 하고 부모가 돼야 할 필요성이 사라지고, 그 덕분에 ‘가부장제 가족’은 물론 자본주의 자체(그녀에 따르면, 자본주의는 성별 분업의 결과이다)도 파괴돼, ‘사이버 공산주의’의 시대가 열릴 것이라고도 말한다. 기계와 기술 덕분에 인류가 노동의 단조로움에서 해방될 뿐 아니라, 출산과 육아의 고통과 괴로움에서도 벗어날 수 있다는 것이다.
이 글의 서두에서 말했듯이, 파이어스톤은 생물학적 결정론을 받아들이는데도 페미니스트 혁명의 가능성에 낙관적이다. 그런데 차별이 남성/여성의 생물학적 차이에서 발생하는 것이라면, 페미니스트 혁명은 어떻게 가능할까? 그녀는 현대의 과학기술 덕분에 인공적 재생산(예를 들어 시험관 아기)과 피임 등이 개발돼 우리가 역사상 처음으로 생물학에서 해방될 도구들을 갖게 됐다고 주장한다. 이런 과학기술이 없었던 것이 과거의 혁명이 실패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의 하나라고 그녀는 주장한다.결론
37 ― 이해하고 그것을 기초로 한 몰역사적 방법을 받아들이기 때문이다. 그녀가 동시대 미국의 소위 마르크스주의자들과 혁명가들의 스탈린주의와 성차별적 태도를 접하며 느꼈을 좌절은 충분히 공감한다. 하지만 그녀는 마르크스주의를 버림으로써 여성 차별과 그 기원을 제대로 이해하지는 못했다.
파이어스톤이 차별의 기원을 분석하고자 한 것, 자신의 이론을 용기 있게 ― 당시에는 오늘날보다 더 큰 용기가 필요했을 것이다 ― 밝힌 것은 높이 평가할 일이다. 하지만 마르크스주의자인 내가 보기로 이 책은 문제도 있다. 동성애 혐오적, 인종차별적 관점을 받아들이는 문제이다. (인종차별적 관점에 관해서는 이 글에서 다룰 여지가 없었다.) 더 중요한 문제도 있다. 프로이트의 터무니없는 주장과 결합된 조야한 생물학적 결정론을 기초로 한 방법의 결함이 그것이다. 그녀가 이런 심각한 문제가 있는 결론에 이르는 것은, 계급과 젠더의 관계를 뒤집어서 ― ‘성적 분화’가 먼저이고 계급은 성적 분화의 결과로 발생했다는 주장주
-
필자인 매들라인 요한슨은 아일랜드 사회주의노동자당SWP 당원이고 사우스더블린 주州 주의회 의원이다.
출처: Madeleine Johansson, Review: Shulamith Firestone, The Dialectic of Sex, Irish Marxist Review 2015 vol 4 number 13.
↩
- http://www.newyorker.com/magazine/2013/04/15/death-of-a-revolutionary?currentPage=allaccessed 24/05/15 ↩
- http://disruptingdinnerparties.com/2014/05/29/breaking-away-to-come-back-new-leftsexism-radical-feminism (검색일: 2015년 6월 24일) ↩
- 1967년 8~9월 미국공산당을 포함한 구좌파와 신좌파 등 대다수 좌파가 모여 새로운 통합 정치단체를 구성하기 위한 시도로 조직됐다 ─ 옮긴이. ↩
- http://www.newyorker.com/magazine/2013/04/15/death-of-a-revolutionary (검색일: 2015년 6월 24일) ↩
- 파이어스톤 2016, pp14-15. ↩
- 파이어스톤 2016, p14. ↩
- 파이어스톤 2016, p14. ↩
- 파이어스톤 2016, p22. ↩
- 파이어스톤 2016, p19. ↩
- 파이어스톤 2016, p197. ↩
- 파이어스톤 2016, p247. ↩
- 파이어스톤 2016, p247. ↩
- 파이어스톤 2016, p13. ↩
- “투사들은 박해, 습격, 구타 그리고 단식투쟁에서의 강제 취식까지 당하기도 했으나 10년이 안 돼 투표권을 쟁취했다. 급진적 페미니즘의 불꽃은 꺼져만 가던 선거권운동이 단일 문제를 추진하는 데 필요로 했던 것이었다.”(파이어스톤 2016, p39.) ↩
- “1920년대에는 에로티시즘이 크게 대두하였다. 페미니스트의 공격으로 로맨스와 함께 결혼제도가 점차 흔들리기 시작하면서(‘사랑과 결혼 … 은 말과 마차처럼 함께 간다. …’) 약화되고 무너져 가는 제도를 다시 대두시키고 강화시키는 역할을 했던 것이다.” (파이어스톤 2016, p45.) ↩
- 파이어스톤 2016, p71. ↩
- “그러한 이행이 감정적 잔여물인 ‘콤플렉스’를 남기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남아는 자기 목숨을 구하기 위해서 어머니를 버리고 배반해야만 하며, 그녀를 억압하는 자와 같은 부류에 속해야 한다. 그는 죄책감을 느낀다.”(파이어스톤 2016, pp81-82.) ↩
- 파이어스톤 2016, p88. ↩
- 파이어스톤 2016, p89. ↩
- 파이어스톤 2016, p91. ↩
- 파이어스톤 2016, p93. ↩
- 파이어스톤 2016, p315. ↩
- 파이어스톤 2016, p109. ↩
- 파이어스톤 2016, p114. ↩
- 파이어스톤 2016, p115. ↩
- “아이들은 특별한 숙소, 학교 또는 활동으로 분리되어진 적이 없었다.”(파이어스톤 2016, p116.) ↩
- 파이어스톤 2016, p116. ↩
- 파이어스톤 2016, p117. ↩
- 파이어스톤 2016, p122. ↩
- 파이어스톤 2016, p129. ↩
- 파이어스톤 2016, p134. ↩
- 파이어스톤 2016, p135. ↩
- 파이어스톤, 2016, p135. ↩
- 파이어스톤 2016, pp137-138. ↩
- 파이어스톤 2016, pp140-141. ↩
- “우리는 곧 혁명을 위한 세 쌍의 전제조건을 가질 텐데, 과거의 혁명이 실패한 원인은 그것이 부재했기 때문이었다.”(파이어스톤 2016, p276.) ↩
- “우리가 생식을 위한 성의 생물학적 분화가 모든 계급분화를 낳게 하는 근본적인 ‘자연적’ 이원성으로 가정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이제 우리는 성의 분화를 기본적인 문화적 분화의 뿌리로 가정한다.”(파이어스톤, 2016, p25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