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Ⅰ: 페미니즘과 성 해방
최초의 성 해방 운동과 사회주의 운동 *
이 글은 사회주의의 역사와 성 해방의 역사가 서로 얽혀 있으며, 이 점은 한 세기 전 혁명적 분위기의 독일에서 가장 분명하게 드러났다고 지적한다.
공장 시스템은 노동계급 가족을 갈갈이 찢어 놓았다. 땅에서 쫓겨나 산업 시대의 새 공장과 도시로 빨려 들어가며 노동자들의 생활방식은 완전히 허물어졌다. 맨체스터의 프리드리히 엥겔스에서부터 런던의 반동적 성향의 작가 로버트 칼라일에 이르기까지 좌파 측과 우파 측 모두에서 많은 평론가들이 정도는 달라로 공포와 경악을 느끼며 그것을 목격했다. 도시와 공장은 농촌 지역을 빨아먹는 흡혈귀 같았다. 도시와 공장은 젠트리가 1 공유지를 장악함에 따라 땅을 빼앗긴 사람들을 빨아들였다. 영국 지주들이 나라 전체를 마른 수건 짜듯 쥐어짠 아일랜드 출신자들도 흡수했다.
19세기 중반이 되자 기득권층의 관심사는 노동자들의 도덕과 신앙이 어떤지 혹은 신앙이 없는지에 관한 것에서 노동자들이 효과적으로 일하고 다음 세대 노동자를 생산할 능력이 있는지에 관한 것으로 옮겨 갔다.
이러한 배경에서 자본주의 국가와 교회는 노동계급 가족을 재건하기 위한 일련의 입법 활동과 캠페인을 벌였다. 그들은 더 복잡한 기계를 조작할 수 있는 더 건강하고 더 믿음직한 노동자가 필요했고, 미래의 노동을 담당할 아이들을 낳고 기를 가족의 수립도 필요했다. 공장과 탄광에서 아동 착취를 제한하고 여성이 아이를 돌보고 기를 수 있도록 보건·안전 규제가 도입됐다. 지배계급은 개별 공장 소유주들이 자유 시장에 대한 제약을 받아들이는 것이 체제 전체에 더 큰 득이자 도움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동시에 교회(영국국교회, 잉글랜드와 웨일스의 새 도시와 마을에서는 감리교 등 비국교회 교회 모두)는 죄악과 부도덕한 삶에 반대하는 도덕 캠페인을 벌였다. 노동자들 처지에서는, 가족 구성원이 모두 일하며 기숙 시설에 사는 것보다는 가족과 사생활을 가질 권리를 얻는 것이 투쟁할 가치가 있는 개혁이었다. 그 결과로 생겨난 이성애적 핵가족은 안식처인 동시에 성적·사회적 관습을 구축하는 억압 기구였다.
당시 우세한 강대국이었던 영국은 이러한 변화의 선두 주자였다. 물론 이 변화는 19세기 자본주의 도처에서 발견된 현상이었지만 말이다. 엄격한 도덕률과 행동 수칙을 갖추고 “더 높은 사람들”에게 기꺼이 복종하는 “점잖은” 노동계급 가족을 창출하는 것이 그 변화의 목표였다. 이런 상황을 반영해 모자를 들어 올려 인사하는 노동자가 수많은 소설에 등장했다. 그는 자기 가족 내에서는 주인으로 행동하지만 자기 주인에게는 충성하고 복종하는 분수를 아는 노동자다. 이성애적 핵가족의 등장은 또 다른 결과도 낳았다. 정도 차이는 있겠지만 누구나 저지를 수 있는 행동이나 죄악으로 여겨지던 동성애가 하나의 사회적 유형이 된 것이다.
이 과정은 아주 초기부터 도전받았다. 급진적 낭만파 운동과 사회주의 운동이 이 가족 모델을 반대하며 자유 연애와 성 해방을 옹호했다. 감리교회가 잉글랜드 북부의 공장 마을에서 활동하던 바로 그때 그 공간에서 에드워드 카펜터 같은 사회주의자들은 사회주의와 자유 연애, “소중한 동지애”를 위해 캠페인을 벌이고 주장하며 동성애를 그러한 자유 연애의 사례이자 미래의 신호로 여겼다.
카펜터의 소책자와 책은 19세기 말에 피어나던 사회주의 운동과 협동조합 운동 내에서 널리 읽혔다. 그의 어떤 저작은 5만 부 이상 인쇄돼 당시의 사교 클럽과 모임에 돌려 읽혔다. 성 해방과 동성애 권리의 역사는 사회주의 운동 역사와 결부돼 있고, 그 일부라고도 할 수 있다. 두 운동은 긴밀한 관계의 별개 운동이 아니었다. 사회주의 운동 안에서 성 해방이 논의됐다.
19세기 말이 되자 동성애 혐오는 자본주의의 특징처럼 됐다. 특히 영국에서 심했다. 영국 지배계급은 프랑스나 독일의 지배계급보다 더 동성애 혐오적으로 행동함으로써 우월성을 보이려 했다. 영국 제국은 동성애 혐오적 법률을 식민지에 가장 철저히 집행했고, 흔히 그 법률은 식민지 주민들의 전통과 충돌했다. 영국인 선교사들은 빅토리아 시대의 도덕 가치를 설교하고 강요하는 데 가장 열심이었다. 동성애 혐오와 인종 차별은 제국의 중심 임무였고, 영국인에게 도덕적·인종적 우월감을 안겨 줬다.
영국은 [성에 대해] 자유롭고 관대한 이슬람권을 도덕적으로 해이하다고 보며 비웃었다. 성과 같은 문제에 이슬람이 관대하고 자유로운 것은 그들의 후진성을 나타내는 징후로 여겨졌다. 이 시기에 영국인 동성애자 중 부유한 사람들은 억압을 피해 남반구 나라들과 중동으로 도망쳤다.
최초의 동성애 권리 운동
영국이 대중에게 엄격한 도덕률을 부과하고 설교하는 중심지였다면, 사회주의 운동이 가장 강력해 새 도덕에 대한 조직적 반대가 가장 강했던 곳은 독일이었다. 최초의 동성애 권리 운동과 성 정치 운동이 바로 독일에서 일어났다.
당시 독일 사회민주당이 독일 노동계급에게 끼친 영향력의 강도와 깊이, 유럽의 다른 사회주의 정당들 모두에 끼친 영향력이 어땠는지를 오늘날 제대로 인식하기는 쉽지 않다. 독일 사회민주당은 제2인터내셔널의 심장이었을 뿐 아니라 두뇌였고, 지도자로 인식되며 다른 사회주의 정당들이 모두 길잡이와 이론적 지도를 바라는 정당이었다. 사회민주당의 저명한 인사들인 카우츠키, 룩셈부르크, 체트킨, 베벨 등이 쓴 저작은 세계 사회주의 운동 도처에서 열광적으로 읽히고 연구됐다.
독일 사회민주당은 당원이 1백만 명이 넘었을 뿐 아니라 국가 안의 국가로 기능했다. 당원들은 사회민주당이라는 세계에서 살았다. 사회민주당은 정당으로서만 기능한 것이 아니라 당원들의 물질적 복지를 돌봤다. 청년 클럽, 예술과 연극 모임, 노래와 음악 모임을 운영하며 시민적·문화적 삶을 조직했다. 사회민주당은 당원들의 삶 전체를 조직했다.
1860년대와 1870년대에도 동성애 권리를 옹호하는 모임과 주장이 있었지만, 독일에서 동성애 권리 운동이 실질적으로 시작된 것은 마그누스 히르슈펠트가 세운 캠페인과 조직, 특히 과학적인도주의위원회의 활동부터라고 할 수 있다. 과학적인도주의위원회는 동성애를 불법화한 소도미 법인 형법 175조를 폐지하는 캠페인을 위해 1897년에 설립됐다.
오스카 와일드의 재판과 그 이후 영국을 휩쓴 억압의 물결에서 동성애는 국제적 쟁점이 됐다. 와일드의 재판은 국제적 사건이 돼, 사회주의 운동이 와일드와 동성애 권리에 관해 입장을 취하지 않을 수 없었다. 1895년 사회민주당 지도자 중 한 명이자 당내 우파인 에두아르트 베른슈타인이 당의 가장 중요한 신문인 〈디 노이에 차이트〉(새 시대)에 이 주제를 다룬 기사 두 편을 썼다. 그 기사는 와일드가 자기 몸으로 하길 원하는 행동을 할 권리를 지지했고, 그 쟁점에 관한 영국의 후진성을 비웃었고, 여러 시대와 여러 사회에서 발견되는 사랑에 부자연스러운 것은 없으며 법이 도덕 문제에 관여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다.
1898년 아우구스트 베벨이 독일 의회에서 이 문제를 제기하면서, 베른슈타인과 비슷한 근거로 동성애 합법화를 주장했다. 형법이 도덕 문제를 다뤄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다. 그전까지 어느 나라의 어느 정당도 이 문제를 제기한 적이 없었다. 당시 영국을 휩쓴 도덕적 공황과는 매우 대조되는 일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사회민주당이 동성애 해방을 온전히 지지했다는 뜻은 아니다. 다른 많은 쟁점에서와 마찬가지로 사회민주당은 동성애에 관해서도 견해가 다양했고 실천은 자신의 이론과 충돌하곤 했다. 베벨은 동성애의 비범죄화를 주장했지만, 동시에 널리 읽힌 자신의 책 《여성과 사회주의》(1879)에서는 “본성에 반하는 범죄”에 관해 경고했다. 사회민주당 안에는 두 경향이 있었다. 혁명으로 자본주의를 타도하고 그와 함께 자본주의에 수반되는 동성애 혐오 등도 타도하고자 하는 경향, 사회민주당이 성장해서 노동계급과 합쳐지고 사회를 점차 인수해 나가는 점진적 개혁에 기대를 거는 경향이 그것들이다. 사회민주당은 반란자와 혁명가들을 끌어당기는 동시에, 대개 종교적이고 사회적으로 보수적 견해를 갖고 있는 “점잖은 노동계급”과도 연관 맺고 그들에 기반을 뒀다.
마그누스 히르슈펠트는 사회민주당에서 온건하고 개혁주의적인 축에 있었다. 히르슈펠트는 1930년대까지 줄곧 동성애 권리 운동의 중심에 있었지만, 혁명가는 아니었다. 그는 사회민주당이 형법 175조 폐지를 지지하는 유일한 정당이었기에 사회민주당에 가입한 사람이었다. 그는 동성애가 제3의 성이며 따라서 바뀔 수 없고 본성을 표출할 권리가 있다는 이론을 폈다.
히르슈펠트는 동성애자들이 스스로 조직하거나 정치적 운동이 될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그는 위로부터의 개혁을 신뢰했다. 그가 벌인 캠페인은 기득권층에게 개혁의 논리를 납득시키는 것을 목표로 했다. 그는 아래로부터 조직하는 것에 반대했고 다른 사람들이 제안한 동성애자들의 대중적 “커밍 아웃”에도 반대했다. “동성애적 마음에 대한 내·외재적 억제력 때문에 상당수 사람들이 공공연하게 동성애자임을 밝히지 못할 것”이라 여겼기 때문이다. [히르슈펠트가 보기로] 전진하는 길은 과학적 연구, 판사·학자·정치인들과의 차분한 논리 논쟁이었다.
하지만 이러한 사회주의로의 점진적(논쟁의 여지가 있긴 했지만) 전진과 논리 논쟁의 세계는 제1차세계대전의 발발로 산산이 부서졌다. 전쟁 발발 이전 사회민주당은 반전 정책을 밝혔다. 전쟁이 일어나면 전쟁 공채 발행에 반대표를 던지고, 독일 노동자들이 다른 나라 노동자에게 총을 쏘는 것을 반대하기로 한 것이다. 그러나 전쟁이 일어나자 사회민주당 의원들은 룩셈부르크와 카를 리프크네히트 등 극소수를 제외하고는 모두 전쟁 공채 발행에 찬성표를 던졌다. 이 사건은 제2인터내셔널의 사회주의 정당들에게 충격을 줬다. 제2인터내셔널은 갈갈이 찢어졌고 사회주의 운동은 분열했다. 사회주의 정당의 다수는 자국을 지지했고, 오직 소수만이 전쟁에 반대했다. 반전 입장의 주도 세력은 러시아 볼셰비키였다. 룩셈부르크를 중심으로 한 소규모 좌파가 결국 사회민주당과 결별했다.
혁명 운동과 성 해방
전쟁은 1917년 러시아 혁명이 일어날 조건을 창출했고, 볼셰비키는 집권 후 거의 곧바로 동성애를 합법화했다. 볼셰비키는 독일 사회민주당 좌파가 발전시킨 정책을 실천했다. 러시아에서는 동성애 권리 운동이랄 것이 없었지만, 대중이 세계를 뒤집어엎자 사회의 급진적 변화 속에서 성 해방에 대한 지지가 흘러넘쳤다. 성 해방에 대한 지지는 제2인터내셔널의 잿더미와 러시아에서 새로 태어난 제3인터내셔널에 기대를 건 공산당들의 합의된 정책이 됐다.
히르슈펠트의 온건한 관점을 고려할 때, 그가 1919년 독일 혁명 중에 베를린의 의회 계단 위에서 대중에게 우연히 연설하게 된 것은 역설적인 일이었다. 독일 혁명은 미완의 혁명이었지만, 동성애 권리 운동을 완전히 바꿔 놓았다. 혁명은 대중의 사고방식과 기대를 완전히 바꿔 놓았다.
이것은 삶의 모든 영역과 아주 오래된 관념들을 하룻밤 사이에 바꿀 수 있는 진정한 혁명의 징후였다. 새로운 삶을 원하며 전쟁터에서 돌아온 사람들이 독일 전역에 많이 있었다. 동성애자들이 드러내 놓고 서로 만날 수 있는 친교 카페와 모임이 우후죽순 생겨났다. 베를린, 뒤셀도르프, 프랑크푸르트암마인, 슈투트가르트, 함부르크, 드레스덴, 카셀 등 여러 도시에서 친교 카페가 등장했다.
제1차세계대전 발발 전부터 활동한 활동가 집단으로부터 아래로부터 대중 운동이 만개했다. 1920년 친교 카페들은 독일친교동맹이라는 전국 조직을 결성하고 《프로인트샤프트》(친교)라는 잡지를 발행했다. 그 창간호는 2만 부가 인쇄됐다. 막스 다니엘존은 잡지 창간호에서 다음과 같이 썼다.
세계대전이 낡은 세계를 재앙으로 휩쓸었다. … 새로운 시대가 밝아 온다! 우리에게 해방의 시간은 지금 아니면 절대로 이룰 수 없다. … 배척당하고 박해받으며 오해받는 우리는 동등한 존중과 평등의 새 시대에 환히 빛날 것이다.
우파는 탄압으로 대응했다. 1921년 경찰은 뮌헨의 친교 카페를 폐쇄했지만, 21세의 참전 용사이자 활동가인 리하르트 린제르트가 이끄는 친교동맹 뮌헨 지부의 반대 행동에 부딪혔다. 그들은 폐쇄에 맞서 법정 투쟁을 벌이고 공개적으로 평등권을 주장했다. 리하르트 린제르트는 이후 베를린으로 이주해 독일 공산당에 가입하고 혁명적 정치에 헌신했다.
혁명과 혁명의 불완전한 성격으로부터 나온 타협물인 바이마르 공화국 덕분에 히르슈펠트는 베를린에 성과학연구소를 설립할 공간과 자금을 받을 수 있었다. 그와 동시에 동성애자를 겨냥한 상업이 전례 없이 성장했다. 검열이 완화되고 새로운 자유가 등장함에 따라 게이와 레즈비언을 위한 클럽, 극장, 술집, 출판물이 확산됐다. 게이인 사업가 프리드리히 라츠추바이트가 동성애 출판물의 새 시장을 지배했다. 그는 1923년 친교동맹을 분열시킨 후 인권동맹으로 단체명을 바꿨다. 그는 게이와 레즈비언을 겨냥한 5만 부 이상 발행됐다고 하는 여러 잡지들과 수십만 명이 참가하는 운동을 만들었다. 1920년대 중반이 되면 동성애 운동에는 세 개의 중심이 서서 서로 경쟁했다. 라츠추바이트가 지배하는 상업계, 히르슈펠트를 위시한 사회민주당의 온건한 사회주의자들, 린제르트 같은 활동가로 된 공산당의 혁명가들이 그것이었다.
린제르트와 급진좌파 인사 쿠르트 힐러는 형법 175조 폐지 캠페인을 벌인 과학적인도주의위원회에서 히르슈펠트와 함께 일했다. 사회민주당과 공산당 둘 다 동성애 합법화를 지지했지만, 합법화가 뜻하는 바가 무엇인지는 갈수록 달라졌다. 사회민주당은 중도적·우파적 성향의 종교 정당들을 달래려고 동성애 권리 지지 정책에서 후퇴했다.
1928년 형법 175조의 폐지안이 상정된 상황에서 과학적인도주의위원회 내부의 차이가 전면에 드러났다. 사회민주당은 별나게 살지 않는 “점잖은” 동성애자들만을 위한 합법화를 지지했다. 사회민주당과 공산당을 갈라 놓은 쟁점은 남창男娼에 대한 태도였다. 린제르트는 베를린으로 이주할 때 성과학연구소를 대표해 베를린의 노동계급 남창들에 대한 상세한 조사를 수행했다. 그는 우파의 주장과 달리 남창들은 “범죄형”이 아니며, 대부분 독일의 심각한 경제 위기 때문에 성매매를 하게 된 것임을 보였다.
린제르트는 과학적인도주의위원회와 공산당 내에서 떠올라 공산당 베를린 지부의 지도자 중 한 명이 됐고, 자유 연애와 동성애 해방에 관한 소책자를 많이 썼다. 린제르트는 형법 175조를 검토하기 위해 만들어진 독일 의회 위원회에 속해 있었다. 이 위원회는 1929년에 보고서를 냈지만, 그 권고안은 1930년의 위기와 나치의 부상 속에 사라져 버렸다.
상정된 새 법안은 세 가지 상황을 제외한 동성 간 성행위를 합법화할 것이었다. 당사자 중 한 명이 21세 미만일 경우, 지위나 영향력을 이용한 경우, 돈을 지불한 경우. 이 쟁점은 과학적인도주의위원회와 동성애 운동 전반을 분열시켰고, 특히 사회민주당과 공산당을 분열시켰다. 린제르트가 이끌던 공산당은 새 법안에 반대하며 “일보 전진, 이보 후퇴에 해당한다”고 말했다. 남성 간 성행위를 합법화한 것은 일보 전진이지만, 동성애자의 성관계 가능 연령을 높이고 남성 성매매를 범죄화한 것은 이보 후퇴라는 것이다. 당시는 공산당이 사회민주당 전반에 대해 초좌파적이고 종파적인 태도를 취하고, 사회민주당을 나치와 거의 동급으로 취급하며 “사회 파시스트”라고 부르던 시기였다.
린제르트는 과학적인도주의위원회가 상정된 새 법안에 반대하도록 설득했고, 자유 연애와 성 해방을 옹호했으며, 히르슈펠트가 과학적인도주의위원회에서 사임하도록 만들었다. 과학적인도주의위원회는 분열했다. 과학적인도주의위원회는 오랫동안 히르슈펠트의 통제 하에 있었지만, 이제 다수는 린제르트가 이끄는 더 급진적인 공산당의 입장에 찬성했다. 성이 난 히르슈펠트는 자금을 동결시키는 등 재정적으로 제대로 기능하지 못하게 만들어 과학적인도주의위원회를 끝장내 버렸다.
린제르트는 1933년에 죽었다. 러시아에서 스탈린주의가 득세함에 따라 독일 공산당의 성 해방 정책은 거꾸로 뒤집혔다. 공산당은 그전 20년간 견지한 혁명적 입장을 사실상 포기하고 점잖은 노동계급 도덕을 고취하는 사회민주당의 성 정치를 받아들였다. 러시아에서는 1934년 동성애가 범죄화됐고, 진보적이고 성 해방적인 정책들이 모두 뒤집혔다. 스탈린이 이끈 완전한 반혁명 때문이었다.
스탈린주의와 파시즘의 발흥과 득세로 말미암아 사회주의 운동 내에서 성 해방 전통은 사라지고 잊혀졌고, 1960년대에 가서야 재발견되고 재개됐다.
MARX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