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Ⅱ: 1987년 6월 항쟁·노동자 대투쟁 30주년
1987년 6월 항쟁 30주년 ─ 무엇을 계승할 것인가?
지배자들은 퇴진 운동이 박근혜 탄핵을 넘어 사회 전반의 문제를 제기하며 전진하는 것을 극도로 경계한다. 특히 노동자들이 퇴진 운동에서 얻은 자신감을 바탕으로 자신들의 고유한 요구를 내세우며 투쟁하는 것을 제일 두려워할 것이다.
그들은 어쩌면 1987년의 악몽을 떠올릴지도 모르겠다. 그해 한국 노동계급은 6월 항쟁과 7~9월 노동자 대투쟁을 통해 자신들이 쉽게 무시될 수 있는 존재가 아니라는 것을 지배자들에게 분명히 보여 줬다. 그렇게 역사의 전면에 등장한 한국의 노동계급은 그 뒤의 주요한 투쟁에서 주도적 구실을 했다.
2 6월 항쟁은 많은 사람들의 급진화, 노동계급 운동과 조직의 모태가 됐기 때문에, 6월 항쟁 이야기를 하는 것만으로도 가슴 설렌다.
1987년이 지배자들에게는 악몽이었을지 모르지만 착취와 억압에 저항해 온 많은 사람들에게는 ‘한 세대를 마법에 빠뜨린 특별한 해’였다.무너지지 않을 것 같았던 박근혜를 감옥에 보낸 거대한 운동에 참가한 많은 사람들이 철옹성처럼 보였던 군부독재를 무릎 꿇린 6월 항쟁을 떠올리는 것은 당연하다. 하지만 6월 항쟁 이후 항쟁에 참여한 계급들이 서로 다른 방향으로 나아갔듯이, 6월 항쟁으로부터 배울 교훈도 서로 다르다.
문재인의 민주당과 개혁주의 진영의 일부는 6월 항쟁의 성과로 치러진 1987년 대선에서 노태우가 당선해 6월 항쟁이 미완으로 끝났으니, 이번 대선에서는 죽 쑤어 개 주지 않으려면 민주당으로 정권을 교체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그러나 6월 항쟁 직후 벌어진 7~9월 노동자 대투쟁에 적대적이었고, 1997년 이후 10년을 집권하면서 노동계급을 공격했으며, 이번 대선에서 우클릭을 반복한 민주당은 많은 사람들이 바라는 ‘적폐 청산’을 제대로 하지 못할 것이다.
이와 같은 위로부터의 관점 ─ 노동계급이 다른 계급(부르주아나 중간계급)에 의지해 그들이 선사하는 개혁을 기다리며 자신들의 고유한 요구를 내세우면 안 된다는 ─ 이 아니라 아래로부터의 관점 ─ 노동계급의 자력 해방 ─ 으로 바라본다면 6월 항쟁은 아주 다른 그림으로 보일 것이다.
이 그림 속에 6월 항쟁과 7~9월 노동자 대투쟁은 한국 노동계급이 “즉자적 계급”에서 “대자적 계급”으로 발전하는 거대한 첫걸음이었고 이후 역사는 이 과정 속에 있다. 이 글은 이러한 관점으로 6월 항쟁을 바라보려는 시도이다.
역사적 맥락
1987년 수개월 동안의 폭발적인 대중투쟁은 어느 날 갑자기 찾아온 것이 아니었다. 그전에 있었던 수많은 크고 작은 투쟁들이 누적된 결과로 봐야 한다. 1980년 광주항쟁의 여파로 군부독재에 목숨 걸고 싸우고자 하는 많은 투사들이 생겨났다. 실제로 광주항쟁을 잔인하게 진압된 뒤에 이어진 폭압 속에서도 저항은 계속됐다.
4 1983년에는 1982년에 견줘 노사분규가 증가하기 시작했다.
특히 노동자들의 저항이 끈질겼다. 전두환 정권이 1970년대에 건설된 민주노조를 파괴하려 하자 이에 맞서 원풍모방 노동자들은 1982년 10월까지 격렬하게 투쟁했다.5 1983년 12월 ‘유화조치’는 이런 배경에서 실시됐다.
전두환 정권은 폭압만으로는 대중을 통제하기 힘들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구속자가 넘쳐 나는데도 저항은 계속됐다.전두환 정권은 ‘유화조치’로 저항이 누그러지기를 바랐겠지만 역사란 지배자들의 의도대로만 전개되는 것은 아니다. 저항이 되레 크게 늘어나기 시작했다. 학생들은 학생회를 건설하고 정권 반대 투쟁을 전개했다. 1984년에는 노동자 투쟁과 노동조합 건설이 증가했다.
특히 대구를 중심으로 시작된 택시 노동자들의 투쟁은 전국으로 확산돼 노동조건 개선과 노동조합 건설의 성과를 내기도 했다. 9월에는 청계피복노조 합법성 쟁취 대회가 열렸는데, 여기에 참가한 노동자와 학생들은 1980년 5월 이후 서울에서 가장 큰 규모의 가두시위를 벌였다.
이런 분위기 속에 치러진 1985년 2월 총선에서 여당이 패배하면서 노동자들의 저항 정서는 더욱 고조됐다. 1985년 노동쟁의는 전년보다 1백20퍼센트나 급증했다. 특히 대우자동차 파업과 구로동맹파업은 이후 일어날 폭발적 노동자 투쟁의 모습을 미리 보여 줬다.
전두환 정권은 점점 증가하는 저항을 억누르기 위해 탄압을 강화했다. ‘부천경찰서 성고문 사건’과 ‘건국대 사태’,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 등이 그 과정에서 일어났다. 많은 노동자와 학생들이 구속됐다. 하지만 노사분규는 1985년보다 1986년에 오히려 조금 증가했다. 전두환 정권의 폭압도 물밑에서 흐르는 도도한 물결을 막을 수 없었던 것이다.
6 그래서 일부 활동가들은 1987년 6월 항쟁 직전의 상황을 비관적으로 보기도 했다.
1986년 전두환 정권의 폭압이 본격화됐고, 이 때문에 학생운동이 위축됐다. 당시 한 공안 당국자가 “서울대 학생운동은 향후 10년 동안 재기하지 못할 것이다” 하고 말할 정도였다.하지만 대중의 정서는 점점 끓어오르고 있었다. 그래서 당시 한 신문은 다소 침체한 듯 보이는 대학의 분위기를 언제 터질지 모르는 ‘휴화산’ 같다고 묘사했다.
박종철 고문치사에 항의하고자 조직된 2월 7일과 3월 3일의 집회가 대중적 투쟁으로 발전하지는 못했지만 평범한 사람들의 참가가 두드러졌다. 경찰에 항의하고 시위에 직접 참가하는 등 사람들의 자신감이 이전과 달라지고 있다는 것을 볼 수 있었다.
6월 항쟁은 어떻게 시작됐나? 대중의 자신감이 증가한 데는, 앞에서 말한 요인들과 함께 경제 호황도 큰 영향을 미쳤다. 1985년 대우자동차 파업이 좋은 사례다. 당시 노동자들은 사상 최대의 흑자를 낸 사측에 높은 임금인상을 요구하며 투쟁해 승리했다.
1986년 초 필리핀에서 일어난 대중투쟁이 독재자 마르코스를 쫓아낸 것도 큰 영향을 미쳤다. 전두환 정권은 이 소식이 퍼지는 것을 극도로 두려워해 언론을 통제하기 급급했지만 사람들은 ‘우리도 필리핀처럼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얻기 시작했다.
6월 항쟁은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이 계기가 됐다. 광주 민중을 학살해 권력을 장악하고 연이은 부정부패 속에 정권을 연장하려는 전두환 정권이 휘두르는 폭압에 대중의 환멸과 분노는 극에 달했다.
하지만 6월 항쟁 이전 이 항쟁에 영향을 미친 크고 작은 투쟁들이 있었고 이 투쟁들을 이끈 사람들 ─ 비록 소수일지라도 ─ 의 구실은 무시할 수 없다. 6월 항쟁은 대중의 자생성이 폭발한 때이기도 했지만 6월 항쟁으로 가는 길에 놓인 수많은 의식적 노력들의 결과이기도 했다.
8 이러한 자신감을 바탕으로 학생들은 5월부터 가두시위와 군부 정권에 항의하는 정치적 투쟁을 벌여 나갔고 서대협과 서학협이 만들어졌다. 서학협은 이후 6월 항쟁 거리 전투의 선두에 섰다.
1987년 상반기 상대적으로 조용했던 대학에서 학내 쟁점으로 투쟁이 일어났다. 4월에 서울대와 부산대에서 징계 문제와 학내 언론 독립 문제로 점거와 집회가 열려 승리를 얻어 냈다.9 6월 9일에는 6·10대회 출정식을 열었다. 여기서 연세대 학생 이한열이 경찰이 쏜 최루탄을 맞아 쓰러졌고 6월 항쟁의 또 다른 기폭제가 됐다.
6월 들어서 학생들은 더 많은 사람들의 집회 참가를 조직하기 위해 단식·삭발을 포함한 선전·선동을 강화했다. 6월 5일 연세대 총학생회는 고등학교 14곳과 중학교 한 곳에서 6·10범국민대회 참가 호소 유인물을 배포했고한편, 1987년 상반기 울산 현대 계열사와 창원 대우중공업, 거제 대우조선소 등에서 노동자들의 집단 행동과 노조 건설 움직임이 일어났다. 투쟁과 노조 건설을 준비한 사람들의 노력은 이후 대투쟁의 밑거름이 됐다.
군부독재의 굴복
6월 10일 마주보고 달리는 두 개의 열차가 충돌했다. 이날 잠실체육관에서 열린 민정당 전당대회에서 노태우가 대통령 후보로 선출됐다. 전두환 정권은 대중의 열망과는 정반대로 군부 독재를 지속하고자 했다.
반면 거리에서는 1960년 4·19 시위 이후 최대 규모의 격렬한 시위가 벌어졌다. 거리 곳곳에서 경찰은 무장해제되거나 시위대에게 곤욕을 치렀다. 한 경찰 간부의 말처럼 경찰로서는 “가장 힘들고 길게 느껴졌던 하루였다.” 22개 지역에서 수십만 명이 시위에 참가했다. 어떤 지역은 경찰이 아예 진압을 포기하기도 했다. 사람들은 군부 독재에 맞서 싸워 이길 수 있다는 자신감이 높아진 반면 전두환 정권의 사기는 떨어졌다. 6월 13일 시국 관련 책임자들이 참석한 회의에서 전두환은 시위 대중은 “사생결단으로 나오는데 우리는 안 그런 것 같다”고 말했다.
11 그러는 사이 시위는 눈덩이처럼 커져 갔다.
경찰력의 한계를 본 전두환 정권은 군 투입을 놓고 고민했지만 결론을 내리지 못하고 우왕좌왕했다. 대중투쟁이 워낙 강력했기 때문에 군을 동원할 경우 군 내부에서 분열이 일어나거나 사병들이 시위대 편으로 넘어갈 가능성은 얼마든지 있었다.6월 18일과 26일 집회에는 6월 10일보다 더 많은 지역에서 더 많은 사람들이 참가했다. 결국 전두환은 대중투쟁의 도도한 물결 앞에 무릎을 꿇을 수밖에 없었다.
국민운동본부와 야당
6월 항쟁의 지도부는 국민운동본부(이하 국본)였다. 국본은 부르주아 야당을 포함한 재야와 학생운동을 포괄하는 계급연합 조직이었다. 야당이 국본에 참여한 것은 야당도 정치적 자유가 제약되고 탄압을 받는 상황인 데다가 전두환 정권이 야당이 원하는 정치적 양보를 할 의사가 없음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당시 야당인 민주당은 6월 항쟁 기간 내내 동요하며, 일관되게 투쟁을 이끌고 나갈 세력이 아님을 보여 줬다. 야당은 투쟁을 전진시키기보다 정치 협상을 통해 ‘파국을 막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6월 10일 이후 민주당은 이미 원내 복귀를 고민하기 시작했다. 15일 김영삼은 등원을 선언하기도 했다.
야당의 우유부단함을 잘 알았기에 전두환은 주로 야당을 겨냥해 비상조치설을 퍼트려 야당이 위축되고 동요하도록 만들었다. 김대중 부인 이희호는 친위 쿠데타설이 돌았던 20일 상황을 자서전에서 다음과 같이 회고했다. 김대중을 포함해 “간절히 기도하는 일 말고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대중투쟁에 호소하기보다 기도를 택한 김대중이 단지 기도만 한 것은 아니었다. 김대중 측은 김영삼과 함께 국본 내에서 신중론을 펴며 대규모 집회 계획 연기를 주장했다.
13 이에 대해 재야의 대표 조직인 민통련이 야당과의 연대기구였던 민국련에서 탈퇴했다. 이후 격렬하게 벌어진 5·3인천투쟁의 배경에는 군부독재에 대한 반감뿐 아니라 야당에 대한 반발도 있었다.
야당의 이러한 동요는 6월 항쟁 와중에만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1986년 전두환 정권이 야당을 개헌 협상의 파트너로 끌어들였을 때 당시 야당인 신민당은 원활한 협상을 하는 데 부담이 됐던 재야의 반미운동을 비난했다. 6월 항쟁 이후 7~9월 노동자 대투쟁이 벌어지자 야당은 노동자들의 투쟁이 민주화를 원하지 않는 세력에게 이용당할 수 있고 한꺼번에 모든 것을 해결하려 해서는 안 된다며 노동자들에게 자제를 요구했다.야당이 동요할 때 실제 투쟁을 전진시킨 것은 거리의 대중이었다. 국본이 주최한 세 번의 대규모 집회 외에도 국본이 주도하지 않은 거리시위가 매일 벌어졌다. 명동성당과 부산의 가톨릭센터에서는 국본과 무관하게 농성이 벌어졌다. 그야말로 대중의 자발성과 전투성이 빛을 발하고 있었다.
학생들이 거리투쟁의 발전에 주도적 구실을 한 것은 맞다. 하지만 노동자들도 거리의 투쟁을 확대·강화하는 데 주요한 구실을 했다.
6월 항쟁과 노동자 6월 항쟁은 단지 학생들이나 ‘중산층’만의 투쟁은 아니었다. 노동자와 중간계급 그리고 부르주아의 일부도 포함하는 그야말로 민중 항쟁이었다. 특히 노동자들의 참가가 가장 많았다. ‘중산층’의 대표 집단으로 오인되는 ‘넥타이 부대’도 대부분 사실상 노동자였다. 노동자 밀집 지역의 경우 6월 항쟁의 초기부터 노동자들의 참가가 두드러졌을 뿐 아니라 노동자들의 요구가 제기되기도 했다.
노동자들은 단지 소극적인 개인들로서만 시위에 참가한 것은 아니었다. 인천 등지 노동자들은 집회와 투쟁을 주도하면서 집단으로서 자신감을 느끼고 투쟁을 자신의 작업장 안으로 가지고 갈 준비를 했다. 부산 사상공단 노동자들은 6월 18일 집회에 잔업을 거부하고 참가했다.
이러한 노동자들의 주도적 참여와 집단적 움직임은 전두환 정권을 두려움에 빠지게 하기에 충분했다. 군대 투입 문제를 놓고 갈팡질팡한 것에도 사실 노동자들의 참가가 결정적 구실을 했다고 봐야 한다.
1980년 5월 주로 학생들로 이루어진 거리 시위를 제압하며 권력을 장악한 전두환은 그때와는 확연히 다른 상황을 보면서 어쩔 줄 몰라 했다. 6월 17일 전두환은 확산되는 대중투쟁을 두려워하며 쓸 카드가 없다고 괴로워하기도 했다.
특히 6월 항쟁 직후 벌어진 7~9월 노동자 대투쟁은 전두환 정권이 6월 항쟁의 성과를 되돌리지 못하게 만든 결정적 구실을 했다.
오늘날의 교훈
6월 항쟁을 단지 민주화 투쟁으로 보는 것은 일면적일 수 있다. 물론 6월 항쟁이 이념적으로는 부르주아 민주주의 틀 안에 머물렀지만 여기에 참가한 대중의 열망은 단지 거기에 머물지는 않았다.
대중집회와 거리토론회, 투쟁의 방향을 둘러싼 민주적 토론과 규율 등에서 나타난 천대받던 사회 하층민의 집단적이고 자의식적인 민주주의는 단지 ‘정치적 민주화’로 치환될 수는 없다.
그리고 6월 항쟁의 거리에서 ‘노동3권 보장’, ‘임금인상’을 외친 노동자들이 6월 항쟁 승리 직후 작업장에서 자신들의 고유한 요구를 걸고 투쟁에 나선 것은 6월 항쟁을 단지 민주화 투쟁으로 국한해 볼 수 없는 이유이다.
이 점에서 6월 항쟁을 통해 ‘87년 체제’(정치적 민주주의 체제)가 성립됐다고 주장하는 것은 정치적 측면만을 강조하는 일면적 규정이라 할 수 있다.
6월 항쟁은 7~9월 노동자 대투쟁과 연속적인 과정에 있는 하나의 투쟁이다. 또한 6월 항쟁과 7~9월 노동자 대투쟁은 로자 룩셈부르크가 정치투쟁과 경제투쟁의 상호 결합을 통한 노동계급 투쟁의 발전을 이야기한 대중파업의 과정으로 이해해야 한다.
6월 항쟁은 정치적 민주주의 투쟁이고 7~9월 노동자 대투쟁은 경제적 민주주의 투쟁이라고 주장하며 두 투쟁을 민주주의 투쟁으로만 규정하는 것도 문제가 있다. 정치투쟁과 경제투쟁 사이에 만리장성이 존재하는 것은 아니며 정치투쟁의 과정에서 경제적 요구를 제기하는 것이 투쟁을 발전시키는 데 매우 중요하다는 것을 두 투쟁은 보여 줬다.
사회주의자들의 과제는 두 투쟁을 결합시키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다.
16 ‘불완전한 민주화를 특징으로 하는 87년 체제’의 문제를 지적하며 정치 제도나 헌법의 개선을 대안으로 제기한다. 17 즉, 부르주아 민주주의를 강화하는 것이 대안이라는 것이다.
근래 박근혜 정권 퇴진 운동을 평가하며 ‘87년 체제’에 대한 이야기가 다시 나오고 있다. ‘87년 체제’가 ‘민주주의와 권위주의가 동거하는 어떤 체제로 퇴행’해서 박근혜 최순실 게이트가 생겼다거나18 야권분열로 대선에서 노태우가 당선된 1987년처럼 죽 쑤어서 개 주는 상황이 재현되지 않으려면 결선투표제를 도입하거나 촛불공동정부를 구성해야 한다는 대안을 제시하기도 한다. 19 대체로 실천적 결론은 부르주아 정당을 지지하거나 부르주아 정치 체제를 개선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따라서 광장에서 사람들이 희망하고 요구한 것을 실현하는 문제는 운동의 몫이 아니라 국회와 정부의 몫이라고 주장한다.하지만 1987년을 돌아보며 우리가 진정으로 이어받아야 하는 것은 이것이 아니다.
1987년 좌파의 주요 세력이었던 재야와 학생운동은 군부독재와의 타협 없는 투쟁을 주장했지만 그 대안은 부르주아 민주주의 체제를 확립하는 것에 머물렀기 때문에 6월 항쟁 이후 “선거를 통한 민주주의 혁명”을 목표로 설정하면서 노동자 투쟁에 대한 조직적 준비와 개입을 하지 못했다.
1987년 6월 항쟁과 뒤이은 노동자 투쟁은 부르주아 민주주의적 요구라도 노동계급만이 일관되게 수행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 줬다. 동요하는 야당과 달리 노동자들이 거리와 작업장에서 자신들의 힘을 발휘했기 때문에 6월 항쟁의 성과가 반동으로 파괴되지 않고 지속될 수 있었다.
오늘날 박근혜 퇴진과 구속의 성과를 바탕으로 모든 적폐를 청산하는 길은 노동자들의 고유의 힘을 발휘하도록 할 때 가능할 것이다. 또한 1987년 대중파업의 경험을 이어받아 거리에서의 자신감이 작업장에서 발휘될 수 있도록 노력하는 것이다.
주
- 〈조선일보〉 2017년 3월 13일자 사설 ‘광화문광장 흉물 천막들 이제 걷어낼 때다.’ ↩
- 하먼 2004. ↩
- 이미 1980년 12월 광주 미문화원이 불에 탔을 뿐 아니라 노동계급의 중요성을 인식한 투사들도 증가하기 시작했다. ↩
- 이원보 2013, p257. 매우 폭압적인 분위기 속에서도 영등포 일대에서 격렬한 가두시위가 벌어지기도 했다. ↩
- 한홍구 2010, p108. 1983년 안기부의 보고서에는 사법부가 형량을 높여 정권의 인기만 떨어진다며 형량을 낮추는 조치가 들어가 있다. ↩
- 서중석 2011, p219. ↩
- 대우자동차 투쟁이 승리한 데에는 다른 사업장으로의 투쟁 확산을 막기 위한 정부의 용인과 양보의 여지가 있었던 사측의 상황이 작용했다. 하지만 10여 명의 소수 활동가들이 투쟁을 조직하기 위한 노력을 1984년부터 꾸준히 진행해온 결과이기도 했다. ↩
- 서중석 2011, p226. ↩
- 서중석 2011, p273. ↩
- 서중석 2011, p336. ↩
- 〈워싱턴포스트〉 특파원 돈 오버도퍼는 당시 젊은 장성들이 시위대는 정당한 명분을 추구하고 있으며 군대를 동원하면 엄청난 파국이 초래될 것이라고 말한 것으로 전했다. ↩
- 서중석 2011, p368. ↩
- 정해구 2011, p127. ↩
- 한국기독교 사회문제연구원 편 1987, p65. ↩
- 6월 10일부터 마산·익산·인천에서 노동자들은 ‘노동3권 쟁취,’ ‘임금 인상’ 등의 구호를 외치며 시위에 참여했다. ↩
- 최장집 2017, p17. ↩
- 손호철 2017. ↩
- 최장집 2017, p53. ↩
- 손호철 2017, p119. ↩
참고 문헌
서중석 2011, 《6월 항쟁》, 돌베개.
손호철 2017, 《촛불혁명과 2017년 체제》, 서강대학교 출판부.
이원보 2013, 《한국노동운동사 100년의 기록》 개정증보판, 한국노동사회연구원.
정해구 2011, 《전두환과 80년대 민주화운동》, 역사비평사.
최장집 2017, 《양손잡이 민주주의》, 후마니타스.
하먼, 크리스 2004, 《세계를 뒤흔든 1968》, 책갈피.
한국기독교 사회문제연구원 편 1987, 《7~8월 노동자 대중투쟁》, 민중사.
한홍구 2010, 《지금 이 순간의 역사》, 한겨레출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