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Ⅱ: 1987년 6월 항쟁·노동자 대투쟁 30주년
1987년 7~9월 노동자 대투쟁 30주년 ─ 노동계급의 결정적 힘을 보여 주다
연인원 1천7백만 명의 노동자·민중이 5개월간의 투쟁을 통해 박근혜를 파면·구속시켰다. 통쾌한 승리였다. 이명박근혜 정부 9년 동안 불평등과 경제 위기에 고통받은 민중에게는 이승만을 몰아낸 4·19 혁명과 군부독재를 굴복시킨 1987년 6월 항쟁이 떠올랐을 것이다.
물론 6월 항쟁의 성과는 1987년 7~9월 노동자 대투쟁으로 이어지지 않았다면 반동으로의 회귀를 막지 못했을 수도 있다. 1960년 4·19 혁명은 곧 이은 5·16 쿠데타의 반동을 맞았고, 1980년 ‘서울의 봄’은 신군부의 광주 학살로 막을 내렸다. 그러나 1987년 6월 항쟁을 뒤이은 7~9월 노동자 대투쟁은 노동계급의 결정적 힘을 보여 주며 군부독재의 반동 시도를 막을 수 있었다.
박근혜 정권 퇴진 운동으로 힘을 느낀 노동자들 중에는 작업장으로 돌아와 자신들의 조건을 변화시켜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1987년 6월 항쟁으로 자신감을 얻은 노동자들이 일터로 돌아와 무엇을 할 것인지를 고민했듯이 말이다.
박근혜 정권 하에서 빼앗긴 민주적 권리를 되찾고, 노동자들의 요구를 쟁취하기 위해서는 노동계급 고유의 힘을 사용해야 한다. 이런 점에서 1987년 7~9월 노동자 대투쟁 30주년을 맞아, 진정한 사회 변화의 원동력이 노동계급의 투쟁임을 되짚어 보는 것은 큰 의미가 있다.
6월 항쟁과 노동자 투쟁
6월 항쟁에 참가한 ‘시민’ 중 다수는 미조직 노동자들이었다. 그들은 항쟁 초기부터 자신들의 요구를 구호로 표현하는 등 적극적으로 거리 시위에 참가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드러났지만, 그들의 참가는 6월 항쟁이 단순히 6·29 선언으로 끝나지 않고 전진할 수 있었던 이유였다. 인천을 비롯해 안양·성남처럼 노동자가 많은 지역에서는 6월 항쟁 초기부터 노동자들이 참가했다. 특히 성남 등 중소 도시에서 노동자들은 시위대의 선두에 섰고, 경찰에 맞서 전투적으로 싸웠다. 당시 이 지역들에서 체포된 사람들 가운데 노동자들이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었던 점은 이를 잘 보여 준다.
전국적으로는 6월 13일쯤부터 노동자들의 참가가 눈에 띄게 늘어나기 시작했고 갈수록 참가자 수는 많아졌다. 소위 ‘넥타이 부대’라고 불린 미조직 사무직 노동자들이나 서비스 부문 노동자들도 많이 참가했다. 군부독재는 이 즈음 군대를 동원할지 말지를 고민하기 시작했고, 이들이 동요하는 사이 투쟁은 눈덩이처럼 커졌다. 7~9월 노동자 대투쟁의 중요성을 인정하는 연구자 중 한 명인 노중기는 “항쟁이 노동자 계급까지 확산되던 6월 말의 시점에서 지배 블럭이 민주화 선언을 급히 발표하였던 것도 노동운동의 현재적 잠재적 역량을 평가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결과였다”고 평가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6·29 선언이 발표됐다. 거대한 대중의 힘은 독재자 전두환이 선언한 호헌을 철폐시키고 승리를 얻어 냈다. 직선제 쟁취 이후 부르주아 야당과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이하 국본)는 대통령 선거에 몰두했다. 하지만 6월 항쟁에 참가하면서 거리를 누빈 대중의 열망은 직선제 쟁취로만 국한된 것은 아니었다. 군부독재 하에서 벌어진 온갖 억압적 정책에 대한 청산을 원했다. 노동자들은 멈추지 않고 또다시 행동에 나섰다. 7월 6일에 결성된 ‘민주헌법쟁취노동자공동위원회’는 성명서를 발표해 투쟁의 지속을 결의했다. “6월 29일 노태우의 발표는 미국과 군부독재 정권이 노동자를 비롯한 전체 민중들의 거센 투쟁에 밀려 한 형식적이고 기만적인 것에 불과하지 결코 완전히 물러선 것은 아니다. 해고 노동자들의 즉각 복직, 노동3권의 완전 보장, 8시간 노동제와 실질생계비 보장하는 최저임금제 실시, 노동운동 탄압하는 국가보안법의 즉각 철폐, 노조의 자유로운 정치 활동의 보장” 등이 실질적으로 달성될 때까지 투쟁하겠다고 말이다.
전두환 군부독재의 항복 선언은 노동자들의 자신감을 고무했다. 민주주의 투쟁이 노동자들의 경제 투쟁에 기름을 부었다. 노동자들은 군부독재가 양보한 상황을 이용해 7월 초부터 투쟁에 나섰다. 로자 룩셈부르크가 경제 투쟁과 정치 투쟁의 결합을 제기한 대중파업이 현실에서 펼쳐졌다.
정치 투쟁의 모든 활발한 공격과 승리는 경제 투쟁에 강력한 자극을 준다. 이것은 정치 투쟁의 활발한 공격과 승리가 노동자들에게 처지 개선을 위한 싸움으로 시야를 넓혀 주고 또 싸우려는 의욕을 강화시킴과 아울러 노동자들의 투쟁 정신을 강화시킨다는 점에서 그렇다. 정치 행동의 물결이 고양된 뒤에는 언제나 수많은 경제 투쟁의 싹을 틔우는 기름진 퇴적물이 남고, 또 그 역도 마찬가지이다.
비록 6월 항쟁에 조직된 대열로서 참가하지는 않았지만, 승리의 기쁨을 맛본 노동자들은 자신의 작업장 삶이 그대로인 현실에 분노하지 않을 수 없었다.
박정희·전두환 군부독재의 억압적 노동 통제 하에서 억눌려 온 노동자들의 요구는 짧은 기간 동안 폭발적으로 분출했다.
노동자들은 임금 인상, 노동시간 단축, 조장에 의한 자의적인 평가 폐지, 화이트칼라와 블루칼라 노동자 간의 지위 구분 철폐, 식사의 질 개선, 복장과 머리 길이 규제 철폐, 강제적인 아침 체조 중단 등을 요구했다. 물론 이러한 요구를 쟁취하기 위해 국가와 자본으로부터 독립적인 민주노조 건설이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노동자 계급의 거대한 진출
그 첫 출발은 현대 재벌 정주영이 죽기 전에는 노동자들이 절대 빛을 볼 수 없을 것만 같았던 현대그룹에서 시작됐다. 정주영은 입버릇처럼 ‘내 눈에 흙이 들어가기 전에는 노조를 허용할 수 없다’고 했다. 그러나 7월 5일 현대엔진 노동자 1백1명이 울산 옥교동 디스코텍에 모여 ‘경축 현대엔진(주) 노동조합 결성대회’를 열어 노동운동의 불모지 ‘현대 왕국’에 노동조합의 첫 깃발을 꽂았다.
현대엔진 노조의 첫 홍보물은 그들의 노동조합 결성을 이렇게 말하고 있다.
강도 높은 장시간 노동, 열악한 근로조건, 산업재해 속에서 이기적인 욕망에 사로잡혀 인간을 인간으로 보지 않고 이윤 추구의 도구로만 보는 가진 자의 온갖 횡포와 사회적 멸시 속에서 소외된 삶을 살아 온 우리 노동자들은 이러한 악조건을 더 이상 방관할 수 없었으며 또한 다음 세대가 우리의 전철을 되밟지 않게 하고 정당한 노동의 대가와 인간성 회복을 위해 전 근로자가 일치단결하여 현대엔진 노동조합을 탄생시켰다.
현대엔진에서 노조가 결성됐다는 소식은 다른 계열사 노동자들에게 매우 고무적인 영향을 끼쳤다. 7월 16일 현대미포조선 노조 설립 신고서 탈취 사건은 이런 자신감에 불을 지폈다. 무엇보다 1987년 노동자 대투쟁의 핵심은 현대중공업 노동자들이었다.
인명 경시, 비인격적 대우, 최고의 대형 산재율, 최장시간 노동, 저임금, 위해 사업장, 거듭되는 대량 인원 감축 등 살인적 조건에서 현대중공업 노동자들의 분노는 커져 왔다. 7월 21일 사측이 어용노조를 만들자 그 분노가 한꺼번에 터져 나왔다. 노동자들은 ‘현대중공업 노조개편 대책위원회’를 만들고 1만 7천 명이 운집한 가운데 “어용노조 물러가라”, “임금 인상하라”, “상여금 차등지급 철폐하라” 하고 외쳤다. 투쟁 분위기가 무르익어 갈 즈음인 8월 6일, 정주영이 관리자들을 모아 놓고 훈시하기 위해 울산에 내려왔다. 정주영이 훈시하고 있던 체육관 주위를 노동자 5백여 명이 에워싸고 ‘임금 25퍼센트 인상, 어용노조 퇴진’ 등을 외치며 농성을 벌였다. “이때 누군가 정 회장을 향해 흙을 뿌렸다. 마치 정 회장의 눈에 흙이 들어가게 만들어 민주노조를 인정하게 만들겠다는 심정으로!”
한편, 임금 인상 등 노동조건을 개선하려면 단위 사업장뿐 아니라 현대그룹과 맞설 필요가 있었다. 이러한 문제의식은 8월 8일 11개 사업장 노조 대표들이 모여서 현대그룹노동조합협의회를 결성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현대그룹 노동자들은 8월 17~18일 덤프트럭과 지게차 등 중장비를 앞세우고 시내로 행진했다. 18일 시위대가 공설운동장에 도착했을 때 대열은 6만 명으로 불어났다. 결국 노동부 차관 한진희가 울산에 내려와 노동자들과 협상을 해야 했다.
1987년 노동자 대투쟁이 울산의 현대그룹 투쟁에서 시작됐다는 점은 중요하다. 현대는 당시 한국에서 가장 큰 자동차 공장과 조선소를 보유한 가장 큰 재벌그룹이었다.
다른 재벌기업처럼 현대도 노동조합을 금지했다. 이런 곳에서 민주노조가 건설된 것은 다른 기업의 노조 활동가들에게 커다란 자신감을 줬다.
울산 현대 노동자들의 투쟁에 이어 태광산업·럭키·동양나일론·풍산금속 등에서 민주노조 건설 투쟁이 벌어졌다. 이후 대한조선공사, 국제상사 여성 노동자, 화학·신발업체 등 부산과 마산·창원의 노동자들이 투쟁에 나섰다. 투쟁은 8월 초순 이후 남부지방에서 전국으로 확산돼, 8월 4일에는 인천 대우중공업 등에서 노조 건설이 시작됐다.
노동자들의 투쟁은 중공업, 제조업에서 시작해 점차 광업·교통·항만, 그리고 서비스 부문으로 확산됐다. 투쟁은 공간적으로는 영남 공업단지로부터 수도권과 기타 지역으로, 기업 규모로는 대기업으로부터 중소기업으로, 업종으로는 제조업에서 기타 산업으로 확대됐다.
1987년 7월부터 9월까지 3천3백41건의 노동쟁의가 발생했는데, 거의 대부분 작업 중단, 비조직적 파업, 시위 형태를 띠었다.
그해 여름에 발생한 노동쟁의 건수는 1960년 초반 이후 수출지향적 산업화 과정 전 기간 동안 발생한 전체 노동쟁의 건수를 능가했다. 노동쟁의가 절정에 달한 8월 중순에는 하루에 1백 건 이상의 노동쟁의가 발생했고, 이것은 박정희와 전두환 시대의 한 해 평균 노동쟁의 건수에 해당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노사분규에 참가한 노동자는 당시 10인 이상 기업체 정규직 노동자의 거의 3분의 1에 해당하는 1백20만 명이었던 것으로 추산된다. 당시 노동자들은 ‘선파업 후협상’을 했다. 파업의 94.1퍼센트는 불법파업으로 분류됐다. 노동자들은 파업·농성·시위 같은 쟁의행위에 먼저 돌입한 후 조직을 구성했고, 그 다음에 사용자와의 협상을 요구하는 형태로 행동했다.
아래로부터 투쟁을 통해 만들어진 노동조합의 대표자들은 평조합원들의 직접적인 통제를 받고 있었다.
9 하고 술회한 것처럼 현장 노동자들의 전투성이 꽃을 피우던 시기였다.
당시 현대중공업 쟁의부장을 맡았던 정병모 씨가 “조합원들이 나의 피를 요구하고 있는 것 같았다. 나는 온몸의 피가 마르는 것을 느꼈다”민주노조 건설 요구에 이어 임금 인상이나 노동조건 개선과 같은 개별 사업장의 경제적 요구가 압도적으로 많았는데, 그중 임금 인상이 전체의 약 70퍼센트를 차지했다. 대투쟁 결과 임금이 25~30퍼센트 인상됐다.
10 그러나 박정희의 ‘선성장 후분배’ 논리는 급속한 중화학 공업화 추진 과정에서도 계속됐다. 저임금 기조는 바꾸지 않았고, 노동시간과 산업재해는 급격히 늘었다. 노동 규율과 통제는 더욱 엄혹했다.
이처럼 임금 상승과 민주적 권리 확립은 노동자 투쟁의 결과였다. 그러나 박정희를 찬양하는 국정교과서에는 “산업화로 임금이 상승해 중산층이 형성되었고 이것이 민주화의 바탕이 되었다”고 적혀 있다. “중화학 공업화가 진행되면서 제조업 국가의 구성이 종래의 여성 노동자에서 숙련 남성 노동자 중심으로 변모하였고, 임금도 상승하였다”는 것이다.유신체제는 한국 자본주의가 중화학 공업화에 성공할 수 있도록 보장해 준 초착취 억압책이었다. 해외 차관 지원, 국민 혈세 지원 등 정부의 막대한 특혜로 오늘날 현대와 삼성 등이 재벌로 성장했다.
1970년대 중반 이래 중화학 공업화에 의해 산업구조가 크게 변하고, 그에 따라 한국 자본주의의 주력 노동자 계급이 형성됐다. 1987년 노동자 대투쟁이 자동차, 조선, 기계 산업의 거대 공장에서 시작된 것은 이러한 변화를 반영한 것이었다.
노동계급 정치와 조직의 중요성
노동자들은 투쟁을 통해 삶의 주체임을 인정받게 됐고, 인간으로서 존재 가치를 확인받을 수 있었다. 공장 노동자들은 더는 ‘공순이’나 ‘공돌이’ 같은 사회적 천대 대상이 아니었다. 전국적인 대규모 파업으로 노동자들의 거대한 힘을 보여 준 것이다.
1987년 노동자 대투쟁은 9월이 되면서 가라앉기 시작했다. 8월 28일 국무총리의 ‘좌경용공 세력 척결을 위한 담화’ 이후 대우조선 이석규 열사 장례식은 정부가 대규모 이데올로기 공세를 펼치면서 쟁의 현장에 공권력을 투입할 의지를 실행에 옮긴 전환점이었다.
9월 들어 현대중공업과 대우자동차 노동자들의 농성투쟁이 무력으로 진압되고, 노동자와 민주인사에 대한 대규모 수사와 구속이 뒤따랐다.
정부가 이렇게 공세로 전환한 데에는 부르주아 야당이 한몫했다. 야당은 노동자 대투쟁에 대해 군부 정권과 별반 다르지 않은 논리를 폈다. 야당은 “자칫 본의 아니게 민주화를 원하지 않은 세력에 이용”당하지 않도록 투쟁의 자제를 촉구했다. 그리고 정부와 기업주의 폭력 진압에 대해서는 일언반구도 없이 암묵적으로 지지를 보냈다.
6월 항쟁을 주도했던 국본은 대통령 선거 일정을 기다리며 투쟁을 멈춘 상태였다. 야당이 노골적으로 투쟁을 저지하려 했다면, 국본은 노동자 대투쟁에 관심이 없었다. 노동자 대투쟁은 “민주화 이행을 주도했던 중간계급을 보수화시키고, 지배 블럭에 반격의 원인을 제공함으로써 민주화-정권교체에 부정적 요인으로 작용한다”고 여겼다.
1987년 노동자 대투쟁이 마무리가 된 것은 기업주들이 어느 정도 양보한 데다가, 야당과 국본이 투쟁에 부정적 영향을 끼친 것을 이용해 국가 권력이 폭압적으로 탄압했기 때문이다. 만약 대중파업을 전국적 차원의 단일한 조직으로 결집시킬 노동계급의 정치조직이 존재했다면 또 다른 그림이 펼쳐질 수도 있었다.
노동자 대투쟁의 교훈
노동자 투쟁은 3년 동안 지속됐다. 1987년 말 노조 설립 요건 완화, 법정 노동시간 4시간 단축 등으로 노동법이 개정됐다. 현대중공업 노동자들은 1988년에도 단체협약 체결과 해고된 노조 지도자 4명의 복직을 요구하며 1백28일 동안 최장기 파업을 벌였고, 1990년에는 골리앗 투쟁을 전개했다. KBS 노동자 등 사무직 노동자들이 파업했고, 1989년에는 1천5백 명의 해직을 감수하며 전교조가 결성됐다.
민주노조 4천 개가 새롭게 결성돼, 전체 노동조합 수는 1986년 말 2천6백58개에서 1988년 말 6천1백42개로 대폭 증가했다. 약 70만 명이 노동조합에 새로 가입해, 노동조합원 숫자도 1백만 명에서 1백70만 명으로 증가했다. 3년 동안 매년 임금이 10~30퍼센트 인상됐다.
한편, 일부 사람들의 주장과 달리, 1987년 노동자 대투쟁은 순전히 자생적인 투쟁이 아니었다. 앞선 시기 투쟁의 산물이었다.
11 1987년 노동자 대투쟁은 1970년대 경공업 중심의 여성 노동자 투쟁으로부터 1980년대 대우자동차 파업과 구로 연대 파업 등 일련의 노동자 투쟁의 연속선 상에서 벌어졌다.
한국 노동계급의 역사를 연구한 구해근이 “한국 노동계급의 형성 과정에서 중요한 변화는 1980년대에 이루어졌으며, 이는 1970년대부터 시작된 변화들이 누적된 결과”라고 했듯이,무엇보다 1987년 노동자 대투쟁은 부르주아 민주주의적 요구조차 노동계급의 힘을 통해 쟁취할 수 있다는 트로츠키의 연속혁명론이 적용된 사례였다. 1987년 7~9월 노동자 대투쟁이야말로 민주화의 진정한 동력이었다.
1987년 투쟁 이후 30년 동안 노동계급의 결정적 패배가 없었기 때문에 한국 사회는 권위주의 체제로 회귀하지 않았다.
일부 좌파들은 박근혜 정부의 등장을 ‘파시즘으로의 회귀’라고 주장했지만, 이는 파시즘을 잘못 이해하고 부르주아 민주주의로의 진정한 이행 동력이 노동자 투쟁이라는 점을 보지 못한 주장이다.
1987년 6월 항쟁과 7~9월 노동자 대투쟁으로부터 시작된 부르주아 민주주의는 민주노총 합법화와 민주노동당의 등장으로 이어졌다. 물론 이 과정은 매년 커다란 노동자 투쟁과 1996~97년 대중파업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박근혜 정부는 2008년 이후 가속화되고 있는 경제 위기의 대가를 노동계급에게 떠넘기기 위해 공격을 강화했다. 이를 위해 통진당 해산, 전교조 법외노조화 등 여러 민주적 권리를 공격해 왔다. 이에 맞서 노동자들은 박근혜 정부 4년 동안 저항의 중심을 이뤄 박근혜 정권 퇴진 운동의 밑거름이 됐다.
그러나 노동자 계급은 1987년 7~9월 노동자 대투쟁처럼 자신의 고유한 힘을 충분히 사용하지 못했다. 부르주아 민주주의가 안착화되면서 노동조합 지도부의 관료주의가 강화되고, 선거에 의존하는 개혁주의 정치가 자리 잡았기 때문이다. 아래로부터 투쟁에 바탕을 둔 노동계급의 정치가 중요한 이유다.
박근혜 퇴진만이 아니라 진정한 적폐 청산은 자본주의에 대한 도전과 연결돼야 한다. 인구의 압도 다수로서의 힘을 가지고 있고 자본주의의 고리를 끊을 유일한 힘을 가지고 있는 노동자 계급의 투쟁이 확대될 때만이 진정한 적폐 청산이 가능할 것이다.
1987년 노동자 대투쟁의 의의는 노동자 투쟁이야말로 진정한 사회 변화의 원동력이라는 점이다.
MARX21
주
- 성남시청이 작성한 《6월 20일-21일 가두시위 종합보고서》에 따르면, 6월 19일 연행자 80명 가운데 근로자는 34명(42.5퍼센트), 대학생은 8명(10퍼센트), 막노동자는 6명(7.5퍼센트)이었다. ↩
- 노중기 1997, p209. ↩
- 김영수 외 2013, p62. ↩
- 룩셈부르크 2002, p193. ↩
- 이수원 1994, p51. ↩
- 이수원 1994, p69. ↩
- 구해근 2002, pp228-230. ↩
- 노중기 1997. p202. ↩
- 이수원 1994, pp114-115. ↩
- 국정 한국사교과서 2017, p272. ↩
- 구해근 2002, p37. ↩
참고 문헌
국정 한국사교과서 2017, 국사편찬위원회.
구해근 2002, 《한국노동계급의 형성》, 창작과비평사.
김영수 외 2013, 《전노협 1990~1995》, 한내.
노중기 1997, ‘6월 민주항쟁과 노동자대투쟁’, 《6월 민주항쟁과 한국사회 10년》, 당대.
룩셈부르크, 로자 2003, 《룩셈부르크주의》, 풀무질.
이수원 1994, 《현대그룹 노동운동, 그 격동의 역사》, 대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