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 혁명 100주년
어떻게 레닌은 혁명이 10월 혁명으로 향하도록 했는가? *
레닌이 러시아로 돌아왔던 1917년 4월은 증오의 대상이었던 차르를 전복한 2월 혁명이 일어난 지 5주가 지났을 때였다. 이 글은 혁명이 사회 최상층의 변화를 넘어 더 나아가는 데서 레닌이 했던 결정적 구실을 밝히고 있다. 레닌의 ‘4월 테제’는 대담함과 지도력을 구체적으로 보여 주는 본보기다.
“이것은 미친 사람의 헛소리다.” 레닌이 핀란드역에 도착한 다음 날인 1917년 4월 4일 페트로그라드에서 한 연설을 두고 알렉산더 보그다노프가 한 말이다. 레닌의 연설문은 볼셰비키 기관지 〈프라우다〉가 ‘4월 테제’라는 이름으로 발표했다.
당시에는 볼셰비키 당원이 아니었던 보그다노프만 레닌의 “헛소리”에 놀란 것이 아니었다. 페트로그라드를 비롯해 러시아 전역의 많은 지도적 볼셰비키 당원들도 레닌의 분석과 강령에 당황해 했다. 그들 중 한 명은 “레닌의 테제는 폭탄이 터지는 것 같은 충격을 줬다”고 회고했다.
그러면 레닌은 뭐라고 말했을까? 레닌의 연설이 낸 효과를 이해하려면, 먼저 그 내용을 설명해야 한다. 볼셰비키 지도자 레닌은 3세기 동안 러시아를 지배하던 로마노프 전제정을 타도한 2월 혁명이 터진 지 5주 후에 페트로그라드에 도착했다. 큰 격변 속에서, 거의 동시에 두 개의 정치 권력이 생겨났다. 하나는 부르주아 정치인과 자산 소유주들을 포함한 임시정부였다. 다른 하나는 노동자·병사 평의회(소비에트)였다. 소비에트는 반란이 일어난 병영과 도시 전역의 작업장에서, 그리고 2월 혁명의 5일간 경찰에 맞서 싸우며 바리케이드를 세운 이들이 선출한 대표자들로 구성됐다.
이중(이원) 권력의 시기라 알려지게 되는 이 상황은 임시정부와 소비에트 양쪽 모두에게 딜레마를 안겼다. 한편으로 임시정부는 소비에트의 동의 없이는 의미 있는 일을 할 수 없었다. 다른 한편으로 소비에트 지도자들은 자신들의 권력이 임시정부의 권력보다 압도적으로 강했음에도, 마치 역사적 원칙이라도 되는 양 임시정부가 국가를 운영해야 한다고 여겼다.
소비에트 지도자들이 그렇게 여긴 데에는 이유가 있다. 많은 볼셰비키 당원들을 포함해 다수가 1905년 혁명의 실패 이후 추구한 목표 ― 프롤레타리아와 농민의 민주적 독재가 이끄는 부르주아 민주주의 혁명 ― 가 2월 혁명을 통해 이뤄졌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이 목표의 바탕에는, 러시아의 부르주아 계급이 너무 약하고 소심해서 자신의 이름을 내건 혁명을 수행하지 못할 것 ― 이는 러시아의 부르주아가 1917년 2월 혁명에서 한 구실이 별로 없었다는 점으로 입증됐다 ― 이지만, 노동자의 사회주의 혁명으로 나아가기 위한 조건을 마련하려면 러시아가 자본주의 지배의 시기를 거쳐야 한다는 사고가 있었다.
소비에트 지도자들이 권력을 임시정부로 넘긴 것은 그들의 분석 때문만은 아니었다. 소비에트가 처음 구성됐을 때 대표자의 다수는 프티부르주아 출신자들이었고, 그들은 선출된 자유주의 정치인들이 소비에트를 이끌어 주길 원했다. 그럼에도 소비에트는 변화를 가져왔다. 요컨대 소비에트는 명령 1호 ― 트로츠키는 이를 “2월 혁명의 유일하게 가치 있는 문서”라고 불렀다 ― 를 발표해, 병사 평의회가 무기 통제권을 “어떠한 경우에도 장교에게 넘기지 않고” 선거를 치를 수 있게 했다.
·영국·미국 정부와 거래를 지속한다는 것을 의미했다.
이들 소비에트 지도자들은 집권한 임시정부가 차르 잔당의 반혁명뿐 아니라 독일군의 침략으로부터도 혁명의 성과를 지키길 바랐다. 이것은 임시정부가 전시 동맹국인 프랑스그러나 이는 또한 수많은 농민 병사들을 전방의 도살장으로 보내고, 식량 부족과 그로 인한 도시의 물가 폭등 상황을 계속 그대로 내버려 둔다는 것을 의미했다. 볼셰비키가 보기로 이것은 1914년에 전쟁이 시작된 이후 줄곧 지켜 왔던 원칙, 즉 자국의 패배를 주장하고 제국주의 전쟁을 계급 전쟁으로 바꾸려 애쓴다는 원칙을 뒤집는 것이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2월 혁명으로 모든 것이 변했다고 느꼈다. 레닌이 러시아에 도착하기 겨우 며칠 전에 열린 볼셰비키 협의회에서 한 대의원은 이렇게 주장했다. “평화협정을 맺는 동안, 우리는 계속 무장해야 합니다. 이제 싹트기 시작한 우리의 자유를 지켜야 합니다.”
이렇게 생각과 판단들이 충돌하는 혼란 가운데, 4월 3일 레닌이 국제열차에서 내렸다. 수많은 병사·노동자들과 소비에트와 임시정부의 고위 인사들이 레닌을 맞았다. 당시 페트로그라드 소비에트 집행위원회 의장이자 멘셰비키였던 니콜라이 츠케이제가 커다란 꽃다발을 선물하며 레닌을 공식적으로 환영했다.
츠케이제는 이렇게 말했다. “현재 혁명적 민주주의의 으뜸 과제는 내부와 외부의 모든 공격으로부터 우리의 혁명을 방어하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 이 목표를 달성하려는 우리의 노력에 당신도 함께하길 바랍니다.” 그 다음으로 한 젊은 해군 사령관이 레닌에게 임시정부의 일원이 되길 바란다고 했다.
페트로그라드 소비에트 지도부의 일원이었던 니콜라이 수하노프는 당시 상황을 목격하고 이렇게 말했다. “레닌은 그런 제안들에 조금도 개의치 않았다. … 그는 소비에트 집행위원들을 등지고 서서 이렇게 답했다. ‘병사·노동자 동지 여러분, 여러분들과 함께 러시아 혁명의 승리를 맞아 기쁘고, 여러분이 국제 프롤레타리아 군대의 선봉대가 된 것이 기쁩니다. … 이제 머지 않았습니다 … [세계] 민중이 자국의 자본주의 착취자들에게로 총구를 돌릴 것입니다. 여러분이 쟁취한 러시아 혁명이 새 시대를 열었습니다. 국제 사회주의 혁명 만세.’”
그 뒤 레닌은 환영 인파에 둘러싸여, 나중에 볼셰비키가 임시본부로 쓰게 되는 빈 건물로 이동했다. 레온 트로츠키에 따르면, 거기서 여러 연설이 이어졌고, 레닌은 다시 한번 “청중에게 열정적 생각들을 폭포수처럼 쏟아냈다. 가끔은 채찍질 같이 느껴질 정도였다. … 레닌의 연설은 그의 최측근들조차 섬뜩하게 느낄 정도였다.”
다음 날 레닌은 볼셰비키당 협의회에서 자신의 생각을 짧게 요약한 ‘4월 테제’를 발표했다. 트로츠키는 나중에 이 글을 러시아 혁명에서 가장 중요한 문서의 하나라고 말했다. 레닌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1) 제국주의 전쟁 지지 의견에 타협해서는 안 된다.
2) 러시아는 “혁명의 첫째 단계를 지나 … 둘째 단계로 나아가고 있다. 이제 권력은 프롤레타리아와 가장 빈곤한 농민의 손에 놓여야 한다”
3) 임시정부를 지지해서는 안 된다. “[임시정부의] 순전히 거짓된 약속을 분명하게 폭로해야 한다”
4) 노동자 평의회만이 유일한 형태의 혁명 정부임을 대중에게 알려야 한다.
레닌의 주장은 계속 이어졌다: 경찰, 군대, 관료 체계를 폐지해야 한다. 모든 선출직 ― 그들은 소환될 수 있었다 ― 의 임금은 노동자 평균 임금을 넘지 않아야 한다. 부동산을 모두 압류하고, 그 처분권은 지역 노동자·농민 평의회가 맡아야 한다. 국내 은행을 모두 국유화해 소비에트가 통제하는 하나의 공립은행으로 만들어야 한다. 소비에트가 사회적 생산과 생산물 분배를 통제해야 한다.
레닌의 주장은 느닷없는 것이 아니었다. 2월 혁명 이후 레닌은 망명지 스위스 취리히에서 혁명에 관한 자신의 견해를 써 계속 러시아로 보냈다. 특히 2월 혁명을 보면서 자신의 이전 전망이 완전히 바뀌었음을 밝혔다.
그 다섯 번의 ‘먼 곳에서 보낸 편지’에서 레닌은 소비에트 지도자들이 노동자들에게 임시정부를 지지하라고 말한 것은 배신 행위라고 비판했다. 그는 국가 기구를 “분쇄”하고 “경찰력, 군대, 관료 체계를 병합하고 민중을 무장시켜 새 기구로 대체”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혁명을 방어하고 “빵, 평화, 자유”의 대의를 진전시키기 위해서 말이다.
그러나 레닌의 경고에 주의를 기울인 사람이 별로 없었음이 분명했다. 레닌의 ‘4월 테제’에 대한 [볼셰비키 협의회] 대의원들의 즉각적 반응은 기껏해야 당황하거나 심지어 적대적이기까지 했다. 2월 혁명 때 석방돼 볼셰비키 기관지 〈프라우다〉의 편집권을 맡은 레프 카메네프와 이오시프 스탈린이 레닌의 주장에 특히 부정적이었다. 카메네프는 ‘4월 테제’가 “구체적 설명”이 없고 “[2월]혁명은 부르주아 혁명이지 사회주의 혁명이 아니”라고 고집했다.
많은 대의원들은 레닌이 러시아 소식을 자주 접하지 못해 당시 조건을 보지 못한다고 여겼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레닌이 제기한 결정적 상황 하나가 표면화됐다. 레닌의 주장은 다음과 같았다. “소수파일 때 우리는 [임시정부를] 비판하고 잘못을 폭로해야 합니다. 동시에 전체 국가 권력을 노동자 평의회로 이양해야 하는 이유를 설파해야 합니다. 그래야 민중이 경험을 통해 자신의 실수를 극복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 원리는 볼셰비키당 내에도 적용됐다. 페트로그라드 전역에서 열린 토론회, 그리고 결정적으로는 볼셰비키당의 여러 부문 대의원들이 모인 공식 모임에서 토론과 논쟁이 일어났다. [‘4월 테제’를 발표해] 다수의 동지들에게 충격을 준 지 3주 후, 드디어 레닌은 볼셰비키당의 제7차 전국 협의회에서 다수 대의원의 지지를 받았다.
레닌이 비교적 쉽게 승리할 수 있었던 데에는 당시 상황의 영향이 있었다. 임시정부가 “세계대전을 확실하게 승리로 이끌”고 동맹국들과 전리품을 나누는 데 동참하겠다는 결의문을 발표했고, 이에 반대하는 항의 시위가 널리 확산됐다. 함대와 병영에서 병사들의 격분이 터져 나왔고, 며칠 만에 거대한 시위대가 정부 각료들이 모여 있던 마린스키 궁을 포위했다. 이는 수많은 병사들과 노동자들이 정부 지지 입장에서 위기 해결을 위한 혁명적 결론으로 얼마나 빠르게 옮겨 갈 수 있는지를 보여 주는 사건이었다.
레닌의 승리의 의미를 과소평가해서는 안 된다. 볼셰비키당은 그 전 20년간 선두적인 좌파 정당이었고, 비합법 조건으로 지속적인 체포·구금의 위협 속에서 활동했지만, 전투적인 산업 투쟁으로 단련된 노동자들 사이에서 상당한 지지층을 구축했다. [그래서] 볼셰비키의 주장은 영향력이 있었다. 10월로 가는 길에 혁명이 잇따른 위기를 겪고 극복하면서, 볼셰비키의 영향력은 점점 더 커졌다.
레닌은 러시아 혁명이 중대한 갈림길에 섰을 때 페트로그라드에 도착했다. 그는 “당을 재무장”시키려는 결의로 볼셰비키 동지들과 논쟁했다. 그 과정에서 볼셰비키당은, 장차 10월 혁명을 위한 지지를 늘리고 10월 혁명을 완수할 자신감을 주는 정치로 무장할 수 있었다.
MARX21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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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Alan Gibson, How Lenin set the course for October, Socialist Review (April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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