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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의 시장화와 ‘돈주’의 구실에 대한 보충
《마르크스21》 19호에 실린 “최근 20년 동안 북한식 ‘시장화’와 김정은 정권의 불안정”에서 김어진은 1990년대 후반 이래 추진돼 온 북한의 시장화 추세에 대한 일정한 평가를 내놓았다.
1 이런 시장화가 국가 관료들의 통제 하에서 진행되고 있다고 지적했다. 간단히 요약하면, “북한 관료는 배급제가 불가능한 상황에서 북한 주민의 삶을 ‘자력갱생’에 맡겨 둬 장마당이 확대되면 다시 단속·처벌을 통해 시장확대의 이익을 일정하게 수거하고 다시 시장을 묵인·방조하고 은연중에 확대하는 방식”(121쪽)을 추진해 왔다는 것이다.
김어진은 북한의 시장화가 “소유권의 부분적 변화”나 “운영권의 실질적 사영화” 등의 방식으로 진행돼 왔으며, 그 결과 “당·군·내각에 연결된 무역회사와 기업소의 사업권 확장을 가져온 것은 사실”이지만김어진은 북한 관료들의 통제 하에서 추진된 일정한 시장화가 세수 확대라는 목적을 위한 것이며(126쪽), 김정은 정권이 이렇게 확보한 재정으로 핵·경제 병진노선을 추구하고 있다고 주장했다(127쪽).
또한 김어진은 1995년 이후 군부나 당의 권력기관으로부터 ‘와크’라는 무역허가권을 받고, 각종 외화벌이 사업을 통해 부를 축적해 나가는 ‘돈주’가 형성됐는데, 이들 중 일부는 단순한 영세상인들이 아니라 합작투자를 통해 조직화(분업화)·기업화(대형화)의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고 지적했다(111쪽).
김어진의 이와 같은 설명은 북한의 시장화와 돈주의 등장에 대한 양문수, 정은이 같은 학자들의 과도한 평가와 대비된다.
2 물론 시장화에 따른 북한 정부의 딜레마(“경제의 숨통을 틔우고 계획경제의 토대가 와해된 상황에서 국가는 시장의 힘을 빌릴 수밖에 없지만” 3 시장화가 진전되면 빈부격차의 확대 등 정치적 부담이 증가한다는 점 때문에 시장화를 억제한다는 점)를 지적하지만 말이다. 정은이도 북한에서 시장이 형성되는 역사적 과정과 국경 지역의 회령시장 사례 연구 등을 통해 시장화가 꽤 진척되고 있다고 주장한다. 4
양문수는 기본적으로 2002년 7·1 조치 이후로 북한에서 시장화가 진전됐고, 그래서 “공식경제/계획경제의 비공식경제/시장경제에 대한 의존성이 심화되었다”고 주장한다.5 그러나 설문조사로 북한 경제 전체에서 민간기업이 실질적으로 어느 정도를 차지하는지 그 규모를 판가름하기 힘들다. 생산 부문을 포함한 북한 경제 전체로 보면, 시장화된 영역보다는 국가가 직접 통제하거나 간접적으로 영향력을 행사하는 영역이 압도적인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럼에도 통계자료의 부족 때문에 북한 경제에서 자유시장이 포괄하는 범위에 대해 객관적 데이터를 제시하는 학자는 없다. 양문수는 탈북자 설문조사를 통해, 북한의 제조업의 20퍼센트, 무역의 40퍼센트, 서비스업의 50퍼센트를 개인위탁경영 방식으로 운영되고 있다고 추정한 바 있다.6 이런 연구들을 볼 때, 북한에서 화폐경제가 발전하고 그 과정에서 일부 돈주가 부유한 상인 집단으로 등장했다 할지라도 돈주라는 상인 집단이 (국가로부터) 독립적이고 다른 집단과 구분되는 독자적 계급을 형성했다고 보기는 힘들다.
일부 북한 연구자들도 북한의 시장화가 주요 국가기관에 의해 추진되고 있고, 또 매우 제한적이라고 지적함으로써 김어진과 비슷한 평가를 내리고 있다. 김병로는 “기존의 정치적 계층구조에서 기득권을 차지하고 있는 당원이 장사를 전문적으로 하는 상인계급으로 직접 진입하지는 않”으며, 권력기관이 시장 기제를 관리하고 통제하는 것을 통해 이윤의 일부를 수탈하는 구조라고 주장했다.북한에서 돈주라는 집단이 국가로부터 독립적인 지위를 갖고 있는지가 중요한 이유는 이들이 국가에 종속돼 있지 않고 국가로부터 독립적인 이해관계를 갖고 있는 집단인지를 분간하는 중요한 기준이기 때문이다. 즉, 북한 체제가 ‘폐쇄적 국가자본주의’에서 사적 자본을 용인하는 ‘시장을 포함한 국가자본주의’로 전환했는지를 판단하는 기준이 되는 것이다.
우파를 포함한 일부 학자들은 북한 사회에서 사적 자본의 형성과 시장경제로의 이행이 민주화나 자유화를 나타내는 것으로 이해하지만 실상은 전혀 그렇지 않고 계급 지배의 구조가 바뀌지 않은 게걸음일 뿐이다. 그럼에도 북한 사회에서 시장화의 정도가 어떤지와 독립적인 상인 계급의 등장 여부는 북한 사회의 (근본적이지는 않을지라도 의미 있는) 변화를 평가하는 데서 중요한 지표라 할 수 있다.
이런 연구에서 두 가지 역사적 사례를 살펴보는 것이 도움이 된다. 첫째는 봉건제에서 자본주의로 이행할 때 상인의 구실을 살펴보는 것이다. 크리스 하먼은 중국에서 일찍부터 제국이 등장했지만 상인들이 자본주의 발전을 추진하지 못했던 이유를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상인들과 부유한 무역가들이 완전한 자본가로 변모할 수 있는 능력을 약화시킨 중국의 특수성은 물질적인 것이었지 이데올로기적인 것이 아니었다. 중국의 상인 계급은 17세기와 18세기 유럽의 상인 계급보다 훨씬 더 국가 기구의 관료들에게 의존했다. 거대한 운하망과 관개 시설 같은 주요한 생산수단을 국가 관료가 운영했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중국 상인들은 국가가 잉여의 막대한 몫을 흡수해 황궁과 고위 관리의 사치스런 생활을 유지하고 이민족을 매수하는 등 비생산적인 데 사용했는데도 국가 기구와 협력하는 수밖에 없었다.”
위의 인용문은 크리스 하먼이 북한의 돈주에 대해 지적한 것이라 해도 손색 없을 정도로 북한의 현실과 잘 부합한다. 일부 돈주가 부유한 상인 집단으로 부상하고 와크를 통해 시장의 독점력을 행사할지라도 이들이 국가로부터 독립해 자신의 독자적 이해관계를 갖지 않을 경우에는 의미 있는 상인 집단으로 부상했다고 판단할 수 없으며 이들을 시장화 추진 세력으로 보기도 힘들다.
북한의 시장화와 민간기업 그리고 돈주의 등장을 평가할 때 도움이 되는 또 다른 사례는 1980년대 중국의 개혁개방 과정에서 농촌 지역에 우후죽순처럼 등장한 향진기업이다. 향진기업은 중국 행정기구인 향鄕과 진鎭에 소속된 기업이라는 의미이며, 주로 인민공사 내에 있던 사대기업이 향진기업의 모태가 됐다. 향진기업은 형식적으로는 향진 소속 주민들의 소유(집체集體 소유)였지만, 그 일부는 지방정부의 관료가 실질적으로 소유했다. 그리고 초과이윤을 분배하는 등 경영 방식을 새롭게 도입하면서 효율성을 제고하기 위한 노력을 기울였다. 그래서 중국을 연구하는 일부 학자들은 중국의 개혁개방과 시장화의 시작을 향진기업에서 찾는다.
8 그리고 사영기업의 등장과 발전을 뒷받침해 준 것이 1993년의 회사법이다. 중국의 시장화가 진척되면서 향진기업은 쇠퇴했다. 1992년 5백50만 개까지 설립됐던 향진기업은 사영기업과 국유기업 등과의 경쟁으로 그 숫자는 줄어들고 각 기업의 규모는 증대했다. 이런 변화 속에서 향진기업도 형식적으로 사영기업화의 길을 걸었다.
그럼에도 향진기업들은 대부분 지방정부의 후원을 받았다. 결국 ‘시장을 포함한 국가자본주의 체제’로의 전환은 1990년대 중반 이래로 급속히 성장한 사영기업 때문이었다.현재 북한의 시장화 정도와 돈주 등장의 의미를 과장해서는 안 된다. 북한의 유통 부문에서 등장한 민간기업들이 시장화를 나타내는 현상인 것은 맞지만 이들과 돈주가 시장화를 주도하거나, 시장화가 크게 진전돼 국가 통제나 관리 영역을 넘어서는 듯이 말한다면 과장일 것이다.
여전히 북한에서 노동력을 포함한 생산 자원의 배분과 가격 결정이 시장에 의해 이루어지지 않고 있으며, 전체 경제에서 시장 부문이 차지하는 비중도 크지 않다. 그리고 돈주도 국가 관료기구에 의존해 부를 축적하기 때문에 독립적인 상업 자본가로 성장했다고 보기도 힘들다. 따라서 북한에서 시장화가 진척되더라도 매우 제한적인 수준일 뿐 아니라 제한적인 시장화 과정조차 정치적 이유로 인해 국가 관료에 의해 역전될 수도 있다는 점을 놓쳐서는 안 된다.
주
참고 문헌
김병로 2016 《북한, 조선으로 다시 읽다》, 서울대학교 출판문화원.
김병연·양문수 2012. 《북한 경제에서의 시장과 정부》, 서울대학교 통일학연구총서 16. 서울대학교 출판문화원.
김어진 2017, ‘최근 20년 동안 북한식 “시장화”와 김정은 정권의 불안정’, 《마르크스21》 19호.
양문수 2013, ‘북한의 시장화: 추세와 구조 변화.’ 〈KDI 북한경제리뷰〉 2013년 6월호.
양문수 2014, ‘김정은 체제 출범 이후 “우리식 경제관리방법”의 모색: 현황과 평가.’ 〈KDI 북한경제리뷰〉 2014년 3월호.
정은이 2011, ‘북한의 국경지역 시장에 대한 연구: 회령지역의 사례를 중심으로,’ 〈북한경제리뷰〉 2011년 11월호.
하먼, 크리스 2004, 《민중의 세계사》, 책갈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