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노무현 정부 5년 돌아보기
거짓으로 청년 세대 현혹하는 친문의 기억 재구성 비판
우파 정권 9년 만에 민주당 친노 정부가 등장했다. 문재인 정부는 대중이 그 9년을 끔찍한 시절로 기억한다는 점 덕에 이미 약속들을 어기고 미루고 말을 바꾸고 있는데도 높은 지지를 받고 있다.
9년 전에 우파에 정권을 넘기기 전 정부가 노무현 정부였다. 노무현 정부는 임기 말 재·보선에서 전패했다. 노무현 정부에 대한 대중의 심판 정서는 대선에서도 확인됐다. 집권 여당 후보 정동영은 친노가 아니었는데도 6백만 표를 겨우 넘겼고, 당선한 이명박과는 5백만 표 차이가 났다. 전두환 정권 아래서 치러진 20년 전 대선에서도 김영삼, 김대중이 각각 6백만여 표를 얻었으니, 대참패를 한 셈이다. 그래서 친노 정치인들은 스스로 “폐족”이라고 부르며 거의 일선에서 물러났다.
그런데 대중 투쟁이 박근혜 정권을 퇴진시켜 강제로 우파의 9년 집권을 끝내고 친노 정부가 들어섰으니 극적인 권좌 복귀로도 보인다. 게다가 문재인은 노무현의 가장 가까운 “친구” 아닌가? 문재인 본인도 잠깐을 빼고는 노무현 정부 내내 청와대를 지켰다. 노무현 탄핵 때 변호인단을 이끈 것도 문재인이었고, 노무현이 이명박의 검찰에게 수모를 당하며 수사를 받을 때도 문재인이 변호를 주도했다. 누가 봐도 문재인은 노무현의 후계자다. 그러니 노무현 정부를 그리워하는 친노 인사들에게 문재인 정부의 집권은 노무현 정부의 복권처럼 여겨질 만도 하다. 문재인은 9년 전 대선에서 이명박이 정동영을 앞선 것보다 더 많은 표 차이로 옛 집권당의 홍준표를 제쳤다.
노무현 정부에 참가한 친노 인사들은 임기 도중에도, 임기를 마친 뒤에도 좌우의 협공 때문에 자신들의 개혁 정치가 실패한 것이라고 주장해 왔다. 유시민은 그 한 명이다. “[선거 때] 편들어 줬던 여러 세력들이 … 10개의 사안에서 9개를 지지하더라도 1개가 자기 마음에 안 드는 것 있으면 다 때린다. … 그 악몽이 또 되풀이되면 거의 99퍼센트 망한다. … 참여정부에 있을 때, 또 여당에 있을 때 제일 힘들었던 것은 … 객관적으로 [평가]해 주는 지식인·언론인이 너무 없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당시 노동운동은 노무현의 개혁이 친노동·친민중이 전혀 아니어서 반대했던 것이다(친노 세력이 “신좌파”라는 조기숙의 헛소리는 여기서는 다루지 않는다). 그러므로 친노 인사들의 해명은 노동계급이 스스로에게 해로운 개혁을 지지했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셈이다. 따라서 노무현 정부에 맞서 싸우며 심지어 정권 퇴진까지 요구했던 진보·좌파 진영과 노동운동 안에서까지 문재인 정부의 집권을 노무현의 복권과 연결시키는 인사들이 많은 것은 경악스럽다. 노무현 정부에 대한 기억의 재구성이 결국 문재인 정부에 대한 오해와 침묵을 낳기 때문이다. 그러나 문재인 정부의 개혁이란 건 이미 드러났듯이, 설득의 방식으로 노동자 임금을 깎는 것이고, 절차를 제대로 지켜 사드를 도입하는 것이다. 즉, 한국 자본주의의 현안을 박근혜보다 더 효율적으로 수행하는 것이다.
노무현 정부의 등장 과정
노무현 정부가 문재인 정부의 초기처럼 안정된 기반 위에서 임기를 시작한 것은 아니다.
노무현 정부는 실망과 환멸을 준 김대중 정부를 계승했다. 김대중은 민주화 운동을 지지한 부르주아 야당의 대표 정치인이었다. 1987년 이후 3차례 연속 도전 끝에 집권했는데, 한국 최초로 선거를 통해 일당 독재를 끝내고 정권을 교체한 것이라 대중의 기대도 컸다.
그러나 김대중은 유신 잔당인 김종필과 연합해 당선해 대중의 개혁 염원에 부응할 태세가 별로 돼 있지 않았다. 임기를 시작하기도 전에 국민 화합을 한다며, 내란죄 등으로 복역 중이던 전두환과 노태우를 석방했다. 집권 직전 터진 경제 공황 속에서 IMF 등 국내외 자본의 요구를 수용해 정리해고 등을 도입했다. 이것은 경제 공황 속에서 대기업들에서만 1백만 명이 넘는 노동자들이 일자리를 잃는 결과를 낳았다. 나중에 경기가 회복된 후, 살아남은 기업들에서 잘린 정규직 일자리를 비정규직으로 대체한 것이 오늘날 비정규직 문제를 심각하게 만든 배경이다.
당시 민주노총 지도부는 자신들이 딱 그 1년 전에 파업으로 철회시킨 정리해고, 파견제 등에 합의해 줬다. 개혁주의의 발로였다. 경제 살리기에 동참해야 하고, 이른바 최초의 민주 정부도 도와야 한다는 발상에서 나온 어처구니없는 배신이었다.
김대중 정부 아래서도 노동계급의 삶이 개선되기는커녕 민주적 권리의 신장도 더뎠다. IMF를 극복했다지만, 위기의 대가를 노동계급에게 전가하면서 이룬 경기 회복은 노동자들에게 별 의미가 없었다. 임기 첫해인 1998년에 민주노총 노동절 집회에 집채만 한 물대포를 출동시켜 난장판을 만들었다. 도심 집회에 경찰차를 벽으로 쓰기 시작한 것도 김대중 정부다.
경제 공황과 구조조정 때문에 곳곳에서 노동자들의 저항이 거셌고, 그래서 국가보안법 구속자는 김영삼 때보다 더 늘었다. 햇볕정책을 대대적으로 선전했지만, 해가 뜬 시간보다는 흐린 날이 더 많았다. 김대중 정부는 집권 2년차에 서해에서 NLL 사수를 외치며 북한군과의 충돌을 마다치 않았다. 비록 그 다음 해 최초로 남북정상회담을 성사시키며 민족주의 좌파를 감동시켰지만 말이다. 임기 말에는 김대중의 아들 셋이 모두 구속될 정도로 권력형 비리에도 노출됐다.
이런 약점과 실망, 분노 때문에 애초 민주당의 재집권은 어려워 보였다. 1997년 대선에서는 패배했지만 여전히 국회 다수당이었던 한나라당의 이회창이 차기 대통령으로 유력했다. 대선이 있는 2002년에 치러진 지방선거에서도 민주당은 한나라당에게 참패했다.
5년 만에 다시 군사독재의 후신 정당이 집권당으로 돌아온다는 위기감(약 40년 만의 정권 교체인데 한 번 정도는 더 기회를 줘 봐야 한다는 생각을 포함해)이 일고 2002년 말에 미군 장갑차에 의한 여중생 압사 사건 항의 운동이 솟아오르면서, 민주당에서도 소수파였던 노무현이 극적으로 당선할 수 있었다. 노무현은 애초 김영삼계로 정계에 데뷔해, 김대중이 지배하던 민주당에서는 처음부터 소수파였다. 그러나 김대중 정부보다 더 개혁적일 것이라는 기대감을 불러일으키면서 극적으로 민주당의 대선 후보가 됐고 대선에서도 승리했다.
노무현 정부는 전임 김대중 정부를 계승한 정부였고, 그 전임 정부는 임기 막판에 대단히 인기가 없었다. 그래서 노무현은 지금 문재인처럼 직전 정부와 비교돼 별일 아닌 것조차 호평을 받는 혜택을 누리기 힘들었던 것이다. 게다가 연인원 1천7백만 명이 참가한 정권 퇴진 운동이 일어난 뒤인 지금보다는 사회적 세력균형에서 우파가 더 강했다. 공식정치 안에서도 그랬다.
그래서 노무현은 임기 초부터 정계 개편에 목을 맸다. 그것이 자신의 처지를 대단히 어렵게 만들었지만 말이다. 그 정계 개편의 핵심은 민주당을 친위 여당으로 재편하는 것이었다. 노무현이 김대중 정부의 최고 업적을 훼손하는 대북송금특검에 찬성했던 이유다. 대북송금 의혹은 남북정상회담 성사를 위해 김대중 정부와 대기업들이 북한에 비자금을 건넸다는 의혹이다. 한나라당이 줄기차게 제기해 결국 2003년 3월 국회에서 대북송금특검법이 통과됐다. 이 특검으로 노무현에 부정적이던 동교동계(김대중계) 핵심 인사들이 구속되거나 힘을 잃었다.
사실 노무현은 이 특검법에 거부권을 행사할 수도 있었다. 당시 국무회의에서도 거부권 행사 입장이 다수였다고 한다. 정권 밖 진보진영에서도 남북 화해 기조가 손상된다며 특검을 거부하라는 목소리가 높았다. 그런데도 노무현은 김대중계 숙청의 길을 선택한 것이다. 민주당이 분열해 민주당과 친노계 열린우리당으로 분화했다. 이후 민주당은 한나라당과 함께 노무현 탄핵을 주도했다.
말만 그럴싸한 정치 개혁
노무현 정부는 주로 ‘정치 개혁’과 ‘자주 외교’를 앞세웠다. 경제와 복지 분야에서는 김대중 정부가 수입한 제3의 길 노선을 수용했다.
노무현의 정치 개혁은 지역 구도 타파와 탈권위주의를 핵심 지향으로 제시했다. 노무현 자신이 영남에서 김대중 야당의 후보로 줄곧 낙선을 했기 때문에 이런 지향 설정은 노무현의 강점을 부각시키는 효과가 있었다. 그러나 이는 자당의 득표 기반 확대를 목표로 한 것이었지, 노동계급의 독자적 정치세력화 등에 도움을 주려던 것은 아니었다.
1987년 이후에, 특히 영남 기반 야당이던 김영삼이 노태우·김종필과 3당 합당을 해 전통적 여권(당시 민주자유당)으로 흡수된 뒤에 민주당의 핵심 지역 기반은 호남이 됐다. 김영삼과 야당 지도자 경쟁을 하던 호남 출신 김대중이 민주당의 핵심 지도자가 됐다. 1970년대 이후 분열 지배를 위해 독재 정권들이 호남 차별을 체계화한 것도 이런 지역 구도의 배경이 됐다.
따라서 지역 구도 타파의 진짜 목표는 민주당이 영남 등지에서 의석을 배출하는 것, 이른바 민주당의 전국 정당화였다. 그래서 선거제도 개혁은 김대중 정부 때부터 민주당 정부의 숙원 사업이었다. 총선과 지방선거에서 정당 비례대표 투표제(1인2표제)가 도입된 것도 김대중 정부 때였다. 그러나 민주당이 다수당이 되고 정권을 잡아서 노동자들에게 해로운 일을 더 많이 했으므로, 그런 제도 개혁에 노동계급이 가치를 부여할 일은 아니다.
그런데 그동안 민주당/친노 인사들은 진보·좌파에게 이 제도의 덕을 봐 놓고 배은망덕하게 김대중·노무현 정부에 반대해 상처를 입혔다고 한다. 민주노동당이 2002년 지방선거와 2004년 총선에서 이 제도의 덕을 본 건 사실이다.
1인2표제가, 한나라당이 당선되는 게 싫어서 어쩔 수 없이 당장 당선 가능성이 눈 앞에 보이는 민주당 후보에게 투표하던 유권자들에게 진보정당에 투표할 기회를 준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기존 제도 하였더라도 과감하게 진보정당에게 투표했을 유권자들이 정당 비례만 진보정당에 투표하고 지역구에서는 여전히 민주당에 투표하도록 유인하는 제도이기도 했음을 봐야 한다.
가령 2004년 총선 투표 직전 ‘지역구는 열린우리당, 정당 투표는 민주노동당’을 주장한 유시민의 호소문 제목은 ‘민주노동당 지지자 여러분께 피를 토하는 심정으로 호소합니다’였다! 민주노동당 지지자들에게 2표 중 지역구 1표를 열린우리당에게 달라고 호소한 것이다. 지역구에서 민주노동당에게 던지는 표는 “심리적 위안”에 불과하며, “민주노동당의 원내 진출을 … 위해서 굳이 한나라당을 제1당으로 부활시키고 탄핵 3당에게 과반수를 넘겨야 할 이유는 전혀 없[다]”는 협박도 했다. 이 주장은 당시 ‘집권 여당이 소수정당에게 표 앵벌이를 한다’는 비아냥을 듣기도 했다.
결국 1인2표제라는 정치 제도가 어느 정치세력에게 더 도움이 될지는 미리 정해지지 않는다. 정치 상황, 진보정당의 독자성과 활약도에 달려 있을 것이다. 후자의 가능성은 진보·좌파가 민주당 정부의 실정을 일관되게 비판하며 노동계급의 이해관계를 독립적으로 대변하고 추구할 때 커질 것이다. 결국 제도가 아니라 투쟁이 만들어 내는 세력관계 변화와 노동자 대중의 각성이 중요한 것이다.
노무현의 정치 개혁에서 그나마 봐 줄 만한 것은 국가보안법 폐지론이었다. 그러나 이조차 이루지 못했다. 선거 전 50석도 안 되던 열린우리당이 탄핵 역풍에 힘입어 1백52석을 얻어 과반 여당이 되고 4대 개혁 입법에 국가보안법 폐지를 포함시켜 기대를 모았지만, 결국 국가보안법의 코털도 건드리지 못했다. 비록 헌법재판소가 황당하게 관습헌법론을 적용해 최종 실패했지만, 실효도 없는 행정수도 이전 방안을 국회에서는 일단 관철시켰던 사례만 봐도 국가보안법 폐지에 실패한 것을 단지 박근혜가 이끌었던 한나라당과 우익의 저항 탓으로만 돌리는 것은 적절치 않다.
그 밖에 노무현의 지역 구도 타파론은 지역 균형 개발론으로 이어졌는데, 건설기업들의 개발 붐만 일으켰다. 이는 노무현 정부의 기업도시 정책으로도 이어졌다. 지역 균형 개발은 소외된 지방 지역에 공공서비스 등 생활 편의를 확대하는 것이 아니라 전국의 집값만 고르게 상승하게 만든 정책이었다는 평을 받았다. 가령 노무현은 부동산 분양 원가 공개를 대선 공약으로 내세우고도 2004년 6월에는 “장사하는 것인데 열 배 남는 장사도 있고 열 배 밑지는 장사도 있다. 시장을 인정한다면 원가 공개는 인정할 수 없다”며 반대했다. 결국 노무현의 지역 균형 개발론은 지방의 노동자·서민이 아니라 지역 토호들에게 주는 선물이었던 것이다.
노무현의 탈권위주의도 기층 노동자·민중의 저항에는 적용되지 않았다. 임기 첫해 터진 핵폐기장 유치 반대 부안 투쟁이 좋은 사례일 것이다. 당시는 문재인이 청와대에서 민정수석을 할 때였다. 노무현 정부는 첫해에 지역 균형 발전(!) 차원에서 전북의 서해안에 핵폐기장을 짓겠다고 했다. 전북과 맞닿은 전남 영광(이곳에 핵발전소가 있다), 전북 부안·군산 등이 유치 경쟁을 벌였다. 뒤로 수억 원씩 보상금이 나온다고 공작을 펼쳤기 때문이다. 전북의 서해안 지역은 김대중 정부의 새만금 사업으로 어업이 축소돼 심각한 곤경을 겪고 있었다. 그러나 현금 보상은 사실이 아니었다. 이런 공작을 이용해 전북 부안의 핵폐기장 신청을 주도한 것은 당시 전북도지사 강현욱과 부안군수 김종규였다. 그래서 김종규에 대한 부안군민의 분노는 치솟았다. 2003년 7월 22일 전체 인구가 7만 명인 군에서 1만 명이 모여 집회를 열고, 경찰의 과잉 대응 때문에 물리적 충돌이 벌어졌다. 노무현은 기다렸다는 듯이 군수 김종규에게 직접 전화해 격려했다. 23일 국무회의에서는 “자유 의사 표시를 방해하는 불법 폭력이 있다면 단호히 대처[하고] … 은밀하게 위협하는 행위에 대해서도 사전 차단하고 철저히 수사하는 등 엄정 대응해야 한다. … 지역 경찰만으로는 단호한 대응이 힘들 수 있는 만큼 전북과 중앙의 경찰 차원에서 대책을 강구하라”고 지시했다. 폭력 진압을 노무현 본인이 직접 지시한 것이다. 인구가 7만 명인 군에 시위 진압 경찰이 2만 명이나 들어오게 된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경찰의 진압과 통제 시도는 더 격렬한 저항을 낳았다. 주민들은 경찰이 점령 계엄군을 방불케 한다며 분노했고, 일부 자율주의 운동가들은 정부의 부안 투쟁 탄압이 너무 충격적인 나머지 노무현을 신자유주의 파시즘 정부라고까지 (잘못) 보기도 했다.
자주 외교는 실재했나
이른바 자주 외교도 말과 실체가 다르긴 마찬가지였다. 노무현은 대선 전 “반미 좀 하면 어떠냐?”고 해서 청년층의 지지를 받았다. 그러나 당시 발언에 관한 언론 보도는 다소 일면적이었다. 노무현이 이 말을 한 것은 영남대 강연에서였다. 미국에 한 번도 가 보지 못한 것에 대한 청중 질문에 노무현은 “미국 한 번 못 갔다고 반미주의자냐. 또 반미 좀 하면 어떠냐”라고 답했지만, 곧이어 “대통령 하겠다는 사람이 반미 한다는 건 말이 안 된다. 국정에 큰 어려움을 줄 것”이라고 했다. 친노 지지자들은 조중동 기레기 탓을 하겠지만, 좌파 입장에서는 반대로 노무현이 진보적으로 포장된 왜곡 보도였던 셈이다. 노무현은 한국 대통령의 임기 초 코스인 미국 방문 후 한미정상회담에서 “53년 전 미국이 우리를 도와주지 않았으면 저는 지금쯤 북한의 정치범수용소에 있을지도 모른다”고 미국 지배자들에게 아부했다. 문재인이 트럼프와 한미정상회담을 하러 미국에 가서 “[한국전쟁 중 흥남 철수 당시] 장진호의 용사들이 없었다면, 흥남 철수 작전의 성공이 없었다면, 제 삶은 시작되지 못했을 것이고, 오늘의 저도 없었을 것”이라고 발언한 것과 거의 흡사하다. 노무현이 가정법으로, 문재인은 부모의 경험담으로 말했다는 차이는 있지만 똑같이 미국의 은혜를 칭송한 것이다.
노무현의 자주 외교는 실제로는 친미 실용주의 외교였다. 미국의 이라크 침략 전쟁을 지지하고 심지어 초기부터 전투 병력 파병을 공언한 것이 그 사례다. 노무현 정부를 기록한 여러 기록들에서 당시 이라크 파병은 한반도 문제를 평화적으로 해결할 권한을 미국에게 받으려는 정부의 판단 때문이었다는 것이 확인된다.
당시 미국 부시 정부는 9·11 사태 후 이라크, 이란, 북한을 ‘악의 축’으로 지목했다. 미국은 그중 이란 접경국인 아프가니스탄을 2001년에 침략했고, 2002년 3월에 이라크를 침략했다. 이 때문에 북한 폭격설도 나오긴 했다. 그러나 한반도 전쟁설은 과장이었다. 당시 미국의 이라크 침략은 중동에서 미국의 석유 패권을 힘으로 과시해 경제력은 상대적으로 약화된 미국의 세계 패권 질서를 재공고화한다는 네오콘 프로젝트에서 나온 것이었다. 문제는 중동이었던 것이다.
그럼에도 한반도에서 군사적 긴장이 고조된 건 사실인데, 역설이게도 미국은 바로 이라크 전쟁에 발목이 잡혀 북한에 신경 쓸 여력이 없었다. 그러니 이라크 전쟁에서 미국을 한국 정부가 군사적으로 도와서 한반도 평화를 보장받겠다는 노무현 정부의 발상은 황당무계했던 셈이다. 쉽게 말해, 전쟁광이 전쟁에서 승리하도록 돕는 것으로 전쟁을 막아 보겠다는 발상이었다. 이런 어리석음은 애초부터 노무현 정부가 한미동맹 강화에 적극 부역하면서 한반도 평화를 모색해 보겠다는 친미 실용주의 기조였기 때문에 발생한 것이었다.
군사독재 정권 때도 보기 힘들었던 현역 군부대의 시위 진압 투입으로 악명을 떨친 평택 미군기지 이전 문제도 이 가짜 자주 외교와 이어진다. 미국 부시 정부는 전 세계의 미군을 신속기동군으로 재편하려 했다. 이는 두 군데서 동시에 승리할 수 있고 그래야 한다는 네오콘의 새로운 군사전략 개념에 따른 것이었다. 평택 미군기지 이전 계획은 의정부와 서울 용산에 있는 미군기지와 부대를 항구 도시인 경기도 평택으로 옮기는 것이었다. 주한미군을 해외 다른 전쟁에 파병하기 쉽게 지리적으로 재편제하려는 것이었다. 이는 미군을 휴전선 근방에서 서해 바다 근처로 옮김으로써 미국의 진정한 견제 대상이 북한이 아니라 중국임을 보여 주는 것이기도 했다. 노무현 정부는 사달이 나고 반대 시위가 격화된 2006년이 아니라 이미 2004년에 미군기지 이전에 합의하고 몰래 기지 이전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실제로 돌아간 상황을 보면, ‘동북아 균형자’론도 그 포장을 걷어 내고 실체를 엿볼 수 있다. ‘동북아 균형자’론은 2005년 노무현이 처음 이 용어를 쓸 때에도 그 실체가 무엇인지 혼란이 있었다. 그럼에도 당시에 언론에 통용된 내용을 거칠게 요약하자면, 동북아시아 강대국들 사이에서 한국이 주체적으로 국익을 중심으로 미국, 일본, 중국, 러시아 등과 균형 잡힌 외교를 하자는 구상이었다.
그러나 노무현 정부는 동북아 균형자론의 골격이 한미동맹의 토대 위에 있음을 결코 부정하지 않았다. 다만 중국과의 관계를 냉전적 시각으로 볼 수 없다는 것이 새로운 점이었다. 그러나 사실 이것이 냉전 시대 전통적 우방인 대만과 외교 관계를 끊으며 중국과 수교를 강행한 노태우 정부의 이른바 ‘북방 외교’와 질적으로 무엇이 다른지는 의심스럽다.(중국과의 수교 과정에는 미국의 협조도 있었다.)
한국 자본주의는 전통적으로 미국 중심의 패권 질서 아래서 미·일의 하위 파트너로서 성장해 왔다. 그러나 가령 50~60년 전과 비교하면 특히 경제 면에서 동맹 내 세력균형의 변화가 일어났다. 힘의 차이가 상대적으로 좁혀졌다. 한국 자본주의는 이 기간에 미국에 의존적인 입양아에서 독립 가능한 성인으로 성장했다. 독자적 이해관계를 갖는 자본주의 국가가 된 것이다. 미국과 일본에 대한 한국의 의존은 이제 절대적 관계에서 상대적 관계로 바뀌었다. 가령 사드 배치에 대해 한국 자본주의의 이해관계는 미국의 입장과 전적으로 같지는 않다.
사실 노태우의 ‘북방 외교’도 그런 변화와 이해관계를 반영한 것이었다. 그 뒤 1997년 경제 공황을 수출 경제에 더욱 의존하는 방식으로 탈출한 한국 자본주의에게 성장하는 중국 시장과의 교역은 비중이 커질 수밖에 없었다. 경제적 측면에서만 그런 것은 아니다. 북핵 문제에서도 중국이 중요했다. 중국은 북한을 지원하기도 하지만 압박하기도 한다. 대북 압박에서도 중국과의 선린 관계가 더 유용하다는 계산을 할 법도 하다. 또한 미국의 대북 강경책을 완화시킬 지렛대로 중국의 반대를 한국이 이용할 수도 있다.
그러나 한중 경제 교류가 깊어지는 것이 한미동맹 의존 전략과 충돌하는 것은 아니다. 동북아시아 긴장 고조의 핵심이 미중 간 지정학적(전략적) 갈등에 있지만, 미국과 중국의 경제 의존도도 지난 40년간 마찬가지로 높아져 왔다. 중국은 미국에게 가장 큰 채권국이기도 하다. 이런 모순된 현실은 ‘경제 따로, 안보 따로’라는 말이 아니라 (정반대로) 개별 기업들의 이익이 국가적 차원의 지정학적(전략적) 이해관계를 앞설 수 없음을 보여 주는 사례로 이해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미국조차 이럴진대, 한국의 중국 중시 정책이 한미동맹 우선이라는 국가 대전략과 충돌할 이유는 없다.
지금 문재인 정부가 중국을 가벼이 대하지 않으면서도 결국 미국의 대對중국 무기 체계인 사드 배치를 기정사실화하는 것과 흡사하다. 뭐만 잘못됐다 하면 노무현 탓하기 바빴던 박근혜조차도 집권 초 미국보다 중국에 먼저 대통령 특사를 보내는 등 정권 초 ‘균형 외교’를 기조로 내세웠다. 근래 가장 친미적이었다는 이명박 정부도 미국의 대對중국 견제용 MD(미사일 방어망) 편입 압력은 이리저리 피해 왔다.
다만, 한국 지배자들은 2010년대에 특히 미일 군사동맹이 강화되는 걸 보면서 미국의 동맹으로서 한국의 지위가 일본보다 현격히 낮아질 것을 걱정한 듯하다. 이는 국제 질서에서도 한국의 서열이 상승하지 못하거나 하락할 수 있다는 걸 뜻하기도 한다. 이는 한국 국적 기업(자본)들의 국제 경쟁력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
또한 경제·안보 위기 상황에서 한국이 의존할 패권 질서는 미국일 수밖에 없다는 판단도 했을 것이다. 미국이 한국 자본주의에 해 주던 역할을 중국이 수십 년 내에 대체하리라는 보장도 실력도 없다고 본다. 이런 판단들이 박근혜가 집권 말에 무리하게 사드 배치를 시작하고 한일 위안부 합의를 강행한 이유일 것이다.
따라서 노무현 정부의 자주 외교, 동북아 균형자론의 실체는 한미동맹에 계속 의존하되, 이데올로기적으로 냉전적 틀은 버리자는 정도에 불과한 것이다. 그 속에 ‘자주’의 실체가 있다면 그것은 군비 확충이다. 김대중 정부 아래서 가령 해군은 연안 해군(한반도 방어)에서 대양 해군(해외 진출)을 새롭게 표방했다. 노무현 정부는 이를 이어받아 막대한 자금을 들여 이지스함 6척을 새로 만들려고 하는 등 군비 증강에 힘을 쏟았다. 이른바 자주 국방인데, 자주 국방은 전시작전권 환수 시도와도 관계있을 것이다. 전작권 환수 시도는 독자적 이해관계를 가지는 한국 자본주의의 성장과 위상 변화를 반영한다. 최근 북한의 핵탄두 보유가 기정사실화하면서 지배계급 안에서 이견이 나오는 것도 이런 배경에서다. 미군 의존(핵우산)을 강화해야 하느냐, 독자적 대응 능력(핵무장)을 강화해야 하느냐, 아니면 중국을 통한 대북 압박이 더 중요하냐 하는 식인데, 근본적 국가전략 차이는 아닌 것이다.
노무현 정부는 균형자론을 내세워 진보진영을 교란시키고는 미국의 중동 전쟁에 파병하기, 평택미군기지, 제주해군기지 등 미국이 원하는 곳에 미군기지 만들어 주기, 한미FTA로 미국과의 동맹 관계 강화하기 등 친미적 실용주의 정책을 펴 나갔다. 한국군의 중동 파병을 직접 배경으로 한국인이 여럿 죽었는데도 꿋꿋했다. 훈련 중이던 미군 장갑차에 하교하던 중학생 2명이 깔려 죽었는데 미군은 처벌을 피하려 한 이른바 미군 여중생 살해 사건에 분노해 노무현에게 투표했던 청년 세대에게 노무현 5년은 분개할 수밖에 없는 시간이었다.
복지도 산업 정책도 기업주들을 위해
노무현 정부가 추구한 제3의 길 노선은 김대중 정부의 “생산적 복지”를 이어받는 것이었다. “근로 연계 복지”라고도 불린 이 기조는 경제가 위기에서 충분히 회복하지 못하는 현실을 인정하며 서구 주류 사회민주주의가 ‘전후 복지국가 노선’에서 후퇴한 것을 정당화하는 개념이다. 노무현 정부는 좀 더 직접적으로 용어를 수입해 “사회투자국가” 용어도 사용했다.(영국 토니 블레어의 신노동당이 쓴 단어다.)
생산적 복지나 사회투자국가나 가리키는 바는 같다. 경제가 호황일 때는 정부가 복지 정책을 늘릴 수 있지만, 정작 복지 지출은 경제가 노화하거나 침체될 때 늘어나게 마련이다. 노후 연금이 그렇고 실업수당 등 각종 보조금 지출이 그렇다. 따라서 정부가 재정적자를 감수하며 복지 지출을 늘리려면 세금을 늘려야 한다. 그러나 이윤율이 저조한 국면에서 세금이 올라가는 것을 반길 자본은 없다. 감당 가능한 자본이 단기적으로 경쟁 자본을 어렵게 만들려는 의도가 아니라면 말이다. 오히려 감세가 기업들의 주된 요구 사항이다. 그러나 기업과 부자를 위한 감세를 해 줘도 정부 지출이 획기적으로 줄기는 어렵다. 따라서 정부 자체도 점점 수익성 논리로 운영하게 된다. 이런 배경에서 복지가 노동계급 대중에 대한 국가의 보장 책임이 아니라 일종의 투자 개념으로 바뀌게 되는 것이다. 주류 사회민주주의자들은 이런 식의 개념 수정을 지지했을 뿐 아니라, 이렇게 해야 자본이 복지 ‘투자’에 협조하도록 설득할 수 있다고 지지자들을 설득했다. 한마디로 경제 성장을 위한 복지인 것이다. 전통적으로 사회민주주의 운동이 복지제도의 진보성을 해당 분야를 얼마나 탈상품화하느냐를 기준으로 판단했던 것에 비춰 보면 현격한 후퇴인 것이다.
복지 자체가 투자가 되면, 복지 지출의 대상은 자원이 되고 수익성을 입증해야 한다. 그래서 가령 영국 토니 블레어의 신노동당 정부 시절에는 노후 연금은 삭감 대상이었지만, 아동수당은 늘었다. 투자 가치가 더 있으니까! 노무현 정부 아래서 국민연금이 삭감되고 김대중·노무현 정부 아래서 교육부가 교육인적‘자원’부가 된 것도 비슷한 발상에서다. 이처럼 보편주의 확대와는 거리가 있는 민주당이 보편 급식 등에는 관심이 있었던 것도 그것이 일종의 투자이기 때문이다. 개인들에게는 기회의 평등을 위한 투자이고, 경제 전체로는 시장의 수요에 맞는 노동력을 공급하려는 투자이다.
한국에서 사회투자국가를 소개하는 데 앞장섰고 지금은 문재인 정부의 인수위원회 격인 국정자문기획위원회의 사회분과위원장인 김연명 중앙대 교수는 최근 언론 인터뷰에서 “사회투자국가의 핵심은 경제 성장과 복지 확충이 선순환하도록 하는 것 … 이를 위해서는 가장 중요한 것이 인적자본 확충”이라고 말한다. 문재인이 대선에서 “기회는 평등할 것입니다. 과정은 공정할 것입니다. 결과는 정의로울 것입니다” 하고 말한 것은 공정한 시장 경쟁을 강조한 것임과 동시에 사회투자국가론의 복지·교육, 즉 인적 자원 정책을 윤색해 말한 것이기도 하다.
교육 복지가 투자가 되면 학생들은 장학금을 받거나 취업에 성공하기 위해서라도 스스로 경쟁력을 키워야 하고 그 경쟁력은 시장에서 요구하는 것이어야 한다. 노무현의 사회투자국가가 교육에 적용되면(사회투자국가론 자체가 그 논리상 교육 분야에 관심이 많을 수밖에 없기도 하다), 인문 교양 교육의 후퇴와 지식의 상업화 또는 실용주의화(취업용 스펙 쌓기만 판치는)가 더 강조된다. 보육 복지나 급식 복지 확대도 마찬가지로 투자받을 기회의 평등이자 유자녀 기혼 여성을 저임금 노동시장으로 유인하려는 목적 아래서 설계된다.
노무현 정부의 사회투자국가론이 복지의 성격을 인적자원 개발로 바꾼 것은 노무현 정부가 김대중 정부를 이어받아 서비스 산업, 지식 경제 따위의 담론을 중시하고 동북아 금융 허브 같은 허상을 좇은 것과도 관계 있다. 노무현이 변양균 등 경제기획원 출신 관료들과 짠 ‘비전 2030’이나 ‘사회복지 2030’ 문서들은 선진통상국가와 사회투자국가 비전을 모두 포함하고 있었다. 그래서 이 문서들은 노무현의 한미FTA 추진을 정당화하는 문서들이기도 했다. 한미FTA는 노무현 정부가 외부 충격을 빌어 국내 산업을 구조조정하려는 시도였다. 그때 가장 초점이 된 것은 금융을 포함한 서비스 산업의 규제 완화였다. 이 발상과 박근혜의 미래창조과학부 신설 발상은 질적으로 다를 게 전혀 없다.
노무현 정부의 지식경제 중시, 서비스 산업 발전론은 2005년 황우석의 사기극도 뒷받침했다. 황우석 연구의 사기성을 폭로한 MBC ‘PD수첩’에 비난 여론이 비등했던 것에는 친노 지지자들이 일조한 면이 있다. 심지어 노무현 정부의 고위 인사들이 MBC에 보도 자제를 압박했다고 한다. 그때나 지금이나 전통적 여권 집단(군사독재의 정치적 계승자들을 중심으로 한)을 친미·친일 사대 매국 집단으로 비판하는 포퓰리즘 분석은 노무현의 자본주의적 부국강병 개혁을 진보적인 것으로 착각하게 만드는 효과가 있다. 황우석의 연구(와 성공)가 중요했던 또 다른 이유는 그것이 삼성 같은 재벌들이 미래 사업 분야로 꼽고 있는 것이 바로 바이오 산업, 즉 의료 민영화로 가는 장미빛 길이라고 여겨졌기 때문이다. 노무현 정부가 그 재앙의 길에 레드카펫을 깔고 있었던 것이다. 이런 일들은 노무현 정부의 지향이 삼성경제연구소에 의해 좌지우지되고, 그 연결 고리가 노무현의 오른팔 왼팔인 안희정과 이광재라는 분석이 힘을 얻게 했다. “노무현-삼성 커넥션” 현상은 노무현 시대에 “삼성 공화국” 담론이 유행한 배경이었다. 노무현 정부가 공정한 시장 경제를 위해 재벌을 규제하거나 압박해서 재벌을 비판하는 담론이 생겨난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노무현 정부는 안기부의 국내정치 사찰과 삼성의 정치권 로비 사실이 담긴 녹음 파일이 폭로된 이른바 “안기부 X파일 사건”에서 삼성 부분을 죄다 면제시켜 줬다. 그 파일에 목소리로 직접 등장하는 〈중앙일보〉 전 회장 홍석현은 불법 정치자금 제공으로 처벌받지 않았다. 노무현은 홍석현을 주미대사로 임명해 차기 유엔 사무총장으로 밀어주려 했다. 홍석현 본인은 그 직을 이용해 대통령이 될 꿈을 꿨다고 한다. 홍석현이 X파일 사건으로 이 프로젝트를 진행하기 어렵게 되자 빈틈을 파고든 것이 미꾸라지 반기문이었다. 지난해와 올해 잠시 반짝였던 반기문 붐은 애초 홍석현에게 저작권이 있었던 것이다. 노무현의 검찰은 오히려 그 X파일을 폭로하는 데 앞장선 당시 민주노동당 노회찬 의원을 기소했다. 이 일을 마무리한 것이 훗날 박근혜의 총리가 되는 황교안이다.
결론
노무현 정부 참여 인사들과 골수 지지층은 노무현 정부의 실패를 죄다 한나라당이나 진보적 사회운동 탓으로 돌린다. 정말 양심 없는 짓이다. 표가 많이 안 나오는 경북 성주 주민은 비난하면서, 표를 받아야 하니까 부안 투쟁 문제는 주민들 탓을 하지 않고 그냥 없던 일 취급한다.
노무현 정부는 부안 투쟁을 빌미로 한나라당과 함께 집시법 개악안을 통과시켰고, 비정규직 악법을 제정했다. 그런 악습의 결과, 노무현 정부 아래서 구속 노동자 숫자가 역대 최대치를 기록했다. 시위 도중 경찰 폭력에 사망한 사람이 5년 동안 3명이나 된다. 매체가 한미FTA를 반대한다고 정부 광고를 끊거나 한미FTA 반대 측이 만든 TV 광고를 가로막았다.
돌아보면, 노무현 정부는 애초에 목표부터 실천까지 진보성이 없었다. 그래서 현상적으로 좌우 모두에게서 비판받을 때조차 노무현은 명백하게 우파의 요구나 지향을 수용했다. 그는 구 여권과 좌파의 협공을 당한 게 아니라 우파와 손잡고 노동운동과 좌파를 협공했다. 그것은 자신의 계급 기반과 친시장주의 신념에 따른 선택의 결과였다. 그러니 진보진영 일각이 노무현 정부 시절을 미화하는 데 동참하거나 침묵하는 것은 규탄받아 마땅한 일이다. 노무현 정부를 변론해 문재인 정부에 기대를 걸고 협력의 기회를 만들어 보려고 하는 취지에서 그러는 것일 텐데, 노무현 정부 때도 그랬듯이 비극적 실패를 반복할 뿐이다. 친노·친문은 야당일 때조차도 일관되게 이명박과 박근혜의 악행에 반대해 본 일이 없는 세력이다. 우파 정권이 노동계급에게 100을 뺏겠다고 달려들 때, 이에 반대한다며 끼어들어서는 노동자들에게 80만 내 주고 끝내자고 하는 것이 그들 방식이다. 이런 세력의 ‘개혁’을 믿고 노동운동이 투쟁을 미룬다는 것은 나무 위에서 물고기를 구하겠다는 것과 같은 일이다.
주
- 장진호湖 전투는 한국전쟁 당시(1950년 겨울) 함경남도 장진호에서 중국군에게 고립된 미 해병 1사단이 포위를 뚫고 흥남으로 철수한 전투를 말한다. 이 전투로 미군은 큰 인명 손실을 입었지만, 그 과정에서 중국군의 전진을 지연시킨 덕에 흥남에서 남한으로 철수하는 작전이 가능했다고 평가된다. 문재인의 부모는 바로 이 흥남 철수 작전 때 미군이 제공한 수송선을 타고 남하해 부산에 정착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