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쟁: 노동당의 당명·강령 변경과 혁신 논쟁
좌파 개혁주의의 위기와 모순된 대응
노동당이 8월 당대회에서 전면적 ‘혁신’을 추진 중이다. ‘제2의 창당대회’로 삼겠다고 한다. 새로운 정치 상황에 걸맞은 좌파의 대응 방식이 필요하다는 판단도 작용하고 있을 것이다. 노동당이 처한 현 상황에 뭔가 돌파구가 필요하다는 공감대도 있어 보인다.
현재 노동당 혁신 방안을 체계 있게 내놓고 논쟁을 주도하는 것은 옛 사회당 계열이다. 이들은 자신들 고유의 전망과 전략을 이참에 노동당의 강령과 활동 방향에 포함시키려는 듯하다.
이들은 지금이 사회운동이 활성화되는 시대이지만, 문재인 정부를 대하는 태도 때문에 사회운동들이 총체적 사회 개혁을 추구하는 정치운동으로 발전하기는 힘들다고 전망한다. 따라서 노동당이 각각의 사회운동을 건설하고 개입해 성장해야 하며, 무엇보다 사회운동을 정치화시키는 정당이 돼야 한다고 말한다. 이런 인식 아래서, 노동당 혁신안은 당명에서 “노동”을 삭제하는 것, 강령에서 반자본주의 성격을 완화시키는 것, 사회운동 단체들과의 조직적 연계를 강화시키는 방향으로 조직 구조를 바꾸는 것을 핵심으로 한다. 각각의 사회운동에 개입해 성장하되, 그러려면 대중성을 더 늘리는 것이 중요하다는 문제의식이 뚜렷해 보인다. 개혁주의적 성격이 도드라져 보이는 이유다.
이에 노동당 안에서 다양한 반응이 있고 찬반 논쟁도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듯하다. 그런데 혁신안에 대항하는 나름의 일관성과 체계를 갖춘 대안적 전망과 비판은 눈에 띄지는 않는다. 이 글에서는 노동당 당대회 준비위원회를 통해 옛 사회당계가 내놓은 노동당 혁신 방안을 중심으로 그 장단을 살펴 보려 한다.
강령과 당명
노동당 강령 개정안은 노동당의 좌파 ‘개혁주의’ 성격을 더 분명히 하는 방향인 듯하다. 기존 노동당 강령에는 “자본주의의 쳇바퀴 속에서 우리에게 내일은 없다”, “노동당은 위기의 시대를 넘어설 사회주의 대전환을 위해 탄생했다”는 두 문장이 첫째와 둘째 소제목으로 강조돼 있었다. 그런데 개정 초안은 이 두 문구를 소제목에서 삭제했다. “사회주의 대전환” 문구는 본문 안에 남겼지만, 소제목은 모호한 “사회적·생태적 전환”으로 대체됐다. 강령의 결론에 해당하는 문장은 이렇다. “우리 당은 지역에 뿌리내리는 한편 다양한 사회운동들을 사회적·생태적 전환의 목표 아래 하나로 묶어 신자유주의를 종식시킬 것이다. 그리하여 우리는 이 시대의 위기를 넘어선 새로운 사회, 새로운 경제, 새로운 나라를 향한 길을 열어갈 것이다.”
비록 강령의 본문 안에는 “사회주의 전환” 문구가 남아 있지만, 반자본주의적 성격은 약화되고 지향은 모호해진 것이다.(기존 강령에서는 “자본주의”가 16회, “신자유주의”가 1회 등장한다. 개정안에서는 각각 4회, 6회로 빈도도 역전됐다.)
이는 옛 사회당계가 최근 발전시켜 온 ‘신자유주의 불안정노동 체제론’과도 연관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들의 신자유주의 체제 위기론은 오히려 신자유주의 이전 자본주의의 불안정성을 과소평가한다. 이는 자본주의 자체의 불안정성을 과소평가하는 것으로 귀결되기 마련이다. 따라서 신자유주의 체제 위기론은 현 위기를 개혁주의적 해법으로 극복할 수 있다는 전망으로 귀결될 수밖에 없다. 옛 사회당계는 “기본소득-노동시간 단축-최저임금 1만 원 인상” 패키지 개혁으로 현재의 한국 사회 시스템을 개혁할 수 있다고 주장해 왔다. 각각 지지할 가치가 있는 요구들이지만, 이것들만으로 계급 권력의 이전을 낳기 힘들다. 이 요구들이 대중 투쟁과 연결돼 계급 세력균형에 변동을 일으킬 전략과 만나지 않고 단지 기존 국가에게 청원하는 법 개혁 캠페인에 머문다면, 더더욱 단지 개혁 요구의 다발에 불과할 것이다.
또한 최근 분명히 확인되는 것은 지배자들 사이에서조차 신자유주의에 대한 의심이 명백히 나타난다는 점이다. 지배자들의 고민은 다른 대안이 없다는 것이다. 그러니 조금만 유심히 분석하면 현재의 위기가 자본주의 자체의 심각한 위기이며 ‘사회주의적 전환’이 오히려 강조돼야 할 때임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노동당의 기존 반자본주의-사회주의 강령은 (비록 혁명적 강령은 아니었어도) 유지할 가치가 있다. 만약 기존 강령이 추상적이라 현 국면에 좀 더 직접적으로 적용할 구체적 강령이 필요하다면, 기존의 강령을 그대로 둔 채 행동 강령 성격의 전망과 요구를 부속 강령으로 추가하면 될 일이다. 굳이 강령 자체를 개정할 이유가 없다. 개정안이 퇴보임은 노동당 대표단이 제시한 당명 개정 이유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현재 평등당이 예상대로 유력한 대안으로 제출돼 있다.) 대표단은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한국 사회에서 노동당이라는 당명이 가지는 한계가 분명히 있습니다. … 정규직 대공장 중심의 노동운동과 북한의 ‘조선노동당’의 이미지로부터 자유롭지 않기 때문[에] … 활동가가 아닌 일반 대중에게 노동당 당명이 확장성 [면]에서 … 제한적[이며] … 노동당 당명이 다양한 가치를 담을 수 있느냐 없느냐라는 이론적 수준의 문제가 아니라 정작 대중이 어떻게 인식하느냐에 대한 판단 [결과] …. 다양한 가치를 지향하는 사회적 세력들이 노동당 당명에 대해 자신들의 가치는 부차적으로 인식될 수 있다고 ‘느끼고’ 있[다.]”
2 일반 대중이 보기에 거부감이 들 수 있다는 것이다. 이는 전형적인 (후진적) 대중 추수주의의 사례라고 할 수 있다. 한국 사회에서 별로 인기 없는 소재인 ‘북한’과 ‘노동’이 연상된다며 현 당명을 바꾸자는 것, 스스로의 이론적 입장보다 대중의 인식이 더 중요하다는 것이 딱 그렇다. 특히 “북한 연상론”을 “노동” 당명 개정 사유로 꼽은 것은 좌파 운동의 원칙에도, 조직 노동계급의 실천 경험에도 부합하지는 않는다. 심지어 구글에서 “노동당”을 검색어로 치면, 조선로동당이 아니라 한국의 노동당이 맨 앞에 뜬다.
“북에서 미사일 하나 날아오르면 [공든 탑이] 공염불이 되곤 한다”는 나도원 경기도당 위원장의 말도 같은 맥락이다.첫째, 좌파적 원칙의 문제다. ‘북한 조선로동당이 연상되니, 노동을 쓰지 말자’는 논리는 친북적이지 않은 좌파는 애시당초 “노동”이란 단어를 명칭 같은 데에 쓰면 안 된다는 얘기나 다름없다. 북한 조선로동당은 70년 된 독재 정당이고, 한국에서 레드 콤플렉스는 이미 수십 년 된 현상이다. 군사독재 정권과 우파는 “노동”, “계급”, “좌파”, “혁명”, “사회주의” 등의 단어를 금기시(불온시)하고 억눌러 왔다. 또한 이런 단어들에 담긴 지향이 북한의 억압적 체제를 지지하는 것이라고 왜곡하며 낙인을 찍어 왔다. (그들이 지금도 ‘근로자’라는 말을 고수하려는 것도 한 사례일 것이다.) 그래서 이런 억압에 맞선 한국의 노동운동과 좌파 운동의 투쟁 역사는 “노동” 같은 단어들의 ‘시민권’을 획득해 온 역사이기도 했다. 이런 투쟁은 이 단어들이 북한의 억압적 체제와 전혀 관계 없음을 이론과 실천으로 입증하는 일이기도 하다. 진정으로 노동계급의 자력 해방을 추구하는 진지한 좌파라면, 남한 지배자들의 탄압과 위선에 맞서는 것과 북한의 일당 독재 체제가 감히 “노동계급”과 “사회주의”를 ‘참칭’하는 것을 비판하고 그 체제의 성격을 분석해 폭로하는 것을 모두 중시해야 한다.(주장과 행동에서의 비중은 상황에 따라 다르겠지만 말이다.) 그래야 북한을 핑계로 한 우파의 위선적 공격에 효과적으로 맞설 수 있다. 그러므로 노동당 대표단의 “북한 연상론”은 좌파의 역사에 대한 일종의 불쾌한 희화화이며, 임무 방기다. 불평등과 정의의 문제가 시대적 화두인 건 사실이고 정의당과 비슷한 평등당이란 당명이 선거에서는 득이 될지 모르겠지만, 적어도 좌파적 신용이라는 정치적 자산 면에서는 그 득이 이런 무원칙함 때문에 잃는 실보다 클 것 같지는 않다.
3 (저마다 ‘노동’의 구체적 의미를 조금씩 다르게 해석했지만 그럼에도) “노동”(과 “사회주의”)의 의미를 우파나 스탈린주의식 왜곡에서 맞서 지키고 계승하려 투쟁한 역사가 헛되지 않았던 것이다. 좌파의 지난한 투쟁이 노동자 대중 운동을 매개로 대중의 의식에 누적된 영향을 남긴 것이다.
둘째, 노동당이라는 당명이 확장성이 없다는 주장은 조직 노동계급(선진 노동자)의 집단적 경험에도 부합하지 않는다. 냉전 우파적 통치술을 앞세웠던 박근혜 정부의 몰락에서도 드러났듯이, 지금은 그 어느 때보다 친북(종북) 마녀사냥이 잘 통하지 않는 시기다. 또한 퇴진 촛불은 노동자 투쟁의 선도적 기여 없이 가능하지 않았다. 그래서 광장에서 조직 노동운동 대열은 환영받았다. 이런 흐름을 이어 정의당은 올해 대선에서 “노동”을 전면에 내세워 대선 운동을 펼치고 진보·좌파의 역대 최고 성적을 거뒀다. 그런데 그 대선을 앞두고 노동당 내부에서는 “노동”을 상징하는 현 이갑용 대표가 대선 후보로 출마하는 것을 불편해 하는 목소리가 있었다. 정작 노동당도 지난해 총선에서 득표 성적이 가장 좋았던 출마 지역은 조직 노동운동의 기반이 있는 울산 등이었다. 노동당 기초의원들의 지역구도 노동자 당원 비중이 높고 노동자 밀집 지역인 울산·경남·거제이다. 사실 이런 현상은 하루 이틀 된 일이 아니다. 민주노동당은 이미 17년 전부터 “노동”이 포함된 당명으로 활동하며 몇 번의 선거에서 큰 성과를 거뒀다.추수주의
이처럼 좌파적 원칙이나 선진 노동자들의 투쟁 경험에 부합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노동당 대표단의 당명 변경 사유는 (후진적) 대중 추수주의이다. “대중이 어떻게 인식하느냐”가 중요하다고 하는 것도 그런 속내의 표현이다. 물론 내년 지방선거에 대한 고려도 크게 작용했을 것이다. 그런데 이 추수주의가 비관적 전망에서 나오는 것 같지는 않다. 가령 노동당 금민 정책위 의장은 이렇게 말한다. “[문재인 정부의] 개혁은 신자유주의 세계경제와 고유하게 한국경제가 직면한 위기 구조에 비추어 볼 때 불충분한 개혁으로 끝날 수 있고, 불충분한 개혁과 위기의 심화가 대중을 분노하게 할 수도 있지만, 분노의 방향이 어디로 향하게 될 것인지는 전혀 사전에 자동적으로 결정되어 있지 않다. … 신자유주의의 폐해에 대한 부분적 교정이 아니라 다른 사회의 가능성을 현실화하는 정치적 개입력이 작동하지 않는다면 대중의 분노가 등장한다고 해서 이러한 분노가 사회적 전환의 에너지가 될 것이라는 보장은 없다.” 4 금민 의장이 신중하게 표현하고 있지만, ‘현재 위기의 성격상 좌파의 중요한 과제는 대중의 보수화를 걱정하는 것이 아니라 향후 형성될 대중의 분노에 어떻게 개입해 정치적 방향을 부여하느냐에 있다’는 것이 핵심 취지로 읽힌다.
그동안 청년 세대 조직화를 강조해 온 옛 사회당계 인사들은 대체로 박근혜 정권 퇴진 운동에 참가하면서 나름의 정치화 과정을 시작한 청년 세대를 개입 대상으로 보는 듯하다. 특히 여성주의나 알바 노동권 같은 문제에 관심이 있는 층을 주로 염두에 둘 것이다. 이들 다수는 정치적 경험이 일천해 노동자 운동(과 좌파)가 한국 사회의 변화에 기여해 온 역사나 전통을 잘 모를 것이다. 소련 붕괴 후 사회 의식을 형성하기 시작해 ‘사회주의는 이미 실패했다’는 식의 ‘편견’을 ‘상식’이라고 생각하기 쉽고, 그래서 억압적 북한 체제에 반감도 클 것이다. 도리어 민주당 정부를 ‘촛불 정부’의 등장으로 착각하고는 노동자 투쟁이나 좌파의 정부 비판을 못마땅해 할 수도 있다. 커다란 사회운동으로 수많은 평범한 대중이 난생 처음 유입될 때에는 ‘상식’이라고 불리는 낡은 편견들도 딸려 오기 마련이다.(이런 정치적 희석화가 두려워 대중 운동에 관여하기를 회피하면 종파주의일 것이다.) 문제는 이런 새로운 세대와 어떻게 관계를 맺을 것이냐일 것이다. 이 점에서 당명 개정을 포함한 노동당 혁신안은 모순된 지향들의 결합처럼 보인다. 한편으로는 정치화하는 대중에 개입해 그들을 새로운 정치적 주체로 만들겠다는 진취성이 보이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스스로 더 오른쪽으로 가서 대중에 접속하겠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어느 정도의 개방성과 요령은 필요하지만, 상대적으로 발전이 더딘 현재의 대중 의식 수준에 단지 조응할 뿐인 추수주의로는 운동의 좌경화라는 목적을 이루기 더 어려워진다. 그동안 “좌파”를 자신들의 준별적 호칭이자 지향점으로 삼아 왔던 옛 사회당계가 오히려 “좌파”라는 단어를 기피하려는 것도 모순의 일종일 것이다.(이들의 유관 단체인 좌파노동자회는 올해 평등노동자회로 이름을 바꾸었고, 기관지 격의 잡지 《월간 좌파》는 얼마 전 《월간 시대》로 제호를 바꿨다. 청년좌파는 명칭 변경을 하지 않았다.) 만약 금민 의장의 말처럼 지금이 ‘새로운 사회적 투쟁의 시대’라면 “노동”과 “좌파”가 그 어느 때보다 부각돼야 한다. 노동운동 내부에서조차 새 정부에 대한 환상이 크므로 좌파’들’의 목적의식적 관여가 더 중요하다.
좌파가 커다란 대중 운동을 경험한 대중에게 코드를 맞추는 데 꼭 자신의 선명한 좌파성을 완화시키는 방법만 있는 건 아니다. 운동의 규모가 크면 클수록 급진적 사상과 행동에 대한 대중의 개방적 태도도 커지기 때문에 그 안에서 좌파들이 하는 구실에 따라 대중도 또한 빠르게 낡은 생각에서 벗어나 급진적으로 바뀔 수 있다. 박근혜 퇴진 운동에서도 대중은 좌파의 강령까지 지지하고 따를 의사는 없었지만 운동의 진로를 놓고 좌파가 하는 주장에는 크게 호응했다. 엔지오가 아니라 좌파가 대중의 진정한 투지를 대변한 덕분에 운동은 전진할 수 있었다. 물론 좌파의 관여가 시덥잖다면, 그 반대의 일도 벌어질 수 있다. 문재인 개혁에 대한 착각에 좌파와 노동운동이 도전하지 않는다면, 박근혜 퇴진 운동이 대중의 의식에 끼친 그나마의 영향도 사라질 수 있다. 대중의 정치의식은 전진하기도 하고 후퇴하기도 한다. 그러므로 좌파가 이에 잘 관여하려면 대중의 의식에 반영되는 사회적 세력 균형에 대한 진단과 분석이 정확해야 할 뿐만 아니라 그 방법이 추수주의가 아니라 선도적이어야 할 것이다. 또한 개입주의적으로 대중적 투쟁을 조직하려고 해야 한다. 집단적 투쟁 경험 속에서 의식은 성장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마르크스주의의 공동전선 전술은 개혁주의 대중에 능동적으로 개입하는 방식으로 여전히 유효하고 중요하다.
5 그러면서 “아무리 잘못된 인식이라고 해도 대중적 인식은 정치적으로 유효하며 현실적 규정력을 가진다”고도 말한다. 이 진술이 말 그대로 대중의 착각과 환상(“인지 오류”)을 일종의 주어진(객관적) 현실로 인정하고 그것을 극복할 대응책을 추구하자는 취지라면 틀린 것이 아닐 것이다. 그러나 이 주어진 현실을 바꾸기 힘드니 좌파가 어느 정도는 그 상대적 후진성에 순응하자는 취지라면 추수주의일 것이다. 금민 의장의 주장은 이 면에서 모호한 감이 있다. 금민 의장은 “[문재인 정부에 대한] 대중의 실망과 분노가 급속도로 표출될 때 … [좌파가 개입할 수 있는] 기획을 지금부터 시작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런데 아쉽게도 그의 주장 전반에는 문재인 정부의 부르주아 개혁을 친노동 개혁으로 호도하는 이데올로기들(이 유포하는 투쟁 회피주의, 대리주의 등)에 맞서 좌파와 노동운동(또는 사회운동이)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는 드러나 있지 않다. 이 과제는 금민 의장이 강조하는 새로운 사회에 대한 강령적 선전과 사회운동과의 연계에 대한 추상적 강조로 환원될 수 없다.(운동의 과제는 말하지 않고 ‘우리 당’의 과제만 말하는 것에는 어느 정도 종파주의가 작동하는 것 아니냐는 의심도 가질 만하다.) 이 공백은 단지 아쉬운 문제가 아니다. 노동당 혁신 방향의 약점을 보여 주는 것이기도 하다.
금민 의장은 개혁 염원 대중이 민주당 정부의 개혁을 “큰 개혁”으로 착각하는 현상을 “[노동당에게] 크게 불리한 정치적 조건”으로도 간주한다.정체성의 정치학
동당 대표단이 단지 불특정 청년 세대에게만 추수주의적인 건 아닌 듯하다. “노동”이 포함된 당명이 다양한 사회 세력의 가치를 포괄하지 못한다고 할 때에는 당 안팎의 급진주의적 여성주의나 노동당에 친화적인 여러 부문 운동의 지지자들을 염두에 뒀을 것이다. 그러니 당명 변경 등 노동당 혁신 시도가 “노동 중심성”에서는 더욱 멀어지려는 시도 아니냐는 의심을 피하기 어렵다. 올해 초부터 노동당 내 청년, 여성주의 당원들 여럿이 “노동”이 포함된 당명이 다양한 주체와 가치를 포괄할 수 없다며 불편함을 호소하기도 했다. 이런 진술들은 “정체성 정치” 6 의 인상을 강하게 준다. 노동당 내에서 최근 급진주의적 여성주의 경향이 더 유력해진 듯하다. 의식적으로 정체성 정치를 받아들이지는 않더라도 “노동 중심성”에 대한 오해와 경시는 현대 자본주의 사회의 변혁에서 노동계급이 차지하는(또는 차지할) 비중을 낮추보는 사고를 드러내는 것이다.
노자본주의는 기본으로 판매하려고 상품을 생산하는 사회다. 노동계급은 독자적 생활 수단도 없고 노동력 말고는 팔아서 화폐를 구할 상품도 없다. 그래서 노동력을 판매해 그 대가인 임금으로 생활을 유지한다. 이 불평등한 거래 조건 때문에 고용주들은 구매한 노동력에 대한 통제력을 이용해 실제로는 임금 몫보다 더 많은 노동을 시킬 수 있다. 그래서 생기는 잉여노동이 자본주의적 착취이고 이윤의 실체다. 개별 노동자는 자본에 고용돼 의존할 수밖에 없고, 자본 전체도 집단적 노동에 의존한다. 경제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큰 기업(공장)일수록 그곳에 고용된 노동자들의 잠재적 힘은 크다. 그 당사자들의 (현재) 의식, 그들을 바라보는 다른 운동 주체들의 인식과 무관하게 말이다. 지난해 조직 노동자들이 성과연봉제 등에 맞서 박근혜 정부에 도전하기 시작했을 때 지배계급이 가장 걱정한 것은 임금을 위한 현대차와 기아차 등의 노동자 파업이었다. 따라서 개인들이 어떻게 느끼냐는 주관적 인식보다 객관적 현실(에 대한 인식)이 먼저다.(정체성 정치학에 깔린 주관주의는 심각한 문제다.) 이처럼 자본주의 경제의 대부분인 기업 이윤의 생산을 노동계급이 담당하므로 임금노동-자본 관계가 현대 사회의 지배적 문제이다. 이를 알아야 한다. 자본주의가 불안정한 체제이고, 경기 변동이 고용과 임금에 영향을 끼치므로 노동계급은 어떤 형태로든 체제와 늘 갈등을 빚을 수밖에 없다. 이 갈등을 목적의식적 투쟁으로 발전시키는 과정에서 노동계급은 자본주의와 화해할 수 없는 적대 관계를 확인하고 입증할 것이다. 또한 집단으로 체제를 마비시키는 힘을 발휘해 자신의 힘을 자각하고 입증할 수 있다. 요컨대, 자본주의 사회를 변혁하려면 노동계급의 경제적 힘(이윤 생산을 멈출 수 있는 힘)이 결정적으로 중요함을 알아야 한다.
국가와 사회가 대중에게 가하는 온갖 차별은 바로 이런 집단적 힘에 대한 자각을 지배자들이 가로막고 파괴하고 싶어 하기 때문에 생기는 것이다. 이른바 “분열 지배”다. 또한 오늘날 각각의 특정한 차별을 받는 집단들 내에서 가장 비중이 큰 것은 노동계급 소속 사람들일 것이다. 여성, 불안정 노동 청년, 성소수자, 빈민, 장애인 등 모두에서 그렇다. 그러므로 온갖 차별에 맞서는 운동들은 이런 점들을 이해하고 체제에 맞서는 저항의 구심으로서 노동계급과 연계돼야 한다. 노동계급 여성이나 노동계급 성소수자가 해당 차별과 천대에 맞서면서도 노동계급으로서 정체성을 중심에 놓는 일은 얼마든지 가능하다.
반면, 정체성 정치를 받아들여 노동운동의 중심성을 거부하는 전략은 오히려 운동을 각각의 차별 이슈와 정체성으로 파편화시켜 분열시킨다. 노동당 내 일부 인사들이 “아재 정치 OUT!” 같은 구호를 채택해 자당을 비롯한 노동운동 내 남성 노동자들을 멋쩍게 만들며 여성 해방을 위한 실천에 적극 동참하기 어렵게 만드는 일이 그런 사례다. 정체성의 정치학에서 극단적으로 도출된 ‘피해자 중심주의’와 ’2차 가해’ 개념이 운동 내부에 대화 없는 반목과 갈등을 키워 문제를 해결하기 힘든 방향으로 악화시키는 것도 마찬가지 사례일 것이다.
또는, 반대로 계급 간 연대를 추구해 운동을 우경화시키기도 한다. 정체성의 정치학은 특정한 차별을 (유일한) 기준점으로 삼다 보니 계급 간 단결이 가능할 듯한 착각을 조장하기도 한다. 이것의 대표 사례는, 성소수자 운동이 국제적 연대인 자긍심 행진에 주한 미국 대사관 등 제국주의 국가의 외교관들을 초빙한 일일 것이다. (한국에서는 자긍심 행진을 퀴어 퍼레이드라고 부른다. 사실 이 명칭에도 운동의 일반화보다는 자신들이 겪는 차별의 특수성을 부각하려는 전략이 담겨 있다.)
7 를 강조한다. 이런 걸 보면, 현재의 노동당 정치는 아직은 정체성 정치와 계급 정치가 모순되게 뒤섞인 상태인 듯하다.
두 경우 모두 노동계급 운동은 물론이고 결국에는 자신의 운동도 분열시키고 약화시키는 효과를 낸다. 반면, 객관적인 계급 동질성에 기초해 단결을 추구하는 마르크스주의적 계급 정치학은 차별과 천대에 맞서고 해결하는 데서도 비할 데 없이 더욱 유용하다. 그래서 좌파가 계급 정치에서 후퇴해 정체성 정치를 받아들이는 것은 (모순되게 계급 정치와 뒤섞는 것을 포함해) 일종의 퇴행이다. 자본주의에서 노동계급이 차지하는 특별한 지위를 보건대, 좌파가 계급 정치에서 물러서는 것은 자본주의 변혁의 전망에서 후퇴하는 징조일 개연성이 높다. 물론 노동당이 노동자 운동에 대한 좌파적 개입을 아주 거부하는 것은 아니다. 노동당은 4월 전국위원회에서 올해 민주노총 선거 등에 정치적으로 개입하자고 결의했다. 그러나 그러면서도 옛 사회당계 활동가들은 여러 사회운동의 “등가적 연쇄”노동당의 좌파 지향적 당원들은 이런 정치적 문제들을 심각하게 고민해 봐야 한다. 조직의 위기에 대한 고민도 있겠지만, 좌파로서의 책무도 있는 것이다. 지난 9년 새 노동당은 여러 차례 분열했다. 탈당한 지도부 대부분이 더 온건한 정의당으로 가 있다. 그런데 지금 정의당은 총선과 대선에서 약진한 반면 노동당은 그렇지 못했다. 최근에는 노동당이 주된 청중으로 고려해 왔고 강세를 보이던 청년과 여성층에서도 정의당이 지지를 넓혔다. 반면, 총선에서 노동당의 정당비례 득표는 0.5퍼센트도 안 됐다. 올해 대선에서는 내부 분위기가 어수선해 후보를 내지도 못했다. 당권자도 줄었다. 최근 지역 당원협의회 활동에 단 한 번이라도 참가한 당원이 4백 명 정도라고 한다. 나도원 경기도당 위원장은 “노동당에 대한 조직 노동의 지지는 사실상 없거나 매우 낮은 수준이고, 불안정노동 의제를 통한 조직화도 의미 있는 득표로 나타나지 않았다. 노동 조직의 지지도, 청년층의 적극 지지도 얻어 내지 못하고 있다”고 평가한다. 상대적으로 좌파성을 고수한 결과가 이처럼 시원찮다고 판단해서인지, 당 혁신 논의에서는 진취적이기보다는 우경적이고 대중 추수주의적인 방향이 눈에 띈다. 그러나 분열을 감수하며 노동당을 지킨 이유도 돌아봐야 하지 않겠는가?
물론 노동당이 처한 어려움을 말할 땐, 한국의 운동 수준이 좌파 개혁주의에게 기회가 오기에는 급진화가 아직 덜 진척돼 있다는 점도 보아야 공평할 것이다. 사실 지금 노동당이 겪는 어려움의 객관적 측면이 바로 이 문제일 것이다. 원칙 있게 뚝심을 발휘하며 좌파의 책임을 다하면서, 길게 보며 인내심 있게 기회를 기다릴 줄 알아야 한다. 결국 좌파도 노동계급 대중에게 스스로 진가를 입증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지금 노동당 내 혁신안에 대한 찬반 양측 모두 내년 지방선거에 무엇이 더 유리하겠느냐를 주된 근거로 내세우는 듯하다. 이번 혁신안에 비판적인 당원들도 체계적인 대안 전략을 내놓은 것이 아니고, 구성도 무정형이다. 이런 상황에서는 논쟁에 좌파가 개입하기도 쉽지가 않고 당대회 결정이 어떻게 될지 미리 점치기도 어렵다.
노동조합 개혁주의
마르크스주의 정치학이 효과적임을 입증하려면, 현재 노동운동의 약점을 극복할 방안도 말해야 할 것이다. 주로 대기업 정규직 노조 지도자들이 주도하는 최근의 조직 노동운동이 진보적 대중이나 차별받는 집단의 기대와 염원에 미치지 못하는 것은 사실이다. 문제는 좌파가 이를 잘 분석해 대안적 실천과 방향을 제시하는 것이다. 조직 노동운동 내에 소심하고 투쟁 회피적인 경향이 자라온 것은 노동조합 상층 지도자들이 대체로 갈수록 상층의 협상 구조와 관행에 적응하며 온건해지는 물질적 조건과 관계 있다. 노동조합이 안착해 정부와 기업주들과 대등한 교섭 구조를 안착시키는 등 자본주의적 민주주의가 한국 사회에서 자리잡아 온 효과이기도 하다. 이 노동조합 상층 상근 지도자층은 계급 투쟁의 고조를 회피하려고 잘 조직된 부문의 노동자들이 힘을 발휘하도록 조직하기를 피해 왔다. 정치와 경제의 개혁주의적 분업 논리에 따라, 운동의 혁명적 정치화로의 발전을 피하려고 해 왔다. 단사별 임금 투쟁과 산별 교섭, 총연맹의 가을 국회 입법 압박, 노동계 진보정당을 통한 개혁 입법 시도도 같은 식이었다. 또한 정부를 상대로 한 연대(정치) 파업도 거듭 불발돼 왔다. 예를 들어, 재국유화를 요구하며 조직했어야 할 쌍용차 연대 파업이 금속노조 집행부의 회피로 불발됐다. 세월호, 박근혜 퇴진 투쟁 때도 비슷한 일이 반복됐다.
기층 노동자들의 의식도 자신들의 계급적 이해관계에 늘 부합하는 건 아니다. 최근 기아차의 비정규직 노조 분리 투표가 그런 사례일 것이다. 이런 온건한 상층 지도자들의 투쟁 회피주의가 아래로부터 도전받거나 탄핵되지 않는 것은 기층 노동자들의 투지와 자신감, 의식 수준이 아직 지도부의 보수주의나 편견을 뛰어넘지 못하기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상층 지도부의 보수적 개혁주의의 책임이 면피되는 것도 아니다. 계급의식의 진전을 경험할 투쟁의 구축을 개혁주의 지도자들이 의식적으로 가로막아 왔기 때문이다. 계급의식은 노동계급 전체에서 불균등할 뿐만 아니라 시간적으로도 불균등하다. 도약과 후퇴를 거듭하는 것이다. 운동이 계속 전진하지 않으면 (선진 노동자들조차) 계급의식이 후퇴할 수도 있다. 그러나 지금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생산 현장에 기초한 노동자들의 집단적 투쟁이 지니는 객관적 힘이 없어지거나 그 중요성이 약해지는 것은 아니다. 따라서 현재의 계급의식과 객관적 계급적 이해관계 사이의 격차 문제는 좌파가 개입해 운동을 불러일으키고 운동 내 보수주의와 투쟁하며 그 격차를 좁히려고 해야 할 문제이지, 관찰자처럼 논평하며 한탄하거나 도망갈 일은 아니다.
개혁을 위한 투쟁이 중요한 것은 이런 투쟁들 속에서 체제의 본질, 계급 내 연대, 피억압 민중에 대한 헤게모니 문제 등 정치 일반으로 의식이 확장될 수 있기 때문이다. 부분적일지라도 개혁을 성취하는 데 성공한다면 그 과정은 더 촉진될 수 있을 것이다. 혁명적 좌파가 개혁을 위한 운동에 능동적으로 관여하는 이유다. 반면, 개혁주의자들은 선거를 통한 집권이 목적이므로 대중의 의식을 발전시키는 측면에서도 그 한계가 뚜렷하다. 개혁주의자들은 대중의 의식이 자당에 투표하는 수준의 의식 이상, 또는 정상적 정치 일정을 뒤흔들 수준으로까지 고양되는 것을 바라지는 않는다. 그래서 정치와 경제 영역의 분업에 기초해 운동의 발전 수위를 조절하는 것은 개혁주의자들의 영원한 숙제이자 딜레마다. 어느 수준까지 대중의 발전을 촉진하려 할 것인가를 놓고 늘 운동 내 좌우 분열이 존재한다.
8 정치와 경제의 분업도 뛰어넘으려고 해야 한다. 개혁주의의 정치·경제 분업 논리 하에서는 궁극적으로 선거를 통해 집권한 정치권력은 기업주들의 경제권력에 도전하지 않고, 경제 영역에서의 노동자 투쟁은 정치권력을 지향하는 운동에 동원되지 않는다. 즉, 이 분업 자체가 개혁주의 운동이 체제 자체에 도전하지 않는 운동임을 뜻한다. 또한 개혁주의 지도부를 따르는 대중과 혁명적 좌파가 대중적 투쟁에서 만날 매개로서 공동전선 전술의 중요성을 이해하고 잘 적용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런 일들을 잘 하려면, 과업의 성격에 걸맞은 체계적 분석과 강령, 전략이 필요하고 무엇보다 이 전략·전술을 수행할 주체가 필요하다. 그것이 혁명적 정치조직이다. 이 조직은 (대중 일반의 의식이 후퇴할 때조차도) 가장 선진적인 경험과 의식의 보전을 담보할 수단이기도 하다. 당연히 이런 수단들의 결합이 효과적일수록 상층 개혁주의 정치의 헤게모니에 도전할 기회도 늘어나고 그 도전이 성공할 확률도 높아질 것이다.
이처럼 개혁을 위한 투쟁을 대하는 목적이 다르므로, 개혁 쟁취 운동이 꼭 개혁주의자들의 전유물이어야 할 필연적인 이유는 없다. 다만 목적과 수단이 다르기에 좌파는 개혁 쟁취 투쟁에서 (기존 개혁주의 조직과 별개로) 기층 현장 노동자들의 전투적(좌파적) 네트워크를 건설하려고 해야 한다.사회운동정당론
그런 점에서 노동당 혁신 방안이 강조하는 사회운동정당론도 살펴 보자. 제출된 노동당의 혁신 방안은 장차 사회운동이 활성화될 것으로 전망하지만, 문재인 정부 아래서는 정권에 대항하는 일반화된 성격보다는 부문적인 의제들을 중심으로 각개약진하는 모양새일 것이라고 전망한다. 따라서 이 운동들에 적극 개입하면서도 이 운동들이 당을 통해 일반화된 전망을 획득할 수 있도록 개입해야 한다는 것이다.
좌파(정당)가 2008년 위기 이후 등장한 새로운 사회운동과 적극 연계해야 한다는 의견은 옳다. 사회운동이 정치화돼야 하고 그것이 정당이라는 매개를 필요로 한다는 지적도 형식적으로는 옳다. 금민 의장은 노조가 부문적 요구로 파업을 하면, 의회정당이 그런 요구를 반영해 입법을 하는 식으로 역할 분담(정치와 경제의 의식적 분업)을 해 온 기존의 주류 사회민주당들의 방식이 문제라고 옳게 비판한다. 문제는 어떤 정치냐, 어떤 정당이냐, 그 정당과 운동의 관계는 어떠해야 하며 무엇을 매개로 관계를 맺느냐일 것이다. 그런데 옛 사회당계의 사회운동정당론이 기존 개혁주의 정당의 문제를 극복할 수 있을지는 불분명하다.
9 이처럼 경험적 증거는 당 구조에 사회운동단체를 포함시키는 것이 문제를 자동으로 해결해 주지 않음을 보여 준다. 물론 금민 의장도 “당의 조직체계 개혁만으로 이러한 일이 저절로 달성되지 않[고] … 사회운동기구 도입은 … 최소한의 장치이며 가능성이 등장할 수 있는 필요조건”이라고 말한다. 정당과 운동의 관계에서도 정치의 내용이 중요한 것이다.
우선 정당과 운동의 관계에 관해 일차적으로 노동당 혁신안이 내놓은 방안은 조직 문제다. 이 조직 혁신 방안은 노동당을 지지하는 사회운동 단체들에게 아예 당내 기구 자격을 주고 당내 대의기구에 그 단체 소속 당원 수만큼 의결권을 보장하자고 한다.(이밖에 부문위원회 활성화 등도 있는데 이는 기존의 활동을 잘하자는 것이므로 논외로 하자.) 노동당 안에서는 이것이 새로운 조직론인 것처럼 토론되는데, 사실 이는 과거 민주노동당의 중앙위원/대의원 부문할당제와 거의 흡사하다. 당시 민주노동당은 자당을 배타적으로 지지하는 단체들에게 일정한 수의 중앙위원/대의원 선출권을 할당했다. 예를 들어, 노동부문 할당 대의원은 민주노총에 배정이 일임됐고, 그중 일정 비율이 한국노총 소속 활동 당원들에게도 배정됐다. 농민 할당도 전국농민회총연맹에 선출권이 있었다. 이 부문할당제의 장점은 운동 내 논쟁과 당내 토론이 연결될 수 있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언제나 중요한 것은 정치(전략)이다. 민주노동당 지도자들과 사회운동 단체들, 특히 민주노총의 지도자들은 협력도 했지만, 서로 각자의 영역(에서 자신들의 이니셔티브)을 철저히 구분했다. 본질적으로 개혁주의적 정치·경제 분업 구조에서 벗어나지 않았다는 것이다.이 문제에 대한 옛 사회당계의 입장은 “개별적 사회운동의 등가적 연쇄를 보장할 ‘정당으로서의 당’ … 모든 사회운동의 보편적 깃발로서 전체적인 사회적 생태적 전환의 상을 대표[하는 당]”이라는 금민 의장의 말에서 잘 드러나는 듯하다. 또한 “대중의 실망과 분노가 급속도로 표출될 때, 분출하는 요구권들의 혼돈을 새로운 사회에 대한 정돈된 전망으로 묶어 내면서, 이를 통해 개별 시민을 국민으로 묶어 내고, 위와 아래의 대립 구도를 만들 기획”을 내놓는 것이 새로운 사회운동정당의 임무라고도 말한다. 운동은 부분적 요구(권의 행사 또는 저항권의 행사)를 대표하고, 정당은 사회 전체의 개혁 전망을 대표한다는 생각이 반복해서 강조되고 있다. 이런 도식은 경제투쟁으로는 계급의식을 쟁취할 수 없고 계급의식은 계급 운동 외부에서 도입되며 따라서 정치투쟁이 경제투쟁보다 우위에 있다는 독일 사회민주주의자 카를 카우츠키를 연상케 한다. 운동과 정당의 관계를 이렇게 설정하는 것이 개혁주의적 분업과 본질적으로 다른 것인지 의심스럽다. 가령 다음의 진술을 보자. “2008년 이후 유럽의 광장항쟁은 정당이 체제 변혁적 요구를 내세우는 주권적 구조를 보였으며, 이러한 특성은 새로운 사회운동정당을 통한 집권 프로그램으로 이어져 일련의 선거 과정을 거치며 낡은 정치체제의 혁파로 귀결되고 있다.” 그가 그리스 시리자, 스페인 포데모스, 독일 좌파당 등 일정한 선거적 성공을 거둔 유럽 좌파 정당들만 새로운 사회운동정당 모델로 치켜세우는 이유가 이 문장에 담긴 듯하다.
지금처럼 체제의 모순과 불평등이 대중의 삶을 피폐하게 하는 때에 체제 순응 의식보다는 대중 투쟁으로 개혁주의 의식이 부상해 개혁주의 정당이 성장하는 것은 도움 되는 일이긴 하다. 그러나 운동의 정치화를 위해 정당/정치의 개입이 필요하지만, 체제 위기의 시대에 사회운동의 활성화와 정치화가 꼭 ‘선거정당’을 매개로 해야 하는 것은 아닌 까닭이다.
무엇이 더 선차적 요인인가 하는 것은 전략 문제이므로 따져 볼 필요가 있다. 투쟁 속에서 개혁주의적 의식이 성장해 선거로 반영되는 것이다. 1997년 대중 파업을 정점으로 하는 민주노조 운동의 15년 역사를 보지 않고서 민주노동당의 등장과 선거적 성공을 말할 수 없듯이 말이다. 지난 2~3년의 노동자 투쟁과 그것이 촉발한 정권 퇴진 운동 없이 정권 교체와 정의당의 약진을 설명할 수도 없다. 대중의 투쟁이 선차적이다. 따라서 운동의 활성화에 도움이 되는 정당이 더 필요하다. 그 점에서 노골적인 선거정당이 아니라 사회운동 속의 정당을 내세우지만, 모종의 “운동 vs. 정치” 도식 때문에 사회운동정당론은 결국 좌파적 ‘선거정당’을 만들자는 명백히 모순된 결론으로 귀결되는 것이다. 이 모순은 무엇보다 이 사회운동정당론이 좌파적이되 개혁주의의 한계를 갖는 좌파 개혁주의의 스펙트럼 안에 있기 때문으로 보인다.
운동의 부흥과 좌파정당의 선거적 전진 사이에서또한 운동이 아니라 정당이 정치의식의 담지자라는 해석은 포스트마르크스주의의 주장을 떠오르게 한다. 포스트마르크스주의는 객관적 계급 구조는 더는 유효하지 않고 대신 대안적 담론으로 새로운 대중적 주체를 형성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포스트마르크스주의는 이 주체화(민주주의에서의 주권자화) 과정을 주도하는 것은 담론으로 개인(민중)을 호명하는 지식인이다. 이들 그 과정은 포퓰리즘, 그리고 ‘민주주의의 급진화’로 부른다. 지식인(정당)에 특권적 지위를 부여한 것이다. 또한 주관적 담론으로 정체성을 형성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최근 노동당 내 유력한 경향이며 굉장한 주관주의를 방법으로 채택한) 정체성 정치 경향도 이 이론에 영향을 받았을 것이다. 그들은 고전 마르크스주의가 계급과 계급의식의 관계를 필연적 귀결(기계적 유물론)로 연결 지은 것이 오류라고 하지만, 이는 오해이자 왜곡이다.
이 문제는 대중과 정당이 관계 맺는 방식과 수단(매개) 문제를 제기한다. 사회운동정당론대로라면, 부분적 운동과 정당만 있으면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당과 운동(속의 대중) 사이에는 공동전선 같은 방식도 수단으로 존재할 수 있다. 고전 마르크스주의 전통의 공동전선은, 개혁주의 지도자들과 협약을 맺고 정치적·조직적 독립성을 유지하며 개혁주의 대중에게도 적극 개입하며 대중 투쟁을 건설하려고 고안된 전술이다.
박근혜 정권 퇴진 운동에는 계급적 불평등에 대한 대중의 분노가 결국 선거에서 정권 교체를 지지하거나 노동계 진보정당에게 역대 최대 표를 안겨 주는 것으로 귀결됐다. 쉽게 말해 운동을 지탱한 대중 자체가 이 시점에서 개혁주의적 대중이었다. 따라서 좌파정치를 고수하면서 이들과 만날 수 있는 공동전선 방식과 정신이 아니고 정당 자체로 이들을 수렴하는 방식으로만 대중과 접속하려 한다면, 그 결과에 따라 종파적이거나 반대로 대중 추수주의로 빠질 위험이 크다. 지금 노동당 혁신안은 후자의 가능성을 엿보인 것이다.
이 문제에서 사회운동정당론이 계급 정치가 아니라 포퓰리즘 전략에 기초해 있다는 점이 다시 한 번 약점으로 작용하는 듯하다. 금민 의장은 지금이 ‘전통적 좌우 구도’가 아니라 “위와 아래의 전선”이 중요한 국면이라고 주장한다. 국제적 광장 점거 운동의 붐에서 유행한 “1 vs. 99” 담론이나 “정치계급 vs. 민중” 구도를 강조하는 스페인 포데모스를 성공 사례로 들면서 말이다. 이런 구분법이 계급적 불평등을 함축하기도 하지만, 좌우 구분선이 무의미해진 듯 주장하는 금민 의장의 해석은 어색하고 우스꽝스럽다. 애초에 “좌파”라는 단어가 가리키는 것이 지배계급에 맞서 기층 대중을 대변해 더 급진적 변화를 추구하는 정치 세력이기 때문이다. 또한 금민 의장은 “2008년 이후 유럽의 급진적 광장 정치는 계급을 호명하는 것이 아니라 개별적 시민을 보편적 주권자, 곧 인민으로 불러내는 방식을 택했고, 그 주요 수단은 소셜 미디어였다”고도 한다.
포스트마르크스주의처럼 나날이 겪는 노동계급의 현실적 경험과 유리된 담론 ‘전략’(그런 걸 전략이라고 부를 수 있다면)을 고집한다면 사회주의적 집단적 주체를 형성할 수 없을 것이다. 어떤 담론의 기초에 계급의 실질적 삶의 경험이 없다면, 그것은 기껏해야 개인들의 의식, 선의, 도덕 등에 호소하는 공상적 사회주의의 실험을 반복할 뿐이다. “좌우가 아니라 위아래”라는 식의 담론이 계급적 불평등을 함축하기도 하지만, 최근의 용어법에서는 노동자 운동을 여러 부문 운동(사회운동)의 하나로 보고 “민주주의”와 “주권”을 강조하는 포퓰리즘 맥락이 더 두드러진다.(최근 유명했던 운동들의 건설 과정에 관해 대표적 오해를 유포하는 ‘소셜미디어 수단론’은 다루지 않겠다. 금민 의장이 소셜미디어 활용을 최근 운동의 강점으로 소개했지만, 현재 노동당 혁신안에서 소셜미디어 활용이 강조돼 있지는 않기 때문이다.)
정당과 전략
노동자들은 지금보다 더 많은 변화를 바라고 상상하며, 싸우고 쟁취할 자격과 능력이 있다. 지금의 세계적 위기의 성격상, 운동은 반자본주의를 분명히 하는 방향으로 전진해야 한다. 자본주의에서 점진적으로(민주주의의 점진적 급진화를 통해서) 사회주의로 갈 수 없다는 것은 역사에서 거듭 증명됐다.
혁명적 노동자 운동을 추구하는 정당은 노동자 운동 자체가 정치화하고, 이 운동이 여러 사회운동들의 혁명적 구심이 되도록 도울 수 있다. 고양된 노동계급이 이윤 생산의 현장에 기초해 스스로 대안적 사회를 구성하고 운영할 기초로서 성장하는 것이다. 이 당의 목적은 노동계급을 혁명의 방향으로 단결시키는 것이다. 노동계급 운동의 의식성, 혁명성이 최고조에 이르면 기존 의회와 국가기구는 결정적 국면에서 노동계급의 대안 국가(권력)와 대립하기 마련이다. 두 권력 중 하나를 추구해야 하는 선택이 강요되는 것이다. 이는 주관적 염원으로 회피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왜냐하면, 운동이 어느 수준을 넘어서 고양되면 운동이 스스로 국가를 지향하기 전에 이미 기존 자본주의 국가가 무력으로 개입할 것이기 때문이다. 체제의 수혜자들이자 수호자들은 때로는 자본 파업으로, 때로는 군사 쿠데타로, 때로는 파시스트를 후원함으로써 개혁주의 정부와 그것을 지지한 대중 운동을 길들이려 해 왔다. 기존 국가기구의 수장이 돼서 자본주의 국가의 계급적 야만성을 길들이려 했던(또는 길들일 수 있다고 믿었던) 개혁주의자들은 모두 이 과정에서 살해되거나(칠레 아옌데), 그 자신이 국가의 포로가 돼 계급을 배신하는 길로 갔다. 그러므로 좌파는 그 전부터 대안을 가지고 의식적으로 준비하며 운동의 성장을 고무해야 한다. 혁명적 노동자 운동을 건설하려는 정당이 혁명기뿐 아니라 일상기에도 필요한 이유다. 이 당은 운동과 정치의 매개가 돼야 한다.
또한 바로 이런 이유로 좌파 개혁주의는 앞으로 기회를 얻겠지만, 그와 동시에 위기를 겪을 것이다. 그러므로 사회 변혁을 추구하는 좌파라면, 개혁이냐 혁명이냐 하는 객관적 전략 문제에 답을 내놔야 한다. 노동당의 사회운동정당 프로젝트는 현 위기의 범위를 신자유주의로 한정함으로써 이 문제를 언급할 필요를 없앴다. 회피하는 것이다. 그런데 그동안 노동당이 좌파 개혁주의적 포퓰리즘의 색채를 갈수록 짙게 해 온 것을 떠올리면, 이는 단지 수줍은 회피는 아닌 듯하다. 이번 당대회 혁신 방향에 드러나는 모순과 우경화 조짐들은 그런 의심에 일조한다. 노동당이 겪는 어려움의 주관적 측면은 결국 개혁주의로 향하는 정치에서 비롯하는데, 지금 노동당의 혁신 방향은 그 개혁주의를 더 짙게 하고 있는 것이다.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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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기 대표단 일동, ‘당원 동지들의 뜻을 모아 당명 개정을 추진하겠습니다’(2017.6.16). 이하 노동당 대표단의 입장이라고 인용한 것의 출처는 모두 이 글이다. 굵은 색 강조는 원문.
http://www.laborparty.kr/index.php?mid=bd_member&category=1731050&document_srl=1732453 ↩ - ‘당 혁신을 위한 당원 토론회’ 자료집. ↩
- 사실 민주노동당 창당 시점에서도 부정적 문제 제기의 다수는 ‘조선로동당과의 관계’ 문제가 아니라 ‘민주당 투표층을 분열시켜 한나라당에게 이로운 일 시키는 것 아니냐’는 것이었다. 한편, 민주노동당이 분열과 갈등을 겪으며 존재감이 약화된 것은 오히려 민주당과의 연립정부 노선(스탈린주의의 인민전선 전략)을 추구하며 노동계급 중심성에서 의식적으로 멀어지려고 한 것 때문이었다. ↩
- ‘당 혁신을 위한 당원 토론회’ 자료집. ↩
- ‘당 혁신을 위한 당원 토론회’ 자료집. ↩
- 특정한 차별을 경험한 사람만이 그 차별을 인식할 수 있고 따라서 그 차별에 맞서는 운동을 할 수 있다는 정치와 그 전략. 객관적 계급 관계 분석을 폐기하고 담론을 통한 개인들(“민중”)의 주체화를 강조한 포스트맑스주의와 이론적으로 연결된다. ↩
- 각 운동의 비중과 가치가 동등하다고 보는 무지개식 연대의 다른 표현. ↩
- 가령 학교에서는 노조 소속을 뛰어넘어 교사, 학교비정규직 노동자들이 모임을 형성해야 할 것이다. 특히나 교사 부분에서 다양한 학교비정규직 직종의 처우 개선과 정규직화에 반감이 있으므로 더욱 그래야 할 것이다. ↩
- 그런데도 그런 연관조차 부담스러워 “민주노총당”을 벗어나고자 한 심상정, 노회찬, 조승수 등이 탈당해 지금 노동당의 뿌리인 진보신당을 만들었다. 그런 그들이 최근 노동을 강조해 득을 얻고, 반대로 좌파적 잔류파였던 노동당에서는 노동 탈피 논쟁이 있는 건 얄궂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