쟁점
미국 급진주의 페미니즘의 궤적과 교훈
1960~70년대 미국 여성운동은 제2물결 여성운동의 선구자로서 국제적으로 영향을 미쳤고, 미국 급진주의 페미니즘은 강렬한 유산을 남겼다. 주디스 오어는 “제2물결 여성 해방운동은, 그것을 비판하고 또 다른 전망을 제시하고자 할 때도, 여전히 활동가들과 이론가들에게 핵심적 기준”이라고 했다.
그래서 최근 여성 해방 정치에 대한 관심이 되살아나면서 제기된 논의들을 꿰뚫어 보기 위해 미국 여성 해방 운동과 급진주의 페미니즘의 역사를 살펴보는 것은 매우 유의미하다.
《나쁜여자 전성시대 ─ 급진 페미니즘의 오래된 현재, 1967~1975》(앨리스 에콜스 지음, 이매진, 2017, 이하 《나쁜여자 전성시대》)는 미국 급진주의 페미니즘의 흥망성쇠를 흥미롭고 생생하게 서술한 역사서이다.
《나쁜여자 전성시대》의 저자 앨리스 에콜스는 마르크스주의자는 아니다. 그래서 마르크스주의 용어가 혼란스럽게 사용된다는 점을 염두에 둬야 한다. 그럼에도 이 책이 정리한 다양한 자료와 활동가 인터뷰는 미국 급진주의 페미니즘에 대한 이해를 풍부하게 해 준다. 무엇보다 비판적 시각에서 급진주의 페미니즘 내 다양한 논쟁들을 다루고 있어 두꺼운 분량에도 불구하고 여성운동에 관심 있는 독자들은 시간을 투자할 만하다. 미국 급진주의 페미니즘을 다룬 또 다른 책 《페미니즘 선언》(한우리, 현실문화, 2016)은 당시 여성 해방 운동을 주도한 단체와 활동가 들의 ‘유명한’ 선언문 9개를 정리한 작은 자료집이다.
그러나 《페미니즘 선언》은 미국 급진주의 페미니즘에 대한 지지를 바탕으로 기획됐기 때문에 선언문마다 후술된 ‘감상평’은 비판적으로 봐야 한다. 《페미니즘 선언》을 번역·기획한 한우리 씨는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낙태죄 폐지 운동, 해시태그로 성폭력 경험 공개 발언, 메갈리아의 미러링” 등 “오늘날 한국 젊은 페미니스트들의 모습은 60~70년대 여성주의자들과 무척 닮아 있다”며 미국 급진주의 페미니즘을 한국 여성운동이 계승해야 한다고 밝혔다.
그러나 미국 급진주의 페미니즘은 분열에 분열을 거듭하며 10년 만에 실패했다. 따라서 우리는 급진주의 페미니즘을 무비판적으로 계승할 것이 아니라 정치적 약점들을 분석해서 반면교사로 삼아야 한다.
나는 《나쁜여자 전성시대》을 바탕으로 미국 급진주의 페미니즘의 역사와 정치적 한계를 살펴보고자 한다.
시민평등권 운동
미국 여성 해방 운동과 급진주의 페미니즘은 독특한 역사적 산물이다. 여성운동의 토대가 된 시대적 배경과 급진주의 페미니즘 형성에 영향을 준 운동들을 살펴봐야 한다.
1960~70년대는 세계적으로 한 세대가 급진화한 특별한 시기였다. 강고해 보이던 주요 국가들이 ‘1968 반란’으로 휘청거렸다. 세계적 약소국인 베트남의 농민 게릴라가 최강대국 미국을 쓰러뜨렸다. 많은 사람들이 체제를 변혁할 수 있다는 자신감 속에 해방과 혁명을 꿈꿨다. 특히 젊은 학생들은 기성 체제에 도전하며 전투적으로 투쟁했다. 권위주의에 맞선 열정과 저항적 히피 문화가 학생들을 사로잡았다.
이런 급진적 정서 덕분에 1960년대에 여성 해방 운동이 중요한 의제로 떠올랐다.
무엇보다 여성의 경제적 지위 변화가 여성운동의 물질적 바탕이 됐다. 경제 호황, 고등교육 확대, 효과적인 피임법의 대중화에 힘입어 노동시장에 여성들이 대거 진출했다. 이전보다 노동자들과 전문직 중간계급 여성들이 대폭 늘어났다. 여성들은 임금노동으로 경제적 자립과 개인적 자유를 어느 정도 누릴 수 있었다.
그러나 여성들은 저임금과 각종 차별로 고통받았다. 여성의 모순적 처지에 대한 불만은 고등교육을 받은 중간계급 가정 출신의 학생들과 전문직 중간계급 여성들에게서 터져 나왔다.
여성들은 흑인들의 시민평등권 운동에 자신들의 차별적 현실을 투사해 여성운동을 정립했다. 1960년대 내내 미국 사회를 뒤흔든 흑인 인종차별 반대 운동에 젊은 여성들이 대거 참가했는데, 후에 이 여성 활동가들이 여성 해방 운동의 구심을 형성했다.
민권 운동의 돌격대”라는 명성을 얻었다. 4
시민평등권 운동을 조직하는 데 중요한 구실을 한 주요 학생 조직은 학생비폭력조정위원회SNCC와 민주사회학생연합SDS이다. 이 단체들은 인종차별이 가장 극심한 남부 지역에서 인종 격리 정책에 도전하고, 연좌 농성과 시위, 선거인 등록 활동 등을 조직했다. 학생비폭력조정위원회는 “대의에 헌신하고 기꺼이 목숨까지 내걸면서 금세1960년대 초까지 시민평등권 운동은 중간계급 출신의 흑인 목사들이 이끌었다. 마틴 루터 킹의 비폭력주의는 전면적 충돌을 회피하고 주류 사회 편입을 추구하는 온건한 전략이었다. 미국 민주당은 경제 성장과 도시화로 늘어난 흑인 인구를 무시할 수 없음을 깨닫고 변화를 시도했다. 북부 도시에서의 통제력을 유지하기 위해 아주 제한적으로 흑인들을 공식정치로 흡수하려 했다. 이런 변화는 세계 패권 국가인 미국 정부가 ‘자유 민주주의’의 수호자라는 이미지의 손상을 원치 않았던 것도 반영된 현상이었다.
5 1960년에는 백인 전용 간이식당 운영에 항의하는 연좌 농성도 벌어졌다. 여성들은 시민평등권 운동에서 용감하고 헌신적인 활동가였다.
그러나 미국 민주당의 변화는 매우 제한적이고 피상적이었다. 미국 민주당은 마틴 루터 킹의 ‘합법주의’가 인종차별 반대 운동을 통제하도록 압박했다. 그러나 덜 ‘합법적’인 대중 운동이 기층에서 터져 나왔다. 흑인/백인 버스 좌석 분리 정책에 반대하는 대규모 버스 보이콧 운동이 1년 동안 지속됐다.학생비폭력조정위원회는 ‘흑인과 백인이 함께 자유롭게 버스 타기 운동’(일명 freedom ride 운동)을 이끌며 남부의 인종차별에 대항하는 투쟁을 주도했다. 이 활동가들은 남부 지역 경찰의 잔인한 폭력과 위선적인 민주당의 통제 전략에 환멸을 느끼면서 점점 전투적으로 진화했다. 시민평등권 운동은 “미국 남부 여러 주에서 미국의 주류 사회에 통합되기 위한 운동으로 시작됐던 것이 점점 미국 자본주의 자체에 대한 반대 운동으로 변해 갔다.” 마틴 루터 킹 목사의 전략이 지지를 잃어 가자, 1965년 이후 흑인 민족주의를 바탕으로 한 블랙파워 사상이 공백을 메우며 성장했다. “블랙파워란 흑인의 자결, 흑인 공동체의 정치, 경제, 문화 생활을 흑인이 통제하는 상태를 뜻했다.”
‘백인과의 공동체는 흑인의 정체성을 무디게 해 줄 뿐이다’, ‘검은 것이 아름답다’ 같은 블랙파워 메시지는 흑인들의 자긍심을 고취시키고 온건화 전략에 실망한 활동가들에게 공명을 일으켰다. 마오쩌둥주의의 영향을 받은 흑표범당은 흑인 해방 운동을 이끈 ‘혁명적’ 조직이었다. 흑표범당은 백인이 모두 흑인 차별에 공모하고 있으므로 백인과 분리된 운동을 조직하고, 흑인의 자결권을 요구하는 전투를 벌여야 한다고 주장했다.
학생비폭력조정위원회가 블랙파워를 지지하자, 백인 활동가들은 주변화됐다. 후술하겠지만 블랙파워는 미국 급진주의 페미니즘의 논리적 발판이 되기도 했다.
민주사회학생연합SDS은 산업민주연맹이라는 우파 사회민주주의 조직의 지부로 출발했다. 그러나 시민평등권 운동에 적극 참여하면서 왼쪽으로 이동했다. 이후 민주당 존슨 정부의 베트남 확전에 실망해 자유주의에 반대하며 급진화했다. 민주사회학생연합은 마오쩌둥주의가 주도하는 신좌파의 영향을 받고 있었다. 이들은 주류 사회에서 배제된 가난한 민중을 낭만적으로 ‘이상화’했다. 그들의 정치를 압축적으로 잘 표현한 구호는 “민중이 스스로 결정하게 하자”였다. 이 구호는 민중의 요구는 그냥 지지하고 반영해야 하므로 ‘위로부터의 리더십’은 끼어들면 안 된다는 아나키즘적 정치를 의미했다. “분명한 계획은 기만이고 참여 민주주의 정신에 위배되는 것으로 간주됐다.”
민주사회학생연합은 체제에서 천대받는 알코올 중독자, 거리 부랑자, 갱단에 가입한 실업자 등 불안정한 빈민을 조직하는 데 몰두했다. 그러나 이 조직 사업은 성공할 수가 없었다.
노동계급이 체제를 변혁할 집단적 힘을 가지고 있다는 마르크스주의의 기본 명제는 자본주의 생산관계 때문에 객관적으로 부여된 노동계급의 능력을 포착한 것이다. 따라서 차별의 정도 여부는 사회적 힘이나 선진 의식을 담보하는 지표가 될 수 없다. 오히려 가난하고 천대받는 사람들은 소외가 심해 불안정하고 무기력할 수도 있다. 그래서 빈민 남성 조직을 담당한 남성 활동가들은 유의미한 성과를 내지 못했다. 반면 여성 활동가들은 여가, 보육 시설, 학교, 주택, 복지 등 “생활 보호 대상 유자녀 여성들을 조직하는 데 상당한 진전을 보였다.”
시민평등권 운동이나 빈민 조직 사업 등에서 여성 활동가들은 큰 기여를 했다. 그러나 여성 활동가들은 운동 내에서 동등한 동지가 아니라 보조적 일꾼 취급을 받았다.
신좌파의 성차별적 행태와 급진주의 페미니즘의 태동
급진주의 페미니스트 로빈 모건은 《자매애는 강하다》 서문에서 운동 속 여성들의 처지를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우리도 남자들처럼 새로운 사회를 건설하려는 투쟁에 참여한 점을 생각하면, ‘운동’ 바깥에서나 안에서나 똑같은 일을 하고 있다는 깨달음은 서서히 우울하게 다가왔다. 우리는 남자들이 발언하는 연설문을 타이핑하고, 정책이 아니라 커피를 만들고, 구질서를 대체한다는 정치를 하는 남자들의 액세서리 노릇을 했다.
‘운동권’ 남성 활동가들의 성차별적 언행 문제는 매우 심각했다. 1960~70년대 미국 학생들은 대개 중간계급 가정의 자녀들로 호황기의 풍요 속에서 자란 세대였다. 이들은 노동계급의 중요성을 이해하지 못했다. 미국에서 노동계급과 노동계급 정치조직들은 1940년대 후반과 1950년대에 매카시즘이라는 반공주의자 마녀사냥과 노동조합 탄압 속에서 큰 타격을 입어 영향력이 미비했기 때문이다.
민주사회학생연합 남성 활동가들은 가난한 빈민과 친분을 쌓기 위해 여성 차별적 언행을 모방했고, 공공연하게 성차별적으로 행동해 여성 활동가들을 분노케 했다.
시민평등권 운동에서는 흑인 남성과 백인 여성의 성관계가 종종 문제를 일으켰다. 팽배한 ‘마초’ 분위기 속에서 일부 흑인 남성들은 남자다움을 과시하기 위해 많은 백인 여성들과 성관계를 맺는 것을 자랑거리로 삼았다. 일부 백인 여성 활동가들은 ‘흑인 남성의 성적 구애를 거부하면 인종차별주의자로 찍히지 않을까? 그냥 받아 주면 헤픈 여자로 찍히지 않을까?’ 하며 난감해 했다. 학생비폭력조정위원회의 일부 여성 활동가들은 운동 내 불평등한 여성의 지위와 팽배한 성차별적 분위기에 자극받아 1964년 11월 운동 내 성적 불평등 목록을 정리한 총회 보고서를 작성했다. 그러나 학생비폭력조정위원회의 지도적 흑인 활동가 스토클리 카마이클은 “여성들의 지위가 어떤가요? … 여성들의 위치는 납작 엎드리는 것이요!” 하고 자문자답하며 여성들을 비웃었다. 1965년에 열린 민주사회학생연합 대의원대회에서도 남성 대의원들은 여성 연사들의 문제 제기에 “너는 그저 빠구리가 필요한 것일 뿐이야”라고 조롱했다.
여성 활동가들은 신좌파 남성 활동가들의 성차별적 모욕에 깊은 상처를 받았다. 그러나 신좌파의 정치는 여성들이 자신의 개인적 처지와 차별을 돌아보는 도구가 되기도 했다. 급진주의 페미니즘의 구호 “개인적인 것이 정치적인 것이다”는 신좌파의 개인 경험 중시 정치를 그대로 투영한 구호였다. “개인의 억압에 주목해야 한다는 사고는 여성들이 자신의 처지를 검토하는 데 필요한 이데올로기 수단을 제공했다.”
블랙파워에 밀리고 빈민 조직에 실패한 신좌파 학생 운동은 방향을 잃고 혼란에 빠졌다. 신좌파 학생 활동가들은 베트남 반전 운동 건설과 징병 거부 운동 조직으로 위기를 만회하려 했다.
학생들은 베트남 반전 운동에서 대규모 반전 시위를 조직하는 등 중요한 구실을 했다. 하지만 일부 도덕주의적 방식은 문제를 일으켰다.
신좌파 학생 활동가들은 징병 거부를 ‘찌질한’ 도피가 아니라 용감하고 ‘남자다운’ 행동으로 치켜세우며 캠페인을 조직했다. 징병 거부 중심의 반전 캠페인은 “징병 통지서를 불태울 수도 없고, 감옥에도 갈 수 없”었던 여성 활동가들을 주변화시켰다. “여자들은 ‘아니오’라고 말하는 남자들에게 ‘예’라고 말하자” 라는 구호에서 드러나듯 여성 활동가들은 수동적인 지지자로 취급됐다.
대규모 반전 운동에도 불구하고 미국 지배자들은 전쟁을 강행했다. 전쟁은 판돈이 매우 컸다. 지배자자들은 필사적이었다.
흑표범당의 ‘게릴라 식’ 반란 시위가 폭력적으로 진압당하자 스스로 ‘제국주의 국가의 백인 특권층’으로 여기던 학생 활동가들은 죄책감에 시달렸다. 억압받는 세력이 ‘권위’를 가져야 한다는 신좌파의 도덕주의는 무력감을 강화하고 사기를 떨어뜨렸다.
이런 상황에서 신좌파의 성차별적 행태에 도전하려는 일부 여성 활동가들은 신좌파의 사상을 반격 무기로 활용했다.
15 여성이 흑인처럼 억압받는 ‘계급’이라면 그것 자체로 ‘권위’를 갖게 되는 셈이었다.
1967년 민주사회학생연합 총회에서 여성 활동가들은 “자본주의 사회, 특히 미국에서 여성이 차지하는 지위를 분석한 결과, 우리는 여성이 남성과 식민 관계에 있으며 우리 자신이 제3세계의 일원이라고 생각한다”고 주장했다.그러나 신좌파 남성 활동가들은 이런 주장에 격렬하게 저항했다. 흑인 투사들에게 ‘인종차별주의자’로 몰려 블랙파워에 자리를 내준 남성 활동가들은 ‘남성 우월주의자’로 여성들에게 낙인 찍히는 것을 참을 수가 없었다.
1967년 8월 여러 운동의 통합 필요성이 제기돼 새정치전국회의가 열렸다. 그러나 블랙파워가 이미 대세인 상황에서 이 회의는 분열만 확인하는 자리가 됐다. 학생비폭력조정의원회의 한 활동가는 “가장 박탈당하는 흑인들이 운동을 이끌어야 한다고 선언하면서 여기에 동의하지 않은 이들은 지옥에 가게 되리라”고 단언했다. 또 다른 활동가는 “늘 박탈당하는 사람들이 지도부를 장악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흑인 대표자들은 흑인들이 전체 대표자의 약 6분의 1밖에 안 되는데도 투표권의 50퍼센트를 행사할 수 있어야 한다고 요구했다. 백인 활동가들은 열렬한 박수로 인정했다.
여성 대표자 슐라미스 파이어스톤과 조 프리먼은 흑인 대표자들의 전례를 따라 전체 인구의 51퍼센트를 대표하는 여성들이 대회 투표권과 위원회 대표자의 51퍼센트를 차지해야 한다는 결의안을 제출했다. 흑인 활동가들에게는 ‘속죄’하듯 엎드렸던 백인 남성 활동가들이 여성 대표자들의 요구는 가당찮다며 발언권도 주지 않으려 했다. 슐라미스 파이어스톤이 발언권을 주지 않는 것에 항의하자 한 의장은 그녀의 머리를 톡 치면서 이렇게 말했다. “비켜요, 아가씨! 이 자리에는 여성 해방보다 중요한 문제가 많아요!”
곪았던 분노가 터졌다. 여성들이 느낀 배신감과 분노, 항의의 목소리는 너무나 정당했다. 이 사건을 계기로 급진주의적 여성 활동가들은 남성과 분리된 모임을 결성했다. 그러나 여성만이 여성을 조직할 수 있다는 블랙파워 정치의 ‘미러링’은 “양날의 칼”이었다. 신좌파 남성 활동가들은 블랙파워를 무기 삼아 가장 억압받는 흑인들의 투쟁을 ‘특권화’하고, 여성 문제를 ‘부르주아적인 사안’으로 치부하며 여성들을 무시했기 때문이다.
특정 형태의 차별을 겪는 사람들만이 그 차별을 알 수 있다거나 그 차별에 맞서 싸울 수 있다고 보는 정체성 정치는 운동을 분열시킬 수밖에 없다. 흑백 분리주의가 이제 양성 분리주의로 확대되면서 운동은 파편화의 길로 나아갔다.
급진주의 페미니즘의 탄생
이처럼 미국 급진주의 페미니즘은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이 아니라, 미국 좌파의 취약성에서 비롯했다. ‘운동권’ 남성들에 대한 적대감은 ‘모든 남성은 여성 차별의 원인’이라는 분리주의 정치의 근간이 됐다. 더 근본적으로 미국 여성운동의 계급적 기반이 중간계급 중심이었다는 점이 급진주의 페미니즘 정치의 특징을 구성했다. “중간계급 직종과 전문직 직종에서 여성 차별적인 남성들과 경쟁한 여성들에게는 남성이 주된 장애물로 보였을 것”이기 때문에 분리주의 시각을 갖기 쉬웠다.
급진주의 페미니스트들은 명료하지는 않았을지라도 자본주의와 가족제도, 여성 차별 체제 근본적으로 도전했다. 그래서 1996년에 결성된 전국여성기구NOW(중간계급을 기반으로 한 자유주의 여성 단체)의 온건한 정치보다 분명하게 왼쪽이었다.
1968 반란이 절정에 달한 시기에 학생들은 사회주의자나 마르크스주의자를 자처했고 초기 여성 해방 활동가들도 이런 급진화의 일부였다. 학생들은 위기에 빠진 미국 지배자들의 필사적 ‘발악’ — 킹 목사 암살, 흑표범당에 대한 폭력적 진압, 학생 운동 탄압, 시카고 민주당 전당대회 밖 폭력 사태 등 — 을 경험하면서 ‘사랑과 평화’가 아니라 ‘폭력 혁명’이 필요하다고 여기게 됐다. 1968년 베트남민족해방전선의 구정 공세와 프랑스 5월 투쟁이 학생들을 혁명적 열망으로 휘감았다.
1969년 1월 닉슨 대통령 취임식 반대 시위 준비 과정에서 벌어진 논쟁은 제2물결의 급진주의 페미니스트들이 자유주의에 가진 반감을 확인할 수 있는 에피소드이다.
급진주의 페미니스트 바버라 메르호프와 슐라미스 파이어스톤은 유명한 참정권 운동가인 전국여성당 창설자 앨리스 폴에게 ‘투표권 반납 운동’을 하자고 제안했다. 전쟁도 인종차별도 막지 못하는 ‘가짜 민주주의’에 항의해 유권자 등록증을 불태우자고 제안하자 폴은 길길이 날뛰면서 화를 냈다.
미국 급진주의 페미니즘은 자유주의에 환멸을 느꼈지만, 여성 차별 체제에 근본적으로 도전할 수 있는 이론과 정치는 매우 허약했다. 왜냐하면 신좌파의 문제투성이 정치를 고스란히 흡수했기 때문이다. 미국 급진주의 페미니즘의 독특한 특징인 개인 감정 중시하기, 의식 고양 강조하기, 자발성과 평등주의를 찬양하기 등은 모두 신좌파에 연원을 두고 있다.
20 그래서 초기 여성 해방 운동의 정치는 단일하지 않았고, 급진주의 페미니즘이 대세인 것도 아니었다.
여성해방 운동 초기에 “많은 급진 여성들은 새로운 운동이 조직적으로나 이데올로기적으로나 신좌파에 밀접히 결합되기를” 바랐다.‘여성 차별의 본질은 무엇인가?’, ‘어떤 운동이 가장 중요한가?’, ‘남성은 교화시켜야 할 대상인가? 구제불능 억압자인가?’ ‘여성 차별에 도전하기 위해 필요한 사상과 행동은 무엇인가?’
이런 중요한 쟁점들을 둘러싸고 치열한 논쟁이 계속됐다.
일부 급진주의 페미니스트들은 여성 차별의 원인을 남성 우월주의, 더 나아가 남성 자체에 돌렸다. 베벌리 존스와 주디스 브라운은 1968년에 《여성 해방 운동을 향하여》에서 진정한 억압자는 남성 그 자체라고 규정했다.
그러나 일부 ‘운동권’ 여성 활동가들은 여성 차별은 자본주의 체제와 연관돼 있으므로 다른 운동과 분리된 여성들만의 운동으로 발전하는 것에 반대했다. 이블린 골드필드는 급진주의 페미니즘을 겨냥해 “독자적 여성운동이라는 관념 자체가 분열적”이고 “오직 여성에게 영향을 미치는 문제들에만 국한하는 여성운동은 급진적일 수 없다”고 일갈했다.
23 그러나 이들은 영향력이 매우 작았다.
한편 노동계급 여성 조직을 중요하게 여긴 모임도 있었다. ‘신여성’ 그룹은 어린이집과 고용 차별 문제를 중심으로 여성들을 조직하는 데 관심을 기울였다. 이들은 “오로지 집단 행동, 특히 노동계급 여성과 빈민 여성을 포함하는 행동을 통해서만 해결 가능하다고 주장했다.”급진주의 페미니즘은 논쟁의 상호작용 속에서 분리주의 논리를 더 발전시켰다. “급진 페미니스트들이 인종과 계급보다 젠더에 특권을 부여하고 여성을 균일한 단일체로 여긴 경향은 대체로 좌파가 젠더를 ‘부차적 모순’으로” 취급하는 것에 대한 반발이었다.
‘운동권’ 남성들의 성차별적 언행에 대한 적대감과 ‘분리된 여성운동’을 우려한 ‘운동권’ 여성 활동가에 대한 불만이 급진주의 페미니즘의 분리주의적 특성을 강화시켰다. 그러나 여성 차별의 원인과 대안에 대한 체계적인 이론을 내놓기 위해서는 경험주의를 넘어서야 했다.
급진주의 페미니즘의 성공과 좌절
1969년 닉슨 대통령 취임식 항의 시위에서 벌어진 소동은 여성 차별적 신좌파 남성 활동가들이 벌인 최악의 참사였다. 여성 활동가가 집회에서 여성 차별을 주제로 연설을 시작하자 “때려치워라! 저 년 끌어내!”, “어디 끌려가서 강간당하고 싶으냐?” 하는 살벌한 욕설과 고함이 난무했다.
이 사건은 여성 활동가 모두에게 트라우마를 안겨 줬고 급진주의 페미니즘 사상이 주도권을 잡게 된 계기가 되었다. ‘운동권’ 여성 활동가들과 분열한 급진주의 페미니즘 단체들이 생겨났고, 여성 출판물이 쏟아졌다.
선명 급진주의 페미니즘 그룹인 레드스타킹은 이렇게 선언했다.
현실에서 모든 남녀관계는 계급 관계다. … 남성 우월주의는 가장 근본적이고 가장 오래된 지배 형태다. 남성 우월주의의 연장선상에서는 인종차별, 자본주의, 제국주의 등 온갖 억압이 있다. ... 우리는 무엇이 혁명적이고 무엇이 개량적인지 묻지 않겠다. 다만 무엇이 여성을 위한 것인가만 묻겠다.
슐라미스 파이어스톤은 《성의 변증법》에서 남녀는 계급 관계이고 이는 생물학적 사실에서 비롯한다고 규정했다. 초역사적으로 남성 지배와 권력이 존재한다는 가부장제 이론이 유행했다.
급진주의 페미니스트들은 1968년 미스 아메리카 반대 시위로 주목을 받았고, 낙태권 운동을 건설하며 여성 해방운동을 이끌었다.
여성운동의 성과로 1970년 7월 뉴욕주가 낙태금지법을 완화했고, 3년 뒤 미국연방법원은 ‘로 대 웨이드’ 사건에서 낙태를 금지하는 법이 헌법에 위배된다고 판결했다. 1970년 8월에는 평등권 수정안도 통과됐다. 1970년대 초까지 급진주의 페미니즘은 번성하는 듯했다.
급진주의 페미니스트들은 여성들이 계급이나 인종으로 여성들을 분할된다고 보기보다는 ‘공통의 차별 경험’이 여성들을 단결시킬 수 있다고 믿었다. 그러나 이런 믿음은 운동이 커질수록 더 커다란 모순에 부딪쳐 물거품이 되어 갔다.
‘전쟁과 인종차별을 지지하는 여성 지배자들은 동지인가? 적인가?’ ‘기혼 여성들은 남성 권력의 부역자인가? 남성 권력에 세뇌당한 희생자인가?’ 등의 쟁점들이 뜨거운 논쟁을 불러일으켰으나 급진주의 페미니즘은 제대로 된 분석을 내놓지 못했다.
26 셀16은 남성이 규정하는 미의 기준을 거부하기 위해 긴 머리를 자르는 퍼포먼스를 하기도 했는데, 한 여성은 재치 있는 질문으로 이 퍼포먼스를 비판했다. “남자들은 내 가슴도 좋아해요. 그럼 내가 가슴도 잘라 내야 하나요?” 27
심지어 급진주의 페미니즘의 분리주의를 일상 생활 지침으로까지 밀어붙이는 극단적이고 분별없는 단체들도 생겨났다. 셀16은 금욕주의, 여성 공동 생활체, 가라데를 강령으로 삼았다.28 이 그룹은 회원 중 기혼여성이나 남자와 동거하는 여성의 비율을 전체의 3분 1로 제한하는 상한선 규정을 만들었다가, 1971년에는 기혼여성을 모두 추방하기로 결정했다.
‘페미니스트들’이라는 그룹은 “섹스의 주요 기능이 남성 지배와 여성 종속을 강화”이므로 여성들이 섹스 자체를 거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29 급진주의 페미니스트들은 여성 차별의 ‘권위’가 밀리는 것을 우려해 1968년 여성 해방운동 대회에 흑인 여성 활동가들을 초대하지 않기로 결정했다. 한 여성 활동가는 “전투적인 흑인 여자가 떡 하니 앉아 자기가 더 많은 억압을 당하는데 너는 어떻게 할거냐고 묻는 회의에는 가고 싶지 않다”며 흑인 여성 활동가 초청에 반대를 표명했다. 30 ‘자매애’는 정체성 정치의 벽 앞에서 무용지물이었다.
흑인 여성과 백인 여성 사이의 이질감도 문제였다. 흑인 여성 활동가들은 당연하게도 자신의 삶에 큰 영향을 미치는 것은 인종차별 문제라고 여겼다. 그러나 “인종차별로 고통받는 것은 흑인 남성도 마찬가지”여서 “흑인 여성에게는 젠더가 항상 최우선이 아니었다.”분리주의 정치의 문제를 지적한 한 페미니스트의 주장은 매우 시사적이다.
여성들이 결혼을 포기함으로써 ‘자기 자신을 해방시킨다’고 하는 주장은 남편 말고는 다른 생계 수단이 전혀 없는 많은 여성들을 자동으로 배제함으로써 강력한 계급적 편견을 반영한다. … 우리가 결합해야 하는 투쟁을 벌이는 다수의 여성들(자녀를 둔 복지 수혜자, 해방을 위해 싸우는 흑인과 황인 여성, 일하는 여성과 가정주부)은 생존 문제에 워낙 얽매여 있어서 상처받은 영혼이나 내면화된 이미지에 관한 신비적인 추상 개념에 귀 기울일 여력이 없다.
그러나 급진주의 페미니스트들은 분리주의 정치를 비판적으로 돌아보기는커녕 계속 확장시켰다. 슐라미스 파이어스톤은 임신은 미개한 행위라고 비판했고, 기혼 여성들에게 아이들을 집에 놓고 모임에 오라며 적대했다. 급진주의 페미니즘은 여성들에게 ‘더 나은 삶’이 아니라 남성과 분리된 ‘더 편협한 삶’을 대안으로 제시했던 것이다.
급진주의 페미니즘이 개인 ‘해방’을 정치 투쟁으로 격상시킨 것도 운동의 파편화를 부추겼다. 급진주의 페미니스트들은 ‘개인 경험 말하기’ 같은 의식 고취 모임을 중요한 활동으로 삼았다. 개인의 자각을 개인 ‘해방’의 출발로 여겼기 때문이다. 개인이 만족스러우면 정치적으로 올바르다고 평가됐고, 개인의 억압을 해결하는 것은 개인의 이익을 추구하는 것과 구분되지 않았다.
그래서 슐라미스 파이어스톤조차 여성들이 의식 고취 활동으로 급진화되기보다 “페미니즘을 자기 계발의 이데올로기로 움켜쥐는 모습을 보고 환멸을 느끼”며 지쳐갔다. 그녀는 자신의 저서인 《성의 변증법》이 출간된 1970년 이후 실천 활동에 종지부를 찍었다.
사회·경제적 변화 없이 개인 ‘해방’을 지향하는 것은 공상적이다. 개인의 삶은 총체적 사회관계의 일부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정치적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사회관계에 도전할 수 있는 집단적 힘이 필요하다. 각자의 경험을 공유하는 것은 인식 개선에 도움은 되지만, 그것 자체가 사회·경제적 변화를 끌어낼 수는 없다.
‘개인 감정’을 우선시하는 풍토는 내향화를 부추겨 여성 모임을 파탄 내는 부메랑이 됐다. 여성들이 ‘차별’받는다고 느낄 때 특정 개인 혹은 집단을 낙인 찍고 공격하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특히 리더십과 조직 체계를 배척하는 아나키즘적 정치는 감정적 헐뜯기를 조장하며 여성 모임을 위기로 몰아갔다.
‘베테랑’ 급진주의 페미니스트들과 페미니즘 작가들이 언론의 주목을 받고 유명해지자 다른 여성 활동가들은 격분했다. 운동에서 ‘권위’를 얻고 ‘지도’를 자임하는 것은 ‘특권’을 누리고, 평등주의를 배반하는 행위였다. 그래서 언론과 인터뷰를 하거나 글을 기고하며 여성운동을 알려 왔던 ‘베테랑’ 급진주의 페미니스트들이 여성 모임에서 축출당하는 소동이 벌어졌다. 일부 급진주의 페미니스트 모임은 언론 인터뷰, 강연, 기고 등을 ‘제비뽑기’로 하자고 결의하기도 했다.
32 조 프리먼은 “조직 구조를 없앤 것이 더 민주적이기는커녕, 현실에서는 오히려 비공식적 엘리트주의를 양산했다”고 지적했다. 33
그러나 리더십을 배격하는 분위기는 자멸적이었다. “능력을 지닌 여성들이 그 능력을 활용하거나 심지어 공유하는 일까지 가로막음으로써 운동을 약화”시켰고, “상상력·영감·효율적인 정치 조직 등은 의심받고 질식당했”기 때문이다.여성 해방 운동에서 가장 심각한 갈등은 정치적 레즈비언들과 이성애자 여성들 사이에서 벌어졌다.
급진주의 페미니스트들은 대체로 여성 해방과 성해방이 서로 배타적이라고 봤다. 여성의 자유로운 섹슈얼리티는 남성의 여성 착취에 ‘순응’하는 것으로 여겨졌다. 급진주의 페미니스트들은 섹슈얼리티에 대한 혼란과 동성애 차별 의식이 뒤섞여 레즈비언에 대해 편협한 태도를 드러내기도 했다. “셀16의 록산 던바는 페미니즘의 과제는 여성들의 파트너 성별을 바꾸는 일이 아니라 여성들을 침실에서 끌어내는 일이라고 주장”했고, 브라운 밀러는 “레즈비언은 성욕이 지나치며 억압적인 남성성을 갖고 있다”고 했다.
이에 일부 레즈비언들은 ‘레즈비어니즘은 남성과의 관계를 단절한 진정한 페미니스트’라는 논리로 자신을 정당화하며 급진 레즈비어니즘을 탄생시켰다. 1970년 제2차 여성연합회의에서 급진 레즈비언 활동가들이 뿌린 ‘여성이라는 불리는 여성’ 선언문은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여성 해방을 위해서는 이성애라는 근본적인 구조를 직면해야 한다. … 남성과 더 나은 섹스를 하려는 시도, 어떤 남성을 ‘새로운 남성’으로 탈바꿈하려는 시도, 그것은 또한 우리를 ‘새로운 여성’으로 태어나게 하리라는 환상에 엄청난 에너지가 소모될 것이다. … 가장 중요한 것은 여성과 관계 맺는 여성, 함께 새로운 의식을 창조해 나가는 여성이다.급진주의 페미니스트들은 분리주의 논리에 발목 잡혀 무장 해제돼 갔다. 이성애는 특권으로 간주됐고, “동생애가 아닌 여성들은 마치 2등 시민처럼 대접받았다.”
동성애자와 이성애자의 분열은 여성 해방 운동에 치명적이었다. 많은 이성애자 여성들이 운동에서 떨어져 나갔다. 낙태나 육아처럼 여성들의 이해가 걸린 요구는 이성애자 여성들의 문제로서 격하됐다. 급진주의 레즈비어니즘의 목소리가 높아지자 “남성을 사귀지 않은 여성들이 여성운동의 진정한 주역이라는 정서가 확산되면서 운동은 남성 권력에 맞선 대결에서 벗어나 대안적 생활 방식으로 옮겨갔다.”
여성운동과 급진주의 페미니즘의 쇠퇴
1970년대 중반 운동 전반의 쇠퇴와 함께 미국의 제2물결 여성운동도 쇠퇴했다. 그러나 운동이 약화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계급, 인종, 섹슈얼리티, 의견 차이 등 다양한 정체성에 따라 분리주의가 ‘남발’되면서 여성운동은 갈갈이 찢어졌다.
38 자리를 내줬다.
‘극단적’ 분리주의의 확대로 위기에 놓인 급진주의 페미니즘은 1970년대 중반에는 문화 페미니즘에39 사회와 국가에 맞선 투쟁은 ‘남성적인 방식’이므로 거부해야 한다는 문화 페미니즘은 정치 투쟁을 회피하고픈 사기 저하된 여성 활동가들에게 안식처를 제공했다.
그러나 앨리스 에콜스가 적절하게 지적하듯이 정치 투쟁에서 멀어져 개인의 ‘해방’과 라이프스타일 운동을 추구한 급진주의 페미니즘의 안에 이미 문화 페미니즘의 요소가 들어 있었다. 또한 “여성의 본질적 동일성과 남성과 여성의 근본적 차이를 주장하는 문화 페미니즘”은 “크게 분열된 운동을 통일하는 길”이 될 수 있다는 착각을 일으켰다.40 자본주의 시장 논리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페미니즘 사업체들은 금세 모순을 드러냈다. 페미니스트경제네트워크는 수익성의 포로가 된 극단적 사례였다. 이 단체가 “고용한 여성들 대부분은 장시간의 힘든 노동을 요구받으며 착취당한다고 느꼈다.” 페미니스트경제네트워크 지도자들은 “불신과 분노가 점점 고조되자 무장 여성들을 고용해 건물 경비를 맡기는 식으로 대응”하기도 했다. 41
차별적 체제를 그대로 둔 채, 대안적 여성 문화를 건설하자는 문화 페미니즘의 실천은 여성건강센터, 여성신용조합, 여성상담센터 같은 페미니즘 사업체를 만드는 것이었다. 그러나 페미니스트 기관과 사업체가 실질적인 문화적·경제적 독립을 달성할 수 있다는 사고는 “돈키호테식 공상”에 불과했다. 결국 페미니즘 사업체들은 대부분 “이윤만을 추구하는 전체 경제에 갇힌 채 가망 없이 허우적거렸”고, 정치는 “필연적으로 이윤에 앞자리를 내주”며 변질됐다. 일부 급진주의 페미니스트들은 ‘가모장제, 여성의 우월성, 모권’ 등을 내세우며 거꾸로 된 성 고정관념을 되풀이하는 문화 페미니즘에 비판의 목소리를 높이기도 했다. 그러나 역부족이었다. 급진주의 페미니즘은 “자체의 이론적 한계들 때문에 탈선”했고 “신랄한 내부 싸움”에 지쳐 활동가들은 운동에서 이탈한 상태였다.급진주의 페미니즘이 문화 페미니즘에 자리를 내주며 몰락하자, 여성운동의 정치적 공간은 자유주의 페미니즘 단체인 전국여성기구NOW가 차지하게 됐다.
전국여성기구는 민주당에 기대 개혁 입법을 위한 로비를 주된 활동으로 삼았는데, 미국 현대 여성운동 붕괴 이후 사실상 유일한 여성 단체가 됐다. 1970년대 중반 이후 안정을 되찾은 미국 자본주의는 여성운동의 많은 부분을 제도화하며 체제 내로 흡수했다. 전국여성기구는 국가와 타협하며 거듭 우경화하면서 정부의 여성 권리 공격을 막아 내지 못했다.
교훈
좌파적이었던 미국 여성해방 운동이 문화 페미니즘으로 후퇴하거나, 자유주의 페미니즘에게 주도권을 내 준 것은 불가피한 결말이 아니었다. 여성해방 운동을 주도한 급진주의 페미니즘에 내재된 약점 ─ 분리주의, 정체성 정치, 노동계급 조직 결여, 개인주의 찬양 등 ─ 이 낳은 산물이었다.
미국 급진주의 페미니즘이 여성운동에 전 세계에 미친 사상적 영향력에 비하면, 조직적 규모는 크지 않았다. 당시 여성해방 운동에서 생겨난 각종 여성 그룹의 규모는 대체로 수십 명 수준이었고, 낙태권 운동을 제외하면 시위 규모도 수백 명을 넘지 못했다.
그 이유는 급진주의 페미니즘이 남성을 여성의 적으로 규정하고, 범계급적 ‘자매애’라는 실현 불가능한 전략을 매달렸기 때문이다. 급진주의 페미니스트들이 신좌파 남성 활동가들의 성차별주의에 분개한 것은 너무나 정당했다. 그러나 남성은 문제의 근원이 아니다. 어떤 의식을 가졌든 남성 노동계급은 지배계급 여성이 누리는 특권과 권력을 가지고 있지 않다.
진정한 문제는 남성 자체가 아니라 신좌파의 빈약하고 후진적인 정치에 있었다.
신좌파 남성 활동가들과 달리 마르크스, 엥겔스, 레닌, 트로츠키 등 수많은 남성 혁명가들은 여성 차별을 계급투쟁의 핵심적 일부로 여기고 여성해방을 위해 헌신적으로 투쟁했다.
우리가 여성해방을 쟁취하기 위해서는 남성을 여성운동의 적으로 여기는 급진주의 페미니즘과 완전히 다른 길을 모색해야 한다.
44 따라서 오늘날 여성 차별의 뿌리인 자본주의를 성공적으로 변혁하기 위한 사회주의 전략이 필요하다.
여성 차별은 계급지배의 산물이며, 오늘날 계급사회는 자본주의를 뜻한다. “차별은 자본주의 체제를 운영하는 특정 개인들의 인종, 성별, 성적 지향 때문에 생긴 것이 아니라 자본주의 체제 그 자체에서 비롯”한다.여성 차별 체제에 도전하기 위해서는 각성한 여성 개인들의 대담한 사회적 항의를 넘어 강력하고 집단적인 힘을 조직해야 한다. 자본주의에서 가장 강력한 힘을 가진 남녀 노동계급의 단결 투쟁이 성차별 체제에 균열을 낼 수 있다.
미국 여성해방 운동은 많은 여성들에게 용기와 영감을 주며 찬란하게 불타올랐지만, 분리주의적 정치로 인해 뼈아픈 분열로 귀결됐다. 미국 급진주의 페미니즘의 실패는 여성해방 운동이 더 나은 방향으로 전진하기를 염원하는 이들에게 유의미한 교훈을 제공할 것이다.
주
- 오어, 2016, p228. ↩
- 9개 선언문 중 ‘전미여성협회 창립 선언문’이 있는데, 전미여성협회는 급진주의 페미니즘 단체가 아니라 중간계급 중심의 자유주의 페미니즘 단체이다. 컴바히강공동체의 ‘흑인 페미니스트 선언문’은 양성 분리주의에 비판적이라 주류 급진주의 페미니즘과 결이 다르다. ‘흑인 페미니스트 선언문’은 여러 차별이 중첩적으로 결합된다는 ‘상호교차성 개념’의 연원이 됐다. ↩
- ‘‘행동’하는 여성들의 격렬한 목소리: 미국 급진 페미니즘의 본령 담은 《페미니즘 선언》’, 《한겨레21》 제1139호(2016.11.28). ↩
- 에콜스 2017, p62. ↩
- 1950년대 미국 남부의 버스 좌석은 앞쪽은 백인용, 뒤쪽은 흑인용으로 구분돼 있었다. 로자 파크스는 흑인용 좌석 맨 앞줄에 앉아 있었다. 그러다 백인 승객이 버스에 많이 오르자 버스 기사가 ‘흑인용’ 표지판을 한 칸 뒤로 옮기며 흑인 승객들에게 자리에서 일어날 것을 요구했다. 로자 파크스는 이에 불응해 체포됐다. 연방 대법원이 공공 버스의 흑백 분리가 위헌이라고 선언할 때까지 버스 보이콧 운동은 3백81일 동안 지속됐다. ↩
- 하먼 2004, p89. ↩
- 에콜스 2017, p78. ↩
- 저먼 2007, p266. ↩
- 에콜스 2017, p67. ↩
- 에콜스 2017, p61. ↩
- 영어 단어 position이 ‘지위’를 뜻하기도, 성행위의 ‘체위’를 뜻하기도 한 것을 이용한 것이다. ↩
- 오어 2016, p192. ↩
- 에콜스 2017, p87. ↩
- 남성들의 성적 구애에 여성들은 “예”라고 대답해야 한다는 여성 비하적 표현을 이용해 징병을 거부한 남성들을 지지하는 구호로 활용했다. ↩
- 에콜스 2017, p89. ↩
- 에콜스 2017, p92. ↩
- 에콜스 2017, p95. ↩
- 에콜스 2017, p96. ↩
- 클리프 2008, p272. ↩
- 에콜스 2017, p97. ↩
- 에콜스 2017, p117. ↩
- 에콜스 2017, p 114. ↩
- 에콜스 2017, p163. ↩
- 에콜스 2017, p166. ↩
- 한우리 2017, p47. ↩
- 에콜스 2017, p245. ↩
- 에콜스 2017, p247. ↩
- 에콜스 2017, p261. ↩
- 오어 2016, p202. ↩
- 에콜스 2017, p172. ↩
- 에콜스 2017, p224. ↩
- 에콜스 2017, p321. ↩
- 오어 2016, p222. ↩
- 에콜스 2017, p322. ↩
- 한우리 2017, p123. ↩
- 에콜스 2017, p361. ↩
- 에콜스 2017, p363. ↩
- 문화 페미니즘은 여성성과 여성의 가치를 우월한 것으로 찬양하며 여성만의 공동체와 문화를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페미니즘의 한 조류이다. ↩
- 에콜스 2017, p368. ↩
- 에콜스 2017, p411. ↩
- 에콜스 2017, p415. ↩
- 에콜스 2017, p418. ↩
- 에콜스 2017, p423. ↩
- 스미스, 2017, p291. ↩
참고 문헌
스미스, 섀런 2017, ‘정체성 정치 비판’, 크로익스, 제프리 디스티 외, 《계급 소외 차별: 마르크스주의는 계급, 소외, 여성·성소수자·인종 차별을 어떻게 설명하는가?》, 책갈피.
에콜스, 앨리스 2017, 《나쁜여자 전성시대─급진 페미니즘의 오래된 현재, 1967~1975》, 이매진.
오어, 주디스 2016, 《마르크스주의와 여성 해방》, 책갈피.
저먼, 린지 2007, 《여성과 마르크스주의》, 책갈피.
클리프, 토니 2008, 《여성 해방과 혁명》, 책갈피.
하먼, 크리스 2004, 《세계를 뒤흔든 1968》, 책갈피.
한우리 2017, 《페미니즘 선언》, 현실문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