쟁점
4차 산업혁명 담론이 제기하는 몇 가지 쟁점에 대해
많은 미래학자들은 이른바 ‘4차 산업혁명’에 해당하는 각종 신기술들(인공지능, 로봇, 사물인터넷, 자율주행차, 3D 프린팅 등)이 2008년 경제 위기 이후 활력이 떨어진 자본주의에 새로운 생명력을 불어넣을 수 있다는 환상과 기대감을 갖고 있는 듯하다. 자본가들은 신기술 도입이 새로 형성될 시장에서의 점유율 확보나 이윤 증대에 미칠 영향을 면밀히 따져보고 있다.
그런데 미래학자들의 주장이 대부분 엉터리일지라도 일부 주장은 진보·좌파 진영에도 영향을 미치고 있다. 그래서 이 글에서는 4차 산업혁명 담론에서 제기되는 몇 가지 따져봐야 할 주장들을 다룰 것이다.
이런 주장들로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다. 4차 산업혁명으로 자본주의 경제가 디지털화됐고, 따라서 지식 또는 정보가 가치의 원천인 ‘인지 자본주의’ 또는 정보통신 자본주의로 변모했는가? 기술이 계속 발전한다면 어느 순간에는 인공지능과 로봇이 인간의 지능과 노동 등을 완전히 대체할 수 있지 않을까? 신기술 도입이 일자리를 없애는 것은 아닐까?
기술과 자본주의
기술혁신은 노동생산성을 향상시켜 생산물 단위당 비용을 줄이는 효과를 낸다. 자본가들이 생산물 단위당 비용을 줄이고 노동자들의 생산성을 높이려는 이유는 바로 자본주의 동역학의 핵심인 경쟁 때문이다. 따라서 기술혁신은 개별 자본들이 생존하는 데 사활적으로 중요하다. 역사적으로 특정한 기술이 생산과정에(그리고 결국 세계사에) 큰 영향을 미치기도 했는데, 하그리브스의 제니 방적기나 와트의 증기기관이 대표적 사례들이다.
그런데 신기술이나 새로운 기계들이 도입되면 자본을 구성하는 불변자본과 가변자본 중 불변자본비중이 증대해(자본의 유기적 구성의 증대) 이윤율이 하락하는 경향을 보인다. 자본가들은 이런 경향을 상쇄하기 위해 노동강도를 높이거나 노동시간을 연장하려 애쓰지만 이윤율의 경향적 저하 추세를 거스를 수는 없다. 이처럼 더 많은 이윤을 위해 기술혁신을 추구하고 노동자들을 공격하면, 노동자들의 반발을 받을 수밖에 없다.
생산의 물질적 수단의 변화와 발전 과정은 항상 인간 사회의 재구성과 밀접한 연관이 있다. 특히 기술혁신의 결과로 노동인구의 구성이 계속 바뀌고 변화한다는 점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예를 들어 화물 운송에 컨테이너 기술이 도입됨으로써 1966~76년 영국에서 항만 노동자 15만 명이 사라졌다. 또, 활자 인쇄가 컴퓨터 조판으로 바뀌면서 수많은 식자공들이 사라졌다. 그래서 신기술 도입은 항상 작업장에서 긴장을 일으켰다. 노동자들이 기계를 파괴한 러다이트 운동도 이런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자본주의가 발전하면서 부의 생산은 더 증대했고, 항만과 인쇄 부문이 아닌 다른 곳에서 더 많은 일자리가 생겨났다. 기술혁신으로 한 산업 내, 또는 산업 간 구조조정이 벌어지면서 사라지는 일자리도 있지만 더 늘어나거나 새로 생겨나는 일자리도 있다. 따라서 기술혁신이 일면적으로 일자리를 줄인다고 하는 것은 자본주의 역사가 보여 주는 바와도 맞지 않다.
디지털 혁명?
자본주의에서 기술혁신은 생산물의 총가치를 극대화하는 수단으로 항상 사용돼 왔다. 하지만 최근 디지털 혁명을 주장하는 대표적 인물들(앨빈 토플러, 대니얼 벨, 마누엘 카스텔 등)은 디지털 기술(또는 정보통신 기술)은 다른 혁신 기술들과 달리 노동과정을 획기적으로 변화시키고 생산물 가치를 무한히 증대시키는 독특한 기술이라고 주장한다. 예를 들어 앨빈 토플러는 정보통신 기술이 전통적인 일자리를 모두 없앨 것이며 그 분야에 종사하는 노동자들은 여가를 즐기는 실업자가 될 것이라고 예언했다. 대니얼 벨은 물질이나 에너지보다 정보의 가치가 더 커지는 정보사회가 출현할 것이며, 이 사회에서는 서비스 고용이 지배적일 것이라고 봤다. 이 논리는 노동자 계급의 소멸을 주장한 앙드레 고르나 제조업 노동의 종말을 주장한 제레미 리프킨으로 이어졌다. 마누엘 카스텔은 정보사회의 네트워크가 위계적 사회 조직을 대체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이런 모든 주장들은 현실의 검증을 이겨 내지 못했다.
물론 디지털 혁명으로 오늘날의 자본주의가 ‘비물질’의 ‘공짜’ 노동에 기반을 두고 있다는 주장은 진지하게 검토할 필요가 있다. 만약 이게 사실이라면 자본주의 체제가 흔들릴 것이며, 자본주의의 동역학을 규명한 마르크스주의 경제 이론을 폐기하지는 않을지라도 만만찮게 수정해야 할 것이기 때문이다.
마르크스의 노동가치론을 비판하는 사람들은 지식 생산 작업이 정신적·정서적 노동이기 때문에 ‘비물질적’이라고 본다. 하지만 이런 정신적 노동과정에서도 인간 에너지의 지출은 발생할 뿐 아니라 뇌의 신경세포들 사이의 상호작용이 이뤄지므로 ‘비물질적’이라고 볼 수 없다. 비록 지식이 초감각적이긴 하지만 분명 물질적 과정을 거쳐 형성된 생산물이다. 전기가 물질적 현상이라는 점을 인정한다면 뇌에서 벌어지는 전기적 활동과 그 작용의 결과 만들어지는 지식도 물질적인 현상으로 봐야 한다. 따라서 ‘비물질적’ 노동은 사실 존재하지 않는다.
정신적 노동이 ‘비물질적’이기 때문에 그 생산성을 측정할 수 없다는 주장도 틀렸다. 지식이라는 생산물의 가치도 수량화가 가능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어떤 지식의 원본에 투자된 자본들(컴퓨터, 회사 부지, 설비, 칩 공장 등의 고정 불변자본과 원재료 등의 유동 불변자본 그리고 개발자들의 임금에 해당하는 가변자본)과 홍보 등에 들어가는 행정 비용 등을 모두 합쳐 비용①이라고 하자. 그리고 지식의 복제품을 생산하는 데에도 추가 자본이 필요하다. 정신적 생산물을 담는 물리적인 껍데기(DVD나 USB 등)를 생산하고 조달하기 위한 비용을 비용②라고 하면, 총투하자본은 ①+②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총투하자본(①+②)에 정신적 노동과정 전반에서 창출된 잉여가치③을 더하면 복제품의 가치 총액이 나온다. 그리고 복제품 한 개당 가치는 복제품의 가치 총액을 복제품의 수량으로 나눈 값이다. 즉, 개별 복제품의 가치는 가치 총액과 정비례하고 복제품의 수량과 반비례 관계에 있다.(사실 이런 과정은 기존의 신문·방송·영화 산업 등과 본질적으로 같다.)
보통 지식은 생산하기는 힘들지만(그래서 비용이 많이 든다), 복제하는 데는 비용이 거의 들지 않으므로 흔히들 복제품의 단위가치가 0이거나 0으로 수렴한다고 여긴다. 그러나 복제하는 데 비용이 전혀 들지 않는 것도 아니고, 설사 비용이 전혀 들지 않는다고 할지라도 복제가 무한정 이뤄진다고 볼 수는 없다. 왜냐하면 정신적 노동과정에서 만들어진 제품도 도덕적 마모가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한물간 프로그램은 공짜라 할지라도 사람들이 잘 사용하지 않는데, 그보다 더 나은 프로그램이 있기 때문이다.
디지털 생산물은 ‘공짜’이니 가격을 가지지 않는다는 것도 사실이 아니다. 포털 사이트가 공짜로 메일 서비스를 제공하고 저장 용량을 무료로 제공하는 것 등을 두고 디지털 생산물은 모두 공짜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사실 저장 용량을 제공하려면 대용량의 서버와 기타 기술적 준비를 해야 하기에 결코 공짜가 아니다. 다만 포털 사이트나 검색 사이트가 이용자들에게 무료 서비스를 제공하는 대신 광고 등으로 수익을 얻기 때문에 그 서비스가 마치 비용이 들지 않은 것처럼 보일 뿐이다.
디지털 경제론의 ‘공짜’ 노동과 공유경제 개념도 사태를 침소봉대한다. 예를 들어 페이스북의 등장 초기에, 페이스북이 개인 이용자들이 광고 판매 수익을 얻으려고 한 ‘공짜’ 노동(게시물 공유 등 비용이 들지 않는 행위)에 기초한다는 주장이 있었다. 무료 인터넷 이용, 위키피디아 페이지 편집, 오픈 소스 소프트웨어 설계 참여 등도 자본주의에서 임금을 받고 노동하는 것과 다르다고 한다.
하지만 디지털 경제뿐 아니라 그렇지 않은 자본주의 경제에서도 지식의 공짜 이용은 널리 나타나는 현상이다. 부모가 오랫동안 자녀들에게 공짜로 지식을 전해 주는 것, 작업장에서 선임 노동자가 신입 노동자에게 업무와 노하우를 전수하는 것이 그런 사례들이다.
그렇다고 해서 자본주의 경제 작동을 설명하는 마르크스주의 경제학이 쓸모없어지는 것은 아니다. 더욱이 예전에는 공짜였던 스트리밍과 다운로드 서비스가 요즘은 유료화되는 것을 보면, ‘공짜’ 노동이라는 영역조차 축소되고 있다. 사실 더 중요한 문제는 공짜 노동에 기반해 있다고들 하는 구글, 페이스북, 아마존 등 대기업들이 자신이 고용한 노동자들에 대한 실시간 착취에 기초하고 있다는 점이다. 아마존의 경우, 사측은 상품 배송 노동자들의 업무를 분초 단위로 관리하며 노동자들을 압박한다. 구글은 광고 수입에 의존하는데, 더 많은 광고를 얻기 위해 야후나 바이두 같은 경쟁사보다 효과적인 검색엔진 등의 서비스를 개발해야 한다는 압력을 받는다.
로봇과 인공지능
최근 로봇 공학과 인공지능의 발전 덕분에 많은 생산과정이 자동화되고, 미숙련·반숙련 노동이 사라지고 있다고들 한다. 자본가들은 로봇과 인공지능 활용을 생산성을 높여 주는 만병통치약처럼 생각하고 노동자들은 그 탓에 자기 일자리가 사라지지 않을까 걱정한다.
하지만 로봇 활용이 생산성을 무한정 높여 주는 것은 아니다. 소위 로봇 활용의 ‘한계생산성 효과’나 ‘혼잡 효과’ 같은 것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사실 로봇 활용에 대한 많은 연구들은 산업 현장에서의 로봇 활용이 19세기 철도 개발이나 20세기 고속도로 건설과 비슷한 효과를 낸다고 지적한다. 로봇 활용이 생산과정에서 뭔가 획기적인 사례는 아니라는 지적이다.
그럼에도 많은 자본가들은 로봇 개발과 활용을 위해 많은 투자를 하고, 생산과정에 많은 로봇이 사용된다. 그러나 로봇 활용은 근본적인 한계가 있다. 로봇은 유연성이 매우 부족해서 인간 노동을 모두 대체할 수 없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주요 자동차 기업인 메르세데스 벤츠는 최근에 단순 생산과정에만 로봇을 유지하고 노동자 고용을 늘리겠다고 발표했는데, 노동자들이 로봇보다 더 유연하기 때문이다. 4차 산업혁명의 핵심 중 하나로 부각되고 있는 ‘스마트 작업장’ 사례로 널리 알려진 독일 자동차 공장에 대한 한 연구는 로봇 사용이 생산성 증대 효과를 내기보다는 로봇을 계속 모니터링하는 별도의 인간 노동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1 이라는 주장은 과장이다.
그러므로 좌파 일각에서도 제기되는 “생물학이 기계에 도입됨으로써 인간의 정교하고 유연한 육체 노동까지 대체하는 로봇의 등장은 더 이상 불가능한 일이 아니게 됐다”거나 “4차 산업혁명의 본질적 특징은 … 인간 노동의 세 측면, 즉 육체 노동, 정신 노동, 사회적 노동의 특성을 기계에 도입하는 것”이고 “생산의 더 고도한 단계를 열면서 엄청난 새로운 가치를 창조하고 있는 것”사실 이런 과장은 이미 1950년대에도 소위 미래학자들에 의해 자주 제기됐다. 노동자 없는 공장, 종이 없는 사무실, 운전자 없는 자동차, 원격 진료 등이 그런 미래를 나타내는 표현들이었다. 그러면서 1950년대 미래학자들은 조만간 스스로 사고하는 로봇이 등장할 것이라고 예언했다. 그런데 오늘날에도 비슷하게, 로봇공학과 뇌과학 등의 발전으로 언젠가는 기계가 의식을 갖게 돼 자기 인식을 하면서 자아가 있는 ‘강한 의미의 인공지능’을 가진 기계가 등장할지 모른다는 전망이 제기되는 것이다.
그런데 인간의 정신 노동이 담당하는 분석과 판단의 다양한 영역을 이제는 정교한 컴퓨터가 대신하고 있다는 말은 명백히 과장이다. 왜냐하면 기계가 인간을 대체하고 있는 것은 여전히 연산능력 영역이지, 판단·분석·추론 능력 영역이 아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알파고가 이세돌을 이긴 바둑도 본질적으로는 경우의 수가 많은 연산에 지나지 않는다. 하지만 알파고는 어떤 것이 더 아름답다거나 하는 판단을 할 수 없다.
이런 점에서 기계의 알고리즘과 인간 뇌를 단순 비교하는 것은 잘못이다. 인간 뇌에는 1천억 개의 신경세포가 있고, 각각의 세포는 평균 1천 개의 다른 세포와 연결돼 있다. 그리고 이런 모든 연결고리는 서로 전기자극을 교환한다. 이 때문에 인간 뇌는 초거대 회로판 이상의 것이다.
인간의 뇌를 좀더 정교하고 복잡한 회로판으로 이해하는 것은 조야한 환원주의에 지나지 않는다. 환원주의는 어떤 현상을 그것의 한두 가지 하위 요소들의 귀결로 보는 이론이다. 사회는 개인들로 구성돼 있으니 개인들의 합이 곧 사회라는 사회학적 환원주의, 인간은 세포로 구성돼 있으니 세포를 잘 알면 인간을 더 잘 이해할 수 있다거나 인간은 원숭이에서 진화했으니 ‘털 없는 원숭이’로 봐야 한다는 생물학적 환원주의가 그 사례들이다.
즉, 환원주의는 ‘상위’ 수준의 요소들을 ‘하위’ 수준의 요소들로 환원시키는데, 사실 후자도 전자만큼이나 복잡하다. 그러면 그 ‘하위’ 수준의 요소들을 더 ‘하위’ 수준의 요소들로 설명해야 할 텐데, 이것은 불가지론이나 순환론으로 빠져들 수밖에 없다. 그래서 환원주의는 현실에 존재하는 수많은 설명 인자들을 배제하는 결과를 빚는다. 예를 들면 인간을 복잡한 기계나 털 없는 원숭이로 이해할 경우 인간을 인간으로 만든 사회적 노동이나 언어의 구실을 완전히 경시한다.
이렇게 환원주의로 이어지기 쉬운 4차 산업혁명 담론들은 근본적 사회 변혁을 지향하는 사람들의 실천과도 관계된 함의가 있다. 생산력의 한 요소인 특정 기술의 발전으로 말미암아 생산관계가, 더 나아가 체제 전체가 바뀔 수 있다고 봄으로써, 사회 변혁에서 인간이라는 행위 주체가 하는 역할을 축소시킨다는 것이다. 즉, 실천적으로 수동성에 빠질 공산이 큰 것이다.
결론
4차 산업혁명과 관련한 많은 환상들(그것이 유토피아든 디스토피아든)은 따지고 보면 실체가 없는 경우가 많다. 그럼에도 한 가지 분명한 점은 자본주의 체제는 경쟁 때문에 생산성을 증대시켜야 하는 압박을 가하는 체제이고, 그런 압박을 받는 자본가들은 로봇, 인공지능, 과학기술의 발전을 인류의 삶을 개선하도록 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의 이윤을 증대시킬 수단으로만 여긴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런 자본가들의 시도에 노동자들의 저항도 항상 존재했다. 4차 산업혁명이라는 현상도 과거의 신기술 도입과 다르지 않을 것이다. 다만 4차 산업혁명 담론이 노동자들의 자신감을 약화시키는 작용을 하지 않도록 사실을 있는 그대로 설명하는 노력이 필요할 것이다.
MARX21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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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자운동연구공동체 뿌리, ‘4차 산업혁명, 누가 두려워해야 하는가 ― 자본가 아니면 노동자?’, 2017년 5월 12일.
http://blog.daum.net/sociostra/16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