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Ⅱ: 러시아혁명 100주년
1917년 10월 러시아 혁명: 현재와의 공명(共鳴) *
러시아 혁명은 잘 언급되지 않을 뿐더러 언급되더라도 흔히 오늘날과는 별로 상관없는 실패한 실험이라고 무시된다. 영국 사회주의노동자당SWP의 샐리캠벨은이런 편견이 사실과 다르고, 억압과 착취에 맞서 싸우려는 사람들은 여전히 러시아 혁명에서 배울 교훈이 있다고 주장한다. [ ]안의 말과 각주는 독자의 이해를 돕기 위해 옮긴이가 붙인 것이다.
1 역사 과목에서 러시아 혁명을 배운 한 학생의 최근 경험에 대한 보고서를 받아보았다. 25년 전 내가 러시아 혁명을 배웠을 때와 놀랄 정도로 차이가 없어 보였다. 학생들은 여전히 라스푸틴이 로마노프 왕가에 미친 미심쩍은 영향력에 대해서는 너무 많이 듣고, 1917년의 사건들에서 노동자 등 폭넓은 대중이 한 구실에 대해서는 너무 적게 듣는다.
중등교육자격검정시험내가 학교를 다니던 시절은 소련이 붕괴한 지 2~3년이 지난 때였다. 당시 동구권의 붕괴는 사회주의의 실패를 보여 주는 구체적 증거로 여겨졌다. 러시아 혁명은 기껏해야 실패한 실험이었고, 최악으로는 독재와 강제수용소로 귀결될 수밖에 없었던 쿠데타였다는 것이다.
그러나 비록 러시아 혁명은 실패처럼 보일지라도, 현재의 경험과도 연관이 있고 알아 둘 필요가 있는 중요한 사건이다.
오늘날의 세계와 크게 달라 보이고 이미 오래 전에 사라진 제정 러시아의 상층부에서 일어난 신비주의적이고 이상한 사건들이나 배우는 오늘날 십대 청소년들에게 러시아 혁명은 현실과 굉장히 동떨어진 일처럼 느껴질 게 틀림없다.
그리고 그것이 통설이다. 올해 초 [러시아 혁명사 연구자] 실라 피츠패트릭는 〈런던 리뷰 오브 북스〉에 다음과 같이 썼다. “러시아 혁명에 관한 새로운 책들이 쏟아지고 있지만, 러시아 혁명의 여전한 중요성을 설득력 있게 주장하는 책은 드물다. 대부분 변명조이다. 이와 같은 새 합의를 반영하듯, 토니 브렌튼은 러시아 혁명이 십중팔구 ‘잉카제국 같은 역사의 거대한 막다른 길’의 하나일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렇다면 러시아 혁명은 정말 남긴 유산이 하나도 없을까? 역사적 호기심이 아니라면, 100년 전의 사건을 살펴보며 당시 사건이 흘러간 과정과 그 과정에 영향을 미친 세력을 이해하려고 애쓸 이유가 있을까?
2 은 세계에서 가장 부유한 8명이 소유한 부가 가장 가난한 36억 명, 즉 세계 인구의 절반이 소유한 부와 같다고 발표했다.
먼저 실패에 관해 얘기해 보자. 2017년 1월 옥스팜세계에서 가장 부유한 나라의 하나인 영국에서, 정부의 공식 예측에 따르더라도, 2021년 노동자들의 평균 소득은 2008년보다 적을 것이다.
그런데도 내가 이 글을 쓰는 시점에 영국 총리 테리사 메이는 한 연설에서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자유시장 경제는 올바른 규칙과 규제 아래 운영되기만 한다면, 인류가 발명한 가장 위대한 체제입니다. 자유시장 경제는 의심할 여지 없이 최선이고 정말로 유일하게 지속 가능한, 한 나라의 국민 모두의 삶의 질을 개선하는 수단입니다.”
영국에서 가장 부유한 자치구에서 순전히 태만과 비용 절감 때문에 최소 80명이 목숨을 잃고 수백 명이 집을 잃은 [서민주택] 그렌펠 타워 화재가 일어난 지 고작 3개월밖에 안 됐는데, 이런 말을 내뱉다니!
세계 수준에서 보면 카리브해와 남아시아 지역에서 이상 기후 때문에 삶이 파괴되고 있는데, 미국 대통령 도널드 트럼프 같은 자들은 여전히 인간이 기후 변화에 미친 악영향을 부인한다.
그와 동시에 도널드 트럼프는 북한의 김정은과 설전을 벌이며 1980년대 이후 최악의 수준으로 핵전쟁 위험을 높이고 있다.
자본주의는 매일매일 실패하고 있다. 자본주의는 세계 인구 압도 다수의 기초적 생존도 충족시키지 못한다. 자본주의가 낳은 경제적 불평등과 전쟁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난민이 된다. 그 난민이 안전한 피난처를 찾아 유럽을 향한다면 지중해에 빠져 죽을 가능성이 높다. 또한 자본주의는 지구 전체의 미래를 위험으로 몰아넣고 있다. 환경 재앙이든 핵전쟁이든 말이다.
의회를 통해 자본주의를 개선하려는 노력은 효과가 없었다. 지난 세기 여러 곳에서 매우 많은 좌파 정부가 들어서 자본주의가 낳은 최악의 결과를 잠시 개선했지만, 그 개혁입법들은 자본주의의 근본적이고 잔혹한 현실을 바꾸지 못했다. 바로 자본주의는 극소수가 부를 창조하는 수단을 소유·통제해 압도 다수를 착취하는 데 기반한 체제라는 현실 말이다.
러시아 혁명, 특히 10월 혁명은 바로 이런 현실에 정면으로 맞섰고, 사회를 [자본주의와] 다른 방식으로 운영할 수 있음을 얼마 동안 보여 줬다.
그 가능성은 레닌과 볼셰비키가 머릿속 지식을 대중에게 주입해서가 아니라, 노동자들이 자주적 활동을 벌이는 치열한 과정에서 나타난 것이다. 그런 자주적 활동은 작업장에서만 일어난 것이 아니다. 오랫동안 러시아 노동자와 농민의 속박한 차별과 정치적 탄압에 맞서서도 일어났다.
10월 혁명은, 특히 1917년 2월 러시아에서 나타난 분노의 폭발과 비교하면, 비교적 무혈의 혁명이었다. 이런 차이가 생긴 이유가 있다. 바로 2월 혁명에서 10월로 나아가는 몇 달 동안, 노동자들이 부르주아[자본주의적] 민주주의 ― 차르의 폐위 이후 구성된 임시정부라는 형태로 나타났다. 임시정부는 차르의 다른 적폐와 함께 1차세계대전을 지속했다 ― 의 한계와 자신의 힘을 자기 경험을 통해 배운 것이다.
3 의 글 ‘행동하는 소비에트’를 보면, 노동자들이 어떻게 해서 공장을 스스로 운영하고, 전체 생산 과정을 이해하고, 다른 작업장과 거래하고, 유통망을 세우게 됐는지를 알 수 있다. 이 빠른 교육과정을 거친 노동자들은 옛 국가를 해체하고 소비에트로 대체한 10월에는 새 사회를 통치하는 데 적합한 존재로 변모해 있었다.
뒤에 발췌 소개한 존 리드2월 혁명 직후 구성된 소비에트는 노동자, 병사, 농민의 대의기구였다. 소비에트는 10월 전에는 혁명에 관한, 10월 이후에는 새로운 노동자 국가에 관한 일상적·전략적 결정을 내리는 기구였다.
존 리드는 소비에트가 얼마나 민주주의적이었고, 대중의 정서에 얼마나 잘 호응했는지 보여 주는 글을 썼다.(아래 글을 참고하시오.) 존 리드는 유권자들이 후보 개인이 아니라 정치적 입장에 대해 투표했다고도 지적한다. 바로 이런 민주적 과정을 통해 볼셰비키는 10월 혁명을 이끌게 된 것이다.
볼셰비키는 자신의 뜻을 대중에게 강요하기는커녕, 정치 전략을 내놓고 소비에트에서 다수의 지지를 받았다. 당시 볼셰비키의 정치 전략은, 러시아의 노동자·농민이 진정으로 해방되려면 전쟁을 끝내고 토지 문제를 해결하고 부르주아지에게서 권력을 빼앗아 사회를 착취받고 차별받는 사람들의 이익에 따라 운영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또한 볼셰비키는 여성과 인종·종교적 소수자의 처지 향상을 활동과 구호의 중심에 뒀다.
10월 혁명 이후에도 소비에트 지도자들은 계속 대중 정서에 민감했고 [직무 수행에 적합하지 않으면] 소환됐다. “소비에트 정부가 구성된 이후, 의장(또는 수상)은 줄곧 레닌이었다. 그의 지도가 만족스럽지 못하면 러시아 민중의 대표자들이 언제든 레닌을 소환할 수 있었다. 또는 러시아 민중이 스스로 몇 주 만에 레닌을 직접 소환할 수도 있었다.”
러시아 혁명은 쿠데타도 아니었고 미숙한 실험도 아니었다. 러시아 혁명은 노동자의 자주적 활동이 대중적 수준으로 일어난 순간 ― 2~3년 ― 이었다. 러시아 혁명은 카를 마르크스가 그 전 수십 년 전 주창한 노동계급의 자력 해방이었다. 그리고 러시아 혁명을 가능케 한 것은 레닌과 볼셰비키의 혁명적 정치 운동이었다.
러시아 혁명의 비극은 혁명이 [다른 나라로] 확산되지 못했고, 홀로는 생존할 수 없었다는 것이다. 그 결과는 스탈린에게 길을 열어 줬고, 스탈린은 사회주의의 의미를 “당”이 지배하는 못된 국가 통치 체제로 바꿔 버렸다. 이 주제에 대해서는 향후에 좀더 자세히 다룰 것이다.
1917년 이후 1918년 독일 혁명부터 2011년 이집트 혁명까지 많은 혁명이 있었다. 착취와 차별이 존속하는 한 혁명은 계속 일어날 것이다. 그러나 1917년 10월 혁명이 매우 중요한 이유는 이 혁명이 대중의 거리 시위나 상층의 정권 교체 수준을 넘어 근본적 사회 변혁으로, 계급 지배를 아예 끝장낼 수 있는 가능성을 보여 준 [노동자] 국가의 시작으로 나아갔기 때문이다.
노동자들의 자주적 활동은 100년 전보다 오늘날 훨씬 더 절실하다. 노동계급이 훨씬 더 커졌기 때문이기도 하고 그 필요성이 훨씬 더 커졌기 때문이기도 하다. 카탈루냐 독립을 놓고 스페인 국가가 겪는 정치적 위기에서도 이를 느낄 수 있다. 바로셀로나의 부두 노동자들은 대중집회를 통해 스페인국립경찰관과 치안수비대원을 태운 배에서는 작업하지 않겠다고 결정했다. 그들은 “시민권을 지키기 위해” 그런 결정을 내렸다고 말했다. 수만 명의 조합원을 대표하는 노총 CGT의 카탈루냐 지부는 다음과 같은 성명을 발표했다. “다른 노동조합들과 논의한 결과 10월 3일부터 총파업에 나설 것을 촉구하기로 결정했다.”
오늘날 영국에서는 제러미 코빈의 노동당이 변화를 바라고 ― 사회주의 사상에 우호적인 ― 새로운 정서를 포착하고 있다. 그러나 코빈이 당선되길 기다리는 것으로는 노동자들이 인금 인상을 얻어 내거나 국가의료체계NHS를 지킬 수 없다. 이에 대해서는 이 잡지[《소셜리스트 리뷰》]의 다른 글에서 마크 L 토마스가 다루고 있다.
노동계급이 조직화하고 자신의 힘을 자본가들에게 행사하려 하는 한, 러시아 혁명은 막다른 길이 아니라 미래를 향한 길일 것이다.
권력을 잡은 노동자들
존 리드
3월[율리우스력으로 2월] 혁명이 일어나자 많은 공장의 소유자와 관리자가 도망치거나 노동자들에게 쫓겨났다. …
관리자와 감독이 없는 상황에서 대개 기술자, 회계 담당자, 노동자들은 작업이 계속되게 하거나 굶어 죽거나 해야 하는 양자택일의 선택에 직면했다. 각 ‘라인’과 부서에서 대의원이 한 명씩 선출돼 위원회가 구성됐다. 이 위원회는 공장을 운영하려 애썼다. 물론, 처음에 이 계획은 가망이 없어 보였다. 이런 방식으로 여러 부서의 기능들을 조율할 수는 있었지만, 노동자들의 기술 훈련이 부족해 기괴한 결과가 나왔다.
마침내 어느 공장의 위원회 회의에서 노동자 한 명이 일어나 말했다. “동지들, 무엇을 걱정하십니까? 기술 전문가 문제는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생각해 보세요. 이 공장의 사장도 기술 전문가가 아니었습니다. 사장은 기술도 화학도 회계도 몰랐습니다. 그는 그저 공장을 소유했을 뿐입니다. 사장은 기술적 도움이 필요하면 그 일을 할 사람을 고용했었습니다. 이제 우리가 주인입니다. 기술자, 회계 담당자 등 필요한 사람을 고용해 우리를 위해 일하게 합시다!”
노브고로드에는 방직공장이 있었다. 혁명이 일어나자 공장 소유자는 이렇게 말했다. “문제가 생겼어. 이 혁명이 진행되는 동안 우리는 이윤을 조금도 낼 수 없을 거야. 혁명이 사그라들 때까지 작업을 멈춰야지.” 그래서 소유자 … 와 사무직원, 화학자, 기술자, 관리자가 페트로그라드로 가는 열차를 탔다. 다음 날 아침 노동자들이 공장을 열었다.
이 노동자들은… 제조, 회계, 관리, 판매의 기술적 과정을 아무것도 몰랐다. 그들은 공장 작업장 위원회를 선출해서 비축된 연료와 원자재 재고를 확인하고 면직물 제조에 착수했다.
제조한 면직물로 무엇을 해야 할지 몰랐던 노동자들은 각자 가족들이 필요한 만큼 나눠서 가져갔다. 그 뒤 기계 몇 대가 망가지자, 노동자들은 근처 기계 공장에 대표자를 보내 면직물을 주는 대가로 기계와 관련된 도움을 구했다. 그 뒤에 노동자들은 지역 도시의 협동조합과 계약을 맺어 면직물을 제공하는 대가로 식량을 받았다. 그들은 이 물물교환의 원리를 확장해, 하리코프 석탄 광원들과는 연료를, 철도노조와는 운송 서비스를 직물과 교환했다.
이처럼 러시아 전역의 노동자들은 산업 생산의 기초는 물론 유통까지 필요한 교육을 받고 있었다. 그래서 [10월] 혁명이 왔을 때, 노동자들은 자신의 작업장의 기계를 스스로 통제할 수 있었다.
행동하는 소비에트(1918년)
존 리드
소비에트는 공장의 노동자와 논밭의 농민에 직접 기초를 두고 있다. 처음에 노동자·병사·농민 대표 소비에트는 각 지역의 인구와 필요에 따라 다양한 규칙에 의거해 선출됐다. 어떤 마을 농민들은 투표자 50명에 한 명꼴로 대의원을 선택했다. 후방의 병사들은 각 부대의 규모를 고려하지 않고 연대마다 특정 수의 대의원을 배정했다. 그러나 전방의 병사들은 이와는 다른 방식으로 자신의 소비에트를 선출했다. 대도시 노동자들과 마찬가지로, 그 병사들도 대의원을 [투표자] 500명당 한 명으로 제한하지 않으면, 대의원이 너무 많아져서 불편해진다는 것을 금세 깨달았다. 같은 이유로, 처음 두 차례의 전국 소비에트 대회는 대의원을 투표자 2만 5000명당 한 명꼴로 선출했다. …
내가 러시아에 있을 때 활동 중이던 페트로그라드 노동자·병사 대표 소비에트는 사회주의 국가 치하의 도시 단위 정부 기능이 어떻게 이뤄지는지를 보여 주는 사례가 될 수 있다. 페트로그라드 소비에트는 대의원 1200명으로 구성됐다. 평시에는 격주로 전체 회의를 열었다. 전체 회의는 그 사이에 활동할 중앙집행위원 110명을 정당 비례의 원칙에 따라 선출했다. 중앙집행위원회는 모든 정당의 중앙위원회, 전문가협회의 중앙위원회, 공장 작업장 위원회 등 민주적 조직의 대표자들을 초청해 중앙집행위원회에 포함시켰다. … 소비에트의 시스템은 매우 유연하다. 요리사, 웨이터, 청소 노동자, 건물관리 노동자, 택시 운전사 등 누구라도 조직돼서 요구하면, 소비에트에 대의원을 보낼 수 있었다.
대의원 선출은 비례대표제를 기초로 한다. 즉, 정당들은 전체 도시에서 얻은 득표수에 정확히 비례해서 대의원을 확보한다. 그리고 후보자 개인에 투표하는 것이 아니라, 정당과 정책에 투표한다. … 대의원은 정해진 임기를 두고 선출되지는 않고 언제든 소환될 수 있다.
지금까지 발명된 어떠한 정치 기구도 소비에트만큼 대중의 의지에 민감하게 반응하지는 못했다. … 예컨대, 1917년 12월 첫 번째 주에 제헌의회를 지지하는 가두행진과 시위가 있었다. 소비에트 권력에 반대하는 행동이었다. 무책임한 적위대 몇 명이 총을 쏴 몇 명이 사망했다. 이 어리석은 폭력에 대한 대응은 즉각 취해졌다. 사건이 발생한 지 12시간도 안 돼 페트로그라드 소비에트의 구성이 바뀌었다. 볼셰비키 소속 대의원 10여 명이 사퇴했고, 멘셰비키 소속 대의원이 그 자리를 차지했다. 3주가 지나서야 민심이 가라앉았다. 이제 멘셰비키 소속 대의원이 하나씩 자리를 잃고 볼셰비키가 돌아왔다.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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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Sally Campbell, October 1917: an echo from the future, Socialist Review, October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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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등교육자격검정시험GCSE: 영국 고등학생들이 대학 진학을 위해 치르는 시험. ↩
- 영국 옥스포드를 본부로 1942년 발족한 국제 자선 엔지오. ↩
- 존 리드는 미국인 사회주의자로 저명한 저널리스트였다. 그는 1917년 러시아를 방문해 10월 혁명을 직접 경험하고 르포를 썼다. 그것이 《세계를 뒤흔든 열흘》(책갈피, 2005)이다. 이 책은 《카탈로니아 찬가》, 《중국의 붉은별》과 함께 르포문학의 3대 걸작으로 꼽힌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