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Ⅱ: 러시아혁명 100주년
전 세계 민족해방운동을 고무한 러시아 혁명 *
남태평양의 쿡제도Cook Islands는 영국 제국에 병합돼 있었다. 1919년 3월 11일 쿡제도의 주요 섬인 라로통가에 있던 식민지 당국은 뉴질랜드에 다음과 같은 전보를 보냈다. “정착지를 책임지는 귀환 병사들이 심각한 반란을 일으킴. 무장 병력 지원 필요. 전함 등 도움을 보내 줄 수 있는가? 무장 병력이 최소 50명 필요함.”
반란을 일으킨 병사들은 유럽으로 파견된 전함에서 군복무를 하던 중 볼셰비키 사상을 만난 참전 군인들이었다. 그 병사들은 소수여서 쉽게 진압됐지만, 제국의 권력자들은 혁명적 사상이 더 번져 나갈까 봐 두려워했고, 그 두려움은 근거가 없는 것이 아니었다. 쿡제도의 경험은 작은 사례이다. 그러나 당시 세계 인구의 다수는 제국주의의 통치를 받았고, 그래서 그들이 어떻게 해방될 수 있느냐는 중요한 문제였다.
1800년대 말 자본주의는 먹느냐 먹히느냐의 치열한 경쟁 속에서 강대국들이 세계를 여러 제국으로 분할 ― 그래야 시장과 자원을 통제할 수 있으므로 ― 하는 제국주의 단계로 발전했다. 그 과정에서 강대국들은 세계 전체를 자본주의 체제로 편입시켰다. 이 제국주의적 갈등은 제1차세계대전이라는 대학살로 이어졌다.
제1차세계대전이 끝날 무렵에도 영국은 여전히 지배적인 제국주의 강대국이었다. 그러나 영국은 프랑스, 독일, 미국이 제기하는 끝없는 경쟁에 직면했다. 많은 식민지 대중은 승전국의 위선을 알게 됐다. 승전국들은 바르세유 평화회의에서 민족 자결권 운운하면서도 세계 인구의 다수를 노예 상태로 묶어 놓았던 것이다.
제국들은 인도나 아프리카의 여러 나라는 직접 식민 통치를 했고 중국이나 멕시코는 공식적으로는 독립된 국가이지만 경제를 지배해 반半식민지로서 지배했다. 후자는 남반구 곳곳에 대한 현대 제국주의의 사례와 비슷한 것으로, 그 나라에 외국 기업들을 위한 특수한 경제 구역을 설정하는 것이었다.
그런 곳들에서 제국주의에 맞선 저항은 식민 제국 내에서 좀더 나은 처지를 보장받기를 원한 중간계급 급진파나 스스로 새로운 지배계급이 되고자 한 민족주의자들이 이끄는 경향이 있었다. 제1차세계대전은 세계 곳곳에서 민족주의를 고양시켰다. 영국의 오래된 식민지 아일랜드에서 독립 요구가 제기됐다.
식민지의 대중은 모두 제국주의에 의해 천대받았지만 중간계급의 경험과 노동자·농민의 경험은 달랐다. 볼셰비키는 독특한 실천 방식을 고안해 냈다. 그것은 중간계급과 노동자·농민 둘 다와 함께 활동하면서도 가난한 사람들의 이익을 추구하는 독립적 조직을 항상 유지하는 것이었다.
당시 서구의 대다수 사회주의 조직들은 국익 사상을 받아들였다. 그래서 그들은 제1차세계대전 때 자국 지배자들을 지지하기에 이르렀고, 결국 자국의 제국을 지지하는 데로 나아갔다. 1943년에도 노동당은 영국의 아프리카 식민지들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상당한 시간이 지나더라도 이 사람들은 자주적 정부를 가질 준비가 돼 있지 않을 것이다. 유럽의 민중과 국가들은 그 영토를 관리할 책임을 져야 한다.”
그와 반대로 공산주의자들은 모든 식민지의 즉각적 독립을 주장했다. 러시아 혁명의 지도자 레닌은 1919년 다음과 같이 말했다. “사회주의 혁명은 각국의 혁명적 프롤레타리아가 자국 부르주아지에 맞서 싸우는 투쟁만으로 또는 그것을 주된 모습으로 해서 일어나지는 않을 것이다. 사회주의 혁명은 제국주의에 천대받는 식민지와 나라들의 투쟁으로 일어날 것이다.”
그러나 이 투쟁은 단지 식민 지배 이전 상태로 돌아가는 것을 뜻하는 것은 아니었다. 왜냐하면 그 과정에서 그 사회들에서 가장 억압받는 집단인 농민들이 해방돼야 했기 때문이다. 러시아에서 승리한 볼셰비키의 실천은 1919년 국제 혁명 정당인 ‘공산주의 인터내셔널’(코민테른)을 창설하는 것이었다. 공산주의 인터내셔널은 계급 투쟁의 결정적 중요성, 철저한 국제주의, 다른 정치 세력과 공동전선으로 함께 활동하기, 인종차별에 확고히 반대하기 등을 원칙으로 삼았다.
그래서 볼셰비키는 1920년 카스피해 연안의 바쿠에서 제1차 동양 인민회의를 주최했다. 바쿠는 레닌이 “민족들의 감옥”이라고 부른 러시아 제국의 일부였던 지역이다.
바쿠에서 회의를 개최한 것은 볼셰비키가 단지 산업국의 노동자만 신경 쓰는 것이 아님을 보여 주고자 한 일이다. 바쿠 회의에는 러시아 제국에 지배당하던 민중뿐 아니라 여러 다른 식민지의 민중도 초청됐다. 바쿠 회의에는 신민지·반半식민지 출신의 사람들도 참가했다. 러시아인들은 식민지들을 동양이라고 불렀다. 그래서 동양이라는 단어는 주로 아시아를 뜻했지만 아프리카와 라틴아메리카도 뜻했다. 실제로 미국 사회주의자 존 리드는 바쿠 회의에서 멕시코에 관해 연설했다.
혁명 이후 볼셰비키는 러시아 제국의 중요한 요소였던 무슬림 차별의 종식을 선언했다. “이제부터 여러분의 신념, 관습, 민족적·문화적 제도는 침해할 수 없는 자유를 가질 것임을 선언합니다.” 바로 이런 태도 덕분에 많은 무슬림이 내전 동안 볼셰비키를 지지했던 것이다.
바쿠 회의는 여성에 관해서는 “권리의 완전한 평등, … 교육기관과 직업기관에 대한 조건 없는 이용, … 결혼 쌍방의 동등한 권리”를 요구했다.
바쿠 회의의 국제적 파장이 얼마나 컸는지는 크게 주목할 필요가 있지만 이 글에서 다 다룰 수는 없다. 공산주의자들도 관계된 한 가지 예만 들자면 외국 군대의 침공에 맞선 터키인들의 저항이 있다. 당시 터키는 거대하지만 점차 축소되고 있던 오스만 제국의 핵심 지역이었다. 제1차세계대전에서 패전국들 편에 선 오스만 제국은 승전국들에 의해 분할되고 있었다.
이에 반대하는 운동은 민족주의와 범이슬람주의 세력이 이끌었는데, 각자 모든 민중을 대표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바쿠 회의에서 지적됐듯이, “터키의 민족적 혁명 운동 일반은 외세에 맞서기만 할 뿐” 농민 문제나 지대 문제는 무시했다.
러시아 소비에트 정부는 무스타파 케말 아타튀르크의 터키 민족주의 운동을 훈련하고 무장을 지원했다. 그들의 승리가 제국주의 강대국들에게 큰 타격을 입힐 것임을 알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러시아 소비에트 정부는 아타튀르크가 정권을 잡으면 혁명적 활동을 억누를 것임도 정확히 예측했다. 그래서 초기부터 레닌은 다음과 같이 경고했다. “민족주의에 붉은 칠을 하지 말라.”
제국주의를 약화시키기 위해 민족주의자들과 함께하면서도 노동자·농민의 독자적 이익을 훼손하지 않는다는 섬세함이 레닌 주장의 요체이다. 각각의 경우에 가장 핵심적인 문제는 노동계급이 투쟁을 일으킬 수 있는 독립적인 공산당을 건설할 만큼 강하냐 아니냐였다.
레닌은 식민지에서 벌어지는 저항의 경험을 알기 원했고, 그래서 인도의 혁명가 마나벤드라 나트 로이를 초청해 식민지에서 조직하는 최상의 방식이 무엇일지를 토론했다. 인도는 영국의 핵심적인 식민지였는데, 로이는 멕시코 혁명에 참여해 얻은 경험이 있었다. 로이는 인도공산당CPI을 창립한 7인 중 1명이 됐다. 인도공산당은 1920년 러시아 소비에트의 영토 내에 있는 타슈켄트에서 창당했다. 인도공산당의 초기 당원 다수는 범이슬람주의자였던 사람들이다.
공산주의 인터내셔널의 정책이 가장 빛나는 성과를 낸 곳, 그리고 가장 비극적으로 실패한 곳은 바로 중국이었다. 당시 중국은 1911년 마지막 황제가 타도된 이래 정치적 동요 속에 있었고 많은 사람들이 서구 사상들에 매료되고 있었다. 민족주의 정당인 국민당이 저항 운동에서 득세하는 조직이었다. 동시에 근대식 공장이 들어서며 노동계급도 성장하고 있었다.
역사학자 해롤드 아이작스는 다음과 같이 썼다. “공장 노동자들이 일하고 사는 조건은 산업혁명 초기의 노예 같았던 영국 노동자들의 열악한 처지에 필적한다. 남성, 여성, 아동이 하루에 12시간, 14시간, 16시간을 일했다. … 안전과 위생을 위한 기초적 조건도 보장되지 않는 처지였다.”
중국공산당CCP은 1921년에 창당했다. 불과 4년 뒤에 중국공산당은 대중적인 혁명 운동에서 주도적 구실을 했다. 그 운동은 상하이 국제 공동 조차지에서 영국이 인도 군대를 이용해 중국인 노동자들에게 총을 쐈고, 그 때문에 홍콩 등지에서 거대한 총파업이 벌어지며 일어난 운동이었다.
혁명가들은 민족주의자들과 어느 정도로 협력해야 하는지를 두고 격렬한 논쟁을 벌였다. 1923년 중국공산당은 국민당에 입당하기로 결정했다. 그때 국민당은 소비에트 러시아에게 훈련과 무장을 제공받고 있었다. 그러나 공산주의 인터내셔널은 다음과 같이 조언했다. “중국공산당은 독립적 조직과 고도로 중앙집권적인 기구를 유지해야만 한다.” 이 조언은 그 뒤에 일어날 재앙으로부터 중국공산당을 구할 수도 있었던 귀중한 조언이었다.
러시아 혁명이 고립되면서, 특히 독일 혁명이 패배하고 1924년 레닌이 사망하면서 노동자가 독립적으로 행동할 수 있다는 것에 회의적인 사상이 고개를 들었다. 1925년 5월 스탈린은 연설을 하며 국민당을 “노동자와 농민의 당”이라고 불렀다. 붉은 칠을 한 것이다. 중국공산당은 정치적 독립을 포기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1927년 혁명이 중국을 뒤흔들었다. 1917년 러시아 페트로그라드[현재의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펼쳐진 모습과 비슷하게, 공산당의 지도를 받은 노동자들이 주요 산업 도시인 상하이를 통제했다. 중국 혁명가 정차오린은 당시 상하이 상황을 다음과 같이 술회했다. “거리가 사람들로 북적거렸다. 상점주는 없었다. 무장하거나 하지 않은 노동자, 학생, 여성이 시위를 벌이며 여기저기로 행진했다.”
이 혁명은 1917년 10월 혁명으로 시작된 국제적 혁명 물결을 재개할 기회였다. 그러나 국민당 군대가 상하이에 도착하자 공산주의자들은 동맹으로 여기던 국민당에 통제권을 넘겼다. 이제 민족주의자들은 제국주의보다 노동자를 더 두려워하게 돼서 노동자들을 공격하고 혁명을 피바다 속에 빠뜨렸다. 국민당은 중국공산당 당원들을 학살했다. 그 전에 중국공산당이 스탈린의 명령에 따라 국민당에 넘긴 당원 명단에 있던 당원들이었다.
중국공산당의 지도자 천두슈는 중앙위원회에서 사퇴했다. 천두슈는 공산주의 인터내셔널이 “한편으로는 우리 자신의 정책을 수행하라고 하고는 다른 한편으로는 국민당으로부터 철수하지 못하도록 했다”고 분개했다.
중국공산당 같은 신생 조직이 수많은 노동자의 지지를 받으며 투쟁의 중심에 서서 매우 빠르게 전술을 배우고 봉기를 이끌었다는 사실은 매우 놀랍다. 그러나 공산주의 인터내셔널은 중국공산당이 민족주의 세력과 단절하지 못하게 가로막았다. 그 때문에 혁명은 패배했고, 사회를 변혁할 잠재력이 있던 노동자 봉기가 꺾여 기존 체제의 통치권을 쥐길 바라는 민족주의 투쟁으로 억눌렸다. 노동자 지향적 조직이었던 중국공산당은 이 패배로 농민과 농촌에 집중하는 조직으로 변모했다.
독일 혁명의 실패로 산업국들 전역으로 확산된 혁명의 쓰나미가 가로막혔다. 중국 혁명의 비극과 불가피하지 않은 패배도 같은 구실을 했다. 식민지에 관한 볼셰비키의 정책이 적용될 기회를 차단한 것이다.
레온 트로츠키는 러시아의 1905년 혁명 이후 연속혁명론을 발전시켜서, 경제적으로 낙후한 나라에서도 사회주의 혁명이 어떻게 가능한지를 설명했다. 당시 대다수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주요 자본주의 중심지에서만 사회주의 혁명이 일어날 수 있다고 봤는데 말이다. 트로츠키는 처음에는 연속혁명론이 러시아에만 적용된다고 봤다. 그러나 1926~1927년 중국 혁명의 실패를 보며 자기 이론을 일반화했다. 정차오린 등 중국공산당의 몇몇 지도자들은 트로츠키의 분석과 공산주의 인터내셔널 비판에 동의하게 됐다.
그러나 공산주의 운동의 대다수는 다른 결론으로 이끌렸다. 노동계급의 힘만으로는 안 되고, 계급을 가로지르는 동맹 구축과 인민전선이 필요하다는 결론이었다.
공산주의 인터내셔널의 조언은 점점 부적절하게 됐음에도 10월 혁명이 준 영감은 계속 확산됐다. 그래서 한 가지 사례를 살펴보는 것이 가치가 있겠다. 바로 훨씬 더 장기적으로 이뤄졌고 처음에는 큰 성과가 없었던, 아프리카 전역의 혁명가들과 관계를 맺으려는 노력이었다.
혁명가들은 아프리카와 관련해 여러 난제에 부딪혔다. 아프리카의 식민주의 반대 운동은 젊었고 여러 방향으로 이끌렸다. 아프리카 혁명가들은 자체의 정치적 미숙함과 제국주의 강대국들의 적대에 맞닥뜨렸다.
혁명가들을 결집시키려 애쓴 가장 중요한 조직은 ‘국제 흑인 노동자 노동조합 위원회’ITUCNW였다. 국제 흑인 노동자 노동조합 위원회는 아프리카 출신 선원들과 접촉할 수 있었던 독일의 항구 도시 함부르크에 기반을 뒀고, 흑인 투사들의 네트워크를 형성하기 시작했다. 이 단체의 신문 <흑인 노동자>는 아프리카와 카리브해 식민지 전역에서 금지당했다. 그러나 국제 흑인 노동자 노동조합 위원회는 나중에 케냐의 첫 대통령이 되는 조모 케냐타 같은 인물과 관계를 맺었다.
국제 흑인 노동자 노동조합 위원회가 가장 성공적이었던 때는 1930년 함부르크에서 국제 흑인 노동자 회의를 열어 국제 혁명 운동의 건설을 토론했던 때이다. 이 회의에 참가한 대표자들은 러시아로 가서 더 공공연하게 혁명적인 토론을 벌이고 “흑인 식민지에서 제국주의의 즉각적 철수와 흑인 식민지의 완전한 독립”을 주장했다.
그러나 국제 흑인 노동자 노동조합 위원회의 주된 관심사는 아프리카 여러 나라의 급진적 인사들을 한둘씩 천천히 모아 뿌리를 내리기 시작하는 것에 있었다. 사하라 사막 이남 아프리카에서 공산당이 실질적으로 존재한 유일한 나라는 남아프리카공화국이었다. 그래도 1935년 무솔리니의 이탈리아가 에티오피아(당시 이름은 아비시니아)를 침공할 때까지는 국제적으로 조율된 행동을 벌이는 것은 가능했다.
남아공공산당은 항만 노동자들에게 침략군 식량 수송선의 하역 작업을 하지 말라고 호소하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아비시니아를 방어함으로써 여러분들은 아프리카의 백인 강도 제국주의자들 모두에게 타격을 입힐 수 있을 것이고, 남아프리카 흑인이 해방되는 날도 앞당길 수 있을 것입니다.”
이 행동은 공산주의 사상에 대한 사람들의 존경을 높였고 운동이 범아프리카주의 방향으로 나아가도록 했다. 또한 바쿠 회의와 공산주의 인터내셔널과 마찬가지로 즉각적 독립을 주장했다.
그러나 1930년대 중반이 되자 공산주의 인터내셔널은 국제 흑인 노동자 노동조합 위원회을 옭아맸다. 그것의 전투적 전술이 광범한 영향력을 끼칠 수 있던 시점에 말이다. 당시 러시아는 완전히 스탈린주의 지도자의 손아귀에 있었는데, 스탈린주의자들은 나치 독일의 부상에 맞서 제국주의 강대국들과 “인민전선”을 맺기를 바라고 있었다. 그러려면 식민주의에 반대하는 즉각적인 봉기 호소 활동이 폐기돼야 했다.
러시아의 스탈린주의 지도자들은 제2차세계대전 와중에 공산주의 인터내셔널을 해산했다. 그와 동시에 국제 혁명이라는 사상을 저버리고는 동맹국이 될 만한 나라들에서 일국적인 민족주의적 사회주의를 건설하고자 했다.
러시아 혁명은 세계 전역을 휩쓴 연대 물결을 고무했다. 억압의 종식을 주장하고 언제나 천대받는 사람들의 편에 섰기 때문이다.
10월 혁명의 여파가 얼마나 컸는지는 1924년 레닌의 장례식에서 미국의 흑인 민족주의 지도자 마커스 가비가 한 추모 연설에서도 알 수 있다.
“혁명은 … 러시아 정부의 운명을 특권 계급의 손에서 빼앗아 왔다. … 그 뒤 5년 이상 동안 레닌과 트로츠키는 러시아 농민을 결집시키고 근대 최초로 … 민중이 통치하는 정부를 수립했다. … 러시아는 흑인뿐 아니라 전 세계의 약한 민족들에게 큰 희망을 약속했다.”
후대의 공산주의자들도 스탈린 체제의 러시아를 지도자로 여겼지만, 민족주의적 정치나 계급 협력적 정치로 희석된 스탈린주의에 매력을 느껴서 그랬던 것은 아니다. 그것이 차별을 종식시키자는 10월 혁명의 약속을 이행할 사상으로 보였기 때문이었다.
이제 스탈린주의 정치가 득세하던 시절은 지나갔으니만큼, 우리는 스탈린주의가 전 세계에서 제국주의와 차별을 쓸어 버릴 수 있는 진정한 잠재력을 가진 초기 전통을 왜곡한 것임을 알아야 한다.
MARX21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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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Ken Olende, How Russia inspired the world, Socialist Review, October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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