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민중항쟁 ― 한국 노동계급 운동의 변곡점
읽을 가치라고는 조금도 없지만 전두환이 낸 회고록 이야기로 글을 시작해야겠다. 회고록과 함께 전두환 자신도 폐기 처분해야 하기 때문이기도 하고, 이 글이 회고록의 온갖 거짓과 왜곡에 대한 노동계급 입장에서의 반박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다.
전두환의 회고록 제1권은 1979년 10월 26일 박정희의 죽음부터 광주민중항쟁에 이르는 과정을 다루고 있다. 전두환은 이 시기를 회고록 제1권의 제목처럼 ‘혼돈의 시대’라고 본다. 즉, 박정희 체제의 균열을 뚫고 솟아나는 대중 투쟁을 억누르고 착취와 억압의 박정희 체제를 유지하고자 했던 자신의 시각으로 썼다고 할 수 있다. 당연히 온갖 왜곡과 거짓으로 가득 차 있다.
그의 시각 속에 광주민중항쟁은 여전히 ‘폭동’과 ‘사태’이다. 자신은 가해자이기는커녕 되레 ‘싯김굿의 재물’이 된 피해자이며, 발포 명령자는 없었고, 정당한 진압이었다고 뻔뻔하게 주장한다.
이러한 왜곡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광주민중항쟁 당시부터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사실 전두환은 제대로 된 반성과 사과를 한 번도 한 적이 없었을 뿐 아니라, 심지어 자신의 행위를 정당하다고 생각하는 ‘확신범’이라 할 수 있다.
반면 광주민중항쟁을 투쟁의 역사로 기억하는 사람들의 입장에서 이를 바라보는 그림은 완전히 다르다. 이런 견해를 대표하는 책이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일 것이다. 1985년 출판되자마자 금서가 됐지만 ‘지하 베스트셀러’였던 이 책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도청을 마지막까지 지키다 목숨을 잃은 윤상원의 말이다. “우리가 설령 진다고 해도 영원히 패배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는 이 말을 유언처럼 남겼는데, 이 말이 실제 현실로 나타났다.
1980년대 많은 사람들이 광주민중항쟁의 영향으로 급진화돼 군부독재에 맞서 기꺼이 싸우고자 했다. 심지어 목숨을 바친 사람들도 많았다. 특히 사회 변화에서 노동자들의 중요성을 인식한 투사들이 늘어나기 시작했다.
《한국노동계급의 형성》의 저자 구해근 교수는 당시 상황을 잘 묘사했다. “역설적으로 한국 노동계급 운동은 전두환 정권 첫 1년 동안 더 강해지고 성숙해졌다. 표면적으로 정치적 안정이 유지됐지만 그 이면에서는 학생 노동자 재야집단들이 1980년의 패배에 대해서 광주학살의 의미에 대해서 그리고 그들의 미래전략에 대해서 숙고하였다.”
다시 말해, 광주는 물리적으로는 패배했지만 정치적으로는 그렇지 않았다고 할 수 있다. 오히려 진정한 민주주의와 해방을 원했던 사람들의 열망이 1987년 6월 항쟁과 7~9월 노동자대투쟁으로 이어진 것은 전두환에 대한 ‘역사의 복수’라 할 만하다.
1970년대
광주민중항쟁을 이야기하기 위해서는 먼저 1970년대 말의 상황을 살펴봐야 한다.
1970년대 말 한국 자본주의와 박정희 정권에 심각한 위기가 찾아왔다. 경제성장률이 1976년에는 14.1퍼센트였지만, 1978년에는 9.7퍼센트로 떨어지더니 1979년에는 6.5퍼센트로 급락했다. 1980년에는 광주항쟁의 영향까지 겹치면서 마이너스 5.2퍼센트로 폭락했다. 이러한 위기의 대가는 평범한 대중이 치렀다. 물가가 22퍼센트 올랐고 해고와 실업도 늘었다.
이 시기 노동자들의 처지는 상당히 열악했다. 1976년 해태제과 노동자들이 쟁의 때 노동부에 낸 탄원서의 내용은 하루 12시간만 일하게 해 달라는 것과 일주일에 하루는 쉬게 해 달라는 것이었다. 불황 때문에 1979년 5월 말까지 임금 체불액은 1978년 같은 기간에 견줘 무려 7배나 됐다. 1
1970년대 폭압적인 분위기 속에서도 노동자들의 저항은 끈질기게 이어졌다. 노동쟁의는 1976년부터 증가하고 있었다. 특히 1978년 동일방직 노동자들의 투쟁은 사회적으로 큰 영향을 미쳤다. 중앙정보부(현재 국정원)까지 개입해서 노동자들에게 똥물을 뒤집어씌우는 등 온갖 탄압을 가했지만 노동자들은 끈질기게 투쟁을 이어 나갔다. 이 투쟁에 영향을 받아 서울대 학생들이 투쟁에 나섰다. 노래 ‘아침이슬’을 만든 김민기는 ‘공장의 불빛’이라는 노래굿을 만들었다.
1970년대에는 주로 여성 노동자들이 투쟁을 이끌었는데, YH무역 노동자들의 투쟁도 이 선상에 있었다. YH무역은 1966년부터 미국에 가발을 수출하기 시작하면서 성장해 1970년에는 수출 1000만 달러 달성하고 1972년에는 사장인 장용호가 고액 소득자 순위 8위에 오르는 등 급속히 이윤을 확대해 나갔다. 이러한 성장의 이면에는 노동자들에 대한 가혹한 착취가 있었다.
하지만 1970년대 중반 가발 시장이 쇠퇴하며 위기를 맞자, 회사는 1979년 4월 폐업을 단행하고 300만 달러를 해외로 빼돌렸다. 노동자들은 이에 항의해 투쟁에 나섰다. 농성이 시작되자 경찰이 공격해 들어왔고, 노동자들은 투쟁을 방어하고 지속하기 위해 당시 야당인 신민당 당사에서 농성하기로 결정했다.
노동자들이 신민당사에 들어간 지 24시간 만인 8월 10일 청와대에서 열린 고위대책회의에서 강제해산 결정이 내려졌다. 8월 11일 새벽 경찰 1000명이 동원돼 강제 진압에 나섰고, 이 과정에서 YH노동자 김경숙 씨가 사망했다.(정부는 단순 추락사라고 했지만 나중에 의문사진상조사위원회는 타살 의혹을 강력히 제기했다.)
YH 투쟁은 부마항쟁에 상당한 영향을 줬다. 부마항쟁의 시발점이었던 부산대 학생들의 선언문에는 YH 탄압에 대한 항의가 주요 내용으로 담겨 있다. 부마항쟁으로 지배자들의 분열이 가속화됐고 박정희가 죽음에 이르렀다고 본다면, YH 노동자들의 투쟁은 그 유신의 심장을 쏘는 뇌관이었던 셈이다.
그러므로 노동자들을 그저 ‘불쌍한 노동자’나 ‘힘 없는 노동자’로 본 당시 자유주의자들의 시각은 문제가 있다. 1970년대 노동자들의 끈질긴 투쟁은 학생들의 투쟁과 민주주의 투쟁에 영향을 미쳤고, 다시 이것이 노동자 투쟁을 고무하며 발전해 1987년 6월항쟁과 7~9월 노동자대투쟁으로 이어졌기 때문이다.
부마항쟁과 10·26
부마행쟁은 ‘유신대학’이라는 오명을 쓰고 있던 부산대에서 시작됐다. ‘유신대학’이란 유신에 고분고분한 대학이란 뜻이었다. 그런데 그때까지 박정희에게 아무런 저항도 못하던 부산대에서 부마행쟁이 시작될지는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다.
1979년 10월 16일 부산대생 200여 명이 유신헌법 철폐 등을 요구하며 시위를 시작했고 금방 5000명으로 불어나 시내로 진출했다. 저녁이 되자 퇴근하는 노동자들이 합류해 시위대는 7만여 명에 달했다. 부산의 투쟁은 마산으로 확산돼 격렬하게 전개된다.
정부는 부산에는 계엄을, 마산에는 위수령을 선포하고 공수부대를 투입해 잔인하게 진압했다. 부마항쟁은 군대의 폭력으로 잦아들었지만, 항쟁이 지배자들에게 준 충격은 매우 컸다. 지배자들은 반란·혁명에 대한 두려움에 빠져들었고 극심하게 분열했다.
중앙정보부장 김재규는 부마항쟁을 두고 이렇게 말했다. “유신체제에 대한 도전이고 물가고에 대한 반발과 조세에 대한 저항에다가 정부에 대한 불신까지 겹친 민중봉기다. 불순한 세력은 배후에 없다. 위와 같은 민란은 정보자료로 판단컨대 5대 도시로 확산된다.” 그러면서 강경 조처만으로는 안 된다는 입장을 냈다. 하지만 박정희는 김재규를 질책하면서 “앞으로 서울에서 4·19 같은 데모가 일어난다면 대통령인 내가 발포 명령을 하겠다”고 호언했다. 경호실장 차지철은 “캄보디아에서는 300만 정도 죽어도 까딱 없었는데 데모대원 100만~200만 정도 죽어도 걱정 없다”며 박정희를 부추겼다.
결국 지배자들의 분열은 10월 26일 김재규가 박정희와 차지철을 죽이는 것으로 나타났다. 하지만 지배자들의 분열이 해소된 것은 아니었다. 박정희가 죽은 후 대통령이 된 최규하는 실질적인 권력을 갖고 있지 않았다. 권력은 군부에 있었다. 군부는 크게 두 세력으로 분열해 있었다. 육군참모총장으로 계엄사령관이었던 정승화와 보안사령관으로 합동수사본부장이었던 전두환이었다. 정승화 측은 유신체제를 조금 완화하는 방향으로 가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긴급조치 폐지, 김대중 복권 등 몇몇 유화 조처가 취해졌다. 그러나 전두환 측의 생각은 달랐다. 그는 자신의 사조직 ‘하나회’를 기반으로 조심스럽게 군부 내에서 지지 세력을 모았다.
박정희는 자신과 고향이 같은 영남 출신들을 중용했다. 전두환은 박정희의 5·16 쿠데타 직후 육군사관학교 생도들의 5·16 지지 시위를 조직하여 박정희의 눈에 든 이후 주요 보직을 거치면서 박정희의 총애를 받았다.
박정희의 ‘정치적 아들’이라 할 만한 전두환은 자신의 사조직인 하나회를 중심으로 정승화 쪽을 제압할 계획을 추진했다. 결국 전두환은 12월 12일 정승화를 박정희 살해 공모 혐의로 체포하면서 ‘12·12 쿠데타’를 일으켰다.
그 뒤 전두환은 아래로부터의 저항을 파괴하기 위해 움직였다. ‘충정 작전’을 준비했는데, 이것은 저항에 대한 철저한 진압훈련이었다. 그리고 주요 방송과 신문사를 회유·통제하는 ‘K공작’을 펼친다. 새로운 ‘King’ 전두환을 국가 지도자로 부각시키는 일을 벌인 것이다.
1980년 3월 중순 당시 주한 미국 대사 글라이스틴이 작성한 한국의 정치 상황 보고서는 전두환이 군을 장악하고 이제 정권을 장악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고 말하고 있는데, 당시 상황을 잘 묘사했다고 할 수 있다.
‘서울의 봄’
상황이 이런데도 야당의 대응은 초라했다. 김영삼은 군장성급 출신자들을 영입하고, 전두환의 중앙정보부장 서리 임명에도 반대하지 않으면서, 신군부와 흥정을 잘 하면 자기가 대권을 잡을 수 있을 것이라는 꿈을 꾸고 있었다.
김대중은 재야·학생 운동을 자제시키기 급급했다. 군부를 자극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다. 5월 16일 김대중은 김영삼과 공동으로 시국수습 6개항을 발표하면서 평화 유지를 호소했다. 하지만 신군부는 다음 날 계엄을 전국으로 확대하면서 김대중을 내란혐의로 구속했다.
학생운동으로 말할 것 같으면, 1980년 ‘서울의 봄’ 시기에 학생회들이 부활하기 시작했다. 학생들은 처음에는 학내 문제에 집중했지만, 전두환의 집권 음모가 명백해지자 신군부에 대항한 항의 시위에 나섰다.
절정은 5월 15일 서울시내 30개 대학 10만 명 이상이 서울역에 운집해 계엄 철폐를 요구한 것이었다. 하지만 학생들은 오후 8시경부터 해산을 시작했다. 이른바 ‘서울역 회군’이다.
5 전두환의 쿠데타를 학생들만의 시위로 막을 수도 없었다. 노동자들의 광범한 참가가 관건이었지만 그런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당시 ‘회군’을 주장한 서울대 총학생회장 심재철은 최근 한 인터뷰에서 ‘회군’ 때문에 광주에서 학살이 벌어진 것이라는 비판을 의식해 “10만 학생들과 시민들을 희생시킬 수 없다고 생각해 철수하자고 한 것”이라고 했다. 광주민중항쟁에 참여한 대중의 염원과는 반대의 삶을 살았던 그의 주장은 변명에 지나지 않는다. 그렇다고 해서 ‘서울역 회군’이 광주학살의 결정적 원인이었다는 것은 아니다. 당시 학생들의 정치·조직·경험·자신감을 볼 때, 그런 비판은 과도하다.물론 노동자들은 1980년의 유화 국면 속에서 그동안 억눌려 온 불만을 터뜨렸다. 노동쟁의가 급증했다. 특히 사북항쟁은 매우 격렬하게 벌어졌다.
1980년 4월 16일 사북탄광에서 광원 25명이 어용노조의 형편없는 임금 인상안에 반대해 임금 인상과 노조 지부장 재선거를 요구하면서 전국광산노동조합 위원장실을 점거했다. 경찰이 개입하면서 투쟁은 사북항쟁으로 발전했다. 광원과 가족 3000여 명은 사북읍을 장악하고 저항했다.
정부는 강경 진압이 사태를 더 키울 수 있다는 판단으로 합의를 이끌어 내 투쟁을 무마시켰지만 합의는 기만적이었다. 협상 이후 투쟁을 주도한 100여 명을 연행해 가혹하게 고문하고 구속했다. 일주일 후에 일어난 부산의 동국제강 투쟁도 비슷한 양상이었다.
이처럼 폭발적인 투쟁이 벌어지기도 했지만 투쟁은 확대되거나 지속되지 못했다. 장기간 이어져 온 노동통제 때문에 노동자들은 투쟁의 경험, 조직, 자신감 등 모든 면에서 아직은 취약했다. 아직 그들에게는 경험과 시간이 더 필요했다.
신군부는 5월 17일 계엄을 전국으로 확대했다.(이미 1979년 10월 27일에 제주도 제외한 전국에 계엄이 선포된 상황이었으므로, 5월 17일의 선포는 실질적으로는 전면적 탄압의 개시 선포였다.) 5월 17일 하루에만 재야·학생운동 지도자·언론인 600명 이상이 체포됐다. 김대중은 내란음모 혐의로 체포됐다.
하지만 다른 지역과 달리 광주에서는 시위가 계속됐다. 광주에서만 시위가 멈추지 않은 데는 분명한 요인이 있었다. 군부독재는 분열지배 전략의 일환으로 호남을 의도적으로 차별하는 정책을 써 왔다. 호남은 상대적으로 낙후했을 뿐 아니라 호남 사람들은 온갖 멸시와 천대를 받았다. 그런 군부가 김대중을 체포한 것이 광주 시민들을 더 분노케 한 것이다.
전두환은 광주의 시위가 전국으로 확산될까 봐 두려워했다. 이 때문에 그는 광주를 초기에 잔인하게 짓밟아 본보기를 보여 주려 작심했다. 공수부대의 짐승 같은 야만 행위는 그 결과였다.
공수부대도 부마항쟁을 진압할 당시의 공수부대가 아니었다. 당시 군은 ‘부마사태 진압작전에 대한 평가 과정에서 시위의 대규모 확산을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서는 초동 단계부터 공수부대 등을 투입해 강경 진압을 하는 것이 효율적’이라는 결론을 이끌어 냈다.
광주민중항쟁
5월 18일 오전 10시 전남대 정문에서 학생 100여 명이 모여 농성을 시작했다. 학교를 지키고 있던 공수부대는 쇠심이 박힌 살상용 특수 곤봉으로 공격을 시작했다. 잠깐의 투석전이 있었지만 특수훈련을 받은 공수부대를 상대하는 것은 무리였다. 공수부대는 학생들을 쫓아가 머리를 강타하고 실신하면 질질 끌고 갔다.
학생들은 시내로 나가 시민들에게 알리기로 하고 시내에서 시위를 시작했다. 오전에는 학생들을 중심으로 수백 명이 모였다 흩어지기를 반복하며 시위를 벌였다. 오후에는 시위대가 좀더 불어났다. 오후 4시 40분경 광주 시내에서 공수부대의 공격이 시작됐다. 학생을 잡으면 먼저 곤봉으로 머리를 때려 쓰러뜨리고서는 서너 명이 한꺼번에 달려들어 군홧발로 뭉개고 곤봉으로 쳐서 피 곤죽을 만들었다. 조금이라도 반항하는 기색이 보이면 가차 없이 대검을 사용했다. 투쟁이 격화됨에 따라 사망자의 사망 이유는 처음에는 타박상, 그 다음은 자상, 그리고 총상 순서로 많아졌다.
19일 계엄군의 검문과 통제가 강화됐다. 하지만 오전 10시 금남로에 모여든 군중은 3000~4000명으로 불어났다. 이 날도 잔인한 진압은 계속됐다. 체포한 사람들을 거리로 끌고 나와 많은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발가벗기고 기합을 주고 괴롭혔다. 여자들도 옷을 벗기고 괴롭힘을 당하는 데 예외가 아니었다.
19일 오전부터 시위대의 중심 세력은 학생에서 일반시민으로 바뀌었다. 시위는 시내 전역으로 확산되고 있었다. 광주 시내 종합병원과 개인병원들에는 중환자가 넘쳐나기 시작했다. 병원에서 죽어 가는 사람도 많았다. 학생과 청년뿐 아니라 노인과 여성, 심지어 어린아이의 시체도 있었다.
20일 오후 시위대는 수만 명으로 늘어났다. 꼬마 손을 잡고 나온 할머니, 점원, 학생, 회사원, 가정주부, 요식업소의 종업원 등 다양한 사람들이 참가했다. 민중항쟁으로 발전하고 있었던 것이다.
오후 7시 대형 트럭, 고속버스, 시외버스와 200여 대의 택시가 금남로를 가득 메운 채 시위에 참가했다. 시위 규모는 20만 명을 넘어섰다.
이날 MBC가 불타고, KBS도 불탔다. 수많은 사람들이 죽어 가는데, 뉴스에는 단 한 마디도 보도되지 않고 계엄 당국의 강경한 발표만 있었기 때문이다.
21일 화정동, 동명동 등지의 고급 주택가는 부자들이 빠져나가 인기척이 없는 가운데 도청 중심으로 30만 명이 모여들어 투쟁의 정점을 이루었다. 이제 곧 공수부대가 물러날 것이라는 희망적인 관측도 있었다. 하지만 정오가 되고 애국가가 울려 퍼질 때 발포가 시작됐다. 조준 사격으로 많은 사람들이 희생됐다.
사람들이 무장을 해 저항했고, 이때 형성된 시민군의 저항으로 21일 저녁 드디어 계엄군을 몰아내고 도청에 진입했다.
항쟁의 확산을 위한 노력도 있었다. 21일 아세아자동차에서 차량을 징발해 확산을 위한 조건이 마련했다. 전주·서울 방향으로 진출하려 했지만 계엄군의 강력한 제지로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지만 전남 도내의 다른 시와 군으로는 확산됐다. 실제 목포, 함평, 나주, 무안, 강진, 해남 등으로 항쟁이 확산됐다.
22일 광주는 해방구가 됐다. 시민군은 자체 조직을 정비해 계엄군의 반격에 대비하면서 시내의 치안을 유지하는 일을 했다. 모든 차량을 등록하고 구호·연락·수송·보급·순찰·전투 등의 임무를 나눠 조직했다. 사재기나 매점매석은 일어나지 않았다. 헌혈이 넘쳐났고 은행이나 신용금고에 대한 사고는 단 한 건도 없었다. 시민군에 의한 폭력 사건도 없었다. 사소한 사고라도 발생하면 시민군 순찰대가 체포해 조사부로 넘겼다.
계엄군이 물러난 광주는 평범한 사람들이 이 사회를 운영할 수 있다는 잠재력을 보여 줬다. 하지만 항쟁은 고립돼 있었고 전두환과 신군부는 진압의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정시채 부지사, 유지급 인사들, 목사·신부·변호사 등 15명을 위원으로 한 시민수습대책위원회가 구성됐다. 이들은 군과 협상을 시작했고 총기 반납을 추진했다. 이러한 타협적인 협상에 반대해서 새로운 투쟁 지도부를 구성해야 한다는 주장이 나오기 시작했다.
결국 25일 투쟁적인 항쟁 지도부가 구성됐고, 26일 마지막인 5차 궐기대회가 도청 앞에서 열려 최후 투쟁을 다짐했다. 계엄군은 최후통첩을 보냈다. 항쟁 지도부는 시민들에게 이 사실을 알렸다. 계엄군과 싸워 이길 거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없었다. 죽을 각오가 돼 있는 사람들만이 남았다. 이들은 유언처럼 다음과 같은 말을 남겼다.
“물론 우리는 패배할 것입니다. 죽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냥 이대로 전부가 총을 버리고 계엄군을 아무 저항 없이 맞아들이기에는 지난 며칠 동안의 항쟁이 너무도 장렬했습니다. 앞으로 우리 시민들의 저항을 완성시키기 위해서도 누군가가 여기에 남아 도청을 사수하다 죽어야 합니다.”
27일 새벽 3시 30분 계엄군이 광주 시내로 진입하기 시작했고 4시 55분 도청을 완전 점령하면서 광주에서 민중의 무장 저항은 막을 내렸다.
광주민중항쟁과 미국
광주민중항쟁 당시 ‘대학생수습대책위원회’ 명의로 붙은 한 대자보에는 ‘미7함대는 지금 부산에 진주해, 전두환을 견제하고 있습니다’ 하는 내용이 있었다. 이처럼 당시에는 미국에 대한 환상이 어느 정도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미국은 제국주의적 본질에서 벗어난 적이 없다.
베트남전 패전 이후 미국의 대외정책은 직접 개입보다는 지역 동맹자를 통한 패권 유지 전략을 추구했다. 미국은 중동에서는 이란의 끔찍한 독재자 샤 정권을 지원하고 라틴아메리카에서는 독재정부를 지원했다. 중국과는 평화 무드를 조성하며 베트남전 패전의 상처를 만회하려 했다.
하지만 1979년 1월 이란 혁명이 일어나 미국의 후원을 받던 샤 정권이 몰락했다. 1979년 7월 니카라과 산디니스타 민족해방전선이 친미 독재정권 소모사를 몰아내고 권력을 장악했다. 카터 정부는 군비 팽창 정책을 강화하기 시작했다. 페르시아만 지역에 미군기지를 신설하고 제3세계에 즉각 투입할 수 있는 신속배치군을 신설했다. 1980년대 레이건의 대규모 군비 팽창은 카터 행정부의 정책을 발전시킨 것이었다.
1979년 6월 31일 카터와 박정희의 정상회담이 있었다. 이는 미국이 박정희 체제에 대한 지지를 확실히 한 것이었다.
미국은 박정희의 죽음으로 한국의 지배 체제가 불안정해져 동아시아에서 자신의 중요한 동맹세력이 없어지는 것을 바라지 않았다. 미국은 신군부를 지지함으로써 자신의 이익을 관철하려 했다.
광주민중항쟁을 진압하기 위한 20사단의 5월 22일 이동을 승인한 미국 국무차관 크리스토퍼는 미국이 질서를 회복하려는 한국 군부의 노력을 전적으로 지지하며 다만 공개적으로 드러나지 않게 조심하고 있다고 말했다.
당시 육군참모총장 이희성은 광주 진압 작전 전에 사태 확산 우려 때문에 미국과 사전 협의를 했고, 항공모함과 조기경보기가 한국에 배치될 때까지 진압 작전을 유보해 달라는 미국 측의 요구가 있었다고 했다. 물론 미국은 이와 같은 광주학살 지원에 대해서 인정하거나 사과한 적이 한 번도 없다.
광주민중항쟁은 미국의 제국주의적 본질을 드러냈고 이후 제국주의에 반대하는 투쟁이 확대되는 계기가 됐다. 1980년대 전국의 미국문화원이 점거나 방화로 몸살을 앓았던 것은 이런 맥락 하에서였다.
진상규명과 학살자 처벌
광주민중항쟁을 거치며 급진화된 한국 노동계급 운동은 1987년 6월항쟁과 7~9월 노동자대투쟁을 통해 군부독재를 무릎 꿇리고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큰 힘을 가질 수 있었다. 이러한 노동계급의 거대한 전진을 바탕으로 광주학살에 대한 진상규명과 처벌을 위한 과정이 본격적으로 시작될 수 있었다. 1988년 전두환이 백담사로 쫓겨나고 ‘광주청문회’가 열렸다. 1995년에는 전두환과 노태우가 구속됐다.
그동안 이룬 성과들은 투쟁의 결과물이다. 이 점이 중요하다. 학살자들에 대한 만족스럽지 않은 처벌조차도 투쟁으로 성취한 것이다.
1987년 거대한 투쟁을 통해 이뤄진 직선제가 포함된 개정 헌법에는 국가원로자문회의가 들어가 있다. 이 기구의 의장은 전직 대통령이다. 전두환이 퇴임 이후에도 자신의 영향력을 보장받기 위한 것이었고 야당은 이것에 타협해 줬다. 이것대로 됐다면 전두환이 ‘백담사 대머리’가 될 일은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1987년 6월항쟁 이후 지속된 노동자와 학생들의 투쟁으로 사태는 전두환의 뜻대로 전개되지 못했다. 결국 전두환은 백담사로 유배됐다.
6 하지만 김영삼 정부가 들어서자마자 노동자와 학생들의 투쟁이 이어졌고 대구지하철 폭발, 삼풍백화점 붕괴 등이 겹쳐 위기에 몰리자 김영삼은 노태우와 전두환을 구속했다.
김영삼은 1993년 대통령에 취임한 직후에는 전두환과 노태우를 처벌할 의사가 없었다.김대중은 당선되자마자 대중의 열망과는 달리 전두환과 노태우를 풀어 줬다. 그리고 5월 18일을 국가기념일로 지정하는 등의 조처들을 취했다. 광주민중항쟁을 제도화된 틀 내에 국한시키고 광주라는 지역적인 틀 내에 가두려는 조처들이었다.
물론 그조차 투쟁의 성과물이라는 점은 중요하다. 그러나 김대중·노무현 정부가 학살자 처벌이나 진상규명 문제에서 우파에 타협해 여전히 묻혀 있는 진실이 있음을 알아야 한다.
박근혜 정권 퇴진 운동 덕분에 당선한 문재인 정부는 이전 민주당 정부처럼 ‘5·18문제 해결’을 들고 나왔다. 그래서 계엄군의 헬기 사격 의혹과 공군 전투기 출격 대기 의혹을 조사하기 위해서 국방부 특별조사위원회가 발족됐다.
7 또, 사드 배치 강행에서 보여 주듯이, 이 나라 지배자들의 이해가 걸린 문제에서는 그가 입버릇처럼 강조하는 대중과의 ‘소통’을 내던져 버렸다. 그래서 문재인 정부가 광주학살에 대한 진상규명과 학살자 처벌을 철저히 할 것이라고 기대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하지만 대통령 당선 전 문재인은 특전사령관 출신자이자 전두환이 발포 명령을 내리지 않았다고 주장하는 전인범을 영입했다.이전에 얻은 성과가 그랬던 것처럼, 문재인 정부의 등장과 진상규명을 위한 조처 자체도 대중 투쟁의 힘이 근본적인 동력이다. 그 반대가 아니다. 따라서 대중 투쟁의 힘을 강화시키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 진상규명을 위한 출발이어야 한다.
글을 마치며
우리는 광주민중항쟁을 넓은 시각으로 바라볼 필요가 있다. 즉, 노동계급 운동 역사의 중요한 일부로 봐야 한다. 박정희가 폭압적 착취 체제 속에서 만들어 낸 노동계급이 1987년 역사의 전면에 등장하게 되는 과정에서 광주민중항쟁은 굉장히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바로 노동계급 운동이 정치적·조직적으로 급진화되는 계기였던 것이다.
오늘날 우리는 자본주의가 가하는 끔찍한 고통을 매일 마주하고 있다. 가난과 불평등, 온갖 차별과 대형 사고들은 자본주의가 낳은 끔직한 ‘적폐’들이다. 이것은 이윤을 위해 대중을 고통에 몰아넣는 자본주의 자체를 분쇄하지 않고는 해결될 수 없다.
따라서 광주민중항쟁에서 보여 준, 대중이 스스로 이 사회를 운영할 수 있다는 잠재력과 진정한 해방을 위한 염원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하다. 그 염원은 그때와는 비교할 수 없게 커지고 조직된 노동계급에 의해 현실화될 수 있을 것이다.
주
- 이런 상황은 부마항쟁의 경제적 배경이 되기도 한다. 예컨대 몇 달째 체불임금에 시달리던 현대양행 노동자들이 집단으로 부마항쟁 거리 시위에 참가했다. ↩
- ‘공장의 불빛’은 당시 노동자들의 상황을 잘 묘사한 가사로 많은 공감을 얻었다. 예컨대 “사장이 키우는 개는 포니 타고 병원 가고 우리들은 타이밍 먹고 일 나간다”는 말처럼 말이다. 동일방직문제대책위에서 활동한 조세희는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의 모티브를 여기서 얻었다. ↩
- YH 사건으로 구속된 고은 시인은 ‘YH 김경숙’이라는 시를 썼다. “1970년 전태일이 죽었다. 1979년 YH 김경숙이 마포 신민당사 4층 농성장에서 떨어져 죽었다. 죽음으로 열고 죽음으로 닫혔다. 김경숙의 무덤 뒤에 박정희의 무덤이 있다. 가봐라.” 이 내용은 당시 상황을 적절히 묘사했다고 할 수 있다. ↩
- 하지만 둘 사이의 차이가 근본적인 것은 아니었다. 정승화는 “김대중은 사상적으로 불투명하고 김영삼은 무능하며 김종필은 부패해서 그들이 대통령이 되면 쿠데타라도 일으킬 것”이라고 공공연히 말하던 인물이다. 전두환은 회고록에서 정승화의 이러한 입장을 언급하며 정승화야말로 쿠데타 세력이라고 주장했는데, 이것은 둘 사이의 차이가 그리 크지 않았음을 보여 준다. ↩
- 당시 계속 시위를 하자고 주장한 유시민은 《나의 한국현대사》에서 자신이 계속 싸우자고 주장하긴 했지만 이러다 다 죽는 것은 아닌지 굉장히 두려웠다고 회상했다. 서울역 집회에 참여한 학생들을 면담한 서중석 교수는 당시 시민들이 학생들의 주장에 크게 호응하는 분위기가 아니어서 학생들도 자신감이 있는 상태가 아니었다고 한다. ↩
- 1993년 김영삼은 ‘5·18책임자 처벌과 진상규명은 역사에 맡기자’고 했고 1995년 7월 검찰은 ‘성공한 쿠데타는 처벌할 수 없다’며 학살자 처벌 요구를 외면했다. ↩
- 그는 광주 학살자 중 한 명인 정호용을 ‘고마운 선배’, ‘인간적인 사람’으로 추켜세웠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