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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민중항쟁 ― 한국 노동계급 운동의 변곡점

MARX21

  1. 이런 상황은 부마항쟁의 경제적 배경이 되기도 한다. 예컨대 몇 달째 체불임금에 시달리던 현대양행 노동자들이 집단으로 부마항쟁 거리 시위에 참가했다.
  2. ‘공장의 불빛’은 당시 노동자들의 상황을 잘 묘사한 가사로 많은 공감을 얻었다. 예컨대 “사장이 키우는 개는 포니 타고 병원 가고 우리들은 타이밍 먹고 일 나간다”는 말처럼 말이다. 동일방직문제대책위에서 활동한 조세희는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의 모티브를 여기서 얻었다.
  3. YH 사건으로 구속된 고은 시인은 ‘YH 김경숙’이라는 시를 썼다. “1970년 전태일이 죽었다. 1979년 YH 김경숙이 마포 신민당사 4층 농성장에서 떨어져 죽었다. 죽음으로 열고 죽음으로 닫혔다. 김경숙의 무덤 뒤에 박정희의 무덤이 있다. 가봐라.” 이 내용은 당시 상황을 적절히 묘사했다고 할 수 있다.
  4. 하지만 둘 사이의 차이가 근본적인 것은 아니었다. 정승화는 “김대중은 사상적으로 불투명하고 김영삼은 무능하며 김종필은 부패해서 그들이 대통령이 되면 쿠데타라도 일으킬 것”이라고 공공연히 말하던 인물이다. 전두환은 회고록에서 정승화의 이러한 입장을 언급하며 정승화야말로 쿠데타 세력이라고 주장했는데, 이것은 둘 사이의 차이가 그리 크지 않았음을 보여 준다.
  5. 당시 계속 시위를 하자고 주장한 유시민은 《나의 한국현대사》에서 자신이 계속 싸우자고 주장하긴 했지만 이러다 다 죽는 것은 아닌지 굉장히 두려웠다고 회상했다. 서울역 집회에 참여한 학생들을 면담한 서중석 교수는 당시 시민들이 학생들의 주장에 크게 호응하는 분위기가 아니어서 학생들도 자신감이 있는 상태가 아니었다고 한다.
  6. 1993년 김영삼은 ‘5·18책임자 처벌과 진상규명은 역사에 맡기자’고 했고 1995년 7월 검찰은 ‘성공한 쿠데타는 처벌할 수 없다’며 학살자 처벌 요구를 외면했다.
  7. 그는 광주 학살자 중 한 명인 정호용을 ‘고마운 선배’, ‘인간적인 사람’으로 추켜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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