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르크스의 삶과 중심 사상
카를 마르크스는 1818년 독일 트리어에서 태어났다. 트리어는 로마 유적과 수많은 성당으로 유명한 모젤의 조용하고 작은 시장 도시였다.
1818년까지만 해도 산업혁명은 영국에서 진행되고 있었다. 증기기관, 새로운 기계, 새로운 계급들, 새로운 투쟁들이 새로운 세계를 창조하고 있었다.
마르크스가 태어난 이듬해에 영국에서 피털루 대학살이 있었다. 1819년 8월 맨체스터 민중이 의회 개혁을 요구하는 집회를 열자 시 당국이 군대를 보내 11명을 죽이고 수백 명을 다치게 한 학살이었다. 이 대학살 직후 영국 의회는 억압적인 6개의 법률Six Acts을 통과시켜 노동계급의 정치 활동을 혹독하게 탄압했다. 로버트 오언이 쓴 《사회에 관한 새로운 의견》(New View of Society, 국내에는 지만지 출판사가 같은 제목으로 번역 출판했다)을 수년 동안 출판 금지시켰다. 이 책은 영어로 된 최초의 공상적 사회주의 소책자였다.
그런데 이 모든 일은 트리어에는 아무런 파장도 일으키지 못했다. 마르크스가 성장하던 시절 트리어는 중세적 고요의 깊은 잠에 빠져 있었다. 독일 전체가 그랬다고 말할 수 있다. 독일은 정치적·경제적 후진성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이 사실은 중요하다. 이것은 마르크스가 자신의 성숙한 전망에 이르는 데서 밟은 특수하고 평탄치 않은 진로에 영향을 미쳤다. 마르크스가 밟을 수 없었던 길은 리옹, 파리, 맨체스터, 런던에 있었다.
마르크스는 철학, 특히 헤겔 철학을 깊이 연구하면서 마르크스주의자가 됐다. 마르크스가 청년이었을 때 독일에서는 철학이 성행했다. 프로이센 국가는 철학 연구를 후원하고 장려했다.(마르크스가 학창 시절을 보냈던 본과 마찬가지로 트리어도 프로이센 영토였다.)
헤겔은 실재는 근본적으로 정신적이거나 영적인 것이라고 생각했다. 관념론이다. 즉, 관념이 궁극적인 실재다. 그러나 헤겔에게 중요한 것은 모든 사람의 관념이 아니었다. 그것은 오직 절대자(또는 신으로 알려진)와 관련해서만 이해될 수 있다.
그 자체로는 독창적인 명제가 아니다. 그러나 헤겔에게 이런 실재는 발전의 과정이지 최종 상황이 아니다. 그리고 발전은 필연적이고 모순과 투쟁의 과정이다 ― 정립, 반정립, 종합.
그런데 헤겔의 접근은 근본에서 보수적인 이데올로기에 기대고 있었다. 헤겔은 이렇게 말했다. “현실적인 것은 이성적인 것이고 이성적인 것이 현실적인 것이다.” 이것은 큰 문제를 낳는다. 헤겔의 방법론은 투쟁을 통한 변화를 강조한다. 그러나 모든 사람은 현존 세계를 최상으로 생각해야 한다. 그리하여 헤겔이 죽은 해인 1831년 프로이센 국가는 세계 역사의 절정을 대변했다.
이렇듯 헤겔의 방법과 체계는 대조적이었는데, 이 때문에 그가 죽자 그의 제자들은 분열했다. 방법을 강조한 ‘청년 헤겔파’는, 비록 관념적 언어를 사용했지만, 헤겔의 방법을 현재 상황에 적용했다.
청년 헤겔주의에서 역사 유물론으로
마르크스는 본에서 탕진과 게으름의 한 해를 보낸 뒤 1836년에 프로이센과 헤겔주의의 중심지인 베를린으로 갔다. 그리고 헤겔주의를 깊이 탐구한 뒤 청년 헤겔주의 비평가가 됐다. 당시 상황에서 독일 철학 전통에 몰입하지 않고서는, 그리고 독일 철학 전통을 뛰어넘지 않고서는 전진할 수 없었다. 법률을 공부하기를 바란 아버지의 기대를 저버리고, 마르크스는 결투 클럽에 참여하기도 하고 술집에서 소란을 피워 학교에서 처벌을 받기도 했다. 그리고 점차 철학과 정치에 심취했다.
포이어바흐를 제외한 나머지 청년 헤겔주의자들은 관념론적 설명에 갇혀 있었다. 그들의 관심사는 오직 관념에 대한 비평이었고, 정치적으로 수동적이었다. 마르크스는 여러 해 동안 그들의 일부였고, 이 시기에 그의 정치적 관심은 추상적 ‘민주주의’로 향했다. 마르크스의 첫 정치 저술인 ‘프로이센 국가의 검열에 관해’(1842)는 원칙적으로 모든 검열을 반대했다. 이 글은 청년 헤겔주의자들 사이에서 유행한 ‘비판적 비판주의’에 기초했다.
그러나 마르크스는 청년 헤겔주의의 진부함을 넘어 유물론적 견해를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유물론은 물질 세계와 우주는 인간 의식 외부에 있고 인간 의식에 앞서며 관념은 환경에 의해 형성된다는 사상이다. 헤겔의 절대자(그리고 기독교/유대교/이슬람의 신)는 인간 사회의 산물이지 원동력이 아니다. 신은 관념(정신, 영혼)이고 관념은 인간이 만든 것이다. 신이 인간을 만들지는 않았다. “인간이 종교를 만드는 것이지 종교가 인간을 만드는 것은 아니다. … 그러나 인간은 세계 바깥에서 살고 있는 추상적인 존재가 아니다. 인간은 인간의 세계, 즉 국가와 사회에 살고 있다.”(1844년, 《헤겔 법철학 비판 서문》)
여기에는 역사 유물론의 싹이 있다. 그러나 싹일 뿐이다. 1845년에 마르크스는 관념론과 결정적으로 단절하기 시작했다. “역사 그 자체는 아무것도 아니다. 역사는 막대한 재화를 소유하고 있지 않다. 역사는 전투를 벌이지 않는다. 역사는 인간이며 그것도 현실에서 살아 숨쉬는 인간이다.”(《독일 이데올로기》)
역사는 인간과 분리되지 않는다. 역사는 자신의 특정한 목적을 위한 수단으로서 인간을 이용한다. 역사는 목표를 추구하는 인간의 활동일 뿐이다. 여전히 ‘인간’을 말하고 있지만 관념론과 결정적으로 단절하기 시작한다.
마르크스는 헤겔의 역동적 관념론을 통해 헤겔의 인식 방법과 싸워 마침내 유물론에 이르렀다. 역사적으로 보자면, 마르크스는 뒤늦게 유물론에 도달했다. 마르크스 자신이 밝혔듯이, 18세기의 프랑스·스코틀랜드·영국 사상가들은 이미 유물론적인(즉, 과학적인) 견해에 도달했다. 그러나 그들의 유물론은 두 가지 약점이 있었다. 기계적 또는 일면적인 결정론이거나 원자론(마르크스가 ‘로빈슨주의’라고 부른)에 이끌리는 경향이 있었다. 헤겔에 몰두했던 마르크스는 이런 오류에 빠지지 않았다.
따라서 마르크스주의 자체가 불균등 결합 발전의 산물이었다. 마르크스가 일찍이 간파했듯이, 헤겔 철학은 독일의 후진성이 낳은 산물이자 마르크스가 받아들인 ‘합리적 핵심’을 담고 있었다.
선진국인 영국과 프랑스에서는 각각 정치경제학과 사회주의가 발전했다. 소수의 진보적 지식인들이 확립한 사상이지만 이 나라들의 조건 덕분에 이 사상들은 대중적으로 확산됐다.
러시아의 혁명가 레닌이 ‘마르크스주의의 세 가지 원천과 세 가지 구성 요소’라고 불렀던 독일의 철학, 영국의 정치경제학, 프랑스의 사회주의는 마르크스에 의해 국민적 특수성을 넘어 종합됐다.
종합은 방법이다. 마르크스는 헤겔의 방법이 ‘물구나무 서 있다’고 말했다. 마르크스는 《포이어바흐에 관한 테제》에서 자기 방법의 핵심을 이렇게 지적한다.(이 글은 1845년에 작성됐으나 마르크스 생전에 출간되지 않았다.)
인간의 사유가 객관적 진리에 도달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는 결코 이론의 문제가 아니라 실천의 문제다. 인간은 실천을 통해 진리를 증명해야 한다. 환경과 교육의 변화와 관련한 유물론적 교의는 환경이 인간에 의해 바뀌며 교육자 자신이 교육받아야 한다는 점을 놓치고 있다.
1846년에 마르크스와 그의 새로운 협력자 프리드리히 엥겔스는 《독일 이데올로기》를 완성했다. 이 대작은 마르크스와 엥겔스 생전에 출판되지 않았다. 독일어 원본은 1932년에 처음 발견됐다. 그리고 현재 세대가 잘 모르는 많은 사상가들과 논쟁하는 형식이어서 낯설다. 그러나 마르크스주의 사상의 정수가 이 저작에 있다. 이 저작은 역사 유물론의 출발점이자 두 사람이 마르크스주의와 진정한 사회주의 실천으로 옮아갔음을 뜻했다.
살기 위해서는 다른 무엇보다 먹을 것, 마실 것, 살 곳, 입을 것 등등이 필요하다. 따라서 최초의 역사 행위는 물질적 삶 자체의 생산이다. 이것이 실로 역사 행위이며 모든 역사의 근본적인 조건이다.
사회는 생산을 둘러싸고 형성되고 건설된다. 이런 생산 과정은 특정 발전 단계에서 이용할 수 있는 기술, 도구, 장비에 의지한다. 그리고 사회 계급들, 즉 착취자와 피착취자가 생겨나게 한다. 이것은 계급투쟁을 낳는다.
정치 활동 참여
마르크스의 혁명적 시각을 잘 보여 주는 책이 《공산당 선언》(이하 《선언》)이다.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1848년에 《선언》을 썼다. 그때 이래 전 세계에서 수백만 명이 이 책을 읽었다. 《기네스 북》에 따르면, 《선언》은 성경 다음으로 많이 팔린 책이다. 《선언》은 마르크스주의를 처음으로 대중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또,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사상에 대한 가장 훌륭한 입문서다. 세상을 변화시키기 위해 싸우는 모든 투사들은 꼭 이 책을 읽어 봐야 할 것이다.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1844년 9월 파리에서 처음 만났다. 그 뒤 두 사람은 평생의 동반자가 됐다. 의기투합한 두 사람은 대단한 지성을 투입해 혁명적 이론을 구성했다. 그리고 나서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정치적 운동에 뛰어들었다. 그들은 외국에 거주하고 있는 독일 직공들의 국제 비밀결사인 의인동맹에 관심을 기울였다.
당시 의인동맹의 핵심 지도자는 빌헬름 바이틀링이었다. 그는 음모적 엘리트주의자였다. 바이틀링은 노동자 대중은 공산주의를 이룩할 수 없다고 믿었다. 따라서 혁명적 소수가 대중을 대리해 권력을 장악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의인동맹에 개입해 1847년 6월 의인동맹을 음모적인 비밀 결사체에서 공개적인 혁명적 조직인 공산주의자동맹으로 바꿨다. 《선언》은 공산주의자동맹의 원칙을 밝히는 것이었다. 《선언》이 발표됐을 무렵, 유럽은 온통 혁명이 휩쓸고 있었다. 1848년 2월에는 프랑스의 루이 필립 왕정이 붕괴하고 제2공화정이 선포됐다. 3월에는 빈과 베를린에서 봉기가 일어났다. 《선언》은 마르크스라는 천재가 탁상에서 구상해 집필한 것이 아니었다. 정반대로 《선언》은 1848년 혁명에 개입하기 위한 공산주의자동맹의 실천적 지침서였다.
오늘날에도 들어맞는 《공산당 선언》의 자본주의 분석
어떤 사람들은 《선언》이 시대에 뒤떨어졌다고 말한다. 서로 연결된 몇 가지 이유를 든다. (1) 《선언》이 발간된 지 150년이 지났는데도 자본주의는 여전히 살아남았다. (2) 동유럽과 소련 등의 ‘현존 사회주의’ 체제가 몰락했다. (3) 노동계급은 죽었다. 따라서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말한 ‘계급투쟁, 혁명, 프롤레타리아의 승리’ 등은 틀렸다는 것이다.
과연 그럴까? 오히려 《선언》은 놀라운 현재성을 보여 준다.
자본주의의 발전 속도와 방향에 대한 마르크스의 서술은 시대를 한참 앞지른 통찰이었다. 그 어떤 부르주아 사상가도 마르크스만큼 자본주의를 잘 이해하지 못했다. 《선언》은 자본주의 발전 초기에 집필됐다. 당시 자본주의가 가장 발전했던 영국에서조차 산업화와 도시화의 정도는 보잘것없었다.
그러나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자본주의가 거대하게 전진할 것이라는 점을 인식했다. 그 결과 인류 역사상 처음으로 공산주의 창출을 위한 물질적 조건이 형성될 거라고 봤다. 또, 마르크스는 자본주의의 역동성이 자본의 세계화를 낳는다고 지적했다.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세계화’론의 창시자였던 셈이다.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자본주의의 업적을 지적함과 동시에 단서를 덧붙였다. 즉, 자본주의를 추동하는 역동성은 체제를 위기로 몰고 갈 조건을 만들어 낸다.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주장한 주기적 위기는 자본주의의 생래적 특징이다.
한편, 자본주의에서 노동자들은 생산수단을 소유하지 못한다. 반면에 생산수단을 소유한 자들은 일하지 않는다. 자본주의에서 생산은 사회적이다. 생산은 사회적이지만, 소유는 한줌의 개인들, 기업체, 국가의 몫이다.
삼성그룹 회장이 노동자를 착취하는 동기는 자기 개인의 소비를 위해서가 아니다. 그랬다면 자본가들의 부담은 작을지도 모른다. 삼성그룹 직원은 25만 명이 넘는다. 이 노동자들이 잉여가치 형태로 하루에 1000원만 주더라도 이재용은 평생 먹고 살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착취 동기는 자본가들의 소비가 아니라 자본 축적이다. 현대차는 다른 경쟁사들과의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 더욱더 많은 자본을 투자해 끊임없이 공장을 혁신해야 한다. 자본가들 간의 무정부적 경쟁의 또 다른 측면은 모든 자본 단위에서 노동자들에게 가하는 횡포다.
《선언》은 소수에게로의 자본 집중을 지적했다. 오늘날 자본주의 기업의 규모는 지난 세기에 상상했던 것 이상으로 거대하다. 500대 다국적기업들이 전 세계 무역의 3분의 2를 통제한다. 이들 가운데 몇몇 기업이 파산한다면 체제 전체가 위기에 빠질 수도 있다.
자본 집중은 동시에 인구의 집중을 낳는다.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살았던 당시, 도시 인구는 적었다. 오늘날 세계는 수백만 명이 살고 있는 거대 도시에 의해 지배당한다. 인구가 500만 명이 넘는 도시가 41개나 된다. 1000만 명이 넘는 메가 시티는 34개다. 오늘날 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농촌과 전통적 직종을 떠나 대도시로 몰려든다.
한편 생산수단은 갈수록 소수 자본가들의 독점적 소유물이 됐고, 그 결과 생산의 성격이 변했다. 공장 생산은 사회적 노동이다. 이것은 아주 많은 사람들의 공동 노력에 의존한다. 이 때문에 자본주의는 필연적으로 공동의 이해관계를 가지며 똑같은 사장과 체제에 의해 착취받는 사람들을 집중시킨다. 그 결과 거대한 노동계급이 창출됐다.
오늘날 모든 나라에서 인구의 거대한 부분이 노동계급화하고 있다. 한국도 대규모 도시화와 프롤레타리아화를 겪었다. 경제활동인구 중 노동계급의 비율이 압도적이다. 경제활동인구 2695만 5000명 중 임금 노동자는 71.4퍼센트인 1923만 3000명이다(2016년 3월 통계청 자료).
마르크스는 공장에서 일하는가 그렇지 않은가에 따라 노동계급을 규정하지 않았다. 《선언》에 따르면, “[현대의 노동계급은] 일자리를 찾아 놓고 있는 동안만 살 수 있고, 자신들의 노동이 자본을 증식시키는 동안만 일자리를 찾을 수 있다.”
노동계급은 단지 남성 블루칼라 노동자만이 아니라 화이트칼라 노동자, 서비스 노동자, 여성 노동자 모두를 포괄한다.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화이트칼라 노동과 블루칼라 노동을 구분하지 않았다. 계급은 노동 형태가 아니라 생산 과정에서 차지하는 객관적 위치에 따라 결정된다 ― 착취당하는 자와 착취하는 자.
혁명의 필요성
앞에서 지적했듯이, 오늘날 자본주의는 (비교적) 풍요에 바탕을 둔 무계급 사회를 건설할 물질적 기반을 창출했다. 이 사회의 인간적 토대는 노동계급이다.
모든 인류의 역사는 착취의 역사였으며, 착취가 사라지는 그날을 위해 희망을 갖고 싸우는 사람들이 있었다. 이 사람들은 모든 남성과 여성이 서로 협력해 자유롭고, 행복하고, 평화롭게 살 수 있는 유토피아를 그렸다.
어떤 유토피아는 천국에 있었고, 또 어떤 것은 지상에 있었다. 유토피아의 선동자들은 자신들을 무지하고 곤경에 처한 아이들을 약속의 땅으로 이끄는 부모로 생각했다. 그들 모두는 엘리트주의자들이었고, 19세기 초 프랑스의 공상적 ‘사회주의자들’이 바로 그들이었다.
젊은 마르크스는 이런 유토피아를 경멸했다. 마르크스는 역사상 처음으로 착취를 영원히 끝장낼 수 있다는 점을 깨달았다. 산업혁명을 통해 크게 증가한 생산은 모든 사람들에게 골고루 나누어 줄 만큼 충분했다. 이제 모든 사람들의 필요를 충족시킬 수 있고, 사회적으로 생산되고 분배되며,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의 노동을 통해 부를 쌓는 것이 범죄로 여겨지는 사회인 ‘사회주의’를 말할 수 있게 됐다
그런데 그런 사회는 어떻게 가능할까? 너무 올바르고 괜찮기 때문에 필연적일까? 자본가들, 토지 소유주들, 은행가들이 맹렬하게 반대하지 않을까?
마르크스는 일찍이 계급 지배의 무자비함을 깨달았다. 지배자들은 자비 호소에 너무도 무감각한 흡혈귀였다. 그래서 마르크스는 다음과 같이 결론 내렸다. 자본가들에게 약탈당하는 바로 그 계급이 권력을 잡을 때 비로소 자본가들은 자신들의 잉여생산물을 포기할 것이다. 즉, 지배계급은 힘으로 무너뜨리지 않는 한 부와 권력을 내놓지 않을 것이라는 점이 혁명이 필요한 첫 번째 이유였다.
혁명이 필요한 또 다른 이유는 노동계급이 혁명 없이 “여러 세대의 오물들”을 제거하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었다.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노동계급은 후진적이고 무식하고 인종차별적이며 더럽고 천하다. 그런데 어떻게 이런 계급이 착취와 공포로부터 자유로운 새로운 사회를 창조할 수 있겠는가?’ 하는 비난에 격분했다.
물론 마르크스는 착취 사회가 착취하는 괴물을 만들어 낼 뿐 아니라 착취받는 비참한 사람들을 만들어 낸다는 점도 알고 있었다. 그리고 이것이 혁명이 필요한 가장 중요한 이유였다.
자본주의는 노동자들을 단결하도록 만듦과 동시에 분열시킨다. 일자리와 주택 등을 둘러싼 경쟁은 노동계급을 분열시킨다. 사장들에 맞선 투쟁은 노동자들을 단결하도록 이끈다. 그래서 혁명의 가장 중요한 측면은 노동계급의 정신적 변화다.
민주주의와 공산주의
마르크스의 저작에서 가장 일관된 주제는 투쟁 속에 깃들어 있는 노동계급의 잠재력에 대한 열정이다. 이 주제는 마르크스 스스로 “급진 민주주의자”라고 불렀던 초기 저널리스트 시절로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마르크스가 초기 관념론적 저널리스트에서 훗날 과학적 작품으로 ‘위대한 전환’을 했다는 주장은 틀렸다. 마르크스는 민주주의에 대한 열정적 믿음으로부터 공산주의에 대한 열정적 신념으로 자기 논리를 발전시켰다고 말한 바 있다.
마르크스가 1846년에 완성한 《독일 이데올로기》의 주제는 노동계급 자력 해방의 중요성이었고, 이것은 그의 모든 저작을 관통한다. 1864년에 창립된 제1인터내셔널 강령은 “노동계급의 해방은 노동계급 자신의 사업이어야 한다”고 밝혔다. 이 구절이 인터내셔널 가입 조건이었다.
제1인터내셔널이 창립된 지 7년 뒤인 1871년 파리의 노동자들이 봉기해 자신들의 정부를 세웠다. 마르크스는 매우 강력한 정치 팸플릿을 써, 코뮌의 가장 위대한 업적은 노동계급의 자력 해방이라고 주장했다.
노동계급의 운동을 통해 펼쳐질 공산주의는 지금껏 상상할 수 있는 가장 민주적인 사회다. 왜냐하면 공산주의는 민주적 행동을 통해 나타나고 모든 비민주적 측면 ― 소수에 의한 다수의 경제적 착취에서 비롯하는 ― 을 제거할 것이기 때문이다.
민주주의에 대한 영감과 노동계급 자력 해방에 대한 믿음은 마르크스주의에서 하나를 이루는 두 요소이자 마르크스주의의 정수이다. 이것 없이는 제아무리 신중히 만들어진 경제학과 진지한 철학이라 할지라도 열매를 맺지 못하고 시들 것이다.
반란의 정신, 착취에 맞선 계급 전투의 필요성 ― 마르크스는 이것이 바로 자신이 그토록 비난해 마지 않았던 결정론에 대한 해독제라고 봤다.
MARX21
주
- 거대하고 어려운 영역인 자주적 행동, 정당 그리고 둘의 내적 관계 문제에 대한 밑그림이 이미 1845년에 그려진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