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평
《페미니즘의 작은 역사》
여성운동의 역사를 쉽게 알려 주지만 아나키즘의 한계를 보이는 책
이 책은 페미니즘의 역사를 간단히 다룬 만화책이다. 얇은 만화 개론서라 페미니즘 역사의 흐름을 간단히 살펴보는 데 유용하고 또 단숨에 읽을 수 있다. 저자인 독일 태생의 안체 슈룹은 여성의 정치사상사를 주로 연구하고 19세기의 페미니스트적 사회주의자들을 주제로 박사 과정을 마친 언론인이자 정치학자이다. 인류 역사가 남성이 여성을 지배한 역사라는 입장을 수용하는 페미니스트이자 아나키스트이다.
·로마 시대부터 제3물결까지 다룬다. 계급 사회인 고대나 중세에도 여성에 대한 편견과 차별이 존재했지만 페미니즘의 역사를 고대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것은 과도하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여성 차별에 반대하는 의견을 모두 페미니즘이라고 느슨하게 보는 것을 반영한 듯한데, 페미니즘은 여성 차별에 반대하는 일련의 사상과 운동이다. 이렇게 볼 때 페미니즘의 시작은 1789년 프랑스 혁명 등 부르주아 혁명의 산물이다.
이 책은 페미니즘의 역사를 고대 그리스역사
·사상·활동·논쟁들을 소개하고 있어 흥미롭다. 이 책의 저자는 미국과 유럽, 특히 독일의 페미니즘 운동을 두루 살피고 있다. 이 책을 보면 페미니스트들 사이에서 자유연애, 정당, 가사노동, 남성과의 평등 추구냐 차이 인정이냐, 성 주류화(페미니즘 요구의 제도화) 등을 둘러싼 다양한 논쟁이 있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저자는 여성 내부의 차이를 강조하는 한편 계급 차별, 인종 차별, 동성애 차별 등을 함께 다룬다.
이 책은 주로 시대별로 페미니스트들의 주요 주제미국 남북전쟁이 끝난 후에 흑인 남성에게는 투표권이 주어졌지만 흑인과 백인 여성에게는 투표권이 주어지지 않았다. 저자는 이 때 인종차별적인 언행으로 여성 참정권을 옹호한 미국의 부르주아 페미니스트들을 혹독히 비판한다. 또한 19세기 직업 노동, 고전적 결혼 비판, 참정권 등의 쟁점을 두고 부르주아 여성들과 노동계급 여성들 간의 경험 차이도 있었고 주요 관심사도 달랐다는 점도 보여 준다. 이혼법 개혁과 참정권이 상속권과 연관돼 있는 부르주아 여성들에게 특히 중요했다고 설명한다.
저자는 부르주아 혁명 과정에서 등장한 영국의 메리 울스턴크래프트, 프랑스의 올림페 드 구즈 등 비교적 잘 알려진 부르주아 페미니스트들의 사상과 활동을 다룬다. 또, 계급 문제도 함께 제기한 19세기의 초기 사회주의적 페미니스트들도 비중 있게 설명한다.
20세기 초의 참정권 운동인 페미니즘의 제1물결, 1960년대와 1970년대의 제2물결, 1990년대의 제3물결이 등장한 맥락과 흐름도 대체로 재미있고 쉽게 설명한다. 재치 있고 때때로 코믹한 그림은 흥미를 더해 준다.
특히 제2물결을 비중 있게 다루고 있어 당시의 급진적인 여성 운동이 어떠했는지를 알 수 있게 해 준다. 저자는 신좌파 남성 활동가들의 성차별적 언행으로 미국의 ‘자율적 여성 운동’이 시작됐음을 설명하면서 자신의 몸에 대해 스스로 결정할 권리(낙태금지법 폐지), 가정폭력 반대, 가사노동 논쟁 등을 소개하고 있다.
또, 백인 중간계급 중심의 제2물결에 비판적이고 문화와 느슨한 네트워크 등을 강조하는 제3물결도 잘 다루고 있다. 다원주의적인 제3물결과 연관된 반反인종차별주의, 교차성 개념, 퀴어 페미니즘 등도 간단하게 소개하고 있다.
오늘날 한국의 급진 페미니스트들은 자신들의 사상과 실천이 여성 운동을 대표하는 것처럼 말한다. 그러나 저자는 페미니즘이 하나가 아니라 아주 다양하고, 때로는 대립적인 관점들을 포함하고 있다는 점을 잘 보여 준다. 또, 여성 운동의 쟁점이 시대에 따라 변화해 왔다는 점도 알 수 있다.
러시아 혁명
저자는 19세기의 잔느 드르완, 플로라 트리스탄 등 초기 사회주의적 페미니즘이 정치적 불평등 사상을 더 넓은 범위의 사회적이고 물질적인 평등과 연관시킨 것에 주목한다. 예컨대 플로라 트리스탄은 노예제와 계급 지배에 격분했고, 여성을 억누르고 교육에서 제외시키는 법이 프롤레타리아 남성 또한 억압한다고 강조했다고 말한다.
트리스탄은 “노동계급은 스스로 독자적인 행동을 통해서만 해방될 수 있다”고 말했고, 《공산당 선언》보다 5년 전에 《노동자연합》을 써서 노동자들의 동맹을 주장했으며, 여성과 무산자 억압 사이의 연관성을 밝혔다고 칭찬한다.
《노동자연합》이 직종을 가로지르는 노동계급의 단결을 강조하고 계급투쟁을 짧게라도 언급한 것은 장점이다. 당시 공상적 사회주의자들은 사유재산을 위한 가족 폐지, 가사노동의 사회화, 자유결합 등 급진적인 여성 해방을 주장하기도 했다. 하지만 플로라 트리스탄이 염두에 둔 ‘노동자연합’ 구상과 실천은 마르크스가 지향했던 바와는 달랐다.
‘노동자연합’은 자본주의 안에서 대안 공동체를 만들어 교육 사업 등을 통해 노동자들을 계몽하는 일종의 협동조합이었다. 남녀 노동자들에게 회비를 받았지만 그들의 압제자인 귀족, 사용자, 상층 계급의 여성들에게도 재정적 후원을 받았다. 계급투쟁을 통한 노동자들의 의식과 조직의 발전을 추구하기보다 교육을 강조하고 계급 협조주의를 부추겼다. 플로라 트리스탄은 무장봉기를 통한 정부 전복은 민중의 희생만을 강요한다며 반대했다. 이 점에서 마르크스는 이들을 ‘공상적’ 사회주의자라 불렀다.
반면 세계 여성의 날을 제안하고 여성 노동자들을 혁명적 사회주의 운동의 일부로 끌어들였던 독일의 마르크스주의자인 클라라 체트킨은 비중 있게 다루지 않는다. 부르주아 페미니스트들과 아나키스트 페미니스들은 많이 다룬 반면, 클라라 체트킨은 오직 한 컷만 나온다. 저자는 부르주아 여성 운동을 비판한 클라라 체트킨의 말을 인용하지만, 다양한 여성 운동 단체들이 여성의 이익을 대변하기 위해 서로 연합을 맺는 사실에 주안점을 둔다.
그러나 클라라 체트킨은 파업에 반대하고 계급 협력을 설파한 부르주아 페미니즘에 비타협적이었고 노동계급 여성들이 부르주아 페미니스트들과 동맹할 것이 아니라 노동계급 남성들과 단결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체트킨은 여성 참정권 획득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계급의식 향상을 위한 노동계급의 이익과 단결이라는 관점에서 여성 참정권 투쟁을 벌였다. 또 노동계급 여성은 투쟁을 부르주아 페미니스트들처럼 선거권 요구에 국한해서는 안 되고 일할 권리, 동일임금, 유급 출산휴가, 무료 보육시설, 여성 교육 등을 위해서도 싸워야 한다고 말했다.
한편 저자는 여성의 완전한 참정권과 이혼의 자유, 동일노동 동일임금, 낙태와 동성애 합법화, 양육과 가사노동 사회화 등 매우 급진적인 여성 해방 조처를 도입한 러시아 혁명을 전혀 다루지 않는다. 심지어 저자는 20세기에 여성 참정권을 부여한 주요 나라들을 죽 나열하면서 러시아만 쏙 빼놓았다.
1918년에 러시아가 완전한 여성 참정권을 도입할 당시 참정권이 모든 여성에게까지 보장된 나라는 노르웨이와 핀란드밖에 없었다. 러시아 혁명 전부터 마르크스주의자로서 여성 노동자 조직화에 심혈을 기울였고 혁명 뒤 볼셰비키가 만든 제노텔(여성부) 의장으로 활동하면서 여성 해방의 구체적 과제를 실행하는 데 기여한 여성 혁명가 알렉산드라 콜론타이도 이 책에 등장하지 않는다. 아마도 저자가 이 책에서 러시아 혁명을 제외한 이유는 노동자 국가를 부정하는 아나키즘 정치 때문일 것이다.
보호법
이 책은 여성들 사이에도 계급적 차이가 있다고 얘기하지만 부르주아 페미니스트 단체를 우호적으로 말하면서 계급적 차이를 흐리거나 노동계급의 관점을 부각하지 않고 여성들의 연대를 얘기하기도 한다.
예를 들어, 18세기 주요 부르주아 페미니스트들은 1789년 프랑스 혁명 때 베르사유 궁전을 향해 행진한 가난한 여성들을 경멸한 계몽주의자들이었는데, 저자는 이 사실은 언급하지 않는다. 올림페 드 구즈가 단두대에서 처형당했을 때 노동계급 여성들은 박수갈채를 보냈다.
저자는 19세기 영국의 여성노동보호법이 특정 산업에서 여성 노동을 금지했던 부정적인 측면만을 일면적으로 설명하면서 당시 여성노동보호법을 반대하고 여성 고용을 촉진한 영국의 여성고용촉진협회를 우호적으로 설명한다.
그러나 여성노동보호법은 우리가 지지할 수 없는 특정 산업의 여성 노동 금지뿐 아니라 하루 10시간 노동이라는 노동시간 단축도 포함하고 있었다. 그래서 영국의 리즈에서 여성 노동자들은 1874년 공장법(아동과 여성의 노동시간을 1일 10시간으로 단축) 지지 파업을 벌였고, 하루에 14~16시간을 일하던 세탁부 여성 노동자들의 97.7퍼센트가 1891년 노동시간규제법을 지지해 대규모 시위를 벌였다.
영국의 여성고용촉진협회는 여성 고용을 지지했지만 상층 부르주아 여성들이 만든 기구로, 여성노동보호법 반대를 위해 광산소유주와 손잡는 데 주저함이 없었다. 여성 작업장으로 인정되는 가내산업과 가족노동, 상점 등에서 노동시간 규제 삭제를 위해 압력을 가했고, 게다가 여성들이 빠른 시간 안에 일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며 모성보호법(출산 4주 뒤에 일하는)도 반대했다. 여성 노동자들에게 열악한 노동조건을 감수하라며 노동조건 향상을 막았고 자본가들과 연대해 노동 착취를 은폐했다. 여성 노동자들이 이 단체를 증오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저자가 이런 기구를 호의적으로 묘사한 것은 노동계급적 관점이 없음을 드러내는 것이다.
한편, 저자는 제1인터내셔널의 첫 번째 회의가 여성 노동 금지에 찬성했다며 반여성적인 것처럼 서술하지만 제1인터내셔널은 단일한 입장으로 통일돼 있지 않았다. 마르크스는 원칙적으로 여성들이 노동자가 되는 것을 적극 찬성하면서 여성 노동에 반대한 프루동주의자들에 맞서 논쟁했다. 저자는 뒤에 가서야 제1인터내셔널이 여성 노동에 대한 온건한 입장으로 돌아섰다고 말하는데, 그것은 마르크스의 논쟁 덕분이었다.
잠재력
이 책에는 ‘평등 대신 자유’라는 장이 있다. 이 책에서 드러나지는 않지만 저자의 인터넷 블로그를 참고하면 이 장이 저자가 지지하는 페미니즘임을 알 수 있다. 저자는 이탈리아의 ‘비본질적 차이 페미니즘’의 선구자인 철학자 공동체 디오티마와 이 공동체 창립자 루이자 무라로를 지지한다.
루이자 무라로는 정당, 좌파, 국가가 페미니즘에 평등 사상을 주입시켰다며 성주류화에 비판적이고, 각각의 여성들이 서로 깊고 강한 유대 관계를 맺는 것을 기반으로 한 여성의 자유가 대안이라고 말한다. 그러면서 개인의 의식 변화를 강조한다. 저자는 개혁주의에 비판적이지만 노동계급의 중요성을 무시하고 개인주의를 강조하는 아나키즘 정치의 약점을 갖고 있다.
개인의 자유를 강조하는 아나키즘 정치는 착취와 차별의 근본 원인을 제대로 설명하지도 그 대안을 효과적으로 제시하지도 못한다. 여성차별은 개인적인 남녀관계가 아니라 계급 사회에서 비롯하는 것이므로 집단적 계급투쟁으로 사회를 바꿔야만 진정한 변화를 이룰 수 있다. 여성 개인의 자유와 의식 변화는 노동계급의 집단적 투쟁과 이익 속에서 추구할 때 효과적인 것이지, 그 자체로만은 여성 해방을 이루는 방식이 될 수 없다. 남성의 여성 차별적 의식도 투쟁 과정에서 바뀔 수 있다. 그런 점에서 아나키즘이 권위주의적이라고 비판하는 노동자 국가와 혁명 정당은 노동계급의 이익을 일관되게 옹호하고 혁명을 확산시키는 데 필요하고 또 정당한 것이다.
《페미니즘의 작은 역사》는 만화여서 당시의 역사적 배경과 논쟁점 등을 상세하고 구체적으로 알기는 어렵다. 그래서 이 책을 읽으면 여러 물음과 궁금증이 생기고 페미니즘의 역사를 더 탐구하고 싶은 욕구가 생길 것이다. 1물결 시기의 페미니즘은 주디스 오어의 《마르크스주의와 여성해방》을, 2물결 시기의 페미니즘은 주디스 오어의 《마르크스주의와 여성해방》과 린지 저먼의 《여성과 마르크스주의》를 읽길 권한다. 러시아 혁명은 토니 클리프의 《여성해방과 혁명》을 참조하시라. 남녀 노동계급의 잠재력과 투쟁적 관점에서 페미니즘의 역사를 깊이 있게 알 수 있다.
MARX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