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호를 내며
이번 호에는 모두 7편의 글을 실었다.
‘유럽 우익의 위험’은 유럽 곳곳에서 극우가 선거에 출마해 꽤나 큰 성공을 거두는 일이 반복되고 있고, 이런 극우의 부상은 기득권층의 인종차별적 편견 유포와 밀접한 관계가 있음을 지적한다. 또한 이 글의 후반부는 독일, 오스트리아, 그리스, 폴란드 극우의 동향과 좌파의 대응에 관해 각국 사회주의자들이 보내온 글이 수록돼 있다.
중동에서 벌어지는 갈등의 궁극적 원인이 석유라는 점과 중동에서 이스라엘이 하는 구실 그리고 아랍 민족주의와 공산당의 정치적 한계를 지적한다. 이 글은 1967년에 작성됐음에도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의미한 가치가 있다. 도널드 트럼프의 ‘예루살렘 선언’이 왜 아랍인들을 분노케 하는지를 알게 해 주는 글이다.
‘중동에서의 반제국주의 투쟁’은‘마르크스주의와 정신적 고통’은 최근 영국에서 출판된 《마음의 정치학: 마르크스주의와 정신적 고통》의 저자 이언 퍼거슨의 인터뷰를 번역한 것이다. 퍼거슨은 자본주의에서 우울증과 불안이 만연한 이유를 마르크스주의 관점에서 설명한다. 오늘날 주류 심리학과 정신의학은 정신적 고통의 원인을 대개 개인(이나 그의 뇌나 유전자나 신경전달물질, 또는 그의 일부 경험)의 문제로 환원하는데, 이를 잘 반박하고 있다.
‘정신병과 자본주의’는 정신의학이 사회 통제의 필요가 있는 자본주의, 돈 내는 고객이 필요한 정신과 의사들의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해 개발된 가짜 과학이라고 지적한다. 정신의학자들이 말하는 정신 장애라는 것이 생물학적 표지가 없기 때문에 이 사회를 지배하는 자들이 자신들의 이해관계에 기초해 무엇이 정상이고 무엇이 일탈인지를 결정한다는 점을 날카롭게 비판하고 있다.
‘낙동강 오리알 신세인 1917년 10월혁명 ― 현재적 의미는 무엇인가?’는 작년이 러시아 10월혁명 100주년이었음에도 축하하는 분위기가 형성되지 않았던 이유를 설명하면서 볼셰비키의 경험에 대한 온갖 왜곡과 아전인수 격 해석이 있지만, 혁명적 마르크스주의 전통을 계승하려는 사람들에게서 레닌과 볼셰비키는 핵심적인 준거점으로 남아 있다는 점을 역설한다.
‘러시아 10월혁명 100주년 기념 저작들에 대한 비판적 평가’는 작년 한국에서 출판된 러시아 10월혁명을 기념하는 책들에 대한 비판적 서평이다. 여러 필자와 논자들에게서 나타나는 공통점은 ‘전시 공산주의’ 때부터 혁명의 일탈이 시작됐고 결국은 레닌이 스탈린을 낳았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그들은 레닌과 공산당이 ‘전시 공산주의’를 실시할 수밖에 없었던 조건에 대해서는 전혀 고려하지 않는다. 이 글은 학계에서 10월혁명에 대한 논의가 크게 우경화했음을 보여 준다.
‘4월 테제를 통해서 본 레닌의 연속혁명론’은 독자 투고글이다. 레닌이 부르주아 임시정부를 타도하고 소비에트가 권력을 장악해야 한다는 슬로건을 제시한 4월 테제를 전후로 레닌의 전술 변경이 이뤄졌다는 점과 레닌이 이런 전술 변경을 하게 된 배경으로 제국주의에 대한 탐구가 큰 역할을 했다는 점을 설명한다.
문재인 정부의 등장과 더불어 부상한 개혁주의에 대해 예각 있는 토론과 논쟁이 필요할 시기다. 이런 토론을 위해 《마르크스21》에 실린 글들이 독자들에게 도움을 줄 수 있을 것이다. 일부 독자들은 《마르크스21》이 나올 때마다 주요 글들을 읽으면서 활동의 지침으로 삼고 있는 듯하다. 이런 경험이 확산됐으면 하는 바람이다.
편집팀을 대표해 이정구
MARX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