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 정세 이해하기
중동에서의 반제국주의 투쟁
이 글은 1967년에 작성돼 영국에서 소책자로 출판됐다가 1990년 10월 《소셜리스트 워커 리뷰》 Socialist Worker Review에 다시 실렸다. 필자인 토니 클리프는 팔레스타인에서 태어난 혁명적 사회주의자이다. 정부 탄압을 피해 영국으로 피신한 클리프는 평생 사회주의 정치 운동을 하며 영국 사회주의노동자당SWP을 건설했다. 이 글은 50여 년 전에 발표된 글이어서 낡은 부분도 있지만, 이스라엘의 탄생과 본질, 팔레스타인인과 아랍인들의 반제국주의 투쟁과 그 약점들 등 현재의 중동 상황과 투쟁을 이해할 기초를 세우는 데 도움을 준다. [ ] 안의 말은 독자의 이해를 돕고자 옮긴이가 삽입한 것이다.
중동에서 제국주의의 핵심 특징은 석유다
産 석유 수탈은 놀라울 정도로 수익성 높은 사업이다. 미국산 원유原油 생산비는 1배럴당 1달러 63센트인데 반해, 중동산 원유 생산비는 1배럴당 15센트밖에 안 된다. 1948년부터 1960년까지 중동산 석유 생산의 공식 이윤율은 평균 67퍼센트였다. 이에 견줘 베네수엘라산 석유 생산의 이윤율은 21퍼센트, 미국산 석유 생산의 이윤율은 10.8퍼센트밖에 안 됐다.
중동산제2차세계대전 전에는 영국이 이란 석유의 100퍼센트, 이라크 석유의 47.5퍼센트를 통제했다. 미국은 이라크 석유의 23.75퍼센트만을 통제하고 있었다.(프랑스도 같은 비중을 차지했다.) 그 뒤 상황이 급변해서, 1959년에는 중동산 석유 전체에서 미국이 통제하는 몫은 50퍼센트로 뛴 반면 영국의 몫은 18퍼센트로 하락했다.(프랑스는 5퍼센트, 네덜란드는 3퍼센트, 아랍 정부들을 포함한 기타 국가는 24퍼센트를 차지했다.)
석유 생산은 중동 나라들의 발전에 그다지 유익한 영향을 못 미쳤다. 봉건제와 제국주의가 초래한 경제·사회·정치 발전의 왜곡이 더 두드러졌다.
석유 관련 산업의 고용 효과는 매우 적다. 이란과 이라크에서는 고용인구의 단지 1퍼센트만이 석유 산업에 종사하여 생계를 유지하고 있다. 사우디아라비아에서도 그 비율은 2퍼센트에 지나지 않는다. 중동 전체를 통틀어 석유 산업 고용인구는 이집트 단 한 나라의 섬유 산업 종사자보다도 더 적다.
석유 자원이 가장 풍부한 국가는 가장 구식의 사회체제 하에 있다. 중동의 국경들은 제국주의 강국들이 그어 놓은 것이다. 지금까지 사회적·정치적으로 가장 선진적인 주요 인구 중심지들을 구분하기 위해, 중동의 주요 천연자원 매장 지역을 구분하기 위해서였다.
시온주의
유대인들은 제정 러시아 시대의 유대인 학살(포그롬), 동유럽에서 자행된 박해, 나치의 유대인 대학살(홀로코스트) 같은 일련의 인간적 비극을 피해 팔레스타인으로 왔다. 유대인들이 팔레스타인에 도착했을 때 그곳에는 아랍인들이 살고 있었다. 유대인들의 이주 동기가 무엇이었든 간에, 시온주의 정착민과 아랍인 사이에서 갈등이 증가하는 것은 피할 수 없었다.
[유대인] 노동자가 어떻게 일자리를 구할 수 있었을까? 그들이 일자리를 구할 유일한 길은 유대인 고용주가 아랍 노동자를 고용하지 못하도록 막는 것이었다. 이스라엘 국가 창립 직전 텔아비브에 거주하던 인구는 30만 명 정도였는데, 그중에는 아랍인 노동자는 물론이고 아랍인 거주자가 단 한 명도 없었다.
아랍인 농민들은 노동력을 제공했고, 농산물도 매우 낮은 가격으로 생산했다. 이런 조건에서 유럽 출신시온주의자들은 아랍인 농민(펠라)들이 유대인 이용 시장에서 농산물을 팔지 못하게 방해했다. 그리고 펠라가 굶주림을 못 견디고 감히 이 조처에 대들면 두들겨 맞았다.
Hashomer Hatzair, ‘마팜’의 전신 같은 ‘극좌’ 정당조차, 시온주의자들의 아랍인 노동자·농민 배척 운동을 반대하지 않았다.
시온주의 노조연맹인 ‘히스타드루트’의 조합원은 누구나 두 종류의 특별 회비를 의무적으로 납부했다. 하나는 “유대인 노동자를 위한 것”으로서, 아랍인 노동자 고용을 저지하는 활동을 조직하는 데 쓰이는 기금이었다. 다른 하나는 “유대인 농산물 보호를 위한 것’으로서, 아랍인 농산물 불매운동 조직 기금으로 쓰였다. 그 어떤 시온주의 정당도, 심지어 ‘마르크스주의적 시온주의 청년 유대인 운동’[유대인] 노동자와 농민은 그 누구도 경제적으로 생존하지 못했을 것이다.
아랍인 배척 운동은 시온주의의 본질에 내재한 것이었다. 아랍인 배척 운동이 없었더라면 유럽 출신시온주의는 토착 아랍인 주민과 적대하는 동시에, 유력한 제국주의 열강에 이바지해야 했다. 시온주의 정치 운동의 창시자 테오도르 헤르츨은 주로 오스만투르크 제국의 술탄과 독일 황제의 환심을 사려 했다. 제1차세계대전 이후 시온주의는 영국 제국주의로 기울었다가, 제2차세계대전 이후에는 태도를 휙 바꿔서 미국 제국주의에 찰싹 달라붙었다.
1920년대와 1930년대의 주요 시온주의 군사조직이었던 하가나는 영국 점령군과 경찰에 부역했다.
後身이다.
‘경찰예비대’가 1936년 봄에 창설됐다. 하가나의 주요 부분과 ‘에첼’(또 다른 시온주의 군사조직)의 일부가 합쳐져 합법적 군대로 탄생한 것이었다. 1939년 봄 이 기구의 병력은 약 2만 1000명이었다. 두말할 것 없이 아랍인의 입대는 결코 허용되지 않았다. 현재 이스라엘군은 예전에 영국이 관리한 ‘경찰예비대’의 본질을 이어받은 후신이스라엘인들은 식민 지배를 받는 민족일까? 이스라엘 경제는 서방 제국주의의 착취를 받는 후진 경제가 아니다. 1949년부터 1964년까지 60억 달러에 달하는 돈이 독일의 전쟁배상금, 미국 정부의 경제원조, 미국을 비롯한 세계 각지의 유대인들이 보낸 송금으로 이스라엘에 유입됐다. 이 액수는 이스라엘인 1인당 3000달러, 즉 1000파운드 이상의 거금이었다. 영국 제국의 절정기에조차, 영국이 식민지로부터 얻은 투자 순이익은 영국인 1인당 10파운드를 넘지 않았다!
耕者有田의 회복 ─ 은 이스라엘이 바라는 것이 결코 아니었다.
이스라엘이 급진적 토지개혁에 관심이 있을까? 물론 아니다. 시온주의는 펠라를 제거해 버렸다. 농업혁명 ─ 경자유전이스라엘이 아랍 민족이 단일 국가로 통일하는 것에 관심이 있을까? 물론 아니다. 이스라엘은 제국주의에 억압당하는 식민지가 아니라, 시온주의 정착민들의 요새이고 제국주의의 발판이다. 매우 야만적인 박해와 학살을 당한 사람들 일부가 스스로 국수주의적·군국주의적 열기에 도취돼, 제국주의가 아랍인 대중을 예속하는 데 쓰이는 맹목적 도구가 됐다는 사실은 비극이 아닐 수 없다.
현존하는 사회 질서는 유대인이 겪은 재앙의 원인인 동시에 유대인의 재앙이 반동적·억압적 목적에 이용되는 원인이기도 하다. 시온주의는 유대인을 고통에서 구원하기는커녕, 제국주의와 아랍인 대중의 민족 해방·사회해방 투쟁 사이의 교전지대라는 새로운 위험에 몰아넣었다.
이스라엘의 유대인들은 계급으로 분열돼 있고, 그래서 이스라엘은 계급투쟁으로 분열돼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스라엘 노동자 상당수가 자동으로 아랍인의 반제국주의 투쟁에 동참하거나 함께할 태세가 돼 있다는 뜻은 아니다.
남아프리카공화국의 백인 노동자들은 여러 차례 파업을 벌였다. 전투기까지 동원한 얀 스뮈츠의 탄압으로 진압된 1922년 백인 광원 파업만 기억해도 충분하다. 그러나 백인 노동자들이 차별에 맞선 흑인 노동자들의 투쟁에 동참한 것은 결코 아니었다.
1945년 알제리에서는 100만 명에 이르는 유럽 출신 정착민의 다수가 공산당을 지지했다. 그러나 아랍인들의 항쟁이 벌어지자 상황이 바뀌었다. 한 설명은 다음과 같았다.
알제리 거주 유럽인들은 사회적 지위가 추락하면 할수록 무슬림 대중이 미숙련 일자리로 밀고 들어와 가장 가난한 유럽인들의 생활수준조차 떨어뜨릴 것 같다는 두려움이 더 커졌다.
유럽에서는 유대인이 희생자이지만 중동에서는 아랍인들이 희생자이다. 이스라엘은 오히려 특권을 누리는 억압자이고 제국주의의 동맹자이다.
아랍민족주의 운동
아랍 나라들의 지배자들은 대체로 두 집단으로 갈려 있다. 첫째는 봉건적 국왕과 왕족들이다. 사우디아라비아의 파이살 왕, 요르단의 후세인 왕, 쿠웨이트의 샤이크, 페르시아만의 여러 소小군주들이 그 사례이다. 그들은 이란과 더불어 제국주의의 신뢰할 만한 동맹자들이다.
사회적·정치적 체제가 비교적 진보적인 아랍 나라들로는 이집트, 시리아, 알제리, 이라크 등이 있다.
물론 두 집단 사이에 만리장성 같은 장벽이 있지는 않지만, 실질적 차이는 있다. 첫째 집단은 (이스라엘과 함께) 미국과 영국한테서 무기를 입수할 수 있다. 하지만 둘째 집단은 그럴 수 없다.
아랍의 노동계급 중 가장 선진적인 부위인 예멘 아덴항 노동자들이 파이살 왕이나 자국 종교 지도자의 사진이 아니라 나세르의 사진을 가지고 다니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물론 그들이 마르크스, 레닌, 트로츠키의 사진을 가지고 다닌다면 더 좋을 테지만 말이다.)
나세르가 아무리 일관되지 못하고 담대하지 못했을지라도, 제국주의와 봉건적 질서에 반대하는 조처를 어느 정도 시행했다. 나세르는 1956년 수에즈 운하를 국유화했다. 1960년 2월에는 이집트은행과 내셔널은행을 국유화했다.
市營化됐다. 은행과 보험사가 모두 국유화됐고, 상공업체 약 300곳이 전부 또는 부분적으로 국유화됐다.
같은 해 6월에는 언론사들이 국유화됐고, 카이로 시의 버스 회사들이 시영화1961년 10월에서 1962년 2월 사이에는 이집트 600대 가문의 재산이 몰수됐다.
Dutch-British Lever Brothers, 부분 국유화돼 있던 해운회사 14곳, 육상 운송회사 29곳이 있었다. 1964년 4월에는 쉘-BP의 투자 지분이 국유화됐다.
1963년 8월에도 국유화 조처가 이어졌다. 기업 300곳이 그 영향을 받았다. 그중에는 ‘더치-브리티시 레버 브라더스’1958년에는 가구당 토지 소유를 300에이커로 제한하는 토지 보유 상한제가 법제화됐다. 1961년 6월에는 100에이커로 더 강화됐다. 그리하여 1943년에는 토지를 5에이커 미만으로 소유한 농민이 전체 경작지의 33.2퍼센트를 소유했는데, 1964년에는 54.7퍼센트를 소유하게 됐다. 하지만 이 토지개혁은 철저한 것은 아니었다(거대 지주를 없애기는 했지만).
여전히 농민 가정 200만 호는 소유한 토지가 1에이커 미만이고, 100에이커를 소유한 지주는 많다. 또, 법망을 교묘히 빠져 나가 그 이상을 소유한 대지주도 있다. 무토지 농민의 수는 전혀 줄지 않았고, 1952년 이후로는 오히려 증가했다.
시리아의 바트당 정권은 토지개혁 분야에서는 나세르 정권보다 더 철저했다. 하지만 나세르도 바트당도 혁명적으로 되지 못했고, 중간계급적 사회 기반을 뛰어넘어 성장하지도 못했다. 그 둘의 사회적 기반은 군장교, 공무원, 교사, 상인과 성공한 수공업자의 아들, 부농이나 소지주였다.
아랍 사회에서 이 집단은 한편으로는 봉건 지주와 대부르주아지, 다른 한편으로는 노동자와 농민 사이에 서 있다. 하층 중간계급은 전자도 후자도 결코 아니다. 1958년 도시의 계급 분화는 아래의 표와 같다.
전체 인구에서의 비중 | 일인당 상대적 소득 (산업 노동자 =100) | |
---|---|---|
부르주아지와 귀족 | 3 | 1,391 |
하층 중간계급 | ||
(a) 중간 관료, 전문직 | 8 | 220 |
(b) 장인(피고용인 포함) | 9 | 202 |
(c) 하층 관료 | 14 | 174 |
프롤레타리아트 | ||
(a) 산업 및 운송 노동자 | 10 | 100 |
(b) 수공예 노동자 | 5 | 66 |
룸펜 프롤레타리아트 | ||
(a) 미숙련 정규직 | 2 | 44 |
(b) 가사 도우미 | 12 | 35 |
(c) 영속적 실업자 | 37 | 0 |
소위 “아랍 사회주의”의 주된 특징은 이런 그들의 모호한 지위에서 비롯했다.
나세르와 바트당은 봉건제(지주)와 제국주의와 독점자본주의(대자본가)를 비판한다. 부르주아 의회민주주의를 사기극이라고 보며 배격한다. 지주와 대자본가의 권력을 분쇄하기 위해서는 철저한 변화가 필요하다고 본다.
그들은 기간산업의 국유화를 옹호하고 계획경제에 환호한다. 하지만 나세르는 노동자 계급이 행위 주체가 되는 것은 반대하므로, 그의 국유화와 계획경제는 사회주의와 닮은 구석이라고는 하나도 없다.
국유 기업과 계획경제를 대하는 중간계급의 태도는 매우 양면적이다. 국가 관료의 일부로서 그들은 국유 기업의 급속한 성장에 관심이 있다. 하지만 소자산가의 아들이자 형제이자 사촌으로서 그들은 민간부문이 국유부문을 이용해 득을 보도록 허용하기를 바란다. 그리하여 이집트 경제는 국가자본주의의 관료적 타성과 사적 자본주의의 투기적 운영이라는 두 가지 문제에 시달린다.
나세르의 사회적 위치 때문에, 나세르의 청년장교단은 쿠데타를 벌이기 이전에 존재하고 파룩 왕 시절부터 내려온 옛 관료 체제를 청산할 수 없었다. 그 위에 새로운 관료 체제가 형성됐다.
United Arab Republic: UAR이 해체됐다.(이집트와 시리아 사이의 통일 시도는 시리아가 연합 내 자신의 지위가 부차적인 것에 반대함으로써 단명으로 끝났다.) 또, 나세르는 이라크의 카심과도 심각한 불화를 겪었다.
나세르주의는 이처럼 대중 속에 내린 뿌리가 얕아서, 파벌 간 다툼에 매우 취약했다. 그래서 1961년에 아랍연합공화국[라고 불리는 봉건적 국왕인] 요르단의 후세인 왕과 사우디아라비아의 파이살 왕을 명예롭지 못하게 포용하는 것 사이를 오락가락했다. 또한 나세르주의는 “무슬림 형제단”에 대한 공격(그 지도자들에 대한 처형을 포함해) 과 이슬람에 대한 열정 사이를 오락가락했다.
나세르주의는 그 사회적 기초 때문에 공화주의에 대한 지지와, “우리의 아랍인 형제”알제리의 벤 벨라와 이라크 카심의 몰락에서 배울 수 있는 교훈 하나는 후진국의 보나파르트 체제 ― 노동계급·농민과 제국주의 사이에서 균형을 유지하려 애쓴다 ― 가 매우 불안정하다는 것이다.
油田과 공장을 장악해야 하고, 농민이 혁명적 토지개혁을 수행해야 한다.
반제국주의적 혁명 투쟁이 진정으로 성공하려면 나세르주의로는 부족하다. 나세르주의는 대중의 자주적 행동과 너무나 동떨어져 있기 때문이다. 대중의 자주적 투쟁이 성공하려면 민족 해방 혁명이 사회주의 혁명과 융합해야 하고, 노동자가 유전공산당
중동 상황에서 가장 꾀죄죄한 구실을 한 것은 공산당들일 것이다. 공산당들은 나세르와 바트당, 그 전에는 카심의 보나파르트적 정권으로부터 독립성을 유지하지 않았다. 오히려 완전히 투항했다.
소련 노선을 따르는 공산당들은 “제3세계”에서는 사회주의로의 평화적 이행이 가능하다고 봤다. 부르주아 국가기구를 분쇄해야 한다고 한 마르크스와 레닌의 분석을 거부한 것이다. 공산당들은 “민족 단결” 노선을 따랐다. 즉, 제국주의에 맞선 민족 투쟁과 사회주의를 위한 투쟁을 별개로 본 것이다.
시리아 공산당의 서기장 칼레드 박다시는 수십 년 동안 중동에서 가장 중요한 공산당의 지도자였다.
그는 1944년 아랍 공산당들의 전반적 정책의 핵심 기조를 밝히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민족 해방의 문제는 그 민족 전체의 문제라는 점은 자명하며, 그러므로 민족 전체의 단결을 실현하자는 위대한 슬로건을 민족 전체가 따르는 것은 별다른 토론이 없어도 가능한 일이다. 민족 해방은 그 민족 지주들의 이해관계가 걸린 문제다. 마찬가지로 중소상인과 대상인의 이해관계가 걸린 문제이기도 하다.
그리고,
민족 해방을 위해 충심으로 투쟁하는 민족 자본가들에 대한 우리의 감사와 존경은 민족 해방을 위해 충심으로 투쟁하는 민족 노동자들에 대한 우리의 감사와 존경에 뒤지지 않는다.
그는 아주 태연하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시리아 공산당과 레바논 공산당의 당대회가 채택한 우리의 ‘민족 강령’을 읽은 사람이라면, 그 문서가 민족 사회주의를 전혀 언급하지 않았을 알 것이다. 그 어떤 표현이나 요구에도 사회주의적 색채는 없다.
赤旗와 인터내셔널가歌가 아닌 것을 국기國旗와 국가國歌로 채택했다.
시리아 공산당과 레바논 공산당은 이 노선에 따라 적기칼레드 박다시는 지주들을 안심시켰다.
의회에서 우리는 지주들의 부동산과 토지를 몰수하라고 요구하지 않고 있으며,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오히려 그와 반대로 우리는 대규모 관개 기업을 설립하고 비료와 현대적 기계를 손쉽게 수입할 수 있게 해 달라는 지주들의 요구를 돕고 싶다. … 그 대신에 우리가 요구하는 것은 오로지 농민(펠라)에게 자비를 베풀라는 것이다. 농민이 빈곤과 문맹에서 벗어나도록, 촌락에 지식과 보건이 흘러 넘치도록 해 달라는 것뿐이다. … 이것들이 우리의 경제적 요구이다. 이를 우리의 사회적 요구라고 불러도 무방하다. 이는 민주적이고 매우 온건한 요구다.
우리가 요구하는 것은 오로지 … 모두가 수긍할 만큼 필수적인 민주적 개혁을 시행하는 것이다. 민족 자본과 민족 기업을 몰수하자는 것은 우리 강령의 요구가 아니며,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민족 자본과 민족 기업 소유주들에게 약속한다. 우리는 민족 기업가들을 시기하거나 증오하지 않을 것이다. 오히려 그 반대로 그들의 진보와 번영을 바란다. 우리가 요구하는 것은 오로지 우리 민족 노동자들의 처지 개선이고, 정의와 민족 단결의 기초 위에 사용자와 노동자의 관계를 규정할 민주적 노동법의 실현이다.
이 노선에 따라 시리아 공산당은 바트당에 굽실거렸다. 이라크 공산당은 카심 장군을 무비판적으로 지지했다. 하지만 1959년 카심은 공산당을 탄압했다. 카심의 후임자 아레프 장군은 많은 공산당원을 학살했고, 공산당원을 비롯한 많은 사람들을 투옥하고 고문했다.
이와 똑같은 기회주의 정책 탓에 이집트 공산당은 분열하고 동요했다. 나세르의 “사회주의 연합”에 가입했던 가장 중요한 공산당 분파들은 결국 해산했다.
1967년 전쟁
[예멘의] 아덴에서 반제국주의 투쟁이 고조돼 왔다.
이스라엘과 주변 아랍국들 사이에 벌어진 최근 전쟁은 연속해서 일어난 예시적 사건들을 뒤이어 일어난 것이다.예멘의 이 투쟁은 종교 지도자에 대항해 일어난 혁명적 투쟁과 더불어, 인접국 사우디아라비아의 파이살 국왕을 위협했다. 게다가 시리아와 ‘이라크 석유회사’(중동 여러 곳에서 영업하고 있는 서방 석유기업들의 카르텔) 사이에 분쟁이 불거졌다.
油井을 국유화한 이후, ‘이라크 석유회사’는 1966년 말에 또 한번 타격을 입었다. 시리아가 자국 영토를 지나는 송유관 사용료로 ‘이라크 석유회사’가 지불하는 금액을 46퍼센트 인상(하고 징수)했다.
1964년 12월 시리아가 자국 유정게다가 시리아는 원유 운반비를 1톤당 1실링 1펜스에서 2실링로 올리고 싶어 했다. ‘이라크 석유회사’는 1실링 7펜스까지만 올려 줄 용의가 있었다. 합의가 이뤄지는 듯했다. 시리아는 1955년 합의에 기초해 납부된 대금이 잘못 계산된 것이라며, 그 때문에 자국이 1억 1000만 시리아파운드의 손해를 봤으니 이를 지불하라고 주장했다.
협상 과정에서 시리아 당국은 1956~1965년의 손실액을 4000만 시리아파운드로 낮춰 요구했다. 하지만 ‘이라크 석유회사’는 앞으로 지불할 비용 계산에는 시리아의 요구에 동의하지만 밀렸다는 사용료 지불에 대한 논의는 단호히 거부했다. 그러자 시리아 정부는 송유관을 막아 버렸다.
이에 대응해 미국과 영국은 사우디아라비아에 무기를 대거 공급해 줬다. 5월 15일 이란, 사우디아라비아, 쿠웨이트, 요르단이 이슬람동맹을 결성했다. 이스라엘 총리는 자국에 대한 공격이 지속되면 이스라엘군이 시리아 수도 다마스쿠스로 진격할 것이라고 선언했다.
그 다음에 끔찍한 비극이라고 부를 일이 뒤따랐다. 이집트군이 시나이반도로 집결했고, 아랍 국가들 ― 공화국이든 왕정 국가든 가릴 것 없이 ― 은 모두 ‘지하드’(성전) 수행을 선언했다. 그 다음은 역사가 말하는 대로다.
이스라엘의 승리로부터 누가 득을 봤을까? 무엇보다 서방 제국주의이다.
〈데일리 텔레그래프〉는 ‘이스라엘의 승리’라는 제목의 기사에서 아랍 국가들의 패배로부터 왜 서방이 득을 봤는지를 분명하게 서술했다.
이스라엘의 놀라운 승리의 결과로 중동의 힘의 균형 전체가 상당히 바뀌었다. … 대체로 서방은 이스라엘에 크게 감사할 것이 틀림없다. … 나세르 대통령은 오랫동안 서방과 세계 평화에 위험한 존재였다. 하지만 이제는 아니다.
〈선데이 텔레그래프〉의 페리그린 워스쏜 기자는 ‘문명 세력의 승리’라는 제목의 시적으로 쓴 기사에서 다음과 같이 웅변했다.
지난 주, 압도적 규모의 미개인들에게 포위돼 있던 한 조그마한 서방 공동체가 어떻게 하면 힘들이지 않고도 오늘날 아랍인들에게 자신의 의지를 관철시킬 수 있는지를 잘 보여 줬다. 이는 최초의 백인들이 제국의 전성기에 아프리카-아시아 원주민에게 한 일과 같은 것이었다.
런던 금융가는 이에 호응했다. 스털링화가 오랫동안 강세를 유지했다. 〈이코노미스트〉가 상황을 잘 요약했다. “이스라엘의 신속한 승리가 파운드화를 구했다.”
진정한 길
식민지 민중의 반제국주의 반란을 전심전력으로 지지하는 사람들만이 그 피억압 민족 운동 지도자들의 정책과 전술을 비판할 자격이 있다. 나세르가 이끈 아랍 민족 운동을 혹독히 비판하는 것은 완전히 옳다.
NLF이 대중적 게릴라 부대에 기댄 것, 미국 군대와 그 부역자들을 계속 괴롭힌 것은 절대적으로 잘한 일이었다.
어떤 반제국주의 해방 운동이든 그것의 힘은 노동자와 농민 대중에게서 나온다. 한편으로는 대중의 자주적 활동으로부터, 다른 한편으로는 제국주의 사슬의 가장 약한 고리를 올바로 간파하는 것으로부터 나온다. 그러므로 베트남 민족해방전선아랍 반제국주의 운동의 잠재력은 노동자와 농민 대중에 있다. 그들의 공격 표적은 유전과 송유관과 정유공장이어야 한다. 농민은 혁명적 토지개혁을 수행함으로써 게릴라 전쟁의 근거지를 창출해야 한다. 1967년 나세르가 이스라엘에 맞서 벌인 전쟁은 베트남 민족해방전선의 정책이나 전술에 정반대되는 것이었다.
이스라엘은 현대적이고 특혜를 누리는 국가이고, 베트남보다 훨씬 더 강력한 제국주의의 요새다. 게다가 이스라엘 반대 운동은 아주 쉽게 ‘지하드’(성전)로 타락하곤 하는데, 지하드에서는 이를 데 없이 반동적인 정권도 민족 단결 논리로 그 투쟁을 비틀어 버림으로써 스스로를 보호할 수 있다.
이집트의 나세르와 시리아의 바트당은 베트남 민족해방전선의 정책을 따를 깜냥이 안 된다. 러시아 볼셰비키의 정책을 따를 수 없다는 것은 두말하면 잔소리이다.
따라서 유전을 공격하는 게릴라 전쟁도 노동자 투쟁도 나세르가 이끌 수는 없다.
소련 지도자들은 식민지 대중의 해방 운동에 우호적인 세력이 결코 아니다. 소련이 나세르에게 제공한 탱크·전투기·미사일·기술자 등은 아랍 민족 운동에는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고, 나세르를 따르는 군대가 운동을 잘못된 길로 빠지게 하는 것을 도왔다는 면에서 오히려 장애물이었다.
오랜 기간 억압받아 온 아랍의 노동자·농민은 민족혁명 정책과 사회혁명 정책 둘 다 필요하다.
민족 해방과 사회 해방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다. 나세르와 칼레드 박다시 시리아 공산당 서기장 등은 민족혁명과 사회혁명이 별개라는 이론을 주장하는데, 완전히 반동적인 공상이다.
노동자가 기간산업을 장악하고 농민이 토지를 장악할 때만 제국주의와 그 부역자들에 대한 투쟁이 성공할 수 있다. 물론 그 투쟁은 길고 처절하고 여러 우여곡절을 겪겠지만 말이다.
중동 문제를 해결할 유일하게 가능한 대안은 유대인과 쿠르드인 등 여러 소수민족의 권리가 완전히 보장된 사회주의 공화국 수립을 목표로 하는 노동자와 농민 대중의 혁명이다.
주
- E. Behr, The Algerian Problem (1961), p21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