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쟁
러시아혁명 100주년
낙동강 오리알 신세인 1917년 10월혁명 *
현재적 의미는 무엇인가?
2 그러나 1917년 10월 러시아 혁명은 낙동강 오리알 신세다. 10월혁명은 올해 100주년을 맞았는데, 축하받는 일이 거의 없이 지나가고 있다. 1967년 50주년 때는 현저히 달랐다. 나는 그때 일을 기억할 만큼 나이를 먹었다. 당시에는 서구에서조차 10월혁명은 (그리 흔쾌히는 아니지만) 세계사적으로 의미 있는 사건으로 인정받았다.
근대에 일어난 많은 위대한 혁명은 계속 축하를 받는다. 예를 들어, 미국 혁명과 프랑스 혁명이 그렇다. 두 혁명은 기념하는 국경일이 있다(각각 7월 4일과 14일). 아일랜드 부활절 봉기도 그렇다. 이 봉기는 지난해에 100주년을 맞았는데, (비록 위선적이었지만) 성대한 기념 행사가 열렸다. 1949년 중국 혁명도 마찬가지다. 현재 중국을 통치하는 중국 공산당은 이 혁명에서 자신의 통치 정당성을 찾는다.3 그렇다고 해서 소련을 세운 사건이라고들 하는 10월혁명을 푸틴이 좋아하는 것은 아니다. 오언 매슈스는 다음과 같이 썼다.
1967년 50주년은 냉전 와중이었다. 당시에는 1917년 10월혁명이 현실과 큰 관련성이 있다는 점이 분명해 보였다. 서구와 갈등을 벌이던 적대 세력인 소련이 자신의 통치 정당성을 10월혁명에서 찾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뒤로 25년 후에는 소련은 더는 존재하지 않게 됐다. 소련 해체 뒤 들어선 러시아 국가를 통치하고 있는 블라디미르 푸틴은 2005년 의회에서 다음과 같은 유명한 연설을 했다. “소련의 붕괴는 20세기 최악의 지정학적 재앙이었다.”KGB 관료로서 복무한 소련은 크게 사랑하지만 그 소련을 창조한 대중 봉기는 극도로 싫어한다. 최근 몇 년 동안 러시아 정부는 러시아 역사의 많은 부분을 끄집어내 푸틴의 통치 정당성을 높이려 하면서, 키예프 공국의 블라디미르 대공과 [러시아 공국의] 폭군 이반[‘차르’ 칭호를 처음 사용한 제정 러시아의 초대 통치자]의 동상을 세우고, 스탈린을 대량 학살범이 아니라 영웅적 전쟁 지도자로 추켜세우려고 역사책을 다시 썼다. 그러나 “공식적” 버전이든 “애국적” 버전이든 [1917년] 혁명의 노선을 따르는 현대 정당은 없다. 혁명이 일어나기 전 정부의 총리를 역임한 보수적 인물 표트르 스톨리핀 ― 그는 혁명가들을 ‘스톨리핀 넥타이’라고 불린 줄에 매달아 교수형에 처한 것으로 유명하다 ― 이 현 시기 [러시아의] 공식 영웅에 가장 근접한 인물임은 십중팔구 확실하다. 스톨리핀은 2008년 시행된 TV 시청자 전화 참여 프로그램에서 “역사상 가장 위대한 러시아인”으로 선정됐다.(나중에 이 결과는 조작된 것으로 밝혀졌다. 스탈린이 더 많은 표를 얻었다.)
푸틴은 자신이 공산당원이자 국가보안위원회스톨리핀과 마찬가지로 푸틴은 다른 무엇보다 러시아 제국주의자이고 반대파를 밟아 없애야 한다고 여기는 인물이다. 푸틴은 국가를 타도한 볼셰비키를 위험한 배신자로 본다고 분명히 밝혔다. 2015년 대통령궁이 운영하는 ‘셀리거 전국 청년 포럼’ 연례 행사에서 푸틴은 청년 활동가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레닌과 그의 직업 혁명가들은 “러시아의 국익을 배신했다. 영웅적인 러시아 병사와 장교들이 제1차세계대전의 전선에서 피를 흘리고 있을 때 볼셰비키는 조국이 패배하기를 바랐다.” 푸틴의 관점에서 볼 때 혁명은 “러시아를 국가로서 붕괴하도록 하여 스스로 패배를 선언하게” 만들었다.
[10월혁명 이후 벌어진] 러시아 내전에서 적군이 아니라 백군이 승리했더라면 들어섰을 나라와 여러모로 비슷하다. 푸틴의 사회적 보수주의, 교회를 이용해 자신의 통치 정당성을 뒷받침하기, 반대파에 대한 불관용은 “전제정, 러시아 정교회, 민심”이라는 차르 시대 공식 특징의 최신판이다. 보리스 옐친이 소련 공산당을 해산해 혁명의 유산을 뒤집은 인물이 됐을 수도 있었다. 그러나 시계를 100년 전으로 돌려 놓은 인물은 푸틴이 됐다. 푸틴은 국가 통치자와 교회가 통일된 사회, 반대 목소리는 반역인 사회, 보안경찰이 대중의 불만을 물 샐 틈 없이 감시하는 사회, 즉 신성神聖 러시아를 복원했다. 4
실제로 푸틴의 러시아는
[미국 지배자들의] 히스테리를 보면 알 수 있다. 조지 W 부시의 수석 윤리 변호사(역사 연구에 많은 시간을 할애해야 하는 자리)를 역임한 리처드 페인터는 이 히스테리의 시작을 1917년으로 거슬러 올라가 찾는다 “우리는 러시아인들이 무슨 일을 해 왔는지를 안다. 그들은 그 일을 1917년 러시아 혁명 때부터 해 왔다. 그때부터 공산당은 서방 민주주의를 불안정하게 하기 시작했고 … 이 일은 2017년까지 계속됐다.” 5 그러나 이런 냉전적 돌아보기는 1917년 10월에 대한 큰 관심을 불러일으키지 않았다.
서방에서도 러시아에 대한 두려움과 편집증이 사라지지 않았다. 도널드 트럼프가 러시아와 내통했을지 모른다는 학계에서는, 1960년대와 1970년대에는 급진화 덕분에 혁명에 대한 사회적 해석을 발전시키려는 노력이 촉진됐지만 지금은 그런 노력이 크게 억눌려 있다. 학계에서 합의된 관점은 1917년 10월혁명을 러시아를 혼돈과 전체주의로 몰아넣은 퇴행적 쿠데타로 묘사한다. 이런 관점은 올랜도 파이지스가 형편없는 책 《민중의 비극》에서 주장한 “사회사”에서도 발견되고, 레닌을 혐오하는 베테랑 역사학자 리처드 파이프스의 저서 같은 더 전통적인 정치 서사의 형태를 띄기도 한다.7 한때 러시아 주재 영국 대사였던 토니 브렌튼이 편집한 이 책이 10월혁명을 대하는 태도는 시작부터 분명히 드러나는데, 위대한 러시아 시인 알렉산드르 푸쉬킨의 다음 말이 인용돼 있다. “분별없고 인정사정없는 러시아의 반란.” 이 책에서만큼은 최악의 글은 파이프스가 아니라 [러시아인 역사학자] 에드바드 라진스키의 것이다. 그는 처참한 꼴을 당한 차르 니콜라이 2세와 그 가족의 순교를 애도하는 글을 이 책에 수록했다. 파이지스는 이 책에 수록된 글에서 1917년 10월 24일 페트로그라드[현재 상트페테르부르크]를 순찰하던 경찰이 “평범한 취객”으로 위장한 채 스몰니 학원(소비에트가 사용한 건물)으로 향하던 레닌을 알아차리지 못한 사실에 한탄한다. 경찰이 레닌을 알아봤더라면 “역사가 판이하게 다른 방향으로 흐를 수 있었으리라”는 것이다. 8 소비에트 시대를 연구한 저명한 역사학자 실라 피츠패트릭은 이 논문 모음집을 평가하면서, 편집자 브렌튼의 글이 “후쿠야마의 《역사의 종말》처럼 시간의 검증을 버티지 못할 자유시장 승리주의” 냄새를 풍긴다고 점잖게 불평했다. 브렌튼은 피츠패트릭의 말은 “지구가 둥글다는 학설의 승리”를 비난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라고 응수했다. 9 그의 반응은 신자유주의를 옹호하는 극단적 중도파의 파탄이 도래하는 데도 보이는 허영이라 할 만하다.
학계의 이런 합의는 최근 출판된 《역사적 불가피성? 러시아 혁명의 전환점들》이라는 논문 모음집이 정확하게 대변한다. 그러나 1917년 10월을 둘러싼 침묵은 좌파들 사이에서도 발견된다. 데이비드 하비가 오늘날 살아 있는 마르크스주의 지식인 중에서 두드러지는 인물이라는 점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그의 저술과 온라인 강의는 마르크스의 정치경제학 비판에 대한 관심을 불러일으키는 데 혁혁한 공을 세웠다. 그러나 하비가 자본주의의 “17가지 모순”이라고 부른 것을 탐구하고 정치적 대안이 어떻게 발전할 수 있을지를 개괄적으로 제시하는 것과 관련해 마르크스의 정치경제학 비판을 대중적으로 해설한 그의 최근작을 보면, 프란츠 파농의 혁명적 휴머니즘을 다루는 논의는 있지만 레닌과 1917년은 둘 다 언급되지 않는다. 하비는 불평등이 커지는 상황에서 “(레닌주의의 설명에 따르면 전위당이 지도하는) 자의식적으로 조직된 반자본주의적 혁명 운동이 떠오”를 시나리오를 간단히 언급하지만, 이내 그런 운동은 “너무 단순하고 심지어 근본적으로 결함이 있다”고 일축해 버린다. 하비는 항상 레닌주의와 거리를 뒀다. 그러나 1917년 10월혁명을 준거점으로 삼는 전통과 연계된 저명한 마르크스주의 지식인들은 1989~1991년 소련과 그 위성국가들의 붕괴로 현대 좌파들이 러시아 혁명의 경험과 선을 긋게 됐다고 시사한다. 1980년대 후반에 해체될 때까지 영국 공산당에 충실했던 훌륭한 역사학자 에릭 홉스봄은 장기 19세기를 다룬 그의 유명한 3부작에 덧붙이는 에필로그 격으로 《극단의 시대》를 썼는데, 그 부제를 ‘단기 20세기, 1914~1991년’이라고 지었다. 이 시기 구분이 함축하는 의미는 10월혁명으로 시작된 시대가 끝났다는 것이다. 실제로 홉스봄은 “1980년대 말 산산조각 난 세계는 1917년 러시아 혁명의 영향을 크게 받은 세계였다”고 주장하며 현재 세계를 “10월혁명의 종식에서 살아 남은 세계”라고 묘사했다. 그러나 홉스봄이 진정 다루고자 한 주제는 글로벌 자본주의, 20세기 초와 말의 심각한 위기, 그 사이의 저돌적 팽창이었다. 홉스봄의 이 실천은 그의 다음 말과 대비된다. “’자본주의’ 대 ‘사회주의’ 대결의 역사는 … 십중팔구 연구할 흥미가 꽤 제한되는 역사일 것이다. 길게 보면, 16~17세기 종교 전쟁이나 십자군 전쟁과 맞먹는다.”12 이와 달리, 스탈린주의는 1917년 10월의 필연적 산물이 아니라고 보는 것은 트로츠키주의 전통의 결정적 특징이다. 다니엘 벤사이드는 2009년에 좀 일찍 죽었는데, 그때까지 그는 가장 뛰어난 트로츠키주의 전통 옹호자였다. 그러니 벤사이드가 홈스봄의 ‘단기 20세기’라는 말을 받아들인 것은 흥미로운 일이다.
이런 얼버무림은 홉스봄과 그가 몸담은 공산당의 사이가 껄끄러웠던 것과 관계 있을 듯한데, 이는 러시아 경험에 대한 그의 최종 판단이 담긴 《극단의 시대》에 반영됐다. “10월혁명의 비극은 바로 그것이 무자비하고 잔혹한 종류의 지령 사회주의를 창출했을 뿐이라는 점이다.”독일 통일, 소련 해체, 냉전 종식 등등이 제1차세계대전과 러시아 혁명으로 시작된 커다란 주기의 종말을 뜻한다는 점은 분명했다. “단기 20세기”라는 거친 개념을 받아들인다면, 그것은 곧 다소 빠르게 지정학적 묶음의 개편뿐 아니라 노동자 운동 내 조류들의 재정의와 재구성을 뜻하고야 말 역사적 전환점 문제가 될 것이다.
10월혁명은 무엇을 남겼는가?
FRB 의장 폴 볼커가 1979년 10월 시행한 금리와 달러의 급격한 상승으로 빚어진 부채 위기 덕분이었다.
그런데 “10월혁명의 종식”이나 “제1차세계대전과 러시아 혁명으로 시작된 거대한 주기의 종말”이라는 말이 뜻하는 것은 정확히 무엇일까? 벤사이드의 말처럼, 1989~1991년이 지정학적인 큰 변화, 즉 미국의 세계적 헤게모니 행사에 걸림돌이었고 서구 자본주의와 경쟁한 초강대국 블록이 붕괴해 사라진 변화를 뜻한다는 점은 분명하다. 이 변화 덕택에, 1980년대 초 마거릿 대처와 로널드 레이건이 개척한 신자유주의 경제 정책 체제가 일반화될 수 있었다. 동시에 신자유주의는 제3세계로 수출됐다. 이는 미국 연방준비제도이사회ANC에 걸었고 오늘날에는 점점 더 심각해지는 위기에 빠진 남아공 공산당 정도가 그 사례이다.
벤사이드는 “노동자 운동 내 조류들의 재정의와 재구성”도 언급한다. 1919년 공산주의인터내셔널(코민테른)의 결성은 10월혁명을 일반화하려 한 볼셰비키의 노력을 나타냈다. 이 전략이 실패하면서, 스탈린이 소련에서 권력을 잡고 국제 공산당들을 소련 외교정책의 도구로 변형시키는 것이 용이해졌다. 그래서 노동자 운동 ― 노동자 운동의 최상의 투사들을 몇 세대 동안 끌어당긴 조류 ― 의 상당 부분이 자기 운명을 소련 국가의 운명에 결박시켰다. 소련 국가의 쇠퇴 ― 그리고 국제 공산당 운동의 지도권을 둘러싼 소련과 중국의 갈등 ― 는 공산당 운동의 해체에 일조했다.(비록 공산당들이 경쟁 정당인 사회민주주의 정당들의 정치와 별 다를 게 없는 개혁주의 정치를 스스로 받아들인 것도 점점 더 중요한 동인이었지만 말이다.) 소련의 붕괴는 공산당 운동의 해체 과정을 가속시켰다. 서구에서 가장 중요한 공산당이었던 이탈리아 공산당의 자살이 특히 극명한 사례이다. 오늘날에도 어느 정도 영향력이 있는 공산당은 손에 꼽을 정도이다. 초강경 스탈린주의 정당인 그리스 공산당과 포르투갈 공산당, 선거적 기반을 잃은 인도 공산당(마르크스주의파), 지난 50년 동안 자기 운명을 아프리카민족회의[《인터내셔널 소셜리즘》]의 이론적 원칙은 그런 동일시를 거부한다. 우리가 보기에 1920년대 후반과 1930년대 초반 소련이 스탈린 식으로 변모한 것 ― 강제적 공업화와 농업 집산화 ― 은 사회주의 건설이 아니라 반혁명의 공고화를 나타낸다. 당과 국가의 요직을 차지한 관료로 구성된 새 지배계급이 원자화하고 권리를 박탈당한 노동자 계급을 지배하고 착취하게 됐다. 그 새 지배계급은 서방 제국주의 열강과의 군사적 경쟁이 가하는 압박 하에서 자본 축적 논리에 종속됐다. 그러므로 1989~1991년에 일어난 격변은 우리가 보기에는 자본주의의 복원이 아니었다. 크리스 하먼이 썼듯이, 한 형태의 자본주의(관료적 국가자본주의)가 다른 형태의 자본주의(신자유주의 시대에 득세한 시장자본주의)로 바뀐 게걸음이었다. 14
따라서 1989~1991년이 장기적 변화, 즉 미국의 주도력 하에서 세계 자본주의가 신자유주의적으로 재조직되고 공산당 운동이 쇠퇴하는 변화를 향한 급격한 전환점이었음은 분명하다. 그렇다면, 1917년 10월이 오늘날의 사회주의자들에게 남겨 놓은 것은 아무것도 없는 것일까? 소련 블록의 자체 붕괴는 10월이 방출한 빛을 차단하는 것일까? 이 질문에 어떻게 대답하느냐는 어느 정도는 러시아 혁명과 스탈린주의를 사실상 동일시하는 홉스봄의 견해에 동의하느냐 아니냐에 따라 달라진다. 물론, 이 잡지15 그런데 10월이 방출한 빛 중에서 어떤 것이 오늘날 우리에게도 도달할까? 10월은 그저 혁명적 영감을 제공할 뿐일 사건일까, 아니면 더 구체적인 전략적 중요성도 있는 사건일까? 트로츠키가 1924년에 쓴 소책자 《10월의 교훈》을 보자.
이런 분석은 1917년 10월이 진정한 노동자 혁명이었고, 그러므로 그것을 쿠데타로 묘사하는 엘리트주의적 합의가 틀렸다고 전제한다.당 전체, 특히 젊은 세대 당원들이 10월의 경험을 차근차근 탐구해 완전히 소화하는 것은 필수 불가결한 일이다. 그 경험은 과거에 대한 가장 우월하고 그 무엇도 필적할 수 없고 대체 불가능한 시험대였고 미래로 향하는 문을 열었다. … 프롤레타리아 혁명의 법칙과 방법을 탐구하는 데서 10월의 경험보다 더 중요하고 훌륭한 재료는 지금까지는 존재하지 않는다.
17 물론 그 경험은 후대의 혁명적 마르크스주의자들에게도 적절성이 있었다. 사실, 그 경험을 반영한 저작들, 특히 레닌의 글은 벤사이드 자신의 전략에 관한 사고에서도 결정적으로 중요했다.(비록 벤사이드가 주기의 종말이라는 말을 했지만 말이다.) 18
《10월의 교훈》은 논쟁을 위해 집필됐다. 트로츠키는 독일 공산당이 1923년 10월에 권력을 잡지 못한 것은 볼셰비키당 내 정치적 라이벌들, 특히 코민테른 의장 그리고리 지노비예프 탓임을 주장하고자 했다. 그러나 트로츠키가 그 책에서 개진한 주장은 오늘날에도 적용될 수 있는 측면이 있고, 트로츠키의 정치 실천이 1917년 10월을 혁명적 전략과 전술의 시금석으로 여기는 관점에 의해 인도됐음은 부인할 수 없다. 트로츠키가 집필한 《러시아 혁명사》는 러시아 혁명 과정 전체를 서술하는 면에서 탁월한 책이다. 트로츠키의 이론적이고 지적인 능력 일체가 동원된 혁명의 중단과 시작, 전진과 후퇴 설명은 그 누구도 따라올 수 없을 만큼 훌륭하다. 코민테른의 초창기 역사에서 가장 마음을 사로잡는 부분은 러시아 혁명 지도자들 ― 그 누구보다 레닌과 트로츠키 ― 이 신생 공산당들, 특히 독일 공산당의 지도자들에게 혁명 경험을 알려 주고 그 교훈을 설명하려 애쓴 노력이다.[레닌의] 《무엇을 할 것인가?》에 관해 수행한 방대한 구출 작전을 시작으로 마르크스주의자들 사이에서 레닌에 대한 관심이 되살아났다. 그 뒤로도 앨런 샨드로의 흥미로운 연구, 타마스 크라우스의 중요한 사상 전기(2015년 도이처 상 수상), 타리크 알리의 멋진 비평, 존 몰리뉴의 《오늘날을 위한 레닌》 발간 등이 이어졌다. 19 그중 몰리뉴의 책은 국제사회주의 경향의 전통에 확고하게 자리잡고 있다. 그러나 나머지 저서들은 학계의 합의에 의해 협소화돼 희화화된 모습으로부터 레닌을 구출하고, 마르크스주의 역사와 러시아 혁명 역사 속에서 레닌이 차지하는 자리를 적절히 재설정하는 데 주로 초점을 맞췄지, 레닌이 이룩한 업적의 현재적 의미를 탐구하지는 않는다. 몰리뉴의 《오늘날을 위한 레닌》을 논외로 하면, 이런 경향의 예외 사례는 슬라보예 지젝이다. 그러나 지젝의 “레닌주의”는 너무 기이하고 그의 끈질긴 철학적 선입견이 너무 크게 녹아 있어서 대중에게 인식될 만한 정치를 위해서는 기여할 것이 거의 없다. 20
라스 리가21 현재 좌파적 개혁주의가 되살아나고 있는데, 특히 영국에서 분명하게 나타나고 있다. 그 지도자들인 제러미 코빈과 존 맥도넬은 룩셈부르크가 제기한 딜레마에서 “개혁”을 선택한다. 그들은 영국 사회가 의회민주주의의 헌법 틀 안에서 변혁될 수 있다고 일관되게 주장한다. 프랑스 ‘불굴의 프랑스’의 장뤽 멜랑숑, [스페인] 포데모스, [그리스] 시리자 같은 유럽에서 새로 성장하는 좌파 조류의 지도자들도 마찬가지이다.
그렇다면, 트로츠키가 주장한 대로, 1917년 10월혁명은 보편적 의의가 있고 오늘날의 사회주의자들에게도 줄 교훈이 있는 것일까? 그렇다고 대답해야 할 핵심적인 이유가 있다. 좌파들 사이 매우 오래된 논쟁 때문이다. 그 논쟁은 19세기 말 독일 사회민주당에서 일어난 ‘수정주의 논쟁’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것으로, 자본주의가 소멸하지 않고 점진적으로 개혁될 수 있느냐 없느냐와 관계된 논쟁이다. 바로 로자 룩셈부르크가 “개혁이냐 혁명이냐?” 하고 말한 논쟁이다.22 사회민주주의 정부들이 일반적으로 보이는 패턴이 있는데, 그것은 금융시장이 가하는 압박, 국가 관료와 대기업들의 사보타주에 직면한 사회민주주의 정부가 선거 때 공약했던 온건한 개혁을 내버리게 된다는 것이다. 만약 완고하게 버틴다면 그 정부는 파괴되고 말 것이다. 그 암울한 결과를 보여 주는 사례는 칠레의 경험이다. 1973년 9월 칠레 군부는 쿠데타를 일으켜 살바도르 아옌데의 민중전선 정부를 전복시켰다. 2015년 7월 그리스 시리자의 패배는 좌파 정부를 파괴하는 새 방법을 보여 준다. 바로 은행 시스템을 폐쇄해 그 정부로 하여금 그 국민들을 빈곤으로 내모는 데 협력하도록 강제하는 것이다.
문제는 역사에는 좌파적 개혁주의 정부의 성공 사례가 없다는 것이다. 역대 노동당 정부 중 가장 중요했던 1945~1951년 클레멘트 애틀리 정부는 주요한 개혁을 시행했다. 그러나 당시에 시행된 복지국가의 공고화와 기초 산업의 국유화는 둘 다 제2차세계대전 와중에 엘리트들이 도달한 합의, 즉 영국 자본주의의 재건이 필요하다는 합의의 산물이었다. 매우 비슷한 개혁이 1944~1946년 프랑스에서도 도입됐는데, 당시 총리는 급진파와는 거리가 먼 샤를 드골이었다.23 바로 이 때문에 1917년 10월에서 무엇을 배울 수 있는지를 연구하고 살피는 것이 중요하다.
이처럼 개혁주의의 길이 닫혀 있는 것이라면, 우리는 혁명적 대안을 진지하게 검토해야 한다. 1917년 10월 러시아 혁명은 자본주의를 타도한 첫 번째 성공 사례이다. 사실, 국제사회주의 전통은 러시아 혁명을 유일하게 성공한 사회주의 혁명으로 여긴다. 20세기에 일어난 위대한 혁명들 ― 무엇보다 중국 혁명, 베트남 혁명, 쿠바 혁명 ― 은 식민 지배를 무너뜨렸지만 스탈린주의 러시아를 본뜬 관료적 국가자본주의를 수립했다.다양한 지적 장치가 우리로 하여금 1917년 10월의 경험과 단절하도록 기능하고 있다. 그중 가장 눈에 띄는 것은 1917년의 러시아는 2017년의 세계화된 자본주의와 공통점이 없다는 주장이다. 당시 러시아는 압도적으로 농업 중심인 광활한 사회였다. 인구의 압도 다수는 토지를 소유한 귀족 및 신사 계급과 동맹을 맺은 차르 독재 체제에 의해 억압당하고 착취당하는 농민이었다. 후발 주자 제국인 러시아가 후진적이었음은 부인할 수 없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러시아가 국제적인 자본주의 발전 과정에서 동떨어져 있었던 것은 아니다. 레닌과 트로츠키는 이를 아주 잘 이해하고 있었다. 크라우스가 말했듯이,
前 자본주의적 형태들을 보존한 채로 서방 자본주의의 이익에 종속돼 자본주의에 편입돼 있는 것 말이다. 자본주의는 자체의 기능을 잃지 않은 채로 전前 자본주의적 형태들과 통합돼 있었다. 24
1905년 이전에 이미, 레닌은 이 특수한 발전을 규명했다. 러시아는 세계 체제에 편입돼 있었는데, 오늘날의 우리라면 “준주변부의 통합”이라고 묘사할 과정을 통해서였다는 것이다. 전
크라우스는 다른 곳에서 이 주장을 더 발전시킨다.
다양한 형태의 생산과 역사적 구조가 이렇게 합금된다는 사실을 과학적으로 발견한 것은 러시아가 “중층 결정의 모순”(알튀세르의 말)을 가진 지역이라고 여긴 레닌의 확신이 옳았음을 뒷받침한다. 그런 모순은 혁명의 길 위에서만 해소될 수 있다. 레닌은 십여 년간의 과학적 연구와 정치 투쟁을 거치며 자본주의의 지역적 특성과 차르 군주제의 타도 가능성이 서로 갈마드는 상관성을 의식한 유일한 인물이 됐다. 이 조사 덕분에 레닌은 매우 중요한 것, 러시아에 관한 그의 테제에서 “제국주의 사슬의 약한 고리”라고 요약되는 것을 발견할 수 있었다.
트로츠키는 다소 다른 경로로 같은 결론에 도달했다. 1905년 혁명과 1917년 혁명에 대한 위대한 연구에서 트로츠키는 차르 국가의 구실에 더 중점을 뒀다. 자국 서쪽 유럽에 있는 선진 강대국들과의 지정학적 경쟁 탓에 러시아는 18세기 초 표트르 1세를 시작으로 줄곧 경쟁국들로부터 선진 기술(과 함께 그 기술을 수입하는 비용과 흔히는 그 기술을 운영하는 사람들에게 줄 보수를 충당할 자본)을 수입해야 했다. 바로 이 맥락에서 트로츠키는 ‘불균등 결합 발전’ 이론을 정식화했다.
역사적 과정의 가장 일반적인 법칙인 불균등 법칙은 후진국의 운명에서 가장 첨예하고 복잡하게 드러난다. 외부적 필요라는 채찍 아래에서 후진 문화는 도약을 강요당한다. 불균등 법칙이 보편적으로 적용된다는 사실로부터 결합 발전의 법칙 ― 더 나은 이름이 없으므로 이렇게 부르기로 하자 ― 이라는 또 다른 법칙이 도출된다. 이 법칙은 여정의 여러 단계를 한데 모으기, 각각의 단계를 결합시키기, 낡은 것과 더 최신 형태의 혼합물을 뜻한다.
27 이 “특혜” 덕분에, 다른 열강에 견준 자국의 상대적 지위를 유지하려면 급속한 공업화를 촉진해야 했던 차르 국가는 19세기 말과 20세기 초에 자국의 가까운 동맹국인 프랑스로부터 차관 형태로 자금을 마련할 수 있었다. 1913년 무렵 러시아는 세계 다섯 번째로 큰 공업 경제였으며, 노동인구의 집중도가 유럽에서 가장 큰 나라였다. 이 때문에 러시아에서는 선진 공업의 섬이 생겨났고, 그곳에서 1905년 혁명과 1917년 혁명을 추동하게 될 투쟁적 노동자 계급이 등장했다. 28 크라우스가 “자본주의의 지역적 특성과 차르 군주제의 타도 가능성이 서로 갈마드는 상관성”이라고 부른 러시아 발전의 모순은 20세기 초에 이미 크게 심화돼 있었고, 1905년에 폭발을 일으켰다. 국가와 외국 자본에 대한 러시아 부르주아지의 의존성, 공업화로 창출된 새로운 노동자 계급의 투쟁성으로 말미암아 프롤레타리아의 행동이 전면에 나섰다. 유대인 대박해(포그롬)로 파시즘을 미리 보여 준 매우 악독한 형태의 반동에도 불구하고 노동계급 투쟁은 결국 승리했다.
이 과정에서 “역사적 후진성의 특혜”, 즉 “특정한 날에 앞서 준비가 돼 있는 모든 것을 채택하도록 허용, 아니 오히려 강제하고, 중간 단계를 통째로 건너뛰는 것”이 등장한다.이렇게 선진적인 것과 후진적인 것의 모순된 결합은 후발 주자인 제국 러시아만의 특징은 아니었다. 예를 들어, 이탈리아와 오스트리아-헝가리처럼 19세기 말에 새로 공업화된 경제도 어느 정도 공유한 특징이었다. 보수적인 역사학자 노먼 스톤은 1914년 이전 유럽 전역에서 계급 투쟁이 전반적으로 증가했는데, 이는 1873~1895년 대불황의 영향을 받은 현상이고, 특히 농민의 빈곤화와 (경제 회복기의) 가격 인상의 영향을 받은 현상이었다고 주장한다.
1895년 이후 가격이 상승함에 따라, 또는 그 전 10년 동안 농업국들의 소비 여력이 점점 떨어짐에 따라, 새롭게 공업을 발전시켜야 한다는 강한 충동이 있었다. 독일이나 영국에서는 비용을 떨어뜨려야 한다는 압박이 있었고, 그래서 기계화가 촉진됐다. 이탈리아나 러시아에서는 농업의 불황으로 공업화가 장려됐다. … 1890년대에는 신기술이 해외 투자를 통해 선진국에서 비교적 후진국으로 이전됐고, 단 몇 년 만에 극적인 경제적 변화가 나타났다. 프롤레타리아(와 농민) 집단이 공장에 나타났다. 1880년대 다른 나라들에서는 가격이 완만하게 하락했고 실질임금이 상당히 상승했다. 1890년대 말, 그리고 1906년 이후에 다시 가격이 꽤 빠르게 상승했다. 그 결과, 어떤 관측자들이 혁명이 코앞에 닥쳤다고 결론 내릴 만큼 모든 곳에서 노동자 투쟁성이 상승했다.
Great Unrest을 초래했다. 급속한 공업화로 사회적·정치적 구조가 불안정했던 러시아는 훨씬 더 취약했고, 레닌은 1917년 2월 혁명 이후에 쓴 “멀리서 보내는 편지”에서 이 점을 강조했다. 특히 러시아 전제정은 공격적이고 팽창주의적인 외교정책을 추구해 발칸 반도에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과의 충돌, 그에 따라 그 동맹국인 독일 제2제국과의 충돌에 휘말렸다. 쇠락해 가는 두 제국이 벌인 죽기살기 쟁투는 그 전 수년에 걸쳐 영국과 독일 사이의 적개심을 심화시킨 제국주의 간 충돌을 촉발했고 대다수 유럽 열강과 그들의 식민지를 제1차세계대전으로 끌고 갔다. 스톤은 “1909년 이후 유럽 나라들이 거의 모두 정치적 혼돈의 시기에 접어 들었”고, 이로부터 우파는 전쟁을 해방으로 보게 됐다고 주장한다. 30 실제로 세계대전은 유럽에 남아 있던 구체제의 잔재를 싹 쓸어 버렸다. 러시아에서는 전쟁이라는 지옥으로 공업 노동자 계급의 규모가 상당히 커졌으나 새로운 빈곤층이 돼 고통을 겪었다. 한편 여기저기 흩어져 살던 수많은 농민은 징병돼서 대규모 군대에 집중됐고, 그 군대의 패배는 전제정에 대한 역사의 심판을 전달하게 된다. 31
심지어 당시 가장 강력했던 제국주의 열강인 영국에서도 이러한 적대감은 1914년까지 이어진 사회적 대불안 1917년 2월에 시작된 새로운 혁명 과정은 1905년 혁명에서 주도적 구실을 한 노동자 계급에게 훨씬 더 큰 기회를 줬다. 대체로 농민으로 구성된 병사들 ― 그들이 일으킨 반란은 로마노프 왕조의 종말을 고했다 ― 은 공장과 농촌 마을을 잇는 다리 구실을 했다. 그러나 혁명의 전위 페트로그라드와 모스크바의 숙련 금속 노동자들은 여러 문제에 직면해 있었고, 서방 선진 자본주의 중심지들인 베를린, 토리노, 셰필드, 글래스고 등지의 노동자들이 세운 조직과 근본적으로는 다르지 않은 조직 형태를 발전시켰다. 그러나 사실 정치적으로는 러시아 노동자들이 더 선진적이었다. 러시아 노동자들은 경제 투쟁과 정치 투쟁을 둘 다 수행하면서 이미 1905년에 노동자 계급 전체를 결속할 수 있는 프롤레타리아 자체 조직인 소비에트를 개발했고, 그럼으로써 기존 자본주의 국가를 대체할 대안의 토대를 놓았다. 중서부 유럽에서 활동하던 노동계급 투사들은 러시아 노동자들의 투쟁을 보며 자신들이 직면한 문제를 풀 해결책을 발견했다. 그러므로 많은 금속 노동자들이 볼셰비키 혁명을 서쪽으로 확산시키기 위해 결성된 공산당들에 몰려든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33 볼셰비키가 소비에트 권력을 잡은 것은 이런 급진화 과정이 종착에 다다랐음을 뜻했는데, 이것이 가능했던 이유는 두 가지이다. 하나는 볼셰비키의 권력 장악이 당시 상황의 필요에 알맞은 일이었다는 것, 다른 하나는 학계 주류의 묘사와 달리 볼셰비키가 전체주의적이고 폐쇄적인 종파가 아니었다는 것이다. 알렉산더 라비노비치가 페트로그라드의 10월혁명을 다룬 자신의 역작에서 밝히듯이, 그것이 볼셰비키 쿠데타라는 생각은 완전히 틀린 것이다.
이와 비슷하게, 10월혁명이 택한 형태 자체는 러시아인들의 권위주의적 전통으로 회귀한 것(파이프스의 말)도, 설익은 대중의 본능을 표현하는 것(파이지스의 말)도 아니다. 그와 반대로, 산고의 고통을 겪던 그 도시에서는 트로츠키가 말한 “점근법을 이용한 대중의 능동적 노선 조정”이 일어났다. 즉, 노동계급과 군대 내 동맹은 다른 정치적 해법을 찾으려 애쓰는 과정에서 온건한 정당들의 정책이 파산하는 것으로 나타나자 조금씩 조금씩 좌파 쪽으로 이동한 것이다.볼셰비키의 경이로운 성공은 적잖이 1917년에 그 당이 띤 성격 덕택으로 돌릴 수 있다. 여기서 내가 염두에 두는 것은 그 역사적 의의를 부정할 수 없는 레닌의 대담하고도 결단력 있는 지도력이나 비록 크게 과장된 것이지만 흔히 언급되는 볼셰비키 조직의 통일성과 규율이 아니다. 오히려 나는 ― 전통적 레닌주의 모델과 뚜렷하게 대비되는 ― 내부적으로 비교적 민주적이고 관용적이며 분권화한 당 구조와 작동 방식, 그뿐 아니라 본질적으로 개방적이고 대중적인 당의 성격을 강조하고자 한다.
1917년의 진짜 특색 그렇다면, 1917년 10월혁명은 별다른 특징이 없었을까? 물론 그렇지 않다. 모든 역사적 사건과 마찬가지로 10월혁명도 보편적인 것과 특수한 것이 특유의 방식으로 섞여 있는 사건이다. 두 가지 특징이 두드러진다. 첫째는 당시 모든 사회가 공유한 것으로, 바로 제1차세계대전이다. 1917년 2월 혁명 이후 차르 정권을 대체하려 한 임시정부는 프랑스·영국과의 3국 협상, 미국이 대표하는 새롭고 강력한 동맹국에 계속 충실해야 하고 러시아가 계속 전쟁에 참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것은 트로츠키가 묘사한 대중의 급진화 과정을 일으킨 주요 원동력의 하나였다. 노동자와 병사들은 볼셰비키로 몰려들었다. 볼셰비키가 전쟁을 끝내야 한다는 입장이 확고한 유일한 정당이었기 때문이다. 볼셰비키의 입장은 브레스트-리토프스크 조약 체결이 보여 주게 된다. 전쟁에 반대하고, 농민이 귀족과 신사 계급의 땅을 차지하는 것을 지지한 볼셰비키의 입장은 압도적으로 농업 사회였던 러시아에서 10월혁명이 생존할 수 있는 데서 결정적으로 중요했다. 레닌은 볼셰비키가 성공할 조건을 다룬 아주 날카로운 분석에서 다음과 같이 강조했다. 볼셰비키의 권력 장악은 “(1) 프롤레타리아트의 압도 다수 (2) 병력의 거의 절반 (3) 결정적 시기 결정적 장소 ― 이를테면 페트로그라드, 모스크바, 중심부와 가까운 전선 ― 에서 우세한 세력의 압도 다수”의 지지를 얻고, 그 뒤에 볼셰비키가 농민의 토지 점유라는 사회혁명당의 강령을 채택한 덕분에 “농민의 중립화”를 이룰 수 있었던 덕분이다.
36 참호에서 벌어진 산업화된 살육을 보며 많은 노동자와 지식인은 기성 지배계급들에 대한 충성심을 잃었다. 러시아 밖에서 일어난 가장 극적인 사례는 1918~1923년 독일 혁명이었다. 그러나 전쟁 경험은 사람들을 야수처럼 만드는 악영향도 끼쳤다. 전선에서 돌격대로 복무한 많은 사람들이 1918년 이후에는 반혁명의 창으로서 부상한 파시즘 운동에 합류한 것이다. 러시아에서 반혁명 공세는 1918~1921년의 끔찍한 내전으로 나타났다. 내전은 물리적으로 러시아 산업을 붕괴시키고 혁명을 일으킨 노동자 계급을 해체시켰을 뿐 아니라, 결국에는 볼셰비키 승리의 대가가 사회 일반의 군국주의화이도록 만들었다. 볼셰비키당은 노동자 계급에 내렸던 뿌리를 대거 잃었다. 볼셰비키당은 무장을 하고서 당원들에게 영웅적 자기 희생을 요구하고 성공의 대가라며 상명하복식 규율을 부과하는 정당이 됐다. 37
그러나 더 넓게 보면, 제1차세계대전의 발발은 1945년 8월에 끝나게 되는 전쟁과 혁명과 반혁명의 시대를 열었다. 독일의 보수적 역사학자 에른스트 놀테는 이 시대를 “유럽 내전”이라고 적절히 요약했다.‛좌익’ 공산주의: 유치증》에서 다음과 같은 유명한 말로 언급했다. “1917년이라는 구체적이고 역사적으로 독특한 상황에 있던 러시아가 사회주의 혁명을 시작하기는 쉬웠다. 그러나 러시아가 혁명을 지속시켜 그 완성을 이루기는 다른 유럽 나라들보다 어려웠다.” 38 다시 말해, 사회민주주의가 얼마나 강하느냐는 해당 사회의 발전 수준에 달려 있다. 개혁주의적 노동조합 상근간부층과 의회 내 동맹자들의 견고한 권력은 그 어떤 혁명에도 중대한 걸림돌로 작용한다. 하지만 선진 사회에서 [노동자 계급이] 권력을 장악한다면, 자본주의로부터 물려받을 생산성과 교육 수준이 비교적 높을 것이므로 유리한 측면도 있다.
1917년 10월혁명의 둘째 특징 ― 러시아와 다른 서구 나라들을 가르는 차이점 ― 은 러시아에는 강력한 개혁주의 전통이 부재했다는 것이다. 레닌은 이 특징을 자신의 소책자 《39 그러나 이 말을 과장해서 이해하면 안 된다. 레닌이 활동하던 시대에도 사회민주주의는 특정 수준의 후진성과 공존할 수 있었다. 그람시는 이탈리아 특유 형태의 불균등 결합 발전 상황과 씨름했다. 당시 이탈리아에서 북부는 공업 자본주의가 비교적 발전돼 있어서, 노동자 운동의 지도자들이 남부의 농민 ― 그들의 운명은 지주와 교회에 달려 있었다 ― 을 희생시키는 대가로 경제적 양보를 얻어 낼 수 있었다. 40 게다가 어떠한 위대한 혁명적 경험을 보더라도, 옛 체제가 위기에 빠진 뒤에는 개혁주의 세력이 급속히 성장한다. 레닌도 앞서 언급한 소책자에서 러시아 사례를 지적한다.
이 점은 의심할 여지 없이 옳을 것이다. 안토니오 그람시는 서유럽의 훨씬 더 발전된 시민사회 제도가 혁명에 맞서는 보루 구실을 한다는 유명한 지적을 남겼다.단 몇 주 만에 멘셰비키와 사회혁명당은 제2인터내셔널의 유럽인 영웅들, 정부 각료들, 각종 기회주의 잡동사니들의 사고 방법과 행동 방식과 주장과 궤변을 완전히 습득했다. 샤이드먼, 노스케, 카우츠키, 힐퍼딩, 렌너, 오스터리츠, 오토 바우어, 프리츠 아들러, 투라티, 롱게, 페이비언주의자들, 영국 독립노동당 지도자들의 말은 모두 오래되고 익숙한 후렴구의 따분한 반복과 중언부언으로 보인다(실제로도 그렇다). 그 언행은 모두 멘셰비키에게서 본 것들이다. 역사에서 보듯이, 후진국의 기회주의자들은 많은 선진국 기회주의자의 선구자가 됐다.
[정부와 사측에] 독립적인 노동자 운동으로서, “스스로를 제한하는 혁명” 사상을 빠르게 수용한 폴란드의 솔리다르노시치(연대노조), 노동자 반란에서 나타났지만 점점 더 투쟁을 제약하고 선거 정치에 포섭된 브라질 노동자당, 아파르트헤이트의 최종 순간 동안 눈 돌아가는 속도로 대중적 사회민주주의 정당이 된 남아프리카공화국 공산당이 그렇다. 더 최근 사례도 있다. 2011~2013년 이집트 혁명 동안 무슬림형제단은 국가와 대중을 중재하는 개혁주의 정당의 기능 일부를 맡았고, 이는 무슬림형제단과 혁명 모두에 궤멸적 결과를 초래했다. 이 사례들은 노동자 투쟁이 스스로를 제약하는 경향을 반영하는 것이다. 그런 경향은 자본주의 하에서 겪는 착취와 차별 경험의 영향을 매우 크게 받아 노동자 일부가 자신감을 잃고 그래서 기존 질서와 타협하려 하면서 생기는 것이다. 이 자신감 부족을 극복하려면 1917년 혁명이 보여 주듯이 두 가지가 모두 필요하다. 하나는 그런 타협이 실패한다는 실천적 경험과 그 실패를 극복할 능력이 있는 노동자들의 자체 조직이고, 다른 하나는 노동자들 사이에 존재하면서 그들이 필요한 정치적 교훈을 배우도록 돕는 대중적 혁명 정당이다.
덜 발전한 사회의 대중 운동에서 개혁주의가 급속히 성장하는 사례는 최근에도 많다. 1980년대 신흥 공업국 경제에서 성장한反긴축 정당으로 재창조하려 애쓰고 있다.
심지어 오늘날 서유럽에서 활동하는 우리도 레닌이 활동하던 시대나 제2차세계대전 종전 이후 시기에 존재한 고도로 구조화되고 비교적 안정적인 개혁주의적 노동자 정당을 오랫동안 경험했다. 현재 우리는 겉보기로는 서로 대립하지만 사실은 밀접하게 연관된 두 가지 현상을 보고 있다. 한편으로는, 한때 강력하고 성공적이었던 정당이 (이탈리아 공산당처럼) 자살을 하거나 (그리스 사회당, 프랑스 사회당, 브라질 노동자당처럼) 스스로 주변화된다. 다른 한편으로는, 새로운 개혁주의 조직체가 매우 빨리 부상할 수 있다. 그리스의 시리자와 스페인의 포데모스가 최근에 나타난 고전적 사례이다. 영국에는 독특한 사례로 노동당이 있다. 영국 노동당은 창립한 지 매우 오래된 사회민주주의 정당인데, 현재 그 지도자들은 당을 반[영국 노동당의] 토니 블레어와 [독일 사민당의] 게르하르트 슈뢰더 시대를 거치며 사회민주주의가 사회자유주의로의 변모하며 이 쇠퇴는 더 심각해졌다. 다른 하나는 10년 간의 경제 위기와 긴축으로 부르주아 정치 구조가 약화한 것이다. 그 덕분에 선진 자본주의의 중심지에서조차 혁명가들은 이제는 레닌과 그람시가 서구 사회주의 혁명의 주요 장애물로 보았던 안정적인 개혁주의 조직을 마주하지 않게 됐다. 물론 오늘날 사회민주주의가 비교적 불안정한 이유는 혁명 이전 러시아에서 개혁주의가 안정적으로 발전하지 못했던 이유 ― 차르 전제정이 민주적 도전 일체를 억누른 것 ― 와는 매우 다르다. 그럼에도 시리자의 궤적 ― 국제 좌파들의 큰 희망이었던 시리자가 5년 만에 트로이카의 공권력으로 변모한 것 ― 이 보여 주듯이, 오늘날 개혁주의 정치는 유동적이고 불안정해서 혁명가들에게 기회를 열어 줄 수 있다. 물론 혁명가들이 효과적으로 대처한다면 말이다.
이 두 현상은 두 가지 변화의 결과이다. 하나는 사회민주주의의 장기적 쇠퇴이다.42 20세기 내내 일어난 여러 거대한 노동계급 투쟁은 민주적인 자체 조직 형태를 만들어 냈다. 그 기구들은 투쟁 기구의 구실을 넘어, 자본주의 국가의 통치권에 도전하는 새로운 정치권력의 기초로 발전하는 경향이 있었다. 다양한 모습과 이름으로 즉흥적으로 출현한 이 조직들 ― 1918년 독일의 노동자 평의회, 1973년 칠레의 코르돈, 1978~1979년 이란의 쇼라 ― 은 노동자 혁명이 성공한다면 발전해 나갈 [노동계급의] 자치 사회의 모습을 힐끔 보여 줬다. 지금의 위기가 촉발한 대중 운동들, 특히 2011년 이집트 타흐리르 광장, 스페인 푸에르타 델 솔 광장, 그리스 신타그마 광장, 미국 주코티 공원에서 벌어진 광장 점거 운동은 자본주의 체제가 제공하는 빈약한 민주주의보다 더 직접적인 형태의 민주주의를 바라는 염원을 보여 줬다. 물론 이 운동들은 러시아 소비에트나 다른 나라의 유사 기관들과 달리 대중파업의 동역학에 의해 추동된 것은 아니지만 말이다.
바로 이런 맥락에서 10월혁명이 제공한 진정한 정치적 혁신 두 가지를 고려해 볼 가치가 있다. 그중 첫째는 소비에트와 이원(이중) 권력의 논리이다. 이원(이중) 권력은 상호 적대적 정치 형태인 부르주아 국가와 프롤레타리아 국가가 공존하며 서로 얽혀 있는 상황을 뜻하고 1917년 2월 이후 러시아에 나타났다. 이 첫째 혁신은 보편적인 것으로 드러났다.43 라스 리의 해석이 일으킨 광범한 논쟁을 이 글에서 다루지는 않겠다. 그 대신 나는 라스 리가 마르크스 이전의 역사 이해 방식, 즉 행위자의 의도가 실현되고야 만다고 보는 관점에 기대고 있음을 간단히 지적하고자 한다. 다시 말해, 《무엇을 할 것인가?》 출판 이래 레닌이 개진한 주장의 목적은 라스 리가 이해한 것, 즉 차르 치하에서 러시아 버전의 독일 사회민주당을 만드는 것이었다고 해 보자. 그런데 문제는 이 프로젝트가 실현 불가능했다는 것이다. 독일 사회민주당이 선거에 출마하는 합법적 대중 정당으로 성장할 수 있었던 조건 ― 특히, 자본주의가 개혁을 제공할 수 있을 만큼 선진적이고 팽창적으로 성장한 것, 의회적 부르주아 체제에 근접한 정치 체제가 수립된 것 ― 이 러시아에서는 없었기 때문이다. 혁명의 불가피성 ― 처음에 레닌은 러시아에서 일어날 혁명이 전제정을 쓸어 버릴 부르주아 혁명일 테지만, 러시아 부르주아지는 취약해서 그 혁명은 노동자와 농민의 대중 운동이 끌고 갈 것이라고 봤다 ― 때문에 [러시아서는] 전혀 다른 종류의 정당이 필요했다. 그 정당이 어떤 종류의 것이냐에 대해서는 토니 클리프가 《레닌 평전》 제1권에서 상세히 설명했다. 44 레닌과 그의 동지들은 스스로 택하지 않은 상황에서, 알게 모르게 뭔가 새로운 정당을 만든 것이다.
둘째의 위대한 혁신은 볼셰비키당이었다. 이렇게 말하는 것은 라스 리의 커다란 노력과 모순된다. 라스 리는 볼셰비즘의 정치적 독특함을 부인하면서, 레닌이 카우츠키의 충실한 추종자였으며 카우츠키의 사회주의 운동 개념을 러시아 조건에 적용하려 애썼다고 주장한다.그 정당의 차이가 무엇이냐를 설명하는 한 가지 방법은 카우츠키의 말을 빌리는 것이다. 카우츠키는 다음과 같이 유명한 말을 남겼다.
사회주의 정당은 혁명 정당이지만 혁명을 일으키는 정당은 아니다. 우리는 우리 목표가 오로지 혁명을 통해서만 이룰 수 있음을 안다. 우리는 우리의 반대자들에게 혁명을 막을 힘이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우리에게 혁명을 창조할 힘이 없다는 것도 안다. 혁명을 선동하거나 혁명을 향해 나아가는 길을 닦는 것은 우리 과업의 일부가 아니다. 그리고 우리가 혁명을 마음대로 창조할 수 없으므로, 우리는 혁명이 언제, 어떤 조건 하에서, 어떤 형태로 일어날지 등등에 관해서는 아무 말도 할 수 없다. 우리는 부르주아지와 프롤레타리아트 사이에 일어나는 계급 투쟁은 후자가 정치권력을 모두 소유하고 사용해 사회주의 사회를 시작하기 전에는 끝나지 않을 것임을 안다. 우리는 이 계급 투쟁이 양적으로 질적으로 성장해야 한다는 것을 안다. 우리는 프롤레타리아트가 규모 면에서 계속 성장하고 도덕적·경제적 힘을 계속 얻고야 말 것임을 알고, 그러므로 프롤레타리아트의 승리와 자본주의의 전복 불가피하다는 것을 안다. 그러나 우리는 사회적 전쟁에서 마지막 결정타가 언제 어떻게 이뤄질 것이냐에 관해서는 매우 막연한 추측만 할 수 있을 뿐이다.
46 볼셰비키는 바로 이 “조화로운 융합”이라는 가정을 깨뜨리는 실천을 했다. 레닌이 이미 《‛좌익’ 공산주의: 유치증》에서 묘사하듯이, 진정한 혁명가들이 성공하느냐 아니냐는 다른 정치 경향들과의 가차없는 투쟁 ― 카우츠키는 독일 사회민주당 안에서 이런 투쟁을 회피했다 ― 에 달려 있다. 그런 투쟁에는 트로츠키가 《10월의 교훈》에서 강조하듯이, 혁명 와중과 후에 볼셰비키당 지도부 내 활동가들 사이에서 일어난 격렬한 논쟁도 포함된다.
이처럼 카우츠키의 설명에서 혁명 정당은 역사의 높은 파도를 잘 타는 정당이고, 자본주의와 계급 투쟁이 발전 ― 이는 사회주의 이데올로기와 노동자 운동의 점진적 융합을 나타낸다 ― 하면 자연스럽게 생겨나는 산물이다. 샨드로가 말하듯이, 제2인터내셔널의 마르크스주의는 다음과 같이 가정한다. “생산력의 성장이 역사의 방향을 결정하고, 그와 나란히 사회주의를 위한 물질적·지적 조건이 발전하고, 마르크스주의 이론과 노동계급 운동이 조화로운 융합을 이룬다.”47 그러나 여러 면에서 더 중요한 것은 [1917년] 4월에서 10월 사이 볼셰비키가 노동자 계급의 다수를 설득하기 위해 기울인 체계적 노력이었다. 레닌은 ‘4월 테제’에 무엇이 포함돼 있는지를 설명했다.
그러나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볼셰비키가 혁명을 일으키는 정당이었다는 점이다. 계급 투쟁에 적극 관여해서 투쟁에 영향을 끼치고 투쟁이 혁명적 과정으로 나아가도록 도우려 했다는 면에서 볼셰비키는 혁명을 일으키는 정당이었다. 볼셰비키가 봉기를 조직한 사례에서 그 점을 가장 분명히 볼 수 있다. 볼셰비키는 1905년 모스크바에서 봉기를 조직했고, 1917년 10월에는 모두 알듯이 봉기를 조직하고 권력을 잡았다. 1917년 가을 레닌이 쓴 글들은 “자본주의의 전복이 불가피하다”는 보장이 없음을 보여 준다. 오히려 그 글들은 볼셰비키가 때를 놓치면 볼셰비키 자신과 노동자 계급이 반혁명적 파국을 맞을 것이라는 긴박감과 주장으로 가득 차 있다.대중은 노동자 대표 소비에트만이 혁명 정부가 될 잠재력이 있음을 알아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의 과제는, 소비에트 정부가 부르주아지의 영향을 받고 있는 한에서는, 인내심을 가지고 체계적이고 지속적으로 소비에트 전술의 오류를 들춰 내고 설명하는 것이다. 특히 대중의 실천적 필요에 부합하는 설명을 제공해야 한다.
[소비에트의] 권력 장악을 조직할 것이냐 말 것이냐였다. 봉기를 일으키자는 레닌과 트로츠키의 주장 ― 구체적 전술을 놓고는 둘의 의견이 달랐고, 트로츠키의 판단이 일반적으로 옳았음이 입증됐다 ― 에 지노비예프와 레프 카메네프가 이끄는 그룹은 공개적으로 저항을 벌였다. 결국 지노비예프 등의 반대는 규율적 조처를 취할 수도 있다는 [볼셰비키] 중앙위원회 다수의 최후통첩에 의해 극복됐다. 논쟁이 최소한 잠정적으로라도 해소되지 않으면, 그리고 소수가 다수결을 존중하지 않으면, 혁명을 일으키는 정당은 제기능을 할 수 없다. 49
대중 다수의 지지를 획득하는 일에는 나중에 공동전선이라고 불리는 전술의 사용도 있었다. 예를 들어, 1917년 8월 볼셰비키는 코르닐로프 장군의 군사 쿠데타 시도를 저지하기 위해, 그 전까지 볼셰비키를 독일 첩자라고 하며 박해하던 멘셰비키·사회혁명당과 함께했다. 볼셰비키 당은 민주적이고 열린 태도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노동자·병사의 급진화를 반영하고 그들이 권력 장악으로 나아가도록 할 수 있었다. 그러나 볼셰비키가 민주적이었다고 해서 그저 중구난방으로 논쟁만 했던 것은 아니다. 1917년 가을, 혁명의 목전에 놓인 주요 쟁점은50 크라우스가 지적하듯이, 이 분석은 러시아 사회의 모순을 세계적 차원에서 자본주의가 일으키는 변화 속에 자리매김하도록 한다. 그 변화인즉, 독점자본주의 블록들의 출현과 그들 사이의 경쟁이었다. 이는 세계대전으로 이어지기 십상인 제국주의 경쟁을 낳았고, 이에 대항하는 유일한 방식은 사회주의 혁명이었다. 이런 상황은 러시아의 소비에트 권력을 세계적 혁명 과정의 출발점으로 삼으려 애쓰며 그 안에서 새로 창설된 공산주의인터내셔널(코민테른)이 식민지들에서 노동자 봉기와 민족주의적 반란을 한데 묶으려 노력한 것을 정당화한다. 이 과정을 추구하려면 혁명을 일으키는 정당으로서 볼셰비키당 모델을 일반화해야 했다. 51
볼셰비키가 추구한 전략의 지적 기반은 레닌이 제1차세계대전 동안 발전시킨 제국주의론이었다. 그에 따라 레닌은 1917년 4월 쓴 중요한 문헌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우리는 수많은 사람을 끌어들인 전쟁, 수많은 자본의 이해관계가 걸린 전쟁을 끝내려 애쓰고 있다.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한 프롤레타리아 혁명이 일어나지 않으면 이 전쟁을 끝내고 진정으로 민주적인 평화를 이룰 수 없다.”[공산당] 지도자들이 볼셰비키의 조언을 존중하면서도 지시로는 여기지 않고 각자의 사정에 맞게 창의적으로 전략과 전술을 구사하도록 고무하기보다는 소련의 의견을 따르도록 했기 때문이다. 이런 경향은 1920년대 중반 지노비에프 하에서 일어난 코민테른의 “볼셰비키화”를 거치며 제도화했고, 그 뒤로는 각국 공산당이 스탈린 치하 소련 국가의 외교정책상 필요에 체계적으로 종속되는 변화가 일어났다.
문제는 이런 혁신을 수출하는 것이 소비에트 형태의 조직 ― 노동자들이 대중 투쟁의 논리를 따르면서 자발적으로 이런 조직을 재발견하는 일이 거듭됐다 ― 을 수출하는 것보다 훨씬 더 어렵다는 것이다. 코민테른은 초기에는 바로 그 일을 빠른 속도로 진척시키려는 영웅적 노력을 보였다. 그러나 클리프가 《레닌 평전》에서 보여 주듯이, 볼셰비키 전략과 조직에 관해 이룬 진정으로 새로운 혁신을 사회주의 전통이 다른 각국의 특수성에 맞게 접목하는 것은 극도로 어려운 일임이 드러났다. 대중 투쟁과 반동, 탄압과 망명을 거치며 볼셰비키가 스스로를 형성한 길고 지난한 과정, 그 속에서 1917년에 존재 가치가 입증되는 공동 실천, 격렬한 논쟁, 상호 신뢰의 전통을 세운 과정을 쉽게 대체할 도리는 없다. 볼셰비키의 권력과 명성은 혁명 이후에는 진정한 국제화에 결정적 장애물로 작용했다. 왜냐하면 볼셰비키는 다른 나라[러시아의] 급속한 공업화를 요구했다. 이 명령을 다시 부과하기 위해서는 10월혁명이 성취한 것을 파괴해야 했다. 이는 매우 특수한 형태로 나타났고, 그래서 좌파들은 두 세대 동안 방향 감각을 상실했다. 바로 소비에트 국가가 명시적으로 전복된 것이 아니라 볼셰비키 정부가 변모한 것이다. 1920년 초가 되면 볼셰비키 정부는 일당 독재 체제가 됐는데, 그 지도자들은 주관적으로는 노동자 계급 권력에 헌신하는 처지, 객관적으로는 더 발전한 서구 제국주의 강대국들과 경쟁하는 조건에 있는 국가를 경영하는 처지 사이에 사로잡혀 있었다. 마르크스가 말했듯이, 사회적 존재가 의식에 앞선다. 즉, 1920년대 말과 1930년대 초 러시아에 강제된 공업화는 노동자와 농민을 자본 축적의 우선순위에 종속시켰고, 러시아를 자체의 몫을 가진 제국주의 열강으로 변모시켰다. 소련은 “사회주의 건설”이라는 구호 아래 국제적인 경제적·지정학적 경쟁 과정에서 뒤처지지 않아야 했다.
혁명이 서쪽으로 확산되지 못하면서 불균등 결합 발전 과정 ― 1905년과 1917년에는 혁명의 조건을 창출한 과정 ― 은 이제 뒤집혀서 반혁명에 유리하게 작용했다. 러시아 발전의 특수성에 대한 트로츠키의 분석에서 핵심이었던 국가 간 경쟁 논리는 계속해서[독일 사회민주당의] 카우츠키의 경고를 찬성의 의미로 인용하면서 다음과 같이 덧붙였다.
스티브 스미스는 최근 러시아 혁명사에 관해 사려 깊고 배울 게 많은 연구 결과를 내놓았는데, 앞서 말한 결과는 볼셰비키의 프로젝트가 계획부터 잘못된 것이었음을 보여 준다고 암시한다. 스미스는 사회주의 혁명이 전쟁으로부터 생겨날 수 있다는 예측에 반대한 프랑스 사회당의 지도자 장 조레스와볼셰비키는 쇠락한 자본주의 체제가 조만간 붕괴하리라는 것을 추호도 의심하지 않았다. … 100년이 지난 지금 … 러시아 혁명이 자본주의의 종말적 위기 때문에 생겨난 것이 아님은 분명하다. … 20세기를 거치면서 자본주의는 어마어마한 역동성과 혁신을 보였다. … 비록 소수의 손에 막대한 부를 집중시키고 새로운 형태의 소외를 창출했음에도 말이다.
53 이 주장은 10월혁명 이후 몇 년 동안 자본주의가 역사상 최악의 위기, 즉 1929~1939년 대불황을 겪었다는 사실을 무시한다. 자유주의 경제학자 라이오넬 로빈스는 1934년에 쓴 글에서, 1914년과 1929년이 밀접하게 연결돼 있음을 매우 분명히 표현했다. “우리는 세계 위기의 4년째가 아니라 19년째 해를 살고 있다.” 54 그리고 자본주의는 또 다른 위기, 인류의 밑바닥을 드러낸 홀로코스트를 동반한 훨씬 더 파괴적인 제국주의 간 세계대전을 통해 그 위기에서 벗어났다. 러시아에서 일어나는 혁명이 제국주의라는 거대한 구조물을 통째로 무너뜨릴 수 있으리라는 레닌의 도박이 성공했더라면, 이 야만의 주지육림을 막았을지 모른다. 레닌은 다음의 독일 속담을 인용하기를 좋아했다. “끝없는 공포보다는 공포의 끝이 낫다.”
이 주장은 카우츠키의 또 다른 사상에 기대고 있는 듯하다. 그것인즉, 제1차세계대전은 자본주의 발전 자체의 결과가 아니고, 자본주의는 국제적으로 통합된 “초제국주의”로 평화롭게 진화할 수 있다는 것이다.스미스도 그러한 대안적 역사를 정말로 받아들일 의향이 있을 것이다. 그래서 다음과 같은 레닌 비판은 흥미로운 뒤틀림을 담고 있다.
결정적으로, 레닌은 1인 지도자 체제를 선호하는 권력 구조를 물려 줬고, 그 때문에 그 지도자의 사상과 역량이 민주적 정치 결정보다 훨씬 더 중요해졌다. 이것의 논리적 귀결 ― 스탈린주의가 레닌주의에서 자연스럽게 발생했다고 보는 사람들은 흔히 간과하는 귀결 ― 은 부하린이나 트로츠키가 서기장이었더라면 스탈린주의의 공포는 나타나지 않았으리라는 것이다. 비록 경제적 낙후함과 국제적 고립이 여전히 러시아의 기동의 여지를 제약하는 결정적 요인이었을 테지만 말이다.
[독일에서도] 볼셰비키 정부가 들어서는 또 다른 시나리오를 상상한다면, 논리적으로는 러시아 바깥에서도 혁명적 돌파구가 열릴 가능성이 있었음을 배제할 이유가 전혀 없다. 그리고 그런 일이 일어났더라면, 20세기의 역사는 매우 달랐을 것이다. 56 [그 때문에] 소비자 자본주의라는 기쁨을 누리지 못하게 될 수 있었겠지만, 그것은 아우슈비츠와 히로시마를 피하고 진정한 공산주의 사회를 건설하기 시작할 수 있었던 것에 견주면 작은 손해였을 것이다.
그러나 혁명이 러시아 제국의 국경이라는 감옥을 탈출할 수 있었더라면 훨씬 더 큰 일이 일어났을지 모른다. 무엇보다 독일 혁명이 카이저를 타도하고 민주적 공화국을 설립하는 것을 넘어 더 발전했다면 어땠을까? 독일에서 1918~1923년이라는 시기는 독일판 10월, 둘 중 하나의 패배로 끝나고야 말 사태를 향해 투쟁하는 세력들의 전진과 후퇴가 가득한 시기였다. 역사에 대한 결정론적 견해를 받아들이지 않고결론
[동유럽] 혁명은 대체로 국제적 신자유주의 공세가 확장되는 결과를 낳았다. 그러나 이제는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 자체가 심각한 위기에 빠져 있다. 단지 2007~2008년의 붕괴와 그 여파 때문만이 아니다. 지배 계급에 맞서는 반란 때문이기도 하다. 이런 조건은 10월혁명이 현재에도 계속 중요하다는 점을 재확인하는 데 유리한 맥락을 조성한다.
그러나 개탄스럽게도 혁명은 패배했다. 이 지점에서 우리는 다시 처음으로, 즉 “거대한 주기의 종말”이라는 벤사이드의 말로 돌아간다. 소련은 결국 자신의 형성에 큰 영향을 끼쳤던 바로 그 경제적·지정학적 경쟁의 논리의 희생자로 전락했다. 그러나 많은 좌파들이 (스탈린주의에 비판적이던 좌파들 다수도) 오랫동안 소련을 ― 아무리 변형되고 왜곡됐을지라도 ― 자본주의가 아닌 대안으로 여기던 이데올로기적 투자가 어느 정도 작용해 1989~1991년[오늘날에도] 혁명적 마르크스주의 전통을 계승하려는 사람들에게 핵심적인 준거점으로 남아 있는 것이 틀림없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서 그 경험을 기계처럼 모방하자는 뜻은 아니다.(그것은 레닌 자신이 특히 1922년 개최된 공산주의인터내셔널 제4차 대회에서 강하게 비판했던 일이다.) “10월의 교훈”의 옹호자 트로츠키가 항상 주장하길, 전통의 계승은 과거 경험에서 무엇이 여전히 유용한지를 고르는 과정이다. 제1차세계대전 말미에 일어난 위대한 혁명 경험 ― 1917년 러시아 혁명뿐 아니라 1918~1923년 독일 혁명과 1918~1923년 이탈리아 반란도 ― 은 가까이 밀착해서 보는 비판적 연구가 필요하다. 골동품을 수집하는 행위로서가 아니라, 그 시대의 성공과 실패의 진정한 요인을 바로 밝힘으로써 현재에 더 나은 혁명가가 될 방법을 배우는 과정으로서 말이다.
10월혁명이 단지 자본주의 체제에 매우 큰 정치적 타격을 입힌 사건이었기 때문만은 아니다. 더 구체적으로 보면, 볼셰비키의 경험이[1917년] 러시아에서는 제국주의적 세계대전의 맥락에서 불균등 결합 발전의 법칙이 작동하면서 보편적인 것과 특수한 것이 융합될 수 있었다. 더 구체적으로 말해, 노동자 대중 투쟁이 이원(이중) 권력 상황을 창출한다는 보편성과 그런 상황을 이용할 줄 아는 혁명 정당이 존재했다는 특수성이 융합됐다. 그런 융합이 또 일어날 수 있을까? 혁명적 마르크스주의 정치는 그럴 가능성이 있다는 데에 도박을 건다. 대중적 자체 조직과 대중적 혁명 정당이 만나는 일은 1917년 러시아와는 분명히 매우 다른 조건에서 그리고 다른 형태로 일어날 것이다. 그러나 이런 새로운 경험이 낳을 승리가 아무리 대단한 것일지라도, 1917년 10월 25일 ― 그날 러시아 노동자들은 자본주의가 타도될 수 있고 어떻게 그럴 수 있는지를 보여 줬다 ― 이 방출하는 빛은 흐려지지 않는다.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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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렉스 캘리니코스는 런던대학교 킹스칼리지의 유럽학 교수이자 《인터내셔널 소셜리즘》의 편집자이다.
출처: Alex Callinicos, ‘The orphaned revolution: the meaning of October 1917’, International Socialism 156(Autumn 2017)
↩
- 부활절 봉기의 실제와 위선에 대해서는 Allen, 2016을 보시오. 1640년대의 영국 혁명은 1917년 10월혁명과 마찬가지로 그 중요성이 정치 엘리트에 의해 대체로 부인당한다. 역사학계에서 “수정주의”가 승리한 덕분에 영국 혁명은 종교적·헌법적 분쟁으로 잘못 소개된다. Haynes and Wolfreys (eds), 2007은 위대한 혁명들의 중요성이 역사 서술에서 축소되는 더 넓은 상황을 비판한다. 이 논문 초안을 읽고 의견을 준 조셉 추나라, 케빈 코어, 제임스 이든, 존 로즈, 카밀라 로일에게 감사한다. ↩
- Osborn, 2005. ↩
- Matthews, 2017. ↩
- 다음 사이트로 가시오. https://twitter.com/BraddJaffy/status/884525634751524865/video/1 ↩
- Figes, 1996, 특히 Pipes (ed), 1996. Lih, 2001은 파이프스의 학자적 명성을 무너뜨린다. ↩
- Brenton (ed), 2016. ↩
- Figes, 2016, p141. 이 매우 형편없는 논문 모음집에서 예외 사례는 러시아 혁명의 지정학적 맥락을 특유의 날카로움으로 분석한 도미닉 리벤의 글이다. Lieven, 2016을 참고하시오. ↩
- Fitzpatrick, 2017, 그리고 Brenton, 2017. ↩
- Harvey, 2014, p91. ↩
- Hobsbawm, 1994, pp4, 9. ↩
- Hobsbawm, 1994, p498. 《극단의 시대》와 2002년 출판된 홉스봄의 자서전[《미완의 시대》, 민음사, 2007]에 대한 서평 격 논문에서 페리 앤더슨이 홉스봄의 역사적·정치적·개인적 모호함을 상세히 다룬다. Anderson, 2002a와 2002b를 참고하시오. ↩
- Bensaïd, 2003a. 이 문헌의 기원은 2000년대 초 반자본주의 운동이 최고조에 이르렀을 때 프랑스 혁명적공산주의자동맹과 영국 사회주의노동자당 사이에 벌어졌던 논쟁이다. 벤사이드는 이 글을 2002년 나에게 보내는 편지로 썼고, 혁명적공산주의자동맹의 지도자들(레온 크레미유, 프랑수아 뒤발, 프랑수아 사바도)이 함께 서명했다. 내가 이 글을 영어로 번역했는데 그것은 International Socialist Tendency Discussion Bulletin No. 2, January 2003에 실렸다. ↩
- Cliff, 2003, Harman, 1990, Callinicos, 1991. ↩
- 러시아 혁명을 매우 훌륭하게 분석한 것으로는 Sherry, 2017을 보시오. ↩
- Trotsky, 1975, pp202, 203. ↩
- 특히 Broué, 2004, Harman, 1983, Riddell (ed), 2015를 보시오. ↩
- 예를 들어 Bensaïd, 2002와 Bensaïd, 2003b. 벤사이드의 정치 사상을 다루며 나는 그에게 레닌이 중요했음을 강조했다. Callinicos, 2012. ↩
- Lih, 2006, Shandro, 2014, Krausz, 2015, Ali, 2017, 그리고 Molyneux, 2017. 이 “레닌의 부활”의 시작은 거의 틀림없이 2001년 에센에서 슬라보에 지젝이 조직한 레닌 관련 컨퍼런스일 것이다. 벤사이드와 나의 것을 포함한 자료집은 Budgen, Kouvelakis and Žižek (eds), 2007이다. ↩
- Žižek (ed), 2002, 이 책은 레닌에 관한 지젝의 논의가 가장 충실히 담긴 책일 것이다. 1917년 레닌이 쓴 글 일부도 수록돼 있는데 유용하다. 지젝의 레닌 해석에 대한 비판으로는 Callinicos, 2001, pp391-397과 Callinicos, 2007을 보시오. ↩
- Luxemburg, 1908. ↩
- Addison, 1977, Fenby, 2011, chapter 16. ↩
- Cliff, 1963. ↩
- Krausz, 2015, p363. ↩
- Krausz, 2015, p89. 1917년 이전 레닌의 사상이 어떻게 발전했는지, 특히 농민 문제에 관한 이해가 어떻게 발전했는지에 대해서는 Shandro, 2014가 상세히 다룬다. ↩
- Trotsky, 2017, p5. Trotsky, 1973도 보시오. 마샬 포는 다소 비슷한 역사적 전망을 제공한다. 포는 16세기 이후로 러시아 국가는 유럽으로부터 지리적으로 떨어져 있고 서유럽의 선진 경쟁국들을 본뜬 근대화 개혁을 독재적으로 시행한 덕분에 서방의 지배를 피할 수 있었다고 주장한다. Poe, 2003. ↩
- Trotsky, 2017, p4. ↩
- 이와 관련해서, 그리고 후발 제국인 러시아의 정치경제에 대한 더 많은 자료는 Smith, 2017, chapter 1에서 보시오. ↩
- Stone, 1983, pp86-87. 더 일반적으로는, 이 책의 특히 탁월한 부분인 첫 두 장을 보시오. ↩
- Stone, 1983, p144. ↩
- 최근에 나온 중요한 역사 연구로는 Clark, 2013, Tooze, 2014, Lieven, 2015가 있다. 셋 모두 제1차세계대전의 발발에서 러시아가 중요한 구실을 했음을 강조한다. Tooze의 책은 볼셰비키의 이론과 전략을 진중하게 다룬다는 면에서 독특하다. Stone, 2008은 러시아 내전에 관한 고전적 분석이다. ↩
- Smith, 1983과 Murphy, 2005는 러시아 금속 노동자에 대한 필수적인 연구 결과를 제공한다. 서방에 대해서는 Broué, 2004, Hinton, 1973, Gluckstein, 1985를 보시오. ↩
- Trotsky, 2017, pxvi. ↩
- Rabinowitch, 2017, p311. 라비노비치가 어떤 면에서도 볼셰비키 옹호자가 아님을 강조해야겠다. 레닌과 트로츠키는 소비에트 내 정당을 모두 아우르는 연립정부를 구성 ― 그리 했다면 내부 다툼으로 마비된 소비에트 정부에 맞서 반혁명이 승리하는 것이 확실했을 것이다 ― 하자는 데 반대했는데, 라비노비치는 이에 매우 비판적이다 ↩
- Lenin, 1964c, pp262, 263. ↩
- Nolte, 1987. ↩
- 러시아 내전에 관한 대체로 공정한 서술로는 Smith, 2017, chapter 4를 보시오. 또한, 혁명적 테러의 증가 속에서 반혁명적 폭력이 권력으로 형성돼 가는 과정을 폭넓게 다룬 것으로는 Mayer, 2000을, 볼셰비키를 방어하는 것으로는 Rees, 1991을 보시오. Pirani, 2008은 1920년대 초 볼셰비키가 점점 노동자 계급으로부터 괴리되고 있었음을 다룬 최신 연구 결과이다. ↩
- Lenin, 1964d, p64. ↩
- Gramsci, 1975, II, pp865-867. ↩
- 특히 Gramsci, 1978. ↩
- Lenin, 1964d, p30. ↩
- Callinicos, 1977과 Gluckstein, 1985를 보시오 ↩
- 라스 리의 레닌 해석에 관한 방대한 소개와 비평으로는 Corr and Jenkins, 2014를 보시오. ↩
- Cliff, 1975-1978. ↩
- Kautsky, 1909, p50. ↩
- Shandro, 2014, p99. ↩
- Žižek (ed), 2002에 수록된 글들에서 매우 분명하게 나타난다. ↩
- Lenin, 1964a, p23. 4월 테제의 중요성을 삭감하려는 라스 리의 시도를 비판한 것으로는 Corr, 2017을 보시오.. ↩
- 이 과정은 Rabinowitch, 2017에 상세히 묘사돼 있다.(그 결과에 대해서는 pp310-311을 보시오). ↩
- Lenin, 1964b, p88. ↩
- Callinicos, forthcoming. ↩
- Smith, 2017, pp391-392. ↩
- Kautsky, 2011. ↩
- Robbins, 1934, p1. ↩
- Smith, 2017, p388. ↩
- Harman, 198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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