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쟁
러시아혁명 100주년
러시아 10월혁명 100주년 기념 저작들에 대한 비판적 평가
러시아 10월혁명 100주년이었던 지난해 한국을 포함해 전 세계적으로 10월혁명을 기념하는 분위기가 크게 형성되지는 않았다. 세계사적으로 의미 있는 10월혁명의 100주년이 잊혀지지 않을 정도의 관심만을 받으며 과거로 물러난 것은 그만큼 오늘날 정치 지형이 좌경화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1974년 포르투갈에서 혁명이 벌어졌을 때 레닌의 《국가와 혁명》이 베스트셀러였다.
하지만 오늘날 미국에서는 트럼프가 등장했고, 유럽에서는 경제 위기와 난민 문제로 파시즘이 위세를 확장하고 있다. 이런 정치 상황을 우경화라고 단정할 수 없는 것은 다른 한쪽에서 제러미 코빈 현상 같은 좌경화가 나타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기성 체제의 주류 이데올로기가 극우 세력에 의해 도전받을 정도로 취약해졌고 노동운동은 부상하고 있긴 하지만 자본주의 체제를 뒤흔들 만큼 대안적인 세력으로 등장하지 않고 있다. 이 때문에 10월혁명 기념 행사들은 있었는지조차 모를 정도로 초라하게 지나갔다. 한국에서는 지난해 12월 1~2일 한국러시아사학회가 주최한 ‘러시아혁명 100주년: 유산과 평가, 그리고 한국적 이해’라는 학술대회가 열렸다. 이 학술대회에서 기조 발제를 한 한정숙 씨(이하 모든 존칭 생략)는 “러시아혁명은 처음부터 제국주의에 대한 거부를 자기정체성의 핵심”으로 삼고 있었으며, 그 때문에 반제국주의적 성격이 동방의 많은 식민지와 피억압 민족들에게 영향을 미쳤다고 올바로 지적했다.
하지만 그는 발제에서 논쟁을 유발할 많은 쟁점도 제기했다. 첫째는 1917년 2월 혁명이 자유주의적 자본주의의 길로 나아가는 출발점일 수도 있지 않았느냐는 것이다. 한정숙은 임시정부가 10월혁명으로 무너지지 않았을지라도 러시아에서 자유주의적 자본주의가 쉽게 안착했으리라는 보장은 없다고 말한다. 하지만 2월 혁명이 자유주의적 자본주의로 나아가려 했다고 보는 견해는 2월 혁명으로 이원(이중)권력이 등장한 상황에서 노동자 권력의 실체가 존재했음을 경시하는 태도로 보일 수 있다. 어찌 보면, 당시 러시아 부르주아지는 유약함과 우유부단함 그리고 노동자 계급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차르의 품에 있다가 2월 혁명에 의해 역사적 추월을 당했다. 그래서 러시아에서 자유주의적 자본주의의 가능성은 거의 존재하지 않았다고 봐야 할 듯하다. 둘째 쟁점은 러시아 혁명이 “비서구 공간에서 새로운 노선에 따라 포괄적 근대화가 진행된 과정” 중의 하나라고 지적한 것이다. 그는 “볼셰비키 혁명은 사적 소유권의 절대성에 대한 부정 위에 성립한 체제”였음에도 산업화에서 엄청난 성공을 거뒀다고 지적한다. 이 말은 포괄적 근대화를 추구했던 러시아 혁명이 스탈린의 공업화 정책으로 완성됐다는 의미로 읽힌다.
다른 한편 한정숙은 러시아 혁명 이후 진행된 근대화가 시민적 권리를 제한한 근대화였다고 지적한다. 러시아 시민이 정치적 주체가 되지 못하고 피후견자의 지위로 전락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한정숙은 러시아 혁명이 소련이라는 체제의 수립을 가져 왔지만 소련은 혁명의 약속을 실현하지 못했다는 뜻으로 러시아 10월혁명을 미완의 혁명이라고 부른다. 하지만 왜 그렇게 됐는지는 간단하게라도 밝히지 않는다.
10월혁명 100주년이 큰 관심을 받지 못했음에도 지난해 러시아 10월혁명을 다룬 책들이 꽤 출판됐다. 그 중에서 정재원·최진석 등이 편집한 《다시 돌아보는 러시아 혁명 100년》(문학과지성사, 2017)과 올랜도 파이지스의 《혁명의 러시아 1891~1991》(어크로스 2017)은 비판적으로 검토할 필요가 있는 책이다. 이 글은 러시아 10월혁명 100주년을 다룬 학술대회의 일부 발표 논문과 위의 책들에서 제기된 몇 가지 쟁점들을 다루고자 한다.
인민의 비극?
A People’s Tragedy: The Russian Revolution, 1891-1924, 1996, Penguin을 높이 평가했다. 파이지스는 한때 러시아 혁명과 소련 체제에 우호적이었지만 소련 해체 이후 러시아 혁명에 환멸을 드러낸 대표적 인물이다. 그는 스탈린 체제가 아니었다면 러시아 혁명 이후 소비에트 체제가 다른 길을 갈 수 있었을 것이라고 본 일부 수정주의 역사학자들과는 달리 러시아 혁명 자체를 ‘인민의 비극’으로 본다. 3
영국공산당 당원이자 자본주의와 제국주의 체제의 등장을 다룬 삼부작(《혁명의 시대》, 《자본의 시대》, 《제국의 시대》)의 저자로 유명한 에릭 홉스봄은 러시아 혁명을 ‘인민의 비극’이라고 본 올랜도 파이지스의 《인민의 비극》 《인민의 비극》 서문에서 파이지스는 다음과 같이 썼다. “책 제목이 나타내듯이, 인민의 혁명으로 시작한 것이 그 내부에 폭력과 독재의 씨앗을 내포하고 있음을 보여 주고자 했다. … 볼셰비키 정권이 승리하도록 했던 바로 그 사회 세력이 주된 희생자들이었다.”이런 관점이 이번에 국역 출판된 그의 《혁명의 러시아 1891~1991》에서도 그대로 드러난다.
5 이런 묘사는 새로운 민주주의가 등장했다는 그 자신의 지적과도 모순된다.
1917년 2월 혁명이 성공한 뒤의 상황을 파이지스는 “지금 거리를 지배하는 유일한 실질적 권력은 폭력의 힘이었다”거나 “술에 취한 노동자들과 군인들 수천 명이 상점을 약탈하고 가택에 침입하며, 말쑥한 옷차림의 시민들을 구타하거나 갈취하면서 도시를 휩쓸고 다녔다”고 기술했다.6 다른 페이지에서 파이지스는 “쿠데타에 불과할 정도의 소규모의 행동에 지나지 않았다. 볼셰비키가 권력을 장악하는 동안 극장, 식당, 시내 궤도전차는 정상적으로 운영됐다”고 주장했다. 7
파이지스는 더 나아가 10월혁명이 소수의 쿠데타였다고도 주장한다. “왜냐하면 10월혁명에 대한 가장 큰 오해 중 하나가 볼셰비키가 대중의 지지의 파도를 타고 압승을 거두었다는 주장이기 때문이다. 사실은 그렇지 않았다. 10월혁명은 소수 주민의 적극적인 지지를 받았던 쿠데타였다. 다만 그것이 소비에트 권력에 대한 민중의 이상에 집중되어 있던 사회혁명의 한복판에서 일어났을 뿐이다.”8 전시 공산주의는 백군과 연합군의 소비에트 러시아 침공 때문에 불가피하게 추진된 정책이었음에도, 파이지스가 마치 볼셰비키의 의식적 정책 또는 볼셰비키가 추구하고자 한 최고의 정책 등으로 묘사한 것은 10월혁명 자체를 비난하기 위해서다.
심지어 파이지스는 ‘전시 공산주의’를 볼셰비키의 의식적 정책이었고 그 핵심은 노동에 대한 통제였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레닌은 “우리에게 전시 공산주의를 강요한 것은 전쟁과 폐허였다. 전시 공산주의는 프롤레타리아의 경제적 과제에 부합하는 정책도 아니었고 그럴 수도 없었다. 그것은 임시방편이었다” 하고 지적했다. 전시 공산주의 시기 볼셰비키의 노동 정책이 노동자 통제였다는 점에 초점을 맞추는 류한수의 주장도 파이지스의 논조와 비슷하다. 러시아 혁명 100주년을 맞이해 러시아 혁명 연구자들의 글을 모아 펴낸 《다시 돌아보는 러시아 혁명 100년》 1편에서 류한수는 레닌과 볼셰비키가 노동의무제를 사회주의 체제 건설의 한 방법으로 봤다고 주장한다. 물론 레닌은 부자들을 대상으로 한 노동의무제 시행을 첫걸음 삼아 아주 차츰차츰 그리고 차근차근 도입해야 한다고 봤지만, 내전에 직면해 일반노동의무제가 노동자 대중에게로 확대됐다는 것이다. 류한수는 “1919년에 반혁명 세력의 파상 공세를 가까스로 막아 낸 볼셰비키 당 지도부는 노동력을 강제로 동원해서 무너진 경제를 되살리겠다는 전략을 세우고, 이를 위해 1920년에 일반노동의무제를 시행에 옮기는 일에 나섰다”고 지적하면서 레닌과 트로츠키도 노동의무제 도입에 적극적이었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류한수 자신도 인정하듯이, 노동의무제를 도입할 수밖에 없었던 배경이 “상당 부분 내전으로 말미암은 경제 붕괴 탓”이었다. 그런데 류한수는 이를 중요하게 보지 않고 볼셰비키가 노동의무제를 “(사회주의의) 지고한 원칙”에서 “억압책의 이론적 토대”로 바꿨다고 말한다. 그러나 전시 공산주의가 끝나고 신경제정책(일명 ‘네프’)이 실시되면서 일반노동의무제에 기초한 노동 동원은 종언을 고했다.류한수가 노동의무제와 더불어 강조하는 것이 또 있다. 바로 작업장에서 노동자 민주주의가 확립되지 않았다는 점이다. 류한수는 내전 말기와 네프 초기에 작업반장의 권위가 복원되는 현상을 두고 ‘되돌아오는 폭군’이라고 주장했다. “1920년에 접어들어 당이 공장에 다시 위계제를 복원하려는 움직임을 보이면서, 공장 노동자와 작업반장의 관계가 나름대로 대등한 쪽으로 나아가던 추세에 역전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그리고 볼셰비키당 지도부가 “1920년에 접어들어 산업 운영에서 지금까지 장려되어 온 집단협의제 경영 대신에 일인 경영을 수립”하도록 결정했다고 주장했다. 공장에서 “구체제로의 복귀”는 당연히 노동자들의 저항을 불러일으켰다는 것이다. 류한수는 1917년 10월혁명을 노동자 혁명으로 본다는 점에서 파이지스와는 분명한 차이를 보인다. 하지만 내전을 거치면서 볼셰비키는 다시 작업장에 “폭군이 복귀”하도록 했고, 이 때문에 “민주적 공장 관계를 만들어 보려던 실험은 마침내 물거품이 되었”다고 주장한다. 내전과 전시 공산주의를 거치면서 프롤레타리아는 해체됐지만 프롤레타리아 독재는 존속하는 모순이 존재했다. 하지만 정치적 상부구조와 그 이데올로기는 물질적 토대를 직접 그리고 즉시 반영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인식해야 한다. 레닌은 1920년 11월 3일에 한 연설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부르주아지에 맞선 투쟁에서 프롤레타리아가 날카로운 계급의식, 엄격한 규율, 철저한 헌신을 발전시키지 못했다면, 다시 말해 프롤레타리아가 숙적을 물리치고 완전한 승리를 쟁취하는 데 필요한 자질을 모두 발전시키지 못했다면 프롤레타리아 독재는 불가능했을 것입니다.”
프롤레타리아는 해체됐지만 프롤레타리아 독재는 존재하는 모순은 내전 이후 1920년대 내내 러시아 공산당 내부에서 일어난 논쟁의 배경이었다. 좌익반대파, 우익반대파, 중도파는 네프와 혁명의 국제적 확산 등을 두고 격렬한 투쟁을 벌였다. 아래 인용문은 그 투쟁을 무시하는 태도를 보인다.
혁명 이전 제정 러시아의 공장 작업장을 지배하던 강압적 권력 관계가 소비에트 러시아의 공장에 거의 완전하게 복원되었다. 공장 작업장의 ‘왕정복고’가 이루어진 셈이다. 1930년대 말에 이르러 소련은, 비록 많은 문제점을 안고 있었더라도, 공업 강국이 되어 있었다. 그러나 그 공업 생산력은 작업장의 민주주의라는 노동자들의 염원을 희생하고서 이루어진 성과였다.
10월 이후 볼셰비키가 처한 상황의 엄중함
《다시 돌아보는 러시아 혁명 100년》 1편에 실린 정재원의 글은 볼셰비키가 지도한 10월혁명 그 자체가 소비에트 민주주의를 철저하게 파괴한 사건이었다고 규정한다. 국가소멸론의 변질이 첫째 이유이고 소비에트의 변질이 둘째 이유이며, 볼셰비키 정부가 공장위원회를 탄압한 것이 셋째 이유라는 것이다.
15 마르크스는 노동자 국가가 소멸할 것으로 봤지만 레닌과 볼셰비키는 오히려 프롤레타리아트 국가가 장기적으로 존속할 것으로 봤다는 것이다.
정재원은 “레닌은 과도기 단계에 수립된 프롤레타리아트 국가는 소멸 이전에 잠정적으로 존속하는 것이 아니라, 장기적으로 존속한다고 주장하기 시작했”기 때문에 국가소멸론의 변질이 시작됐다고 주장했다. 정재원은 “볼셰비키의 반소비에트적 조치들로 인해 많은 노동자들이 반볼셰비키적 행동을 조직하기 시작했다”고도 주장한다. “주요 도시들에서는 소비에트 원칙을 수호하라고 주장하는 멘셰비키 등에 대한 지지가 급격하게 증가했다”고도 한다. 이런 상황에 대한 볼셰비키의 대응이 “타 정당 활동 금지 조치 및 적색 테러의 공식화 등”이었고, 이 때문에 소비에트 민주주의가 질식당했다고 주장한다.戰時에 이런 토론의 자유가 허용될 수 있었을까?
하지만 사실은 이와 다르다. 1921년 내전이 끝날 무렵 소련 공산당은 노동자 반대파의 강령을 25만 부나 인쇄했고, 반대파 성원 두 명이 공산당 중앙위원에 선출됐다. 민주주의가 질식된 상황이었다면 전시정재원의 주장은 10월혁명 직후 벌어진 연합군과 반혁명 세력의 침공에 맞서 소비에트 체제를 지키고자 한 노력을 스탈린의 국가 강화론과 혼동하는 데서 비롯한 것이다. 정재원의 논리대로라면, 레닌과 볼셰비키는 소비에트 체제를 위협하는 세력에게 권력을 넘겨 줬어야 할 것이다. 정재원은 자신의 글 결론 부분에서 실제로 그렇게 주장했다.
17 정재원은 시장 체제를 거부하지 않는 사회민주주의나 급진 민주주의를 대안으로 내세우고 있는 셈이다.
정재원은 “스탈린이 아니라 이미 레닌 시기에 핵심적인 사회주의 원칙들이 폐기되었다”고 주장하며, 오늘날 중요한 함의는 이런 사태 전개를 어떻게 설명할지를 숙고하는 것이라고 한다. 그가 주장하는 바는 “인간이 사적 소유와 시장을 완전히 대체할 수 있다는 믿음은 헛된 것이었음을 인정”하는 바탕 위에서 “시장의 폭력성을 제어할 수 있는 공동체적 민주주의와 실질적인 사회경제적 민주주의를 실현할 다양한 방안들”을 내놓아야 한다는 것이다.《다시 돌아보는 러시아 혁명 100년》 1편에는 박노자의 ‘러시아 혁명의 의의, 100년 후에 다시 돌아보다’가 실려 있다. 이 책의 총론 격 글이다.
18 이는 10월혁명이 서구식 복지국가를 유산으로 남겨 놓았기 때문에 오늘날의 러시아와도 연속성이 있다는 박노자의 지론이다.
박노자는 10월혁명이 “그 본래의 취지를 끝내 완수하지 못했다는 것”을 인정하더라도 스탈린 체제를 거쳐 오늘날까지도 발전의 궤도를 차근차근 밟아 왔다고 주장한다. 그 근거는 “무상의료와 무상교육은 여전히 유효하며, 제정 러시아 시대의 국교 등은 부활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한다. 박노자는 10월혁명이 복합 혁명의 성격을 지니고 있었으므로, 해결해야 할 다양한 과제들이 어떤 경우에는 서로 충돌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박노자는 “혁명의 두 가지 원칙이 상호 충돌할 경우 하나는 희생되어야 할 때가 있었다”면서 레닌 시절에는 민족자결권 지지 원칙이 그 하나였다고 주장하고 그루지야(현재의 조지아) 사건을 그 근거로 제시했다.그런데 박노자가 소비에트 정부 초기의 여러 실수들(예를 들어 폴란드 침공)을 사례로 든다면 모를까, 그루지야 사건을 레닌이 피억압 민족의 자결권을 부정한 사례로 언급하는 것은 의도적 왜곡처럼 보인다.
레닌과 볼셰비키는 사실 발트해 연안 국가들처럼 그루지야에 대해서도 부르주아 공화국의 설립을 인정하기로 했다. 하지만 그루지야 볼셰비크의 잘못된 판단과 당시 러시아 소비에트 정부의 민족문제 인민위원이었던 스탈린(그는 그루지야 출신이다)의 야심이 결합해, 소비에트 군대가 그루지야를 침공해 그루지야 소비에트 공화국을 건설했지만 광범한 대중적 저항을 받았다. 이것이 그루지야 사건이다. 이 사실을 나중에 인지한 레닌은 그루지야에서 중요한 양보를 하고 심지어 이전의 멘셰비키 지도자였던 조르다니아와 제휴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Moshe Lewin이 편집한 책에서 폭로됐다(Lenin’s Last Struggle, Monthly Review Press, 1968). 이 책은 국내에는 《레닌의 반스딸린 투쟁》(신평론, 1989)으로 번역돼 소개됐다.
하지만 스탈린은 러시아의 경제적 이득만을 고려해 트랜스캅카스공화국이라는 발상을 제시했다. 스탈린과 같은 편에 섰던 오르조니키제(그도 그루지야 출신이다)는 이에 반대한 그루지야 볼셰비키 지도자 한 명을 구타하기까지 했다. 처음에 레닌은 스탈린을 지지했지만 사태의 성격을 파악한 뒤에는 스탈린과 오르조니키제의 민족 정책이 대러시아 국수주의라고 날카롭게 비판했다. 이 사실은 부하린주의자인 모셰 르윈 러시아 혁명이 동방의 식민지 및 반식민지 인민들의 해방 투쟁을 촉구할 수 있다는 점을 인식하고 그들의 민족자결권을 무조건적 옹호했던 인물이 바로 레닌이었다. 그와 달리, 스탈린은 소비에트 연방이라는 허울 좋은 이름으로 소수민족들을 소련 연방에 강제 편입시켰으며(대러시아주의), 강제 이주나 민족 토착어 사용 금지 같은 억압 정책들을 폈다. 강제 이주된 우크라이나의 고려인들에게 남아 있는 알량한 복지를 두고 스탈린 체제 하에서도 10월혁명의 전통이 남아 있었다고 말할 수 있을까! 황당하게도 박노자는 뒤에서 “장기적으로 10월 혁명이 ‘제3세계 운동’의 모태 역할을 한 것이나 다름 없다”고 완전히 상반된 주장을 펴고 있다.박노자는 소비에트 러시아가 잘못한 또 다른 사례로, 노농국가를 표방하면서도 농민을 노동자와 동등하게 대우하지 않았다는 점을 말한다. 박노자는 탐보프 지역 농민 반란과 크론시타트 봉기를 그 예로 제시한다. 탐보프 반란은 러시아 내전 기간에 볼셰비키 정권에 반대해 일어난 농민 반란으로 사회혁명당 소속의 전직 장교 알렉산드르 안토노프가 주동자였다. 발단은 볼셰비키가 곡물을 강제로 징발하는 정책(식량 할당) 때문이었는데, 징발을 확대하면 기아로 농민들의 사망자가 늘어날 수밖에 없었다. 탐보프 등장한 농민 반란으로 의회는 소비에트 권력을 제거하고 토지개혁을 주장하는 제헌의회를 선포했다. 이 반란을 겪은 소비에트 지도부는 식량 할당 정책을 폐지하고 식량 현물세 정책으로 전환했다. 현물세가 낮았으므로, 이 정책은 농민들에게 실질적으로 양보하는 것이었다. 뒤이어 크론시타트 반란과 진압이 있었고, 이어서 신경제정책이 도입됐다. 앞에서 언급한 파이지스, 류한수, 정재원 등과 마찬가지로 박노자도 볼셰비키가 전시 공산주의 정책을 펼 수밖에 없었던 절박한 사정을 전혀 고려하지 않는다. 영국과 독일 등 연합군의 공격과 백군들의 저항에 직면한 소비에트 권력은 어떻게 해서라도 노동자 권력을 지키고자 했다. 그 과정에서 탐보프 반란 진압이나 크론시타트 반란 진압 같은 불가피했지만 비극적인 사건들이 벌어졌다. 레닌은 “우리가 전례 없는 폐허 상황에서 벗어날 다른 방법은 없었”다고 지적했다. 레닌은 전시 공산주의 정책이 오류를 범했을 수도 있고, 또 어떤 때는 극단으로 치우쳤을 수 있지만 “당시의 전쟁 상황에서 우리의 정책은 대체로 올바른 것이었”다고 평가했다. 바로 군사적 위협에 맞서 소비에트 러시아를 방어하는 목표를 달성했기 때문이다.
레닌-스탈린 연속성론 비판
《다시 돌아보는 러시아 혁명 100년》에서 고려할 또 다른 글은 노경덕의 ‘스탈린-트로츠키 경제 ‘논쟁’ 재고, 1923-27: 레닌주의와 스탈린주의의 연결성 조명’이다. 이 글의 핵심은 레닌이 스탈린을 낳았고, 경제정책에서는 트로츠키도 스탈린과 다를 바 없었다는 주장이다. 노경덕은 1923년부터 1927년까지 소련의 고위 정치 문서들을 분석해 본 결과, “스탈린과 트로츠키가 권력투쟁 과정에서 각각 내세웠던 이념과 경제정책에는 근본적인 차이가 존재하지 않았”다고 주장한다.
둘 모두 프롤레타리아 독재 확립을 지상 목표로 설정하면서, 이를 이루기 위한 수단으로 공업화를 최우선 과제로 상정했다. 둘 모두 신경제정책 덕에 부활한 소련 경제에서의 자본주의 요소, 즉 부농(쿨라크)과 자영업자의 성장을 경계하려 했다. 그들 논의는 공업화의 재원을 마련하기 위한 수단에 집중되었는데 둘 모두신경제정책의 대원칙, 즉 농업과 공업의 동맹을 깨뜨리려는 의도, 즉 농촌의 잉여 징발을 통해 공업화를 이루려는 의도는 적어도 1920년대 중반까지는 없었다.노경덕은 과감하게도 스탈린과 트로츠키 사이의 갈등은 스탈린의 당 기구 장악과 이로 말미암은 트로츠키의 소외 문제, 즉 단지 공산당 내 권력 투쟁 문제였다고 본다. 그래서 노경덕은 “이들 간의 이념 및 경제정책 논쟁은 매우 치열해 보여 많은 학자들의 시선을 빼앗았지만 사실 이 같은 정치 쟁점을 포장하는 수사에 가까웠던 것”이라고 결론짓는다.
냉전 시절에나 나올 법한 삼류소설 같은 얘기다. 이런 글이 버젓이 발표되는 것을 보면, 개방된 소련 문서고에서 아무리 많은 사료를 찾는다 할지라도 제대로 된 역사 서술이 보장되지는 않을 수 있다는 교훈을 얻을 수 있다.
10월혁명의 조직자이자 적군 사령관이었던 트로츠키를 중심으로 결성된 좌익반대파는 신경제정책을 반대하지 않았지만, 신흥 부르주아지와 이들과 결탁한 관료들의 힘이 증대되는 것을 저지하고자 했고, 산업화 계획을 실행해 노동자 민주주의의 기반을 확립하려 했다. 또한 좌익반대파는 소비에트 러시아가 산업화를 재촉하기 위해 필요한 재원을 확보하려면 불가피하게 농민들의 희생이 필요하다고 봤다. 따라서 좌익반대파는 노동자와 농민 사이의 갈등을 완화시키려면 혁명의 국제적 확산과 이로부터 소비에트 러시아가 도움을 받아야만 한다고 봤다.
반면 스탈린을 중심으로 결집한 당과 국가 관료들의 분파인 ‘중도파’는 소비에트 국가와 당 안에서 형성되고 부상하고 있던 관료들의 이해관계를 대변했다. 그들은 처음에는 우익반대파와 동맹을 맺기도 했지만, 핵심으로는 하나의 계급으로 발전하던 관료들의 이해관계를 옹호했다는 점에서 우익반대파와 달랐다. 1924년 스탈린이 주장한 일국사회주의론은 혁명이 고립될지라도 러시아 내에서 자신들의 지위와 특권을 유지하고 그렇게 하기 위해 노동자와 농민들을 착취해야 했던 관료들의 이해관계를 잘 반영하는 이론이었다. 따라서 일국사회주의론은 국제사회주의라는 목표로 향하는 좀더 신중한 길이 아니라 전혀 다른 목표를 향하는 길이었다.
노경덕은 이런 차이들을 “정치적 수사”라고 일축한다.
결론
러시아 10월혁명 100주년에 맞춰 출간된 책들이 여럿 있지만, 그 관점은 한결같이 문제가 많다. 이 저작들에서 나타나는 공통점은 레닌이 스탈린을 낳았다는 연속성 테제를 대체로 받아들이고 있을 뿐 아니라 레닌이 지도하던 전시 공산주의 때부터 혁명의 실패가 노정돼 있었다는 것이다. 지난해 가장 늦게 출간된 《러시아혁명 1917~1938》(사계절, 2017)의 저자 실라 피츠패트릭은 이런 연속성 테제를 가장 강력하게 주장하는 인물이다. 이런 책들에서 유익한 교훈을 얻기는 불가능하다.
그럼에도 지난해 러시아 10월혁명과 관련해 유익한 책들도 출간됐다. 알렉산더 라비노비치의 《1917년 러시아혁명》(책갈피, 2017), 존 뉴싱어의 《붉게 타오른 1917》(책갈피, 2017), 최일붕의 《러시아 혁명: 희망과 좌절》(책갈피, 2017) 등이 그것이다. 존 리드의 《세계를 뒤흔든 열흘》(책갈피, 2005), 토니 클리프의 《레닌 평전》 3~4권(책갈피)과 함께 꼭 읽어 봐야 할 책들이다.
주
- 한정숙 2017a. ↩
- 한정숙 2017a. ↩
- 한정숙 2017b, p114. ↩
- Piges 1996, Preface. ↩
- 파이지스 2017, p113. ↩
- 파이지스 2017, p140. ↩
- 파이지스 2017, p146. ↩
- 레닌 ‘현물세’, 1921. 클리프 2010, p145에서 재인용. ↩
- 류한수 2017, p177. ↩
- 류한수 2017, pp185-199. ↩
- 류한수 2008. ↩
- 류한수 2008. ↩
- 클리프 2010, p185에서 재인용. ↩
- 류한수 2008. ↩
- 정재원 2017, p209. ↩
- 정재원 2017, pp216-218. ↩
- 정재원 2017, pp248-250. ↩
- 박노자 2017, p17. ↩
- 박노자 2017, p21. ↩
- 박노자 2017, p28. ↩
- 클리프 2010, pp199-204. ↩
- 클리프 2010, p144-145. ↩
- 노경덕 2017, p257. ↩
- 노경덕 2017, p257. ↩
- 노경덕 2017, p258. ↩
참고 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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