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자 투고
4월 테제를 통해서 본 레닌의 연속혁명론
1917년 러시아 혁명에 대해 말하면서 레닌의 혁명정당론과 트로츠키의 연속혁명론을 빼놓는 것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과 다름없다. 한편 레닌이 연속혁명론에 근접한 ‘모든 권력을 소비에트로’를 선언하지 않았다면 우리는 러시아 혁명 승리 100주년을 기념하고 있지 못할 것이다. 그런 점에서 부르주아 임시정부를 타도하고 소비에트가 권력을 장악해야 한다는 슬로건을 핵심으로 하는 ‘4월 테제’를 분석하고 그러한 전술 변경이 어떻게 가능했는지 살펴보는 것은 러시아 혁명을 이해하는 데 반드시 필요하다.
레닌과 볼셰비키는 1905년 이래 ‘프롤레타리아트와 농민의 혁명적 민주주의 독재(이하 민주주의 독재)’를 전술 공식으로 삼아 왔다. 비록 1905년 혁명을 경험하면서 레닌이 쓴 여러 글에는 이 공식에서 벗어난 관찰이 나타나기도 하지만 볼셰비키의 공식 입장으로서 민주주의 독재라는 개념은 1917년까지 유지됐다. 1917년 4월 망명에서 돌아온 레닌은 이 공식을 낡은 것이라 버리고, ‘모든 권력을 소비에트로’를 선언한다. ‘4월 테제’는 모두를 놀라게 했지만 결국 볼셰비키는 이에 기초해 10월 혁명을 승리로 이끌 수 있었다.
아래에서는 먼저 민주주의 독재와 ‘4월 테제’의 내용을 각각 검토하고, 이런 정치적 전환에 대한 러시아사회민주주의의 반응을 요약한다. 둘째, 전환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던 제국주의에 대한 레닌의 연구를 검토한다. 셋째, ‘4월 테제’ 전후에 레닌이 작성한 글을 통해 그 내용을 풍부하게 이해하려고 시도한다. 끝으로 ‘4월 테제’가 어떤 운명을 맞이했는지 간략히 살펴본다.
《민주주의 혁명에서 사회민주주의의 두 가지 전술》 vs ‘4월 테제’
1905년 혁명이 벌어지자 러시아사회민주노동당은 이에 대응하기 위해 당 대회를 소집했다. 레닌이 소집한 이 대회는 볼셰비키만 참석했고, 멘셰비키는 따로 협의회를 개최했다. 두 분파는 혁명에 대해 서로 다른 전술을 내놓았고, 레닌은 《민주주의 혁명에서 사회민주주의의 두 가지 전술》(이하 《두 가지 전술》)을 통해 이를 비교했다. 두 분파는 러시아 혁명이 부르주아적이라는 데 동의했다. 그러나 멘셰비키는 부르주아지가 혁명을 주도하고 정부에서 다수를 구성해야 한다고 보았다. 프롤레타리아트는 혁명적 야당으로서 부르주아지를 견제하고 추동하는 임무를 맡아야 했다.
大 부르주아지의 반혁명 시도에 맞서 혁명을 지켜야 하기 때문이다. 이 정부 안에 프롤레타리아가 어느 정도로 참여할지는 정해져 있지 않지만 1 레닌은 해결 과제의 측면에서 이 정부를 대체로 프티부르주아적 민주주의 정부로 가정했다. 정부 형태는 혁명을 지키기 위해 무장과 반대파에 대한 견제가 필요하다는 점에서 자코뱅 독재와 유사하게 보았고, 정부는 대체로 자코뱅 같은 혁명적 프티부르주아지와 프롤레타리아트로 구성된다고 보았다. 정부의 계급 구성, 즉 권력 문제에서 레닌은 여러 가지 여지를 남겼다. 결국 서로 다른 계급간 동맹 정부이기 때문에 구체적인 계급 구성을 미리 상세히 계획할 수는 없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는 멘셰비키의 전술처럼 혁명 이후 프롤레타리아가 정부에 참여하지 않고 야당으로 남는다면 혁명의 성과를 부르주아가 독점할 것이기 때문에, 프롤레타리아는 정부에 참여해서 사회민주주의의 최소강령적 요구들을 최대한 쟁취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레닌은 민주주의 독재가 부르주아적 한계를 벗어나지 않지만 프롤레타리아만이 민주주의를 위해 일관되게 싸울 수 있다는 점을 여러 곳에서 거듭 강조한다. 그런 점에서 민주주의 독재가 실제 현실에서 프티부르주아적 독재 정부가 될 것인지 프롤레타리아가 헤게모니를 쥔 독재 정부일지는 결정된 것이 아니었다.
레닌과 볼셰비키는 프롤레타리아트, 농민, 도시와 농촌의 프티부르주아지가 혁명을 주도하고, 이들 동맹 세력들이 민주주의 독재 정부를 구성한다고 보았다. 민주주의 독재가 민주주의인 이유는 이것이 부르주아 민주주의적 한계 안에서 작동하기 때문이고, 독재인 이유는 차르와 대2 프롤레타리아트가 자신의 이익을 위해 민주주의 독재를 이용하는 실제 상황에서는 부르주아지의 저항을 무력으로 분쇄하고, 프티부르주아지의 동요를 막고, 반半프롤레타리트를 자신에 통합시키면서 사회주의 혁명으로 나아갈 수 있다고 말하기도 하지만, 3 러시아 혁명은 부르주아적 한계를 벗어날 수 없다. 4
레닌에 따르면 민주주의 독재 정부는 생산의 사회화 같은 사회주의적 조치를 취할 수 없지만 자본주의 발전에 장애가 되는 것들을 제거하면서 프롤레타리아가 자유롭게 투쟁할 수 있는 조건을 만들어야 했다. 토지 재분배, 완전한 민주주의 확립(보통 선거권, 의회 등), 8시간 노동제 등이 그것이다. 레닌은 러시아의 경제발전 수준이 사회주의 혁명을 할 정도가 아니라고 했다. 또한 ‘노동계급의 해방은 노동계급 자신의 행동에서 비롯하는 것인데, 러시아 프롤레타리아트의 계급의식과 조직 수준은 아직 그에 미치지 못한다’고 판단했다. 그래서 사회주의 혁명을 한다는 것은 ‘무정부주의적’ 사고에 가까운 것이었다.《두 가지 전술》은 러시아 사회와 정치세력에 대한 매우 구체적인 통찰을 담고 있지만, 이것들이 부르주아 혁명과 사회주의 혁명을 기계적으로 구분하는 제2인터내셔널의 공식과 혼합되면서 서로 모순되는 여러 주장을 만들었다. 그러나 전체적으로 보아 다음 두 가지 내용이 핵심이다. 1) 혁명은 역사적으로 규정된 부르주아적 한계 안에 있다. 2) 그럼에도 불구하고 노동계급이 혁명을 주도하면서 성과를 자신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최대한 확대해야 한다. 이것이 볼셰비키를 비롯한 러시아사회민주주의가 이해한 레닌의 민주주의 독재 전술이었다. 그래서 1917년 레닌이 돌아와 혁명의 부르주아적 단계와 사회주의적 단계를 구분하는 낡은 공식을 버리라고 요구했을 때 모두 경악을 금치 못했던 것이다.
全러시아노동자병사대표소비에트 총회 중 볼셰비키 대표단에게 한번, 볼셰비키와 멘셰비키 대표단에게 한번, 이렇게 두 번 이 글을 읽는다. 이 문서는 러시아 노동자들이 혁명을 발전시키기 위해 해야 할 일을 10가지로 요약한다.
‘4월 테제’로 알려진 글의 제목은 ‘당면 혁명에서 프롤레타리아의 임무’였다. 4월 3일 스위스 망명지에서 돌아와 페테르부르크에 도착한 레닌은 다음날 전1. 부르주아 임시정부는 전쟁을 계속할 것이다. 우리는 ‘혁명적 패배주의’ 입장에서 물러나지 않을 것이다. 자본주의와 제국주의는 서로 분리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에 전쟁을 끝내려면 자본주의를 제거해야 한다. 계급 의식적인 프롤레타리아트는 다음 세 가지 조건 위에서 혁명적 패배주의를 정당화할 혁명 전쟁에 동의할 것이다. a) 프롤레타리아트 그리고 프롤레타리아트와 동맹한 빈농의 권력 장악, b) 합병된 영토의 원상 복귀, c) 모든 자본주의적 이해와의 완전한 단절.
2. 러시아 혁명은 첫 번째 국면을 지나 두 번째로 넘어가고 있는데 이제 프롤레타리아와 빈농이 정치권력을 장악해야 한다.
3. 임시정부에 대한 어떤 협력도 해서는 안 된다. 부르주아 정부에게 제국주의 정부이기를 멈추라고 요구하는 것은 그들이 할 수 없는 일에 대한 요구이므로 사실상 그들에 대한 환상을 불러일으킬 뿐이다.4. 노동자대표소비에트만이 유일한 혁명정부임을 대중이 인식하게 하자.
5. 노동자대표소비에트에서 의회주의 공화국으로 되돌아 가는 것은 역사적 퇴보이다. 경찰, 관료기구, 군대는 폐지해야 한다.
6. 농업강령에서 강조점은 농업 노동자대표소비에트에 둔다. 모든 토지를 국유화하며 농업 노동자대표소비에트를 농민대표소비에트와 별도로 조직한다.
7. 국내의 모든 은행을 하나의 국립은행으로 통합하고 그것을 소비에트의 통제 하에 둔다.
8. 생산을 사회화하고 생산물의 분배를 즉시 소비에트의 통제 하에 둔다.
9. 당은 즉시 회의를 소집해 강령을 바꾸고 당의 명칭도 공산당으로 바꿔야 한다. 강령에서 수정해야 할 부분은 특히 제국주의와 전쟁, 국가에 대한 태도와 코뮌 국가의 건설, 시대에 뒤떨어진 최소 강령이다. 10. 사회배외주의
8 그런데 ‘4월 테제’는 사회주의 독재 건설에 근접한 것을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결국 ‘4월 테제’는 제국주의와 전쟁에 대한 반대, 부르주아 임시정부가 장악한 러시아 국가기구의 전복, 부르주아 임시정부의 타도, 노동자대표소비에트의 권력 장악, 프롤레타리아 헤게모니, 농민 전체가 아니라 농업 노동자에 대한 강조, 소비에트에 의한 은행 통제와 생산의 사회화로 자본주의를 넘어서기 등을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이는 토지 재분배, 민주공화국의 건설, 정부 구성에서 노동자 대표가 다수 또는 소수로 참여할 가능성을 열어 두기, 혁명의 주도 세력인 프롤레타리아트+농민+도시와 농촌의 프티부르주아지의 단결, 자본주의 체제 안에서 노동자와 인민 전체의 자유, 권리, 생활 수준의 향상 등을 핵심으로 하는 민주주의 독재 전술과는 현저하게 다른 것이다. 《두 가지 전술》에서 레닌은 민주주의 독재와 사회주의 독재를 구분하고 당면한 러시아 혁명은 민주주의 독재를 건설하는 것이라고 말했다.9 그래서 러시아 인구의 다수인 농민을 혁명에 끌어들이는 일을 중요하게 생각했다. 또 자본주의 발전의 ‘일반적인 형태’를 따라 러시아에서 자본주의가 성숙하려면 농촌에서 사회 분화가 더 진전돼야 한다고 생각했다. 10 그래서 러시아 자본주의가 미성숙한 만큼 농민을 다룰 때에도 하나의 전체로 다루는 경향이 있었다. 《두 가지 전술》에서 농민은 지주를 제외한 농민 부르주아지부터 농촌 프롤레타리아트를 모두 포괄하고, 농민위원회가 이들의 업무를 관장하게 하는 것이었다. 농민이라는 표현이 농민 부르주아지와 농촌 프롤레타리아트 간 계급 투쟁을 내포하지만 농민 전체는 ‘부르주아 민주주의적 의미에서는 혁명적’이라는 것이다. 11 이와 달리 ‘4월 테제’에는 《두 가지 전술》에는 나오지 않는 빈농과 농업 노동자가 등장하고, 이들은 농민대표소비에트와 별도의 소비에트를 건설해야 한다. ‘4월 테제’는 농업 노동자와 빈농의 독립적인 조직을 강조하고 농민들 사이의 계급투쟁을 전제한다. 12 계급 투쟁이 민주주의 독재 전술이 가정했던 상황을 뛰어넘었다는 인식의 반영이다.
농민을 다루는 레닌의 태도 변화 역시 흥미롭다. 레닌에게 농민 문제는 계속해서 중요한 문제였다. 그는 1789년 프랑스 부르주아지는 농민의 지지를 받았기 때문에 승리했고, 1848년 독일 부르주아지는 농민을 배신했기 때문에 패배했다고 하면서 러시아에서도 농민 문제가 결정적이라고 보았다. ‘4월 테제’를 발표한 4월 4일부터 4월 29일까지 대략 한 달여 동안 레닌은 소수파로 전락하고 볼셰비키 다수의 비난을 받았다. 4월 4일 콜론타이는 자신을 제외한 모든 볼셰비키가 레닌에 반대한다고 썼다. 그들은 레닌이 트로츠키주의자가 됐다고 했다. 카메네프는 볼셰비키 기관지 〈프라우다〉 편집자와 중앙위원회 사무국이 ‘사회주의 혁명으로의 전화’라는 레닌의 주장을 반대한다고 밝혔다. 레닌이 돌아오기 전까지 스탈린과 카메네프를 중심으로 한 지도부는 임시정부가 2월혁명을 강화한다고 보고 이에 대한 지지를 표명했었다. 그래서 전쟁 중단을 위해 투쟁할 것이 아니라 임시정부에게 외국 정부와 평화협상을 하라고 요구하는 방식으로 행동해야 한다고 봤다.14 레닌은 〈프라우다〉가 카우츠키주의 쪽으로 동요하고 있다고 비판한다. 15
러시아에 돌아온 후 레닌은 여러 번 낡은 볼셰비즘, 낡은 볼셰비키, 낡은 공식과 같은 말을 되풀이했다. 칼리닌은 레닌이 자신과 같은 사람을 낡은 볼셰비키라 부르고 혁명의 장애물로 비난하는 것에 대해 놀라움을 표시했다. 카메네프는 레닌이 지금 상황을 1871년 파리코뮌과 비슷한 것으로 보고 있지만 러시아는 아직 1789년과 1848년 프랑스 혁명들이 이룩한 것도 성취하지 못했다고 말했다. ‘4월 테제’는 4월 8일 볼셰비키의 페테르부르크위원회에서 거부됐고, 모스크바와 키에프 지방위원회도 같은 방침을 내렸다. 레닌은 4월 14일 페테르부르크위원회 회의에서 처음 승리했는데 이 회의는 ‘임시정부를 타도하라’는 슬로건을 채택했다. 카메네프는 이 슬로건이 조직을 와해시킬 것이라고 비난했다. 4월 24~29일에 열린 제7차 러시아사회민주노동당 전국협의회는 레닌의 결정적 승리였다. 레닌이 작성한 초안 성격의 문서에서 후퇴하기는 했으나, 협의회 결정문은 다음 내용을 포함하고 있었다. 1) 임시정부는 기본적으로 지주와 자본가들의 정부이다. 2) 임시정부가 참여하는 전쟁은 차르가 참여한 전쟁과 같은 성격의 것이다. 3) 임시정부에 대한 지원이나 소비에트에 의한 임시정부의 감독을 모두 거부한다 4) 권력은 소비에트가 장악해야 한다. 5) 사회혁명당과 멘셰비키 대부분은 방어주의 입장을 취하고 있으므로 이들과 통합하지 않는다. 6) 러시아가 당장 사회주의로 나아갈 수는 없지만 현 상황은 사회주의로의 이행을 위해 이미 성숙한 선진국에서 전쟁이 만든 상황과 비슷하다. 노동계급의 활동을 프티부르주아지가 받아들일 수 있는 한계 안에 묶어 두는 것은 불가능하다. 사회주의를 향한 실제적인 조치를 취해야 한다. 이제 ‘4월 테제’의 주요 주장들이 관철됐고, 레닌이 다수파가 됐다. 한 달여의 과정에서 레닌이 종종 자신의 주장을 완곡하게 표현하거나 사회주의의 도입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고 말하기도 했지만, 카메네프가 그랬듯이 볼셰비키는 레닌의 주장을 러시아에서 사회주의 혁명이 가능하다는 것으로 이해했다. 이제 러시아는 단지 부르주아 혁명을 수행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넘어 사회주의로의 이행을 염두에 두어야 했다.전쟁, 제국주의 그리고 혁명
18 1914년 전쟁이 시작되고 레닌은 제국주의 전쟁에 반대하는 정치활동과 연구에 몰두한다. 1916년에 쓴 《제국주의론》에 따르면, 자본주의적 제국주의는 국제적으로 활동하는 거대 자본들에 의해 위계적으로 분할돼 있다. 위계는 자본의 크기와 대체로 그것에 비례하는 힘의 크기에 따라 만들어지는데, 거대 자본은 경쟁적으로 투쟁하면서 자기 지배 영역 안에서 하위 파트너들과 유기적인 관련을 맺는다. 위계는 거대 자본들 안에서도 존재하는데, 이에 따라 세계시장 분할의 몫이 정해진다. 자본주의 발전이 불균등하기 때문에 한번 정해진 분할의 비율은 고정되지 않고 계속 변화한다. 제국주의의 경제적 측면은 정치적 측면과 상호작용하며 제국주의 국가들에 의한 세계의 영토적 분할과 재분할, 전쟁, 동맹, 평화협정을 낳았다. 세계적인 규모의 전쟁은 이러한 분할과 재분할이 폭력적인 방식으로 드러난 것이고, 동맹, 휴전, 평화협정 등도 전쟁과 마찬가지로 세계적 차원에서 세력을 확장하기 위한 정치 투쟁의 형태이다. 19
레닌이 민주주의 독재 전술을 버리고 소비에트 권력이라는 새로운 전술을 고안하게 된 것은 세계대전과 제국주의에 대한 연구 덕분이었다.20 전쟁 당사국 지배계급의 운명이 서로 밀접하게 얽히는 만큼 피지배계급의 운명도 강한 연관을 갖게 된다.
제국주의 전쟁은 자본 축적 위기의 표현일 뿐 아니라 위기를 심화시킨다. 전쟁으로 인한 사회적 위기는 대중의 불만을 고조시키고 혁명적 동요를 일으킨다. 자본주의가 세계체제이고 전쟁으로 폭발한 위기가 세계적이어서 혁명적 위기도 세계적 차원에서 벌어진다.21 파리코뮌처럼 국가간 전쟁을 내전으로 전화해야 한다고 보았다. 국제적으로 노동계급은 그때보다 더 성장했고, 사회주의를 위한 객관적 조건도 더 나아졌으며, 혁명 운동이 국제적으로 단결하고 있기 때문에 코뮌의 정신을 더 잘 실현할 수 있게 됐다. 22 그런데 사회배외주의는 조국 방어를 내세우며 사회주의를 배신하고 있다. 23 노동계급은 모두 자기 정부의 패배를 위해 싸워야 한다. 제국주의 전쟁을 내전으로 전화해야 한다.
자본주의의 세계적 성격, 자본주의의 발전과 위기를 표현하는 제국주의, 위기의 폭력적 발현인 전쟁, 위기로 인한 국제적인 혁명의 가능성 등에 대한 진단은 사회주의자들의 행동지침과 연결돼 있다. 사회주의자들은 전쟁이 벌어지는 정치경제적 위기 상황에서 사회주의 혁명으로 나아갈 것이라고 선언했다.24 기회주의자들과 사회배외주의자들로 타락한 제2인터내셔널은 이러한 과제를 수행할 수 없기 때문에 새로운 국제 조직, 제3인터내셔널을 건설해야 한다. 25
제국주의가 세계를 분할하며 약소 민족을 약탈하기 때문에 제국주의에 맞서는 투쟁은 민족 억압에 맞선 투쟁과 하나가 된다. 억압하는 민족의 사회주의자들은 피억압 민족의 자결권을 위해 앞장서서 싸워야 한다. 피억압민족의 사회주의자들은 억압민족의 노동자와 피억압민족 노동자의 단결을 위해 싸워야 한다.a series of revolutions’이 벌어질 것인데, 러시아 노동계급이 제일 먼저 전면에 나서는 영광스러운 일이 벌어졌다. 혁명은 러시아 혁명이라는 첫번째 단계에서 멈추지 않고 러시아 밖으로 확장될 것이다. 러시아 프롤레타리아는 혼자서 사회주의 혁명을 완수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사회주의 혁명에 유리한 조건을 창출할 것이고, 어느 정도는 그것을 시작할 것이다. 26
1917년 2월혁명이 시작된 후에는 좀 더 구체적인 전망이 제출된다. 제국주의 전쟁이 조성한 상황 때문에 ‘일련의 연속적인 혁명들이제 레닌은 자신의 혁명 전략에 국제 혁명의 문제를 유기적으로 포함시키고 세계 사회주의 혁명을 당면 과제라고 말한다. 제국주의에 의해 억압받는 민족의 해방을 위한 투쟁도 이 과정 속에 통합돼 있다. 러시아 프롤레타리아트는 유럽의 프롤레타리아트에게서 동맹군을 찾을 것이고, 러시아 농민에 대한 프롤레타리아 헤게모니는 좀 더 적극적으로 가능하다. 농업 노동자와 빈농의 소비에트를 농민소비에트와 별도로 조직해야 한다. 프롤레타리아와 농민의 불분명했던 동맹 관계가 도시와 농촌의 프롤레타리아트에 의한 프티부르주아지 농민에 대한 헤게모니로 분명해지고 구체적인 행동지침으로 제시된다.
27
프롤레타리아 헤게모니, 혁명의 결합성과 국제성28 이 편지들은 나중에 ‘먼 곳에서 보낸 편지’Letters from afar라는 제목으로 묶여 출판됐다. 이 편지들을 비롯해 귀국 직전에 쓴 글은 ‘4월 테제’와 직접적인 연관을 갖고 있다. 또 그 내용들은 귀국 후에 쓴 글보다 더 급진적인 경우가 많은데, 그것은 레닌이 러시아에 돌아와 볼셰비키를 설득하는 과정에서 좀 더 완곡한 방식으로 접근하는 것이 좋다고 판단한 때문인 것 같다.
레닌은 러시아로 귀국하기 전 스위스 망명지에서 볼셰비키에게 편지 다섯 통을 쓴다. 이 편지들 가운데 처음 네 개가 〈프라우다〉에 전달됐고, 오직 첫번째 것만 축약, 수정돼 실렸다. 카메네프와 스탈린 등의 편집진은 핵심적인 내용인 임시정부의 제국주의적 본질에 대한 폭로와 멘셰비키, 사회혁명당에 대한 비판을 삭제했다. 나머지 편지들은 1917년에는 아예 출판되지도 못했다.‘4월 테제’와 그 직전, 직후에 쓴 글에서 레닌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제국주의와 전쟁이 낳은 위기 때문에 여러 나라에 걸쳐 일련의 연속적인 혁명이 일정에 올랐고, 결국 러시아가 선봉에 서게 됐다는 인식에서 출발한다. 러시아의 2월혁명은 차르를 몰아내고 구질서에 파열구를 냈다. 이 승리는 프롤레타리아의 투쟁 덕분이지만, 또한 러시아가 독일과 단독으로 휴전 협정을 체결해 전쟁에서 빠져나가는 것을 원치 않던 영국-프랑스 자본과 그들의 대리인인 러시아 부르주아지의 의지도 작용했다.
29 그러나 이들은 차르 제거만을 원했을 뿐 구질서 전체를 바꿀 의도는 전혀 없었다. 이들은 왕정과 경찰력 복구를 시도했다. 이것은 임시정부가 혁명적 인민을 두려워한다는 것을 보여 줄 뿐이다. 차르 체제가 남긴 유산으로부터의 온전한 자유는 혁명적 인민의 투쟁을 고무할 것이기 때문에 임시정부가 보장할 수 없는 것이었다. 30 임시정부는 자신의 계급적 기반 때문에 제국주의 전쟁도 중단할 수 없었다. 러시아는 이미 전쟁을 위해 엄청나게 많은 돈을 빌렸고 이자 지불을 위해 노동자와 농민을 쥐어짤 것이었다. 과거에 체결된 외국과의 모든 협약을 이행하고, 비밀협약을 공개하지 않겠다는 임시정부의 선언은 러시아 인민의 이해에 반하는 것이었다. 31 자본주의가 낳은 제국주의 전쟁과 기아는 자본주의를 폐지하지 않고는 해결할 수 없었다. 부르주아 임시정부는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없고 붕괴를 면치 못할 것이었다. 32 결국 임시정부는 인민의 요구인 평화와 빵을 제공할 수 없었다.
혁명으로 등장한 임시정부는 바로 그 부르주아지에 기반하고 영국-프랑스 자본과 연계돼 있었다. 임시정부의 우두머리들은 1905년 혁명을 ‘거대한 반역’이라고 했던 자들인데, 이제 자신들을 권력에 앉힌 2월혁명은 ‘명예로운 것’이라고 했다.33 2월혁명 직후 등장한 소비에트에서 멘셰비키와 사회혁명당은 볼셰비키보다 더 커다란 영향력을 행사했다. 이들은 임시정부를 지지했다. 스탈린과 카메네프가 지도하던 볼셰비키 지도부도 임시정부 지지를 선언했다. 레닌은 이것을 볼셰비키 당 역사에서 매우 유감스러운 일로 여겼다. 34
전쟁과 임시정부의 제국주의적 성격에 대한 반대는 임시정부와 소비에트에 자리한 사회배외주의자들과 방어주의자들에 대한 비판으로 연결된다. 이들이 전쟁의 양 당사자가 모두 제국주의자들이라는 것을 부정하거나 얼버무리기 때문이다. 유럽의 사회배외주의자들은 제국주의 전쟁을 내전으로 전환한다는 주장을 터무니없다고 하면서 여러 나라의 노동자들을 무기력하게 만들려 했다.35 이것은 봉기를 조직하는 혁명적 지배 기구였다. 36 노동자대표소비에트는 병사, 농업 노동자, 빈농 대표들을 끌어들이면서 소비에트를 발전시켜야 했다. 특히 농업 노동자와의 관계가 중요했다. 37 노동자대표소비에트는 자유, 해방, 차르 체제의 완전한 파괴를 위해 임시정부를 거부하고, 자신의 권력을 강화하고 확대해야 했다. 38 소비에트는 프롤레타리아 민병대를 조직하고 확대하며 노동자들의 지도하에 인민을 무장시켜야 했다. 인민의 무장만이 군주제 복귀 시도나 개혁의 취소에 저항할 수 있고, 빵, 평화, 자유로 가는 길을 닦을 수 있었다. 39 민병대는 경찰을 대체하고 그들이 복구하지 못하도록 만들어야 했다. 또 경찰과 군대의 기능, 일반적인 국가 기능, 생산과 분배의 통제 같은 역할을 통합적으로 수행해야 했다. 40 임시정부가 조직하고 있는 민병대는 인민의 이익에 반하는 민병대이고, 이들은 구舊 경찰과 함께 새로운 경찰을 구축하려 했다. 이들을 막아야 했다. 41
2월혁명은 부르주아 임시정부와 나란히 노동자정부 즉, 노동자대표소비에트를 무대에 올렸다. 이것은 노동자정부의 맹아이며 평화, 빵, 자유를 갈망하는 90퍼센트의 인구를 대변했다. 프롤레타리아 민병대의 조직에 대한 레닌의 아이디어는 매우 구체적이었다. 레닌은 페테르부르크는 5만의 군대를 조직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이 도시의 인구는 2백만인데, 절반 이상이 15~65세였다. 이 중에 4분의 1 정도를 신체 부적합 등으로 빼면 최소 75만 명이 민병대에 참여할 수 있었다. 각자 보름에 하루 민병대에서 일한다고 가정하면 하루에 일하는 민병대원 수는 5만이 되는 것이었다. 민병대원은 민병대에서 일하는 시간에 대해 자기 고용주로부터 급여를 받을 것이다. 민병대는 질서를 확고히 하고, 동지적 규율을 따를 것이다. 곡물과 생필품을 제 시간에 적당하게 분배하는 것을 가능하게 할 것이다. 민병대만이 모든 가족의 빵과 아이들의 우유를 확보하고, 궁전과 부유한 아파트를 징발해 무주택자의 쉼터로 제공하는 일을 할 수 있다. 이것이 러시아가 필요로 하는 국가이고 인민의 민병대이다. 민병대는 젊은이와 여성을 포함한 전체 인민을 정치적 삶으로 끌어들일 것이다.43 예를 들어, 러시아 프롤레타리아는 핀란드 공화국에 분리의 자유를 포함한 모든 자유를 보장할 것이다. 이런 방식으로 러시아 프롤레타리아의 대의를 위한 핀란드 노동자들의 완전한 신뢰와 동지적 지원을 얻을 것이다. 44
레닌은 소비에트가 권력을 장악해야만 평화가 가능하다고 생각했다. 이 과정은 혁명을 국제화하는 구체적인 행동과 맞물려야 했다. 그래서 소비에트는 차르나 부르주아 정부가 체결한 협약의 이행을 거부하고 이들을 공개해야 했다. 전쟁 당사국에 휴전을 요구하고, 모든 식민지와 종속 민족의 해방을 선언해야 했다. 소비에트가 유럽의 부르주아 정부로부터 선행을 기대하지 않는다는 것을 공포하고, 모든 나라의 노동자들이 정부를 전복하고 노동자대표소비에트를 통해 권력을 장악할 것을 호소해야 했다.45 레닌에게 러시아에서 부르주아 혁명은 이미 완수됐다거나, 또는 부르주아 혁명을 넘어 사회주의로 이행할 것이라거나, 또는 민주주의 독재를 넘어 사회주의 독재로 나아가고 있다거나, 또는 지금 러시아 혁명이 부르주아 혁명인지 사회주의 혁명인지를 따지는 것은 관조적인 이론일 뿐이다. 현실은 18세기 후반 프랑스 혁명이라는 부르주아 혁명의 ‘전형적인 형태’가 가르쳐 준 대로 진행되지 않았고 그래서 볼셰비키도 거기에 맞게 이론과 행동을 조정해야 했다. 본래 민주주의 독재 전술도 노동계급의 주도성과 권력 장악이 가능하다고 본 점에서 18세기 후반 프랑스와 20세기 초반 러시아의 차이에 근거해 만들어진 것인데 2월혁명의 진행은 민주주의 독재 전술이 가정한 현실을 훨씬 넘어서고 있었다.
국외에서 러시아 혁명을 바라보던 레닌은 급박하게 돌아가는 상황에 비해 볼셰비키의 대응이 멘셰비키와 크게 다르지 않은 것에 몹시 당황했다. 변화하는 상황에 맞게 전술과 행동지침을 적용해야 했다. 그런데 볼셰비키는 임시정부를 지지했다. 이것은 과거의 교조를 기계적으로 적용한 것으로 차르를 대신해 전쟁을 지속하고 있는 영국-프랑스 제국주의자들과 부르주아 임시정부의 본질을 감추는 일이었다.半프롤레타리아트와 소농의 일부이다. 이들은 어느 정도까지는 프티부르주아지의 영향력 아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전쟁이 지속될수록 상황의 잔혹성이 이들을 프롤레타리아트 쪽으로 밀어붙일 것이다. 노동자대표소비에트는 농업 노동자대표와 빈농대표의 소비에트, 농민대표소비에트를 각각 독립적으로 건설해 이들 동맹 세력을 조직해야 한다. 둘째, 모든 교전국과 전세계의 프롤레타리아트이다. 이들 동맹 세력들은 유럽의 사회배외주의자들에게 억눌려 있었다. 그러나 전쟁이 진행되면서 그들의 힘이 서서히 해방되고 있고, 러시아 혁명은 필연적으로 그러한 과정을 강화할 것이다. 러시아 프롤레타리아트는 두 동맹 세력과 함께 진정한 민주공화국의 성취, 지주에 대한 농민의 완전한 승리, 나아가 평화, 빵, 자유를 가능하게 만드는 유일한 길인 사회주의로 나아갈 것이다. 46 전 세계 사회주의 공화국 건설을 현실로 만들기 위해 프롤레타리아 민병대가 필요하다. 47 빈농과 동맹한 프롤레타리아트는 전쟁이 만든 상황에 따라 생산을 통제하고 생필품의 분배를 조직해야 한다. 이러한 조치들은 사회주의로의 이행을 의미하게 될 것이다. 전환적 조처들 없이 사회주의로 바로 갈 수는 없지만, 사회주의로의 이행은 성공 가능하고 전환적 조처들 덕분에 필연적이게 될 것이다. 48
이중권력 상태를 넘어 프롤레타리아트의 최종 승리를 위한 동맹 세력에 대해 레닌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첫째, 거대한 반‘4월 테제’의 운명 4월 당 협의회를 위해 쓴 글은 19가지 테제로 구성돼 있는데 그 내용은 위에 서술한 것과 다름없다. 협의회의 결정문이 레닌의 초안에 비해 여러 가지 점에서 후퇴했으나 주요한 주장들에서 레닌이 다수의 지지를 얻었다. 이 협의회에서 레닌에 반대했던 주장은 셋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첫째, 노동자병사소비에트라는 이름이 보여 주는 것은 소비에트가 노동자와 프티부르주아의 동맹 조직이라는 것이고 결국 지금 혁명이 아직 부르주아적 단계에 있다는 것을 증명한다. 그러므로 소비에트를 통해 임시정부를 견제하는 일을 해야 한다. 둘째, 우리가 지금 소비에트를 가지고 코뮌 공화국을 건설하는 것이 아니므로 소비에트는 발전 과정에서 자신이 하는 일을 시, 구 등의 행정기구로 이양해야 하고, 의회가 소집되는 과정을 거치면서 점차 사멸할 것이다. 셋째, 러시아는 아직 사회주의를 위한 준비가 돼 있지 않다. 러시아는 유럽에서 가장 농업적인 사회이다.
50 다만 《두 가지 전술》의 예상과 달리 민주주의 독재 정부가 아니라 이원화된 권력 속에서 그런 것이다. 그러니 이제 그만 부르주아 혁명의 단계를 넘어 나아가자는 것이다. 한편, 레닌도 소비에트가 프롤레타리아트와 농민의 독재를 구현한 형태라고 말했다. 병사들이 군복 입은 농민이라는 점에서 그리고 페테르부르크 소비에트가 노동자와 병사 대표들의 소비에트라는 점에서 그렇다. 51 그런 의미에서 ‘프롤레타리아와 농민의 혁명적 민주주의 독재’에서 문제는 ‘프롤레타리아와 농민’을 거론한 부분이 아니라 ‘민주주의’ 부분과 ‘독재’ 부분에 있었다. 민주주의는 혁명의 부르주아적 한계를 나타내고 ‘독재’ 부분은 권력의 문제를 나타내기 때문이다. 그러나 레닌이 ‘독재’를 취급하는 방식은 권력 문제 보다는 공동행동의 의미가 강했고, 권력 문제에 대해서는 모호하게 취급했다. 그래서 소비에트에 노동자와 군복입은 농민이 함께 있었다는 게 문제가 아니라 이것을 투쟁에서의 공동행동기구로 볼 것인가 권력을 분점하는 정치동맹으로 볼 것인가 하는 점이 진정한 문제였다. 1909년 레닌은 마르토프의 글에 대한 반박에서 볼셰비키의 노동자와 농민의 독재 공식이 정치동맹이자 공동행동체를 나타낸다고 말한다. 52 1917년 4월 시기 레닌은 좀 더 분명하게 구분해서 말한다. 권력에 대해 이야기 할 때는 프롤레타리아 권력, 노동자대표소비에트 권력을 언급하고, 혁명을 위한 동맹을 의미할 때는 노동자병사농민대표소비에트를 언급하는 것이다. 53 이제 혁명을 위한 노동자와 농민의 동맹은 진정으로 프롤레타리아 헤게모니에 기반하게 됐다.
첫번째 주장은 자생적으로 탄생한 소비에트의 성격을 미리 정해 놓은 혁명의 단계에 따라 규정한다는 점에서 혁명과 조직에 대한 비변증법적 관점이다. 레닌은 2월혁명에서 부르주아들이 임시정부를 통해 권력을 장악했고, 그런 만큼 러시아에서 이미 부르주아 민주주의 혁명은 완성됐다고 말했다.Ivanovo 지역에서 발전하기 시작한 노동자대표소비에트 그리고 그것의 완성 형태인 10월 페테르부르크 노동자대표소비에트를 의미했다. 그래서 ‘모든 권력을 소비에트로’란 곧 노동자대표소비에트 권력을 뜻하는 것으로 이해되는 것이었다. 1917년에는 노동자들의 자주적인 조직인 소비에트에 도시 주둔군 병사들이 자발적으로 참여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래서 그 해 페테르부르크 소비에트는 노동자병사대표소비에트였다. 농민들도 이런 소비에트를 모방해 자신들의 소비에트를 만들었다. 볼셰비키는 노동자 헤게모니를 위해 소비에트에서 노동자들이 과소 대표되는 것을 문제제기하고 이를 시정하려 했다. 또한 소비에트 내에서 사회혁명당과 멘셰비키의 영향력에 맞서 다수의 지지를 획득하기 위해 노력했다. 그래서 이미 6월이 되면 소비에트의 노동자대표들 가운데에서는 다수의 지지를 확보한다.
이 문제와 관련해 또 하나 지적할 수 있는 것은 러시아 사회민주주의에게 소비에트란 1905년 혁명 속에서 파업위원회로 시작한 조직들이 점점 더 많은 임무를 떠안게 되면서 발전한 조직을 뜻한다는 점이다. 즉, 5월 이바노보54 그러나 소비에트는 사라지지 않고 그해 10월, 군사혁명위원회를 건설해 역사 전체를 끌고 전진했다.
두번째 주장은 소비에트의 소멸을, 세번째 주장은 혁명의 부르주아적 단계를 말하고 있다. 이들 세 가지 반대 주장은 조금씩 다른 것처럼 보이지만 결국 혁명이 부르주아적 한계 안에 있으므로 소비에트는 때가 되면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질 것이라고 말하는 것이었다.‘4월 테제’는 레닌의 지적 전환을 상징하는 매우 중요한 문서이다. 그는 역사에 대한 기계적인 단계 구분은 역사가의 머리 속에서나 가능한 것이고 실제 인간 사회와 그 변화는 과거, 현재, 미래 단계들의 결합이라는 점을 분명히 했다. 그런 점에서 혁명전략을 기계적으로 구분된 역사의 과제에 따라 결정하는 것은 변화를 추동하고 미래를 앞당기기 보다 현실의 변화를 옭아매고 특정 단계에 고정시킨다는 점에서 역사의 퇴보를 낳을 것이다. 이제 레닌은 《두 가지 전술》로 대표되는 단계적인 혁명 전략에서 벗어나 혁명의 연속적 성격을 포착했다. 혁명의 부르주아적 한계를 지적하는 것은 시대에 뒤진 것이다. 러시아 혁명이 사회주의로의 이행을 시작할 수 있고, 유럽의 사회주의 혁명이 이것을 도와 줄 것이다.
55 여기에는 부분적으로 레닌 자신에게서 비롯한 문제가 있다. 스탈린은 이 시기 레닌의 저작들 가운데에서 자신이 원하는 인용 문구를 충분히 찾을 수 있었다. 《두 가지 전술》과 달리 이 시기 레닌의 저작은 명백히 연속혁명의 경향을 갖고 있지만, 과거의 흔적들이 여러 차례 등장한다. 혁명의 부르주아적 한계에 대한 언급, 프롤레타리아와 농민의 동맹 관계에 대한 서술이 보여주는 진동, 제헌의회에 대한 인정 등이다.
이러한 전환은 그의 생전에 공식적으로 인정되지 않았고, 스탈린 시대에는 그것이 부정됐다.세 가지 점이 여기에 기여한 것 같다. 첫째, 레닌은 제국주의 연구에서 시작한 ‘4월 테제’의 지적 전환을 체계적으로 정리할 시간을 갖지 못했다. 둘째, 새로운 전술에 동료 볼셰비키들을 설득하기 위해 모두에게 익숙한 《두 가지 전술》의 논리를 이용하고 부분적인 후퇴도 감수했다. 셋째, 상황도 유동적이었다. 특히 혁명의 편으로 끌어들여야 할 농민이 혁명이나 토지문제에 대해 갖는 태도, 권력의 향배를 결정지을 봉기에 대한 노동계급의 의지와 자신감처럼 결정적인 중요성을 갖는 문제들에 대한 신중한 대응이 필요했다. 농촌에서의 투쟁도 지주에 반대하는 투쟁이 중심이었고, 빈농이 주도하면서 부농을 투쟁 대열로 끌어들였다. 그런 점에서 1917년 농민은 계급으로 분화되지 않은 상태에서 계층적 단결을 보였다. 빈농과 농업 노동자에 대한 ‘4월 테제’의 강조를 그대로 적용하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부농에 대한 투쟁은 1918년이 되어서야 농촌 투쟁의 다수를 차지하게 된다. 1917년 8월, 볼셰비키 농업강령의 변화는 농민에 대한 양보가 불가피하다는 최종적 결정의 산물로서 당시 상황을 역설적으로 보여 준다.
맺음말
한국의 촛불 운동은 박근혜를 끌어내리면서 1917년 러시아 혁명 100주년을 누구보다 훌륭하게 기념했지만, 그동안 만들어진 레닌의 악마화는 한국에서도 그리 줄어들 것 같지 않다. 작은 거리 시위부터 혁명에 이르기까지 사회운동은 항상 ‘어디로 갈 것인가’라는 질문에 봉착한다. 정치와 지도에 대한 이 질문에 대해 1917년 레닌은 누구보다 대담하게 응답했다.
레닌의 민주주의 독재 전술은 비록 혁명에 대한 진화론적 단계 구분 속에 있었지만, 노동자들의 주도성과 권력 장악의 가능성을 주장한 점에서 현실을 이론 속에 반영한 시도였다. 1917년에는 이 같은 모순을 깨고 실재의 역사 변화가 단계적이지 않으므로 혁명도 그럴 수 없다는 결론 속에서 이론의 조정이 이루어졌다. ‘모든 권력을 소비에트로’는 이러한 지적 전환의 전술적 표현이었다. 그것은 이중권력이 낳은 불안정한 상황에 대한 답변이었고, 빵, 평화, 토지라는 요구를 유일하게 실현 가능하게 하는 해결책이었다.
주
- 트로츠키는 ‘프롤레타리아와 농민의 혁명적 민주주의 독재’ 공식을 대수(代數)적 정식이라고 했다. ↩
- 레닌 1992b, p28. ↩
- 레닌 1992b, p123. 1905년 혁명에 대한 통찰이 낳은 이런 서술은 《두 가지 전술》 일년 후에 쓴 글에서도 반복된다(레닌 1991, pp520-525). 이 글은 카우츠키의 논문에 대한 서문인데, 레닌은 이 논문을 전폭 지지하며 자신의 민주주의 독재 전술이 뜻하는 것이 정확히 이와 같다고 했다. 그러나 당시 카우츠키의 입장은 레닌보다 더 일관되게 러시아 혁명이 부르주아적 한계를 벗어난다는 점을 강조했고, 그런 점에서 트로츠키의 입장과 더 비슷했다. 같은 시기 트로츠키도 카우츠키의 이 논문이 자신의 주장을 뒷받침한다고 여겼다. ↩
- 레닌 1992b, pp28, 29, 33, 59, 64, 65, 98, 103, 104, 106, 134, 136, 150, 157. ↩
- 요구와 슬로건의 구분에 관한 마이어스(2016, pp98-102)의 내용을 떠올리게 만드는 대목이다. ↩
- 사회배외주의란 말로는 사회주의를 주장하지만 실제로는 다른 민족에 대한 제국주의적 침략을 지지하는 우익 사회민주주의자들의 사상과 행동을 말한다. ↩
- Lenin 2011e, pp21-24. ↩
- 레닌 1992b, p64. ↩
- 레닌 1992b, pp163-164. 엄밀히 말하면 프랑스 농민을 봉건적 사슬에서 해방시킨 것은 부르주아지가 아니라 1792년의 프티부르주아지이다(트로츠키 2017, pp711-712). ↩
- 러시아 자본주의 발전에 대한 레닌의 연구는 마르크스의 《자본론》을 따라 농촌의 사회적 분화에서 출발한다(레닌 1988). 반면, 트로츠키는 러시아 자본주의가 차르 국가와 외국 자본에 의해 ‘외부로부터 이식’되어 자본주의 발전이 ‘전형적’이지 않고, 여러 단계들을 건너뛰게 됐다는 것에서 출발한다(트로츠키 2010, pp63-73). 이것은 정치 전략의 구상에 있어서도 차이를 만들어 냈다. 레닌이 거대한 농민의 존재와 농업 문제에 천착한 반면, 트로츠키는 러시아의 다른 계급과 비교한 프롤레타리아트의 상대적 강력함, 러시아와 유럽 프롤레타리아와의 동맹에 더 주목했다. ↩
- 레닌 1992b, pp15-16. ↩
- 농업 노동자와 빈농의 독립적인 조직화를 1917년에 처음 주장한 것은 아니다. 1905년 혁명을 겪으면서 그 필요성을 알게 됐고, 《두 가지 전술》 이후에 쓴 글들에서 이런 언급이 등장하기 시작한다. 다만 여기서는 혁명과 권력에 대한 중요한 전술적 전환과 함께 제기됐다는 점이 중요하다. ↩
- 리브만 1985, pp125-128. ↩
- 리브만 1985, pp134-135. 사회민주주의자들이 러시아 혁명을 논하면서 1789년, 1848년 혁명과 비교하는 것은 1905년 혁명 이전부터 행해진 자연스러운 일이었다(Kautsky 1901, Parvus 1905). 트로츠키도 《평가와 전망》에서 1789년, 1848년, 1905년을 직접 비교했다(트로츠키 2010, pp82-95). 고전적인 형태의 부르주아 혁명과 러시아를 비교하며 혁명을 전망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비교를 통해 이론을 실재의 역사 상황에 맞게 적용하고 이론 자체의 변경을 시도한 경우는 드물었다. 트로츠키는 1905년 전후에, 레닌은 1914-1917년에 이를 해냈다. 결국 ‘고전적인’ 부르주아 혁명은 오히려 예외였고, 제국주의가 자본주의 발전을 ‘왜곡’시킨 것처럼 부르주아 혁명도 고전적인 형태를 벗어났다. 트로츠키와 레닌이 1905-1906년 사이 파리코뮌에 대해 논평한 것을 ‘4월 테제’와 비교해보는 것도 흥미롭다. 트로츠키는 영국이나 미국처럼 자본주의가 고도로 발전한 나라들이 아니라 상대적으로 후진적인 ‘프티부르주아적 파리’에서 1871년 노동자들이 권력을 잡았다는 것은, 후진국 노동자들이 선진국 노동자들 보다 먼저 권력을 잡을 가능성을 보여 주는 것이라며 러시아에서도 그 가능성을 주장했다(트로츠키 2010, p97). 레닌은 파리코뮌의 패배가 혁명의 부르주아적 과제와 민주주의적 과제를 구분하지 못한 데 있다고 보며 혁명의 단계적 구분에 더 의존했다(레닌 1992b, p98). 1905년 이러한 레닌의 생각은 ‘4월 테제’의 전환을 통해 트로츠키와 거의 일치하는 것으로 바뀌었다. ↩
- 레닌 1992a, p759. ↩
- 리브만 1985, pp135-137. ↩
- 4월의 논쟁에 대한 보다 생생한 묘사는 트로츠키(1996) 2-4장, 트로츠키(2017) 15-16장 참조. ↩
- Callinicos 1982. ↩
- 레닌 1993, pp106-107, 156-157. ↩
- 레닌 1993, pp99, 112-120. 이 글과 관련하여 레닌의 《제국주의론》을 읽을 때 주의할 점은 독점의 지배력에 대한 과장, 제국주의 전쟁과 혁명의 불가피성에 대한 과장 등이다. ↩
- Lenin 2011b, pp307-308. ↩
- Lenin 2011b, p313. ↩
- Lenin 2011b, p308. ↩
- Lenin 2011b, pp315-316. ↩
- Lenin 2011b, pp329-330. ↩
- Lenin 2011d, pp371-373. ↩
- 아래에서 다룰 글의 제목, 집필 날짜, 레닌 전집의 해당 부분은 다음과 같다. ↩
- Lenin 2011c, pp406-407. (미주 126) ↩
- Lenin 2011c, p297. ↩
- Lenin 2011c, p306. ↩
- Lenin 2011c, pp335-336. ↩
- Lenin 2011c, p323. ↩
- Lenin 2011c, pp299-300. ↩
- Lenin 2011f, p44. ↩
- Lenin 2011c, p304. ↩
- Lenin 2011c, p324. ↩
- Lenin 2011c, p304. ↩
- Lenin 2011c, p305. ↩
- Lenin 2011c, p316. ↩
- Lenin 2011c, pp318-319. ↩
- Lenin 2011c, p327. ↩
- Lenin 2011c, pp328-329. ↩
- Lenin 2011c, pp337-338. ↩
- Lenin 2011c, p331. ↩
- Lenin 2011c, p302. ↩
- Lenin 2011c, pp307-308. ↩
- Lenin 2011c, p318. ↩
- Lenin 2011c, p341. ↩
- 트로츠키 1996, p36. ↩
- Lenin 2011g, p57. 물론, 2월혁명이 낳은 이중권력은 권력의 이분이 아니라 동요와 불안정을 뜻했다. 어느 한쪽이 다른 쪽을 제거해야 했다. 또한 이중권력 시기는 부르주아적 과제를 해결하지 못했다. 차르는 제거됐지만 농민문제 해결이나 왕조적 잔재의 제거 등 다른 개혁 조치들은 임시정부가 방해했다. 러시아에서 소위 ‘부르주아적 과제’가 해결된 것은 10월혁명 직후 얼마 동안의 시기였다. 즉,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통해 부르주아적 과제가 해결됐다. 바로 트로츠키가 전망했던 바였다. 부르주아적 과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라도 프롤레타리아 독재가 필요했던 것이다. ↩
- 좀 더 구체적으로 보면, 병사들은 군복 입은 농민이지만 농촌의 노동 방식보다는 공장의 노동규율에 가까운 군대의 규율 안에 있었고, 페테르부르크 소비에트에 참여한 병사들은 도시 방어를 위해 주둔한 군사들로서 노동자들과의 접촉이 빈번했다. 이들은 이미 조직돼 있는 하나의 집단으로 존재했고 그래서 농촌의 농민에 비해 집단행동에 용이했다. 한편, 이 시대 러시아 노동자들은 여전히 농촌과의 연계가 강했다. 1917년 혁명 동안 농촌 운동을 선동한 사람들은 바로 이들 병사와 노동자였다. ↩
- Lenin 2011a, pp371-373. 이 부분은 마르토프가 자신의 글에서 인용한 트로츠키에 대해 레닌이 논평한 것이다. 레닌이 연속혁명론에 대해 잠깐이라도 언급한 적이 네 번 있었는데 이 글은 그 중 하나다. 한편, 이 글은 레닌이 이때까지 트로츠키가 연속혁명론을 다룬 《평가와 전망》을 읽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준다. 또한 전체적으로 보았을 때, 이 글은 트로츠키가 지적한 것처럼 레닌이 노동자와 농민의 독재 공식을 혁명에서 주요 동맹 세력이 누구인지 나타내기 위해 사용한 것으로, 권력 문제를 분명히 하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 글에서 정치동맹에 대한 레닌의 서술은 권력 문제는 전혀 언급하지 않고, 러시아에서 노동자와 농민의 다양한 공동행동의 역사만을 거론한다. ↩
- Lenin 2011g, p67. ↩
- 트로츠키 1996, p36. ↩
- Callinicos 1982. ↩
참고 문헌
레닌, V. I 1988, 《러시아에 있어서 자본주의의 발전》, 태백.
레닌 V. I 1991, ‘’카우츠키: 러시아 혁명의 추진력과 그 전망’의 서문’, 《러시아 맑스주의》, 거름. pp520-525
레닌, V. I 1992a, 《레닌언론저작집(하)》, 말길.
레닌, V. I 1992b, 《민주주의 혁명에서의 사회민주주의의 두 가지 전술》, 돌베개.
레닌, V. I 1993, 《제국주의론》, 백산서당
리브만, 마르셀 1985, 《레닌주의 연구》, 미래사.
마이어스, 앨런 2016, ‘트로츠키의 전환 강령: 그 활용과 오용’, 《마르크스21》 17호(2017년 7-8월호), 책갈피.
밀즈, C. W 1982, 《마르크스주의자들》, 한길사.
트로츠키, 레온 1996, 《10월의 교훈 및 이행기 강령》, 풀무질.
트로츠키, 레온 2010, 《연속혁명 평가와 전망》, 책갈피.
트로츠키, 레온 2017, 《러시아 혁명사》, 아고라.
Callinicos, Alex 1982, ‘Trotsky’s Theory of Permanent Revolution and Its Relevance to the Third World Today’, International Socialism 2:16 (Spring 1982), https://www.marxists.org/history/etol/writers/callinicos/1982/xx/tprtoday.html
Kautsky, Karl 1903, ‘To What Extent is the Communist Manifesto Obsolete?’ Witnesses to Permanent Revolution: The Documentary Record, Ebook.
Lenin, V. I 2011a, The Aim of the Proletarian Struggle in Our Revolution in Collected Works, volume 15, Progress Publishers, https://www.marxists.org/archive/lenin/works/cw/pdf/lenin-cw-vol-15.pdf. pp360-379.
Lenin, V. I 2011b, ‘Socialism and War’ in Collected Works, volume 21, Progress Publishers, https://www.marxists.org/archive/lenin/works/cw/pdf/lenin-cw-vol-21.pdf. pp295-338. 번역본은 《사회주의와 전쟁》, 아고라.
Lenin, V. I 2011c, ‘Letters from afar’ in Collected Works, volume 23, Progress Publishers, https://www.marxists.org/archive/lenin/works/cw/pdf/lenin-cw-vol-23.pdf. pp295-342
Lenin, V. I 2011d, ‘Farewell Letter to the Swiss Workers’ in Collected Works, volume 23, Progress Publishers, https://www.marxists.org/archive/lenin/works/cw/pdf/lenin-cw-vol-23.pdf. pp367-374. 내용의 일부가 밀즈 1982, pp257-259에 번역돼 있다.
Lenin, V. I 2011e, ‘The Tasks of the Proletariat in the Present Revolution’ in Collected Works, volume 24, Progress Publishers, https://www.marxists.org/archive/lenin/works/cw/pdf/lenin-cw-vol-24.pdf. pp19-26.
Lenin, V. I 2011f, ‘Letters on Tactics’ in Collected Works, volume 24, Progress Publishers, https://www.marxists.org/archive/lenin/works/cw/pdf/lenin-cw-vol-24.pdf. pp42-54. 내용의 대부분이 밀즈 1982, pp247-257에 번역돼 있다.
Lenin, V. I 2011g, ‘The Tasks of the Proletariat in Our Revolution-Draft Platform for the Proletarian Party’ in Collected Works, volume 24, Progress Publishers, https://www.marxists.org/archive/lenin/works/cw/pdf/lenin-cw-vol-24.pdf. pp55-88.
Parvus, A 1905, ‘What Was Accomplished on the 9th of January’, Witnesses to Permanent Revolution: The Documentary Record, Eboo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