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Ⅰ
마르크스주의, 퀴어 이론, 트랜스젠더 정치
퀴어 이론과 그 정치 *
젠더와 섹슈얼리티 분야의 일부 활동가와 이론가는 LGBT(레즈비언, 게이, 양성애자, 트랜스젠더)라는 명칭을 부분적으로나 전면적으로 거부하고 ‘퀴어’queer라는 명칭으로 글을 쓰거나 단체를 만든다. 퀴어 이론과 그 정치의 기원은 1990년대이고 오늘날에도 영향력이 있다. 퀴어 이론과 그 정치의 전망에 입각해 집필된 책이 많고 대학 교과과정이 퀴어 이론과 그 정치를 다루기도 한다. 예를 들어, 영국 리즈대학교는 ‘젠더, 섹슈얼리티, 퀴어 이론’이라는 석사과정을 개설했다. 더 중요하게는, 매우 급진적인 많은 LGBT가 자신들을 퀴어로 여기고 있고, 그런 관점을 채택해 정치 활동을 조직하고 있다. 예를 들어, 2010년에 영국 런던에서는 퀴어 이론과 정치가 무엇인지를 원형 그대로 보여 주는 그룹인 ‘퀴어 레지스턴스’Queer Resistance나 노동조합 활동가 단체인 ‘긴축에 반대하는 퀴어들’Queers Against the Cuts이 창립했다. 이 글은 퀴어 이론과 그 정치의 전개 과정을 추적할 것이다. 또, 퀴어 이론가와 활동가들은 퀴어 이론과 그 정치가 주류 LGBT와는 다른 급진적 대안을 제공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데, 이 주장을 검토한다.
지금까지 퀴어 이론의 사상을 접해 보지 못한 사람들을 비롯해 많은 독자들이 이전에는 정말이지 역겹게도 동성애자들을 모욕하던 말인 ‘퀴어’가 사회주의 출판물에 등장하는 것을 보고는 충격을 받을지도 모르겠다. 이 글의 뒷부분에서는 퀴어라는 낱말의 사용 문제를 다룰 것이다.
LGBT 투쟁의 40년
퀴어 이론과 그 정치를 LGBT 운동의 맥락 속에 자리매김하고, LGBT 운동의 정치 사상이 어떻게 발전했는지를 더 넓은 역사적 맥락 속에 자리매김해서 살펴보는 것이 중요하다.
1960년대와 1970년대: 해방
1 1968년 프랑스에서 일어난 학생 시위는 역사상 가장 거대한 총파업을 촉발했다. 같은 시기 미국에서는 흑인 수천 명이 혁명적 단체인 흑표범당에 가입했다. 베트남 전쟁에 반대하는 대중운동에 수백만 명이 참가했다. 베트남에서 미군 병사들은 상관들에 맞서 반란을 일으켰다. 해마다 ‘상관 살해’ 사건 수백 건이 벌어졌다. 병사들이 적군과 전투를 벌이기보다 자기 상관을 죽이거나 중상을 입힌 것이다. 세계 곳곳에서 일어난 운동에서 유력한 정치는 마르크스주의였다. 물론 흔히는 마오쩌둥주의로 뒤틀린 버전의 마르크스주의였지만 말이다. 2
1960년대 후반과 1970년대 초반 미국과 서유럽 사회에서는 매우 높은 수준의 정치 투쟁이 일어났다.바로 이런 배경에서 현대의 여성 해방 운동과 동성애자 해방 운동이 시작됐다. 1969년 6월 말 뉴욕 경찰이 동성애자 술집인 스톤월을 습격했다. 스톤월을 자주 이용하던 레즈비언과 게이, 많은 흑인과 라틴아메리카계 이민자가 반격에 나섰다. 그들 중에는 드랙퀸[여성복을 입고 여성처럼 행동하는 남성을 가리킨다. 반대로 남성복을 입고 남성처럼 행동하는 여성을 드랙킹이라고 한다]도 있었다. 당시 어느 신문은 이 사건을 이렇게 설명했다.
창 밖으로 맥주캔과 맥주병이 날아왔고, 경찰을 향해 동전이 쏟아졌다. 사람들은 신호에 맞춘 듯이 돌멩이와 병을 던졌다.
역사가 존 데밀리오는 그날 밤에 일어난 사건을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길모퉁이들에 모인 게이들 ― 대다수 기사는 그들이 여성스러웠다고 묘사했다 ― 은 화가 치밀어 가만히 있지를 못했다. 누군가 젖은 쓰레기 뭉치를 경찰차 창문에 집어던졌다. 근처 웨이벌리 플레이스에서는 경찰차를 향해 보도블록이 날아들었고 삽시간에 수십 명이 몰려들어 그 경찰차를 둘러싼 채로 문에 주먹질을 하고 보닛에 올라가 춤을 췄다. … 헬멧을 쓴 경찰이 … 곤봉을 휘두르며 달려들어, 즉석에서 화음을 맞추며 노래를 부르는 동성애자들을 해산시켰다. … 이후 몇 시간 동안 쓰레기가 불타오르고 병과 돌멩이가 날아다니고 ‘게이 파워!’라는 외침이 거리에 울려 퍼졌다. 경찰 400명이 2000명 이상으로 추산되는 군중과 전투를 벌였다.
이 소요에서 동성애자해방전선GLF이 탄생했다. 1970년 가을에는 영국에서도 동성애자해방전선이 건설됐다. 동성애자해방전선은 비록 그 정치가 매우 다양하고 모순된 사상들을 포함했지만 사회 전반에서 벌어지는 급진 운동의 일부였다. 영국에서는 1974년 보수당 정부를 무너뜨린 광원 파업 같은 노동자 투쟁이 상당히 중요했는데, 동성애자해방전선의 일부 활동가들이 노동자 파업에 연대했다. 영국과 미국의 동성애자 해방 운동 활동가들은 인간을 왜 동성애자와 이성애자로 나눠야 하느냐며 의문을 제기하고, 모두의 섹슈얼리티가 해방되고 남성·여성 성역할 구분이 폐지되는 사회를 바라며 활동했다. 동성애자 해방 운동이 급속히 확산되자, 덜 급진적인 세력들도 움직일 공간이 열렸다. 1972년 영국에서 가장 큰 동성애자 단체는 ‘동성애자 평등 운동’the Campaign for Homosexual Equality이었다. 이 단체는 개혁입법과 사회 시설 확대 ― 당시는 지금보다 동성애자 술집이 훨씬 적었다 ― 에 모든 노력을 집중했다. 그리고 정치적 입장을 취하지 않는 것을 강조하면서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우리는 동성애자에 대한 편견이 자본주의나 계급 투쟁과는 전혀 관련이 없다고 본다.” 동성애자가 해방되려면 혁명이 필요하냐, 아니면 자본주의 내에서도 동성애자 해방이 가능하냐를 둘러싼 논쟁은 이 새로 등장한 운동 구성원들의 계급 차이를 어느 정도 반영했다. 1977년 출판된 《동성애 섹스의 즐거움》은 어떤 동성애자 남성들은 제도로서 결혼을 거부하지만 어떤 동성애자 남성들은 동성 결혼의 합법화를 바란다는 점을 설명하고, “사랑에 빠진 35세의 변호사와 35세의 의사가” 생활비와 집안일을 분담하며 사는 일부일처식 동성애자 커플을 소개했다. 이런 집안일 분담은 “바람직한” 동성애자 모습의 핵심 요소가 무엇인지에 대한 생각, 남성/여성 역할 수행role-playing 거부, 젠더 변이gender variance 일체 거부를 반영하는 것이었다.(이런 관점에 따르면, 동성애자 남성은 이성애자 남성과 마찬가지로 남성적이며, 동성애자 여성은 이성애자 여성과 마찬가지로 여성적이다.)
마침내 동성애자 운동은 모두 동성애자 해방을 동성애자만의 일이라고 보는 사상을 받아들였다. 이 “자율성” 전략은 차별에 맞서 싸울 유일한 대안으로서 급진 운동 안에서 널리 받아들여졌다. 흑표범당은 백인을 조직하지 않았고, 여성 해방 운동은 남성을 조직하지 않았다. 이는 한편으로는 사회에 이미 존재하는 분열 때문이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이론적으로는 모든 사람들과 함께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단체들 (특히 미국의 좌파 단체들) 내에서 나타난 성차별적이고 동성애 혐오적인 행태 때문이었다. 또, 자율성 전략은 급진 운동의 일부가 아니던 동성애자 단체들의 처지를 반영했다. 의회 정당, 노동조합, 중앙정부, 지방정부의 지원을 받지 못하는 단체들은 자력으로 생존해야 했다.
1980년대 초반: 후퇴
1970년대 말 대처와 레이건의 당선은 우선회를 나타내는 뚜렷한 신호였다. 대처와 레이건은 노동자들을 공격해서 1960년대와 1970년대에 운동이 거둔 성과를 되돌리기로 단단히 마음먹었다. 대처는 1년간 지속된 광원의 영웅적 투쟁을 물리침으로써 1974년의 패배를 설욕했다. 보수당 정부는 동성애 혐오적 법조항인 지방정부법 28조를 통해 동성애자들을 공격했다. 이 조항은 1988년에 도입돼 2003년(스코틀랜드에서는 2000년)에 폐지됐다. 이 조항은 지방정부가 동성애를 ‘장려’하는 것과 교사들이 학생들에게 동성애를 “모종의 가족 관계”로 받아들일 만하다고 말하는 것을 금지했다. 당시 미국에서는 그리스도교 우파가 성장했다. 그들은 플로리다주州에서 동성애자 권리를 후퇴시키는 캠페인을 성공적으로 펼쳤고 레이건의 대선 운동을 지원했다. 이런 역회전에 에이즈의 영향이 가세했다. 1981년 에이즈 진단을 받은 첫 환자가 생겨났고, 그 뒤로 환자수가 급증했다. 당시에는 인간면역결핍바이러스HIV에 감염된 사람들은 병이 에이즈로 진척되는 것이 흔했고, 효과적 치료법이 없었으므로 대체로 1년 안에 사망했다. 1985년 7월까지 미국에서는 6000명 이상이 에이즈로 사망했는데, 그중 대다수는 동성애자가 많이 거주하던 뉴욕과 샌프란시스코 등지에 살던 게이였다. 에이즈가 확산되면서 동성애 혐오와 심리적 공황이 증가했다. 플로리다주에서는 한 가정의 혈우병 환자 아동 세 명이 HIV 양성 반응을 보이자 그 집이 소각됐다. 영국에서는 유명 주간신문 〈세계 뉴스〉가 독자들에게 설문조사를 실시했는데, 56퍼센트는 “에이즈 보균자”에게 “불임 시술과 성적 취향 억제 치료를 해야 한다”는 데 동의했고, 51퍼센트는 동성애 일체를 다시 범죄로 지정해야 한다는 데 찬성했다.
6 레즈비언 페미니즘은 1960년대와 1970년대에는 사회를 변혁할 수 있다는 믿음을 간직하고 있었지만, 점점 교조적이고 금욕주의적으로 바뀌는 대가를 치렀다: 이성 간 성행위와 남성 동성애자들의 성행위를 본질상 가부장제에 대한 부역 행위로 봤다. 반면, “레즈비언”은 다른 여성에 대한 욕구와 꼭 연결되지는 않는다고 보아 페미니스트로서 승인을 받는 증표라고 재정의했다.
이런 공격 탓에 동성애자들이 사회로부터 고립돼 있다는 인식이 증가했고 그래서 자율주의 전략이 강화했다. 특히 안드레아 드워킨Andrea Dworkin 같은 저술가로 대표되는 “급진 페미니즘” 경향이 두드러졌다. 이 경향은 남성과 함께하는 정치 활동 일체를 거부했고, 남성을 강력한 “가부장적” 지배 구조의 수혜자로 봤다. 또 다른 저술가들은 “레즈비언 페미니즘” 전략을 주장했다. 이 전략은 여성이 한편으로는 남성과의 성관계와 남성에 대한 정서적 지지 제공을 거부함으로써 가부장제를 허물어야 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여성들 사이의 정서적·정치적 유대를 건설 — 이것이 ‘레즈비언되기’이다 —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대체로는, 혁명적 희망이 붕괴하면서 많은 좌파가 노동당에 가입했다. 그 좌파들은 1980년대 초 크게 성장해 여러 지방정부를 차지했다. 그런 지방정부는 동성애자를 지원했다.(사실, 보수당이 지방정부법 28조를 제정한 것은 이런 동성애자 지원을 중단시키기 위해서였다.) 마침내 게이도 레즈비언과 마찬가지로 더 넓은 급진 운동에서 점차 멀어지면서 자율성을 추구했다. 마르크스주의적 혁명이 아닌 지적 대안에 기대를 걸었다. 미셸 푸코의 사상이 그 사례이다. 푸코의 《앎의 의지》(《성의 역사》 제1권으로도 알려진 책)가 1981년에 영국에서 처음 출판됐는데, 당시에 이 책은 자율주의 스타일의 정치에 우호적인 것으로 이해됐다.
1980년대 중반에서 1990년대 초반: 퇴각을 멈추다
로널드 레이건은 1987년 5월이 돼서야 연설에서 에이즈를 언급했다. 그때가지 미국인 3만 6000명이 에이즈 진단을 받았고, 2만 명 이상이 사망했다. 뉴욕 같은 도시에 거주하는 동성애자 남성들은 거의 모두 사망한 사람들과 친분이 있었고, 그중에는 수십 명의 친구 장례식에 참석한 사람도 있었다. 미국 사회가 동성애자를 소모품 취급하고 있다고, 이러다가 동성애자가 모두 죽을 때까지 에이즈 전염이 계속될 것이라고 여기게 된 사람은 에이즈 활동가 래리 크레이머Larry Kramer만이 아니었다. 정부의 무대응, 끊임없이 논쟁만 하는 출세 지향적 과학자들, 에이즈 진단 키트 판매에서 얻을 잠재적 이윤에만 눈독을 들이는 제약회사들에 대해 크레이머는 독설을 던졌다.
에이즈는 오늘날의 홀로코스트다. 우리의 소중한 사람들 수만 명이 죽어 가고 있다. 곧 수십만 명이 죽게 될 것이다. 에이즈는 오늘날의 홀로코스트이고 레이건은 오늘날의 히틀러다. 뉴욕시는 오늘날의 아우슈비츠다.
크레이머는 게이보건위기GMHC를 설립해서, 중앙정부나 지방정부의 지원을 받지 못하는 뉴욕시 거주 동성애자 수천 명에게 보건 서비스를 제공했다. 1987년 그는 ‘액트업’ACT UP ─ 권한 증진을 위한 에이즈 연대 ─ 을 세웠다. 액트업은 항의 시위 조직 단체였는데, 여러 면에서 1990년부터 ‘퀴어’라는 낱말을 사용하기 시작한 조직의 모습을 미리 보여 줬다. 액트업을 다루기 전에 1980년대 후반의 정치적 맥락을 좀더 살펴봐야 한다. 1970년대 급진 운동이 쇠퇴하면서, 정치적으로나 학술적으로나 마르크스주의를 거부하는 경향이 나타났는데, 이 경향은 1989년 베를린 장벽의 붕괴와 뒤이은 소련 제국의 몰락으로 더 강화했다. 1989년까지 수십 년 동안 소련은 사회주의 사회가 아니었다는 이 잡지[《인터내셔널 소셜리즘》] 주요 필자들의 입장도 힘을 얻었지만, 이구동성으로 좌파의 종말을 선언하는 자본주의 친화적 주장의 득세는 당해낼 수 없었다. 마르크스주의도 영향력이 쇠퇴했지만 1980년대 자율주의 정치도 마찬가지였다. 에이즈 쟁점을 둘러싸고 레즈비언들이 게이와, 심지어는 이성애자들과도 함께 활동하면서 레즈비언 페미니즘은 사람들의 경험에 부합하지 않게 됐다. 레즈비언 페미니즘은 레즈비언 역사가인 릴리안 패더먼Lillian Fademan이 “레즈비언 섹스 전쟁”이라고 부를 만큼 매우 뜨겁게 벌어진 일련의 논쟁들에서도 문제 제기를 받았다. 예를 들어, 레즈비언 페미니스트들이 가학적·피학적 성향의 레즈비언과 양성애자가 ‘런던 레즈비언·게이 센터’LLGC를 이용하는 것을 반대한 것에 이견이 나왔다. 그래도 일부 조직들은 계속해서 오랫동안 양성애자를 배척했다. 영국 공공서비스노조UNISON의 ‘레즈비언·게이 대의원대회’는 2003년이 돼서야 ‘LGBT 대의원대회’로 명칭이 바뀌었다.
에이즈가 확산하면서 뉴욕의 게이보건위기와 런던의 ‘테런스 히긴스 트러스트’ 같은 보건·사회복지 제공 단체의 규모가 급성장했다. 이 단체들의 직원 중에는 레즈비언과 게이도 있었는데, 그들은 스스로 대규모 예산을 관리할 수 있음을 입증했고, 정책 논쟁에 참여하며 보건 노동자들과 효과적으로 협력했다. 이런 방식으로 LGBT 관리자층 간부가 생겨나기 시작했다. 게다가 1980년대 초에는 많은 사람들이 보수당과 동성애 혐오 사상을 거부했다.(비록 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동성애 혐오 사상을 받아들였지만 말이다.) 그래서 동성애자 권리를 옹호하는 조직이 존재할 정치적 공간이 생겨났다. 그러나 그런 조직들은 마르크스주의 정치나 투사들의 정치에 기초를 두지 않고 LGBT 활동가층의 전문가화 경향을 반영했다. 바로 이런 맥락에서 지방정부법 28조에 반대하는 저명한 활동가들이 모여 1989년 ‘스톤월’이라는 이름의 자선 단체를 창립했다.
래리 크레이머의 액트업은 투쟁적인 전술을 사용했다. 1988년 10월 액트업은 미국 식품의약국FDA ― 에이즈 치료약을 허가했다 ― 건물을 습격해 연좌시위를 벌이고 연막탄을 터뜨리고 로널드 레이건 모형을 불태웠다. 액트업은 겉보기로는 영국의 자선 단체 스톤월과는 크게 달라 보였지만, 그와 마찬가지로 커밍아웃한 중간계급 동성애자의 성장을 반영했으며, 그런 점에서 액트업의 활동은 ‘전문가적’ 기준에 따라 세심하게 연출됐다. 광고회사 직원이었다가 TV 프로듀서로 일한 미켈란젤로 시뇨릴레Michelangelo Signorile가 액트업의 언론위원회 의장이 됐다. 그는 다음과 같이 논평했다.
시뇨릴레가 만족해 하며 말했듯이, 액트업의 언론위원회는 “충분히 연습된 서커스를 조직했다”고 말했다. 항의 행동 참가자들은 모두 행동 요구의 핵심을 잘 말하도록 훈련받았고, 기자들은 모두 보도 자료 ─ 저명한 칼럼니스트는 맞춤형 자료 ─ 와 커피와 도넛을 받았다. 시뇨릴레는 언론에 보도되는 것이 중요하다고 결론 내렸다. “동성애자 운동은 … 보도 자료와 사전 광고와 홍보 없이는 … 다시는 주요한 시위를 조직할 수 없다.”그들은 액트업의 언론위원회를 세밀히 조율해 이 기구를 정교한 기업 홍보부로 만들었다. … 위원회는 대략 12명의 홍보담당자, 언론인, 편집자, 저술가로 구성됐고, 모두 게이와 레즈비언이었다. … 모든 사람들이 서로 연락하고 접촉했다.
래리 크레이머도 투쟁성과 전문가화 경향을 결합시켰고, ‘동성애자 공동체를 조직하는 방법’이라는 제목의 글에서 다음과 같이 강조했다.
우리 중 그 누가 잠재적 지도자는 의사, 변호사, 과학자, 하버드대학교나 뉴욕대학교 출신자일 것임을 모를까? 내 말이 엘리트주의적으로 들리지 않기를 바라지만 책임감은 교육을 받아야 생긴다. 우리에게는 책임감 있고 좋은 교육을 받았으며 남 앞에 내세울 만한 지도자가 그 어느 때보다 필요하다.
크레이머의 정치는 또 다른 모순도 있다. 그는 에이즈를 대하는 태도를 지적하며 여러 저명한 뉴욕 시민들을 “살인자와 똑같다”고 비난하면서도, 남성 동성애자들도 에이즈 확산에 책임이 있다며 문란한 성행위는 비난받을 일이라고 했다.
1970년대부터 크레이머는 남성 동성애자들의 문란함을 개탄했다. 다른 사람들은 에이즈의 위험을 보며 존중받을 만한 일부일처제로 나아가려는 유인을 얻었다.최근까지도 우리는 철저히 천박하고 매우 쾌락주의인 것으로 보인다. 이런 쾌락주의가 에이즈를 낳았다. 그런데 우리는 이성애자 세계가 즉시 에이즈 문제를 수습하기를 기대하고 있다. 그러니 남성 동성애자들과 그들의 곤경에 대한 동정심이 거의 없는 상황이 과연 이상한 것일까?
1990년대 이후의 미국
전반적으로 그리고 특히 LGBT의 정치와 관련해서, 대략 1990년대부터 영국과 미국의 정치 상황은 다른 방향으로 전개됐다. 미국에서는 40년 전에만 해도 좌파가 꽤 컸지만, 이제는 전체로 보아 정치적 중심이 상당히 오른쪽으로 기울어 있다. LGBT 쟁점을 둘러싼 전국적 정치도 그 영향을 받는다. 공화당은 공공연하게 동성애를 혐오한다. 2000년에 조지 W 부시는 기독교 우파의 표를 얻기 위해 동성 결혼 반대 주장을 했다. 2008년에 존 매케인과 세라 페일린은 둘 다 동성 결혼을 반대하며 단지 연방정부 차원에서 금지할지 주정부 차원에서 금지할지에 대해서만 이견이 있었다. LGBT 쟁점에 대한 민주당의 말은 공화당보다 낫지만 실천은 인상적일 것이 없다. 1996년에 빌 클린턴은 결혼보호법에 서명했는데, 이 법은 연방정부 차원에서는 한 남성과 한 여성의 합법적 결합을 결혼이라고 규정했다. 오바마는 겨우 대선 공약이었던 동성애자 입대 금지를 폐지했을 뿐인데, 그조차 대통령 취임 2년 반이 지난 뒤에야 이행한 것이다.
11 2011년 7월에만 해도 〈워싱턴 포스트〉의 설문조사 결과를 보면, 동성 결혼에 대한 의견은 반반으로 명확히 갈려 있었다. 51퍼센트는 동성 결혼을 허용해야 한다고 봤고 45퍼센트는 계속 불법이어야 한다고 여겼다. 이 쟁점에서도 여론은 시간이 갈수록 동성애 친화적 입장으로 바뀌었다. 2003년에는 단지 37퍼센트만이 동성 결혼 합법화 입장이었고, 55퍼센트는 반대했었다. 12
그렇다고 해서 미국이 균질하게, 또는 일반적으로 동성애 혐오적인 나라라는 말은 아니다. 예를 들어 2010년 12월 〈워싱턴 포스트〉가 실시한 설문조사에 따르면, 응답자의 77퍼센트가 동성애자들의 군 허용에 동의했다. 이 수치는 1993년의 44퍼센트에 견줘 크게 증가한 것이다. 백인 전도사 중에서도 70퍼센트가 동성애자 입대 금지 조처 폐지에 찬성했다. 하지만 국내 정치에서는 확고한 동성애 지지 입장이 인기가 없다. 공화당 우파가 동성 결혼을 핵심 쟁점으로 삼아 공격하고 있기 때문이다. 티파티 소속 여성 하원의원인 미셸 바크먼은 동성 결혼이 “적어도 지난 30년 동안 우리 주와 우리 나라에서 가장 큰 쟁점”이라고 했다. 자본가 정당이고 어느 모로 보나 좌파 정당이 아닌 민주당은 복지 삭감에서부터 국가 부채에 이르기까지 여러 쟁점에서 공화당이 주도력을 발휘하는 것을 허용해 왔다.미국 공식정치에서는 우익이 유력한 상황과 [사회적으로는] LGBT 호의적 입장이 증대한 상황이 맞물리며 몇 가지 효과를 초래했다. 하나는 앤드루 설리번Andrew Sullivan 같은 보수적 동성애자의 출현이다. 설리번은 미국이 중동에서 벌이는 전쟁을 지지하고 복지국가를 반대하고 부자들이 더 많은 세금을 내야 한다는 견해를 반대한다. 1996년 출간된 《사실상 정상》에서 그는 (최근 나타나고 있듯이) ‘자본주의에 통합된 레즈비언·게이·양성애자’라는 전망을 제시하며, 그런 성소수자는 다음과 같이 말할 것이라고 주장한다.
우리는 당신의 군대이고 당신의 전쟁을 수행하고 당신의 가정을 보호한다. 우리는 동성애자와 이성애자 모두를 위한 이 경제를 건설하고 유지하는 기업가이자 여성이다. … 우리는 당신의 민간 지도자고, 당신의 사제이자 랍비이며, 당신의 작가이자 발명가이고, 당신의 스포츠 우상이자 모험가다. 우리는 당신에게 바라는 것은 없지만 당신에게 줄 것은 많다. 당신이 우리를 보호할 필요는 없다. 다만 이성애자를 대하듯 우리도 그렇게 대해 달라.
14 마르크스주의자들은 LGBT와 즐거움을 위한 섹스가 가족 외부에 있으면서 가족을 위협하기 때문에 지금까지 억압받아 왔다는 견해를 받아들이지만, 설리번은 LGBT(적어도 품위 있게 처신할 태세가 된 LGBT)를 가족에 통합시킴으로써 LGBT 해방을 이룰 수 있다고 본다.
이 견해의 핵심 요소는 결혼이다. 설리번은 결혼을 “정말로 중요한 유일한 개혁”이라고 한다. 그는 에이즈로 죽은 친구를 보며 결혼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발전시켜 왔음을 시인한다. 그의 주된 주장은 이렇다: 결혼은 “동성애자들의 생활에서 핵심 ― 동성애자 커플 ― 을 전통적 가족의 일부로 포함할 수 있다.” 미국 정치의 무게중심이 오른쪽으로 치우쳐 있는 상황은 또 다른 효과를 낳았다. 사람들의 견해가 한편으로는 개혁을 거의 제공하지 못하는 우파 개혁주의로, 다른 한편으로는 이해할 만하게도 우파 개혁주의에 반대하지만 더 나은 정치 전략을 제시하지 못하는 퀴어 정치로 양극화된 것이다. 예를 들어 ‘인권 캠페인’HRC은 미국에서 가장 큰 LGBT 운동 단체다. 인권 캠페인은 주로 로비 활동을 하는데, 아메리카 에어라인, 뱅크 오브 아메리카, 마이크로소프트 등과 협력한다. 문제는, 이런 온건한 활동 방식 탓에 이 단체가 정치인이나 다국적기업들의 지지를 얻을 만한 어젠다만을 추구한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 2004년에 인권 캠페인이 사회보장 서비스를 민영화하려는 부시의 발의를 지지했다는 보도가 있었다. “그 이유의 하나는 그 대가로 동성애자 커플이 [민영화된] 사회보장 서비스 혜택을 받을 권리를 취득하는 것”이었다. 2007년 인권 캠페인은 직장에서 동성애자의 평등은 보장하지만 트랜스젠더는 배제하는 법안을 지지했다.16 이런 발전은 환영할 만하지만 LGBT나 퀴어 쟁점에 대한 학계의 연구가 더 넓은 미국 사회에서는 영향력이 매우 적다는 점은 놀라운 일이다. 아래에서 보겠지만, 퀴어 이론의 기본 개념 하나는 섹슈얼리티가 생물학의 결과가 아니라는 것이다. 여러 사회들에서 그 구성원들은 동성애자, 양성애자, 이성애자로 분류되지 않으며, 성과 관련된 개념도 사회마다 다르고, 따라서 그런 개념들은 “사회적 구성물”이기 때문이라고 한다. 하지만 이런 사상은 섹슈얼리티에 대한 대중적 논의에는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 대중적 논의 지형은 한편으로는 동성애를 의도적이고 죄악적인 선택이라고 보는 기독교 우파, 다른 한편으로는 동성에 대한 성적 욕구를 타고난 본성이라고 강조하는 LGBT 활동가들로 양극화돼 있다.
인권 캠페인이 미국 기업들과 제휴하는 동안, 다른 LGBT ― 더 흔하게는 퀴어 ― 활동가들은 미국의 또 다른 기관, 즉 대학들에 둥지를 틀었다. 현재 수많은 미국 대학에서는 LGBT 연구 과정이 제공되고 있고, 게이나 레즈비언이라고 해서 학계에서 주디스 버틀러 같은 유명 인사가 되는 데 방해를 받지도 않는다.1990년대 이후의 영국
1990년 대처의 몰락 이후 영국에서는 동성애 혐오를 부추기는 주요 정치인은 없었다. 보수당의 존 메이저 정부는 남성 동성애자의 합법적 성관계 연령을 18세로 낮췄다. 1997~2010년의 노동당 블레어-브라운 정부는 LGBT에게 공식적·법률적으로는 이성애자와 평등한 권리를 거의 다 보장하는 일련의 조처를 시행했다. 그러나 크게 주목할 예외 두 가지를 남겨 뒀다. 첫째, 동성 커플은 결혼할 수 없고, 이성 커플은 ‘시민 동반자 관계’civil partnership[결혼하지 않더라도 법률상 부부의 권리를 보장받는 관계]를 맺을 수 없다는 것이다. 둘째, 남성 동성애자는 헌혈이 제약된다는 것이다.
지난 40년 동안 LGBT의 처지는 법률로 박해받는 처지에서 법률로 보호를 받는 처지로 급격하게 바뀌었다. 남성들끼리의 모든 성적 행위는 잉글랜드와 웨일즈에서는 1967년까지, 스코틀랜드에서는 1981년까지, 북아일랜드에서는 1982년까지 범죄였다. 동성 커플은 법률상 부부의 지위를 보장받지 못했으므로, 1990년대 정도까지는 강제로 헤어지거나, 파트너가 사망했을 때 임차권을 물려받을 수 없어서 노숙인이 되거나, 동성애를 혐오하는 친척들 때문에 아픈 파트너의 병상을 지키지 못했다. 직장에서 LGBT는 합법적으로 해고되거나 괴롭힘을 당하고, 사내 복지 이용을 거절당했다. 태어날 때 부여받은 것과는 다른 이름과 젠더를 사용하는 트랜스젠더는 여권 같은 서류를 변경할 수 없어서 계속해서 곤란한 처지에 빠지고 괴롭힘을 당했다. 그러므로 공식적으로 법적 평등을 보장받는 것 ― 당연히 차별이 종식되지는 않았다 ― 은 커다란 진전이었다. 여성과 흑인이 공식적으로 법적 평등을 보장받더라도 성차별과 인종차별이 끝장나지 않은 것과 꼭 마찬가지다. 그리고 지배계급이 흑인에 대한 공식적·법률적 평등과 제도적 인종차별을 둘 다 지지하는 것에서 보듯이, LGBT에 대한 법적 평등을 지지하더라도 지배계급이 ‘우리 편’인 것은 아니다. 하지만 법적 평등 보장 덕분에 커밍아웃한 LGBT 사람들이 40년 전에는 불가능했던, 정치적으로 반동적인 입장을 채택하는 일이 가능해졌다. 그런 사람들 일부가 기성 체제의 핵심부에 자리를 잡게 됐고, 그 지위에 걸맞은 자기만족적 견해를 표현해 왔다. 이반 데이비스Evan Davis는 〈라디오4〉에서 ‘투데이’라는 프로그램을 진행한다. 2011년 6월 영국에서 발행되는 〈이브닝 스탠더드〉와의 인터뷰에서 그는 동성애 혐오자들이 지독한 편견을 가질 권리를 존중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노동계급 거주 지역에서 이웃에게 괴롭힘을 당하는 사람보다 부나 특권 ― 옥스퍼드대학교나 하버드대학교에서 학위를 받았고 런던 중심지 고급 주택에 사는 것 등 ― 으로 보호를 받는 사람일수록 데이비스 같은 견해를 받아들이기가 더 쉽다. 법적 평등 보장은 LGBT 사이에서 계급적 구분선에 따라 견해가 나뉘는 것을 촉진하는 경향이 있다. 또, 법적 평등 보장으로 지배계급이 무슬림은 후진적이고 미개하다거나 이슬람은 동성애자 혐오 종교일 수밖에 없다는 인종차별적 고정관념을 이용해서, 중동에서 벌이는 제국주의 전쟁에 대한 일부 LGBT의 지지를 받는 일이 가능해졌다. 예를 들어, 〈인디펜던트〉의 저명 칼럼니스트 요한 하리Johann Hari는 게이 잡지 《애티튜드》Attitude에서 영국 무슬림 중에는 레즈비언이나 게이를 용인하는 사람이 단 한 명도 없다고 주장했다. 피터 타첼Peter Tatchell은 동성애 혐오적 무슬림을 자기 캠페인의 주요 표적으로 삼았다. 반反무슬림적 고정관념은 영국수호동맹EDL 같은 인종차별적 극우 조직의 부상도 도왔다. 영국수호동맹은 자신들이 LGBT를 지원한다고 주장하는데, 그 규모는 과장돼 있지만 아주 허튼소리는 아니다. 예를 들어, 2011년 초 런던 동부에 거주하는 무슬림들이 동성애 혐오적 스티커를 부착하자 영국수호동맹 지지자들은 그에 대응해 “런던 동부 자긍심 행진”을 조직했다. LGBT가 계급에 따라 양극화되고 LGBT의 정치적 견해도 양극화되는 상황에서는, LGBT가 공통의 이해관계를 가지고 통일된 “LGBT 공동체”를 이룬다고 보는 정체성 정치의 이면에 있는 가정들은 허물어지기 쉽다.
시애틀 이후의 운동
19 이런 운동들의 특징은 단결 염원이었다. 또, 1980년대의 정체성 정치와 그것의 분열 초래적 도덕주의에 대한 분명한 반대였다. 그러나 조직의 기초로서 정체성 정치를 대체할 정치적 대안도 없었다. 그래서 단결 염원은 다소 포용적 형태의 정체성 정치를 만들어 냈고, 상이한 정체성들의 연합을 고안했고, LGBT나 LGBTQIA처럼 쉽지 않은 줄임말을 사용했다.
1999년 말 세계무역기구WTO에 반대해 일어난 시위는 나중에 반자본주의 운동이라고 불리는 운동의 도약대였다. 이 운동의 스타일과 정치는 거의 틀림없이 액트업의 그것을 (시뇨릴레가 언급한 전문주의는 제외하고) 물려받은 것이고, ‘영국 긴축 반대’UK uncut 같은 오늘날의 운동에도 틀림없이 영향을 미치고 있다.이런 단결의 기초를 이루는 것은 어떤 정치 사상일까? 그런 운동에는 정치적 이데올로기와 정당에 대한 회의주의가 널리 퍼져 있다. 마르크스주의, 개혁주의적 사회주의, 유럽연합식 자유주의 등 체계적 정치 사상들은 모두 이러저러한 방식으로 신뢰를 상실했고, 마오쩌둥주의와 반식민지 민족주의는 정치 세력으로서는 오래 전에 사멸했고, 경제 위기로 신자유주의도 스스로 문제점을 드러낸 상황이다. 그런 운동에는 여러 정치 조류가 있고 그들 사이에 격렬한 논쟁이 일어나고 있지만, 자율주의 유형의 조직도 꽤나 널리 받아들여지고 있다.
그것은 동호인 단체, 운동 조직 연합체, 정보 교류 센터, 독립 미디어처럼 다양한 수단을 통한 합의를 기초로 항의 행동을 조직하는 … 탈중심적인 “연합들의 연합”이다.
사상 면에서 볼 때, 정치 세력과 정치 사상에 대한 이런 회의주의와 다원성 염원은 미셸 푸코나 주디스 버틀러 같은 저술가들의 포스트모더니즘적 사상의 영향을 받았다. 포스트모더니즘 사상들은 세계를 이해하고 바꾸려 하는 사상들의 근본적 가정들에 문제를 제기하고, 흔하게는 사회를 총체적으로 이해하고 바꾸는 것이 과연 가능하느냐는 의문을 던진다. 이것들이 퀴어 이론의 주요 쟁점들이다. 퀴어 이론의 정치적 맥락을 밝히려면 퀴어 이론의 사상과 정치를 더 자세히 검토해야 하는데, 미셸 푸코의 저작에서 시작하고자 한다.
미셸 푸코
프랑스의 역사가이자 활동가이며 대중적 지식인인 미셸 푸코의 《앎의 의지》는 1979년에 처음 영어로 출판됐다. 이 책은 퀴어 연구와 그 정치의 토대 격 문헌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짧은 책에는 성에 대한 세간의 통념에 강력한 이의를 제기하는 여러 사상이 포함돼 있다.
첫째, 푸코는 성이 단지 인간 생물학의 표현이라는 생각을 거부한다. 오히려 성에 대한 생각, 성이 실제로 이뤄지는 방식이 시대와 사회에 따라 변화한다고 봤다. 예를 들어, 역사의 어떤 시기에는 인류가 “동성애자”와 “이성애자”로 나뉘지 않았다. 어떤 사람이 다양한 성행위의 일종인 “소도미”sodomy[남성 간 성행위]를 행했다는 이유로 비난받았더라도, 소도미는 누구나 저지를 유혹을 느끼는 죄악으로 여겨졌고 그래서 그 행위자가 특정 종류의 인간으로 분류되는 것은 아니었다. 푸코는 유명한 문장에서 그 차이를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고대 민법이나 교회법의 규정으로 소도미는 금지 행위의 한 유형이었고, 그 행위자는 법률적 제재 대상일 뿐이었다. 19세기 동성애는 유명해지고, 어두운 과거 경력이 되고, 병력病歷이 되고 아이들의 일이 됐다. … 그를 구성하는 모든 요소 중에서 그의 섹슈얼리티의 영향을 받지 않는 것이 없었다. 섹슈얼리티는 그의 내부 도처에 존재한다. … 섹슈얼리티는 항상 스스로 노출되는 비밀이다. … 소도미는 일시적 일탈이었지만 이제 동성애는 하나의 종種이다.푸코는 이 변화를 의학, 정식의학, 응용범죄학을 통한 행위 통제가 부과되던 시기인 19세기에 자리매김해서 이해한다. 하지만 그런 변화의 특징이 억압적이라고 할 수는 없다. 이것이 성에 대한 통념에 던진 푸코의 둘째 문제 제기였다. 사람들이 성에 대해 말하는 것이 금지되기보다는, 히스테리 부리는 여성, 자위하는 아동, 동성애 같은 특성이 새로 발견되면서 사람들은 계속 성에 대해 언급할 수밖에 없게 됐다. 사실 성은 개별 인간 존재의 중심으로서 구성된다. “우리는 성에게 진실을 말하라고 요구한다. … 그리고 우리는 성이 우리에게 진실을 말해야 한다고, 또는 더 정확히 말해서 우리가 즉각적 의식에 있다고 여기는 우리들 자신에 관한 그 진실 중에서 깊숙이 묻혀 있는 진실을 말해야 한다고 요구한다.” 《앎의 의지》에서 푸코가 제기한 셋째 주제는 그가 “권력”이라고 부른 것과 관련 있다. 권력은 천대당하는 사람에게는 없고 나머지 사람에게는 있는 그 어떤 것이 아니다. “섹슈얼리티와 관련해 우리는 누가 권력을 가지고 있는지(남성, 성인, 부모, 의사), 누가 권력을 빼앗기는지(여성, 청소년, 아동, 환자)를 찾으려 해서는 안 된다.”
권력은 생래적으로 억압적이지만 창조적이기도 한데, 19세기에 매우 다양한 새로운 성적 특성이 발견됐고 동성애도 그중 하나라는 것이다. 권력은 국가와 같은 것이 아니고, 저항과 쉽게 구별되지 않으며, 저항과 지속적인 상호 관계를 형성한다고 푸코는 확신한다.
[권력의 ― 윌슨] 합리성을 관장하는 사령부를 찾지 말자. 통치 계층도, 국가기구를 통제하는 집단도, 가장 중요한 경제적 결정을 내리는 사람들들도, 한 사회에서 기능하는 권력의 관계망 전체를 감독하지 않는다. … 권력이 있는 곳에 저항이 있다. 그렇더라도, 어쩌면 그 귀결로서 저항은 권력이 관계된 곳의 바깥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 권력 관계는 저항이 일어나는 곳의 다양성에 [의존해] 존재한다. 다양한 저항은 권력 관계 안에서 반대자, 표적, 버팀목, 조종대 구실을 한다. … 따라서 위대한 ‘거부’의 장소가 단 하나인 것은 아니다. 항쟁의 정신, 온갖 반란의 원천, 혁명의 순수 법칙도 하나가 아니다. 오히려 복수의 저항들이 있고 각각은 모두 특별하다. … 정의상 그런 저항들은 권력 관계의 전략 영역 안에서만 존재할 수 있다.
25 그러므로 권력이 가하는 제약으로부터 성을 해방시키자고 요구하는 것은 오류라는 것이다.
이런 권력 개념을 보면, 푸코는 성이 억압당한다는 생각을 거부했음을 알 수 있다. “섹슈얼리티를 권력이 억제하려고 애쓰는 일종의 자연적 여건으로 여기면 안 된다.”26 마크 에프레히트Marc Epprecht가 《이성애적 아프리카?》Heterosexual Africa?에서 인정하듯이, 서구의 성 개념을 가지고 아프리카 전통 사회에서 ‘동성애’를 찾으려 하면 아무것도 발견하지 못할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식민 지배를 받기 이전 아프리카인들이 모두 이성애자였다는 말은 아니다. 그저 아프리카인들의 섹슈얼리티 개념이 서구의 개념과 달랐다는 말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섹슈얼리티가 사회적으로 구성된다고 보는 인식은 중동 사회에 존재하는 남성 간 성행위와 여성 간 성행위를 설명할 때 결정적으로 중요하다. LGBT 일부가 유럽인들은 성적으로 포용적지만 아프리카인이나 중동 출신 사람들은 동성애 혐오적이라는 인종차별적 고정관념들을 받아들이는 경향이 커지면서, 아프리카와 중동 사회에서 나타난 성적 행위들은 정치적으로 중요한 쟁점이 됐다. 27
푸코의 첫째 주장 ― 섹슈얼리티는 사회적으로 구성된다 ― 은 수많은 역사학·사회학 저술에 영향을 미쳤으며, 다양한 맥락에서 유효한 것으로 여겨져 왔다. 고대 그리스의 지배계급으로부터 1940년대 런던의 노동계급에 이르기까지 역사의 대부분 시기에 ‘동성애자’와 ‘이성애자’는 존재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이런 인식은 유럽 이외 사회의 섹슈얼리티를 이해하는 데서도 결정적으로 중요하다.28 사실 사람들은 다양한 성적 경험을 하고, [성은] 두세 가지 범주가 아니라 저울 눈금이나 스펙트럼으로 더 잘 표현될 것이다. 저울 눈금은 시간이 지나면서 바뀔 수 있다. 사람들은 성적 욕구가 다양하고 성적 행위를 다양하게 할 뿐 아니라, 마음 속 ‘성적 정체성’도 다양할 수 있으며, 다른 사람들이 정체성을 부여해 줄 수 있다. 이 상이한 층위들 ― 행위, 내적 정체성, 부여된 정체성 ― 은 여러 방식으로 결합될 수 있다. 예를 들어, 결혼한 어느 남성이 부인과도 섹스하지만 게이 사우나에 가서 모르는 남성과 섹스했다고 하자. 이웃이나 직장 동료들은 그를 이성애자로 여길 것이다. 그런데 그 자신은 스스로 진정한 동성애자로 여기며 결혼 생활을 고통스러운 가식이라고 생각할 수도, 스스로 진정한 이성애자로 여기며 동성과의 섹스는 우연적인 일이라고 생각할 수도, 스스로 양성애자로 여길 수도 있다. 이 쟁점도 포용적 LGBT 운동을 건설할 때 정치적으로 중요하다는 것이 입증돼 왔다. 왜냐하면 모두가 레즈비언, 게이, 양성애자 등의 범주에 딱 맞아떨어지지는 않기 때문이다.
특히 미국의 일부 LGBT 활동가들이 자신들은 “원래 이렇게 태어났다”는 것을 입증하고 그러니 자신들의 욕구를 이유로 존재 자체를 비난하면 안 된다고 주장하려 애쓰면서 섹슈얼리티에 대한 아주 조야한 생물학적 설명을 받아들일 때, 지금 사회에서 동성애와 이성애 같은 범주 구분이 자연스러운 것이냐고 문제 제기하는 것은 유용하다.마지막으로, 섹슈얼리티를 사회적 구성물로 인식하는 것은 트랜스젠더를 포괄하는 운동을 건설하는 데 도움이 된다. 현재 트랜스젠더는 욕구 대상의 젠더를 기초로 한 게이나 레즈비언 등과는 별개 범주로 취급된다. 위에서 보았듯이, 게이나 레즈비언들이 위신을 추구하면서 트랜스젠더와 거리를 두고 스스로 “정상적”으로 남자다운 남자이자 여자다운 여자로 표현하는 경향이 있다. 퀴어 활동가들은 한결같이 스톤월 항쟁이 트랜스젠더가 아니라 LGB(즉, 레즈비언과 게이와 양성애자)의 운동이었다는 사실이 본보기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트랜스젠더는 스톤월 항쟁에서 주도력을 발휘했다. 또, 역사의 많은 시기 동안 동성에게 성적 욕구를 느끼는 것은 트랜스젠더 행위와 결부돼 이해됐다. 섹슈얼리티를 사회적 구성물로 보는 인식은 그런 역사를 발굴하는 데 일조했다.
푸코의 개념은 이런 장점들이 있지만, 심각한 약점도 있다. 푸코는 섹슈얼리티가 어떻게 구성되는 것인지, 그리고 전체 사회의 조건이 어떤 연결고리를 통해 섹슈얼리티의 변화를 낳는 것인지 말하지 않는다. 프랑스의 마르크스주의자 장 폴 사르트르가 논평했듯이,
푸코는 가장 관심이 가는 것을 말하지 않는다. 다시 말해, 각각의 사유가 어떻게 각각의 조건을 토대로 구축된 것인지, 또는 인간이 어떻게 하나의 사유에서 또 다른 사유로 넘어가는 것인지 말하지 않는다. … 물론 그의 시각은 여전히 역사적이다. 그는 시기와 전후를 구분한다. 그러나 그는 영화를 환등기로, 즉 움직임을 정지 상태의 연속으로 대체했다.푸코가 《앎의 의지》에서 그리 한 이유 하나는 역사적 증거를 무시하며 성의 역사와 자본주의 발전이 연결돼 있음을 부인하고자 했기 때문이다. 푸코는 자신이 반대한 통념에 관해 이렇게 논평했다. “17세기에 억압의 시대가 출현했다고 판단함으로써 … 사람들은 억압이 자본주의의 등장과 함께 나타난 것으로 본다. 억압은 부르주아적 질서의 필수적 일부가 된다.” 푸코는 역설적이게도 다음과 같이 호소한다. “부르주아는 육체의 생략과 섹슈얼리티의 억압을 뜻하며 계급 투쟁은 그런 억압을 없애기 위한 싸움을 함의한다고 여기는 사람들에게 양해를 구한다.” 푸코 분석의 약점은 마르크스주의처럼 사상의 변화를 사회 전체의 변화와 연결시키는 방법으로 설명할 수 있다. 성이 억압당한다는 생각에 대한 그의 반대에는 다루기 까다로운 문제가 더 있다. 그가 영국 빅토리아 여왕 시대의 사람들이 성에 대해 침묵하지 않았다 ― 예를 들어 성매매는 주요한 사회적 문제였고 캠페인과 공공 집회의 주제였다 ― 고 말한 것은 옳지만, 억압이 그 사회의 주요 측면이 아니라고 암시하는 것은 틀렸다. 오스카 와일드가 동성 간 성행위를 이유로 수감되고, 여성 하인이 임신하거나 심지어는 남성과 친하게 지낸다는 이유로 해고되고, 자위 행위를 하지 못하도록 밤에 아이들을 마구馬具에 묶는 것을 억압이 아니라면 달리 어떻게 묘사할 수 있을까? 억압이 없다는 [푸코의] 관념은 사상 ― ”성에 대한 그 어느 때보다 많은 담론들” ― 에만 초점을 맞추고 삶의 실재를 무시할 때만 유효하다. 푸코는 섹슈얼리티 해방이라는 사상을 일체 거부므로, (1980년대의 정체성 정치 활동가들이 그의 사상을 자신들에 대한 지적 지지로 여겼던 것과는 상당히 달리) 그의 사상은 LGBT 해방 사상과 근본적으로 어울리지 않는다.
푸코의 권력 개념은 문제가 훨씬 더 많다. 그의 권력 개념은 가족 내 관계부터 시민과 국가의 관계까지 광범한 관계들을 뒤섞는다. 개인적 관계에서의 “권력”은 흔히 유동적이고 모호하다. 의사와 교사 같은 사람들이 하는 기능은 다른 사람들을 돕기도 통제하기도 한다. 하지만 무력과 폭력을 기초로 한 국가의 근원적 권력은 이론의 여지가 없는 실재이다. 푸코가 성에 대한 연구를 하기 전에 광기와 감옥에 대한 글을 썼음을 고려하면, 그의 입장은 훨씬 더 이상하다. 감옥의 역사는 국가권력의 현실을 매우 분명하게 보여 주고, 1970년대 초 수감자들의 쟁점을 다루는 운동가로서 푸코는 많은 아나키스트와 비슷하게, 권력에 대한 거부를 원칙으로 삼았기 때문이다.
지난 30년 동안 푸코의 사상은 이러저러하게 해석돼 왔다. 오늘날 퀴어 활동가들에게 푸코의 사상은 성에 대한 통념에 근본적 의문을 제기하는 것을 뒷받침하는 버팀목을 제공한다. 하지만 1980년대에 출판된 《앎의 의지》는 급진적 정치 활동에서 퇴각하는 것을 정당화하는 데도 이용됐다. “위대한 ‘거부’의 장소가 단 하나인 것은 아니”고, “복수의 저항들”이 있다는 주장은 마르크스주의와 혁명을 거부하는 것, 노동당으로 숙이고 들어가는 것, 천대받는 집단의 투쟁들을 따로따로 자율적인 것으로 분리시키는 것을 보증하는 것이었다.
퀴어 정치와 그 이론의 전개
32 최근 몇몇 미국인 활동가들이 퀴어 이론의 고전이 되는 책 ─ 예를 들면 주디스 버틀러의 《젠더 트러블》 ─ 을 당시에 읽었던 것을 회상한 적이 있는데, 그에 따르면 당시 그들은 활동가들이 성 정체성을 정치 활동의 기초로 삼는 것에 문제의식을 갖도록 이끌지 않았다. 1990년대 중반 미국 퀴어 네이션은 더는 존재하지 않는 세력이 됐다. 대규모 회의를 열어 활동을 공개적으로 논의한 대규모 단체였던 영국 아웃레이지!는 피터 타첼을 중심으로 기자회견문 발표를 주요 활동으로 삼는 소규모 모임으로 전락했다.
“새로운 퀴어 정치”라고 불린 운동은 1990년 즈음 등장하기 시작됐다. 여러 단체와 개인이 그 운동에 포함돼 있었다. 미국에서 가장 유명한 단체는 ‘퀴어 네이션’Queer Nation이었고, 영국에서는 ‘아웃레이지!’Outrage!가 창립했다. 두 단체는 투쟁적 스타일이었고 동성애 혐오에 대항한 직접 행동을 벌여 당시에 성장하고 있던 더 온건한 로비 단체들과 대비됐다. 둘 다 자신의 섹슈얼리티를 드러내지 않는 고위급 LGBT 인사들을 ‘아웃팅’하는 전략을 사용했다. 한편으로 이 전략은 LGBT 내 계급 분단과 특권층에 대한 분노를 반영했다. 미켈란젤로 시뇨릴레는 저명 인사들이 자신들의 섹슈얼리티를 숨김으로써 물질적 이득을 얻고 있다고 주장했다. “그것은 당신이 가진 웨스트 34번가 펜트하우스를 숨겨 주는 벽장이다. 그 벽장 덕분에 당신은 외딴섬에 집을 가질 수 있다. 그 벽장 덕분에 당신의 은행 계좌에는 돈이 가득 찬다.” 그런데 아웃팅에 내포돼 있는 정치는 1980년대의 자율주의 정치와 비슷하다. 즉, 계급 분단을 가로질러 단결한 LGBT 공동체라는 정치, 부유한 LGBT도 그 공동체를 위해 져야 할 의무가 있다는 정치이다. 이처럼 당시의 퀴어 행동주의는 1980년대 정체성 정치가 더 급진화한 형태의 정치였다. 실제로 퀴어 행동주의는 정체성 정치의 분열적 측면 일부를 재생했다. 이 점은 1990년 뉴욕 동성애 자긍심 행진에서 반포되고 시뇨릴레가 편집한 잡지 《아웃위크》Outweek에 재수록된 ‘나는 이성자들을 증오한다’는 논쟁적 제목의 글이 잘 보여 준다. 하지만 퀴어는 사라지지 않았다. 항상 새롭고 “신랄한” 것을 추구하는 언론계에서 유행어가 됐다. ‘퀴어 애즈 포크’Queer as Folk라는 TV 연속극(영국에서는 1999~2000년, 미국에서는 2000~2005년 방영), ‘이성애자를 위한 퀴어의 눈’Queer Eye for the Straight Guy(2003~2007)이라는 프로그램[패션이나 화장 등에 전문적인 동성애자 남성들이 꾸밀 줄 모르는 이성애자 남성을 단장해 주는 프로그램] 제목이 전형적 사례다. 1991년에는 ‘퀴어’라는 용어를 적극 옹호한 테레사 드 로레티스Teresa de Lauretis는 1994년에는 ‘레즈비언’이라는 용어를 다시 사용하기로 하면서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내가 레즈비언이라는 개념을 고집하는 것은 내가 레즈비언이나 게이 연구를 위한 가설로 제안한 뒤로 출판업계에서 매우 다르게 개념적으로 공허한 창조물이 돼 버린 개념과 거리를 두는 것으로 봐도 좋다.”대학들에서 퀴어 행동주의는 사회적 구성주의 ─ 섹슈얼리티는 선천적인 것이 아니며, ‘동성애자’나 ‘이성애자’ 같은 개념은 사회에 따라 서로 다르게 ‘구성’된다는 견해 ─ 와 결합해 퀴어 이론을 낳았고, 퀴어 이론은 학술 연구의 유행으로서 큰 성공을 거뒀다. 케임브리지대학교 도서관의 소장 도서 목록을 보면, 제목에 ‘퀴어’라는 단어가 들어간 책이 수백 권이다. 《퀴어와 가톨릭》, 《퀴어 디킨스》, 《퀴어 경제학》, 《퀴어 독일 영화》, 《퀴어 르네상스 역사 기록》, 《퀴어 현상학》, 《퀴어 이론과 유대인 문제》 등. 이렇게 다양한 제목을 보면, 퀴어 이론이 성 정체성 관련 문제를 다루는 LGBT 연구에 국한되지 않는다는 것이 분명해진다. 퀴어 이론이 역사, 문학, 사회·문화 연구 등을 포함한 분야에서 섹슈얼리티와 젠더와 관련된 쟁점 전반을 다루는 데로 확장된 덕분에, 그 전망에 기초해서 학술 연구를 할 기회가 크게 증대했고, 이는 [퀴어 이론에 대한] 전반적 평가의 일부가 돼야 할 물질적 현실이 됐다.
퀴어 이론과 그 정치 평가하기
퀴어에 대한 오늘날의 이해는 1990년대 초의 퀴어 네이션 같은 급진적 정체성 정치 단체들과, 푸코에서 기원한 구성주의적 섹슈얼리티 분석이 조우한 것에 그 기원을 두고 있다. 애너매리 야고스는 그 결과물을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대략적으로 말해 퀴어는 염색체에 따른 성, 젠더, 성적 욕구 사이의 관계가 안정된 것이 아니라, 그 사이에 모순들이 있다는 것을 극적으로 드러내는 태도나 분석 모델을 가리킨다. … 퀴어는 성, 젠더, 욕구 사이의 부조화에 초점을 맞춘다. 제도적으로 퀴어는 가장 두드러지게는 레즈비언·게이 관련 주제들과 관계가 있었다. 그러나 퀴어의 분석틀은 이성 복장 애호, 간성, 젠더 모호성, 젠더 교정 수술 같은 주제도 포함한다. … 퀴어는 이성애를 안정화하는 세 개념 사이의 모순을 찾아내고 활용한다. ‘자연 그대로의’ 섹슈얼리티는 존재할 수가 없다는 것을 보여 줌으로써 퀴어는 ‘남성’이나 ‘여성’처럼 명백히 문제될 것이 없는 듯한 개념에도 의문을 제기한다.
겉으로 보기에, 위 인용문에 묘사된 퀴어 이론에는 마르크스주의자들이 반대할 만한 것이 없다. 아래에서 다루겠지만, 19세기 이래 마르크스주의자들은 남성성, 여성성, 결혼 등등에 대한 사고가 역사적으로 어떻게 발전해 왔는지를 설명했다. 마르크스주의자들은 푸코의 분석을 자본주의 사회의 등장이라는 맥락 속에 놓은 조건에서는 섹슈얼리티가 사회적으로 구성된다는 주장을 받아들인다. 마르크스주의자들은 경제적 정의를 증진시킬 뿐 아니라, 성과 섹슈얼리티를 둘러싼 심대한 변화를 초래하고, 여성성과 남성성에 대한 통념을 허물고, 사람들의 섹슈얼리티 선택의 폭을 크게 확장할 사회주의 혁명을 위해 활동한다.
그러므로 퀴어 활동가들을 대하는 마르크스주의자들의 첫째 반응은 연대를 표시하는 것이어야 한다. 마르크스주의자와 퀴어 둘 다 많은 사람들의 삶을 다양한 방식으로 망치는 성차별, 동성애 혐오, 트랜스젠더 혐오에 역겨움을 느낀다. 마르크스주의자들은 더 나은 사회가 가능하다고 믿고 그 사회를 염원하며 그 사회를 성취하기 위한 투쟁에 헌신한다. 그렇게 헌신하기 때문에 마르크스주의자들은 마르크스주의 전통 내에서, 또 마르크스주의자와 퀴어 사이에서 변화를 가져올 방법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논쟁에 참여할 책무가 있다. 바로 이런 정신에 입각해서, 또 마르크스주의적 관점에서 퀴어 정치의 약점 ― 투쟁을 전진시키기 힘들다는 면에서 약점 ― 을 평가하고자 한다. 그러고 나서 ‘퀴어’라는 단어 사용 문제와 주디스 버틀러의 사상을 다루고, 마지막으로 마르크스주의 입장의 강점을 개략적으로 밝히고자 한다.
35 하지만 퀴어 이론 자체가 [기존의] 성 정체성에 의문을 제기하고, 그런 문제 제기는 이성애자와 그들의 생각을 단일한 것으로 볼 수 없음을 시사한다. [그 관점에 따르면,] 이성애자는 이 세계의 일부에서만, 그리고 역사의 일부 시기에만 존재한다. 이성애자는 다른 계급, 다른 인종, 다른 성으로 나뉘어 있다. 특히 마르크스주의자라면 이렇게 말할 것이다: 이성애자는 대부분 노동자이고, 그래서 사회 조직 방식을 전혀 통제할 수 없고, 지배계급인 이성애자보다는 LGBT 노동자들과의 공통점이 더 많다.
첫째 쟁점은 퀴어 활동가들이 생각하는 우리의 적들, 즉 위에서 설명한 해방 프로젝트의 주요 반대자들이 누구인가 하는 문제다. 어떤 저술가들은 이성애자들을 적으로 여긴다. ‘나는 이성애자를 증오한다’를 쓴 익명의 필자가 그 생각을 분명하게 밝히고 있고, “이성애 이데올로기”나 “이성애의 세계 지배” 같은 말도 심심찮게 볼 수 있다.퀴어 이론이 흔히 지목하는 둘째 적은 이성애자들이 아니라 LGBT 내 소수이다. 물론 퀴어 저술가들은 동성애 혐오와 ‘이성애 규범성’ ― 이성에게 성적 욕구를 느끼는 것이 보편적인 기본 설정이며, 그러므로 동성에게 성적 욕구를 느끼는 것은 비정상적 예외라는 가정 ― 에 반대할 뿐 아니라, ‘동성애 규범성’ ― 기존 사회의 가치를 수용하는 버전의 동성 간 애정을 증진하려는 시도 ― 도 거부한다. 여기서 퀴어들의 비판 대상은 미국의 인권 캠페인이나 영국의 스톤월 같은 단체이다. 지금 인권 캠페인의 정치적 노선은 분명히 잘못됐다. 그들은 개혁을 제공하지 못하는 개혁주의 단체이다. 스톤월은 IBM과 바클레이즈 은행 등을 협력자로 인정했는데, 이는 LGBT와 이성애자 노동자 모두를 착취하는 등 범죄를 저지르는 다국적기업들이 지지를 획득하는 데 일조했다. 마르크스주의자와 퀴어 활동가들 모두 이런 노선에 반대한다. 그렇다고 해서 스톤월이 주된 적이 되는 것은 아니다. 우리의 주적은 티파티 같은 동성애 혐오자들과 자본주의를 운영하는 힘 있는 기업들과 정부들이지 스톤월 같은 단체가 아니다. 실제로 스톤월 같은 단체가 기여해 생긴 법적 변화는 LGBT의 삶을 개선했다. 인권 캠페인과 스톤월의 입장은 모순적이다. 대기업의 이익과 대다수 LGBT의 이익을 조화시킬 수 있다는 잘못된 생각을 기초로 하기 때문이다. 퀴어 활동가들은 흔히 LGBT 운동 내의 ‘존중받는 주류’를 공격하는 데 너무 많은 에너지를 쏟아붓는다. 이는 동성애 혐오 수준이 일반적으로 낮은 대학과 언론 분야에서 많은 퀴어 활동가들이 차지하는 지위가 반영된 일이라고 본다. 그러나 대학이나 언론이 아닌 영역에서는 LGBT 지지자들(그들의 입장이 아무리 온건할지라도)과의 단결을 구축하는 것이 더욱 중요하다.
36 하지만 영국에서 시민적 결합[동성 결혼]이 도입된 이후로도 결혼하지 않고 있는 LGBT 커플들이 특별히 고통을 받고 있다는 징후는 없다. 오히려 그 반대로, 시민적 결합의 인정은 결혼을 해야 한다는 생각이 수십 년 전보다 완화되는 데 기여했다. 물론 결혼과 가족은 억압적 제도다. 하지만 동성애자도 입대할 수 있어야 한다는 요구와 마찬가지로 평등을 요구하는 것은 LGBT가 이성애자가 하는 일을 똑같이 할 수 있어야 한다는 뜻이다. 동성 커플이 이성 커플처럼 결혼할 수 있게 되는 것은 LGBT가 이성애자와 똑같이 가치 있는 사람들이라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다. 그들이 실제로 결혼을 하든 하지 않든 간에 말이다. 이 쟁점에서도 퀴어 활동가들은 표적을 잘못 잡았다.
하지만 많은 퀴어 활동가들이 특정 개혁, 특히 동성 결혼 합법화에 반대한다. 결혼하지 않는 성소수자의 처지를 더 악화시킬 것이라는 이유에서다. 마이클 워너Michael Warner는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사람들은 결혼을 통해 [자신들 관계의] 유효성, 합법성, 승인을 얻는다고 여기겠지만, 왠지 다른 관계, 필요, 욕구를 무효화하고 불법화하고 지탄하는 일 없이 그렇게 된다고 보는 것 같다.” 주디스 버틀러는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동성 결혼을 촉진하려는 최근의 노력은 결혼 규범에 순응하지 않는 성적 합의를 불법적이고 비천한 것으로 만들겠다고 위협하는 규범 또한 촉진한다.”37 여기서 주된 문제는 “급진적 성” 같은 것이 있다는 가정, 이성 복장 착용이나 가학적·피학적 성애가 현재의 질서를 허문다는 가정이다. 38 당연히 우익은 다양한 행위를 비난할 테고, 우리는 사람들의 선택 능력을 옹호해야 한다. 그러나 이를 테면 가학적·피학적 성애 같은 것이 자본주의와 본질적으로 양립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존중받을 만하게’ 보이는 LGBT 사람들에 대한 공격에는 모호함이 있다. 어떤 경우에 그 존중은 그들의 계급적 특권에 대한 인정이다. 하지만 다른 경우에는 라이프 스타일이나 성적 지향이 존중할 만하다는 뜻이다. 마이클 워너는 “집에 있으면서 남성 애인을 위해 저녁을 준비하는” 비정치적 남성과, 가학적·피학적 성애자이고 “슬럿이나 드랙퀸이나 성전환자”들과 어울리는 사람들을 대비시킨다.둘째 모호함은 ‘퀴어’라는 범주 자체와 관련 있다. 퀴어는 새롭고 더 나은 정체성을 나타낼까? 또는 정체성 정치 일체를 거부하고 새로운 조직 방식을 주장하는 것일까? 주디스 버틀러는 둘째 물음에 긍정적으로 답했다.
내가 이해하기로 퀴어는 회합에 참석할 때 신분을 증명할 필요가 없기를 바라는 개념이다. 이성애자도 퀴어 운동에 참가할 수 있다. 양성애자도 퀴어 운동에 참가할 수 있다. 퀴어는 레즈비언이 아니다. 퀴어는 게이가 아니다. … 퀴어는 참된 레즈비언·게이 정체성이 무엇이냐는 특정 규범성을 반대하는 주장이다.
하지만 실천에서는 퀴어가 LGBT의 한 하위 부분 ― 특히 젊고 세련되고 활기가 넘치는 부분 ― 으로 기능하는 듯한 경우가 흔하다. 퀴어 활동가들은 정체성 정치의 불충분함을 강조하지만 대안적 정치 조직 모델을 제시하지 못하고, 그래서 LGBT 조직에서 이탈해 나오지 못하고 ― 이것이 정체성 정치를 거부하는 것의 논리적 결과일 텐데도 ― 그 안에서 강경파로서 그 조직을 급진적으로 포장해 주는 기능을 하는 것으로 귀결되는 경향이 있다.
‘퀴어’라는 단어 마르크스주의자들이 퀴어 이론과 그 정치를 다루는 주된 방식은 특정 단어 사용이 아니라, 정치 사상에 관여하는 것이어야 한다. 하지만 ‘퀴어’라는 단어는 여전히 논란을 일으키고, 일부 LGBT가 그 단어의 사용을 거부하기도 한다. 언어와 문화 관련 쟁점을 다루는 마르크스주의 방법의 출발점은 그것의 중요성을 인정하는 것이다. 영어 알파벳 N으로 시작하는 흑인 비하 낱말, 영어 알파벳 C로 시작하는 여성 비하 낱말 등을 사용한 혐오 발언은 인종차별과 성차별을 정당화한다. 그런 낱말의 사용은 흑인과 여성의 위신을 떨어뜨려서, 그들이 그런 말을 듣는 것을 넘어서 더 큰 고통을 겪을 가능성을 높이기 때문이다. 사회와 언어는 끊임없이 변하므로 어떤 언어가 가장 적절한지를 때때로 검토해야 한다. 예를 들어 1960년대 초에는 동성에게 성적 욕구를 느끼는 사람들을 존중하는 뜻에서 그들을 ‘동성애자’homosexual라고 불렀지만, 스톤월 항쟁 이후 활동가들과 지지자들은 ‘게이’gay라는 낱말을 사용했다. 그래서 우리의 언어 사용은 전술 문제로서, 광범한 운동의 사상이 변화하는 것에 대한 대응의 일부다. 어떤 상황에서는 사회주의자들이 스스로 ‘퀴어’라는 단어를 사용했다. 캐나다 국제사회주의단체IS는 2011년 5월에 개최한 ‘맑시즘’ 포럼에서 ‘오늘날 퀴어 해방을 위한 투쟁’이라는 주제의 토론을 개설했다.
언어에 대한 우리의 태도는 문화에 대한 마르크스주의자와 유물론자들의 일반적 접근법의 일부다. 마르크스는 물질적 생활의 생산 ― 음식과 주거지 등을 구하려는 사람들의 노력 ― 이 문화적 생활의 발전을 위한 조건을 결정한다고 봤다.
물질적 생활의 생산양식이 사회적·정치적·정신적 생활의 전반적 과정을 조건 짓는다. 인간의 의식이 그들의 존재를 규정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 존재가 그들의 의식을 규정한다.
예를 들어 LGBT라는 용어의 사용은 정치적 변화를 뒤따른 것이다. 즉, 협소한 정체성 정치를 거부하고 운동에 양성애자와 트랜스젠더를 포함시키고자 하는 염원을 반영한 것이다. 이것은 퀴어 같은 단어나 2011년 중반 ‘슬럿워크’ 항의 운동에서 사용된 ‘슬럿’이라는 단어를 ‘갱생’시키자는 사상과는 꽤 다르다. 그런 행위에는 언어의 변화가 정치적 변화를 초래하고 그래서 물질적 세계를 바꾼다는 전제가 깔려 있다.
하지만 퀴어라는 용어의 호소력은 단어들을 갱생시키거나 전복하는 것과 명확히 연결된 전략 때문에 생기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이 단어는 LGBT가 차별당하는 현실을 반영한다. 이 단어는 사람들에게 불편함을 주는 성질이 있는데, 이것은 차별당하는 사람들이 느끼는 상처와 분노, 그리고 이성애적 규범에 반대하겠다 ─ 예를 들어 우세한 문화를 ‘퀴어링’하고[괴상한 것으로 만들고] 가족·남성·여성·동성애·이성애 같은 개념이 자연스럽고 일관적이라는 가정이 온통 엉터리임을 보여 줌으로써 ─ 는 결의를 반영한다. 이 단어의 호소력이 상처와 분노에서 비롯한다는 것은 (‘갱생’시키기가 ‘안전해지기’를 뜻하는 것이라면) 그 단어를 갱생시킬 수 없다는 뜻이다. 애너매리 야고스는 다음과 같이 썼다.
활동가들이 스스로 ‘퀴어’를 쓰는 것에서 변덕을 부려 왔는데, 그 주된 이유는 아무리 해도 그 낱말에 붙어 있는 수치심, 젠더 부조화라는 끔찍한 무력감, 상처투성이의 유년기 등을 떼어 내어 긍정적으로 갱생시킬 도리가 없기 때문이다. 퀴어가 정치적으로 강력한 용어라면, (사실 그러한데) 그것은 퀴어가 수치심의 유년기 원천으로부터 분리되기는커녕 오히려 거의 무궁무진한 변혁 에너지의 원천인 그 장면에 철썩 달라붙어 있기 때문이다.1970년대와 1980년대의 동성애자 운동에서 정치적으로 적극적이던 사람들은 ‘퀴어’ 같은 낱말의 사용에 반대했다. 당시에 그것은 그저 동성애 혐오적 발언이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게이’라는 낱말을 사용하자고 했는데, 운동이 그 낱말을 사용했고, 존중을 표시하는 낱말이었고, 우리의 단어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제 ‘게이’는 영국 전역 학교에서 ‘쓰레기’라는 뜻으로 사용되고, 동성애 혐오자인 DJ 크리스 모일스Chris Moyles가 라디오에서 거리낌 없이 사용하는 말이 됐다. 활동가들은 ‘퀴어’가 이제 우리의 단어가 됐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젊고 투쟁적인 LGBT들, 동성애 혐오와 긴축에 반대해 투쟁하는 LGBT들 일부는 ‘퀴어’라는 표식을 거부한다. 그런 사람들은 동성애 혐오 수준이 일반적으로 낮은 사회 영역 ─ 대학교, 동성애자들의 장소, 언론 ─ 바깥에 있어서 그러는 경우가 흔하다. 그런 극소수 영역에서나 ‘퀴어’라는 말을 들어도 동성애 혐오적 공격을 받을까 봐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다. 다른 곳에서 ‘퀴어’는 여전히 혐오 발언이다. 즉, 몇몇 협소한 영역을 넘어서서 더 많은 사람들을 포괄하는 운동을 건설하고자 한다면, ‘퀴어’라는 낱말의 사용은 실수가 될 수 있다는 뜻이다. 이처럼 더 폭넓은 시야에서 봐야, 이제는 ‘퀴어’라는 단어가 노동조합 운동에서도 가끔 사용되지만 여전히 많은 노동조합이 자신들의 성소수자 조직 이름에 ‘퀴어’가 아니라 ‘LGBT’라는 말을 사용한다는 사실을 이해할 수 있다.
주디스 버틀러
최근 퀴어 이론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인 주디스 버틀러를 위에서 여러 번 언급했다. 퀴어 활동가들 일반을 대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버틀러를 대하는 우리의 태도도 연대의 관점에서 시작한다. 버틀러는 학계의 철학자이자 정치 활동가이고 반전 운동을 지지하는 글을 써 왔다. 버틀러는 자신이 받은 유대인식 교육의 가치를 긍정적으로 평가하면서도, 이스라엘 BDS(보이콧, 투자 회수, 제재) 운동을 지지한다.
유대인으로서 나는 자의적 국가 폭력에 대해 거리낌 없이 말하고 항의하는 것이 윤리적 의무라고 배웠다. 이것은 내가 제2차세계대전과 [유대인] 집단 수용소를 공부할 때 배운 것의 일부다. … 진정으로 나를 힘들게 하는 것은, 누군가 이스라엘의 국가 폭력을 비판하려 하면 그 사람은 유대인이면 자기 혐오적이라고 유대인이 아니면 유대인 배척적이라고 비난을 듣는 것이다. … 내 보기로, 유대인과 비유대인 모두에게 시민권을 동등하게 제공하는 국가가 없는데도 해방 사상을 유지하려 애쓰는 것은 파탄 난 일이다. 그것은 파탄났다.
위 인용문은 이스라엘 신문 〈하레츠〉와 한 인터뷰에서 가져온 것인데, 이 기사에서 버틀러는 시온주의에 반대하는 유대인이 되는 것을 레즈비언 정체성 정치를 거부하는 것과 연결시켰다.
[어릴 때 친구인 ― 윌슨] 누군가를 집에 데려왔는데, [가족들의] 첫 질문이 “걔 유대인이니 아니니?”였던 적이 있을 것이다. 나는 대학교와 대학원을 다닐 때 레즈비언 단체에 들어간 적이 있는데, 그들의 첫 질문이 … “당신은 레즈비언인가요 아닌가요?”였다. … 그것은 지역 사회의 치안 유지처럼 보였다. … 그들은 정말로 유대인일까? 어쩌면 진짜 유대인이 아닐 수 있다. 그들이 진짜 유대인지 아닌지 모르겠다. 어쩌면 그들은 스스로를 혐오하는 것일 수도 있다. 그 사람은 레즈비언일까? 어쩌면 남자와 사귄 적이 있을지 모른다.버틀러는 LGBT 정치에서도 적극적이었고, 2010년 베를린 성소수자 자긍심 행사인 ‘크리스토퍼 거리 행진’CSD에 대한 논쟁을 촉발했다. 버틀러는 그 행사 조직자들이 수여하는 ‘용기 있는 시민상’ 수상을 거부하면서 크리스토퍼 거리 행진이 너무 상업화됐고, 그 조직자들이 인종차별에 맞서 싸우지 못하고 그들 스스로 나름의 인종차별적 행동을 해 왔다고 비판했다.
나는 버틀러의 저작에 대해 두 가지 쟁점, ‘수행성’ 개념과 포스트구조주의의 정치적 함의를 다루려 한다. 둘 다 버틀러가 첫 저작이자 1990년에 그녀를 유명하게 만든 《젠더 트러블》에서 제기했고, 그 뒤로도 여러 차례 제기한 쟁점이다.
먼저 ‘수행적’이라는 말이 언어철학에서 쓰이는 전문 용어임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언어철학은 언어 행위speech act에는 두 가지 종류가 있다고 주장한다. 첫째는 사실 진술이다[진술문]. 이 행위는 세계를 묘사하려는 것이며, 참일 수도 거짓일 수도 있다.(예를 들어, “하늘이 푸르다”, “나는 철학을 좋아한다.”) 둘째는 수행적인 것이다[수행문]. 이 행위는 세계를 변화시키려는 것이며, 따라서 참이다 거짓이다 할 수 없다.(예를 들어, “나는 이제 너를 남자이고 부인이라고 선언한다”, “나는 내일 너에게 전화하겠다고 약속한다.”)
《젠더 트러블》에서 버틀러는 사회에서 일부 사람들이 여성으로 인식되는 방식을 검토한다. 버틀러는 누군가를 여성으로 인식하는 행위가 그 대상자의 내재적이고 여성적인 본질을 반영한다는 생각을 거부한다. 오히려 사회적 힘 때문에 우리가 남성이나 여성으로서 행동하라는 압박을 받으며, 내재적인 여성적 정체성이 존재한다는 믿음은 그런 반복된 행위의 결과라는 것이다.
젠더 표현 이면에는 그 어떤 젠더 정체성도 없다. 오히려 그 정체성이 그 결과라고들 하는 바로 그 표현에 의해 수행적으로 구성된다.
사실 그런 행위는 반복돼야 하는데, 그 과업이 결코 완수되지 않기 때문이다. 즉, 우리는 남성되기나 여성되기를 성취할 수 없다.
이 “남성되기”와 이 “여성되기”는 내재적으로 불안정한 상태일 것이다. 그 둘은 항상 양가성에 포위돼 있다. 바로 모든 정체성 정하기에는 대가가 따르기 때문이다. 그 대가는 또 다른 정체성을 선택할 기회의 상실, 누구도 선택하지 않은 규범으로의 강제적 접근이다.
버틀러는 육체적 성감별이 아무런 물질적 실재가 없다고 주장하지는 않는다. 사상(“담론”)이 육체에 대한 인식에 항상 한몫한다고 주장한다.
담론이 형성적이라고 주장한다고 해서 담론에 수용된 것을 담론이 창출하거나 야기하거나 속속들이 구성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순전히 육체에 관한 언급일지라도 그 담론은 그 육체의 더한층의 구성에 영향을 미친다는 주장이다. … 철학 용어로 표현하면, 사실 진술은 항상 어느 정도는 수행적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누군가를 남성이나 여성이라고 지칭하는 것은 단순히 사실을 진술하는 것이 아니고, 그런 진술은 항상 어느 정도는 젠더에 대한 [기성의] 사상을 긍정적으로 평가하며 강화한다는 것이다. 이처럼 《젠더 트러블》은 페미니즘적 정체성 정치 ― 버틀러가 존재를 부정한 바로 그 내재적이고 여성적인 본질을 공통으로 간직한 모든 여성의 똘똘 뭉친 연대를 주장하는 정치 ― 에 대한 격렬한 문제 제기를 담고 있다.
하지만 버틀러의 긍정적 문제 제기에 대한 몇 가지 혼동이 있었는데, 여기서 ‘수행성’이라는 단어는 명료함을 성취하는 데 도움이 되지 못했다. LGBT 행동주의는 스톤월 항쟁에서 무대의 전면에 나선 이래로 과장된 태도를 흔히 보였는데, 퀴어 네이션은 그런 태도를 전통으로 삼았다. 그런 과장된 태도는 ‘동성애자처럼 행동하기’나 ‘이성 복장 착용하기’ 같은 더 오래된 전통을 긍정적으로 본다. 《젠더 트러블》의 말미에 버틀러는 이성 복장 착용을 간략히 다루면서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즐거움의 일부는 … 흔히들 성과 젠더의 관계가 자연스럽고 필연적이라고 가정하는 인과적 통일의 문화적 환경 설정에도 불구하고 성과 젠더의 관계가 근본적으로 우발적임을 인지하는 데 있다.
50 이 지적은 중요하다. 버틀러가 특정 유형의 정치적 항의와 생활 방식을 정치적으로 효과적이라고 뒷받침했다는 상식이 널리 퍼져 있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기 때문이다.
이 말은 버틀러가 이성애적 규범을 전복하는 방법으로서 이성 복장 착용하기와 과정된 태도를 옹호한 것이라고, 남성되기와 여성되기가 그 본질상 실행임을 주장한 것이라고 이해됐다.(이는 영어 단어 ‘performative’(수행적)와 ‘performance’(실행)을 혼동한 것 때문이기도 하다.) 《문제가 되는 육체》에서 버틀러는 자신의 견해를 명확하게 밝혔다. 버틀러는 “사람들이 아침에 일어나 어떤 젠더를 고를지 벽장이나 좀더 개방적인 공간을 살핀 뒤에 그날의 젠더에 어울리는 옷을 입고, 밤이 되면 그 복장을 원래 자리에 되돌려 놓는다”고 여기지 않았다. 이성 복장 착용하기와 관련해 버틀러는 다음과 같이 논평했다. “《젠더 트러블》이 유력한 젠더 규범을 전복하는 방법으로서 이성 복장 착용하기 실행의 확산을 주장했다고 많은 독자들이 이해할지라도, 나는 이성 복장 착용하기와 [규범] 전복 사이에는 필연적 연관이 없다는 점을 강조하고 싶다.”버틀러는 자신의 포스트구조주의 사상의 정치적 함의를 반복해서 밝혔다. 나는 여기서는 버틀러의 관점이 어느 종류의 퀴어 이론인지, 그 이론이 세계를 설명하고 그래서 정치적 변화를 가져오는 데 얼마나 유용한지를 다루고자 한다. 위에서 언급했듯이, 50년 전에는 사람들에게 실천 동기를 줬던 많은 정치사상이 이제는 신뢰를 상실했다. 마르크스주의나 반식민지 민족주의 같은 사상 체계도 그렇고, LGBT 운동 내의 사상들도 그렇다. 1970년대 초반의 급진 운동은 약속한 사회 변혁을 가져오지 못했다.(레즈비언 페미니즘은 세계를 변혁하겠다는 목적을 유지하고는 있지만 그 사상은 거의 완전히 반대의 효과를 낸다.) 완전히 다른 사회를 가져오겠다고 약속하는 사고 체계에 대한 회의적인 태도가 커졌다. 심지어는 사회를 전체로 보아 일관되게 설명하겠다고 주장하는 사상 체계들은 ‘전체주의적’이거나 ‘일반주의적인’ 설명이라고 묵살당한다.
51 과거에 버틀러는 ― 예를 들면 미국이 민주주의처럼 ‘보편적’이라고들 여기는 가치의 이름으로 이라크를 상대로 전쟁을 벌였음을 지적하면서 ― 더 포괄적인 보편성을 구축하려는 프로젝트를 거부했다. 왜냐하면,
그렇다면 버틀러는 퀴어 이론을 전체주의로 향하는 사상 체계라고 여길까? “동성애”와 “이성애”가, 또는 “여성”과 “남성”에 대한 특정한 이해가 시간과 장소에 따라 다르다는 것을 인식하는 것이 우리의 사고를 더 일반적으로 유효하고 더 보편적으로 참이게 만들어 준다는 의견도 있다.이처럼 감질나게 하는 개념은 오로지 새롭고 더 강화된 배제를 창출하는 대가를 치르고서야 성취될 수 있기 때문이다. ‘보편성’이라는 말은 … 역사적으로 제약된 전망으로부터 영원히 열린 채로 영원히 도전받는 채로 남을 것이며, 보편적이라는 전체주의적 개념은 ‘보편적인 것’이라는 표지 하에서 이뤄질 무언가를 예상하지 못하는 예상 밖의 주장에 권한을 부여하기보다는 그것을 가로막을 것이다.
버틀러는 《젠더 트러블》에서도 비슷한 주장을 하는데, 푸코와 비슷한 스타일로 다음과 같이 썼다.
권력은 철회될 수도 거부될 수도 없다. 다만 재배치될 뿐이다. 사실 내 관점으로 볼 때, 게이·레즈비언 실천의 규범적 초점은 권력을 완전히 초월한다는 불가능한 환상보다는 권력을 전복적이고 풍자적으로 재배치한다는 데 맞춰져야 한다.
겉보기로는 추상적일지라도 이 문제 제기는 정치적으로 중요하다. 세계를 이해할 수 있다는 데 의심을 품으면 세계를 변화시킬 자신감을 느끼지 못할 가능성이 높을 것이다. 파편적 인식만 할 수 있다면, 뒤집어 보기나 풍자 같은 전략만이 남을 것이다, 즉,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는 사상에 대한 전면적 도전은 불가능하다.
하지만 《젠더 트러블》의 1999년판 서문에서 버틀러는 자신이 이 책의 초판을 쓸 때 가졌던 보편성을 일관되게 부정하는 견해를 수정했다고 시인했다. 젠더와 섹슈얼리티에 대한 마르크스주의의 태도를 두고 낸시 프레이저와 벌인 1997년 논쟁에서 버틀러가 보인 견해는 보편성을 발견할 수 있다는 의견에 좀더 우호적이었다. 이 논쟁에서 프레이저는 1980년대의 사회주의 페미니스트들이 ‘이중 체계’ 이론이라고 부른 것을 명확히 표현했다. ‘마르크스주의는 경제학을 이해하는 데 유용하지만 젠더와 섹슈얼리티를 분석하려면 페미니즘으로 되돌아가야 한다.’ 버틀러는 프레이저의 견해에 반대하며 다음과 같이 썼다.
[프레이저는 ― 윌슨] 동성애 혐오가 정치경제학에 뿌리를 두고 있지 않다고 주장한다. 동성애자들이 노동분업에서 뚜렷한 지위를 차지하지 않고, 계급 구조 전체에 분포돼 있고, 착취당하는 계급을 구성하지 않고, … 그래서 그들의 투쟁은 물질적 차별보다는 문화적 인식 문제와 관련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버틀러에 따르면, 프레이저는 모든 계급에 LGBT 사람들이 있으므로, 그들이 받는 차별은 자본주의에 뿌리를 둔 것일 수 없다고 주장했다. 이에 답하며 버틀러는 자본주의는 상품뿐 아니라 인간(노동자들을 포함해)도 재생산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그리고 자본주의가 인간을 재생산하는 제도인 가족은 어떻게 자본주의가 젠더·섹슈얼리티 억압을 만들어 내는지를 이해하는 데 핵심이라고 지적했다. 버틀러는 마르크스와 엥겔스를 참고해 주장을 시작했고, 1970년대와 1980년대의 정치 논쟁을 언급하며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당시 사회주의 페미니즘의 핵심은 바로 가족이 자연적으로 생긴 것이 아니라는 견해였으며 … 1970년대와 1980년대의 학자들은 삶의 물질적 조건의 일부로서 성적 재생산 영역을 확립하고자 했다. … 그들은 어떻게 ‘남성’과 ‘여성’이라는 젠더화된 인간의 재생산이 가족이라는 사회적 규제에 달려 있는지를 보여 주려고도 애썼다. … 섹슈얼리티라는 사회 영역을 변혁하고자 한 투쟁들은 대가가 지불되지 않고 착취당하는 노동의 문제와 직접 연결돼 있지 않으므로 정치경제학의 중심 문제가 되지 않았다. 인간의 사회적 재생산뿐 아니라 상품의 재생산을 포함하는 ‘경제’ 영역 자체의 확장 없이는 그 투쟁들을 이해할 수 없기 때문이다.
마르크스, 엥겔스, 사회주의 전통
56 오늘날 많은 퀴어 이론은 선진국에서는 중공업과 광산업이 쇠퇴하고 소련은 몰락했으므로 마르크스주의가 낡았고 현실에 맞지 않게 됐다는 통념적 견해를 받아들인다.
퀴어와 마르크스주의 전통 사이의 이런 건설적인 대화는 불행하게도 드문 편이다. 푸코는 스탈린주의가 아닌 마르크스주의와 관계를 맺은 적이 없었으며, 도발적으로 마르크스 자신의 저작들을 다음과 같이 일축했다. “마르크스주의는 물 속의 물고기처럼 19세기 사고에 머물러 있다. 즉, 다른 곳에서는 숨을 쉴 수 없다.”이 글은 마르크스주의 전통 일반을 방어하는 글이 아니다. 하지만 젠더와 섹슈얼리티에 대한 마르크스주의의 태도를 설명하는 것은 가치 있는 일이다. 버틀러가 그랬듯이,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저작에서 시작하겠다.
첫째 핵심은 많은 사람들이 여기는 것과 달리 마르크스주의는 인간 해방에는 실질적 관심이 전혀 없이 경제적 정의에만 관심을 두는 정치가 아니라는 것이다. 가장 초기 저작부터 가장 최후의 저작에 이르기까지 마르크스의 자본주의 비판은 인간이 마땅히 누려야 할 존엄을 자본주의가 제공하지 못한다는 점을 포함한다. 그 과정은 자본주의의 경제적 성격에 뿌리를 두고 있지만 그것을 넘어선다.
노동자들은 일하지 않을 때만 자신을 느낀다. 일을 할 때는 자신을 느끼지 못한다. 노동자는 일을 하지 않을 때는 집에 있고, 일을 할 때는 집에 없다. 그의 노동은 … [자신의] 필요를 충족시키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기 외부에 있는 것의 필요를 충족시키기 위한 수단에 지나지 않는다.
일찍이 위 인용문이 실린 글에서 마르크스는 자본주의 하에서 노동은 노동자들의 잠재력 실현이 아니라 생존을 위해 필요한 것이라는 사실이 노동자들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노동은 노동자 외부에 있다. … 그러므로 노동자는 노동에서 자신을 확인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신을 부인하고, 비참함을 느끼고, 불행해 한다. 자유로운 정신과 육체의 에너지를 발전시키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육체를 고되게 하고 자신의 정신을 파멸시킨다.
마르크스는 이런 경험을 ‘소외’라고 했는데, 이 소외가 자본주의 사회의 온갖 일에 영향을 미친다. 공적인 삶과 사적인 삶이 분리되고, 사람들은 집단이 아니라 고립된 개별 인간이 사회의 기본 단위라고 여기도록 부추겨진다. 인간이 만든 제도인 경제가 인간의 통제 밖에 있다고 듣는다. 사회적 기능이어야 할 먹고 마시고 섹스하는 것, 즉 마르크스가 “인간적인 것”이라고 말한 것은 신체적 필요를 만족시키는 것 이상이 되지 못한다.
자본주의 사회는 인간 본성과 모순된다. 이 때 인간 본성은 고정된 것이 아니라, 인간 자신의 활동으로 형성된 것이다. 마르크스주의 철학자 이스트반 메자로스는 다음과 같이 지적했다.
마르크스는 소외, 사유화, 물신화에 항의했지만 특정 종류의 “자연 상태”를 이상화하는 모순에 빠지지는 않았다. 마르크스의 개념에는 자연에서 감성적이거나 낭만적인 이상향을 추구하는 것을 흔적도 찾을 수 없다. 그의 강령은 … “자연”으로, 원시적인 “자연스러운” 환경이나 필요로 돌아가자고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 활동을 적절하게 스스로 조정해서 인간의 자연을 온전히 실현하자고 주장한다.
이런 역사 설명은 사회적 구성주의 역사에서 제기되는 유동적 섹슈얼리티와 인간 본성 설명과 원리적으로 양립할 수 있다.
59 엥겔스는 생애 후반에 인류학적 증거들(인류학에서는 최초로 발견된 증거들)을 기초로 삼아 《가족, 사유재산, 국가의 기원》을 썼다. 60 마르크스가 사유재산 같은 제도는 자연스러운 것이 아니라 역사를 통해 발전해 왔다는 점을 지적함으로써 자본주의의 기초를 무너뜨리고자 한 것과 꼭 마찬가지로, 엥겔스는 결혼과 섹슈얼리티에 대한 당시의 사상에 의문을 제기하고, 그것들을 역사적 맥락 속에 자리매김해서 그 역사적 발전을 보여 주고자 했다. 그 발전은 “원시적” 시초에서 “발전된” 문명으로 전진한다는 식의 속편한 얘기가 아니다. 예를 들면 엥겔스는 몇몇 선사 시대 사회에서는 여성의 사회적 지위가 더 높았다고 말한다. 엥겔스의 책에는 몇 가지 문제도 있다. 이 책이 의존하고 있는 증거는 대부분 낡았고, 인간 사회가 자연선택에 의해 전진한다는 목적론적 견해에 이따금 빠졌고, 지나가듯이지만 몇 군데서 동성애 혐오적 발언을 했다. 하지만 이 책은 남성의 지배와 질투, 일부일처제 등이 자연적이거나 보편적인 것이 아니라 사회적으로 구성됐다고 주장한다. 그러므로 이 책은 당시로서는 엄청나게 앞서 나간 것이었고, 마르크스주의자들이 젠더와 섹슈얼리티 쟁점을 둘러싼 논의에 참여했다는 증거로 남아 있다.
마르크스와 그의 협력자 프리드리히 엥겔스는 섹슈얼리티와 가족에 대해 더 직접적인 논평도 남겼다. 예를 들어 《공산당 선언》에서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가족의 폐지를 주장하고 부르주아의 성적 위선을 비난했다. 이런 참여는 엥겔스 이후로도 계속됐다. 성해방에 관한 마르크스주의 전통이 절정에 이르렀을 때는 혁명적이거나 혁명에 근접한 상황이었다. 그 상황에서 일어난 자본주의를 전복하려는 노동자 투쟁은 많은 통념적 사상들에 의문을 제기하고 성적 자유를 전진시키는 공간을 열었다. 그 사례로는 1917년 10월의 러시아 혁명, 1918년 11월 독일 혁명과 바이마르 공화국, 세계 최초로 레즈비언과 게이의 권리를 헌법으로 보장한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아파르트헤이트 철폐 투쟁 등이 있다.마르크스주의는 퀴어 이론·정치와 많은 목표를 공유하고 있으며,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역사와 사회에 대한 퀴어 이론의 설명 중 적어도 몇몇 요소를 받아들인다. 하지만 퀴어 이론의 다른 측면들은 젠더와 성의 해방을 위한 투쟁을 전진시키는 데 도움이 되지 않는 듯하다. 푸코는 성해방은 신화라고 주장한다. 퀴어의 정치 전략은 활동가들이 결혼을 바라는 온건한 LGBT 사람들이나 대학 캠퍼스 밖에 있는 노동계급 사람들과 관계 맺는 것을 어렵게 만든다. 포스트모더니즘은 세계를 오직 파편적이고 주변적으로만 이해할 수 있고 변화시킬 수 있다고 말한다.
하지만 경제 위기, 파시즘의 성장, 환경 재앙의 위험 증대는 동성애와 트랜스젠더에 대한 혐오가 지속되는 현실과 함께 현존 사회에 대한 일반적 문제 제기가 필요하다는 것을 더 분명하게 보여 주고 있다. 21세기 초 몇 년 동안 벌어진 반자본주의 운동의 훌륭한 강점 하나는 무엇보다 다양한 투쟁들의 연결을 강조했다는 것이다. 마르크스주의자들은 동성애 혐오의 뿌리가 자본주의, 그리고 자본주의의 가족에 대한 강조에 있다고 주장한다. 노동계급은 자본주의를 끝장 내는 데서 핵심적인 행위자이다. 자본주의를 분쇄할 경제적 힘이 있기 때문이다. 위에서 언급한 역사적 설명이 암시하듯이, 정치와 계급 투쟁의 일반적 상황이 젠더와 섹슈얼리티를 둘러싼 투쟁의 맥락을 형성하는 것이지, 그 반대가 아니다. 그렇다고 해서 섹슈얼리티가 경제에 견줘 부차적인 쟁점이라는 말은 아니다. 우리의 모든 투쟁의 목표는, 젠더와 섹슈얼리티를 포함한 인간성을 수만 가지 방식으로 우리에게서 박탈해 가는 자본주의 사회를 파괴하는 것이다. 마르크스주의와 퀴어 이론은 실질적 차이가 있지만 이 점에는 우리 모두가 의견 일치를 볼 수 있다.
주
-
출처: Colin Wilson, ‘Queer theory and politics’, International Socialism 132(Autumn 2011)
↩
- LGBT 투쟁에 관한 자세한 역사는 Dee, 2010를 보시오. Seidman, 1993은 포스트모더니즘의 관점에서 같은 주제를 다루고 있지만 핵심적인 정치적 맥락은 놓치고 있다. ↩
- Harman, 1988, chapters 4, 5 and 9, 그리고 Neale, 2001, chapter 5를 보시오. ↩
- D’Emilio, 1983, pp231-233. ↩
- Weeks, 1977, chapter 17; Silverstein and White, 1977, pp115, 11. ↩
- Shilts, 1987, p580; Bersani, 1987, p5. ↩
- 예를 들어 Rich, 1981을 보시오. ↩
- Shilts, 1987, p596; Kramer, 1990, p173. ↩
- Faderman, 1992; Bi Community News, 2004. ↩
- Signorile, 1993, pp3-16. ↩
- Kramer, 1990, pp91, 75, 245. ↩
- Washington Post, 2010. ↩
- Washington Post, 2011a. ↩
- Washington Post, 2011b. ↩
- Sullivan, 1996, pp176-196. ↩
- New York Times, 2004; Advocate, 2007. ↩
- 목록 전체는 Younger, 2011에서 볼 수 있다. ↩
- Evening Standard, 2011. ↩
- Hari, 2011; Socialist Worker, 2011. ↩
- Shepard and Hayduk, 2002. ↩
- Callinicos, 2003, p80. ↩
- Foucault, 1981, p43. [옮긴이: 국역본(《성의 역사》 제1권 앎의 의지, 2003, 나남출판)은 pp60-61. 이 글에 등장하는 인용문의 국역본이 있는 경우, 독자의 편의를 위해 국역본의 쪽수를 함께 표기했다. 그러나 번역은 영어본을 참고해서 크게 수정했다.] ↩
- Foucault, 1981, pp30, 69. 국역본은 p87. ↩
- Foucault, 1981, p99. 국역본은 p112. ↩
- Foucault, 1981, pp95-96. 국역본은 pp108-110. ↩
- Foucault, 1981, p105. 국역본은 p119. ↩
- Halperin, 1990, 그리고 Houlbrook, 2005를 보시오. ↩
- Epprecht, 2008; Massad, 2007; El-Rouayheb, 2005; Wilson, 2011을 보시오. ↩
- LeVay, 2011을 보시오. 그런 사상은 20세기 초 독일 동성애자 운동에서 득세한 사상과 놀라울 정도로 비슷하다. ↩
- Eribon, 1992, p163. Wilson, 2008도 보시오. 국역본(《미셸 푸코, 1926-1984》, 디디에 에리봉, 2012, 그린비)은 p288. ↩
- Foucault, 1981, pp5, 125. 국역본은 pp26, 138. 예를 들어 란돌프 트럼바흐처럼 근대 이전의 섹슈얼리티를 연구하는 역사가들은 동성에게 성적 욕구를 느끼는 것에 기초한 정체성이 푸코의 주장과 달리 19세기가 아니라 17세기에 [동성들이 성적 교류를 하던] ‘몰리’ 하우스의 발전과 함께 등장했다고 주장한다. ↩
- Huffer, 2010을 보시오. 후퍼가 지적하듯이, 커밍아웃을 강조하고 사람들의 섹슈얼리티에 대한 진실을 말함으로써 자유를 얻는다는 LGBT 해방론은 담론을 통해 성과 주체를 구성한다는 푸코의 반인본주의적 개념과는 근본적으로 어울리지 않는다. ↩
- Signorile, 1993, pp74, 82, 69. ↩
- Jagose, 1996, p127. 국역본(《퀴어 이론 입문》, 애너매리 야고스, 2012, 여성문화이론연구소)은 p202. ↩
- Jagose, 1996, p3. 국역본은 p10. ↩
- Warner, 1993, pxvi; Warner, 1999, p6. ↩
- Warner, 1999, p99; Butler, 2004, p5. 국역본(《젠더 허물기》, 주디스 버틀러, 2015, 문학과 지성사)은 p16. ↩
- Warner, 1999, pp63, 36. ↩
- 예를 들어 Califia, 1994의 부제 “The Culture of Radical Sex”(급진적 섹스 문화)를 보시오. “급진적 섹스”라는 말은 자주 사용된다. ↩
- Butler, 2001. ↩
- Rabble.ca, 2011. ↩
- Marx, 1975a, p425. ↩
- Jagose, 1996, pp105-106. 국역본은 p166. ↩
- BBC News, 2006. ↩
- Haaretz, 2010. ↩
- 버틀러의 수상 거부 연설의 영역본은 Butler, 2010을 보시오. 좌파당(디링케)의 해당 지역 지부 퀴어 활동가들의 대응을 포함해 이 논쟁에 대한 추가 정보는 Freitag, 2010을 보시오. ↩
- Butler, 2006, p34. 국역본은 p20. ↩
- Butler, 1993, p126. 국역본은 p238. ↩
- Butler, 1993, pp10-11. 국역본은 p38. ↩
- Butler, 2006, p187. 국역본은 pp343-4. ↩
- Butler, 1993, ppx, 125. 국역본(《의미를 체현하는 육체》, 주디스 버틀러, 2003, 인간사랑)은 pp234-235. ↩
- 케빈 플로이드는 마르크스주의와 퀴어 이론이 양립할 수 있음을 보여 주려 애쓰며 이 입장을 개진하고 있다. 예를 들어 Floyd, 2009를 보시오. ↩
- Butler, 1992, p8. ↩
- Butler, 2006, p169. 국역본은 pp318-319. ↩
- Butler, 1998, p39. 프레이저의 기여, 사실은 버틀러에 대한 답변은 Fraser, 1998을 보시오. ↩
- Butler, 1998, p40. ↩
- Foucault, 1974, p262. ↩
- Marx, 1975b, p326. ↩
- Mészáros, 1970, p82. ↩
- Marx and Engels, 1973, pp55-56. ↩
- Engels, 1978. ↩
- Dee, 2010, chapters 2 and 3, and pp160-162를 보시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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