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 마르크스주의 관점으로 보는 한국 현대사
제주 4·3항쟁 70주년
분단과 미국 제국주의에 맞선 저항
올해는 제주 4·3항쟁이 70주년을 맞는 해이다. 미국 정치학자 브루스 커밍스는 4·3항쟁을 ‘전후 한국 정치의 현미경’이라고 묘사한 바 있다. 해방 이후부터 한국전쟁까지 역사적 격변기 한가운데 위치한 4·3항쟁을 둘러싼 논쟁이 첨예하다는 의미다. 그래서 그 명칭도 폭동, 사건, 항쟁 등 이데올로기적 관점에 따라 다양하다.
미군정과 이승만 정부, 이후 군부 독재 시기 동안 4·3항쟁은 ‘북한의 사주에 의한 폭동’으로 정의됐다. 4·19혁명 직후 시작한 4·3항쟁 진상규명 운동은 이듬해 발생한 5·16쿠데타로 중단됐다. 소설가 현기영은 《순이삼촌》(1978년)에서 국가권력이 저지른 북촌리 민간인 학살을 폭로했다는 이유로 탄압받았다. 1997년에는 4·3행쟁을 다룬 다큐멘터리 <레드헌트>를 상영했다는 이유로 서준식이 국가보안법으로 구속됐다.
1987년 투쟁으로 형성된 민주화 분위기 덕분에 진상규명 운동이 조금씩 전개돼 2000년에 ‘제주 4·3사건 진상 규명 및 희생자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법’(이하 특별법)이 공표됐다. 그러나 특별법은 희생자에 대한 피해 배상이 전혀 반영되지 않았을 뿐 아니라 역사적 재평가도 충분치 않았다. 이명박근혜 정부는 이마저도 되돌리려 했다.
특별법 시행 이후 정부가 인정한 희생자는 1만 4233명이다. 그러나 이 수치는 정부 기구인 ‘제주 4·3사건 진상규명 및 희생자 명예 회복 위원회’가 2003년 발행한 ‘제주 4·3사건 진상 조사 보고서’가 희생자를 2만 5000명에서 3만 명으로 추정한 것에 견줘도 턱없이 적다. 문재인 정부는 100대 국정과제의 세 번째로 “제주 4·3사건의 완전한 해결”을 약속했다. 그러나 제주 4·3 제70주년 범국민위원회는 “집권 반년이 지나도록 어떻게 완전한 해결로 나아갈지 뚜렷한 방향과 원칙을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며 비판했다.
2017년 12월 ‘제주4·3특별법 전부개정 법률안’이 발의됐다. 이 개정안의 핵심 골자는 희생자와 유족에 대한 보상의 법적 근거의 마련과, 당시 이뤄진 군사재판의 무효화다.
제주 4·3 제70주년 범국민위원회는 미군정의 책임을 묻고, 미국과 국제연합의 책임 있는 조처를 촉구하는 10만인 서명운동을 3월 말까지 벌인다. 당시 제주도 인구의 10퍼센트에 가까운 3만여 명이 희생된 이 사건은 지역적 차원의 사건이 아니라 냉전 체제 형성기에 일어난 세계사적 사건으로 미국이 적극 개입했다.
조지 오웰은 역사와 권력의 본질을 지적하며 “과거를 지배하는 자가 미래를 지배한다”고 했다. 아직도 4·3항쟁의 성격을 둘러싼 역사전쟁은 진행 중이다. 분단과 미국 제국주의에 맞섰던 제주 4·3항쟁의 진상 규명과 정당한 평가가 온전하게 이뤄져야 한다.
해방 후 제주도 인민위원회
해방 후 미국과 소련이 한반도 민중의 의사와 관계 없이 북위 38도선을 기준으로 한반도를 분할 점령했다. 해방직후 남한의 상황은 미국 관리가 보기에 ‘점화하기만 하면 즉각 폭발할 것 같은 화약통’이었다. 미국 국무부는 제2차세계대전 말기에 “일제 통치가 이완되면 한국의 혁명가들과 저항 세력들에 의한 공격이 있을 것”을 우려했다.
그들의 우려대로 1945년 9월 미군이 한반도에 들어왔을 때는 1920∼1930년대부터 성장한 독립운동 단체들이 대중의 지지를 받고 있었다. 미군이 진정으로 걱정한 것은 그 단체들이 대부분 너무 좌익적이라는 점이었다.
미군이 들어오기 전부터 조선에는 이미 조선인민공화국과 지방의 인민위원회가 조직돼 있었다. 하지만 미국은 이를 인정하지 않았다. 일본 총독부는 버젓이 유지시켰으면서 말이다. 아시아의 다른 지역에서도 미국은 일본군을 이용해 좌익 운동을 탄압하고 있었다.
1945년 12월 미군정 사령관 하지는 조선인민공화국의 활동을 탄압하기 위해 2만 5000명 규모의 중앙 경찰을 창설하게 해 달라고 본국에 요청했고, 트루먼은 승인했다. 제주도에서도 해방 이후 1948년 초까지 실질적인 정치적 지도력은 인민위원회에 있었다. 좌익은 경상도 남서부 지역과 강원도의 동북부 해안 지역, 그리고 무엇보다 남해안 근해에 있는 제주도에서 강했다. 당시 미군정의 조사에 따르면, 제주도의 “주민 가운데 대략 3분의 2”가 “온건 좌익”의 견해를 지지했다.
제주도에서 인민위원회가 강력했던 이유는 제주도가 일본과 가까웠기 때문이다. 일제 지배의 영향으로 제주에서는 농업과 어업, 축산물과 수산물을 원료로 하는 제조업이 발전했다. 새로운 생존 방식의 유입과 일제의 인력 정책으로 일본으로 건너가 노동자가 되는 사람이 많았다. 1923년 제주도의 인구는 20만 9925명이었다. 그러나 정기 항로 개설 이후인 1930년에는 19만 9577명으로 인구가 소폭 감소했다. 이와 반대로 일본에 거주하는 제주인 수는 1926년 2만 8144명에서 1934년 5만 45명으로 계속 증가했다. 제주도 인구의 약 4분의 1이 일본에 거주했던 것이다. 1935년에는 제주인 5명 중 1명은 일본에 거주했다.
그들은 일본에서 노동 경험을 하며 노동자로서 계급의식을 조금씩 터득했다. 적색노조 운동에 가담한 사람도 있었다. 해방 후 그들이 대거(약 6만 명) 귀환했고, 제주도 주민들의 의식에 변화를 가져왔다. 그들은 인민위원회 구성과 교육 운동에 앞장섰다. 1946년 가을에 개교해 5·10 선거 때 강제 폐교된 조천중학원의 경우, 교사 13명이 모두 일본에서 공부하고 돌아온 유학생이었다. 이들은 모두 4·3항쟁의 지도부에 참여했다.
제주도에서는 미군정의 통제력이 약했던 점도 한 요인이다. 지리적 거리 때문에 제주도에서는 일제 통치와 미군정 통치 사이 긴 공백기가 있었다. 미군이 제주에 처음 상륙한 것은 1945년 9월 28일이었다. 미군정이 라우렐 대령이 이끄는 제59연대를 제주도에 주둔시켜 실질적 통치 기능을 수행한 것은 10월 중순이 돼서였다. 이 때 제주도에서는 이미 인민위원회 구성이 완료돼 실질적 자치 행정 체제를 갖춰 활동하고 있었다. 그래서 미군정은 초기에도 제주도 인민위원회에 협조적일 수밖에 없었다.
해방 이후 조선에서는 노동조합 전국 조직인 조선노동자전국평의회(전평)을 중심으로 공장 자주관리 운동을 펼치며 노동자들이 전면에 나서기 시작했다. 인민위원회가 자치적으로 통치하는 지역도 많았다. 미군정 정책에 대한 불만은 1946년 9월 총파업과 10월 인민항쟁으로 터져 나왔다. 미군정이 탱크를 동원하고 자본가와 우익 단체들이 합세해 이 저항을 분쇄했다. 국가의 통제력이 강화됐다.
그러나 육지와 떨어져 있었던 제주도는 10월 인민항쟁의 영향을 덜 받았다. 역설이게도, 제주도 인민위원회가 늦게까지 파괴되지 않은 이유이기도 했다. 그러나 저항의 바람은 1947년을 경과하면서 제주도로도 불어왔다.
단독정부 수립 반대
1946년 들어 세력권 분할을 둘러싼 미국과 소련의 갈등이 점차 악화되면서 냉전이 시작됐고, 마침내 1947년 3월 미국이 트루먼 독트린을 발표하고 유럽에서 마셜플랜을 실시했다. 제2차세계대전 종전 이후 미국의 대외정책은 미국 주도의 세계경제와 군사 질서를 구축하는 것이었고 가장 큰 걸림돌은 소련이었다.
4 단독정부 수립은 곧 분단을 뜻했다.
남한은 급속히 악화되고 있는 냉전의 전진기지가 돼 갔고, 미국의 정책은 소련의 한반도 지배를 저지하는 동시에 남한의 공산화를 초래할 세력의 확산을 봉쇄하는 데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 미국은 미군 철수의 영향을 최소화하면서도 남한을 소련 봉쇄의 도구로 활용하기 위해 남한 단독정부 수립을 추진했다. 이승만은 이런 미국의 의지에 부응해 트루먼에게 보낸 서한을 보내 미국 정책을 지지했다. “한국은 그리스와 비슷한 전략적 상황에 놓여 있다. … 미 점령지역에 과도 독립정부의 즉각적인 수립은 공산주의 진출에 대한 보루를 세우는 일[이다.]”미국의 이런 정책은 1·2차 미소공동위원회의 결렬로 나타났고, 1948년 5·10 단독 선거로 이어졌다. 단독정부 수립 반대 정서는 4·3항쟁이 발발한 주요 원인이다. 그 이면에는 해방 후 미군정 하에서 누적된 제주 민중의 불만도 있었다. 앞서 언급했듯이, 해외교포 등의 대거 귀환으로 인구가 급증하고 이는 사회적·경제적 어려움을 동반했다. 재외도민의 송금 감소, 대일교역의 불법화, 원료 공급의 단절로 빚어진 조업 중단 사태 등으로 실업률이 급증했다. 이런 상황에서 미군정의 곡물 수집 정책과 귀환자 재산 압수 방침은 도민들의 반발을 초래했다.
6 을 수용해 우익의 입지를 넓혀 주는 동시에 인민위원회의 해체를 위해 좌익 계열을 공개적으로 탄압하기 시작했다.
더 나아가 미군정은 1946년 7월 제주도에서 일어난 도제 승격 운동이런 상황에서 4·3항쟁의 도화선인 1947년 ‘3·1절 사건’이 발생했다. 미군정에 대한 반감과 민족국가 수립의 염원을 담은 3·1절 기념행사에 제주 지역에만 3만 명이, 서귀포 지역까지 합치면 5만 명 이상이 참가했다. 당황한 미군정은 집회를 폭력으로 진압하고 발포해 6명이 사망하고 8명이 부상당했다.
미군정과 경찰은 1947년 3·1절 기념행사 직전에 육지 경찰 100여 명을 파견했다. 육지 경찰은 이미 10월 항쟁을 경험한 상태였다. 이런 점에서 3·1절 발포 사건은 10월 항쟁의 여파가 제주도까지 미쳤음을 뜻했다.
7 1990년에 발간된 《제주경찰사》에는 166개 기관·단체, 4만 1211명이 이 운동에 참가한 것으로 기록돼 있다.
3월 10일 제주도청 파업을 시작으로 관공서 총파업이 벌어졌다. 이어서 은행, 회사, 학교, 교통, 통신기관 등 도내 156개 단체 직원들이 파업에 들어갔고, 상점은 철시했고 학생들은 동맹휴업을 했다.8 등 우익을 동원해 좌익 지도자 수십 명을 체포하고, 살인을 저지르고, 연일 마을을 수색해 금품을 탈취해 갔다. 이런 강경 탄압은 제주의 저항이 육지로 확산될 것을 우려한 조처였다. 미군 방첩대는 총파업이 “남한 전역의 파업으로 번질 수 있는 시금석일 수 있다”고 긴장했다.
이를 계기로 미군정은 제주도민의 80퍼센트가 좌익에 동정적이거나 좌익 지향적이라고 하며 제주도를 ‘빨갱이들의 섬’으로 규정하고, 1947년 8월에는 ‘작은 모스크바’라고 명명했다. 반공 이데올로기를 강화하면서 경찰이나 행정관료뿐 아니라 서북청년회 1948년 6월 한국의 한 신문은 특별 취재 기사로 다음과 같이 보도했다. “한국 서북부 출신의 청년들로 구성된 청년단체가 들어온 이래로, [섬] 주민들과 본토에서 들어온 이들 사이의 감정이 점차 격해졌다. … 그들은 공산주의자에게 선동됐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3만 명이 넘는 사람이 총칼에 아랑곳 않고 일어나 행동에 나선 것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이유 없이 그럴 수는 없다.”1947년 10월 2차 미소공동위원회가 최종 결렬되자, 미국은 한반도 문제를 유엔에 이관시켰다. 그리고 1948년 5월 10일 총선거를 실시하기로 했다. 주한미군 사령관 하지 중장은 4월 2일 산하 지휘관들에게 보낸 전문을 통해 5·10 선거는 점령 기간의 중요한 시기가 될 것이며, 선거의 성공은 미합중국 사절단의 성과에 핵심적인 사안이라고 강조했다. 하지는 투표율이 낮으면 단독선거를 통한 남한 단독정부의 국제적 승인을 기대할 수 없을 것으로 보고 정당성을 담보할 수 있도록 선거를 성공적으로 치르려 했다. 이를 위해 경찰과 우익 청년단체를 이용했다.
일부 우익 반공주의자들은 4·3항쟁이 ‘남로당 중앙의 지시“에 의해 일어났다며 의의를 축소하고 싶어 하지만, 4·3항쟁은 청년과 농민 등 제주 주민의 대중적 지지를 받아 일어났다. 물론 제주도 좌파가 중요한 구실을 했다.
1948년 4월 3일 새벽 1시 한라산과 제주 지역의 89개 오름에 일제히 봉화가 오르면서 1500여 명의 민중자위대가 도내 경찰지서 20곳 가운데 10곳을 공격하면서 무장투쟁이 시작됐다.
4·3항쟁이 발생하자 미군정은 이를 ‘치안상황’으로 판단하고, 육지 각도 경찰청에서 8개 중대 1700여 명을 차출해 제주도에 파견하고, 제주비상경비사령부를 설치해 이들을 총괄적으로 지휘했다. 미군정은 미군 함정을 동원해서 육지와의 해상교통망 일체를 차단했다. 미군정은 ‘육지와 연결된 좌파 세력의 폭동’이 가져올 파장을 우려하고 있었다.
선거가 이틀 앞으로 다가오면서 주한미군 사령부는 남한 주둔 미군에 특별 경계령을 지시했다. 선거 당일에는 미군 태평양함대 소속 순양함과 구축함 2척이 남한 해역에 들어왔다. 미군정 군수참모부는 항공편으로 실탄을 제주도로 보냈다.
미군정은 유권자의 80퍼센트가 선거인 등록을 하고 그 가운데 95퍼센트가 투표에 참가해 선거가 민주적으로 치러졌다고 발표했다. 그러나 당시 단독정부 수립에 대한 반감이 커서 중도 좌파와 중도 우파, 김구 같은 우파도 모두 선거 참가를 거부할 정도였다. 사실 선거는 경찰과 이승만 일당의 깡패 조직이 자행한 폭력으로 얼룩졌다. 선거 열흘 전에 323명이 폭력에 의해 살해됐고 1만여 명이 체포됐다.
5월 10일 제주도에서는 선거 관련 공무원의 투표 업무 거부, 무장대의 습격, 투표용지 소각과 투표 참가 거부 등으로 선거가 사실상 무산됐다. 제주도의 3개 지역 중 2곳에서 선거가 무효화됐다.
5월 12일 미군 극동사령부는 제주도에서 일어난 소요를 진압하기 위해 구축함 크레이그호를 제주도에 급파했다. 크레이그호는 제주읍에서 3마일 떨어진 연안에서 일주일 이상 정찰 활동을 벌였다. 미군이 상황이 악화하면 전투기까지 사용할 심산이었다. 그만큼 단독정부와 단독선거에 반대하는 저항의 강도가 강했음을 보여 주는 것이다. 남한 당국의 발표에 따르면, 1948년까지 102건의 전투가 벌어졌다. 양측에서 5000명 이상의 전투원이 동원됐고, 제주도민 거의 6000명이 구금됐고, 반란군 422명이 사망했다. 1949년 4월까지 가옥 2만 호가 파괴됐고, 인구의 3분의 1인 약 10만 명이 해안 지역의 보호마을로 집중됐다. 4월 말 미국 대사관은 “4월에 철저한 게릴라 섬멸 작전이 거의 끝나서 질서가 회복되었으며 대부분의 반도들과 그 동조자들을 죽이거나 생포, 또는 전향시켰다”고 보고했다. 남한의 언론은 사망자수가 3만 3000명에 이른다고 보도했다. 제주도 인구의 약 12퍼센트에 해당하는 숫자이다.
여순반란과 반공체제 구축
미군정은 미군 점령 기간의 핵심 과제였던 5·10 선거가 제주도에서 실패하자 대대적 토벌 작전을 감행했다. 남한의 국제적 지위는 여전히 불안한 상태에 있었고, 유엔 총회 회기 중에 대한민국 정부가 승인을 받을지도 미지수였다. 미군정은 남한 단독정부 수립을 위해 내부 불안 요소 제거를 명분으로 제주도에서 소탕 작전을 계속했다.
8월 15일 정부가 수립된 뒤로도 여전히 미군은 한국군에 대한 지휘권을 가졌다. 이는 정부 수립 이후 1948년 8월 24일 ‘대한민국 대통령과 주한미군 사령관 간에 체결된 과도기에 시행될 군사 안전에 관한 행정협정’에 따른 것이었다. 이 협정에 따라 8월 26일 로버츠 준장을 단장으로 한 임시 군사고문단이 조직됐고, 주한미군 철수가 끝난 1949년 6월 30일까지 미군은 한국군에 대한 작전통제권을 가졌다.
미국은 주한미군의 철수를 앞두고 신생 대한민국 정부에 도전적인 공산주의 세력을 척결해 남한 정부의 토대를 굳건히 하고 아시아에서 미국의 위신을 세워야 했다. 4월부터 계속된 제주도 사태는 5·10 선거와 6·23 재선거를 파탄 내면서 이미 미국의 위신에 큰 타격을 가했으므로, 제주도 사태를 진압해야만 미군의 명예로운 철수를 담보할 수 있었다.
한편 남한 정부로서는 미군 철수 문제가 제기되는 상황에서 미국의 군사·경제 원조에 대한 새로운 약속과 유엔으로부터 승인을 받아 국가의 정통성을 확보하고 내부를 안정화시키는 것이 급선무였다.
11 이 포고는 해변을 제외한 중산간 마을 전부를 통행금지 지역으로 묶어 놓음으로써 제주도민을 더욱 압박하는 조처였다.
10월 11일 제주도 경비사령부가 설치됐다. 10월 17일 제9연대장 송요찬 소령은 다음과 같은 포고를 발표했다. “10월 20일 이후 군 행동종료 기간 중 전 도 해안선부터 5킬로 이외 지점 및 산악지대의 무허가 통행금지를 포고함. 만일 차 포고에 위반하는 자에 대하여서는 그 리유 여하를 불구하고 폭도배로 인정하야 총살에 처할 것임.”10월 19일 이승만 정부는 한국군 제14연대와 제6연대의 일부에 제주도 반란 진압 임무를 부여해 출항 명령을 내렸다. 그러나 핵심 국가기구인 군대가 이 명령을 거부하고 일으킨 여순반란은 갓 출범한 이승만 정부의 토대를 위협했다.
여순반란은 그 전 3년 동안 누적된 불만의 폭발이기도 했다. 당시 반란군이 발행한 신문은 미국의 점령에 대항한 “3년간의 투쟁”을 언급하며 미국에게 당장 한국에서 떠날 것을 요구했다. 이 신문은 여수인민위원회의 모든 정부기관을 접수, 토지의 무상몰수 무상분배, 친일 부역 경찰과 공무원 숙청, 남한 단독정부 수립 반대 등을 요구했다.
제14연대 병사들은 21일에는 여수와 순천을 비롯한 주변 지역을 장악했으나 27일 토벌군에 진압됐다. 여순반란은 1주일가량 불어닥친 격렬한 태풍이었지만, 이를 제압한 이승만은 저항 일체를 탄압으로 대했다. 진압 부대가 읍 소재지와 그 주변 지역을 탈환됐지만, 반란군은 주변 산악지대로 피신해 계속해서 ‘유격전’을 전개했다.
1953년 1월 19일 유격전 특수부대인 무지개부대가 투입돼 막바지 토벌 작전을 벌였다. 제주도 경찰국이 한라산 금족령을 해제한 것은 1954년 9월 21일이었다. 1948년 4월 주한미군 사령관 하지가 제주도 현지 미군 장교들에게 사람들 눈에 띄지 말라는 명령을 내렸는데, 미군은 한국전쟁 때도 그랬다. 제국주의적 개입이라는 비난을 피하면서도 ‘보이지 않는 손’ 구실을 하려 한 것이다.
육군사령부는 1949년 1월 10일 여순반란과 관련해 군사재판에 회부된 반란군 혐의자의 재판 결과를 발표했다. 총 2817명이 재판을 받아 410명이 사형, 568명이 종신형을 받았다. 이승만의 반공체제는 여순반란 진압 이후에도 이어진 철저한 탄압과 처벌, 국가 통제와 우익 단체 강화, 남로당 등 좌익 세력의 파괴 등을 거쳐 완성돼 갔다. 이승만 정부는 여수반란을 겪고 나서 반공체제로의 전환에 성공했다.
1948년 12월 1일 공포·시행된 국가보안법이 이를 뒷받침해 줬다. 미·소의 한반도 분할 점령과 분단에 저항하는 민중항쟁이 거세게 일어나자 위기를 느낀 이승만은 일제가 독립운동가들을 탄압할 때 쓴 ‘치안유지법’을 그대로 이어받아 국가보안법을 만들었다.
13 이런 인식 하에서 군 당국은 여순반란 직후 해군 함정을 동원해서 제주도 해안을 봉쇄해 선박 출입을 금지시키고 육지와의 모든 연결을 차단시켰다.
여순반란 직후 국무총리 겸 국방장관 이범석은 의회에 다음과 같이 보고했다. “공산주의자들은 여수에서 반란을 일으킴으로써 제주도 사태를 남한 각지에서 전개시키려 하고 있다.”여순반란 이후 정부군은 제주도에서 훨씬 강경하게 대응했다. 육지로 확산될까 봐 두려워 한 것이다. 1948년 가을과 1949년 봄 사이 제주도에서 대규모 토벌 작전이 전개됐다. 민간인 학살이 압도적으로 이 시기에 벌어졌다. 영화 <지슬>의 배경이 바로 이 때다.
제주 4·3항쟁과 미국의 대한정책
4·3항쟁은 제2차세계대전 종전 이후 미·소의 대결 구도와 냉전 체제가 형성될 때 미국 제국주의적 개입에 맞서 일어난 국제적 저항의 일부였다. 당시 미국은 제주도를 소련 봉쇄 전략의 시험 무대로 봤다. 오늘날 중국을 견제하고 동아시아 패권을 강화하기 위해 제주도 강정마을에 해군기지를 짓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미군정은 한반도 남쪽에 친미 정부를 수립해 미국의 영향력을 강화하고 소련이 태평양으로 진출하는 것을 사전에 차단하려 했다. 그래서 미국은 한국인들의 독립국가 수립의 열망을 철저하게 짓밟았다.
4·3항쟁은 전후 세계질서에서 주요한 한 축을 차지한 미국의 세계전략과 이에 저항하는 제3세계 민중 사이의 충돌이었다. 제2차세계대전의 종결은 아시아·태평양 지역에서 한국을 비롯해 그동안 제국주의 지배 하에 놓였던 사람들에게 해방을 향한 격렬한 에너지를 분출하게 했다. 1947년부터 냉전이 시작되자, 아시아의 공산주의자들은 혁명적 분위기를 고조시켰다. 1948년 버마(3월), 말라야(5~6월), 인도네시아(9월) 등지에서 공산당이 주도한 무장봉기가 일어났다. 필리핀에서는 제2차세계대전 중에 항일 게릴라 조직을 결성하고 독립 후에도 무장투쟁을 포함한 반정부운동을 전개한 후크발라하프가 필리핀 공산당과 제휴해 세력을 확대했다.
그러나 유럽 제국주의 국가들과 미국 제국주의자는 아시아인들의 독립이 아니라 식민지 재건을 도모했다. 인도네시아 민족운동가 탄 말라카는 “영국이 여기에 온 것은 일본군의 무장해제를 위한 것이 아니라, 인도네시아인의 무장을 해제하기 위해서”임을 간파했다. 미국은 호치민이 이끄는 베트남민주공화국이 소련 진영과 가깝다는 이유로 프랑스를 대신해 인도차이나반도를 지배하겠다는 방침을 세웠다. 각지의 민족 운동을 냉전이라는 안경을 통해 바라보고 대응했다고 할 수 있다.
또한, 제주 4·3항쟁은 미국 제국주의가 해방군이 아니라 점령군임을 입증했다. 미국은 한국의 분단을 주도했고 그에 맞선 4·3항쟁의 진압을 결정했고, 대토벌 작전을 수립하고 직접 지휘·감독했다. 4·3항쟁은 미군정 시기에 시작됐다. 그러나 이승만 정부가 들어선 이후에도 1949년 6월까지는 작전권이 미군에 있었다. 5월 초중순께 제주도 최고 지휘관으로 미군 6사단 20연대장 브라운 대령이 파견됐다. 전후 미국이 외국의 ‘전투 현장’에 현지 군대가 아닌 미군을 진압 작전 책임자로 파견한 것은 유례가 없는 일이었다. 1949년 3월 2일 제주도 지구 전투사령부가 설치됐다. 한·미간 비밀의정서에 따라 미국 군사고문단은 1948년 8월 16일부터 1949년 6월 30일까지 한국군에 대한 작전권을 갖고 있었다. 미국 군사고문단은 여순반란 진압에 직접 개입했다.
한국전쟁이 발발한 이후 트루먼은 “한국은 극동의 그리스다. 우리가 현재 충분히 강력하면, 우리가 3년 전 그리스에서 했던 것처럼 그들과 맞서 싸운다면, 그들은 어떠한 조처도 취하지 못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16 그 나라의 인민 대중이 아무리 혁명에 호의적일지라도 말이다.
안타깝게도 그리스 레지스탕스 운동은 소련의 영향을 받은 그리스 공산당이 영국군의 진주를 허용하고 정부 손에 아테네를 넘김으로써 패배했다. 스탈린은 다른 나라 공산당들이 혁명을 시도함으로써 미·영과의 협정에 차질이 생기는 사태를 허용하지 않으려 했다.미군정이 제주도민의 항쟁을 진압하는 데는 8년의 세월이 걸렸다. 그것도 한국전쟁이라는 폭력적 방식을 통해서만 마무리할 수 있었다.
이승만 정부와 4·3항쟁
4·3항쟁은 이승만의 대한민국 정부 수립이 노동자와 민중을 피로 짓밟고 세워진 친미·반공 정부임을 보여 준다. 올해는 이승만과 박정희를 추종하는 뉴라이트를 비롯한 우익은 4·3항쟁 70주년이 아니라 ‘건국 70주년’을 기념하고 싶을 것이다.
박근혜 퇴진운동으로 국정교과서가 폐기되면서 뉴라이트의 목적이 달성되지 못했지만, 여전히 2015년 개정 역사과 교육과정에는 ‘대한민국 정부 수립’이 아니라 ‘대한민국 수립’으로 돼 있다. 국정교과서를 폐기할 뿐 아니라, 교육과정과 집필 기준도 바꿔야 한다.
1948년 8월 15일을 ‘대한민국 수립’으로 보면, ‘건국’에 참여한 사람들은 ‘건국 공로자’가 될 것이다. 소위 ‘건국 공로자’는 대부분 일본 제국주의에 부역한 친일파였고, 해방 후에는 미국 제국주의의 힘을 빌려 진정한 독립과 해방을 원한 노동자·농민 운동과 좌파를 잔인하게 탄압한 자들이다.
2008년 당시 한나라당 의원 13명은 ‘광복절’을 ‘건국절’로 바꾸자는 ‘국경일에 관한 법률 일부개정법률’을 발의했고, 12월 같은 당 국회의원 황우여는 ‘건국공로자예우에 관한 법률안’을 제출했다. 이 법안들은 반대에 부딪혀 폐기됐지만, 이 법률안에 따라 건국 공로 단체로 선정된 곳 가운데는 ‘서북청년회’도 있었다! 4·3항쟁을 잔인하게 진압하는 데 선봉에 선 대표 우익 단체가 말이다!
무엇보다, 4·3항쟁은 남한 정부의 정통성 문제를 제기한다. 그렇기 때문에 이승만 정부 이후 군부 독재 시절 지배자들은 연좌제까지 동원해 4·3을 금기어로 만든 것이다. 1982년 고등학교 국사 교과서는 “제주도 폭동 사건은 북한 공산당의 사주 아래 제주도에서 공산 무장폭도가 봉기하여, 국정을 위협하고 질서를 무너뜨렸던 남한 교란작전 중의 하나였다”라고 해, 한국전쟁과 함께 4·3항쟁을 반공 이데올로기의 중요 쟁점으로 이용했다.
그런데 1987년 투쟁으로 민주화가 진전돼 부르주아 야당으로 정권 교체가 된 이후 제정된 특별법조차 4·3항쟁을 온당하게 평가하지 못하고 있다. 이는 정부 정통성 문제에 대한 태도 때문이다. 박명림은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국가 형성 시기 모든 反이승만 정부가 反남한, 反대한민국은 아니었다. 즉 모든 반정부가 반체제이자 반국가는 아니었던 것이다. 자유, 인권, 민주주의, 평등, 사회적 형평 등의 보편적 가치를 제시하며 출발한 남한 국가의 정통성을 인정하면서도 우리는 그 국가를 이끌었던 특정 정부의 정책과 행태의 과도성과 비민주성, 인권탄압은 얼마든지 비판할 수 있는 것이다.”
이런 자유주의적 입장은 대한민국이 우리 나라 역사상 최초로 민주적 자유선거에 의해 수립된 국가라고 인정하는 셈이다. 미국 제국주의가 ‘자유’와 ‘민주주의’를 들먹이며 제2차세계대전을 정당화하고 미군정 3년 지배를 정당화하는 것도 인정해 주는 셈이다.
18 라고 평가하면서, 5·10 선거에 대해 참가하는 것이 옳았다고 주장한다. 그의 논리는 다음과 같다. “제2차 미소공위가 좌절의 위기를 맞는 1947년 하반기에 미국과 소련 간 냉전이 확연히, 구체적으로 드러났다. 한국은 국제 문제를 무시할 수 없는 상황인데, 1948년이 되면 남북이 독자적으로 통일 정부를 세울 수 있는 여건이 안 됐던 건 현실로서 인정해야 한다.”
서중석은 “5·10 선거가 분단을 초래한 점에선 참으로 마음을 무겁게 하지만 그럼에도 최초의 보통 선거라는 점에서 그것대로 의미가 있는 것이다.”그러나 5·10 선거는 미국 주도 하에 남한에서 친미 우파 정권을 세우기 위한 것이었고, 대다수 한국인의 의사를 거슬러 분단으로 나아가는 길이었다. 좌파와 중도파를 배제하고, 심지어 우파인 김구조차도 반대한 선거였다. 따라서 5·10 선거를 인정하는 것은 아래로부터의 관점이 투철하지 못한 결과이다.
1945년 해방 후 새로운 사회에 대한 대중의 열망이 컸다. 당시 인구의 70퍼센트 이상이 바람직한 사회체제로 사회주의를 지지했다. 해방 정국에서 노동계급(조선공산당을 중심으로 한 전평과 전농)은 다른 운동을 이끄는 중심 구실을 했고, 이승만 등 지배 세력은 노동자 운동을 파괴함으로써만 지배권을 확보할 수 있었다. 친제국주의적이며 노동계급에 가장 적대적인 이승만 정부는 이렇게 수립됐다.
4·3항쟁은 이미 세력균형이 좌익에게 유리했던 마지막 저항이었다는 점에서 비극이다. 이 점에서 조선공산당의 정치적 약점도 봐야 한다.
조선공산당은 인민전선 전략에 따라 계급투쟁을 자제시켰고 ‘민족자본가’와의 협력을 강조했다. 미·소 양국의 신탁통치를 찬성하고 1·2차 미·소공위에 기대를 걸면서 계급투쟁을 자제했다. 이는 해방 직후 수세에 몰려 있던 친일·친미 반동 세력이 전열을 가다듬을 시간을 줬다. 결국 노동자·농민 운동에 대한 대대적인 탄압을 통해 세력균형이 역전됐다.
안타깝게도 4·3항쟁은 비극으로 끝났다. 그러나 분단과 미국 제국주의에 맞선 4·3항쟁은 3·1운동에서 자주관리운동, 4·19혁명, 5·18광주항쟁, 1987년 투쟁으로 이어지는 아래로부터 계급투쟁 속에 중요하게 자리매김돼야 한다.
주
- 제주 4·3 제70주년 범국민위원회는 2018년 1월 15일 월간 《4370신문》을 창간했다. ↩
- 커밍스 2001, p308. ↩
- 김인덕 1999, p41. ↩
- 허호준 2014, pp42-43. ↩
- 고창훈 1989. p256. ↩
- 당시 제주도는 전라남도에 소속되어 있었으나 1946년 7월 제주도로 승격된다. ↩
- 양정심 1999, p80. ↩
- 서북청년회는 서북지역 출신의 월남 청년들을 중심으로 1946년 11월 30일 결성돼 1948년 12월 19일까지 활동했다. 1946년 8~9월 전평의 핵심인 경성방직을 비롯한 영등포 일대 공장, 용산철도공작창, 경성전기에서 벌어진 전평의 파업을 파괴했다. ↩
- 커밍스 2017, p184. ↩
- 커밍스 1989, p38. ↩
- 서중석 1999, p138. ↩
- 황남준 1989, p469. ↩
- 박명림 1996, p405. ↩
- 하루키 외 2017, p333. ↩
- 정해구 1999, p202. ↩
- 하먼 2004, p681. ↩
- 박명림 1999, p439. ↩
- 서중석 2015, p204. ↩
참고 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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