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평
박노자의 《왼쪽으로, 더 왼쪽으로》
급진적 비판, 혼란스러운 분석, 어정쩡한 대안
박노자가 인기 있는 것은, 그가 귀화한 한국인인데도 한국 사회와 역사를 ‘토박이’보다 더 잘 알고 있다는 점 때문만은 아니다. 자본과 국가의 억압적·착취적 속성을 급진적으로 비판한 덕분이기도 하다. 이 책도 “더 왼쪽으로”라는 제목에 걸맞게 좌파적 시각에서 한국 사회를 날카롭게 비판한다.
박노자가 보는 한국 사회는 억압적이고 착취적인 북한보다 나을 것 없는 “경쟁주의 왕국”이다. 박노자의 비판은 자본주의 체제에 대한 근본적 비판과 연결돼 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우리는 생산수단으로부터 소외되는 것은 물론이고, 우리 자신들의 진정한 존재(실존)로부터도 소외되어 인간으로서의 ‘나’를 상실하고 만다.”
구체적으로 한국 사회는 ‘땅 부자’와 대기업주, 고위 관료와 고소득 자영업자를 위해 돌아가는 “기업 국가”이자 “부동산 국가”로, 자본과 국가의 폭력이 노동 현장, 대학, 종교 등 사회 구석구석에서 대다수 한국인들의 마음에 공포심을 안겨 주고 있다고 한다. 그래서 한국인들은 대부분 이곳에서 “바람직한 미래가 없다”고 느낀다.
민주주의에 관한 박노자의 견해도 급진적이다. 박노자는 부르주아 민주주의 자체에 한계가 있다고 지적한다. 부르주아 민주주의는 “‘국민’ 집단에만 적용”되므로 이주자나 식민 점령지 주민들에게는 권리가 없다. 그리고 “선거 이외의 기간에는 정부의 통치 행위에 ‘국민’들이 개입하는 것을 거의 허용하지 않는다.” 또한 아무리 선거를 통해 통치권자를 선출해도, “‘국민’의 생활 세계와 의식 세계를 좌우하는 것은 자본과 언론과 국가다.”
그런데 한국의 정치 체제는 정상적인 부르주아 민주주의에도 못 미친다는 것이다. “군사 독재로의 전면적 회귀는 불가능에 가깝”지만 정부를 비판하는 세력들을 쉽게 처벌하는 나라는 “정상적 의미의 민주 국가가 아니”라고 지적한다. 그리고 “경제 사회적 갈등이 첨예화되는 순간 한국 민주주의는 치명적 위기에 빠질 수도 있[다.]”
그래서 박노자는 “좌파는 대한민국을 긍정해야 한다”는 주대환의 주장을 수긍할 수 없다고 말한다. “민주주의를 가슴을 열고 받아들이며 민주주의를 우리의 이상 실현의 유일한 길로 인정”해야 한다는 주대환의 주장과 달리, “대한민국에는 ‘가슴을 열고 받아들일’ 만한 민주주의가 없다”는 것이다.
박노자는 현실 비판에만 머물지 않는다. 예전 책들과 달리 이 책에서는 대안 논의에 큰 비중을 두고 있다. 그가 제시하는 대안을 한 마디로 표현하자면 “공공성과 복지로의 대전환”이다.
사실 공공성과 복지 강화가 필요하다는 주장은 새삼스러운 것이 아니다. IMF 경제 위기 이후 노동자·서민 대부분의 삶이 팍팍해지면서, 복지 강화에 대한 열망이 강해졌다. 그리고 이런 열망을 대변해, 지난 10년간 진보정당들이 복지 강화를 주요 정책으로 제시해 왔다.
박노자의 장점은 다른 데 있다. 그는 대중 행동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박노자는 진보정당들이 복지 정책을 잘 마련하는 것만으로는 ‘대전환’이 가능하지 않다고 주장한다. 정치권에서 소수에 불과한 진보정당에게 “체제 전체를 움직일 수 있는 힘”이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서 대학생 총궐기와 노동자 파업 같은 대중 행동으로 “밑으로부터의 직접적 압력”을 가해야 한국 사회를 “더 왼쪽으로” 이동시킬 수 있다는 것이다.
어정쩡하게 멈춘 왼쪽으로의 행진
이런 장점이 있지만, 박노자의 프로젝트는 왼쪽으로 가다가 어정쩡하게 멈춘 듯하다. 대중 행동이 중요하다면서도, 다른 한편에선 근본적 사회 변혁에 거부감을 드러낸다. 그는 “혁명이냐 급진적 개혁이냐” 하고 묻고는 혁명이 “불가피해지기 전에” 최선을 다해 급진적 개혁을 추구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물론 박노자가 말한 “급진적 개혁” 강령들은 대체로 지지할 만한 내용을 담고 있다. 그는 금융 기업을 포함한 일부 대기업의 국유화, 무상교육·무상의료, 부유세 징수, 투기 재산 몰수, 대학 평준화, 노동자 경영 참가, 남북한 공동 군축 등의 개혁 강령을 제안했다.
문제는 이런 강령들이 어떻게 구현될 수 있는가 하는 점이다. 박노자는 이런 강령들이 “피를 흘려 이 체제를 무너뜨리지 않고서 쟁취할 수 있는 ‘최대한’을 의미”한다며, 그 강령들이 “국민적 합의에 의해 선택”될 가능성도 있다고 본다.
실제로 이런 강령들을 바탕으로 내놓는 요구들은 자본주의 체제 내에서도 실현 가능한 요구들이다. 그리고 특정 시기에는 이런 요구가 지배계급의 필요에도 부합할 수 있으므로 “사회적 합의”를 통해 이런 복지 정책이 도입될 수도 있다.
가령 제2차세계대전 후 도입된 서구의 복지제도는 이 전쟁의 여파로 대중의 급진화와 지배계급의 필요가 적절히 맞아떨어졌기 때문에 가능했다. 영국 보수당의 한 정치인도 의회에서 “만약 여러분이 국민들에게 사회 개혁을 선사하지 않으면 그들이 여러분에게 사회 혁명을 선사할 것입니다” 하고 말할 정도로 당시는 대중의 압력이 거셌다. 다른 한편, 지배계급은 전쟁으로 파괴된 경제 기반을 복구해야만 했다. 또, 경기가 상승 추세였으므로 지배계급한테도 생산적이고 건강하고 교육받은 노동자들이 매우 필요했는데, 복지제도가 이를 가능케 해 줬다. 게다가 제2차세계대전 후 유례 없는 장기 호황 때문에 지배계급은 약간의 양보를 감내할 여지가 있었다.
그러나 문제는 지금의 조건이 서구의 복지제도가 확립된 당시의 조건과는 다르다는 점이다. 무엇보다 지금 같은 세계 경제 위기 상황에서 자본가들은 치열한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 임금을 삭감하고 노동자를 대량으로 해고하고 복지를 축소하는 등 노동계급의 생활 조건을 공격하려 하고, 노동자들이 투쟁해도 쉽게 양보하려 하지 않는다. 따라서 상황이 이런데도 이윤 체제와 자본가들의 정치 권력에 근본적으로 도전하지 않으려 한다면 박노자가 제시한 총체적인 급진 개혁 요구를 달성하기 어려울 것이다.
노동계급이 혁명을 추구하는 것을 당면 목표로 삼지 않고 급진적 개혁을 추구하려 할 때조차 자본가들은 종종 반동적 행동에 나설 수 있다. 1970년대 칠레 아옌데 정부의 경험은 이를 비극적으로 보여 줬다. 아옌데 정부는 좌파 개혁주의 정부였는데도, 자본가들은 정부 정책을 사보타주하고 뒤이어 군사 쿠데타를 일으켜 정권을 전복하고 수만 명을 학살해서 개혁 자체를 봉쇄했다.
한국의 지배자들은 어떠한가? 신자유주의 정부에 불과한 노무현 정부조차 탄핵했던 자들이 권력을 쥐고 있다. 이런 조건에서는, 자본가들에 굴복하지 않고 급진 개혁 강령들을 진지하게 실행하려 한다면 자본가들의 유혈적 반동이 뒤따를 것이다. 따라서 근본적 변혁을 향해 결정적 한 걸음을 내딛지 않고서도 급진 개혁이 가능하다고 보는 박노자의 주장은 공상일 뿐이다.
불공정한 역사 해석
박노자는 자신이 “밑바닥에서의” 관점에 바탕을 두고 있기 때문에 혁명에 반대한다고 주장한다. 자신과는 반대로 근본적 사회 변혁을 추구하는 사람들은, 혁명기의 기층 민중의 현실도 모르면서 “지도자들의 입장과 시각”에서 혁명을 미화한다고 비판한다. 그는 혁명의 실상을 알려 주겠다며 러시아 혁명을 예로 든다. 그는 혁명군이 농민에게서 식량을 징발한 사례를 소개하며, “혁명군이든 반혁명군이든 도살, 겁탈, 강간이 뒤따르는 것은 똑같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박노자의 설명은 공정치 못하다. 박노자가 언급한 사례는 내전기 농민의 경험인데, 혁명의 일부 시기를 전체 맥락에서 떼어 내 혁명 전체의 특징인 양 서술하는 것은 부정직한 역사 서술 방식이다.
1 게다가 이는 당시 볼셰비키에 적대적이던 세력들조차 인정한 사실이다.
특히 박노자는 러시아 혁명의 두 가지 핵심 특징을 외면한다. 첫째는 노동자·농민·병사의 압도 다수가 혁명을 환영했고, 스스로 혁명의 주된 행위자로 나섰다는 점이다. 박노자는 “레닌과 트로츠키 같은 이상주의자들”이 “노동자들을 위해” 대신 혁명을 일으켰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러시아 혁명에 관한 이런 ‘위로부터의’ 해석은 근거가 빈약하다. 1917년 러시아 10월 혁명을 생생하게 목격한 미국인 기자 존 리드는 “러시아 대중이 봉기를 각오하지 않았다면 볼셰비키는 틀림없이 실패했을 것”이라며, 혁명이 대중 자신의 행동이었다는 점을 강조한다.러시아 혁명의 둘째 특징은 혁명 전까지만 해도 유럽에서 가장 억압적이고 후진적이었던 나라에서 혁명 직후 급진적 개혁과 민주주의가 만개했다는 점이다. 여성 차별 법률이 폐지됐고, 종교에 따른 박해와 민족 억압이 사라졌고, 평범한 사람들이 새로운 체제 건설에 능동적으로 참여했다. 진정으로 “밑바닥에서의” 관점을 바탕으로 한다면 외면할 수 없는 이런 역사적 사실을 박노자는 애써 못 본 체한다.
내전기 상황 서술도 공정치 못하긴 마찬가지다. 사실 박노자가 “밑으로부터의” 관점이라며 소개하는 견해는 노동계급에 맞선 농민 반란을 옹호한 아나키스트들의 해석을 따른 것이다. 그는 볼셰비키 정부가 내전기에 농민 식량을 징발하고 1921년 크론시타트 수병 반란을 진압한 것을 비난한다.
그러나 박노자는 이런 일이 왜 벌어졌는지 말하지 않는다. 이는 제국주의 간섭군의 침략과 반혁명군이 일으킨 내전으로 끔찍하게 황폐해진 러시아의 상황을 빼놓고 설명할 수 없다. 강요된 내전은 이상과 현실의 간극을 벌려 놨다. 내전 결과 러시아의 공업은 대부분 파괴됐고, 이 때문에 농촌의 식량과 교환할 물자를 생산하지 못한 도시에서는 식량 부족으로 기근이 발생하고 전염병이 창궐했다. 이 과정에서 소비에트 민주주의를 구현할 행위 주체였던 노동계급이 대규모로 사라졌다. 도시에서 아사자가 속출하고, 내전을 치르고 있는 적군Red Army 병사들도 식량이 부족했다. 따라서 혁명의 성과를 지키고 노동계급이 되살아나기 위해서는 식량 조달이 필요한 상황이었다. 그런데 당시 농민들은 식량을 시장에 내다 팔려고 곡물을 사재기하고 있었다. 노동계급과 농민의 적대적 대립이 없었다면 좋았겠지만, 내전이 강요한 상황 때문에 대립은 불가피해졌다.
식량 강제 징발은, 그 결과로 러시아 혁명의 중요한 사회적 기반 하나를 등 돌리게 만들 위험을 감수하면서도 노동계급의 생존을 위해 어쩔 수 없이 시행한 조처였다. 이런 상황에서 농민 반란과 농민의 자식들이 주축이 된 크론시타트 수병 반란이 승리했다면, 혁명 정권의 파괴와 반혁명 군대의 승리로 이어졌을 것이고 그것은 러시아에서 끔찍한 억압 체제의 부활을 뜻했을 것이다. 따라서 크론시타트 수병 반란 진압은, 트로츠키의 말마따나 “비극적 필요”였다.
한편 박노자는 ‘약탈·겁탈·강간’ 등 일탈 행동이 마치 혁명군과 반혁명군 사이에서 동일한 규모로 일어난 것처럼 말한다. 그러나 실제로는 반혁명군이 그런 행동을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훨씬 많이 저질렀다. 혁명군 지도자들이 이런 행동을 억제한 덕분이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혁명군은 반혁명군과 달리 혁명의 이상과 대의가 만들어 낸 자신감과 규율에 따라 행동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박노자는 이런 비극들이 혁명 때문에 나타난 것처럼 묘사하지만, 이는 오히려 반혁명군에 맞서 내전을 치르느라 혁명이 충분히 전진하지 못해서 노동계급의 생존 조건이 위기에 처하고 혁명적 민주주의가 약해진 결과였다.
“밑바닥에서의” 관점?
박노자가 다른 개혁주의 지식인들보다 대중 행동을 좀 더 강조한다는 점 때문에 언뜻 보면 “밑바닥에서의” 관점에 충실한 듯하다. 그러나 결국 그가 내리는 결론은 진보정당이 “국가 권력의 평화적 탈환”을 통해 급진적 개혁을 성취해야 한다는 것이다. 물론 진보정당의 집권은 환영해야 마땅한 일이지만, 대중 행동을 진보정당 집권의 보조물쯤으로 여기는 것은 전형적인 ‘위로부터의’ 관점이다.
대중 행동은 어떤 요구를 성취하기 위한 수단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대중의 자기 해방을 가능케 하는 열쇠다. 마르크스는 ‘노동계급의 해방은 노동계급 자신의 손으로 성취해야 한다’며 아래로부터의 자기 해방 사상을 강조했다. 특히 혁명은 자기 해방적 성격이 최고 수준으로 나타나는 대중 행동이다. 따라서 박노자가 “밑바닥에서의” 관점에 서 있다면서 혁명에 반대한다는 것은 모순이다.
2 즉, 혁명은 사회의 변화와 인간 주체의 변화가 하나의 과정으로 결합될 수 있는 유일한 길이다.
마르크스는 기존 체제가 점진적 개혁으로는 근본적으로 변할 수 없다는 점 때문만이 아니라, “타도를 수행하는 계급”은 “오직 혁명 속에서만 모든 낡은 찌꺼기를 떨쳐 버리고 사회를 새롭게 건설할 능력을 몸에 갖출 수 있기 때문”에 혁명이 필수적이라고 봤다.환경의 변화와 인간 활동의 변화, 또는 자기 변화가 일치한다는 사실은 오직 혁명적 실천을 통해서만 파악될 수 있으며 합리적으로 이해될 수 있다.(‘포이어바하를 위한 테제’ 3번 중)
물론 박노자도 “사회주의 운동이란 체제와 싸우는 동시에 자기 자신과 싸우는 과정”이라고 비슷하게 주장한다. 그러나 그는 마르크스와는 완전히 다른 결론을 이끌어 낸다. 마르크스는 체제를 혁명적으로 변혁하려는 집단적 실천 과정에서 행위 주체도 스스로 변한다고 주장했다. 반면 박노자는 대중 행동을 진보정당 집권을 위한 보조물쯤으로 여기다 보니, 사회변화 과정에서도 행위 주체는 변하지 않는다고 여긴다.
그래서 행위 주체의 “인간적 성숙”을 위해 노력하는 개인적 실천이 별도로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지금, 여기에서’ 자본의 사슬을 벗는 ‘깨인 인간’이 된다면 사람들이 일단 다르게 생각하기 시작할 것이다. 꼭 학벌 따고 월급 받고 상사에게 아부하는 인생을 살아야 하는 것일까?” 그가 제안하는 ‘서울대 안 가기 운동’, ‘자동차 안 사거나 덜 쓰기 운동’, ‘자전거 타기 운동’, ‘아이에게 장난감이 아닌 부모 사랑 주기 운동’ 등은 “내 안의 자본가를 한 방울씩 짜내는 과정”이고 “‘자본주의 이후’를 ‘가시적으로’ 준비하는 것”이라고 한다.
비록 이런 개인적 실천이 선의에서 비롯한 것이긴 하지만, 체제를 변혁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하다. 그리고 인간의 의식은 물질적 조건과 경험의 산물이므로, 체제가 근본에서 바뀔 수 있다는 자신감 없이 소외는 극복될 수 없고, 따라서 집단적 차원의 인간 변혁과 해방 또한 불가능하다.
개인의 도덕과 양식에 호소하는 실천을 강조하다 보면, 주로 개인의 도덕성이나 의식 수준을 잣대로 운동의 잠재력을 폄하할 수 있다. 실제로 박노자는 선진국이든 한국이든 노동자들이 “마음의 관리자”인 자본에 포섭돼 경쟁주의 의식을 내면화하고 있다는 점을 강조한다. 그러다 보니 근본적 사회 변혁의 가능성도 낮게 본다.
현실의 대다수 노동계급은 자본에 완전히 포섭되지도, 그렇다고 근본적 변혁을 지향하지도 않는 모순된 의식을 지녔다. 그러나 의식이 모순되고 불균등하지만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계급 간 착취 관계 때문에 노동자들은 투쟁에 나설 수밖에 없다.
박노자는 이런 투쟁이 혁명으로 발전하기는 어렵다고 선을 긋지만, 현재의 세계 경제 위기 상황처럼 계급 간 이해관계가 심각하게 충돌하기 쉬운 특정 사회적 조건에서는 이런 투쟁이 종종 혁명으로 발전한다. 그리고 이런 투쟁의 경험 속에서 노동자들의 의식도 변할 수 있다.
사회 변화와 폭력, 그리고 국가
박노자는 혁명을 반대하는 근거로 혁명의 폭력성을 든다. 평화주의자로서 모든 종류의 폭력을 혐오하기 때문인 듯하다.
물론 진정한 마르크스주의자라면 박노자와 마찬가지로 폭력이 사라진 진정 평화로운 세상을 바라고 그런 세상을 건설하고자 애쓸 것이므로, 박노자의 심정을 공감할 수 있다. 문제는 그가 폭력이 없는 사회가 어떻게 도래할 수 있는지 비전을 제시하지 못한 채, 주로 개인의 도덕에 호소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조직화된 폭력은 개인의 도덕에 호소해서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계급 사회는 한 집단이 다른 집단의 잉여 노동을 착취하는 체제인데, 지배계급은 이런 체제를 유지하려고 폭력을 쓴다. 자본주의도 다른 계급 사회와 마찬가지로 소수의 지배계급이 압도 다수의 노동 대중을 착취하는 사회다. 이런 체제에서는 착취받는 계급의 저항을 봉쇄하기 위해, 또는 잉여의 재분배를 둘러싼 지배계급 간 경쟁에서 이기기 위해 폭력이 빈번하게 사용된다. 게다가 자본주의의 폭력은 그 규모도 어마어마하다.
박노자는 자본주의가 낳는 이런 끔찍한 폭력을 혐오한다. 그러나, 그와 동시에, 혁명도 어차피 폭력을 낳게 되므로 혁명은 되도록 피하자고 주장한다. 이런 주장은 모순을 낳는다. “국가 권력의 평화적 탈환”을 통해 급진 개혁을 추진한다는 박노자의 구상은 엄청난 폭력을 낳는 자본주의 국가를 용인하게 된다.
국가 폭력을 없애려면 계급 사회를 근본적으로 변혁해야 한다. 착취가 없는 사회에서는 무장력을 이용한 억압도 불필요해지기 때문이다. 사회를 근본적으로 변혁하려면 자본가 계급과의 집단적 투쟁이 불가피하고, 이 과정에서 노동계급은 자신의 집단적 힘, 즉 집단적 폭력을 행사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이런 종류의 폭력을 계급 사회의 역사에서 필연적으로 존재할 수밖에 없는 것으로 여겼다. 계급투쟁의 최고 형태인 혁명도 폭력을 수반할 수밖에 없다. 박노자는 이를 이유로 혁명을 피하자고 주장하지만, 혁명은 역사적 “자연 현상”과 같아서, 영원히 피할 수는 없는 법이다. 트로츠키는 이렇게 말했다. “내전은 휴머니즘의 학교가 결코 아니다. 이상론자들과 평화주의자들은 언제나 혁명의 ‘극단성’을 비난한다. 그러나 ‘극단성’은 혁명의 본성 자체에서 비롯한다. 그리고 혁명 자체는 역사의 ‘극단성’일 뿐이다.” 그렇다면 문제 제기 방식을 바꿔야 한다. 즉, 폭력이 도덕적으로 옳으냐 그르냐가 아니라, 누구의 폭력이 역사에서 진보적 구실을 하느냐는 문제로 접근해야 하는 것이다.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폭력이 “새로운 사회를 잉태하고 있는 모든 낡은 사회의 산파”로서, 새로운 사회를 건설할 잠재력이 있는 계급의 집단적 힘으로 폭력을 행사하는 것은 “역사에서 … 혁명적 역할을 한다”고 여겼다.
박노자가 제시한 수준의 급진 개혁을 추구하려 해도, 지배계급은 온갖 폭력적 수단을 동원해 개혁을 분쇄하려 들 것이다. 이럴 때 노동계급에게 비폭력이라는 가치를 설교하는 것은 폭력을 피하는 길이 되지 못한다. 그것은 오히려 노동계급 운동을 물리적으로 파괴하는 것을 돕는 행위일 뿐이다. 노동계급이 지배계급의 압도적 폭력에도 굴하지 않고 자신의 의지를 관철하려는 힘을 보여 줄 때에야, 박노자가 그토록 혐오하는 자본가 국가의 폭력을 와해시킬 수 있다.
좌파 민족주의에 대한 종파적 태도
박노자는 그동안 민족주의를 강경하게 비판해 왔다. 특히 한국의 좌파 민족주의 경향을 날을 세워 비판해 왔는데, 이 책의 제일 앞부분을 이런 비판에 할애하고 있다.
박노자는 좌파 민족주의 경향이 자본주의의 문제점을 도외시하고 ‘반미’와 ‘통일’에 매달리는 것이 문제라고 비판한다. 좌파 민족주의 경향은 “진짜 문제”인 민생 문제는 전혀 대책을 내놓지 않고, 남북관계조차 자본의 이해관계에 따라 좌지우지되는 “자본주의의 냉정한 현실”을 보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좌파 민족주의와 거리두기”를 해야 한다며 2008년 초 민주노동당 분당을 환영했고 진보신당을 지지한다.
박노자는 민족주의가 자본주의의 계급 분단 현실을 흐린다고 비판하는데, 이런 비판은 완전히 옳다. 그동안 진정한 마르크스주의자들은 민족주의를 근본적으로 비판해 왔다. 민족주의는 (아무리 좌파 민족주의라 하더라도) 민족 간 분열을 강조하고 민족 내부의 계급 분단을 은폐하면서 노동계급의 국제적 단결과 자국 지배계급에 맞선 노동계급의 투쟁을 흐리는 이데올로기다. 따라서 마르크스주의를 민족주의와 융합하겠다는 스탈린주의는 사실, 마르크스주의를 폐기한 것일 뿐이다.
그러나 문제는, 민족주의가 모두 똑같은 양상으로 표현되지는 않는다는 점이다. 제국주의 시대가 도래하면서 억압적 민족주의도 생겨났지만, 강대국의 억압에 맞서 피억압 민족의 민족적 반감 또한 생겨났다. 후자의 민족주의는 종종 반제국주의 투쟁의 이데올로기가 되기도 했다.
그런데 박노자는 한국의 좌파 민족주의가 “박정희주의적 교육을 받은 대한민국의 선량한 국민으로서 … 걸리기 쉬운 … 이념적인 ‘전염병’”일 뿐이고, ‘반미’와 ‘통일’ 등의 구호는 “아무런 현실적 내용도 없는 낭만적 구호”에 불과하다고 폄하한다. 이런 구호는 남북교류와 통일을 자본 축적의 관점에서 “도구시”하는 것을 보지 못한다는 것이다.
남북한 지배계급이 분단의 현실을 통치에 활용해 왔고, 통일 또한 자본 축적의 관점에서 접근하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대중의 반제국주의 정서나 통일 염원을 단순히 지배계급이 ‘조작’한 정서라고 치부할 수는 없다. 무엇보다 이런 정서는 일본 제국주의가 식민 통치를 하고 미·소 강대국 때문에 강제로 분단되고 같은 민족끼리 총부리를 겨눠 수백만 명이 목숨을 잃은 전쟁을 치르는 등 한반도 민중이 겪은 “밑바닥에서의” 생생한 경험에서 비롯한 것이다.
물론 남한의 경우 세계 13위의 경제 대국으로 성장했고 그에 걸맞게 세계 체제에서 위상이 높아지면서, 더는 억압받는 민족이라고 보기는 어렵게 됐다. 따라서 NL 계열의 전략과 달리, 남한에 더는 민족 해방 과제가 있다고 볼 수는 없다(그러나 제국주의 열강에 의해 분단된 민족의 통일 염원은 지지할 수 있다). 박노자의 주장처럼 남한은 부분적으로 억압적 구실도 하는 아류 제국주의 국가로 변모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남한 민족주의의 성격이 근본에서 변한 것은 아니다.
여전히 남한의 민족주의는 모순적이다. 아류 제국주의화는 젊은이들 사이에서 ‘민족적 자긍심’을 강화한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이런 자긍심이 아직 배타적이고 억압적인 민족주의로 명백히 변한 것은 아니다. 남한의 국제적 지위가 아무리 상승했다고 해도 열강들의 틈바구니에 끼어 있는 처지 때문에 남한 국가의 억압적 행위는 주로 미국 등 강대국들의 타민족 억압을 도와주는 수준이다.
좌파 민족주의의 토대가 사라진 것도 아니다. 남한 민중은 여전히 강대국들의 억압 경험에 대한 기억이 생생하고 지금까지도 남한은 미국 등 강대국들의 입김에 큰 영향을 받고 있다. 이 때문에 남한 민중은 여전히 강대국들에 대한 반감이 크고, 이런 정서는 2002년 두 여중생 압사 사건 항의 운동이나 이라크 전쟁 반대 운동, 한미FTA 반대 운동, 촛불 항쟁 등에 영향을 미쳤다.
따라서 진정한 좌파라면 좌파 민족주의 이데올로기를 수용하지 않으면서도, 대중의 반제국주의 정서에 부응하는 운동을 건설할 필요가 있다. 따라서 이런 대중 정서에 기민하게 반응하면서 주요한 운동을 건설하는 좌파 민족주의 경향과 공동 행동을 펴는 것도 주저하지 말아야 한다. 박노자의 ‘거리두기’는 이런 점을 충분히 고려하지 않고, 지나치게 차이점을 강조하는 듯하다.
국제주의와도 거리두기
그런데 박노자는 “좌파 민족주의자와 거리두기”를 하겠다면서, 다른 한편에선 국제주의와도 거리를 둔다. 특히 그는 국제주의 원칙에서 빠질 수 없는 혁명의 국제적 확산 주장이 몽상이라고 비판한다.
박노자는 최근의 세계 경제 위기 상황을 접하며, 현재의 세계 질서가 1920년대 말과 1930년대 초 대공황기와 흡사하다고 말한다. 따라서 반체제적 투쟁이 활발히 벌어질 수 있고, “준주변부” 국가에서는 이것이 혁명으로 발전할 수도 있다는 점을 인정한다. 그러나 서구 선진국에서는 “계급 권력 행사의 가시적인 ‘탈폭력화’” 때문에 체제에 대한 민중의 “두꺼운 ‘동의적 기반’이 있”어서 혁명이 불가능하다고 여긴다.
그런데 박노자는 남한을 혁명 가능성이 높지 않은 “준핵심부”로 규정하다가도 반대로 어느 구절에서는 혁명 가능성이 높은 “준주변부”로 규정하기도 하는 등 견해가 혼란스럽다. 물론 박노자는 대체로 남한에서는 대중의 보수적 의식 때문에 혁명 가능성이 크지 않다고 보는데, 마치 결론을 내려 놓고 분석을 끼워 맞춘 듯한 인상을 준다.
박노자가 선진국에서 혁명이 불가능하다는 분석을 내놓으며 강조하고자 하는 바는 결국 세계 혁명이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관점은 기본적으로 자본주의 체제를 각 국민 국가가 긴밀하게 연관된 유기적 세계 체제로 보지 않는 것이다. 최근의 경제 위기는 세계적 차원의 위기다. 세계 경제는 서로 긴밀하게 연관돼 있으므로, 어느 한 나라가 혁명적 위기에 처했다는 것은 다른 나라에서도 위기가 잠재돼 있다는 방증이다. 그리고 실제 특정 국가에서 혁명이 발생하면, 다른 나라에 잠재된 위기도 폭발할 가능성이 높다.
박노자는 트로츠키의 불균등 결합 발전 원리를 차용해 자신의 주장을 정당화하지만, 그는 각 국민 국가들 사이의 불균등성만 강조하지 ‘결합 발전’ 원리는 도외시한다. 따라서 “준주변부”에서는 혁명적 위기가 도래할 수 있지만 선진국에서는 도래할 수 없다는 박노자의 관점은 자본주의의 국제적 연관성을 놓치는 견해다.
자본주의를 불균등하게 결합된 단일한 세계 체제로 본다면, 세계 체제의 보편적 특징과 각 국민 국가의 특수성을 종합적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세계 체제의 보편적 특징을 간과하고 각 국민 국가의 특수성만 강조하게 되면, 실천에서 사회 변화를 향한 길은 각 나라마다 서로 다르다는 ‘민족적’ 변혁의 길을 따르게 될 공산이 크다.
한편 박노자는 자본주의가 서구 중심적 체제라는 점 때문에 제3세계주의와 흡사한 반反서구적 견해를 내놓는다. 선진국 노동계급이 체제에 포섭돼 근본적 변혁 가능성이 없다고 보는 견해가 대표적이다.
그래서 박노자가 내놓는 대안은 노동계급의 동아시아 지역 연대다. 서구와 달리, 중국이나 일본 등과는 “수평적인 관계”를 맺을 수 있다는 것인데, 한국 노동계급과 서구 노동계급의 연대를 굳이 배제해야 하는 이유는 제시하지 않는다. 한국이 미국과 관계 맺기에 쏠려 있던 것에서 중국·일본과도 확장해 관계 맺고 있다는 이유를 들지만, 그것이 서구 노동계급과 수평적으로 연대하지 못할 이유는 못 된다.
결국 박노자는 한국 진보 운동의 서구 “순종”적 태도를 근거로 든다. 시간이 지나도 “순종의 대상”이 바뀔 뿐, 한국 진보 운동이 강대국에 대한 종속적 태도를 버리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다함께를 지칭하는 듯이 “한국 트로츠키주의자”들이 상당량의 “영문 자료의 번역물”을 내는 것을 그 사례로 든다.
만약 다함께가 정치적으로 아무런 고려도 없이 무턱대고 모든 글을 번역한다면 “순종”이라고 표현할 수도 있겠으나, 국제 정세와 한국 상황에 비춰 적합하다고 판단되는 글을 취사선택해 번역하는 것을 두고 “순종” 운운하는 것은 터무니없는 중상모략이다.
물론 다함께는 한국에서 활동하므로, 한국 노동계급 운동의 발전을 위해 주된 에너지를 쏟는다. 그리고 한국의 구체적 상황에 관한 독자적 분석을 발전시킨다. 그러나 앞서도 말했지만, 국제적으로 보편적 상황과 한국의 특수한 조건을 종합적으로 분석해야 한다. 이런 점에 비춰 보면, 서구든 아시아든 세계 어디든 국제 노동계급 운동에 이로운 정치적 분석이 있으면 이를 수용하고 널리 알리려고 노력하는 것은 국제주의를 지향하는 단체로서 오히려 고무할 일이다. 민족주의와 거리를 두자면서, 은근슬쩍 제3세계 민족주의 정서를 이용한 중상모략에 나서는 박노자는 아무래도 국제주의의 참뜻을 이해하지 못하는 듯하다.
그 밖에도 이 책은 종교, 대학 등 더 많은 쟁점을 다루고 있다. 전체적으로 이 책은 자본주의와 한국 사회에 대한 비판은 급진적인 데 반해, 분석은 혼란스럽고, 대안은 어정쩡하다.
MARX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