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Ⅱ 68반란과 베트남 전쟁
1968 반란 50주년
반란의 불길이 세계를 휩쓸다 *
1968년은 세계사의 분수령이었다. 많은 곳에서 대중 운동이 일어나 자국 정부를 뿌리부터 뒤흔들었다. 세계 반대편의 사람들이 서로의 투쟁에서 영감을 얻었다.
권위에 도전한 이 반란으로, 서구의 시장 자본주의와 동구권의 스탈린주의 독재 정권들이 모두 억압적 체제임이 명백하게 드러났다. 양 체제 모두가 아닌 대안이 필요하다는 것이 분명해졌다.
베트남에서 일어난 저항으로 미국 제국주의는 굴욕을 당했다. 시민평등권 운동 지도자 마틴 루터 킹 암살 이후 미국 내에서 벌어진 반란도 미국 제국주의에 굴욕을 안겼다.
파리에서는 학생들이 도로를 부숴 바리케이드를 쌓고, 경찰에게 보도블록을 던졌다. 며칠 만에 노동자 1000만 명이 총파업을 벌이고 학생들의 저항에 합류했다.
폴란드에서는 노동계급 시위대가 자신들을 “사회주의”라는 이름으로 지배하던 자들에게 맞서 “붉은 부르주아지를 끌어내리자”고 외쳤다.
영국에서도 학생들이 대학을 점거했다. 학생들은 그로스베너 광장의 미국 대사관 앞에서 10만 명이 벌인 시위에 동참했다.
1968년 반란은 세계 곳곳으로 퍼져나갔고, 이는 우연이 아니었다.
전 세계 자본주의는 제2차세계대전 이후 전례 없는 호황을 누렸다. 그러나 1960년대 후반 호황이 한계에 부딪히면서, 체제의 정당성이 약화했다.
노동계급 사람들은 “지금보다 좋았던 적은 없었다”는 말 — 1957년 영국 보수당 총리 해럴드 맥밀런이 한 말 — 을 듣고 살았다. 이제 노동자들은 그 이상을 원했지만 엘리트들은 그 요구를 들어줄 능력이 없었다.
그리고 사회는 변화하고 있었다. 예를 들어, 이민자가 많아졌고 성을 대하는 태도가 개방적으로 바뀌었다.
기득권층은 현상 유지에 사력을 다했다. 개혁을 거부하든지 일부만 양보하든지 간에, 노동자들의 요구를 더 키울 뿐이었다. 영국에서는 1967년 낙태, 이혼, 동성애 관련 개혁 법안이 모두 통과됐고, 1968년에는 인종차별을 금지하는 첫 법안이 통과됐다.
급진적 운동이 성장하면서 수많은 사람들이 혁명적 변화를 바라기 시작했다.
대안
당시 서구의 많은 좌파와 노동운동은 여전히 소련과 동구권을 서구 자본주의가 아닌 사회주의적 대안으로 여기고 있었다.
그러나 이런 견해는 이의 제기를 받게 됐다. 특히 “프라하의 봄”이 커다란 구실을 했다.
체코슬로바키아 공산당은 자국의 침체된 국가자본주의 경제를 활성화하려고 개혁을 시작했지만, 그 덕분에 더 많은 사람들이 지배자들에게 의문을 제기할 공간도 열렸다.
결국 소련의 탱크가 체코슬로바키아로 쳐들어와 이런 개혁을 분쇄하자, 서구의 많은 시위대는 누구를 편들어야 할 것인지 다시 생각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소련 군대보다 체코슬로바키아 노동자·학생과 공통점이 더 많았다.
같은 시기 서구의 운동은 급진화하고 있었다. 예컨대, [미국에서] 마틴 루터 킹의 암살 이후 새 세대 청년 흑인 활동가들은 블랙파워[“흑인 권력”]와 혁명적 단체인 흑표범당을 대안으로 여기기 시작했다.
서구권과 동구권에서 모두 혁명적 대안이 필요하다고 보는 좌파들이 새롭게 부상했다. 영국 사회주의노동자당SWP의 전신인 국제사회주의자들IS도 그런 좌파의 하나였다.
당시 런던대학교 아시아·아프리카학대학 학생이었던 크리스 하먼은 본지에 다음과 같이 썼다.
[미국] 시카고에서는 군대의 지원을 받은 경찰이 평화로운 시위대를 총검으로 무자비하게 두들겨 팼다.
프라하에서는 러시아 지배자들이 ‘반혁명 분자 2만 명을 제거하겠다’고 으스대는 가운데 탱크가 거리를 장악했다.
미국과 러시아, ‘자유 세계’와 ‘사회주의 사회’ 사이에는 중요한 차이점이 있다. 그러나 양쪽 모두 소수의 지배계급이 사회를 지배하고, 최신 기술을 이용해 노동자들(지배계급의 통치를 위협할 수 있는 세력)을 억누른다는 면에서는 똑같다. … 이는 노동자 대중이 삶을 스스로 결정하기 시작했을 때 발현될 힘을 적어도 지배계급은 인지하고 있다는 사실을 증명하는 것이다.
영감
이제 수백만 명이 스탈린주의 소련의 가짜 사회주의를 넘어서는 대안을 생각했다. 어떤 이들은 중국 마오쩌둥이나 쿠바 피델 카스트로 같은 제3세계에서 벌어진 여러 민족 해방 운동에서 영감을 얻었다.
그러나 카를 마르크스가 정의한 대로 노동계급의 자력해방이야말로 진정한 사회주의라는 사상을 국제사회주의자들 같은 그룹이 부활시킬 공간도 열렸다.
1968년은 학생 반란으로 기억되는 경우가 많고, 학생 운동이 실제로 중요한 구실을 했다. 그러나 노동자들의 잠재력을 무시하던 이들은 당시 엄청난 충격을 받았다.
유행을 따르던 좌파 교수와 사상가들은 노동계급의 잠재력을 무시했었다. 서구 노동계급이 장기 호황기 동안 생활수준의 개선으로 체제에 포섭됐다는 이유에서였다.
당시 페이비언 협회가 출판한 소책자의 주장을 크리스 하먼은 다음과 같이 요약했다. “정원 딸린 연립주택이 자동차 공장 노동자 같은 집단을 ‘부르주아’로 변모시켰다.”
그러나 1968년 5월 프랑스에서 당시로서는 인류 역사상 가장 큰 총파업이 벌어져, 공장이 점거되고, 일부 도시에서는 노동자위원회가 구성돼 연료와 식료품 공급을 조직했다. 이듬해에는 영국과 이탈리아에서도 노동자 운동이 급격하게 전진했다.
1968년에 왼쪽으로의 이동만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우파와 지배계급은 유혈 진압과 인종차별적 속죄양 삼기를 이용해 반격에 나섰다. 영국 보수당 이넉 파울은 이때 악명 높은 “피의 강” 연설[이주민들 때문에 영국이 파괴될 것이라는 연설]로 인종차별을 부추겼다.
또한 1968년 반란은 사회를 근본적으로 변화시키지는 못했다. 프랑스에서조차 [잠시 외국으로 도망갔던] 대통령 샤를 드골이 우위를 되찾았고, 결정적으로는 1969년 6월 대선에서 그의 정당이 승리했다.
공산당과 노동조합 상근간부층의 개혁주의적 지도자들은 임금 인상과 향후 교섭에서의 더 큰 발언권을 보장받고 투쟁을 중단하기로 합의했다.
많은 노동자들이 분노했지만 투쟁의 후퇴를 막기에는 진정한 혁명적 좌파가 충분히 강력하지 못했다.
어떤 운동이든 지도력을 둘러싼 투쟁이 벌어지기 마련이다. 어떤 이들은 변화를 요구하며 강경하게 싸우면서도, 자본주의 자체에 맞서기는 꺼릴 수 있다.
그러나 지배계급은 시계 바늘을 완전히 되돌릴 수는 없었다. [당시] 전쟁, 인종차별, 여성차별에 맞서 일어난 운동들은 오늘날 우리가 지키고자 하는 많은 것을 성취했다.
1968년 반란의 역사는 우리가 다음번에는 더욱 멀리 나아가야 함을, 반란을 혁명으로까지 발전시켜야 함을 가르쳐 준다.
세계적 투쟁의 탄생
국제주의와 연대는 1968년 반란의 핵심을 이뤘다.
1968년의 첫 달이 채 지나가기도 전에 베트남에서 민족해방전선(“베트콩”이라고도 불렸다)이 미국 제국주의에 맞서 싸울 수 있다는 선례를 보여 줬다.
[친미적인] 남베트남의 장군이 민족해방전선의 투사 응구웬 반렘을 처형하는 장면이 미국 텔레비전을 통해 방영돼 미국 점령의 공포가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베트남인들의 저항은 미국의 시민평등권 운동과 학생 운동에 국제 연대의 문제를 제기했다. 1967년 10월 이미 10만 명 이상이 [베트남 전쟁에 반대해] 펜타곤[미국 국방부]으로 행진했다. 그리고 1968년 아이비리그 소속 상위 대학들의 학생들이 점거에 들어갔다.
민족해방전선의 간부 부이 띤은 미국에서 일어난 반전 운동이 “우리 전략의 핵심이었다”고 회상했다.
그는 이렇게 설명했다. “전쟁에서 우리는 후방의 확고한 지지를 받은 반면, 미국은 지지 기반이 취약했다.
“우리 지도부는 미국 반전 운동의 성장 소식을 놓치지 않으려고 매일 아침 9시에 라디오로 국제 뉴스를 들었다.”
멕시코시티는 1968년 10월에 올림픽을 개최했다.
시상대에 오른 미국의 흑인 선수 토미 스미스와 존 카를로스는 저항 의미로 미국 국가가 연주될 때 검은 장갑을 낀 주먹을 들어 올렸다. 그 몇 주 전, 멕시코 학생 수천 명은 멕시코 군대가 국립과학기술대학을 점령한 것에 반대해 경기장 밖에서 행진을 벌였다.
멕시코 국가는 ‘삼문화 광장’에서 학생 수백 명을 죽이는 것으로 대응했다.
이 학살이 일어나기 1주일 전, 북아일랜드에서는 경찰이 영국이 점령한 [제2의 도시] 데리에서 가톨릭교도 차별에 반대하는 행진을 진압했다. 이후 [1980년대에] 옥중 단식 투쟁으로 숨지는 마이클 데바인은 멕시코 학생들을 한시도 잊지 않았다.
그는 각종 집회와 시위에서 멕시코 학생들의 대의를 옹호했다.
학생들이 역사의 무대에 오르다
처음으로 학생들이 투쟁의 선두에 섰다. 과거에는 엘리트 양성소였던 대학이 전후 호황으로 성장하면서 중간계급과 노동계급 학생들도 대학에 진학했다.
1960년대 영국에서는 대학 수가 22곳에서 45곳로 갑절 이상 늘었다. 대학은 당시의 세계상을 토론하는 장이 됐고, 투쟁의 장이 됐다.
신입생들은 대학 내 기성 세력의 엘리트주의에 맞서 저항했고, 인종차별과 제국주의에 맞서 싸우던 천대받는 사람들의 대의에 공감했다.
파리에서는 캠퍼스 내 자유를 요구하고 기숙사 성별 분리와 베트남 전쟁에 반대해서 학생들이 반란에 나섰다.
국가가 학생들을 탄압하자 다른 이들이 연대 행동에 나섰다. 자신들 고유의 불만이 많은 노동자들이 학생들에게서 영감을 받아 투쟁에 나섰다.
‘신좌파’의 일부 그룹은 “학생 권력”에 기대를 걸었다.
대학 캠퍼스는 작업장보다 통제가 느슨하고, 저항이 먼저 시작되는 경우가 흔하다.
그러나 학생들은 노동자들과 달리 경제적 기능으로 말미암은 힘이 없다. 노동자들의 저항과 만나지 못하면 학생들의 저항은 빨리 떠올랐다가도 그만큼 빨리 사그라질 수 있다.
학생들은 1968년에 영웅적 구실을 했다. 하지만 운동이 정점에 올랐던 때는 노동계급이 전면에 나섰을 때였다.
연표
- 1월 5일 알렉산드르 두브체크가 체코슬로바키아 정부의 수반이 되고 “프라하의 봄”이라 불린 개혁을 시작하자, 이에 고무돼 거리에서 저항이 벌어지다.
- 1월 30일 베트남 저항군이 ‘설 공세’를 시작하다. 기습을 받은 미국 점령군과 그 동맹이 일시적으로 주요 도시에서 쫓겨나다.
- 2월 1일 베트남 게릴라 전사 응우옌 반렘을 권총으로 처형하는 장면이 카메라에 잡혔고, 이를 시청한 미국인들이 경악하다.
- 2월 11일 미국 멤피스에서 청소 노동자들이 인종차별에 맞서 파업을 벌이다.
- 3월 15일 폴란드에서 시위가 점점 커지다가 전국적 반란으로 나아갔고, 젊은 노동자와 학생 2만 명이 주요 도시 그단스크에서 보안군에 맞서 싸우다.
- 3월 17일 영국 학생 약 10만 명이 미국 대사관이 위치한 런던 그로스버너 광장에서 베트남 전쟁에 반대하는 시위를 벌이다.
- 4월 4일 미국 멤피스에서 마틴 루터 킹이 저격으로 살해당하다. 미국 전역 11개 도시에서 반란이 폭발하다.
- 4월 11일 독일의 우파 신문 〈빌트 차이퉁〉이 “공공의 적”이라고 매도하던 독일 학생 활동가 루디 두츠케가 저격수의 총에 맞아 중상을 입다. 학생들이 대규모 시위를 벌이며 경찰과 충돌하다.
- 5월 29일 프랑스 노동자 1000만 명이 파업을 벌이고 공장 수십 곳을 점거하다. 대통령 샤를 드골이 국외로 도망치다.
- 8월 21일 소련 탱크와 병력 20만 명이 체코슬로바키아를 침략해 두브체크 정부를 무너뜨리다.
- 10월 2일 멕시코에서 여름 내내 벌어진 대중 시위가 끝나자, 경찰과 군대가 멕시코시티에서 학생 시위대 수백 명을 학살하다.
- 10월 5일 북아일랜드에서 일어난 카톨릭교도 권리를 요구하는 시위를 왕립 얼스터 경찰대가 진압한 후, 데리에서 이틀 간 반란이 터지다.
- 10월 16일 미국 흑인 선수 토미 스미스와 존 카를로스가 멕시코 올림픽에서 미국 국가가 나오는 동안 시상대에서 저항의 뜻으로 검은 장갑을 낀 손을 들어 올리다.
MARX21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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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Tomáš Tengely-Evans, ‘1968—when the world caught fire’, Socialist Worker 25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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