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Ⅱ 68반란과 베트남 전쟁
베트남 설 공세 50주년
미국 제국주의를 패퇴시킬 수 있음을 보여 준 베트남 민중
1 설 공세는 50년 전 베트남 게릴라들이 미국 제국주의에게 치욕적인 수모를 안겨 준 사건이었다.
올해는 세계를 뒤흔들었던 1968년 국제적 반란 50주년이다. 이 역사적인 반란의 신호탄은 1968년 1월 31일 남베트남 전역에서 벌어진 설 공세였다.설 공세
2 게릴라들이 음력설을 맞이해 대대적 공격을 펼쳤다. 게릴라들은 사이공에 있던 미국 대사관을 잠시이지만 점거하기도 했다. 미국 대사관에서 성조기가 내려가고 민족해방전선의 깃발이 올라간 것은 베트남 전쟁에서 가장 극적인 장면의 하나였다. 베트남 중부의 후에라는 유서 깊은 도시는 게릴라들의 수중에 떨어졌다. 민족해방전선은 메콩 삼각주의 도시 벤쩨도 장악했다. 당시 미군 지휘관은 “도시를 구하려면 도시를 파괴해야 한다”며 실제 도시 전체를 파괴했다.
1968년 1월 31일 베트남 남부에서 베트남민족해방전선NLF, 이하 민족해방전선민족해방전선의 설 공세는 미국 지배자들에게 악몽과도 같은 것이었다. 설 공세 직전까지도 미국 지배자들은 베트남에서 미국이 승리하고 있고, 곧 전쟁을 끝낼 수 있다는 말을 되풀이하고 있었다. 1967년 12월 베트남 미국 대사관의 송년 파티 초청장에는 “터널 끝에 빛이 보인다”는 글귀가 새겨져 있었다.
설 공세는 미국 지배자들의 이런 자신감을 산산조각 냈다. 게릴라들이 미국 대사관을 점거하고 전투를 벌이는 모습이 TV에 방영됐고, 미국 지배자들의 위신은 땅에 떨어졌다.(그래서 베트남 전쟁 이후 미국 지배자들은 종군기자들의 취재 범위를 대폭 축소하고 통제했다.)
그리고 미국 지배자들은 베트남 게릴라들이 남베트남을 침략해 농민을 살해하는 북베트남의 군인일뿐이고, 미국이 농촌 지역에서 승리하고 있다고 말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것도 거짓으로 드러났다.
농촌 지역에서는 민족해방전선의 공세가 더 승승장구했고, 이는 베트남 남부 농민들의 지원 없이는 쉽지 않은 일이었다. 미국 대사관을 점거했다가 사살당한 게릴라들은 전혀 북베트남 정규군의 모습이 아니었다.
설 공세로 미국 지배자들의 거짓과 오판이 드러나면서 미국 내 반전 운동이 급성장했다. 정부의 거짓말과 위선에 항의해 철군을 주장하는 운동이 대규모로 성장했다.
북베트남에 대한 폭격이 시작되던 1965년 초에는 보스턴 공원에 100명이 모여 분노를 표출했다. 1969년 10월 15일에는 전쟁에 항의하기 위해 보스턴 공원에 모인 사람이 10만 명에 이르렀다. 그날 전국 곳곳의 도시와 마을에서 약 200만 명이 집회를 가졌는데, 이곳들 대부분은 한 번도 반전 집회가 열린 적이 없는 곳이었다.(하워드 진, 《미국 민중사 2》)
그리고 전 세계 혁명적 좌파와 피억압 민중도 세계 최강 지배자들이 수모를 당하는 장면을 보면서 영감과 자신감을 얻었다. 설 공세가 1968년 국제적 반란의 중요한 연료가 됐음은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다. 실제, 당시 유럽에서 새롭게 등장한 혁명적 좌파들은 설 공세에 고무돼 베트남 연대를 위한 국제 회의를 소집했다. 의미심장하게도, 냉전의 한복판에 서베를린에서 회의가 열렸다. 이 회의에 참가한 미국 참전 흑인은 다음과 같이 외쳤다.
우리는 베트남에 가지 않으련다.
왜냐하면 지금 내가 서 있는 곳이 베트남이기 때문이다.
절대로! 우리는 가지 않으련다!
절대로! 우리는 가지 않으련다!”(타리크 알리, 수잔 왓킨스, 《1968 희망의 시절, 분노의 나날》)
독일 당국이 시위를 불허했지만, 이를 무릅쓰고 수만 명이 서베를린을 행진했다.
프랑스 파리와 이탈리아 로마에서도 대규모 시위가 벌어졌다. 일본에서도 베트남 전쟁에 반대하는 투쟁이 크게 벌어졌다. 설 공세에 고무된 프랑스 대학생들이 파리의 한 중심가를 “영웅적인 베트남 지구”라고 명명하기도 했다. 1968년 3월 영국에서는 혁명적 좌파들이 주도한 ‘베트남연대운동’이 경찰의 봉쇄를 뚫고 미국 대사관으로 대규모 행진을 벌였다.
전환점
설 공세는 베트남 전쟁의 전환점이었다. 미국 지배계급에게도 베트남은 이제 골칫거리로 떠올랐고 분열이 시작됐다. 당시 서방 블록 경제에서 미국이 차지하는 지위의 변화 문제와 맞물려 있었기 때문이다.
설 공세가 베트남 전쟁의 전환점이 될 수 있었던 이유는 이를 계기로 미국 대자본의 핵심 부문들이, 미국이 베트남을 통제하기 위한 비용을 더는 감당할 수 없음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사실 미국이 베트남 전쟁에 쏟아붓고 있었던 비용은 한국전쟁 비용보다 많지 않았다. 하지만 그 사이에 일본과 서독 자본주의가 경제 호황을 통해 미국 자본주의의 경쟁자로 떠오르면서, 미국은 이들의 경제적 도전과 베트남에서 벌어지고 있던 지상전을 한꺼번에 감당하기 힘든 처지에 놓이게 된 것이다.(크리스 하먼, 《민중의 세계사》)
그래서 자신만만하던 대통령 존슨은 재선 불출마를 선언했고, 닉슨이 베트남 문제 해결을 과제로 제시하며 대통령 자리에 오를 수 있었다.
설 공세 이후 미국 정부는 파리에서 북베트남과 평화협상을 시작했다.(물론 전쟁이 곧바로 끝난 것은 아니었다. 평화협상 중에도 미국은 수시로 베트남을 폭격했고, 1970년에는 캄보디아로 확전했다.) 설 공세는 미국 지배자들의 뜻대로 베트남 상황이 돌아가지 않는다는 것을 분명히 보여 준 것이다.
군사적 패배, 정치적 승리
물론, 설 공세에서 민족해방전선은 미국의 군사력을 당해 내지 못했다. 미국 대사관을 점거한 게릴라는 몇 시간 만에 다 사살됐다. 후에나 벤쩨 등 곳곳에서 미국 지배자들은 민족해방전선을 저지하기 위해 군사력을 쏟아부었다.
민족해방전선은 애초에는 설 공세를 도시 봉기와 연결시키려 했다. 그러나 도시에서는 거의 성공을 거두지 못했다. 계급연합을 중시하던 스탈린주의 경향의 베트남 공산당이 도시 노동계급을 중요시하지 않아 조직적 기반이 없었던 탓이다. 그래서 설 공세는 도시보다 농촌 지역에서 더 지속될 수 있었다.
설 공세를 감행하면서 민족해방전선은 엄청난 타격을 입었다. 군사적으로는 크게 패배한 것이다.
그러나 정치적으로는 앞서 언급했듯이 미국 지배계급에게 엄청난 타격을 입혔다. 그래서 설 공세를 “군사적으로 패배했으나 정치적으로 승리한” 전투의 대표적 사례로 꼽는다. (비슷한 일이 1980년 5월 27일 새벽 광주 전남도청에서 벌어졌다. 마지막까지 도청을 사수한 시민군은 공수부대의 군사력에 패배했지만, 정치적으로는 군사 독재에 큰 타격을 입혔고 이후 투쟁의 정치적 연료가 됐다.)
그렇다면, 설 공세가 전환점이 됐던 베트남 전쟁의 원인은 무엇인가, 왜 미국은 베트남에서 전쟁을 벌였으며 어떤 일이 있었는지 살펴보겠다.
미국은 왜 베트남에서 전쟁을 벌였는가?
제2차세계대전 이후 제국주의 열강의 식민지들에서 위대한 민족 해방 운동이 벌어져, 식민 지배를 종식시키는 일이 벌어졌다. 1947년 영국이 인도를 포기했고, 1949년 중국에서는 마오쩌둥이 이끄는 홍군이 미국의 막대한 지원을 받던 장제스를 몰아내는 민족 해방 혁명을 이룩했다.
식민지 시대를 종식시키는 획기적인 일이었다. 그러나 제국주의가 종말을 맞은 것은 아니었다. 제2차세계대전 종전 후 세계는 곧 “초강대국 제국주의” 경쟁(미국과 소련의 경쟁) 시대로 돌입했다. 강대국 사이의 열전이 벌어지지는 않았으나 패권을 유지하기 위한 대리전(예컨대 한국전쟁)이 벌어졌고, 각자의 영역을 지키기 위한 힘겨루기는 치열했다. 미국 지배자들에게는 중앙아메리카, 카리브해 연안, 동아시아 등에 위성국가들이 있었고, 남베트남도 그중 하나였다. 게다가 베트남은 1949년 민족 해방 혁명이 성공한 중국과 국경을 맞댄 나라여서 미국에게는 중요한 곳이었다.
3 은 베트남에 영향력을 행사하려던 프랑스와 전쟁을 벌여 1954년 유명한 디엔비엔푸 전투에서 승리해 프랑스를 몰아냈다. 베트남은 프랑스가 물러난 뒤 남북으로 쪼개졌다. 북부는 공산당이 통제하고 남부는 미국의 후원을 받는 정권이 들어섰다. 마지막까지 프랑스를 지원한 미국은 프랑스가 패배하자 직접 베트남 남부에 수립된 정부를 후원하면서 통제력을 행사하려 나섰다. 그러나 프랑스 제국주의를 패퇴시킨 베트남 민중은 미국의 지배와 억압적인 독재 정권의 지배에 맞서 끊임없이 투쟁했다. 남베트남 독재 정권의 대표적 인물이 고 딘 디엠이다. 고故 리영희 선생은 미국 지배자들이 고 딘 디엠을 “베트남의 이승만”이라 불렀다고 했다(리영희, 《전환시대의 논리》). 그가 어떤 인물일지 충분히 짐작이 간다.
베트민1960년대 초에만 해도 미국 지배자들은 자신만만해 했다. 미국 대통령의 고문이었던 로버트 케네디가 “우리에게는 서른 개 이상의 베트남이 있다”고 호언할 정도였다. 그러나 이는 오판이었다. 남베트남은 점점 더 현지 정부의 통제력이 약화하는 상황이었다. 그럴수록 미국은 점점 파병 군대를 늘려갔다. 1964년 통킹만 사건을 조작해 의회 통제 없는 전쟁 지휘권(“통킹만 결의안”)을 확보하고 1965년부터는 대대적 폭격을 시작했다.
전쟁의 참상
미국의 전쟁은 야만적이었다. 베트남 전쟁 동안 미군은 베트남(남·북), 라오스, 캄보디아에 폭탄 800만 톤을 투하했다. “이것은 제2차세계대전에서 참전국 전체가 사용한 폭탄보다 무려 세 배나 많은 양으로, 그 파괴력이 히로시마에 투하된 원자탄 640개와 맞먹는다.”(조너선 닐, 《미국의 베트남 전쟁》) 당시 베트남 인구를 고려하면 “베트남 국민 1인당 200킬로그램짜리 폭탄 하나씩을 투하한 셈이다.”(하워드 진, 《미국 민중사2》)
미국 지배자들은 잔혹하게 네이팜탄도 이용했다. 네이팜탄은 투하되면 주변을 다 불태우는 무기다. 1973년 퓰리쳐상을 받은 사진 한 장이 네이팜탄의 끔찍함을 잘 드러냈다. 네이팜탄 폭격으로 옷이 다 불타고 화상으로 고통받는 베트남 소녀의 사진이었다.
미군은 집속탄(모폭탄에서 자폭탄이 퍼져나가는 끔찍한 무기. 국제적으로 사용을 금지하고 있다)도 사용해 민간인을 학살했다.
북베트남에서 미군의 주요 폭격 대상은 병원, 학교, 교회였다. 베트남 전쟁으로 베트남인 150만~200만 명이 사망했다.
미국은 남·북 베트남뿐만 아니라 베트남과 국경을 맞댄 라오스(북베트남과 남베트남의 이동 경로 이른바 ‘호치민 루트’가 있는)와 캄보디아(베트남 게릴라들의 피난처로 이용했던)도 폭격했다. 라오스와 캄보디아에서도 수십만 명이 사망했는데, 대부분 공습으로 사망했다고 추정된다.
지상전도 끔찍했다. 민족해방전선에 대한 지지가 높고 게릴라 전쟁이 벌어지는 상황에서 게릴라와 민간인을 구분하는 것은 쉽지 않았다. 그러나 미국 지배자들은 베트남 민중을 굴복시키려 했다. 그래서 베트남 주둔 미군 사령관 웨스트멀랜드는 지상전에 대해서 대놓고 “소모전”이라는 전략을 사용했다. 게릴라든 민간인이든 가리지 않고 다 적군으로 보고 전투를 벌인 것이다. 이런 배경에서 미라이 양민 학살(1968년 3월)과 한국 군대의 양민 학살들이 벌어졌다.
미군 병사들의 저항
베트남 민중의 저항과 미국 본토를 비롯한 국제적 반전 운동의 성장은 미국 병사들에게 영향을 끼치기 시작했다. 미국 내에서는 전쟁 반대 여론이 더욱 높아졌고, 징집 거부 운동도 광범하게 벌어졌다. 무하마드 알리(본명은 케시어스 클레이. 흑인 해방 운동 지도자 말컴 엑스의 영향을 받아 개명)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흑인 복서였다. 알리는 징집을 거부하며 이렇게 말했다. “베트콩[민족해방전선]은 나를 깜둥이라고 무시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내가 왜 베트남 사람들을 죽여야 한단 말입니까?” 알리는 챔피언으로서 얻었던 모든 특권을 잃었지만 끝내 징집을 거부했다.
베트남이라는 사지로 던져진 미국 병사들의 대부분 노동계급의 자식들이었다. “교전에 참가한 미군 병사의 약 80퍼센트가 블루칼라 출신이었다. 20퍼센트는 아버지가 화이트칼라 직종에 근무했지만, 그것도 대개는 단순 반복 노동이었다.”(조너선 닐, 《미국의 베트남 전쟁》)
1970년이 되면서 탈영병이 속출했다. “프래깅”이라는 상관 살해가 급증했고, 전쟁 반대 목소리가 담긴 신문들이 부대 안에서 제작돼 배포되기도 했다.
미국의 패배
1968년 설 공세에 타격을 입고 휘청거렸지만 미국 지배자들은 쉽게 베트남에서 손을 뗄 수 없었다. 세계 최강 제국주의 군대가 베트남에서 패배해 손을 떼는 것은 막대한 손해를 끼칠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미국 지배자들은 평화협상 와중에도 폭격을 거두지 않았다. 게다가 1972년 닉슨이 베이징을 직접 방문해 베트남으로부터 중국을 떼어 놓으려고도 했다. 그러나 1970년 캄보디아로의 확전은 반전 운동이 더 한층 격렬하게 벌어지는 계기가 됐다.
베트남의 상황을 통제하기 쉽지 않았고, 미국 내 균열도 커졌다. 전쟁 비용 때문에 군비 지출이 30퍼센트까지 치솟자, 미국 대자본들이 항의하기 시작했다. 미국 청년들이 전쟁과 징집에 반기를 들었다.(크리스 하먼, 《민중의 세계사》)
결국 미국은 베트남에서 철수하기로 결정했다. 패배해 쫓겨난 것이다. 이는 베트남 민중의 영웅적 저항과 국제적 연대(특히 미국 내의 강력한 저항)가 맞물린 결과였다. 미국 지배자들의 패배는 전 세계 피억압자들의 승리였다.
그리고 미국 지배자들은 큰 내상도 입었다. 베트남에서 패배하고 나서 미국 지배자들은 다른 곳에 직접 개입하는 것을 꺼려 하게 됐다. 이를 ‘베트남 증후군’이라 불렀다. 1980년대 레이건 정부가 들어서고 나서야 베트남 증후군을 극복하려는 작업이 시작됐다.
이처럼 베트남 전쟁은 평화운동을 건설하려는 이들에게 중요한 교훈과 영감을 주는 사건이다.
한국 지배계급의 야만성과 성장
한편, 한국의 박정희 정부는 미국의 야만적 전쟁에 9년 동안 연인원 32만 명을 파병했다. 베트남 전쟁에 파병된 한국군 중 5000여 명이 사망했고, 1만 5000여 명이 부상당했다. 미군이 밀림을 제거한다고 공중에서 투하한 고엽제 때문에, 파병 병사와 그 자녀 등 7만여 명이 고통받았다.
한국군은 미군 다음으로 주요한 전투 부대였다. 박태균 교수(《베트남 전쟁》에서)나 한홍구 교수가 지적했듯이, 1961년 5·16 쿠데타로 집권한 박정희는 케네디에게 인정받기 위해 미국을 방문해서 베트남에 파병하겠다고 먼저 제안했다. 베트남 상황에 대해 자신감이 넘쳤던 케네디 정부는 처음에는 한국군 파병에 시큰둥해 했다. 그러나 전황이 불안정해지자 한국군 파병을 요청했고, 박정희 정부는 적극 호응했다.
한국 지배계급은 남한 국가가 형성된 이승만 정부 때부터 미국 지배계급의 전략과 함께하는 것을 이익이라고 여겼다. 이런 한국 지배계급의 전략은 베트남 전쟁 이후 가장 큰 파병이었던 노무현 정부의 이라크 파병에도 적용됐다.
베트남 전쟁은 박정희가 한국의 강력한 지배계급으로 성장하는 기회이기도 했다. 미국 지배계급의 신임을 얻었고, 군대의 기반을 다졌고, 남베트남 독재 정권의 몰락(그들은 “월남 패망”이라고 불렀다)을 교훈 삼아 북한에 맞서는 강력한 국가를 건설해야 한다는 이데올로기도 활용했다. 그리고,
베트남 파병은 한국의 정치사에 장기적인 영향을 미쳤다. 위로는 전두환, 노태우, 정호용, 황영시, 유학성, 장세동, 안현태 등 신군부의 주요 인물들이, 아래로는 광주에 투입되었던 공수부대의 장교나 하사관들 상당수가 베트남에 파병된 자들이었다. 베트남 전쟁에서 민간인을 잠재적 베트콩으로 보고 총을 겨눴던 경험을 가진 자들이 광주학살의 주역이 된 것은 결코 우연한 일이라고 볼 수 없을 것이다. 또한 물자가 풍부했던 베트남에서 부와 경력을 쌓은 일부 장교들은 서로 밀어주고 끌어주면서 하나회와 같은 사조직으로 똘똘 뭉쳤다.(한홍구, 《유신》)
신군부 세력은 박정희에게 바통을 이어 받아 12년 동안 한국을 지배했다. 따지고 보면, 베트남 전쟁은 최근 주목을 받고 있는 5월 광주 학살(영화 ‘택시운전사’)과 1987년 6월 항쟁(영화 ‘1987’)과도 긴밀한 연관이 있다.
베트남 전쟁의 교훈
마지막으로 베트남 전쟁이 오늘날 평화운동을 건설하려는 이들에게 던지는 몇 가지 교훈을 얘기하고 싶다.
첫째, 베트남 전쟁은 세계 최강대국 미국도 패배할 수 있다는 영감을 준다. 미국은 여전히 강력한 제국주의 국가이지만 난공불락의 철옹성인 것은 아님을 보여 준 것이다.
둘째, 아래로부터의 저항과 투쟁이 미국 제국주의를 패배시킨 동력이었다. 더 구체적으로 말해, 베트남 민중의 저항, 미국을 비롯한 국제적 연대 운동, 미국 병사들의 반란이었다. 평화협상과 최종 협정은 저항과 투쟁의 결과였고, 미국 지배자들은 평화협상을 시간 벌기용으로 활용하기도 했다.
셋째, 베트남 전쟁을 시작한 것도 무자비한 폭격을 감행한 것도 미국 민주당 정부였다. 미국 반전 운동 초기에 유행했던 구호는 “어이 LBJ(당시 대통령 린든 B 존슨의 약자), 오늘은 얼마나 많은 아이들을 죽였나?”였다. 미국 민주당에 대한 환상을 갖지 말아야 한다.
넷째, 당시 ‘사회주의’를 자처하던 소련과 중국 지배자들이 보인 꾀죄죄한 태도나 배신도 돌아봐야 한다. 두 국가가 진정 사회주의 국가였다면, 미국 제국주의와 싸우고 있는 베트남을 지원하거나 적어도 베트남을 편들어야 했다. 그러나 소련과 중국 지배계급은 국제주의를 실천하기는커녕 서로 다투고 있었다. 소련과 중국은 프랑스가 베트남에서 패배해 쫓겨날 때, 베트민이 베트남 북부만 통제하도록 설득했다. 베트남 남부 민중의 저항과 염원은 고려 사항이 아니었다. 그래서 남베트남은 친미 독재자가 차지했다. 마오쩌둥은 미국 지배자들이 베트남에서 곤경에 처해 있던 1972년 베이징을 방문한 미국 대통령 닉슨을 환대했다. 미국 지배자들이 더 큰 수렁에 빠지지 않도록 도운 것이다. 미국 제국주의에 반대해 러시아나 중국을 지지하거나 적어도 무비판적인 태도를 보이는 진영논리는 옳지 못하다.
다섯째, 한국의 반제국주의 운동은 한국 정부에도 독립적이어야 한다. 베트남 전쟁에서 보여 준 한국 정부의 야만성은 단지 미국 지배자들의 요청에 의해 어쩔 수 없이 한 일이 아니었다. 돌출적이거나 일탈적인 행위도 아니었다. 한국 지배계급도 나름의 이익을 계산해 실행한 것이다. 민주당도 별로 다르지 않다. 한국 자본주의 국가의 수장이 된 문재인 정부를 포함한 역대 민주당 정부들도 베트남에서 저지른 한국 군대의 야만에 대해 분명하게 사과하지 않았다. 김대중 정부는 아프가니스탄 파병, 노무현 정부는 이라크 파병으로 미국의 전쟁을 지원했다. 문재인 정부는 사드를 배치하며 미국의 동아시아 전략을 지원하고 있다. 우리가 한국 정부에 독립적이어야 할 이유다.
베트남 전쟁 간략한 연표
- 1883년 프랑스가 베트남을 정복하다.
- 1940년 일본의 감독 아래 프랑스 식민주의자들이 계속 지배하다.
- 1945년 8월 일본의 항복 이후 베트민이 이끄는 민중이 사이공과 하노이를 비롯해 전국에서 권력을 장악하다.
9월 호치민이 하노이에서 독립을 선포하다. 사이공에서는 영국군이 봉기를 진압하다. - 1946~1954년 프랑스-베트민 전쟁
- 1954년 디엔비엔푸 전투에서 프랑스가 패배하다. 제네바 협상으로 공산당이 이끄는 북베트남과 미국과 동맹한 남베트남으로 분단되다.
- 1954년~ 미국의 지원 하에 남베트남 고 딘 디엠 정권이 들어서고 억압이 계속되다
- 1960~ 베트남민족해방전선(NLF) 결성되고 게릴라 투쟁을 시작하다
- 1961년 미국 케네디 정부 최초로 미군을 파병하다
- 1963년 남베트남에서 불교 신자들이 소요와 시위를 주도하다. 고 딘 디엠이 쿠데타로 암살당하다. 미국은 이 쿠데타를 지원하다.
- 1964년 미국 존슨 정부는 통킹만 사건을 조작하고 국회의 동의 없이도 정부가 베트남을 공격할 수 있는 결의안(‘통킹만 결의안’)을 국회에서 통과시키다.
9월 박정희 정부가 태권도 교관과 의료 인력을 중심으로 최초로 파병하다. - 1965년 존슨 정부가 남북을 가리지 않고 베트남 전역을 폭격하다. 미군 대규모 증파하다. 박정희 정부는 전투 병력으로 2차 파병하고, 해병대를 포함해 3차 파병하다. 이후 8년 동안 한국군 31만 명이 파병되다.
- 1968년 1월 31일 설 공세가 일어나다. 존슨은 재선을 포기하다. 파리에서 평화협상이 시작되다. 닉슨이 베트남 문제를 해결하겠다며 당선하다. 한국군 주둔 규모가 5만 명으로 최고조에 이르다.
- 1970년 미국이 캄보디아를 침략하다. 베트남 전선에서 미군 병사들의 저항이 확산되다.
- 1972년 북베트남군이 남부에 대한 공세를 개시하다. 미국은 북베트남을 무차별 폭격하다. 닉슨이 중국을 방문하다.
- 1973년 미국과 북베트남이 파리 평화협정을 조인하다. 미국은 부대 철수와 보상금 50억 달러 지급을 약속하다. 보상금 지급 약속은 지키지 않았다. 최후 미군 철수하다. 한국군 잔류 병력도 철수하다. 남베트남 대통령 평화협정 거부하다.
- 1975년 남베트남 군대 붕괴하다. 공산당이 사이공을 접수하다.
주
- 베트남에서 음력설은 최대 명절이다. 그래서 전쟁 중에도 설 명절은 암묵적 휴전기였다. 그런데 1968년 음력설인 1월 31일 베트남민족해방전선이 베트남 남부에서 대대적 공격을 펼쳤다. 그래서 ‘설 공세’라고 한다. ‘구정 공세’나 설을 뜻하는 베트남어를 사용해 ‘뗏 공세’라고도 부른다. 영어로는 ‘테트 공세’(Tet Offensive)라고도 한다. 이 글에서는 ‘설 공세’로 표기한다. ↩
- 1960년 베트남 남부에서 공산당이 주도해 만든 계급연합 전선체. ↩
- 1940년 베트남 공산당이 주도해 설립한 계급연합 전선체. 독립을 목표로 했고 대프랑스 전쟁을 이끌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