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Ⅱ: 오늘날 중동 위기와 제국주의
테러로 건설된 이스라엘 *
70년 전 이스라엘 국가는 끔찍한 범죄 행위를 통해 수립됐다. 1947년 이스라엘 민병대는 팔레스타인인 거의 100만 명을 고향 땅에서 쫓아냈다.
팔레스타인인들은 이 폭거를 나크바(아랍어로 ‘대재앙’)라고 부른다. 같은 해 이스라엘은 예루살렘과 역사적 팔레스타인 땅 전체를 점령하면서 또 다른 반인륜적 재앙을 일으켰다. 이후 40년 넘게 이스라엘은 이 지역을 무력으로 점령하고 수많은 학살을 저지르며 시온주의 국가를 지켜 왔다.
나크바 등의 사건들과 1948년 이스라엘 건국은 오늘날 이스라엘-팔레스타인 분쟁의 뿌리를 이해하는 데 결정적으로 중요하다.
시온주의 운동의 기원은 유럽에서 발흥했다. 시온주의 운동은 19세기 말 인종차별적 민족주의와 유대인 배척의 성장에 대한 대응으로 생겨났다.
비록 시온주의 운동은 차별받는 유대인의 안전한 피난처로서 유대인 국가를 건설하려는 바람에서 시작됐지만, 그 지도자들은 목적을 이루려면 유럽 정부의 지원이 필요하다고 봤다.(이것이 시온주의의 비극이다.)
그래서 시온주의 지도자들은 시온주의 운동을 유럽 식민주의의 첨병으로 만드는 이데올로기를 창조했다. 시온주의자들은 유럽의 인종차별적 민족주의에서 벗어나기는커녕 유대인의 식민지 프로젝트를 만들어 인종차별적 민족주의를 퍼트릴 심산이었다.
상당한 내부 논쟁 끝에 시온주의 운동은 팔레스타인을 유대인 국가 건설에 적합한 지역으로 선정했고, 20세기 초 몇 십 년에 걸쳐 소규모 유대인 정착민들이 이주를 시작했다.
시온주의자들은 자신들의 [팔레스타인] 정착이 영국이 얼마 전에 얻은 오스만 제국 땅에 대한 통제력을 공고히 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라 약속했고, 이에 구미가 당긴 영국 정부는 1917년 팔레스타인에 “유대인 민족의 고향”을 세우는 것을 지지했다.
그 2년 전인 1915년에만 해도 영국은 같은 장소에 아랍 왕국을 수립하겠다고 약속했다. 막후에서는 전쟁 동맹 프랑스와 오스만의 영토를 여러 세력권으로 분할하는 비밀거래를 하면서 말이다.
제1차세계대전 종전 후 평화 교섭 때 영국은 국제연맹의 위임통치 제도를 통해 팔레스타인 지역의 통제권을 획득했다.
이후 20년간 팔레스타인으로 이주하는 유대인이 더 많아졌다. 팔레스타인 거주 유대인 인구는 1919년 5만~6만 명에서 1930년대 중반에는 거의 45만 명까지 증가했다.
독일에서 아돌프 히틀러가 집권하고 나치가 유대인을 박해하면서 유럽의 사정은 더욱 악화했다. 유럽 정부들 대부분 나치의 박해를 받는 희생자들에게 이중적 태도를 취했다. 나치의 박해는 규탄하면서도, 절박한 난민들에게는 국경을 걸어 잠갔다.
세계의 초강대국들이 이스라엘 국가의 탄생을 지원했다. 미국과 소련은 처음에는 유엔의 팔레스타인 분할안을 지지했고, 그 뒤에는 이스라엘 국가를 인정했다. 중동 지역에서 영국의 영향력이 더 빠르게 쇠락하길 바라면서 말이다.
시온주의자들의 팔레스타인 점령 신호탄은 유엔 총회가 쏘아 올렸다. 1947년 11월 유엔 총회는 팔레스타인을 둘로 쪼개는 분할안을 통과시켜, 유대인 국가와 팔레스타인 국가가 나란히 존재하는 상황을 만들었다.
분할안은 명백히 팔레스타인인들에게 불리했다.
시온주의 지도자들은 공개적으로는 분할안을 환영하면서, 뒤로는 팔레스타인인들을 무자비하게 공격할 계획을 세워 놓았다.
이스라엘 초대 총리가 되는 다비드 벤구리온은 1947년 11월 유대인협회 집행부에게 팔레스타인인들이 맞이할 암울한 미래에 대해 설명했다. “그들은 다수가 체포되거나 추방될 것입니다. 추방하는 것이 낫습니다.”
1947년 12월에서 1948년 1월까지 시온주의 민병대는 팔레스타인인 거주지에서 끊임없이 잔혹한 행위를 자행했다.
1947년 12월 18일 갈릴리의 키사스 마을에서도 그런 공격이 벌어졌다. 시온주의 군대는 한밤중에 마을의 집들을 폭파했다. 폭파된 집에는 사람들이 자고 있었다. 15명이 사망했고, 그중 5명은 어린이였다.
12월 초 항구도시 하이파에서 시온주의 병력들은 폭발물을 팔레스타인 거주지에 굴려 넣었다. 그들은 불 붙은 기름을 거리에 뿌리고, 불길을 피해 나오는 주민들을 기관총으로 쐈다.
팔레스타인인 추방과 학살에 탄력이 붙는 와중에, 시온주의 지도자들은 ‘플랜 달렛’(히브리어 알파벳 D에서 따옴)이라 알려진 작전을 논의하고 채택했다. 이 작전은 시온주의자들의 핵심 병력인 ‘하가나’의 지휘관들에게 팔레스타인인들을 어떻게 대할지에 대해 분명하게 지시했다.
이 작전은 둘 중 어느 방식으로도 수행될 수 있다. 하나는 (불을 지르거나, 폭파하거나, 잔해에 지뢰를 설치해서) 거주 지역들, 특히 영구히 통제하기 어려운 인구 밀집 지역을 파괴하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다음 지침에 따라 수색·통제 작전을 개시하는 것이다: 먼저 마을을 포위하고, 내부를 수색한다. 저항이 있으면, 무장 세력은 반드시 말살하고, 주민들은 국경 밖으로 추방한다.
1948년 4월 10일 데이르 야신 마을에서는 90명이 넘는 주민이 학살당했다. 그중 3분의 1은 젖먹이였다.
이런 학살은 분명한 목적이 있었다. 학살자들은 팔레스타인인들이 겁먹고 달아나게 해서, 추방을 가속화하길 바랐다.
유엔의 팔레스타인 분할안 결의로, 아랍 정권들은 자국의 자원병들이 팔레스타인인들을 방어하러 팔레스타인에 들어가는 것을 허용해야 했다.
1947년 12월에서 1948년 5월까지, 아랍인 자원병들은 소규모 무리로 나뉘어 각자 고립돼 있었다. 무기도 부족했고 통일된 명령 체계도 없었다.
더욱이, 이스라엘 역사가 아비 슬레임이 지적했듯이, 두 진영의 전술은 매우 달랐다.
시온주의자들은 주요 유대인 정착지를 빠르게 확보하고는, 팔레스타인 국가의 영토로 지정된 지역으로 공격해 들어가서, 의도적으로 팔레스타인인들을 몰아냈다.
반면, 아랍인 투사들은 더 방어적이었다. 팔레스타인 지역의 통제력을 유지하려 애쓰면서, 시온주의자들의 점령지에 반격해 들어가는 일은 드물었다. 1948년 5월 주요 아랍국의 군대가 개입했지만, 이미 팔레스타인인 25만 명이 피난을 떠난 상황이었다.
1948년 5월 중순 팔레스타인에 있는 아랍국 연합 병력은 겨우 2만 5000명이었는데, 형성 중이던 이스라엘방위군의 지휘를 받는 병력은 3만 5000명이었다.
이스라엘방위군은 재빨리 더 많은 병력을 전투에 동원해, 7월 중순까지는 6만 5000명, 12월경에는 9만 6441명을 투입했다.
1948년 5월 15일 벤구리온은 이스라엘 건국을 세계에 공표했다. 그러나 추방과 학살은 계속 이어졌다.
5월 22일 탄투라에서는 팔레스타인인 최대 230명이 무참하게 살해돼, 공동 묘지에 매장됐다.
나중에 이스라엘 총리가 되는 이츠하크 라빈은 1948년 7월에는 람라와 리드에서 벌어진 군사 작전의 책임자였다.
라빈이 추산한 바에 따르면, 그의 군대는 해당 지역에서 팔레스타인인 5만 명을 쫓아냈다. 추방된 팔레스타인인들은 서안 지구까지 음식과 물도 없이 걸어가야 했다.
그 후 몇 달간 팔레스타인 난민의 숫자는 85만 명으로 급증했다.
공포에 질리고 아무것도 가지지 못한 팔레스타인 난민들은 레바논, 시리아, 요르단, 서안 지구, 가자 지구의 혼잡한 수용소에 수용됐다.
유엔 총회는 이스라엘에 난민의 귀국을 허용하라고 촉구하는 결의안을 통과시켰지만, 7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난민과 그 후손들은 여전히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있다.
1948년 팔레스타인인들에게 닥친 재앙은 당시 중동 지역이 혼란스러웠던 상황에서 일어난 것이다. 옛 식민 제국들과 미국이 시온주의 운동을 잠재적으로 유용한 동맹으로 본 이유의 하나는 중동에서 강력한 반제국주의 운동이 성장했기 때문이었다.
비록 아랍 지도자들의 무능과 배신으로 팔레스타인의 운명은 요르단 왕 압룰라와 이집트 왕 파로크 같은 자들의 손에 넘어가게 됐다.
하지만 제국주의와 그 부역자들인 지역 지배자들에 맞서 성장하고 단결한 1948년의 대중운동은 팔레스타인 문제에 대한 대의가 중동을 불붙게 할 수 있다는 것도 보여 줬다.
MARX21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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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Anne Alexander and John Rose, ‘Israel - created by terrorism’, Socialist Worker 2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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