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Ⅱ: 오늘날 중동 위기와 제국주의
아랍의 지배계급은 팔레스타인 해방의 동료가 아니다 *
아랍 지도자들은 이스라엘을 비난한다. 하지만 그들이 서방 제국주의와 긴밀한 관계를 맺은 걸 보면 그들은 팔레스타인 해방 투쟁의 진정한 동료가 아니다. 이 글은 이스라엘의 가자 지구 폭격과 학살이 한창이던 2014년 7월 29일에 쓴 글이다.
중동의 지배자들은 종종 팔레스타인 해방 투쟁을 지지한다고 말한다. 이집트 수도 카이로에 본부를 둔 아랍연맹은 최근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 공격을 “전쟁 범죄”라고 비판했다. 이란도 “야만적인 공격”이라고 했다. 마침내 친미 국가인 사우디아라비아도 이스라엘의 공격을 비난했다.
하지만 아랍 지배자들은 팔레스타인 투쟁을 배신해 왔다. 집권 세력이 아랍 민족주의자든, 자유주의자든, 이슬람주의자든 말이다.
중동에서 일어난 식민 지배에 반대 투쟁 덕분에 이집트의 가말 압델 나세르 같은 아랍 민족주의 지도자들이 한 세대 동안 집권할 수 있었다.
야세르 아라파트와 팔레스타인해방기구PLO도 이와 비슷한 민족주의 정치를 내걸고 등장했다. 많은 사람들은 이를 보면서 팔레스타인의 해방을 위한 투쟁이 아랍과 걸프 지역 지배자들의 지지를 얻어야 승리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이집트 같은 정부에게는 급진적으로 보이는 게 유용할 수 있다. 하지만 괜찮은 협상 조건이 제시되면 아랍의 지배자들은 모두 팔레스타인을 내팽개쳤다. 그들은 모두 서방 제국주의에 순응한다.
‘아랍의 봄’은 중동에서 일어난 아래로부터의 항쟁의 일부로서 팔레스타인 해방 투쟁이 승리할 가능성을 보여 줬다. ‘아랍의 봄’은 일부 집단들의 한계도 보여 줬다.
예컨대 서방 정치인들은 무슬림 형제단이 이집트에서 집권할 가능성을 보며 기겁했다. 서방 정치인들은 이집트가 팔레스타인 가자 지구의 하마스 저항 운동과 동맹을 맺고는 이집트와 이스라엘 사이의 “평화”를 유지해 온 캠프 데이비드 협정을 파기할지 모른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무슬림 형제단이 배출한 대통령 모하메드 무르시는 캠프 데이비드 협정을 파기하지 않았다. 그 대신 하마스와 이스라엘 사이에서 거간꾼 노릇을 했다.
혁명 물결이 시리아로 확산됐을 때, 많은 사람들은 이 혁명이 팔레스타인인들에게 재앙이 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일부 좌파는 [시리아의] 대통령 바샤르 알아사드가 반제국주의 투사로서 믿을 만하고 팔레스타인 해방을 지지한다고 했다. 하지만 바샤르 알아사드 정권은 항상 자신의 필요를 앞세웠고 팔레스타인을 지지하는 데서는 기회주의적이었다.
그동안 아랍 지배자들이 팔레스타인을 배신해 온 것은 우연하게 일어난 일이 아니다. 이는 아랍 지배자들이 서방 제국주의와 맺은 관계에서 비롯한 것이었다.
1970년대는 중동에 개입한 미국 제국주의에 중요한 전환점이었고, 아랍 정권들이 왜 그리고 어떻게 팔레스타인을 배신했는지를 잘 보여 주는 시기였다.
당시 미국의 전략은 식민 지배에 맞서는 투쟁에서 등장한 아랍 국가들의 연합을 깨뜨리는 것이었다.
1973년 안와르 사다트의 이집트와 하페즈 알아사드(바샤르 알아사드의 아버지)의 시리아는 광범한 연합의 일부로서 이스라엘을 공격했다. 이라크, 요르단, 알제리는 병력 10만 명을 제공하고, 사우디아라비아와 쿠웨이트는 재정을 지원했다.
이 전쟁은 흔히 팔레스타인을 돕는 아랍 민족주의자와 미국 제국주의의 중동 경비견 이스라엘 사이의 전쟁으로 묘사된다. 물론 이 전쟁은 미국 제국주의와 아랍 정부들 사이의 분쟁이었다. 하지만 팔레스타인인들은 자기 이익을 추구하는 아랍 정부들에게 지정학적 장기판의 졸로 이용당했다.
아랍 지배자들은 자국 경제를 발전시키기 위해 독자적 정책 ― 대체로 소련에서 영감을 얻은 국가자본주의적 노선을 따르는 정책 ― 을 추진하고자 했다. 이 때문에 서방 제국주의와 충돌을 빚게 된 것이다.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 식민화 프로젝트도 이해관계의 충돌을 낳았다. 1967년 이스라엘은 이집트에게서 시나이 반도를, 시리아에게서 골란 고원을 빼앗아 병합했다. 바로 이런 이유로 1970년대 내내 아랍 정권들의 요구 사항에는 공정한 유가와 함께 이스라엘에 대한 “억제”가 들어갔다.
하지만 이집트는 1973년까지는 이스라엘과 협정을 맺으려고 계속 애를 썼다. 이 시도의 실패가 1973년 전쟁의 한 이유였다.
1978년 이집트와 이스라엘이 맺은 캠프 데이비드 협정은 팔레스타인에 대한 분명한 배신이었다. 이 협정은 이후 20년간 일어날 사건들의 배경이 됐다.
이 협정으로 이집트는 시나이 반도를 되돌려 받는 대가로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사이에서] 중립을 취하기로 했다. 이 협정 덕분에 이스라엘은 팔레스타인인들을 탄압하고 북쪽의 적들(레바논 등)과 싸우는 데 집중할 수 있게 됐다.
이스라엘은 캠프 데이비드 협정을 맺자마자 레바논을 침공했다. 1982년 시나이 반도 반환이 완료되자, 이스라엘은 훨씬 더 야만적인 또 다른 침공을 시작했다.
1 는 팔레스타인인들에게 끔찍한 것이었다.
새로 등장한 “차가운 평화”이집트 정권은 아랍 세계에 대한 지정학적·경제적 영향력을 강화했다. 사다트와 그의 후임자 호스니 무바라크는 신자유주의 정책을 도입했는데, 이는 군산복합체와 자본가들에게 득이 됐다. 사다트와 무바라크는 이스라엘 기업들과의 연계를 더 강화했다.
하지만 모든 아랍 국가들이 “승자”였던 건 아니다. 시리아는 1967년 전쟁에서 패배해 빼앗긴 골란 고원을 돌려받기를 원했다. 그렇다고 해서 팔레스타인을 지지하는 것은 아니었다.
시리아는 유리한 위치에서 이스라엘과 협상해 골란 고원을 돌려받기를 원했다. 시리아 정권의 이익에 비춰볼 때, 팔레스타인은 장애물이었다. 하페즈 알아사드는 팔레스타인해방기구 지도자 야세르 아라파트를 “제거해야 할 장애물”이라고 불렀다.
시리아는 팔레스타인인들의 저항을 더는 지원하지 않았다. 그 대신 팔레스타인 저항 운동을 통제해 협상 카드로 이용하려 했다.
1966년 집권하기 전 하페즈가 제기한 핵심 쟁점은 “이스라엘에 대항하는 게릴라전에 반대하기”였다. 그는 시리아에 기반을 둔 게릴라 조직들을 재빨리 공격했다.
팔레스타인 쟁점은 아랍 지배계급에 대한 대중적 반대를 일으킬 잠재력이 있다. 그래서 1970년대 내내 아랍의 정권들은 계속 불안정했다.
팔레스타인해방기구는 이웃 요르단에서 강력한 세력이었다. 그런데 팔레스타인해방기구의 전략은 아랍 정권들과 협력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스라엘의 군사적 공격이 가하는 압박과 더 좌파적인 그룹들이 가하는 압박으로 팔레스타인해방기구는 요르단의 하쉬미트 왕정에 맞서는 행동에 나설 수밖에 없었다.
1970년 요르단 정권은 “검은 9월”이라고 불리는 공격을 벌여 팔레스타인인 수천 명을 학살했다. 이 사건은 아랍 정권들이 자기 권력을 지키기 위해서라면 팔레스타인인들을 공격할 태세가 돼 있음을 잘 보여 줬다.
[시리아의] 하페즈는 그저 외교적으로만 [이스라엘에] 항의한 뒤, 레바논에 있는 팔레스타인 저항 세력을 공격했다. 1975년 시리아 정권은 대중적 저항을 분쇄하기 위해 레바논에 군대를 투입했고, 이는 레바논 내전을 촉발했다. 팔레스타인해방기구, 레바논의 좌파와 노동운동이 시리아 군대에 맞서 저항했다.
2 파시스트 민병대가 텔 알-자타르 난민촌에서 대학살을 저지를 수 있었다. 1978년에 이스라엘이 레바논을 침공했을 때 이스라엘의 주된 목표는 레바논에서 활동하는 해방 운동 조직과 저항 조직들을 몰아내는 것이었다.
시리아의 공격 덕분에 팔랑헤하지만 시리아의 더 명백한 배신은 이스라엘이 레바논을 침공한 1982년에 일어났다. 시리아는 팔랑헤민병대의 새 지도자로 엘리 호베이카를 지지했다. 호베이카는 1982년에 사브라와 샤틸라 난민촌에서 야만적 학살을 주도한 인물이다.
하지만 이집트가 중립을 고수하는 상황에서 이스라엘로서는 시리아와 “평화” 협정을 체결할 이유가 없었다.
시리아는 서방과 손잡는 전략을 추구했다. 시리아는 1991년 서방의 이라크 공격을 지지했다. 그러나 시리아는 이스라엘에 맞서 싸우던 헤즈볼라를 지원함으로써 중동에서 자신들의 입지를 강화하려 애썼다.
저항 운동에 대한 아랍 지배자들의 태도는 지정학적 이해관계에 따라 달라졌다.
3 와 연계를 맺으려 했고, 최근에는 ‘이라크·시리아 이슬람국가’(아이시스)에 맞서 미국과 협력하는 것도 고려하고 있다.
이란은 무슬림 국가들의 맹주이자 팔레스타인인들의 옹호자 지위를 차지하려 애썼다. 걸프해 연안국들은 팔레스타인을 말로만 지지하며, 실제로는 미국 제국주의와 사이 좋게 지냈다. 심지어 이란의 지배계급도 이라크의 말리키 세속주의 정부이런 배신들은 1993년 오슬로 협정이라는 “평화 협정”으로 이어졌고, 팔레스타인해방기구는 “두 국가 방안”을 받아들였다.
오슬로협정이 체결되면서 팔레스타인인들은 커다란 희망을 가졌다. 하지만 그에 따라 생겨난 팔레스타인 자치정부는 이스라엘이 신자유주의 정책을 추진할 경우 제공하는 자금으로 가지고 노는 노리개에 불과하다는 것이 드러났다.
팔레스타인해방기구 지도자들이 배신의 행보를 걸을 때 첫 번째 인티파다, 즉 이스라엘에 맞선 봉기가 일어났다. 요르단에서도 신자유주의에 맞선 항의 운동과 봉기가 일어났다. 요르단 강 서안 지구가 이스라엘에 맞서 일어날 때, 요르단 강 동안 지구는 요르단의 하심 왕조에 맞서 일어났다.
그 뒤로 팔레스타인은 더 조각조각 나뉘었다. 이스라엘 정착민들의 도로가 서안 지구를 갈갈이 찢어 놓았다. 가자 지구는 이스라엘의 계속되는 공격을 받는 지붕 없는 감옥이다.
팔레스타인의 역사는 외교와 지역 지배자들에 의존해서는 결코 해방을 가져올 수 없음을 보여 준다. 팔레스타인 해방 투쟁이 이를 배신한 아랍 정권들에 맞서 일어나는 투쟁과 연결될 잠재력은 있다. 이 지역 곳곳에서 아래로부터 일어나는 노동계급의 봉기만이 팔레스타인에 해방을 가져다줄 수 있다.
MARX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