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Ⅱ: 오늘날 중동 위기와 제국주의
이집트 공산주의 운동, 잃어버린 기회의 역사
이 글은 2017년 12월 12일 아랍어 온라인 매체 〈알아답〉(http://al-adab.com)에 실린 글을 번역한 것이다. 필자인 사메 나기브는 이집트 ‘혁명적 사회주의자 단체’RS의 지도적 활동가이다. 각주들은 모두 옮긴이가 독자의 이해를 돕기 위해 단 것이다. 옮긴이 박이랑은 한국외대 통번역대학원 아랍어과를 졸업한 아랍어 통번역가이다.
이집트 공산주의 운동은 1921년 밝은 전망으로 출발했지만 역사적으로 많은 위기와 분열, 분화를 겪었고, 이 때문에 정치적·사회적으로 영향력이 있는 대중운동으로 성장하지 못했다.
역사학자들은 이 운동을 크게 네 시기(1기: 1920년대, 2기: 1940년대, 3기: 1970년대)로 구분한다. 아직 4기에 대해선 연구된 바가 적다. 그러나 확실히 1990년대 이후(소련 붕괴 이후) 등장한 정당과 단체들을 2011년의 이집트 혁명까지 이어지는 4기에 포함시킬 수 있을 것이다.
이 구분은 실제로 이집트 공산주의 운동사 자체의 단절을 반영한 것이다. 1921년에 시작한 1기는 1924년에 사실상 끝났다. 2기는 1930년대 말 밑바닥에서부터 다시 시작했지만, 1960년대 중반 당의 해체라는 참사로 끝났다. 1970년대 초에 시작한 3기는 상당한 정치력을 확보했지만 1980년대 말과 1990년대 초의 소련 붕괴와 더불어 끝이 났다.
주목할 점은 새 세대의 공산주의자들이 등장할 때마다 되풀이되는 길을 걸었다는 점이다. 즉, 마르크스주의·학생 서클로 시작해 선전 그룹으로 성장한 뒤 공산주의 단체로 발전하는 식이었다. 새 세대와 선배 세대의 연결 고리는 책 등의 출판물이나 개인적 인간관계에 한정돼 있었다. 이집트 공산주의 운동은 역사가 오래됐음에도 조직적·사상적 퇴적물을 남기지 못했던 것이다.
공산당의 설립에서 1965년 해체까지
1 정부는 이에 재빠르게 대응해 파업 지도자들과 공산당 창당 간부들을 체포했다. 공산당은 이 탄압을 극복하지 못했고 당 재건도 시도하지 못했다.
1기 공산주의 운동은 오래 지속되지 못했기 때문에 자세히 다루지는 않을 것이다. 이집트 공산당은 1921년에 창당했고 많은 지식인과 노동자가 가입했다. 이집트 공산당은 1923~1924년 알렉산드리아 등지에서 여러 파업들을 조직하는 성과를 거뒀다. 당시 와프드당2 으로 이름을 변경한 ‘이집트 민족 해방 운동’이었다. 곧이어 ‘이스크라’, ‘민중 해방’ 등 경쟁 단체도 생겨났다. 이 정당들은 대학가와 샤브라 알카이마, 마할라 알쿠브라와 같은 노동자 지역을 중심으로 빠르게 성장했다.
하지만 1930년대 말 들어서 조직들이이 재건되기 시작했고, 제2차세계대전 동안에는 중요한 정치 세력이 됐다. 그중 규모가 가장 큰 단체는 나중에 ‘민족 해방 민주주의 운동’Democratic Movement for National Liberation, 하디투하지만 이 정당들은 창당 시점부터 정치적·사상적·이론적으로 소련과 소련 공산당에 종속돼 있었다. 이집트 공산주의자들은 소련의 대외정책을 따르는 입장을 취했고, 이것이 이집트 국내에선 재앙적 결과를 낳았다. 스탈린은 러시아 공산주의자들의 사상과 정책을 다음과 같이 뒤집어 버렸다.
- 국제주의와 혁명의 확산 대신 일국사회주의론을 주장했다.
- 민주주의·사회주의의 과제와 노동계급의 지도력을 혁명적으로 연결하는 전망, 즉 연속혁명적 전망을 폐기하고 단계적 혁명론을 주장했다. 그리고 사회주의 혁명의 실천에 앞서 민족·민주주의 혁명의 완수가 꼭 선행돼야 한다고 주장했다.
- 독립적인 노동계급의 지도력을 구축하는 것이 아니라, 부르주아·프티부르주아와 함께하는 ‘민족·인민전선’ 전략을 추구했다.
이렇듯, 전 세계의 공산당들에겐 자국에서 노동자 혁명을 위해 노력하기보다 급격하게 변화하는 소련의 대외정책에 복무하는 것이 의무가 됐다.
3 이후 팔레스타인 문제가 광범한 이집트 지식층인과 청년층의 특별한 관심사로 떠올랐다. 그러나 분할 결정을 수용하고 시온주의 국가를 4 인정한 이집트 공산당의 결정은 공산주의자들의 조직적 성과들을 무너뜨리고 지지자들의 신뢰도 잃어 버리는 결과를 초래했다. 반면 무슬림형제단은 팔레스타인 문제에 대한 입장이 종파주의적이고 인종차별주의적이긴 했지만 ― 당시 상황을 무슬림과 유대인 간의 전쟁으로 봤다 ― 이집트 전역에서 팔레스타인을 위한 국민 봉사 캠페인을 조직하는 등 규모와 영향력을 증대시킬 수 있었다.
소수의 지식인과 트로츠키주의 단체를 제외한 이집트 공산주의자들은 철저하게 스탈린주의를 따랐다. 최초의 대재앙은 팔레스타인 분할 결정과 함께 일어났다. 왜냐하면 소련이 이 결정에 서명한 첫 국가였을 뿐 아니라 이스라엘을 최초로 인정한 국가였기 때문이다. 1930년대부터, 특히 1936~1939년 봉기두 번째 재앙은 공산주의 운동, 특히 “하디투”와 와프드당 간의 관계에서 비롯했다. 부르주아 정당인 와프드당은 영국 제국주의와 이집트 왕정에게 계속해서 양보했다. 토지 개혁 같은 민중의 시급한 요구들은 먼 미래로 제쳐 놓았다. 와프드당은 파산한 부르주아 민족주의를 대변하는 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반혁명 대열에까지 동참했다. 이 때가 민주주의 운동, 민족주의 운동, 사회 운동들을 이끌 노동계급의 지도력을 구축하고, 그 운동의 요구들을 사회주의 혁명과 결합시킬 수 있는 공산주의 운동을 건설할 역사적인 기회였다. 그런데 공산주의 운동 내 최대 세력인 하디투는 와프드당이 양보와 배신을 하는데도 무조건적 지지를 보냈다. 이와 같은 부르주아지들에 대한 꽁무니 좇기는 이집트 최대 공산주의 세력의 기본 원칙이 돼 버렸다. 그 결과 공산당은 와프드당과 무슬림형제단 사이에서 정치적 경쟁을 벌일 수가 없었다. 이 때문에 생긴 정치 공백 속에서 1952년 자유장교단이 쿠데타를 일으킬 여지를 얻었다.
5 해산을 결정했다. 그들은 석방된 뒤 당시 명칭이 ‘아랍사회주의연합’이었던 6 집권당에 입당했다. 부르주아 계급과의 연대 전략과 연계된 이 행보는 부르주아지들의 꽁무니를 좇는 정도가 아니라 아예 그들 속에서 용해돼 버릴 지경에 이르렀다. 이렇게 2기 공산주의 운동은 비극적 결말을 맞이했다.
2기 공산주의 운동의 자살 행위는 1960년대 중반에 벌어졌다. 당시 나세르 정권은 소련의 동맹국이 돼 일련의 경제 정책들(국유화, 국가 주도 개발 등)을 추진했다. 이 정책들은 공산당의 단계발전론과 맞아떨어졌다. 당시 소련은 “비자본주의적 개발양식”에 주목하고 나세르 정권 같은 체제들을 사회주의로 가는 “이행기” 체제로 보기 시작했다. 이집트 공산당 활동가들은 대부분 1959년 이래로 투옥돼 있는 상황이었는데도 1964년 ‘통일공산당’의3기 공산주의 운동
1970년대 초 대학가의 몇몇 마르크스주의 서클들이 모여 ‘이집트 공산주의자’ 조직을 결성했다. 이 조직은 나중에 ‘이집트 공산주의 노동자당’(이하 노동자당)이 된다. 한편, 1965년의 공산당 해산을 반대한 일부 서클들은 ‘1월 8일 공산당’을 결성했다.
이 공산주의 단체들, 특히 노동자당은 1972년 학생 운동이 일어나자 대학가에서 성장했다. 그러나 조직원과 지지자들의 수가 수천 명을 넘지는 못했고 학생 조직으로서 성격이 강했다. 이들에게 가장 중요한 의제는 민족주의 문제와 시온주의 국가와의 전쟁 촉구였다. 그러나 이들은 헬완과 알렉산드리아 등 중요한 지역에서 노동운동 지도자들을 끌어들이는 성과를 거두기도 했다. 그 밖에도 당시에는 ‘공산주의자 동맹’을 결성한 소규모 트로츠키주의 그룹이 있었다. 이들은 사상적으로 명료함과 깊이가 있었으며 스탈린주의와 그 범죄 행위를 날카롭게 비판했지만, 선전 그룹 수준을 벗어나지 못했다. 그러다가 1980년대 초에 일련의 공안 탄압이 벌어져 이 중요한 실험은 막을 내렸다.
노동자당을 다시 살펴보면, 그들의 계획은 사실 전망이 밝았다. 나세르의 실험에 대해 마르크스주의적으로 비판적이었으며, 소련으로부터 조직적·정치적으로 독립돼 있었고, 소련의 관료주의적 통치에도 비판적이었다. 그럼에도 노동자당은 스탈린주의의 망령에서 완전히 해방되지는 못했다. 즉, 계속해서 민족·민주주의 혁명이 사회주의 혁명에 선행해야 한다고 고수했다. 독립적 국가 발전이 근본적 목표였을 뿐 아니라, 그것이 노동자 혁명보다 선행돼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소련에서 사회주의적 모델을 찾으려 했고, 소련을 “관료주의적 일탈”로 타락한 국가로 봤다.
7 는 노동자당을 어려운 시험에 들게 했다. 즉, 노동자당은 이 거대한 노동자 운동에 영향을 끼칠 만한 규모와 경험이 없었던 것이다. 그리고 1977년 봉기 이후 찾아온 대대적 검거 열풍으로 많은 당원이 체포됐고, 이는 당의 약화로 이어졌다.
1970년대에 찾아온 급격한 정세 변화는 공산주의 정당들에 일련의 위기를 불러일으켰다. 1973년 전쟁[4차 중동전쟁]은 분노해 있던 학생 운동의 발목을 잡았고, 이 때문에 노동자당은 주요 지지자들을 잃어 버렸다. 이어서 1977년 일어난 봉기1965년에 통일공산당을 스스로 해산한 옛 간부들이 1975년에 다시 전열을 가다듬기 위해 돌아왔다. 그들은 귀환하자마자 사다트와의 합의 하에 광범한 좌파전선을 구성하기 위한 작업에 착수했다. 이 전선은 다양한 나세르주의 단체와 공산주의 단체들을 포괄하고 있었다. 바로 이 동맹이 1976년에 ‘국민진보연합당’National Progressive Unionist Party이라는 이름 하에 합법 정당이 된다. [국민진보연합당은 ‘알타감무’로도 알려져 있다]
8 의 지도 하에서 1980년대에는 무바라크 정권과 가까워졌고 1990년대에는 “이슬람화”(리파아트 알사이드가 즐겨 쓴 표현)와 테러에 맞선 전쟁이라는 명목으로 무바라크와 공개적인 동맹을 맺으면서 그 모든 기회와 성과를 날려 버렸다.
비록 극명하게 스탈린주의적이었고 나세르주의 정권의 지도자들과 관계를 맺어 온 역사가 있었지만, 국민진보연합당의 출범은 많은 좌파에게 희망을 줬다. 예를 들어, 이 당의 기관지 《알아할리》는 매주 15만 부가 배포됐다. 그리고 캠프 데이비드 협정에 반대하는 입장은 시온주의 국가와의 평화에 대한 대중적 반감을 대변했다. 과거에 공산주의 운동과 노동운동이 맺었던 관계를 활성화시키는 데 성공한 국민진보연합당은 노동계급의 심장부에 무시 못할 기반을 마련할 수 있었다. 하지만 알타감무는 하디투의 옛 간부 리파아트 알사이드이집트 공산주의 운동은 1940년대에는 와프드당에게, 1960년대에는 압델 나세르에게, 그리고 1980년대와 1990년대에는 무바라크에게 굴복했다. 그러나 이것이 끝은 아니었다.
1990년대 이후의 공산주의 운동
소련의 붕괴는 이집트 좌파들을 뒤흔들어 놓았다. 스탈린주의자들에게 이 사건은 사회주의적 모델의 붕괴를 뜻했고, 정치적·사상적 나침반이 사라졌음을 뜻했다. 그리고 이 급속한 붕괴와 더불어 세계 자본주의와 미국 제국주의의 압도적 승리처럼 보였던 당시 상황은 소련의 실험에 비판적이던 이들에게도 뼈아픈 충격으로 다가왔다.
9 속에서 모든 비극적 시대가 그의 유명한 표현인 “그러나 망각은 동네에 전염병처럼 늘 창궐한다!”로 끝나듯이 말이다.
소련 붕괴로 말미암은 좌파의 좌절과 무바라크에 대한 리파아트 알사이드의 굴복 사이에서 좌파들의 공간은 다시 사막처럼 돼 버렸다. 새 세대 마르크스주의자들은 다시 한 번 밑바닥에서부터 시작해야만 했다. 마치 나깁 마흐푸즈의 소설 《우리 동네 아이들》1990년대 초에 마르크스주의 서클들이 결성돼 이집트와 세계에서 일어나는 일들에 대한 분석을 모색하기 시작했다. 이 새 세대는 소련에서 벌어진 일로 좌절한 마르크스주의자들이 아니었다. 이들이 정치에 입문한 계기는 새 세대 이집트인들을 혁명적 사상으로 이끈 팔레스타인의 1차 인티파다(1987년)였다. 이들은 주로 트로츠키주의 서적을 읽으며 트로츠키주의를 받아들였고, 특히 소련이 “국가자본주의”의 일종이며 사회주의와는 전혀 관련이 없다고 설명한 영국의 마르크스주의자 토니 클리프의 서적을 접했다.
이 서클들은 다섯 가지로 주요 사상을 구체화했다.
- 첫째, 소련의 붕괴는 사회주의의 몰락이 아니다. 오히려 국가자본주의에 토대를 둔 계급 체제가 몰락한 것이다.
- 둘째, 세계 자본주의는 위기를 극복하지 못했을 뿐 아니라, 가까운 미래에 더 큰 위기를 앞두고 있다.
- 셋째, 팔레스타인 문제는 합의의 여지가 없는 사안이다. 오슬로 협정과 마드리드 협정을 비롯한 팔레스타인해방기구PLO의 잇따른 양보는 어떠한 성과도 가져다주지 않을 것이고, 팔레스타인 민중은 다시금 혁명을 일으킬 역량을 보유하고 있다.
- 넷째, 우리의 주된 적은 무바라크 정권과 이집트 자본주의이며, 이 정권과의 동맹은 이집트 좌파가 범했던 최악의 참사였다.
- 다섯째, 기본 목표는 바로 노동운동의 중심에서 혁명적 사회주의 정당을 건설하는 것이며, 동시에 차별받는 모든 이들의 연단이 되는 것이다.
10 그리고 무바라크 정권에 맞선 민주주의 투쟁에 좌파가 참여하면서 혁명적 사회주의 단체 등 혁명적 조직들이 크게 성장하고 경험을 축적할 기회를 얻었다.
이와 같은 사상을 토대로 1990년대 중반에 ‘혁명적 사회주의자 단체’Revolutionary Socialists가 결성됐다. 수많은 분열과 후퇴로 어렵게 걸어 왔던 여정을 통해 이 단체는 사상과 선전을 발전시킬 수 있었고, 새로운 간부를 길러 낼 수 있었다. 이들은 대부분 학생이거나 옛 공산주의 단체들의 회원들이었다. 그렇게 21세기의 첫 10년은 좌파들, 특히 혁명적 사회주의자 단체에게 많은 기회를 가져다 줬다. 팔레스타인의 2차 인티파다는 이집트 민중의 전례 없는 연대를 불러 일으켰다. 이 연대를 조직하는 데서 좌파가 한 적극적 역할은 새로운 성장의 물결을 불러왔고, 이를 통해 좌파들의 대오도 재조직될 수 있었다. 이후 이라크 전쟁 반대 운동과 ‘키파야’ 운동,그 뒤를 이어 2011년 혁명이 일어났고, 이집트 좌파에겐 역사적 기회가 찾아왔다. 이 혁명은 독재 정권과 위기에 처한 자본주의에 맞서 수백만 명이 참여한 대중 혁명이었다. 파업 수천 건을 조직했던 분노한 노동자들의 강력한 운동이었으며, 청년 수십만 명을 끌어들인 급진적 민주주의 운동이기도 했다. 이는 분명 마르크스주의자들이 일컫는 전형적인 “혁명적 상황”이었다. 모든 마르크스주의 운동은 바로 이 때를 위한 준비를 한다. 즉, 혁명적 상황에 대비하고 이에 조직적 개입을 하는 것이야말로 마르크스주의 운동의 존재 이유인 것이다.
혁명이 찾아왔을 때 혁명가들은 이집트 반정부 진영이 수십 년 동안 형성해 온 정치 지형에 직면해 있었다. 이슬람주의 세력은 전국적으로 대중적 뿌리를 내리고 있었고, 우리 추산에 따르면 그 활동가들과 지지자는 수십만 명에 달했다. 당시 이집트의 조직 좌파와 미조직 좌파는 수천 명에 불과했다. 이 상황은 또한 이데올로기 차원에서도 세력 균형에 반영됐다. 즉, 혁명이 일어나기 전인 2000년대에는 이슬람주의 운동의 저작들이 우세한 영향력을 미치고 있었고, 마르크스주의 사상은 비교적 협소한 범위에 제한돼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혁명의 첫 번째 기간에 이 두 세력 사이의 경쟁은 이슬람주의자들의 승리로 결론이 났다.
혁명을 직접 경험한 청년과 노동자 수백만 명은, 특히 무슬림형제단의 계급적 모순과 약점뿐 아니라 혁명에 대한 이들의 배신까지 겪게 되자, 광범한 의미로서 좌파적 대안을 모색하게 됐다. 이는 혁명의 구호와 요구에서 잘 드러났고, 대규모 시위와 점거에 많은 여성과 콥트교도들의 참여를 통해서도 나타났다.
11 에 대한 잔혹한 진압도 지지했다!
그러나 무슬림형제단이 권력을 잡은 이후에, 특히 2013년 쿠데타에 대해 광범한 좌파들이 취했던 입장을 통해, 스탈린주의가 여전히 많은 좌파들의 사고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점이 다시금 확인됐다. 예를 들어, 이집트 공산당은 구체제 세력(무바라크 정권)과 공안기구의 요원들과 동맹 맺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이들은 무슬림형제단의 집권이야말로 가장 큰 오류였다고 주장했을 뿐 아니라 2013년 6월의 군부 쿠데타를 지지했고, 라바아 알아다위야 광장 점거우리는 이렇게 다시 한 번 극단적인 신자유주의 정책을 추진하며 절대 다수 이집트인들의 삶을 공격하는 군부 독재 체제, 시온주의 국가와 걸프 자본의 이익에 충실하게 복무하는 체제로 회귀했다. 이렇게 이집트 좌파는 거대한 도전에 직면하게 된 것이다. 즉, 그중 일부는 독재 정권의 품에 안기며, 심지어 독재자 자신이 말했듯이, 정치적으로 파산했다. 그러나 규모와 영향력 면에서 더 거대한 또 다른 좌파가 있다. 혁명적 사회주의자 단체는 좌파의 일부로서 2011년 1월 혁명에 참여했으며, 하루 아침에 증발해 버리지 않을 많은 경험을 쌓았다. 오늘날 우리가 던지는 질문은 다음과 같다. “바로 이들이 좌파들의 대오를 단결하고 과거의 오류로부터 학습해, 새 세대의 이집트 마르크스주의자들에게 또다시 밑바닥부터 시작해야만 하는 짐을 지우지 않을 수 있을까?”
주
- 이집트 최초의 근대적 정당이자 부르주아 민족주의 정당. 와프드는 아랍어로 ‘대표단’을 의미하며 이집트의 독립을 요청할 목적으로 1918년 영국 제국을 방문한 대표단이 그 시초이다. ↩
- 1947년 결성된 공산주의 조직. 이집트 출생의 유대인 앙리 퀴리엘(Henri Curiel)이 주도한 하디투는 산업 노동자들 사이에서 영향력이 있었으며 당시 이집트 내 공산주의 단체 중에서 최대 규모였다. 1952년 나세르의 쿠데타를 지지했으나 나세르 정권에 대한 태도를 둘러싸고 내분을 겪으며 약화되다가 1955년에 다른 단체들과 함께 ‘통합공산당’을 창당했다. ↩
- 1936년 급증하는 유대인의 이민, 이에 따른 아랍인 토지의 강탈, 실업률의 증가에 저항하며 시작된 팔레스타인 노동자들의 총파업은 영국 식민 당국의 유혈 탄압으로 무장봉기로 진화했다. 3년 동안 지속된 전국적 봉기로 팔레스타인인 5000여 명이 사망하고 1만여 명이 부상당했다. ↩
- 시온주의 국가(Zionist Entity)는 ‘이스라엘’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는 아랍의 좌파와 민족주의자들이 ‘이스라엘’ 대신 사용하는 표현이다. ↩
- 하디투가 중심이 돼 다른 공산주의 단체들과 1955년 창당한 ‘통합공산당’과 ‘이집트공산당’이 합당해 1957년 결성됐다. ‘통일공산당’은 합당 당시, 가말 압델 나세르의 정부를 옹호하며 공산주의자들과 노동계급, 그리고 민족부르주아지들의 단결을 주장하는 성명을 발표했다. ↩
- 1962년 나세르의 주도로 창당된 나세르주의 정당. 국유화와 토지 개혁 등이 당 강령의 골자였다. 이후 사다트의 친서방 노선 때문에 분열하다가 1978년에 해산했다. ↩
- “1977년 빵 봉기”로 알려진 이 운동은 사다트 정부의 신자유주의적 공격에 대한 저항으로 일어났다. 사다트는 IMF 차관을 들여오는 대가로 국가보조금을 삭감했고, 식료품 가격이 50퍼센트 폭등했다. 이 때문에 주요 도시들에서 수십만 명이 참여하는 대규모 시위가 벌어졌다. 이 운동은 군대가 투입돼 79명이 사망하고 550명이 부상당하고서야 끝이 났다. ↩
- 무함마드 리파아트 알사이드(Mohamed Refaat El-Saeed, 1932~2017)는 하디투의 주요 활동가였으며 알타감무의 사무총장이었다. 그는 무바라크 정권에 협력하는 방향을 선택했는데, 1990년 대선에서는 야권 세력 중 유일하게 선거를 보이콧하지 않았다. 무바라크 정권과의 협력은 무슬림형제단의 영향력을 차단하고자 하는 목적에서 한 일인 것으로 풀이되는데, 이슬람주의에 대한 맹렬한 반대는 알사이드의 정치적 담론과 저작의 중심을 이뤘다. ↩
- 나깁 마흐푸즈(Naguib Mahfouz, 1911~2006)는 1988년 노벨문학상 수상작인 《우리 동네 아이들(게벨라위의 아이들)》에서 종교를 모독을 했다는 이유로 이슬람주의자들로부터 암살 공격을 받아 죽을 뻔했다. 이 책은 2007년에야 이집트에서 정식 출간됐다. ↩
- 키파야는 아랍어로 ‘(그만하면) 충분하다’는 뜻이다. 키파야 운동은 2004년 무바라크의 연임과 장기 집권에 반대해 벌어진 대중운동이다. ↩
- 2013년 8월 무슬림형제단 지지자들은 엘시시의 쿠데타에 반대하며 카이로의 라바아 알아다위야 광장을 점거했다. 무르시의 복권을 요구하던 이들을 군인과 경찰이 유혈 진압하면서 약 2600명이 사망하고 수천 명이 부상당했다. 휴먼라이츠워치는 이 사건을 근래의 현대사에서 최악의 시위 진압 사건으로 꼽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