쟁점: 현재의 이슈들
위안부 문제는 무엇이고, 왜 이토록 해결되지 않을까?
이 글은 필자의 〈노동자 연대〉 234호 기사 ‘왜 “위안부” 문제는 이토록 해결되지 않을까?’를 대폭 증보한 것이다.
1 합의를 발표했다. 이 합의로 일본은 위안부 문제의 법적 책임과 공식 배상을 회피한 채 위안부 문제가 최종적이고 불가역적으로 해결됐다고 선언할 수 있었다. “향후 유엔 등 국제사회에서 상호 비난·비판을 자제”하기로 해 이 합의는 유네스코 기록물 등재 등 국제 캠페인에서 ‘위안부’ 피해자들을 불리하게 만들었다. 합의 결과는 한국민들의 공분을 자아냈다.
2015년 12월 28일에 한·일 두 정부는 ‘위안부’2 한일 위안부 합의 같은 박근혜의 적폐를 향한 분노는 2016~1917년 박근혜 퇴진 운동에서 확인됐다.
합의 발표 직후 필자는 〈노동자 연대〉 기사에서 다음과 같이 지적했다. “박근혜도 위안부 합의를 끝까지 고수하려 할 것이다. 그러나 이 때문에 박근혜는 광범한 반대 정서에 직면하게 됐고, 이 문제는 남은 임기 내내 박근혜의 발목을 잡을지 모른다.”그러나 정권이 바뀌었는데도 위안부 문제는 해결은커녕 한일 위안부 합의 파기조차 이뤄지지 않았다.
2017년 9월 한·일 정상회담 후 청와대 국민소통수석 윤영찬은 정상회담 결과를 브리핑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한·일 양국 정상은 북한의 핵·미사일 도발로 인한 동북아 긴장이 고조되는 상황에서 양국이 과거사 문제를 안정적으로 관리하면서 미래지향적이고 실질적인 교류와 협력을 강화해 나가기로 했다.”
이처럼 문재인 정부는 위안부 문제를 비롯한 일본 침략 과거사 문제 해결과 한·일 경제·안보 관계의 진전을 분리(이른바 ‘투 트랙’)하겠다고 밝혀 왔다. 그러나 무게 중심은 후자에 있었다.
2017년 12월 27일 문재인 정부의 외교부는 한일 위안부 합의 과정에 관한 조사 결과를 발표하며, 박근혜 정부가 일본과 소녀상 이전 약속, “성노예” 용어 사용 자제 등 추악한 이면 합의까지 했음을 폭로했다.
그러나 문재인 정부는 위안부 합의를 무효라고 선언하지도, 일본에 재협상을 요구하지도 않았다. 위안부 문제의 온전한 해결을 바라는 국내 여론과 미국·일본의 압력 사이에서, 문재인 정부는 절충을 선택한 것이다. 문재인 정부의 결정을 알게 된 일부 피해자들이 “할머니들을 도로 팔아먹었구나” 하며 분개한 까닭이다.
이처럼 위안부 문제는 단지 과거의 일이 아니다. 오늘날 한반도를 둘러싼 강대국들의 첨예한 이해관계와 얽히고설켜 있다. 해결이 어렵고 더딘 까닭이다.
제국주의 전쟁의 희생자들
위안부는 근로정신대, 일본군으로 강제 징집된 청년들과 더불어 1930~1940년대 일본 제국주의의 전쟁을 위해 희생된 사람들이다.
흔히 제2차세계대전을 민주주의 대 파시즘 간의 전쟁으로 오해한다. 그러나 제1차세계대전과 마찬가지로 제2차세계대전도 제국주의 간 전쟁이었다.
제2차세계대전 발발의 결정적 계기는 1930년대 대불황이었다. 이때 유례 없는 경제 위기가 전 세계를 강타했다. 1929~1932년에 전 세계 생산량은 38퍼센트, 무역은 66퍼센트 감소했다. 이에 대응해 각국은 앞다퉈 보호무역주의를 강화했고, 이 때문에 세계경제가 점차 경쟁적인 무역·군사 블록들로 쪼개지기 시작했다.
당시 일본 경제도 심각한 위기에 빠져 헤어나올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1930년에 일본의 수출과 무역은 전년도 대비 각각 32퍼센트, 30퍼센트나 줄었다.
모든 자본주의 강대국들이 어려움을 겪었지만, 거대한 식민지를 보유한 영국과 프랑스 등에 견줘 독일과 일본이 상대적으로 더 큰 타격을 입었다. 미국, 영국, 프랑스 등이 식민지와 본국을 잇는 배타적인 블록을 쌓자, 일본은 평화적으로 경제를 회복시키고 성장할 방법이 없음을 깨달았다. 그래서 식민지를 확장하고(특히 중국), 더 많은 영토·시장·자원을 자국에 통합해 자급자족적인 제국 경제를 구축하고자 했다.
첫 행보는 1931년 만주사변이었다. 일본은 괴뢰국 만주국을 세워 만주를 독차지했다. 일단 발동한 영토 확장의 논리는 여기에서 멈추지 않았다. 화베이華北 지방을 중국에서 분리해 차지하려는 의도에서 일본은 1937년 중일 전쟁을 일으켰다. 그러나 중국이 항복하지 않고 저항하면서, 전쟁이 장기화됐다. 그러자 일본의 목표는 곧 중국에서 동남아시아로 확대됐다.
그러나 일본의 영토 확장은 중국을 비롯해 아시아 곳곳에 세력권과 식민지를 보유하고 있던 영국, 프랑스, 미국 등 서구 제국주의 국가들과의 충돌을 불가피하게 만들었다. 결국 전쟁은 1941년 태평양 전쟁으로 확대돼, 일본은 미국과 정면 충돌했다.
중일 전쟁에서 태평양 전쟁으로 확전되는 과정이 일본 제국주의가 위안부를 대거 징모하고 위안소 제도를 체계화하는 배경이 됐다.
전쟁이 장기화하고 중국 내륙으로 전선이 확대되자, 명분 없는 전쟁에 총동원령으로 징집된 일본 군인들의 불만이 커졌다. 예상 외로 중국 측의 저항이 거세 피해가 커지자 사기도 떨어졌다. 이 때문에 일본군 내에서 하극상이 많아졌다. 그러나 병력이 부족해, 일본 군부가 병사들에게 적절한 교대와 휴식을 보장할 형편이 아니었다. 태평양 전쟁 발발로 전선이 동남아시아와 태평양 군도로 더욱 확장하면서, 이런 어려움은 훨씬 더 커졌다.
일본 군부는 전선 뒤의 광활해진 배후와 후방 지역 관리에도 애를 먹었다. 이 와중에 일본 군인들에 의한 민간인 학살, 약탈, 강간 사건이 비일비재했다. 이는 후방에서 점령지 주민의 불만과 반일 감정을 키워 반일 저항으로 나아가게 만들 수 있었다.
1938년 일본 북중방면군 참모장이 중국 내 휘하 부대에 보낸 한 문건은 당시 일본 군부의 인식을 보여 준다.
군인 및 군대의 주민에 대한 불법행위가 주민의 원한을 사서 … 공산 항일분자의 민중 선동 구실이 돼 치안 공작에 중대한 악영향을 끼쳤[다.]
각 지역에서 일본 군인의 강간 사건이 전면적으로 전파돼 실로 예상 밖의 심각한 반일 감정을 조성[했다.]
따라서 후방을 안정시키고 병사들에게 “위안”을 제공하기 위해 조선, 대만 등지의 식민지 여성들을 위안부로 동원하자는 구상이 일본 군부 내에서 나오게 됐다. 일본 군부는 군이 관여하는 위안소 설치를 성병 증가로 인한 병력 손실을 줄이는 방법으로도 여겼다.
그래서 중일전쟁 발발 직후부터 위안소가 급격히 늘어, 체계적으로 일본 점령지 곳곳에 설치됐다.(그러나 위안소 설치 이후에도 일본군의 강간은 위안소 바깥에서 끊임없이 이어졌다.)
위안부가 된 사람들은 여러 아시아 나라 출신이었고 포로로 잡힌 백인도 있었다. 그러나 조선인이 가장 많았다. 현재 한국 정부가 추정하는 조선인 위안부 피해자는 약 8만~20만 명이지만, 실제 20만 명보다 더 많았을 가능성이 높다.
조선인 위안부 피해자들은 대부분 가난한 농촌 가정의 자식들이었다. 이들은 일본 당국이 선정한 징모업자들한테 ‘여공으로 취직시켜 주겠다’, ‘돈을 벌게 해 주겠다’는 말을 듣고 집을 나섰다.
1930년대 식민지 조선의 농촌은 일본 제국주의의 수탈적 농업 정책으로 매우 피폐해진 상태였다. 이때 농촌의 가난한 어린 여성들에게 여공이 된다는 것은 기회로 여겨졌다. 위안부 징모업자들은 여성들의 이런 사정을 악용했던 것이다.
《제국의 위안부》 저자인 세종대 박유하 교수는 징모업자들의 구실에 주목하며, 이 업자들이 진짜 문제였지 위안부 모집에 직접 관여하지 않은 일본 정부한테는 법적 책임을 물을 수 없다고 강변한다. 그러나 당시는 국가가 인력과 자원을 철저히 통제하던 전시였다. 징모업자가 다수의 여성들을 데리고 국경을 넘는 것조차 일본 당국의 허가 없이는 불가능했다. 이런 점만 봐도 징모업자들은 일본 제국주의의 지원과 감독 속에 활동했음을 능히 알 수 있다. 그리고 박유하 교수의 주장과 달리, 피해자 다수는 동원 당시 미성년자들이었다(그림 참조). 또한, 일본 군인이나 경찰이 총부리를 겨누고 강제로 끌고 가거나 징모업자들이 인신매매로 끌고 간 피해 사례도 많다. “내지[일본 본토]에서는 위안부 모집에 위법행위가 발생하지 않도록 통제했지만, 식민지에서는 그러한 조치를 취하지 않았습니다. … 결국 식민지에서는 군이나 경찰이 선정한 업자의 경우에는 위법적인 수단[유괴·인신매매]으로 군’위안부’를 모집하는 것이 가능했던 것입니다.”
4 )
위안부 피해자들이 위안소에서 겪은 처참한 고통을 여기서 일일이 다 거론하기는 어렵다.(이것을 잘 알고 싶다면 위안부 피해자 증언집과 영상을 보길 바란다.위안부 피해자들 대부분 끝내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했다. 많은 여성들이 위안소의 폭력과 가혹한 대우를 견디지 못하고 중도에 사망하거나, 전쟁에 휘말려 죽었다. 또, 패전이 임박한 일본군에 의해 버려졌다. 퇴각하는 일본군은 위안부 피해자들의 안전을 책임질 의사가 없었다. 심지어 퇴각 과정에서 일본군은 곳곳에서 위안부들을 학살했다. 일본 제국주의 만행의 증거를 없애려는 의도였다.
일부 역사학자들은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중 살아 남은 비율을 25퍼센트 정도라고 추산한다. 이는 당시 전장에 투입된 병사, 노예 무역 시대에 아프리카에서 아메리카로 끌려 갔던 흑인 노예의 사망률보다도 높다.
간신히 살아서 돌아왔지만, 고통은 끝나지 않았다. 생환한 피해자들은 자신이 위안부였다는 사실이 알려질까 봐 두려워하며 숨죽여 살았다. 스스로 결혼을 하지 않는 경우가 많았고, 결혼을 하더라도 출산을 못하거나 성적 관계를 맺는 데 어려움을 겪었다. 해방 이후에도 친일파 인사들이 국가 권력과 경제력을 움켜 쥔 점도 피해자들이 오랫동안 침묵하게 했다. 이처럼 위안부 생활은 피해자들의 삶 전체를 망가뜨렸다.
1945년 이후 미국의 동아시아 정책
위안부 문제는 일본 제국주의에 의한 끔찍한 전쟁 범죄였다. 당연히 전쟁이 끝났으면, 즉시 위안부 피해를 낱낱이 밝히고 그 책임자들을 응당 처벌해야 했다. 그러나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일본의 제국주의적 과거 청산이 어려웠던 것은 근본적으로 1945년 이후 미국이 동아시아에 구축한 제국주의 질서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제2차세계대전이 통념처럼 ‘민주주의 대 파시즘’의 전쟁이었다면, 전쟁의 종결은 식민지와 전쟁으로 식민지 민중이 겪은 아픔을 드러내고 그 유산을 청산하는 계기가 됐어야 했다. 그러나 미군은 해방군으로서 온 게 아니라, 자신의 제국주의적 이해관계를 관철하려는 점령군으로서 동아시아에 들어왔다.
좌파 역사학자 가브리엘 콜코는 당시 미국의 전략은 세계 자본주의 체제를 안정시키고 미국 자본주의에 유리하게 재편하는 것이었다고 지적했다. 1930년대 대불황과 제2차세계대전으로 자본주의는 심각한 위기를 겪고 있었고, 이 때문에 세계 곳곳에서 반식민주의 반란과 민족 해방 혁명이 일어날 가능성이 매우 높았다.
특히, 중국에서 국민당과 공산당 간에 내전이 발발해, 마오쩌둥 군대가 승리할 기세였다. 패전국 일본에서도 1945년 말 38만 명이던 노동조합원이 한달 만에 100만 명이 더 느는 등 노조원 규모가 폭발적으로 증가했고, 무엇보다 노동 쟁의가 급격히 분출했다.
따라서 미국의 시급한 과제는 위기에 빠진 자본주의를 안정시키고 반제국주의적 혁명의 가능성을 제거하는 것이었다.
제2차세계대전의 특징은 승자가 점령 지역에 자신의 체제를 이식할 수 있었다는 점이다. 미국은 자국 자본의 이익과 시장 확보를 위해 자유시장 자본주의의 국제 질서를 확대하려 했고, 일본 같은 국가들이 다시는 1930년대의 배타적 경제 블록을 형성하지 못하게 막고, 이들을 미국이 주도하는 새 질서에 편입시키려 했다. 이런 점들이 미국의 동아시아 전략과 대일본 정책에 영향을 줬다. 우선, 미국은 일본 ‘천황’의 지위를 유지해 줬다. “소련이 주도하는 ‘전 세계 공산화’를 저지하는 데 천황제 유지가 긴요하다”고 본 것이다.
가장 중요한 전범인 ‘천황’이 제자리를 유지함으로써, 일본 구질서의 핵심이 보존될 수 있었다. 전쟁과 식민 지배의 책임이 있는 자들이 대부분 자신의 지위와 권력을 지키고 미국의 파트너가 됐다. 그런 인사 중에는 현 일본 총리 아베의 외할아버지인 기시 노부스케 같은 자도 있었다. 이 점은 나치가 패배한 유럽에서도 미국·영국의 개입과 스탈린의 협조로 구질서가 재건되고 그리스·프랑스·이탈리아 등지에서 파시스트 부역자들이 자신의 지위를 회복한 일과 맥락을 같이한다.
미국은 일본이 식민지 민중을 대상으로 한 범죄의 진실과 책임을 묻는 데 관심이 없었다. 미국은 소수 개인을 제외한 전범 대부분에게 관대한 처분을 내렸다. 미군 당국은 위안부에 관한 상세한 정보를 조사했지만, 이 문제는 일본 전쟁범죄를 다룬 도쿄재판의 대상이 되지 않았다.
냉전이 본격화하자 미국은 일본을 재무장시키고 동아시아에서 자국의 핵심 군사 동맹국으로 세우려 했다. 1950년 한국전쟁 발발 후 미국은 서둘러 일본과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을 맺고, 일본을 국제 무대에 복귀시켰다. 이 조약을 맺을 때 일본의 식민 지배를 받았던 한국, 중국 등은 아예 초대조차 받지 못했다. 당연히 위안부 문제 등은 언급도 없이 넘어갔다.
1960년대 한·일 관계 정상화 과정에도 미국은 개입했다. 미국은 자국 패권의 유지와 냉전 비용 절감을 위해 아시아에서 일본 중심의 집단안보 체제를 구축하고자 오랫동안 집요하게 한국과 일본에 국교 정상화를 촉구했다.
경제 성장을 위해 자금을 확보하고 세계시장에 뛰어들길 원했던 박정희 정권은 미국의 요구에 적극 호응했다. 박정희 정권은 1965년 ‘한일 청구권 협정’에서 식민 지배가 낳은 피해에 관한 청구권은 “완전히 그리고 최종적으로 해결”됐다며 일본에 합의해 줬다.
이후 일본은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과 1965년 한일청구권협정을 근거로 위안부는 물론이고 강제징용·핵피폭 피해자 등에 대한 배·보상 문제는 다 해결된 것이라고 우길 수 있었다. 미국의 개입 속에 한국 지배자들이 한국 자본주의의 이익을 위해 민중의 고통을 헐값에 팔아넘긴 것이다.
이처럼 1945년 이래 미국은 일본을 미국이 주도하는 동아시아 동맹 체제의 중심에 두는 것을 패권 전략의 핵심으로 삼았다. 이 덕분에 면죄부를 받은 일본 지배자들은 과거사 문제 해결을 외면했다. 경제와 안보 문제에서 미국·일본과 얽히고설키게 된 한국 지배자들도 이 문제에서 대다수 한국인의 바람을 계속 외면했다.
그러나 이는 미국 제국주의에 부메랑이 돼 돌아오기도 했다. 과거 일본의 침략과 식민지 경험이 있는 아시아 민중의 반발을 샀기 때문이다. 미국이 관장한 한·일 국교정상화 때문에 박정희 정권이 집권 후 처음으로 대중적 저항에 직면했던 것이 대표적 사례다.
미래를 위해 과거를 묻지 마세요?
수면 아래 잠겨 있던 위안부 문제가 공론화되고 피해자들이 직접 나서서 진상 규명과 일본의 책임 인정을 요구하게 된 것은 1987년 노동자·민중의 항쟁이 폭발한 뒤였다. 특히 1991년, 김학순 씨(작고)가 처음으로 피해자로서 공개 증언에 나섰다. 이를 계기로 1992년 처음으로 일본 국가가 위안부 모집·관리에 관여했음을 증명하는 일본 정부 문서가 폭로됐다.
그러나 일본은 국가의 법적 책임은 한사코 부인했다. 범죄 가해자들과 그 후예들이 일본 지배계급의 핵심에 자리잡고 있었고, 이 자들이 1990년대 일본의 재무장을 주도했다. 과거 제국주의 전쟁과 그 과정에서 벌어진 범죄를 인정하고 책임을 진다는 것은 군사대국화로 나아가려는 그들에게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일본의 군사대국화를 후원하는 미국이 과거사 문제를 온전히 푸는 데 도움을 줄 리 만무했다. “미국은 한일 과거사 문제 해결을 위한 중개자가 아니라 책임의 또 한 축을 이루고 있는 당사자”였다.
한국 정부의 태도도 문제였다. 역대 한국 정부는 일본과의 경제·안보 관계를 ‘위안부’ 문제 해결보다 더 중시했다. 그래서 한사코 한·일 간의 “미래지향적 관계”가 “과거”보다 더 중요하다는 견해를 고수했다. 그러다가 일본 우익이 망동을 부리거나 국내 여론이 악화하면 한국 정부는 뭔가 하는 듯한 제스처만 취하는 행태가 반복됐다.
1991년 노태우 정부는 이런 견해를 밝혔다. “1965년 한·일 청구권협정 체결로 양국 정부 간에 국제법상 권리·의무는 일단락된 사항이므로 정부 차원에서는 대일 보상 제기가 불가하[다.]” 이처럼 한국 정부가 피해자들의 개인 청구권을 일본에 직접 제기할 수 없다는 입장은 이후 정부들에서도 유지됐다. 그래서 2004년 당시 대통령 노무현도 일본 총리 고이즈미를 만나 이렇게 말했다. “내 임기 동안에는 정부 차원에서 [위안부 문제를] 공식적인 의제나 쟁점으로 제안하지 않을 생각[이다.]” 이듬해 일본이 독도 문제로 도발해 오자, 노무현은 다시 태도를 바꿔 일본에 단호히 대응하겠다고 했다. 그러나 1965년 협정으로 위안부 문제가 해결된 건 아니라고 밝힌 것 외에 실질적 조처를 취한 건 없었다.
이명박 정부도 처음에는 이전 정부들의 기존 입장을 고수했다. 그런데 2011년 헌재가 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해 정부가 외교적 노력을 하지 않는 것은 위헌이라고 판결했다. 설상가상으로 이듬해 이명박 정부는 미국의 촉구 속에 한일군사정보보호협정을 비밀리에 추진한 것이 폭로돼, 거센 비난 여론에 직면했다. 그런 가운데 한·일 간에 위안부 외교 회담이 시작됐다.
그러나 미국은 위안부 문제로 한·일 관계 개선이 지체되는 것에 큰 불만을 가졌다. 미국은 중국 견제를 위해 한·미·일 삼각 동맹을 구축하기를 바랐기 때문에, 위안부 문제에 적극 관여해 한·일 양 측에 협상 타결을 압박했다. 그 압력의 주된 방향은 한국을 향했다.
2015년 2월 당시 미국 국무부 차관 웬디 셔먼은 이렇게 말했다. “한국과 중국이 이른바 위안부 문제를 놓고 일본과 다투고 있[다.] … 물론 민족주의 감정이 여전히 이용될 수 있으며, 어느 정치 지도자든 과거의 적을 비난함으로써 값싼 박수를 받는 것은 어렵지 않다. 그러나 그런 도발은 진전이 아니라 마비를 초래한다.”
같은 해 4월 8일 당시 미국 국방장관 애슈턴 카터도 같은 얘기를 했다. “[한·일 간] 협력에 의한 잠재적 이익이 과거에 있었던 긴장이나 지금의 정치 상황보다 중요하다. … 우리 세 나라[한·미·일]는 미래로 눈을 돌려야 한다.”
그래서 2015년 12월 28일 한일 위안부 합의가 발표되자 미국이 가장 크게 환영했던 것이다.
한일 위안부 합의가 미국의 관장 하에 나온 약속이라는 점은 위안부 문제가 오늘날의 제국주의 문제와 깊이 관련돼 있음을 보여 준다. 그리고 한미동맹을 중시하는 한국 지배자들이 앞으로 위안부 합의를 스스로 파기할 가능성이 매우 낮다는 점도 보여 준다.
위안부 문제의 이런 측면을 인식하는 것은 문제 해결의 실마리를 푸는 데 중요하다. 지금까지 많은 사람들이 정부의 외교적 노력을 (심지어 미국의 중재를) 기대했으나, 세계 제국주의 체제 안에서 미국·일본과 여러 면에서 얽혀 있는 한국 국가가 이 문제를 온전히 해결할 동기를 발견하기는 매우 어렵다.
따라서 문제 해결의 실마리는 아래로부터 찾아야 한다. 특히, 한·미·일 지배자들이 가리키는 “미래”를 거부하고 제국주의와 자본주의에 맞서 저항하는 것이 과거사 문제를 해결하고 완전히 다른 미래를 건설하는 데 가장 중요할 것이다.
MARX21
주
- ‘위안부’는 사실 부적절한 용어다. 여기서 ‘위안’은 일본군의 전쟁 수행을 돕고자 일본 군인들에게 위안을 제공함을 의미하기에, 당시의 일본군 입장이 반영된 용어다. 그래서 ‘일본군 성노예’로 고쳐 불러야 한다는 견해가 많지만, 피해자들이 이 말을 좋아하지 않고 대중에게 익숙하지도 않다. 이 글에서는 불가피하게 ‘위안부 문제’, ‘위안부 피해자’라고 표기한다. ↩
- 김영익 2016, ‘한일 ‘위안부’ 합의는 미국의 아시아 중시 정책과 관계 있다’, 〈노동자 연대〉 164호. ↩
- 요시아키 2013, pp55-56. ↩
- 이지원, 김영익 2017, ‘‘위안부’ 문제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는 책과 영상’, 〈노동자 여대〉 233호. ↩
- 다우어 2009. ↩
- 하먼 2004, pp680-686. ↩
- 윤명숙 2015. ↩
- 윤명숙 2015 참조. ↩
참고 문헌
다우어, 존 2009, 《패배를 껴안고》, 민음사.
요시아키, 요시미 2013, 《일본군’위안부’ 그 역사의 진실》, 역사공간.
윤명숙 2015, 《조선인 군위안부와 일본군 위안소 제도》, 이학사.
하먼, 크리스 2004, 《민중의 세계사》, 책갈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