쟁점: 현재의 이슈들
‘촛불혁명’론과 자본주의적 민주주의 그리고 사회주의적 민주주의
많은 이들은 2016~17년 박근혜 정권 퇴진 운동(이하 퇴진운동)을 ‘명예혁명’, ‘촛불혁명’, ‘촛불항쟁’ 등으로 불렀다. 문재인은 퇴진운동 1주년을 앞두고 자신의 정부가 “촛불혁명으로 태어난 정부”라고 했다. 이제 보수언론조차 퇴진운동을 ‘촛불혁명’이라고 부른다.
내년에 발행하는 역사 교과서도 퇴진운동을 ‘촛불혁명’으로 지칭한다. 민주노총을 비롯해 진보·시민·사회단체들도 퇴진운동을 ‘촛불혁명’으로 부르기로 통일하는 듯하다. 그러나 필자는 퇴진운동을 ‘촛불혁명’으로 부르는 것에 문제 의식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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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주의적 민주주의퇴진운동은 1987년 6월 항쟁 이래 처음으로 진보·좌파 운동 진영 전체가 동의한 ‘정권 퇴진’ 운동이었다. 그 과정에서 최고 권력자인 박근혜와 정권의 주요 실세들이 구속됐다. 이를 보고 퇴진운동을 이승만을 몰아낸 1960년 4·19혁명과 비슷하게 보거나 모종의 ‘혁명’이라 주장하는 듯하다.
우선 민주당과 〈한겨레〉류의 자유주의 언론이 퇴진운동을 “명예혁명”이라고 부른다. 1688년 영국에서 일어나 유혈사태 없이 왕을 제거한 명예혁명처럼 비폭력과 법치주의에 기반하고 국회와 헌재를 이용해 박근혜를 합법적으로 제거했다는 것이다. 게다가 조기 대선을 통해 정권 교체와 체제 안정을 되찾았다는 의미에서 “명예혁명”이라는 것이다. 최장집 교수는 “탄핵을 이끌어 낼 수 있었던 촛불 시위는 명예혁명”이고 “구질서의 치명적 약화 내지 해체”를 이뤄 “민주주의의 가치와 원리에 부응하는 정치 질서를 창출”했다고 한다.
3 그래서 퇴진운동을 군부 독재를 무너뜨린 ‘정치혁명’으로 묘사하는 것이다.
한편, 다수의 진보적 교수들과 개혁주의자들은 퇴진운동을 ‘촛불혁명’으로 지칭해 왔다. 구체적 이유는 각양각색일지라도 정치적 근거는 동일하다. 그들은 박근혜 정권가 독재 정권(유신체제)의 부활이나 전前자본주의적 체제였다고 본다. 최순실 등 ‘비선 실세’를 러시아의 전제 군주 차르 하의 라스푸틴으로 묘사하고, 박근혜 정권이 “블랙리스트부터 재벌과의 유착, 공작정치, 공권력의 사유화 등이 보여 주듯이 철저하게 박정희의 유신적 통치에 기반해 있다. 따라서 박정희 체제”였고 본다.정성진 교수는 박근혜의 퇴진을 “비정상적인 것의 정상화”, “이른바 정상화된 자본주의”로의 복귀로 보며 퇴진운동을 자본주의적 민주주의 혁명으로 지칭했다. 정 교수는 퇴진운동을 1917년 러시아에서 벌어진 2월 혁명과 동일시했다. “이른바 ‘부르주아 민주주의 혁명’(2월 혁명)의 ‘사회주의 혁명’(10월 혁명)으로 ‘성장전환’ 시나리오가 21세기 한국에서 재현될 수도 있[었다.]”
이렇듯 ‘촛불혁명’이라는 규정에는 박근혜 정권이 독재 정부(이거나 미완의 자본주의 국가체제)라는 전제가 깔려 있다. 그러나 박근혜 정부가 경제·안보 위기 속에서 민주적 권리들을 공격했고 사악하고 매우 우파적이었지만 그 국가체제가 독재이거나 자본주의 이전 사회의 국가체제였던 것은 아니다.
핵심 지배층의 통치 스타일(방식)과 통치 체제를 구별해서 봐야 한다. 한국 국가의 통치 체제는 박근혜 때도 자본주의적 민주주의였다. 유신 때처럼 국가의 통제를 받는 노동조합만 허용하는 일은 가능하지도 않았거니와, 지배계급의 처지에서 봐도 그것은 바람직하지 않았다.
지배자들은 그람시가 말한 ‘동의에 의한 지배’의 장점과 ‘민주주의’라는 가면을 통해 얻는 지배의 정당성획득이 갖는 장점을 잘 안다. 물론 지배자들은 경제적 긴박함과 정치적 공포를 느끼고 이를 해결하기 위해서라면 자본주의적 민주주의를 내팽개칠 수 있다. 독일에서 바이마르 공화국이 히틀러의 파시즘으로 바뀌는 것은 순식간이었고, 지배계급이 그 길을 열었다.
그러나 박근혜 정부는 전교조와 공무원노조를 인정하지 않고 통합진보당을 해산했지만 노동조합과 노동자 정치단체 대다수를 불법화하거나, 파업과 시위를 일체 금지하거나, 선거권을 박탈하거나, 의회를 해산하는 일은 하지 않았다. 박근혜와 군·공안검찰 출신자들을 비롯한 핵심 지배층의 통치 스타일은 권위주의적이어서 걸핏하면 마녀사냥과 색깔 논쟁을 벌였지만 말이다. 무엇보다 한국의 지배자들이 군부 독재로의 회기를 고려할 정도로 통치 위기를 느끼고 있지는 않았다.
요컨대, 마르크스주의의 관점으로 볼 때 자본주의적 민주주의는 잠재적 반체제 세력인 노동계급의 조직과 활동을 보장하는 것이다. 노동조합 같은 일상 조직, 정의당과 민중당 같은 노동자 정당, 노동자연대 같은 노동운동 내 혁명적 좌파의 활동을 보장하는 것이 자본주의적 민주주의의 실내용이다. 또한, 자본주의적 민주주의는 지배자들이 노동계 지도자들을 끌어들여 활용하는 사회적 합의주의를 주된 특징으로 한다.
트로츠키는 부르주아 민주주의의 사회적 내용이 “프롤레타리아 민주주의”라고 했다. 무슨 말인고 하니, 부르주아 민주주의 구조 안에서 성장해 존속할 수 있도록 자본가 계급이 허용한 노동계급 대중 조직들이 바로 부르주아 민주주의의 사회적 내용이라는 것이다. … 여기에는 특정 조건들이 포함된다. 첫째, 정치와 경제의 분리다. 경제투쟁은 노동조합이 책임지고 선거에서 경합하는 것은 개혁주의 정당이 책임지는 식이다. 둘째, 노동조합 관료의 존재다. 부르주아 민주주의에서 노동계급의 통합은 노조 관료의 중재 구실에 아슬아슬하게 의존한다.
박근혜 정부도 이런 사회적 합의주의(노조 관료의 중재 구실)를 완전히 무시하지 않았다. 가령 2015년 공무원연금 개악 당시 정부는 노조 지도자들과의 합의를 이끌어 내려 공을 들였다. 또, 2015년 민중총궐기 집회에 소요죄를 적용하겠다는 둥 온갖 협박을 하고 한상균 민주노총 위원장을 구속했지만, 민주노총이 주도하는 집회는 그 뒤에도 광화문광장이나 시청광장에서 개최될 수 있었다. 해산당한 통합진보당의 일부 세력이 민중연합당을 창당해 활동할 수 있었다. 이런 일은 유신체제 하에서 가능하지 않았다.
반우파 투쟁만?
어떤 운동(투쟁)을 ‘혁명’으로 규정하려면 정권 교체를 넘어서 정치·경제·사회 전반이 근본적으로 변해야 한다. 러시아 혁명처럼 사회 구조의 근본적 변화(사회혁명)를 수반하거나, 적어도 4·19혁명처럼 기존 정치체제의 근본적 변화(정치혁명)가 있어야 한다. 그러나 퇴진운동은 사회혁명은 물론 정치혁명에도 못 미쳤다.
박근혜 퇴진 운동은 거대한 대중운동이었고 민주주의 투쟁이었다. 그런데 역설이게도 한국이 자본주의적 민주주의 체제였기에 합법적 절차 속에 박근혜를 제거할 수 있었다.
‘촛불혁명’이라는 규정이 갖는 무엇보다 큰 약점은 무척 온건한 세력들의 정치적 입장에 힘을 실어 준다는 것이다. 우선, ‘촛불혁명’ 이후 탄생한 문재인 정부에 대한 커다란 환상(기대)을 불어넣는 효과를 낸다. 박근혜 정부와 문재인 정부가 질적으로 다른 것처럼 말이다. 일부 급진좌파도 박근혜 정부 시기를 ‘비정상적’ 자본주의로 보고 자본주의적 민주주의 혁명이 성공해 정권 교체를 이뤘다고 볼 정도다. 그러나 박근혜가 제거된 것 외에 광장이 요구한 수많은 적폐의 청산은 문재인 집권 1년이 지나도 해결되지 않았다.
문재인과 민주당은 퇴진운동을 ‘촛불혁명’으로 부르면서 홍준표를 비롯한 자유한국당에 맞선 ‘반우파’ 투쟁만 강조한다. 또, ‘촛불혁명’의 완성은 여소야대 국회를 바꾸는 것이라고 한다.
이는 현재 온건 개혁파 지도자들이 자유한국당 등 우파만 비판하며 문재인 정부와 민주당을 지지·엄호하는 것과 일맥상통한다. 그들은 적폐 청산의 걸림돌로 우파만을 지목한다. 김윤태 교수는 “혁명을 주도한 대중의 직접행동은 대통령의 탄핵과 정부의 교체를 이룩했지만, 한국 사회의 실질적 변화를 이룩한 것은 아니다” 하며, 혁명의 완성은 “의회의 입법과 예산을 통해 이루어”진다고 주장한다. “국회의 도움이 없다면 청와대의 정책은 그저 ‘발표’에 그칠 수밖에 없다”며 “의회의 권력을 강화하는 개헌이 필요하다”고 강조한다. 결론적으로 “범국민적 선거법 개정 운동”으로 여소야대 국회를 변화시키는 “장기적 혁명”이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이는 ‘촛불 정부’인 문재인 정부와의 정치적 연합을 추구하는 데로 연결되기 쉽다. 참여연대 이태호 정책위원장은 “정치 구조, 권력 구조 개혁 분야에서 연합을 만들어 이 분야에서의 정치적 연합이 가능하도록 압박하는 정치개혁 시민합의 운동을 시도”하자고 제안한다. 게다가 남북 화해 무드 속에 지방선거를 앞둔 지금 ‘촛불 혁명 완성’을 제기하며 계급을 가로지르는 동맹 추구(민중주의)가 강화되고 있다. “민중주의는 국민 가운데 한줌밖에 안 되는 반민주적·비애국적 무리를 제외한 나머지가 계급을 초월하여 단결해, 그 반동적 극소수를 제압하자는 사상이자 운동이다. ‘반동적 극소수’로 지목되는 집단은 독재 잔당과 ‘공안세력’ 냉전주의자, 재벌 등이다. 민중주의자가 즐겨 내놓는 구호는 ‘각계각층이 단결’ ‘국민과 함께 하는’ 등이다.”
민중주의자들은 홍준표 등 우파들을 제외한 모든 세력의 단결을 강조하며 노동계급의 독립적 요구와 투쟁을 어느 한계 이하로 자제하라고 촉구한다. 최근 민주노총의 제안으로 ‘민중총궐기투쟁본부’가 ‘민중공동행동’으로 조직적 전환을 하는 대표자회의 때 자민통계 대표자(조국통일범민주연합 이규재 의장)가 “왜 노동자들의 요구가 전면에 강조돼야 하는가? 지금은 민족적 단결 요구가 최우선 과제이자 전면에 있어야 한다”며 계급적 이익을 앞세우지 말라고 주문했다. 사실상 남북대화의 당사자인 문재인 정부를 지지하고 친미 우파 세력만 고립시키자는 전략을 주문한 것이다.
운동의 성격을 정확히 규정하는 것은 그 운동의 장점을 제대로 이해하며 그 잠재력을 실현할 방향을 내놓기 위함이다. 퇴진운동을 혁명이라고 규정하는 것은 부지불식간에 그 뒤의 정권 교체가 뭔가 대단한 성취인 것처럼 과장하거나 ‘촛불혁명’에 대한 반혁명을 막기 위한 ‘반우파’ 투쟁만 강조하며 민중주의로 미끌어질 수 있다.
점진적 변화를 통한 혁명?
한편, 국가체제로서 자본주의적 민주주의와 민주적 권리를 구별해야 한다. 시민사회론자들과 자유주의 학자들은 자본주의적 민주주의와 민주적 권리를 동일시한다. 그래서 우파 정부가 집권해 민주적 권리를 일부 침해하면 자본주의적 민주주의가 무너질 것처럼 본다. 이와 반대로 혁명적 마르크스주의자는 자본주의적 민주주의를 지지하지 않지만 민주적 권리는 지지한다. 민주적 권리들의 보장은 노동계급 운동이 제약을 더 적게 받으며 활동하는 데 이롭기 때문이다.
또, 민주적 권리들의 실상을 드러내면 국민주권 이념과 자본가 계급의 국가라는 현실 사이의 모순을 부각시킬 수 있다. 국민주권 이념은 헌법 제1조에 명시돼 있다.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 그러나 국민은 그저 선거 때만 주권자이고 선거가 끝나면 자신이 뽑은 대통령이나 국회의원을 감시·통제할 수단이 사실상 없다.
그러므로 “마르크스주의자가 부르주아 민주주의를 위해(서구 수준으로 진보케 하고자) 애써야 하는 것은 아니다.” 그런데 개혁주의자들뿐 아니라 심지어 일부 급진좌파들도 근본적 사회 변혁에 앞서서 ‘민주 변혁의 완수’가 선행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이 전략을 정당화하는 이론은 각양각색이지만 결국 “개혁을 점진적으로 추구하면 국가 기구들의 성격이 변해 마침내 진보진영 쪽으로 넘어온다는 가정은 비슷하다.”
이 전략에 따르면, 국가 기구를 내부로부터 변모시키거나 국가 기구의 수장을 교체하는 데 주력하게 된다. 대중투쟁은 이 목적에 종속된다. 문제는 자본주의 국가가 점진적·평화적·합법적으로 변혁되거나 민주화할 수 있다는 것은 환상이라는 점이다.
자본주의 하에서는 가장 민주적인 정부조차도 사회의 부를 생산하는 주요 수단을 소유하거나 통제하지는 못한다. 그러한 부의 생산수단은 대부분 선출되지 않은 자본가들의 손에 남아 있으며 자본주의적 경쟁의 법칙에 따라 운영된다. 그런 까닭에 정부들은 대부분 자본가 계급의 집단적 이익을 침해하는 정책을 감히 시도하지 않는다. 설령 시도하는 정부가 있더라도, 자본가들은 투자 중단, 폐업, 자본 도피 등으로 해당 정부를 손쉽게 무릎 꿇릴 수 있다.
무엇보다 선출된 의회는 선출되지 않은 군부, 검찰, 경찰, 법원, 경제 부처 등과 나란히 공존한다. 이 국가 기관들은 온갖 사회·경제·이데올로기적 끈으로 자본가들과 연결돼 있다. 사실 국가 관료들의 이해관계는 자국의 대내외적 영향력을 확대하는 데 있는데, 이를 달성하기 위한 물질적 기초는 결정적으로는 자국 기업들의 경쟁력에 달려 있다. 그러므로 국가 관료들의 이해관계와 자본가들의 이해관계는 근본에서 일치한다. 이 국가 관료들은 정부 정책의 실행뿐 아니라 방향에도 영향을 미칠 수 있는 막강한 힘이 있다.
게다가 마르크스가 말했듯이, 한 사회의 “지배적인 사상은 지배계급의 사상”이다. 언론과 교육 시스템은 경제 성장 논리, 국가 안보 논리 등 지배계급에게 유리한 이데올로기를 끊임없이 대중에게 주입한다. 정치 무대에서도 ‘책임 있는’ 정치 세력이라면 그런 이데올로기를 당연히 수용해야 할 전제로 여긴다. 이런 모든 것들 때문에 자본주의적 민주주의는 자본가 계급의 지배를 은폐하는 장막 구실을 한다. 최악의 경우 군부가 나서서 선출된 정부를 제거할 수도 있다. 또 군부가 나서지 않더라도 가장 민주적인 형태의 자본주의 국가조차 심각한 지정학적·경제적 위기 때 혹심한 노동탄압의 본색을 종종 드러낸다. “1986년 오스트레일리아 봅 호크 노동당 정부는 건설노조연맹을 불법화했다. 호주판 노사정 합의인 “물가-소득 협정”의 한계를 넘는 임금 인상을 요구하며 투쟁한다는 이유로 말이다. 또한 1990년 뉴질랜드에 들어선 국민당 정부는 때때로 노조 가입 사실만으로 노동자를 해고했다. 오스트레일리아와 뉴질랜드는 보통선거권을 도입한 최초의 두 나라다.”
그래서 마르크스는 현실에서 자본주의적 민주주의는 언제나 “부르주아지의 독재”라고 했다.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자본주의적 민주주의를 지지하며 협력하기 위해 애쓸 이유가 없다. 그러나 앞서 얘기했듯이 민주적 권리를 위해서는 적극 투쟁한다.
사회주의적 민주주의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자본주의적 민주주의의 한계를 뛰어넘는 민주주의를 바란다. 바로 사회주의적 민주주의이다. 실제 자본주의적 민주주의의 한계를 뛰어넘은 역사가 있다. 노동자 권력이었던 1871년 파리 코뮌과 1917년 러시아 소비에트 등이 그것이다.
파리와 러시아의 대중은 노동자 평의회라는 아래로부터 건설한 대안 권력 기구를 통해 잠깐 동안 사회를 직접 통제했다. 노동자 평의회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허락되는 그 어떤 민주주의보다 앞서가는 민주주의를 구현했다. 풀뿌리 대중의 참여, 주거 지역과 직장에서 이뤄지는 탈중앙화된 의사결정, 상급 단위 대의원들이 유권자에 의해 언제든 소환될 수 있고 노동자 평균 임금만 받는 것 등이 노동자 평의회의 특징이었다. 이것이 파리와 러시아에 나타났던 사회주의적 민주주의의 모습이었다.
사실 노동자 평의회가 만들어지는 계기 가운데 하나는 공공 서비스가 ‘정상 운영’되지 않는 대중 파업의 시기에 노동자들이 정부의 기능을 대신 떠맡아야 할 필요성 때문이다. 노동자 평의회가 전국으로 확산되는 상황이라면 노동자 평의회는 그 나라 국가를 통째로 대체할 조직적 역량과 경제 권력을 쥐고 있을 것이다. 그 과정에서 대중이 보인 자의식은 대단했다. 1917년 10월 러시아 혁명 때, 문맹률이 60퍼센트나 되는 나라에서 대중의 독서 열의가 솟구쳐 신문 등 인쇄물이 쏟아지고, 사람들이 골목 모퉁이마다 모여 돌아가며 정치 연설을 했다. 노동자들은 기업주가 도망가거나 폐쇄한 생산 시설을 접수해 생산을 조직했다. 이처럼 자본주의의 틀을 뛰어넘어 노동자·민중이 스스로 정치·경제 권력을 장악할 때 진정한 민주주의가 가능해질 것이다.
이런 사례는 그 뒤로도 거듭 반복됐다. 1918년 독일혁명 과정에서 등장한 ‘레테’, 1919~1920년 이탈리아의 ‘붉은 2년’ 시기에 등장한 ‘공장내부위원회’, 1936년 스페인 내전 때 등장한 노동자 자치기구, 1956년 헝가리 혁명 때 등장한 평의회, 1974년 포르투갈 혁명 때 등장한 노동자위원회, 1978년 이란 혁명 때 등장한 ‘쇼라’, 1980년 폴란드 연대노조 운동에서 나타난 자치 권력 등이 대표적 사례다. 이 정도는 아니지만 한국에서 1987년 7~9월 노동자 대투쟁도 진정한 노동자 민주주의가 어디에서 나오는지 알 수 있는 역사적 경험이었다.
따라서 마르크스주의자들은 노동계급과 피억압 민중의 투쟁에 개입하고 그것을 더욱 발전시켜 그 투쟁이 자본주의 국가와 체제를 근본적으로 변혁하는 것으로 발전해 사회주의적 민주주의로 나아갈 수 있도록 애써야 한다.
MARX21
주
참고 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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