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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 마르크스주의 관점으로 보는 한국 현대사

한국전쟁 ― 제국주의가 한반도에서 충돌하다

MARX21

  1. 앨리슨 2018, p238.
  2. 앨리슨 2018, p236.
  3. 커밍스 2017, p10.
  4. 한국전쟁연구회 2000.
  5. 커밍스 2017.
  6. 이 점에서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 2》에서 서중석 교수가 한국전쟁에 대해 북한의 책임을 물어야 한다며 미국의 참전을 인정하고 중시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전쟁을 누가 시작했는가에 초점을 맞췄을 때 나타날 수 있는 문제를 보여 준다.
    물론 서중석 교수의 주장에는 이승만과 미군이 휴전선에서 북한군의 공격을 제대로 막아 냈다면 후퇴와 전진을 반복하면서 벌어진 수많은 학살을 막을 수 있었지 않은가 하는 생각이 깔려 있다. 그러나 북한의 초기 공격을 성공적으로 막아 냈더라도 미군과 한국군이 38선 이북으로 진격하지 않았으리라는 보장은 없었다. 왜냐하면 이승만은 ‘북진 통일’을 부르짖으며 전쟁 발발 이전부터 38선에서 이미 여러 차례 선제 공격을 하고 있는 상황이었고 미국도 소련에 대응해 이전보다 강경한 자세를 보이고 있었기 때문이다.
  7. 커밍스, 헐리데이 1989, p76.
  8. 커밍스 1989.
  9. 지면 관계상 이 글에서 자세히 다룰 수 없는 북한 체제의 형성에 대한 마르크스주의적 분석으로는 김하영 2002를 참고하기 바란다.
  10. 커밍스 2017.
  11. 박명림 1996.
  12. 캘리니코스 2011.
  13. 마셜플랜은 스탈린이 아직 장악하지 못한 지역을 강화하기 위한 미국의 공세의 일환이었다. 마셜플랜 발표 후 몇 주 만에 프랑스와 이탈리아에서는 우파와 중도파 정당들이 공산당을 정부에서 쫓아냈다(하먼 2004).
  14. 1950년 1월 12일 미국 국무장관 애치슨이 전미신문기자협회 연설에서 태평양에서 미국의 방위선으로 알류산열도, 일본 오키나와, 필리핀을 연결하는 선을 제시한 것을 말한다.
  15. 슈퇴버 2016, p64.
  16. 션즈화 2014, pp156-157.
  17. 가브리엘 콜코에 따르면 소련은 중국이 강력해지는 것은 자신의 이익과 일치하지 않는다고 보고 있었기 때문에 공산당에 의한 중국 혁명을 원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중국 정부가 허약한 정부로 계속 남아 있기를 원했다(콜코 1989).
  18. 션즈화 2014, p66.
  19. 션즈화 2014, p383. 한국전쟁이 발발해 중국은 소련에 창춘철도를 개방하지 않을 수 없었고 소련군이 뤼순기지에 계속 주둔할 것을 요청했다. 1950년 7월 11일 소련 정부의 요구에 따라 중국공산당 중앙위원회는 소련이 군사물자를 운송할 수 있도록 창춘철도와 동북지역의 영공을 소련에 전면 개방할 것을 결정했다.
  20. 정병준 2006. 남한군의 공격형 편제와 공격성은 전쟁 전 수차례의 선제 공격으로 나타났다.
  21. 1950년 7월 20일경 북한군은 남한 정부의 임시 수도였던 대전 점령을 목전에 두고 있었다. 그러나 같은 시각 북한군 최고사령관 김일성은 전선의 상황을 ‘파국적 상황’이라고 묘사하며 전선 사령관 김책과 전선 참모장 강건을 강하게 질책했다.
  22. 박명림 2002, p99.
  23. 스티븐 케이시 외 2017, p87.
  24. 박명림 2002, p105.
  25. 김태우 2013, p166.
  26. 박명림 2002, p489.
  27. 김태우 2013.
  28. 커밍스 2001, p405.
  29. 커밍스 2017, p224.
  30. 이원보 2005, p142.
  31. 이런 분위기를 알았기에 민주당은 1956년 선거에서 “도시민의 높고 저항성 있는 지성과 판단력이야말로 정확한 국민의 의사를 표시하는 척도가 될 것”이라는 성명을 발표했다.
  32. 역사문제연구소 1998, p121.
  33. 박명림 2002.
  34. 강준만 2004a, p292.
  35. 흥남철수작전에서 미군이 사람들을 보호하기 위해 모든 노력을 감수했다는 신화는 사실이 아니다. 사람들이 흥남부두로 몰려든 것에는 미군의 원폭 투하 소문이 큰 영향을 미쳤다. 미군은 적에게 아무것도 남겨 주지 않으려고 항구에 대규모 함포 사격과 공중 폭격을 가해 그 일대를 잿더미로 만들었다. 이 때문에 죽어 간 사람이 많았다(강준만 2004b, pp169-170).
  36. 1953년 휴전에 반대하기 위한 이승만의 ‘반공포로석방’으로 필자의 아버지가 남쪽에 남아 필자가 존재할 수 있었다고 해서 필자는 이승만의 ‘인류애’에 감사를 표하진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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