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 마르크스주의 관점으로 보는 한국 현대사
한국전쟁 ― 제국주의가 한반도에서 충돌하다
얼마 전 열린 남북 정상회담으로 한반도의 진정한 평화를 바라는 사람들의 기대감은 높아 졌을 것이다. 분단과 전쟁을 경험했고 얼마 전까지도 전쟁 위기를 느껴야 했던 사람들이 이런 대화 분위기를 환영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남북 두 정상의 의지만으로 한반도에 평화가 올 수 있는 것은 아니다. 한반도 긴장 고조의 진정한 원인은 한반도를 둘러싼 제국주의 사이의 경쟁이기 때문이다. 즉, 한반도는 더 거대한 장기판의 일부에 지나지 않는 것이 현실이다.
2017년 취임 이후 트럼프가 북한을 계속 압박하면서 한반도의 긴장을 높인 배경에는 미국 제국주의와 중국 제국주의의 경쟁이 자리하고 있다.
경제적으로 성장한 중국은 그에 걸맞은 영향력 확보를 원한다. 시진핑은 2014년 유라시아 지도자 모임에서 “결국, 아시아의 일을 다루고, 아시아의 문제를 해결하고, 아시아의 안보를 지키는 일을 맡아야 할 사람들은 아시아 사람들”이라고 말했다. 아시아에서 그동안 미국이 해 왔던 구실을 중국이 대체해야 한다는 것이다. 예컨대 중국은 남중국해에서 자신의 영향력을 확대하기 위해 인공섬과 군사기지를 세우고 전투기의 순찰 비행을 실시하고 있다. 이에 대응해 미국은 2013년 필리핀에게 중국과의 분쟁 문제를 헤이그의 상설중재재판소로 가져가도록 권했고, 중국이 필리핀에 유리하게 나온 판결을 묵살하자 일제히 중국을 비난하는 목소리를 내도록 주도했다. 또, 이 일대에서 대대적인 주목을 끌면서 ‘운항의 자유’ 작전을 실행했다.
미국과 중국이 경쟁하는 또 다른 무대는 한반도다. 미국이 한국에 배치한 사드에 대응해서 중국은 ‘러시아제 사드’로 불리는 방공 미사일 시스템을 배치할 예정이다. 이처럼 미국과 중국 사이의 긴장이 점증하는 과정에서 일어날 수 있는 “전략적 착오가 비극적 결과로 이어질 수도 있[다.]”
미국과 중국은 실제 전쟁을 치른 경험이 있다. 바로 한국전쟁에서다. 한국전쟁 기간 중 상당 부분의 전투는 초기 몇 개월을 제외하면 미군과 중국군 사이에서 벌어졌다. 당시 중국은 소련 제국주의 진영의 일원으로 전쟁에 참가했다.
한국전쟁의 주된 배경은 미국과 소련 사이의 경쟁 격화였다. 제2차세계대전 이후 두 제국주의 국가 사이의 경쟁이 격화하는 맥락에서 한국전쟁이 벌어졌다.
확전 논란이 있긴 했지만 한국전쟁은 한반도라는 제한된 공간에서 벌어졌다. 그래서 일부에서는 한국전쟁을 ‘제한전쟁’이라 부르기도 한다.
그러나 만약 한반도를 무대로 다시 전쟁이 벌어진다면 그때처럼 지역적으로 제한된 전쟁으로 끝나지 않을 가능성이 크다. 그때보다 훨씬 더 큰 파괴가 있을 것이다.
다시 전쟁이 일어난다면 북한만이 아니라 남한과 일본도, 아마도 미국 본토까지도 전쟁의 파고에 휩싸일 것이[다.] 한국과 다른 모든 나라가 관련되어 있다. 과학자들이 증명한 바에 따르면, 소규모의 국지적 핵전쟁만으로도 여러 해 동안의 ‘핵겨울’이 초래되어 세계 도처에서 농작물의 작황 실패가 이어지고 결과적으로 수백만 명의 사람들이 굶주림에 처하게 될 것이다.
한 철학자는 “전쟁의 끝을 본 사람들은 죽은 자들뿐이다” 하고 우울한 전망을 제시했다. 그러나 이 글은 전쟁을 막기 위한 진정한 대안을 찾으려는 노력의 일환이다. 이 대안을 찾기 위해 한국전쟁을 돌아보는 것은 의미가 있다.
전쟁의 기원
한국전쟁과 관련한 쟁점이 많지만 단연 핵심은 전쟁의 기원과 성격에 관한 것이다. 그리고 이 논의는 시대에 따라 변해 왔다. 다소 도식적일 수도 있지만 그 주장들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먼저, 냉전이 한창이던 1960년대 이전부터 주류적인 관점은 ‘전통주의’라 불린 주장이다. 이 관점은 한국전쟁을 팽창주의와 공격적 본성을 가진 소련의 스탈린이 김일성을 하수인으로 해서 벌인 전쟁으로 본다. 따라서 전쟁의 책임은 주로 스탈린에게 돌렸다.
반면, 전통주의에 이견을 제시하면서 등장해서 ‘수정주의’라 불린 주장은 미국의 제국주의 정책이 한국전쟁의 주요 원인이었다고 본다. 이 관점은 비판의 초점을 주로 미국에 맞췄다. 수정주의는 한국전쟁이 미국에 의해 유도됐다는 데 무게를 실었다.
4 전쟁 책임을 주로 김일성에게 묻고 북한의 ‘군사적 급진주의’나 권력 투쟁 문제에 주목했다.
이후에 등장한 경향은 전쟁의 외부적 요인보다 내부적 요인에 초점을 맞췄다. ‘후기 전통주의’라 불린 경향은 김일성이 미국의 식민지로 전락한 남한을 해방시키기 위해 소련의 스탈린과 중국의 마오쩌둥을 설득해 동의와 지원을 이끌어 냈다는 데 주목한다.5 1945년 해방과 함께 미국이 남쪽을 점령해서 친일·지주 세력을 지지하고 그에 반대하는 세력을 탄압하면서 많은 충돌과 학살이 벌어졌고, 식민 통치 시기에 형성된 모순이 증폭됐다는 것이다.
반면 ‘후기 수정주의’는 남한의 내적 모순에 주목했다. 이 관점의 대표적 학자인 브루스 커밍스에 따르면, 한국전쟁의 기원은 일본의 조선 식민 통치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 시기에 형성된 계급 간 갈등과 함께 항일 세력과 친일 세력 사이의 갈등이 해방 이후로 이어졌다는 것이다.커밍스의 주장은 우파의 관점을 반박하는 데서 유용하다. 우파가 한국전쟁을 ‘6·25전쟁’으로 부르는 것은 분명 이데올로기적 이유가 있다. 자신들은 피해자이고, 먼저 공격을 개시한 북한을 응징하는 것은 정당했다는 것이다. 1990년대 초 소련 비밀 외교문서가 일부 공개되면서 김일성이 스탈린의 승인 하에 전쟁을 준비했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우파는 이것을 자신들이 옳다는 근거로 삼았지만, 커밍스에 대한 반박은 되지 못했다. 커밍스에게 누가 먼저 방아쇠를 당겼는지는 쟁점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데올로기적인 다이너마이트를 내포한 ‘누가 한국전을 시작했나?’라는 질문은 확실히 잘못된 것이다. 어떤 미국인도 미국 내전에서 남부군이 썸터 요새에 먼저 총을 쐈다는 사실에 더 이상 관심을 갖지 않는다. 그들은 아직까지도 노예제도와 인종차별정책에 대해서만 관심을 갖고 있을 뿐이다. 아무도 베트남전을 누가 시작했느냐고 묻지 않는다.
군사 전략가 클라우제비츠는 “전쟁은 다른 수단에 의한 정치의 연속”이라고 말했다. 레닌은 이 문장을 인용해 제1차세계대전에서 ‘자국 방위’를 위한다며 참전에 찬성한 독일 사회민주당 지도자들을 비판한 바 있다. 사회민주당 지도자들은 전쟁이 발발하면 이전에 형성된 모든 정치적 관계들이 중지되고 완전히 새로운 상황이 등장한다고 전제했다. 단순히 공격자와 방어자가 있을 뿐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레닌은 전쟁 이전에 형성된 제국주의 국가들 사이의 경쟁, 제국주의가 다른 민족을 억압하는 상황, 지배계급의 노동계급 운동 공격 등 정치적 맥락을 봐야 한다고 주장했다.
커밍스는 이런 정치의 일면을 인식했다. 그의 주장은 한국전쟁이 ‘자유’와 ‘민주주의’를 지켜 낸 정의로운 전쟁이었다는 미국과 남한 지배자들의 주장에 대한 좋은 반박이다.
남한 국가는 진정한 독립과 해방을 원했던 대중의 열망을 짓밟고 미국의 후원 하에 수립됐다. 실제 해방 이후 한반도에서는 진정한 독립과 해방을 원하는 아래로부터의 열망이 분출하고 있었다. 노동자들의 공장자주관리운동이나 각 지역의 인민위원회들의 등장은 이것의 반영이었다. 미군 점령군 사령관 하지의 정치고문 메릴 베닝호프는 해방 후 조선의 상황을 이렇게 묘사했다. “남한은 불꽃이 닿기만 해도 즉시 폭발할 수 있는 화약통이라고 비유하는 것이 가장 적절할 것이다. 독립과 일본의 축출이 즉시 성취되지 못한 데 대한 큰 실망이 있다. 일본에 대한 한국인들의 증오는 믿을 수 없을 만큼 뿌리 깊다.”
미군은 ‘소련에서 밀려오는 영향 하의 조류와 국내적인 혁명의 조류를 막는 방파제를 구축’하려고 대중운동과 조직을 파괴하기 위해 온 힘을 기울였다. 그 결과, 1948년 2월부터 한국전쟁 이전까지 이미 10만 명 이상이 학살당했다. 제주 4·3항쟁에 대한 잔인한 진압은 그 한 사례이다.
이렇게 등장한 남쪽 국가는 진정한 해방과 독립을 원하는 대중의 열망에 적대적이었을 뿐 아니라 소련이 점령해 북쪽에 수립한 국가에도 적대적이었다. 그렇다고 커밍스가 가정하듯이 북한이 남한보다 더 진보적인 사회였던 것은 아니다. 남쪽을 미군이 점령한 것처럼 북쪽도 소련군이 점령하면서 아래로부터의 운동을 억누르고 통제하면서 자신의 이익에 부합하는 체제를 수립하는 방향으로 나갔기 때문이다.
북한을 점령한 소련군은 아래로부터 분출하는 운동을 억누르는 데서 미군과 같았다. 소련군의 첫 포고문은 일본 경찰이 치안을 유지하라는 것이었다. 인민위원회를 인정했지만, 자신들이 통제하는 것을 전제로 한 것이었다. 소련은 많은 쌀과 산업 시설을 약탈했고 신의주와 함흥에서 일어난 대중 저항을 폭력으로 진압했다.
스탈린과의 면담 후 북한에 들어 온 김일성은 소련군의 적극 협력을 받았다. 이렇게 소련군의 후원 속에 수립된 북한 국가는 남한 국가와 다를 바 없이 대중을 착취하고 억압했다. 이미 1946년 7월에 억압 기구인 보안대가 1만 5000명으로 늘었고, 노동자의 생산 통제가 아니라 지배 관료의 노동자 통제만이 있었다.
전쟁의 성격
10 스페인 내전은 파시스트에 맞선 노동자 혁명과 결합됐고, 미국 독립전쟁은 대중 반란과 함께 벌어져 봉건적 굴레를 깨뜨렸다. 하지만 한국전쟁은 ‘좌파 역량의 최저점에서 시작’됐고 11 대중 반란이나 혁명이 일어나지는 않았기 때문에 ‘인민의 전쟁’이라 볼 수는 없다.
커밍스가 한국전쟁을 스페인 내전이나 미국 독립전쟁과 유사한 성격의 전쟁이라고 얘기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한국전쟁을 미국과 소련 두 제국주의 국가 사이의 경쟁이란 맥락 속에서 보는 것이 중요하다. 한반도를 둘러싼 제국주의 간 경쟁을 보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한반도 긴장의 진정한 원인과 그것을 극복할 대안을 찾는 데 핵심이기 때문이다.
제2차세계대전 동안에 미국의 군사 전략가들은 서반구에서 미국의 군사적 우세를 유지하고, 유라시아 대륙에서 미국에 적대적인 강대국이나 열강의 동맹이 나타나지 않도록 억제한다는 목표를 확인한 바 있었다. 이를 위해 전 세계에 미국의 군사기지 네트워크를 구축하려는 세부 계획들도 세웠다. 미국 지배자들이 추구한 ‘자유주의 국제질서’를 가로막는 가장 중요한 장애물은 소련이었다. 그 이유는 소련의 직접적인 군사적 위협 때문이라기보다는 소련의 국가자본주의 체제가 제2차세계대전에서 살아 남았을 뿐 아니라 1944~45년에 중동부 유럽으로 확장되면서 전후 유라시아 대륙에서 최강대국으로 부상했고, 그 결과 경제적·지정학적 블록들이 서로 경쟁하는 전쟁 이전의 질서가 지속됐기 때문이다.
13 일본에서는 ‘역코스’라고 불린 정책을 추진했다. 일본의 미 군정청이 전쟁 전에 일본 경제를 지배하던 독과점을 해체한 초기 정책을 뒤집어, 민간은행을 중심으로 결집한 기업집단들의 발전을 촉진하고 국가관료들의 권력을 유지하는 정책을 추진한 것이다.
미국은 서유럽과 일본의 사회와 경제가 붕괴하면 소련이 정치적 팽창의 기회를 얻을 수 있다는 두려움 때문에 서유럽에서는 마셜플랜,제국주의 간 경쟁은 냉전이라는 양극 체제 형태로 이어졌다. 어떤 면에서 이 대결은 전보다 더 격렬했는데, 왜냐하면 양 진영이 서로 상대방을 단지 라이벌 강대국으로만 여기지 않고 이데올로기적 적수로도 여겼기 때문이다.
미국과 소련은 각자의 점령지에서 자신의 이익을 보장할 수 있는 체제를 만들기 위해 노력했고, 한반도에서 남과 북의 국가는 그렇게 탄생했다. 남과 북 사이 충돌의 근본 동력은 두 제국주의 국가 사이의 경쟁적 쟁투에 있었다.
이미 한국전쟁 이전 미국과 소련은 폴란드·이란 등지에서 영향력 확대를 위해 충돌했다. 특히 베를린 위기라고 불린 독일에서의 충돌 과정에서는 핵무기 동원도 심각하게 고려됐다.
전쟁의 결정
한국전쟁을 이해할 때 전쟁 결정과 관련된 음모들을 파고드는 접근법은 적절하지 않다. 전쟁이란 것이 원래 소수에 의해 비밀스럽게 결정되기 때문에 이것을 중심에 놓게 되면 음모의 바다에서 허우적거리게 된다.
이 문제를 피하는 방법은 제국주의론과 국가자본주의론 등 마르크스주의를 적용해 보는 것이다. 이것은 전쟁에 이르는 근본 동역학과 경쟁적 쟁투들의 본질을 파악할 수 있게 돕는다.
한국전쟁의 시작은 김일성의 요청을 스탈린이 승인하고 마오쩌둥이 동의한 것이라고 알려져 있다. 전쟁 결정의 시점은 1950년 1월로 알려져 있다. 1950년 이전에는 스탈린이 전쟁 개시에 동의하지 않았다.
1948년 북한 정부 수립 이후에 김일성은 ‘국토완정’을 내세우며 무력 통일 의지를 불태웠고 이승만도 북진 통일을 염원하고 있었다. 이 둘이 전쟁으로 달려 나가지 못하게 목줄을 잡고 있었던 것은 미국과 소련이었다.
그렇다고 미국이 평화를 바라서 목줄을 풀지 않았던 것은 아니었다. 1949년 8월 소련이 원자폭탄 실험에 성공하자 미국은 소련이 상쇄시키고자 하는 공격 능력을 다시 우위로 끌어올리기 위해 수소폭탄을 개발하는 것으로 대응했다. 1950년 봄에는 방위군사비를 3배로 올리는 내용이 포함된 정책문서 ‘NSC-68’을 내놓았다.
14 도 미국이 남한을 포기한다는 온건 노선의 표방이 아니었다. 그 방어선에 위치한 섬들에 대한 방위를 확실히 하면서도 선 바깥 지역도 방어할 수 있다는 미국 나름의 유연한 전략의 표현이었다. 전쟁이 벌어지기 며칠 전 미국의 상원의원이자 다년간 공화당의 외교 전문가로서 당시에 국무부의 의뢰를 받아 일본과의 평화조약을 준비했던 덜레스는 남한을 방문해 이승만에게 미국의 지원을 약속하기도 했다. 15
1950년 1월 발표된 애치슨 선언소련이 잡고 있던 목줄을 먼저 놓은 것은 아시아에서 소련의 이해관계와 중국 혁명이 영향을 미쳤다고 할 수 있다. 우파들은 1949년에 중국에서 마오쩌둥이 권력을 잡게 되면서 소련을 중심으로 한 ‘공산권’의 힘이 커져 전쟁으로 나갔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위에서 본 것처럼 소련은 자국의 제국주의적 이익 실현을 위해 애썼고 중국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였다. 스탈린의 전후 아시아 전략에서 중국과 관련된 것은 두 가지가 있었다. 몽골을 중국으로부터 분리해 소련의 안전을 보장하기 위한 완충지대로 삼는 것과 태평양으로의 진출 거점과 부동항 확보를 위해 중국 동북지역 내 러시아 제국의 모든 권익을 회복하는 것이었다. 이에 따라 소련은 대일전에 참전하면서 1945년 8월 중국 국민당 장제스와 ‘중소동맹조약’을 맺었다. 이를 통해 다렌항에서 소련의 우월적 이권을 보장하며, 뤼순 해군기지 조차권을 회복하고 만주의 철도를 공동 경영하기로 결정하는 등 자신의 이익을 관철시킬 수 있었다.
하지만 중국 혁명이 성공하면서 소련은 중국과 새로운 조약을 맺어야 했다. 소련은 태평양으로 진출할 수 있는 연결로인 만주의 창춘철도와 부동항인 뤼순항과 다롄항을 중국에 조기 반환하기로 했다. 스탈린은 중국의 동북지역을 대신해 태평양으로의 진출 거점과 부동항을 보유한 남한이 아시아에서 소련의 이익을 보장할 수 있다고 봤다. 이것이 스탈린이 김일성의 한반도 무력 통일 계획에 동의한 이유였다. 또한 동북아시아에 긴장이 조성되면 중국은 뤼순과 다롄에 소련 군대가 계속 주둔하기를 요청할 것이었다. 새로운 조약에 따라 ‘전쟁 혹은 위기 국면이 발생하면, 소련 군대는 창춘철도를 사용할 수 있’었기 때문에 전쟁은 중국에 대한 영향력을 유지할 수 있는 방법이기도 했다.
전쟁의 과정
전쟁의 과정은 잘 알려져 있지만 간략히 정리하면 이렇다.
초기에 북한군이 군사적 성공을 거두면서 밀고 내려와 낙동강 부근에서 참호전의 양상을 보였다. 이후 9월 15일 미군의 인천 상륙작전으로 전세가 역전돼 압록강 부근까지 미군이 밀고 올라갔지만 10월 25일 중국군이 개입해 다시 전선이 내려와 38선 부근에서 고착 상태에 빠져 2년을 더 끌다가 정전에 이르렀다.
전쟁 과정은 크게 두 시기로 나눠 볼 수 있다. 전쟁 개시부터 10월 25일 중국군이 개입하기 전까지와 그 이후가 그것이다. 중국군이 개입하기 전에는 주로 미군이 주도하는 유엔군·한국군과 북한군 사이의 전투였다. 중국군이 개입한 이후에는 미군 주도 유엔군·한국군과 소련 공군 지원을 받는 중국·북한 연합군(중국군이 주도했다) 사이의 전투였다.
전쟁 초기 미국은 김일성의 예상과는 달리 신속하게 개입했다. 트루먼은 한국전쟁 발발 이후 소집된 초기 대응 회의에서 ‘한국의 사태를 좌시하면 타이완이나 일본뿐 아니라 동남아시아와 서유럽, 특히 독일에서 미국의 위신은 현저하게 손상될 것’이라며 신속한 대응에 동의했다. 미 공군은 6월 27일 폭격을 시작했고 1950년 6월 30일 오전, 트루먼은 미 육해공군 부대가 전면적으로 한국전쟁에 개입하자는 맥아더의 요구를 승인했다.
한국전쟁 개전과 관련된 우파의 전통적인 주장은 군사력이 압도적인 북한군의 기습으로 남한군이 일방적으로 당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개전 당시 남한군 병력은 정규군 10만 3534명에 예비군을 포함해 18만 9133명이었다. 예비군 병력을 제외해도 정규군에 경찰을 포함한 병력은 15만 1807명이었다. 당시 경비대를 포함한 북한군의 병력 18만~20만 명과 크게 차이가 없던 것이다. 전쟁 초기 남한군이 밀린 것은 단순히 ‘방어상의 허점’이나 ‘무방비 상태’에서 공격당했기 때문이 아니라, 자신이 공격자이리라고 확신하던 터에 공격을 당하다 보니 물리적 충격 이상의 심리적 충격이 가해졌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북한군의 남진이 순조로웠던 것은 아니다. 북한군은 남한군의 상당한 저항을 받았다. 한강 이남으로의 전진이 며칠 늦어진 것은 춘천 쪽에서 남한군의 강력한 저항이 있었기 때문이다.
21 이미 8월 15일 이전에 인민군 내부에서 도주 움직임이 나타나고 부대들의 명령 없는 퇴각이 벌어지고 있었다. 22
북한군은 전쟁 초기 성공에도 불구하고 이내 곤란한 지경에 처했다. 미군의 개입과 미 공군의 제공권 장악은 북한군의 전진을 상당히 더디게 만들었다.23 9월 1일 유엔군은 9만 8000명이었던 북한군 병력의 두 배에 달하고 있었다. 24
이 때문에 소련 대사 슈티코프는 김일성이 점차 자신의 힘만으로는 전쟁에서 승리할 수 없음을 알게 된 것 같다고 모스크바에 보고했다. 하지만 8월 낙동강 전선 교착 상태에서 스탈린은 국제적 지원을 요청하자는 북한의 의견을 거부했다.제공권을 장악한 미군은 북한군 점령 하의 남한 지역 도시와 농촌에서 일상적으로 폭격 작전을 펼쳤다. 1950년 9월 서울 수복 후 대한민국 공보처 통계국은 6월 25일부터 9월 28일까지 서울 지역 사상자를 조사했는데 공중폭격으로 인한 사상자가 4250명으로 가장 많았다.
25 미군은 민간인을 ‘잠재적인 적’으로 간주했다.
미군은 흰 옷을 입은 민간인 무리를 향해 무차별적으로 기총소사를 가하곤 했다. ‘노근리 사건’은 그 과정에서 벌어졌다. 노근리 사건은 특수한 사례가 아니라 당시의 보편적 현상이었다고 할 수 있다.미군은 압도적 군사력을 바탕으로 전쟁 4개월 만에 북한군을 압록강 근처까지 밀어붙였다. 이 시점에 중국군과 소련군이 전쟁에 직접 개입하기 시작했다. 중국군은 10월 25일 미군과 첫 전투를 벌였고 11월 1일에는 소련 공군(중국군으로 위장했다)이 처음으로 압록강 상공 교전에 참가했다.
26 1951년 10월 미 공군은 소련 미그-15기의 출현을 2573회나 목격했으며 소련 전투기와 2166회 교전했다. 소련군의 공격으로 B-29 5대가 상실되고 8대가 손상돼 미군은 소련의 공격을 피해 야간 공습을 진행하기도 했다.
소련군의 참전이 아주 작은 규모였던 것은 아니었다. 소련군은 한국전쟁에 모두 7만 명이 참전했다. 1950년 11월 1일부터 1951년 12월 6일까지 소련군은 전투기와 대공포로 미군 비행기 569대를 파괴했다.중국이 한국전쟁에 참전하는 것을 꺼렸던 것은 사실이다. 그렇다고 중국을 단지 소련의 휘하에 있는 수동적 존재로 보는 것은 잘못이다. 중국은 한국전쟁 이전 신장 지역을 점령했으며 한국전쟁 개입과 함께 티베트로 군대를 진군시켰다. 또한 한국전쟁 동안 중국은 외부의 위협을 내세워 내부의 억압을 강화하고 급속한 자본 축적을 위해 지배 체제를 다지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한국전쟁은 전쟁이 시작된 38선 부근에서 교착 상태에 빠지고 2년이 지난 후에야 끝날 수 있었다. 양쪽 모두 힘으로 적을 완전히 제압해 통일시킬 수는 없다는 사실을 확인할 때까지 전쟁을 끝내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 그리고 서로가 조금이라도 우월한 입장에서 전쟁을 끝내길 바랐기 때문에 전쟁은 지속됐다. 이 과정에서 수많은 사람이 희생됐다. 희생자들의 상당수는 미군의 폭격에 의해 발생했다.
폭격과 대량학살
한국전쟁 동안 미국은 북한에 무자비한 폭격을 자행했다. 그 결과 북한은 “달의 표면처럼” 변했고 그야말로 ‘대량 학살’이라 할 만한 일이 벌어졌다.
제2차세계대전에서 태평양전쟁 구역 전체에 투하된 폭탄이 모두 50만 3000톤이었는데, 한국전쟁에서만 63만 5000톤이 투하됐다. 여기에 네이팜탄 3만 2000톤 이상을 더해야 한다. 네이팜탄의 파괴적인 효과는 베트남보다 북한이 훨씬 더 강했다. 인구가 조밀한 도시와 도시 산업 시설이 더 많았기 때문이다.
제2차세계대전에서 일본의 도시 60곳이 평균 43퍼센트 수준으로 파괴됐던 반면, 북한의 도시와 마을의 파괴 정도는 40~90퍼센트까지로 추산된다. 북한의 주요 도시 22곳 중에서 18곳은 도시의 최소한 50퍼센트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1951년 8월 북한을 방문한 헝가리 기자 티보르 머레이는 “북한에는 더 이상 도시가 존재하지 않았”고 “압록강에서 평양에 이르는 북한 지역은 완전히 쑥대밭”이었다고 묘사했다. 1953년 들어 미국은 이미 “쑥대밭”이 된 북한의 도시와 농촌 지역을 겨냥한 폭격의 강도를 한층 더 높이기로 결정했다. 민간 지역을 겨냥한 대량 폭격을 통해 정전회담에서 유리한 위치를 차지하고자 이른바 ‘항공압력작전’을 실행한 것이다. 전쟁이 끝나는 날까지 폭격은 끊이지 않았다. 1953년 5월에는 식량 생산에 타격을 가하고 기아를 유발하기 위해 댐 여러 개를 파괴하기도 했다. 이 때문에 200만 명 이상이라는 엄청난 민간인 사망자가 발생했다. 또한 미국은 여러 차례 핵무기 사용을 고려했다. 1951년 4월 초에는 거의 실행할 뻔했다. 당시 미국 대통령 트루먼이 4월 6일 중국과 북한의 표적에 핵폭탄을 사용하는 명령서에 서명한 것이다. 1951년 9월과 10월에는 ‘핵무기 사용 역량을 확증’하기 위해 북한 상공에서 핵폭탄 투하 연습까지 했다.
전쟁의 결과
한 역사가는 한국전쟁을 ‘죽임과 절망의 역사’라고 했다. 인구의 10분의 1이 희생됐고 1000만 명이 가족과 헤어졌고 500만 명이 난민이 된 끔찍한 사건이었기 때문이다.
한국전쟁으로 미국과 소련 양 진영 사이의 경쟁은 더욱 가속화됐다. 군비가 대폭 증가했고 양쪽 모두에서 획일적인 이념이 강요됐다. 남북 양쪽 지배자들도 상대방의 위협을 강조하면서 끔찍하게 억압적인 착취 체제를 만들었다.
하지만 저항과 혁명은 앞문으로 차내면 뒷문으로 들어오는 법이다. 전쟁은 ‘좌절과 파탄’만을 낳은 것은 아니다. 전쟁은 변화와 저항을 낳기도 했다. 예컨대 전쟁으로 많은 방직 공장들이 파괴돼 당시 필요한 방직물을 대부분 생산한 부산의 조선방직 노동자들이 1951년 12월에 투쟁에 나섰다. 1952년에는 광산 노동자들과 부두 노동자들이 투쟁에 나서 임금 인상을 얻어 내기도 했다. 부두 노동자들은 미군을 상대로 두 차례나 파업을 단행했다.
전쟁은 사회 변화를 가져왔다. 전쟁 전에도 이미 토지개혁을 통해 약화됐던 지주계급은 전쟁을 거치며 물질적 토대를 완전히 상실했다. 또한 도시와 농촌, 지역과 지역, 남한과 북한 사이의 격렬한 인구 이동과 사회적 유동성의 증가는 전통적인 한국 사회의 소규모 공동체 의식을 저변에서부터 깊숙이 파괴했다. 한국전쟁으로 인한 인구의 격심한 국내 이동, 교육과 생계 기회의 도시 편재, 상업 발달과 농촌의 절대 빈곤과 피폐로부터 도시화가 급속히 진행됐다. 1949년 도시 인구는 347만 명이었지만 1955년에 528만 명, 1960년에 700만 명으로 증가했다. 1950년대에는 대학이 10배 증가했고 학생 수도 빠르게 늘었다. 이제 농촌을 대신해 도시가 명백히 저항의 중심지가 됐다. 1950년대의 선거 결과는 이런 변화를 반영했다. 1958년 제4대 총선에서 이승만의 당이었던 자유당의 당선자 90퍼센트가 농촌 지역 출신이었고 야당인 민주당의 당선자 60퍼센트가 도시 지역 출신이었다. 서울에서는 민주당이 14명을 당선시킨 데 견줘 자유당은 1명만을 당선시켰다.
이런 변화와 저항들이 쌓이고 경제·정치 위기가 결합되면서 1960년 이승만 독재를 타도하는 4·19 혁명으로 이어졌다. 물론 노동계급이 저항의 중심에 서고 계급적 존재감을 드러내기까지는 시간이 더 필요했다.
전쟁과 평화 한국전쟁에 대한 주요 연구자 중 한 명인 박명림은 ‘전쟁이 정치의 연속이라는 이해는 전쟁의 정당성을 제공해 줄 위험이 있으며, 타협을 통한 평화의 도출이라는 정치의 영역을 절대적으로 축소시킨다’고 주장했다. 한국전쟁은 ‘정치의 연장이라기보다 정치 실패의 산물’이라는 것이다.
그는 정치를 협상과 조율이라는 협소한 의미로 본다. 그러나 레닌이 ‘전쟁은 다른 수단에 의한 정치의 연속’이라고 주장했을 때 정치는 제국주의 사이의 경쟁적 쟁투와 계급투쟁을 포함하는 개념이었다.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한국전쟁은 이런 의미의 정치의 맥락, 즉 제2차세계대전 이후 경제적·지정학적 경쟁에서 우위를 점하기 위해 벌어진 미국과 소련의 제국주의 경쟁이 격화하는 과정에서 벌어진 것이다.
따라서 정치 협상으로 평화를 가져올 수 있었으리라는 가정은 현실에 부합하지 않는다. 1945년 남북을 각각 점령한 미국과 소련은 처음부터 자신의 이익을 대변할 체제를 수립하기 위해 나아갔다. 두 제국주의 국가는 군대와 경찰 등 억압 기구를 복구해 아래로부터의 운동을 탄압하고 독립적인 통치 기구를 만드는 방향을 추구했다.
1947년 초 미국 의회의 비밀증언에 출석한 애치슨은 미국이 한국에서 이미 분할선을 그었다고 말했는데, 이 증언은 1945년부터 미국 점령군이 해 왔던 정책이 무엇이었는지를 확증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이런 상황에서 미군정이나 그들의 적극적인 후원을 받고 있던 우파를 설득할 수는 없었다. 미군정이 추진하고 중도우파와 중도좌파가 주도적으로 참여한 좌우합작위원회도 사실 중도좌파를 자신의 영향력 하에 묶어 두고 대중운동과 연결돼 있던 급진좌파를 분쇄하기 위한 미군정의 의도가 숨어 있었던 것이었다. 좌우합작위원회가 진행되던 1946년 9월에 벌어진 철도 파업을 진압하면서 미군정 운수국장이 말했듯이, 당시 미군정과 우파들은 아래로부터의 운동을 제압하기 위해 전쟁을 벌이고 있었다.
우리는 전쟁하러 가는 태도로 파업장에 갔다. 우리는 그저 파업을 분쇄하러 갔지, 그 과정에서 혹시 죄 없는 사람 몇이 다칠지도 모른다고 걱정할 겨를이 없었다. 우리는 시 외곽에 정치범 수용소를 세우고 감옥이 가득 찰 때는 그곳에 노동자를 수용했다. 그것은 전쟁이었다. 우리는 전쟁하듯이 파업을 진압했다.
해방 후 미군정은 점령군 사령관 하지의 말처럼 화산의 가장자리를 걷고 있었다. 미국은 화산처럼 끓어오르고 있던 진정한 독립과 해방을 염원하는 대중의 움직임을 제압하지 않고서는 자신의 이익을 실현할 수 없었다. 역으로 말해, 오직 대중의 힘만이 미국을 화산의 가장자리에서 밀어낼 수 있었을 것이다.
35 의 성공이 없었다면, 제 삶은 시작되지 못했을 것이고, 오늘의 저도 없었을 것”이라며 한국전쟁 참전 미군의 ‘인류애’에 감사를 표했다. 단지 자신의 부모가 미국의 배에 타지 못했다면 자신이 존재할 수 없었을 것이라는 이유만에서만은 아니다. 36 문재인은 “한미동맹은 그렇게 전쟁의 포화 속에서 피로 맺어졌”기 때문에 트럼프와 손잡고 한미동맹의 토대 위에서 북핵 폐기와 한반도 평화를 만들어 가겠다고 강조했다.
지난해 미국을 방문한 문재인은 “흥남철수작전하지만 위에서 살펴본 것처럼, 미국과 중국 사이의 경쟁이 점증하는 속에 미국의 대북 압박과 긴장 고조, 때로는 대화 분위기도 있는 것이다. 따라서 한미동맹과 북핵 폐기를 고수하면서 한반도 평화를 만든다는 것은 공상에 지나지 않는다.
예나 지금이나 아래로부터의 대중투쟁만이 전쟁으로 가는 근본 동역학을 저지할 수 있는 유일한 힘이다. 그 중심에 예전과 비교할 수 없이 거대해진 노동계급이 서야 할 것이다. 그리고 그 선두에 미국 제국주의와 중국 제국주의 모두에 반대하고 남북한 지배자들로부터 독립적이며 노동계급의 이익을 일관되게 옹호하는 혁명적 좌파가 있어야 한다.
주
- 앨리슨 2018, p238. ↩
- 앨리슨 2018, p236. ↩
- 커밍스 2017, p10. ↩
- 한국전쟁연구회 2000. ↩
- 커밍스 2017. ↩
-
이 점에서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 2》에서 서중석 교수가 한국전쟁에 대해 북한의 책임을 물어야 한다며 미국의 참전을 인정하고 중시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전쟁을 누가 시작했는가에 초점을 맞췄을 때 나타날 수 있는 문제를 보여 준다.
물론 서중석 교수의 주장에는 이승만과 미군이 휴전선에서 북한군의 공격을 제대로 막아 냈다면 후퇴와 전진을 반복하면서 벌어진 수많은 학살을 막을 수 있었지 않은가 하는 생각이 깔려 있다. 그러나 북한의 초기 공격을 성공적으로 막아 냈더라도 미군과 한국군이 38선 이북으로 진격하지 않았으리라는 보장은 없었다. 왜냐하면 이승만은 ‘북진 통일’을 부르짖으며 전쟁 발발 이전부터 38선에서 이미 여러 차례 선제 공격을 하고 있는 상황이었고 미국도 소련에 대응해 이전보다 강경한 자세를 보이고 있었기 때문이다. ↩ - 커밍스, 헐리데이 1989, p76. ↩
- 커밍스 1989. ↩
- 지면 관계상 이 글에서 자세히 다룰 수 없는 북한 체제의 형성에 대한 마르크스주의적 분석으로는 김하영 2002를 참고하기 바란다. ↩
- 커밍스 2017. ↩
- 박명림 1996. ↩
- 캘리니코스 2011. ↩
- 마셜플랜은 스탈린이 아직 장악하지 못한 지역을 강화하기 위한 미국의 공세의 일환이었다. 마셜플랜 발표 후 몇 주 만에 프랑스와 이탈리아에서는 우파와 중도파 정당들이 공산당을 정부에서 쫓아냈다(하먼 2004). ↩
- 1950년 1월 12일 미국 국무장관 애치슨이 전미신문기자협회 연설에서 태평양에서 미국의 방위선으로 알류산열도, 일본 오키나와, 필리핀을 연결하는 선을 제시한 것을 말한다. ↩
- 슈퇴버 2016, p64. ↩
- 션즈화 2014, pp156-157. ↩
- 가브리엘 콜코에 따르면 소련은 중국이 강력해지는 것은 자신의 이익과 일치하지 않는다고 보고 있었기 때문에 공산당에 의한 중국 혁명을 원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중국 정부가 허약한 정부로 계속 남아 있기를 원했다(콜코 1989). ↩
- 션즈화 2014, p66. ↩
- 션즈화 2014, p383. 한국전쟁이 발발해 중국은 소련에 창춘철도를 개방하지 않을 수 없었고 소련군이 뤼순기지에 계속 주둔할 것을 요청했다. 1950년 7월 11일 소련 정부의 요구에 따라 중국공산당 중앙위원회는 소련이 군사물자를 운송할 수 있도록 창춘철도와 동북지역의 영공을 소련에 전면 개방할 것을 결정했다. ↩
- 정병준 2006. 남한군의 공격형 편제와 공격성은 전쟁 전 수차례의 선제 공격으로 나타났다. ↩
- 1950년 7월 20일경 북한군은 남한 정부의 임시 수도였던 대전 점령을 목전에 두고 있었다. 그러나 같은 시각 북한군 최고사령관 김일성은 전선의 상황을 ‘파국적 상황’이라고 묘사하며 전선 사령관 김책과 전선 참모장 강건을 강하게 질책했다. ↩
- 박명림 2002, p99. ↩
- 스티븐 케이시 외 2017, p87. ↩
- 박명림 2002, p105. ↩
- 김태우 2013, p166. ↩
- 박명림 2002, p489. ↩
- 김태우 2013. ↩
- 커밍스 2001, p405. ↩
- 커밍스 2017, p224. ↩
- 이원보 2005, p142. ↩
- 이런 분위기를 알았기에 민주당은 1956년 선거에서 “도시민의 높고 저항성 있는 지성과 판단력이야말로 정확한 국민의 의사를 표시하는 척도가 될 것”이라는 성명을 발표했다. ↩
- 역사문제연구소 1998, p121. ↩
- 박명림 2002. ↩
- 강준만 2004a, p292. ↩
- 흥남철수작전에서 미군이 사람들을 보호하기 위해 모든 노력을 감수했다는 신화는 사실이 아니다. 사람들이 흥남부두로 몰려든 것에는 미군의 원폭 투하 소문이 큰 영향을 미쳤다. 미군은 적에게 아무것도 남겨 주지 않으려고 항구에 대규모 함포 사격과 공중 폭격을 가해 그 일대를 잿더미로 만들었다. 이 때문에 죽어 간 사람이 많았다(강준만 2004b, pp169-170). ↩
- 1953년 휴전에 반대하기 위한 이승만의 ‘반공포로석방’으로 필자의 아버지가 남쪽에 남아 필자가 존재할 수 있었다고 해서 필자는 이승만의 ‘인류애’에 감사를 표하진 않을 것이다. ↩
참고 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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