쟁점 : 현재의 이슈들
백서 《박근혜 정권 퇴진 촛불의 기록》 발간에 맞춰
좌파적 시각에서 본 박근혜 퇴진 운동의 주요 쟁점과 교훈
최근 박근혜정권퇴진비상국민행동(이하 퇴진행동) 기록기념위원회(이하 기록위)가 제작한 백서 《박근혜 정권 퇴진 촛불의 기록》(이하 백서)이 출간됐다. 이 책은 퇴진 운동의 공식 지도부였던 퇴진행동이 해산하면서 기록위에 편집을 위임해 제작됐다. 따라서 이 백서는 퇴진행동의 공식 기록이라 볼 수 있다.
백서는 2016년 10월 29일 첫 촛불집회부터 2017년 4월 25일 23차 촛불집회까지 다양한 기록, 조직구성도, 지역별 상황, 퇴진행동 회의록 등을 담았다. 퇴진 운동의 역사를 돌아보는 기초적 자료인 셈이다.
그런데 모든 문헌은 작성자들의 정치적 관점이 투영되기 마련이다. 그에 따라 어떤 사실을 선택하고 부각할지, 무슨 활동을 강조할지, 어떤 낱말과 단어·인물을 부각할지 등이 달라진다.
이런 의미로 보면, 기록위는 퇴진행동 내 다양한 세력들의 의견을 반영하지 않고 반쪽 의견만 반영한 채 백서를 제작했다. 백서는 퇴진 운동의 한 축이었던 NGO 등 온건 개혁주의 진영과 한국진보연대 등 자민통계 진영의 의견이 반영된 기록서라고 봐야 한다.
무미건조하게 나열된 사건과 회의 결과 이면에 있었던, 행위 주체들 사이에 벌어진 치열한 논쟁과 그 결과로 추진·집행된 일을 백서는 기록하지 않았다. 어떤 맥락에서 그런 문구가 나왔는지, 퇴진행동 내 논쟁 구도와 쟁점은 무엇이었는지도 밝히지 않았다. 특히, 퇴진 운동 초기에 NGO들이 박근혜 퇴진 요구를 지지하지 않아서 벌어진 일, 12월 9일 국회에서 탄핵소추안이 가결되기 전후로 일부 개혁주의자들이 조기 대선 국면으로 가려고 도발에 가까운 행동을 했던 일, 우파의 반격과 이에 대한 대응 전술을 둘러싼 논쟁 등이 전혀 담기지 않았다.
그래서 마치 퇴진 운동이 아무런 굴곡을 겪지 않고 물 흐르듯 진행된 듯이 서술돼 있다. 이는 퇴진행동의 주요 결정과 집행을 기록위를 주도한 NGO들과 한국진보연대가 한 것처럼 느껴지게 만드는 효과를 내고 있다. 퇴진 운동 안에서 좌파가 발휘한 구실을 잘 보이지 않게 하려는 의도인 듯도 하다.
그러나 급진좌파는 분명히 퇴진 운동 내 중요한 한 축을 담당했고, 필자는 급진좌파의 목소리를 모아 내며 퇴진행동 공동상황실장직을 수행했다. 필자는 퇴진 운동이 성공할 수 있도록 책임지는 자세로 임했었기에 백서에 언급되지 않은 다른 그림을 추가하고 백서의 일부 내용을 수정·보완하고자 한다. 무엇보다 퇴진 운동의 정치적 성과와 아쉬움, 그리고 좌파의 과제 등을 제시하려 한다. 이 글은 백서에 대한 비판적 서평이라기보다 백서와 독립적인 성격의 글이다. 공식 회의록, 각종 언론 보도, 촛불 현장에 뿌려진 각종 유인물, 각 단체가 낸 정기간행물 등을 기초로, 좌파적 시각에서 촛불 운동 과정의 논점을 돌아봤다.
노동계급의 대거 참가와 좌파의 만만찮은 구실
퇴진 촛불의 특징:박근혜 퇴진 촛불은 민주노총과 진보·민중·노동 단체들이 모인 민중총궐기투쟁본부(이하 총궐기투본)가 발의했다. 총궐기투본은 박근혜 정부 내내 반노동·반민중적 공격에 맞서 저항의 초점 구실을 했으므로, 퇴진 촛불의 발의자로서 자격이 충분했다. 총궐기투본이 초기에 신속하게 대응할 수 있었던 데에는 그 안의 노동·좌파 단체의 구실이 컸다.
당시 한국진보연대는 집회 개최는 동의하면서도 ‘시민의 자발성을 해친다’며 ‘주최자 없는 촛불집회’를 하자고 주장했다. 노동자연대는 박근혜에 맞서 온 총궐기투본이 자발적 촛불을 모으는 구심 구실을 해야 한다고 제기했다. 이 논쟁 끝에 총궐기투본이 첫 촛불 집회를 주최하기로 결정한 것이다.
한국진보연대가 ‘시민의 자발성을 해친다’고 주장한 이유는 백서를 보면 알 수 있다. 10월 29일 촛불 집회 개최는 10월 26일 총궐기투본 긴급 집행위 회의에서 결정됐다. 한국진보연대는 그 전부터 참여연대 등 시민단체들과 비공개 물밑 협의를 하고 있었다. 한국진보연대는 총궐기투본이 독자로 집회를 개최하는 것을 부담스럽게 여겼던 듯하다. 즉, ‘시민의 자발성을 해친다’는 논리는 참여연대 등 시민단체를 끌어들이기 전에는 총궐기투본이 나서면 안 된다는 뜻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참여연대 등 시민단체는 ‘박근혜 퇴진’ 요구를 10월 29일 첫 집회 전까지 지지하지 않았다. 시민단체들과 조율하기 위해 총궐기투본이 박근혜 퇴진 집회 주최를 확정하지 않았다면, 초기에 박근혜 퇴진 염원을 모아 내는데 어려움이 있었을 것이다. 또, ‘박근혜 정권 퇴진’이 운동의 공식 요구로 채택하는 데 좀더 시간이 걸릴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총궐기투본이 주최한 29일 집회에서 참가자들은 모두 ‘박근혜 퇴진’을 연호했다.
촛불 참가자들은 민주노총과 진보좌파 단체들에 큰 신뢰를 보냈고 파업 노동자들을 지지하며 연단의 총파업 호소에 연호했다. 이는 박근혜 정부 하에서 누가 저항의 초점 구실을 해 왔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었다. 백서는 이 점을 말하지 않는다. 그나마 자민통계의 의견을 반영해 백남기 농민 관련 내용만 조금 서술했다.
1 였다. 박근혜 정부의 또 다른 아킬레스건이었던 세월호 참사 항의 운동에서도 민주노총과 진보·민중·노동 단체는 만만찮은 구실을 했다.
박근혜 집권기를 돌아보면, 2013년 말 철도 민영화 반대 파업, 2014~2015년 의료 민영화 반대 파업과 투쟁, 2015년 노동개악에 맞선 민주노총 파업과 민중총궐기 등 노동자 투쟁은 박근혜 정부에 맞선 운동의 중요한 축이었다. 그리고 박근혜 퇴진 운동의 밑거름이었다. 2016년에는 “노동계 파업으로 인한 근로손실일수가 9월 현재 지난해보다 2배 이상 급증한 것으로 조사됐다. 최근 10년 간 최대 수치”2 을 느꼈다고 한다.
이런 투쟁들 속에서 정치 의식의 진보화가 이뤄졌고 마침내 2016년 4월 총선에서 박근혜와 새누리당이 참패했다. 이런 변화 덕분에 한편에서는 분노가, 다른 한편에서는 싸워 볼 만하다는 자신감이 빠르게 자라났다. 촛불이 터지기 직전에는 박근혜를 ‘적폐’로 지목하고 싸워 온 공공부문 노동자들이 성과연봉제를 저지하기 위해 연쇄 파업을 벌이고 있었다. 이는 박근혜 퇴진 운동의 결정적 초기 자본이었다. 당시 파업에 참가했던 철도 노동자들은 “촛불이 옮겨 붙기 전부터 광장을 지켰다는 자부심, 새로운 역사를 내 엉덩이로 써 냈다는 우쭐함”이렇듯 박근혜 퇴진 촛불의 점화는 박근혜 정권에 맞서 치열하게 전투를 벌여 온 세력들의 의식적인 노력과 더 광범한 대중의 불만이 맞아떨어진 결과물이었다.
그러므로 대다수 평론가들과 언론이 대중의 자발성을 찬양한다며 노동운동과 좌파의 구실을 부당하게 무시하는 것은 틀렸다.
3 을 주요 특징으로 한다고 주장했다. 퇴진 촛불이 “파업 등과 같은 집단행동에 대한 부정”이었다고도 했다. 4 심지어는 “우리나라 좌파는 이번 촛불혁명을 예상하고 대비, 조직, 지도하기에는 너무나 위축·주변화·분열되어 있었다. … 촛불혁명처럼 좌파가 예측도 준비도 못한 상황에서 대중운동이 분출”했다며 5 노동운동과 좌파가 퇴진 운동 안에서 완전히 ‘주변부’에 밀려나 있었다고 보는 평가도 있다.
일부 지식인들은 “이번 촛불항쟁은 2008년 촛불집회의 연장선상에 있”고 “기존 운동조직이나 시민단체들의 매개의 상실”그러나 이런 주장은 학자들 자신의 편견(노동계급과 그 운동에 대한 편견)에 현실을 꿰맞추는 것으로, 부정확할 뿐 아니라 부정직한 것이다.
이게 견줘 백서는 조직적인 계획과 대중의 자발성을 연결시켜 서술했다. 그런데 백서의 문제는 그 의식적인 계획이 어떤 과정을 통해 나온 것인지를 전혀 다루지 않는다는 점이다.
한편, 평론가들과 다수의 언론은 퇴진 운동의 참가자 숫자만 중시할 뿐, 그 사회적 구성에는 큰 관심이 없었다. 그러나 운동의 사회적 구성이 어떤지는 운동의 잠재력·가능성과 약점, 전진의 효과적 방법 등을 아는 데 꼭 필요한 사실이다.
6 그중 청년은 미조직 노동자일 가능성이 높으므로, 1700만 촛불의 압도 다수는 노동계급 성원들이었다.
한 연구 결과를 보면, “참가자들의 사회적 구성을 보면, 노동자 58.5퍼센트, 대학생·청년 24.5퍼센트, 자영업 16.2퍼센트였다.”노동자들이 대거 참가한 사실은 우파 정권이 9년간 추구한 경제 위기 고통 전가에 노동계급의 반감이 크다는 것을 보여 준 것이자, 이에 맞서 투쟁해 온 조직 노동운동의 위상과 대표성도 방증하는 것이다.
촛불 참가자들은 민주노총의 총파업 호소에 환호했고, 성과연봉제 저지 파업에 폭넓은 지지를 보냈다. 촛불 시위를 계기로 창원GM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대량해고를 저지했고, 이화여대 경비 노동자들은 자신들의 요구를 성취했다. 모든 대선 후보들이 최저임금 1만 원을 공약으로 내걸었던 것도 퇴진 운동의 사회적 구성과 무관하지 않다.
이런 점을 보건대, 12월 9일 국회의 탄핵소추안 가결을 전후로 민주노총의 조직 노동자들이 일터에서 자신의 경제적 힘을 발휘하는 파업을 벌였다면 폭넓은 지지를 받고, 퇴진 운동에 새로 참가한 미조직 노동자들을 자극하며 운동이 좀더 급진화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퇴진 운동의 견인차 구실을 했던 철도 파업이 국회 탄핵소추안 가결 직전에 종료됐다. 민주당과 정의당 등은 노동자 파업 투쟁이 여전한 상황에서 탄핵소추안이 가결되면, 노동자들의 자신감이 올라가 파업이 더 강력해지고 확산될 것을 우려해 파업 종료를 종용했다. 같은 이유로 노조 지도자 다수도 파업 중단을 지지했다. “공공운수노조-철도노조의 개혁주의 노조 지도자들이 조합원들을 업무에 복귀시킨 게 12월 9일이라는 사실은 우연이 아니었다. 자유주의자들은 철도 파업이 지속되는 가운데 박근혜 탄핵소추안이 가결되면 파업이 더 강력해지고 확산될까 봐 두려웠을 것이다. 또한 자기네 당들 내의 좀 더 보수적인 정치인들과 새누리당 내 비박계에 파업 종식 능력을 보여 줌으로써 그들을 설득하기 위한 지렛대로 삼으려 했을 것이다. 자유주의자들과 개혁주의자들은 두 차례 실패 끝에 12월 7일 세 번째 시도에야 비로소 철도 노동자들을 설득할 수 있었다. 노동자들의 저항이 그만큼 강했던 것이다.” 박근혜 퇴진 운동에서 노동계급의 비중이 컸음을 강조하는 이유는 “이 투쟁이 노동자들의 계급 투쟁으로 발전할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즉, 박근혜 정권 퇴진 운동은 단지 정치적 부패에 반대하는 민주주의 투쟁에 머무르는 게 아니라 착취와 억압에 저항하는 노동계급 투쟁으로도 발전할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아쉽게도 현실은 그렇게 전개되지 않았다. 개혁주의 지도자들이 종용한 철도 파업 중단 압력에 끝까지 저항하기에는 노동운동 내 좌파가 역부족이었다. 이에 대해서는 뒤에서 더 다루겠다.
주요 쟁점과 각 세력들의 대응
박근혜 퇴진 운동은 거대한 대중운동이었기에 운동에 동참한 세력(개인)들은 다양했다. 민주노총·한국노총 조합원, 비정규직·미조직 노동자, 여성, 청년·학생, 성소수자, 자영업자, 농민, 빈민, 야당 정치인, 혁명적 좌파, 급진좌파, 자민통계, NGO 등등.
한편으로 이런 다양성은 운동의 강력함의 원천이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운동이 어디로 나아갈지, 그에 따른 구체적 전술은 무엇이어야 할지 등을 둘러싼 논쟁이 불가피한 이유이기도 했다. 아래에서는 퇴진 운동 과정에서 벌어진 주요 쟁점들을 살펴보겠다.
퇴진 운동과 주류 야당(특히 민주당)의 관계
《촛불혁명과 2017년 체제》를 펴낸 손호철 교수는 “촛불 드는 것보다 투표 한 번 잘하는 게 중요하다”는 최장집 교수의 주장에 공감하며 “촛불은 위대하지만 … 정치적 주체화가 굉장히 중요하다”고 했다. 이는 거리 운동이 정당 정치로 수렴돼야 하고 조기 대선 준비가 무척 중요하다는 주장이었다.
그래서 퇴진 운동과 주류 야당(민주당)의 관계는 초미의 쟁점이 됐다. NGO들은 조기 대선을 염두에 두며 민주당과의 공조를 가장 중시했다.
야당과의 관계는 NGO들뿐 아니라 한국진보연대 등 자민통계에게도 무척 중요했다. 자민통계는 민주당과의 전략적 동맹이라는 인민전선을 추구한다. 그래서 퇴진 운동을 민주당과의 동맹을 위한 기반을 다질 수 있는 기회로 여겼다.
그러나 광장의 촛불 참가자들은 대체로 주류 야당을 강력하게 의심하고 있었다. 우선 민주당은 박근혜 정권 4년 동안 저항의 목소리를 내 본 적이 없다. 세월호 참사 진상 규명, 공무원 연금 개악, 노동개악 등에서 민주당은 여당과 야합해 뒤통수를 쳤다. 심지어 퇴진 운동 와중에도 찬물을 끼얹는 시도를 여러 차례 했다. 운동 초기에 박근혜 퇴진을 지지하지 않았고, 11월 12일 처음으로 100만 명이 모여 ‘박근혜 즉각 퇴진’을 요구한 바로 다음 날 민주당 대표 추미애가 박근혜와 영수회담을 하기로 합의했다. 민주당 대표가 나서서, 거의 모든 국민의 불신임하는 박근혜를 대통령으로 인정하겠다고 선언한 셈이었다. 민주당은 국회 탄핵 카드를 꺼내는 것에서조차 우물쭈물하며 눈치를 봤다.
이는 민주당의 계급적 기반에서 비롯하는 문제다. 민주당은 그 핵심 인적·재정적 기반을 기업가들에 의존하는 부르주아 정당이다. 물론 포퓰리즘적 성격이 있고 지배계급 내 비주류 세력이기는 하지만 말이다. 이 때문에 민주당은 노동계급의 요구와 투쟁, 거리의 항의 운동을 일관되게 지지하지 않는다. 민주당은 운동에 동참할 때조차, 운동의 전진을 가로막고 체제 안으로 제한하려는 목적이 강하다.
당시 민주당과의 정치적 공조 강화는 퇴진 운동을 후퇴시킬 위험이 있었다. 퇴진 운동이 크게 성장하는 시점에 주류 야당과의 공조를 최우선으로 고려하자는 것은, 무게 중심을 국회와 조기 대선으로 옮기자는 메시지였고, 거리 운동의 중요성을 낮추자는 메시지였다.
9 이 시도는 좌절됐다. 그 시도는 “야당의 정치노선을 믿을 수 없다는 의견그룹과 합의를 이루지 못해 무산된 것으로 알려졌다.” 10
그래서 노동자연대 등 좌파는 퇴진행동이 주류 야당과 독립적으로 운동을 건설해야 함을 강조했다. 퇴진행동 안에서 날카로운 논쟁이 벌어졌다. 그 결과 퇴진행동은 “퇴진행동의 독자성을 유지하며 필요에 따라 사안별, 한시적으로 정치권과 협력할 수 있다”고 입장을 정리했고, 이는 백서에 담겼다. 이 문구는 대체로 노동자연대 등 좌파의 주장을 반영했다. 당시 NGO들은 “[민주당과] 퇴진행동이 함께하는 연석회의를 구성해 정치권과 공동행동을 추진”하자고 주장했지만,그래서 NGO들은 “지난해 11~12월 탄핵 촛불이 더불어민주당 등 야권 세력과 전략적으로 공조하지 못했다는 점”을 크게 아쉬워했다.
‘즉각 퇴진’과 ‘탄핵’의 역설적 관계
2016년 11월 내내 퇴진행동 내 최대 쟁점은 운동의 슬로건을 ‘즉각 퇴진’으로 할지 ‘탄핵’으로 할지였다. 참여연대 등 NGO들은 일관되게 탄핵을 주장했다. 즉각 퇴진 슬로건은 박근혜 개인 뿐 아니라 그 정부의 온갖 악행까지도 거부하는 대중 투쟁을 지향하는 노선을 뜻했다. 반면, 탄핵 슬로건은 국회와 헌법재판소 등 법 절차를 통한다는 점을 강조하는 노선을 뜻했다. 박근혜 제거라는 공통점은 있지만 길도 다르고 수단도 다르고 정치적 효과도 달랐다. 운동 초기 두 슬로건을 둘러싼 논쟁은 운동의 향방을 정하는 중요한 논쟁이었다.
노동자연대 등 급진좌파와 민주노총 집행부는 즉각 퇴진을 주장했다.
반면, 퇴진행동 내 온건파는 ‘즉각 퇴진은 사실상 불가능하니 야당과 공조 하에 탄핵을 지지하자’며 탄핵 슬로건을 주장했다. 이는 국가를 계급 중립적으로 여기며 개혁을 위한 도구로 삼을 수 있다고 보는 개혁주의 정치에서 비롯한다. 합법적 절차를 통해 집권한 박근혜 정부를 대중의 힘으로 직접 끌어내리기보다는 합법적 절차를 통해 박근혜를 제거하고 싶었을 것이다.
결국 치열한 논쟁이 벌어졌고, 그 끝에 탄핵을 비판적으로 지지하되, 그 방식의 위험성을 강조하는 것으로 퇴진행동의 입장이 정리됐다. 그 입장은 다음과 같이 백서에 정리돼 있다. “탄핵 절차로 갈 때 아래 2가지 우려점이 있음을 밝힌다. ① 박근혜 정권이 자신의 권력을 유지·연장하기 위한 버티기·시간 끌기와 다르지 않으며 ② 국민적 합의에 도달한 대통령 즉각 퇴진 여론에도 불구하고 보수적 헌법재판소가 탄핵소추를 인용하지 않을 위험성이 상당히 높은 바, 이는 소수의 재판관들이 민의를 왜곡함으로써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는 민주주의의 근본 원칙이 국회와 사법부에 의해 왜곡될 수 있다는 점[이다.]”
원안에는 ③항도 있었다. “탄핵에 이르는 긴 시간 동안 박근혜의 온갖 나쁜 정책과 악행이 지속 혹은 가속될 수 있다.” 이는 당시 NGO 등 온건파들의 강력한 반발로 삭제됐다. ③항이 들어가면 사실상 탄핵 반대 입장처럼 보인다는 게 이유였다. 그럼에도 퇴진행동이 정한 입장은 온건파보다 급진좌파의 입장을 훨씬 많이 반영했다.
이는 광장에서 즉각 퇴진 슬로건에 대한 지지가 압도적으로 높았기에 가능했다. 특히 박근혜가 도발적 태도를 보이자 탄핵 절차를 믿을 수 없다는 생각은 커졌다. 그래서 12월 3일 한국 역사상 최대 규모인 232만 명의 시위가 벌어졌고, 이를 본 야당은 탄핵소추안 가결을 통해 운동이 더 급진화하는 것을 제어하려 했던 것이다.
12 일각의 관찰은 부정확하다. 백서는 이런 주장에 대해 팩트 체크를 할 수 있는 자료를 제공한다.
그러므로 “2016년 4·13 총선 결과는 시민들에게 큰 자신감을 주었”으며 시민들은 “국회를 통해서 탄핵안을 통과시키는 데 모든 힘을 집중시켰다”는한편, 노동자연대는 탄핵과 즉각 퇴진이 경쟁과 협력의 역설적 관계임을 알았다. 그래서 초기 논쟁에서는 즉각 퇴진을 주장했고, 국회에서 탄핵소추안이 논의 될 때는 국회더러 빨리 탄핵을 결정하라고 촉구했다. 동시에 탄핵소추안이 가결된 뒤로도 거리 운동이 계속돼야 한다고 주장했다.
탄핵소추안 가결 이후
12월 9일 국회에서 탄핵소추안 가결된 이후 정치적 주도권은 점차 민주당이 가져가기 시작했다. 퇴진행동 안에서도 온건파들의 목소리가 커졌다. 온건파는 박근혜 정부의 온갖 악행을 공격하는 대중의 거리(와 작업장 파업) 투쟁을 건설하려 애쓰기보다는 민주당 지도부에게서 개혁 약속을 받아 내는 것을 강조했다. 그래서 민주당이 받아들이지 않을 공산이 큰 노동개악 철회, 한상균 위원장 석방 등을 퇴진행동의 주요 요구로 포함시키기를 거부했다. 이는 좌파와 노동운동의 주도력을 약화시키려는 목적도 있었다.
13 심지어는 한상균 위원장 석방 발언이 2015년 민중총궐기를 연상시켜 퇴진행동이 “폭력을 옹호하는 것처럼 비춰질 수 있다”면서 우파 언론을 인용하기도 했다(환경운동연합 염형철).
앞서 말했듯이, 탄핵소추안 가결 직전 철도노조 지도자들과 개혁주의자들은 철도 파업을 중단시켰다. 곧이어 NGO는 12월 10일 촛불 집회 때 나온 한상균 위원장 석방 촉구 발언(선고를 앞두고 배치된 발언)을 문제 삼았다. 집회 연단에 노동 관련 발언이 너무 많아서 ‘순수 시민’의 참여가 축소되고 있다는 현실과 다른 논리가 동원됐다. “노동자들의 과격한 언어나 구호를 불편해 하는 시민들의 시선 때문에 광장에서 목소리를 내는 일에 위축감”을 줬다는 것이다.그러나 다수의 촛불 참가자들은 투쟁하는 노동자들의 목소리에 거부감이 아니라 연대의 박수를 보냈다.
온건파는 노동계급을 대변하는 목소리의 비중이 크면 우파로부터의 역풍이 불고, 이는 야당의 대선 득표에 불리하게 작용할 수 있다고 여긴 듯하다. 그래서 특히 운동이 계급적 성격을 분명히 하며 심화하는 것을 제한하려 했다.
필자는 노동계급의 행동이, 특히 파업 같은 고유의 투쟁 방식이 사용돼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래야 실질적인 적폐 청산도 가능하다고 봤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한상균 위원장은 박근혜 정부가 벌인 반노동·반민주적 억압 정책에 맞선 상징이었다. 그의 석방은 너무도 자연스러운 광장의 요구였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수감 중인 한상균 위원장이 스스로 “한상균을 석방하라는 구호를 멈춰 달라”고 요청해 이 논쟁은 마무리됐다.
이 논쟁은 퇴진행동 안에서 서로 간에 감정적 갈등으로까지 표출될 정도로 첨예하고 날 선 논쟁이었다. 백서는 이 논쟁을 전혀 다루지 않는다. 되돌아 보면, 이 시점부터 NGO들의 입김이 강화됐다. 이 때가 퇴진 운동을 점화하며 중요한 구실을 했던 조직 노동운동의 주도력이, 개혁주의자들의 영향력 하에서 자기제한적 태도로 말미암아 꺾이는 시점이었다.
만약 좌파가 노동운동 내에서 좀더 영향력이 강했더라면, 노동계급이 고유의 힘을 발휘할 수 있도록 조직할 수 있었더라면, 또 다른 그림이 펼쳐질 수도 있었을 것이다.
황교안의 권한대행 체제를 인정할 것이냐 말 것이냐 국회의 탄핵소추안 가결 이후 퇴진행동은 ‘박근혜 없는 박근혜 체제’를 운영하는 황교안에 반대하며 ‘황교안 퇴진(사퇴)’을 분명하게 결정했다. “정치권에서는 사실상 황교안 대행 체제를 인정하며 적폐 세력의 핵심인 황교안에게 면죄부를 줌으로써 황교안 권한대행은 적폐 사업을 강행하고 있었다. … 퇴진행동은 황교안의 사퇴를 강력하게 요구하기로 했다.”
그러나 야당이 황교안 대행 체제를 인정하자, NGO들은 황교안 퇴진 주장을 반대하기 시작했다. 퇴진행동 이태호 공동상황실장(참여연대)은 황교안 퇴진이라는 불가능한 요구를 하기보다 황교안의 문제점을 폭로하며 압박하는 전술을 사용하자고 했다.
반면 당시 광장은 황교안 대행 체제에 대한 분노 정서가 압도적이었다. 결국 이태호 실장의 주장은 퇴진행동 안에서도, 광장에서도 호응을 얻지 못했다.
그럼에도 이태호 실장은 퇴진행동 입장을 수정하려 애썼다. 이태호 실장은 퇴진행동 기자간담회 자료에 큰 제목에는 “황교안 사퇴”라는 문구를 넣고서 본문에는 “최소한의 국정관리에 한정하는 중립적인 체제여야 한다”며 황교안 대행 체제를 인정하는 문구를 슬쩍 집어넣어, 한바탕 난리를 일으켰다. 백서에는 이런 얘기 없이 퇴진행동이 황교안 사퇴를 공식 요구로 정했다는 결정사항만 있을 뿐이다.
15 고 한 것이다.
온건파는 야당 대표와의 면담 자리에서도 퇴진행동의 결정 사항을 무시하고 황교안 역할 축소론을 꺼냈다. 당시 퇴진행동을 대표해 야당과의 면담에 나간 권태선 환경운동연합 대표가 “정말 관리하는, 위기 상황을 관리하는 정도로만 황 총리가 운신할 수 있도록 압박[…]해 주셔야 하지 않을까 생각한다”심지어 권태선 대표의 이 발언은 퇴진행동 운영위원회에 보고조차 되지 않았다. 그러나 〈매일노동뉴스〉에 보도됐고, 이를 우연히 발견한 퇴진행동 내 노동자연대 회원들의 제기로 논쟁이 벌어졌다. 이 논쟁을 계기로, 퇴진행동은 NGO들이 퇴진행동을 대표해 야당을 만날 때는 비공개로 하지 못하게 하고 면담이나 협상을 투명하게 공개할 것을 원칙으로 결정했다.
강조하건대, 당시 황교안 퇴진은 촛불의 정서이자 요구였다. 만약 이태호 실장처럼 퇴진행동이 황교안 대행 체제를 인정했다면, 퇴진행동은 광장에서 더는 정치적 신뢰를 받지 못했을 것이다. 무엇보다 ‘박근혜 없는 박근혜 정부’의 수장인 황교안과 그 내각을 반대하지 않는 것은 박근혜가 회생할 가능성을 열어 주는 일이 될 수도 있었다. 당시 “촛불운동은 갈림길에 서 있[었]다. 전진이냐 아니면 잠시 답보하다 퇴보까지 하느냐 하는 선택지 말이다. 정부·여당을 확실히 패배시켜야 한다. 적당히 패퇴시키고 빨리 선거 문제로 도망가는 것은 명망과 존경, 점잖다는 칭찬의 입발림 말을 늘어놓으며 정치적 소생의 기회를 엿보는 여권 세력에 반격의 기회를 주는 것이다”
더구나 당시 기무사가 위수령과 계엄령 발동을 진지하게 검토했다는 사실이 최근에 밝혀졌는데, 그 시점이 황교안이 권한대행을 하던 때이다. 이는 당시 온건파의 인식이 얼마나 순진했는지를 보여 준다.
황교안 퇴진에 반대한 온건파들이 백서 제작에 주도적 구실을 했으니, 당연하게도 백서는 퇴진행동 안에서 심각하게 논쟁이 된 이 쟁점을 아예 다루지 않았다.
분명했던 좌우 대립 구도를 인식하기
17 (이태호, 참여연대)
“우리 사회의 뿌리 깊은 진영화에 맞서야 할 것 같다. … 이분법적 사고를 벗어나야 한다. 진영 논리는 사회 발전을 막을 수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복지를 위해서 세금을 더 걷으려면 사회적 대화가 필요하다. 대화 상대가 보수일 수 있다. 시민운동이 조금 더 건전해지려면 상대와 협력하고 대화해야 한다. 진영 간의 모욕과 비난은 자제해야 한다.”이런 정치적 태도 탓에 NGO들은 2~3월에 극심했던 우파의 준동에 적극 대항하기를 꺼렸다. 〈한겨레〉 등 자유주의 언론은 돈 받고 나온 나약한 노인만 부각시켜 별일 아닌 듯이 보도했다.
NGO들은 당시 국면을 좌우 대립으로 규정하는 걸 무척 부담스러워하고 부정하려 했다. 그런 구도가 조기 대선 국면에서 야당에게 유리하지 않다고 판단했던 듯하다. “좌우 대립 프레임은 우리에게 불리하다. 촛불 집회 참가자를 좌파로 규정하면 협소해진다”는 것이 이유였다. 즉, “상식적인 보수(우파)”도 촛불집회에 나온다며 ‘5퍼센트 친박 세력 대 95퍼센트 국민’의 구도로 보길 원했다. 최장집 교수는 한줌밖에 안 되는 친박은 “이제 사멸할 세력”이라고 규정했다.
이런 시각은 우파가 세를 결집하고 반격을 도모하는 것의 위험성을 과소평가할 위험이 있었다. 이는 퇴진행동이 신속한 대응을 하지 못하도록 마비시키는 결과를 낳을 수 있었다.
그러나 실제로 당시 우파의 준동은 무척 선동적이고 격렬했다. 일부 취재 기자들과 세월호 노란 리본을 단 시민들이 구타당했다. 무엇보다 우파는 좌파에 대한 마녀사냥을 선동하고 언제든 물리적 폭력을 사용할 수 있다고 위협했다.
그래서 퇴진행동은 우파의 준동에 맞서 강력한 대응을 하기로 결정했다. 이에 맞서 NGO들은 광장의 시민들이 편안하게 느낄 수 있는 대중적 언어를 쓰자며 “준동”이라는 단어를 임의로 삭제하려 했다.
그러나 당시 JTBC 손석희 앵커도 뉴스에서 직접 이 표현을 언급할 정도로 ‘우파의 준동에 맞서자’는 문구는 대중적 언어였다.
NGO들은 자신들의 정치적 입장을 관철시키려 할 때 ‘시민들이 원한다’고 말한다. 마치 좌파들은 시민들과 괴리된 괴짜인 것처럼 여기면서 말이다. 그러나 촛불의 다수는 우파의 반격에 위협을 느꼈고, 그래서 긴급하게 잡힌 집회에도 많은 사람들이 모인 것이다.
당시 노동자연대는 우파의 반격에 맞서기 위해 2월 25일 민중총궐기 집회를 열 뿐 아니라, 우파들이 총결집할 3·1절 ‘태극기’ 집회에 대항하는 맞불 집회를 열어야 한다고 제안했다. 다행히 자민통계 활동가들은 3·1절을 이용해 한·일위안부 문제와 역사교과서 국정화 금지 등의 쟁점을 부각시킬 수 있다고 여겨 노동자연대의 제안을 적극 받아들였다.
만약 3월 1일 촛불 집회가 광화문광장에서 개최되지 않았다면, 우파는 군가를 부르며 광화문광장을 점령했을 것이다. 이를 통해 더 기세를 높이고 더 과감한 행동에 나섰을 것이다. 그리 되면 헌재의 결정에도 적잖은 악영향을 미쳤을 수 있다. 헌재는 계급세력 관계에 영향을 받는 정치적 기관이기에 얼마든지 가능성 있는 시나리오였다.
운동이 남긴 퇴적물, 실종된 고리, 과제
박근혜 퇴진 운동은 역대 한국 사회의 시위 기록을 갈아 치우는 일대 사건이었다. 연인원 1700만 명이 참가했고, 진보진영이 꿈꿔 온 100만 명 규모의 시위를 무려 6차례나 했다. 그 전까지 100만 시위는 1987년 6월 항쟁 기간에 두 차례, 2008년 광우병 쇠고기 수입 반대 촛불 때 한 차례가 전부였다. 또 단일 사안으로 거대한 대중 집회가 5개월 동안 이어진 것도 최초였다.
무엇보다 조직 노동자뿐 아니라 ‘정치적 무관심’ 층으로 분류되거나 거의 ‘존재감’ 없이 살아 가던 젊은 청년과 미조직 노동자들이 대중 행동의 힘을 느끼면서 운동에 참가했다. 비록 그들의 정치의식은 매우 모순돼 있었지만 말이다. “세월호 참사가 벌어지고 문제의 심각성을 알았지만 다른 누군가가 나서겠지 하면서 방관했다. [하지만] 국정농단 사태를 보면서 앞으로도 얼마든지 제2의 세월호, 제2의 최순실이 나올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 사람, 한 사람이 움직여야 세상이 바뀔 것 같다.”(윤정현 31세 여성, 〈한겨레21〉)
18 한 여론조사에서는 자신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집회 등 집단적 힘이 필요하다는 응답자가 59.5퍼센트였다.
이렇듯 퇴진 운동은 광범한 정치적 급진화를 낳았고, 촛불 참가자들이 “광장에서 함께 느낀 벅찬 감정은 ‘승리’의 경험과 합쳐”져 “‘가능성’, ‘자신감’ 등의 단어[가] 사용”되기 시작했다. 민주노총은 퇴진 운동 덕분에 조합원 수가 증가했다. 민주노총 발표에 따르면, 최근 1년 사이에 7만 6000여 명이 증가했다고 한다. 특히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조직 증가세가 뚜렷하다고 한다.무엇보다 퇴진 운동은 박근혜 파면·구속, 정권의 주요 실세들 구속, 삼성 이재용 구속 등 주요 요구를 성취하는 성과를 남겼다. 많은 참가자들이 거대한 대중운동에 참가한 경험은 있을지라도 그 요구가 성취된 경험은 드물다. 1960년 4·19 혁명 이래 대통령을 권좌에서 강제로 끌어내린 경험도 처음이다. 정말 기쁜 일이었다. 그뿐 아니라 박근혜가 추진하던 일부 적폐들이 중단됐다. 성과연봉제, 국정교과서 추진 등이 중단됐고, 자유한국당 등 우파의 목소리가 찌그러들었다.
그러나 광장에서 촛불이 청산을 요구한 수많은 적폐는 여전히 그대로다. 퇴진 운동의 직접적 수혜는 대체로 민주당과 개혁주의자들에게 돌아갔다. 이는 퇴진 운동의 발의자이자 참가자 구성에서도 다수였던 노동계급이 자신의 계급적 힘을 충분히 발휘하지 못한 것에서 비롯한다.
만약 혁명적 좌파가 노동계급 내 뿌리가 단단했더라면, 그리고 퇴진 운동 내 급진좌파들이 더 효과적으로 공조했더라면 퇴진 운동은 좀더 급진적이고 계급투쟁적으로 발전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물론 10월 29일 퇴진 촛불이 점화된 후 노동자연대의 제안으로 노동전선, 노동당, 좌파노동자회(현 평등노동자회), 노건투 등이 공조를 위해 지속적으로 논의를 했다.
백서는 다루지 않았지만, 급진좌파들은 퇴진 운동의 성장 속에서 민주노총이 총파업을 선언하고 조직하도록 기층의 압력을 조직하고자 했다. 이를 통해 퇴진 운동에 계급적 힘을 불어넣고자 한 것이다. 그래서 민주노총의 ‘즉각적인 총파업 선언·집행’을 촉구하는 현장 조합원 서명과 기자회견 등을 조직했다. 2주 동안 8200명 이상의 조합원이 서명에 참가했고, 당시에 파업 중이던 철도노조 조합원들이 대거 참가했다.
또, 국회의 탄핵소추안 가결 이후 NGO들과 자민통계 등이 중심을 조기 대선 쪽으로 이동시키려 할 때, 급진좌파는 ‘박근혜 정권 퇴진 투쟁과 노동자운동의 과제’를 주제로 공개 토론회를 개최하며 민주노총과 퇴진행동 안팎의 투쟁적인 목소리를 모아 내고자 했다. 늦었지만 노동자연대의 제안으로 2017년 1월 21일과 3월 4일 두 차례 ‘노동자 투쟁 마당’ 집회를 조직했다. 그러나 결정적 돌파구를 내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무엇보다 퇴진 운동 안에서 나름 능동적 구실을 한 사회변혁노동자당(변혁당)과 사회진보연대가 좌파 공조에 동참하지 않았다. 이들은 퇴진 운동 내내 자신들의 의제를 부각시키는 데 주력했다. 그래서 좌파들 사이 공조를 강화해 노동계급의 잠재력을 현실의 힘으로 만들기 위한 시도를 하는 데 나서지 않았다.
결국 노동계급의 힘을 충분히 동원하지 못했기에 퇴진 운동 5개월의 정치적 수혜는 일차적으로 민주당과 문재인에게로 갔다. 이로부터 얻어야 할 교훈은 노동계급 내 영향력이 있는 혁명적 좌파를 미리부터 건설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 과제가 잘 수행된다면, 혁명적 좌파는 다음번 분출 때는 더 전진해서 노동계급의 잠재력이 실현되는 데 더 큰 도움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일부 좌파의 정치적 약점
변혁당은 퇴진 운동 초기부터 능동적으로 참가하면서도, 그 전부터 자신들의 강조점이던 재벌 쟁점에 몰두했다. 특히 12월 9일 국회에서 탄핵소추안이 가결된 이후, 조기 대선 국면으로 전환하려는 온건파와 맞서야 할 시점에 재벌구속특별위원회에 완전히 ‘올인’했다. 당시는 운동의 주도권을 국회에 넘길 것인지, 황교안과 ‘박근혜 없는 박근혜 체제’에 맞서 투쟁을 어떻게 지속·확대할 것인지 등을 고민하고 실천해야 할 시기였다. 그러나 변혁당은 재벌 총수 구속을 배타적으로 강조했고, “권력은 쓰러져도 돈은 영원하다”며 국가와의 대결을 중시하지 않았다. 반재벌은 곧 반자본이고, 또 반자본주의라고 보는 협소하고도 부정확한 개념에서 나온 오류인 듯하다. 이 도식은 극소수 재벌에 집중하며 민중주의로 나아가고, 결국 개혁주의로 미끌어질 공산이 크다.
20 퇴진 운동 참가의 주된 목적으로 삼았다. 다분히 편협한 태도이다.
변혁당은 퇴진 운동을 “재벌을 초점으로 하는 반자본 투쟁으로 발전시키는 것”, 그 과정에서 “변혁당 강령을 선전하고 반자본 계급운동의 역량을 확대·강화하여 그 힘을 변혁당으로 수렴시켜 내는 것”을결국 변혁당은 재벌 총수 구속이라는 협소한 운동에 주력했다. 국가권력에 맞선 퇴진 운동을 더 계급투쟁적으로 이끌려 하기보다는 자신의 강령을 선전하는 방향으로 나아간 것이다.
21 이 5가지 과제는 모두 지지할 만한 내용이다. 그러나 이를 실현하는 “주권자”에는 “계급”이 존재하지 않았다. 이 때문인지, 사회진보연대는 퇴진 운동 내내 노동계급의 주도적 역할을 강조하지 않았다.
사회진보연대도 박근혜 퇴진 운동 기간 내내 ‘주권자 명령’을 제안하고 선전하는 데 주력했다. 이들은 5가지 과제를 ‘주권자’의 이름으로 호소했다.혁명적 좌파가 성장해야
퇴진 운동 덕분에 문재인과 민주당이 일차적 수혜자가 돼 집권했다. 조기 대선 결과를 보면, 민주당만큼은 아니더라도 노동계 개혁주의(특히 정의당)도 부상했다. 박근혜 퇴진 운동 참가자들의 변화 염원이 이런 정치 현실의 저변에 깔려 있다. 이번 6·13 지방선거 결과도 그 연장선에 있다.
개혁주의의 매력은 모호함에서 나온다. 노동자들이 개혁을 바라지만 혁명에 대한 확신이 아직은 분명하지 않을 때, 개혁주의적 대안은 매력적으로 다가올 수 있다. 또, 혁명을 이끌 좌파가 계급 내 영향력이 약하다면 대중의 급진화는 개혁주의로 수렴되기 쉬울 것이다.
문재인 집권 이후 개혁주의 지도자들은 문재인 응원하기에 나서고 있다. 심지어 문재인 정부를 촛불 정부로 규정하고 지지·엄호를 호소하기도 한다. 남·북/북·미 정상회담 속에서 한반도 평화 분위기도 한몫해 왔다.
그럼에도 문재인 정부에 대한 저항은 시작되고 있다. 무엇보다 퇴진 운동의 가장 주요 세력이었던 노동자들이 문재인의 노동정책에 맞서 투쟁을 시작하고 있다. 노동운동과 좌파는 문재인 정부와 독립적으로 아래로부터의 투쟁을 건설해야 한다.
혁명적 좌파는 개혁주의 세력과 공동 행동을 조직하면서도, 혁명적 정치가 개혁주의 정치보다 낫다는 것을 실천으로 입증할 수 있어야 한다. 개혁주의 지도자들이 행동하기를 두려워하고 거부할 때는, 독자적으로 운동을 건설하고 전진시킬 줄도 알아야 한다. 혁명적 좌파로서의 원칙과 투쟁성, 개혁주의 세력도 기꺼이 공동 행동을 할 줄 아는 유연성, 둘 다가 필요하다.
주
- 김봉석 2016. ↩
- 이한주 2017. ↩
- 이동연 2017. ↩
- 박찬표 2017. ↩
- 정성진 2017. ↩
- 임명도 2016. ↩
- 최일붕 2017. ↩
- 최일붕 2017. ↩
- 백서 p126. ↩
- 손가영 2017. ↩
- 백서 p126. ↩
- 박태균 2017. ↩
- 천정환 2017. ↩
- 백서 p175. ↩
- 민주당·국민의당 공식 논평, ‘박근혜정권퇴진 비상국민행동 면담 모두발언’(2016년 12월 20일) ↩
- 최일붕 2016. 강조는 원문. ↩
- 강민수 2014. ↩
- 김지원·정대연·허남설·송윤경 2017. ↩
- 민주노총, 2018년 4월 30일, 촛불항쟁 이후 민주노총 조직 확대 현황 발표 기자회견 보도자료. ↩
- 김태연 2016. ↩
- 국회 탄핵소추안 가결 전에는 ① 박근혜 구속해야 퇴진이다 ② 새누리 퇴출해야 퇴진이다 ③ 삼성 이재용 처벌해야 퇴진이다 ④ 정치검찰 해체해야 퇴진이다 ⑤ 박근혜 정책 폐기해야 퇴진이다.(12월 3일 자 사회진보연대 유인물) 이후 상황 변화에 따라 약간씩 수정했다. ↩
참고 문헌
강민수 2014, ‘”이명박근혜”보다 무서운 건 따로 있다. 보수-진보간 모욕과 비난은 자제해야.’ 〈오마이뉴스〉.
김봉석 2016, ‘100만일 넘어선 파업 근로손실일, 최근 10년간 최대로 이례적’, 〈매일노동뉴스〉.
김지원·정대연·허남설·송윤경 2017, ‘민주주의는 목소리다’, 〈경향신문〉.
김태연 2016, ‘몸통과 공범들 — 탄핵안 가결 후, 그들을 향한 투쟁’, 〈변혁정치〉 36호.
박찬표 2017, ‘촛불과 민주주의: 촛불 시위에서 드러난 한국 시민사회의 쟁점과 한계’, 《양손잡이 민주주의》, 후마니타스.
박태균 2017, ‘촛불의 역사적 의의와 한국 사회의 과제’, 〈현안과 정책〉 162호, 지식협동조합 좋은나라연구원.
손가영 2017, ‘무서운 촛불 명령 되살릴 수 있을까’, 〈미디어오늘〉.
이동연 2017, ‘촛불의 리듬, 광장의 문화역동’, 《마르크스주의 연구》 제14권 제1호.
이한주 2017, ‘야매 주간지 “오병이어” 발간 분투기’, 철도웹진 〈공감李吳〉.
임명도 2016, ‘100만 집회 참가자 66% 11월 26일에도 간다’, 〈오마이뉴스〉.
정성진 2017, ‘촛불 혁명과 마르크스주의의 과제’, 《마르크스주의 연구》 제14권, 제2호.
천정환 2017, ‘누가 촛불을 들고 어떻게 싸웠나’, 《역사비평》 118호.
최일붕 2016, ‘갈림길에 선 박근혜 퇴진 운동’, 〈노동자 연대〉 190호.
최일붕 2017, ‘계급 관점에서 본 박근혜 퇴진 운동’, 〈노동자 연대〉 201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