쟁점 : 현재의 이슈들
고전 마르크스주의에 입각한 스탈린주의 비판
세월호 참사와 그 항의 운동, 박근혜 정권 퇴진 촛불 운동을 겪으며 많은 청년들이 급진화하기 시작했다. 그중 일부는 자본주의 체제에 불만을 가지게 됐을 것이다. 이런 젊은이들이 대안을 찾는 과정에서 사회주의에 관심을 가지게 될 수 있다.
자연히 사회주의는 무엇인가 하는 물음이 제기될 것이다. 고전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옛 소련과 중국, 쿠바, 북한 등은 진정한 사회주의가 아니라 자본주의의 변형태일 뿐이라고 주장해 왔다. 그러나 우파는 물론이고 진보·좌파 사이에서도 지배적인 이데올로기는 그 사회들을 ― 부정적 이유에서든 긍정적 이유에서든 ― 사회주의라고 부른다.
한편, 남·북/북·미 정상회담이 열리면서 ‘북한 문제’가 다시 중요한 정치 주제로 떠올랐다.(사실, ‘북한 문제’는 오랜 시간 동안 남한 정치의 상수로 돼 있었다.) 5월 26일 2차 남북 정상회담 자리에서 문재인은 김정은에게 “한국에서 김정은 위원장의 인기가 아주 높아졌다”고 말했다. 바로 얼마 전까지 고모부와 이복형을 처형·암살한 잔인한 독재자였던 김정은이 호감형 지도자로 그려지는 순간이다.
새롭게 정치화하는 새 세대의 일부를 혁명적 정치로 이끌려면, 혁명적 좌파는 ‘북한 문제’에 답해야 한다. 북한의 핵무력 완성이 정상회담을 이끌어낸 것인가, 북한은 주체사상으로 똘똘 뭉친 계급 분열이 없는 사회인가, 북한은 사회주의인가 등등.
이런 정치 현상에 제대로 대처하려면 주체주의의 원조인 스탈린주의를 이해할 필요가 있다.
스탈린은 누구인가?
먼저, 레닌의 계승자로 자처하고 대부분이 그렇다고 인정해 온 스탈린을 알아보자.
이오시프 스탈린은 1928년부터 1953년 사망할 때까지 소련을 지배한 절대 독재자였다.
스탈린의 본명은 이오시프 비사리오노비치 쥬가쉬빌리다. 스탈린은 “강철 인간”이라는 뜻의 가명이었다. 그는 1878년 조지아(옛 그루지아)에서 태어났다.
차르가 통치하는 러시아는 빈곤과 권위주의적 지배로 특징되는 엄혹한 사회였다. 스탈린은 성직자 교육을 받았다. 이것은 당시 가난한 집안의 아이들이 받을 수 있는 유일한 교육 기회였다. 그러나 혁명적 활동을 했다는 이유로 신학교에서 퇴학당했다. 스탈린은 레닌의 볼셰비키당에 가입했다. 그 무렵 막 등장한 볼셰비키는 전투적이었던 러시아 노동계급 중 소수를 조직하는 데서 출발해 마침내 러시아에서 자본주의 지배를 끝내는 혁명에서 노동계급 다수의 지지를 얻었다.
스탈린은 일찌감치 볼셰비키 지도부가 됐다. 스탈린은 제1차세계대전의 대부분을 시베리아의 유형지에서 보냈다. 그 시기에 레닌은 러시아 혁명의 전망을 근본적으로 재고하고 있었다. 이 시기에 스탈린이 쓴 것은 거의 없었다.
1917년 러시아에서 혁명이 일어났고, 노동자들은 소비에트를 만들어 스스로 권력을 장악했다. 그러나 3월부터 10월까지 스탈린은 정치적 두각을 나타내지 않았다. 미국인 저널리스트 존 리드가 쓴 러시아 혁명에 관한 고전적 설명인 《세계를 뒤흔든 열흘》에서 스탈린이 두어 번 정도 지나가듯이 언급된다.
혁명은 전 세계 지배계급을 두려움에 떨게 했다. 주요 열강들이 모두 러시아의 옛 지배자들을 지원하고 신생 노동자 국가를 파괴하기 위해 군대를 보냈다. 야만적인 내전 동안 소비에트와 볼셰비키 중 최상의 노동자들이 혁명을 방어하려고 전선에 뛰어들었다. 가장 전투적이고 정치 의식이 높았던 노동자들의 대다수가 내전 과정에서 전사하거나 국가 관료 자리에 올랐다.
이 좌절의 시기에 레닌은 혁명을 방어하는 데 필요한 권한과 능률을 가차없이 행사할 임무를 스탈린에게 맡겼다. 그러나 1922년 죽음을 앞둔 레닌은 그 유명한 유언을 남기며 다른 볼셰비키 지도자들에게 경고했다. “서기장이 된 스탈린 동지는 무제한의 권한을 수중에 넣었습니다. 나는 그가 늘 충분한 주의를 기울이며 그 권한을 행사할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스탈린주의의 부상은 혁명 패배의 산물이었다. 서유럽의 혁명이 실패하고 러시아 국내에서는 노동계급이 붕괴하고 사기저하되자 국가 기구는 관료들의 수중에 넘어갔다. 노동계급과의 연계는 미사여구였을 뿐이었다.
1923년 10월 독일 혁명이 최종 패배하자 1924년에 스탈린은 ‘일국사회주의’를 천명했다. 이것은 국가 관료의 구호였다. 국제 혁명이라는 모험으로 골머리를 앓고 싶어 하지 않던 “관료들의 정서를 명확히 표현했다.”(트로츠키) 1917년에 레닌은 노동계급을 향해 ‘모든 권력을 소비에트로!’라고 외쳤다. 반면, 1924년에 스탈린은 관료를 향해 ‘사회주의의 승리’를 말했다. 레닌의 전략이 혁명이 서구로 급속히 확산될 것이라는 희망에 근거했다면, 스탈린은 세계 혁명이 한없이 연기됐다고 주장했다.
스탈린의 정책은 국제 사회주의 운동에 재앙적인 영향을 미쳤다. 최악의 재앙은 모스크바가 지령을 내린 독일공산당의 노선이었다. 즉, 독일 사회민주당원들이 파시스트보다 낫지 않다는 것이었다(‘사회파시즘’론). 그래서 독일공산당원들은 사회민주당원들과 공동전선을 결성하지 않았고 그 덕분에 히틀러가 권력을 거머쥐었다. 제2차세계대전 발발 직전인 1939년 8월 23일 스탈린은 아돌프 히틀러의 독일과 불가침조약을 맺었다. 공산당을 파시즘에 대항하는 가장 단호한 반대자로 여겼던 전 세계 공산주의자들이 커다란 충격을 받았다. 러시아로 피신해 온 독일 공산주의자들이 히틀러에게 넘겨졌다.
그러나 스탈린의 책략은 소용없었다. 히틀러는 이 조약을 지연 전술로 사용했고, 서유럽을 점령하자 1941년에 러시아를 침공했다. 러시아 인민은 엄청난 용기로 저항했고 막대한 희생을 치렀다.
1944년 10월 스탈린은 모스크바에서 영국 총리 윈스턴 처칠을 접대했다. 이 두 깡패들은 협상을 통해 전후 유럽 분할을 기획했다.
1953년 3월 5일 스탈린이 죽었다.
스탈린 체제의 진정한 성격
많은 사람들이 러시아 혁명이 스탈린 공포로 이어진 것은 필연이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는 복잡한 역사적 과정을 안이하게 정리하는 게으른 접근이다.
이 말이 진실이라면, 스탈린은 왜 1917년 혁명 이전에 볼셰비키당을 건설한 최상의 투사들을 살해했겠는가. 레닌의 많은 절친한 동지들이 말도 안 되는 모스크바 정치 재판의 희생자가 됐다. 이들은 거짓말과 날조된 증거에 의해 유죄 판결을 받고 처형되거나 시베리아 수용소 군도로 유배됐다. 스탈린의 가장 강직한 반대자인 트로츠키는 추방당했고 스탈린의 지령에 의해 마침내 살해당했다.
권력을 잡은 스탈린은 자력 공업화를 러시아의 과제로 삼았다. 1931 년 스탈린은 말했다. “우리는 선진국보다 50년 또는 100년이 뒤처져 있다. 우리는 이 차이를 10년 안에 극복해야 한다. 우리가 해내든지 도태하든지 둘 중 하나다.” 논리는 간단했다. 러시아 경제를 현대화하고 서방 세력과 군사적으로 대결할 준비를 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영국 같은 선진국들의 산업화 과정에서 수백만 노동자들의 삶이 파괴됐다. 스탈린도 영국 같은 서방 국가들이 산업혁명을 밀어붙이는 데 사용했던 유혈낭자한 방법을 모방해 단기간에 공업화하려 했다. 영국에서 300년에 걸쳐 진행됐던 농민 토지 강탈, 소수 민족 지배, 아동 노동, 반대 세력 테러 하기 등을 스탈린은 20년 만에 끝냈다.
박노자 씨는 스탈린 시대에 경제 발전과 성장이 있었다고 주장하면서 그 체제를 사실상 변호한다. 스탈린 체제에서 후진국 러시아는 경제 발전을 통해 주요 공업 강국이자 군사 대국으로 변모했다. 그러나 러시아가 이룩한 성장은, 역사적으로 봐도 미국과 일본 그리고 최근 수십 년 동안 중국 같은 자본주의 사회들이 이룬 것에 비해 대단한 것은 아니다. 그나마 경제가 완만하게 성장하다 사실상 멈춰 버렸고 마침내 1989∼1991년에 체제가 붕괴했다.
무엇보다 진정으로 중요한 것은 이런 성장과 공업화가 러시아 노동 대중의 희생을 대가로 이룬 것이라는 점이다.(한국에서 박정희 정권의 공업화가 노동계급에 대한 착취 강화와 민주적 권리 탄압을 수반한 것과 본질적으로 똑같다.)
스탈린주의 체제에서 노동 규율은 엄격했고, 노동조합 결성권과 파업권은 없었다. 노동조합이 형식적으로 존재했지만, 산업 경영진으로 이뤄진 당·국가가 철저하게 통제했다. 수용소로 보내져 강제 노동을 당한 사람들의 압도 다수는 노동자와 농민 등 평범한 사람들이었다.
스탈린주의는 여성, 성소수자, 소수 민족에게 반동적 재앙이었다. 레닌 시대의 혁명은 이 모든 영역들에서 거대한 진보를 이뤘다. 그러나 스탈린 체제는 그 성과들을 모두 되돌려 놨다. 러시아 혁명은 여성의 완전한 법적·사회적 평등을 선언했다. 1920년에 소비에트는 세계에서 최초로 낙태를 전면 무상 합법화했다. 스탈린주의 러시아는 1935년에 낙태를 범죄화했다. 모성영웅 상훈도 제정했다.
1917년 말에 볼세비키 정부는 일찌감치 동성애 비범죄화를 조처했다. 게이임을 밝힌 게오르기 치체린은 1918년 5월부터 1930년까지 외무인민위원을 역임했다. 그러나 1933년에 동성애는 다시 불법이 돼 1993년까지 그 상태가 유지됐다.
스탈린이 러시아화 정책을 추진하면서 러시아의 소수 민족들이 천대당했다. 소련 내 민족공화국들이 해체됐다. 그리고 그 민족 전체가 강제 추방당했다. 가령 1941년 볼가독일인 자치공화국, 1943년 칼미크공화국, 1946년 체첸과 크림 타타르족이 그랬다. 또 1937년 연해주에 살던 고려인 18만 명이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됐다.
이런 권위주의적 통치를 지탱하기 위해 민주적 권리는 깡그리 부정당했다. 모든 선거는 철저하게 조작돼 집권당인 공산당 후보들이 언제나 거의 100퍼센트를 득표했다. 일당 국가였다. 정치적·지적·문화적 비판이나 반대는 허용되지 않았다. 그 나라의 사회적 삶 전체는 당·국가와 게페우(비밀경찰)의 전체주의적 철권 지배를 당했다.
즉, 러시아의 경제 성장은 엄청난 야만성을 수반했다. 이것은 정확히 스탈린의 반혁명이었다. 혁명을 만든 노동자 권력이 새로운 지배계급의 지배로 대체된 것이다.
이제 새로운 형태의 자본주의가 출현했다 — 국가자본주의. 그것은 시장 자본주의 모델과 매우 다른 것처럼 보였지만, 착취당하는 노동자들의 관점에서는 둘은 똑같다. 스탈린의 “계획 경제”는 민주적인 사회주의 계획과 아무 관련이 없었고, 오직 급속한 공업화만이 목표였다.
1
레닌주의가 스탈린주의를 낳았는가?그런데도 레닌주의의 성격이 스탈린주의를 만들거나 낳았다는 주장이 대세다(연속성 테제).
2 ). 국제적으로 사회민주주의의 다수도 이런 입장이다. 국제 공산당 운동의 압도 다수가 같은 입장이다. 노엄 촘스키 같은 매우 영향력 있는 인물을 포함한 아나키즘 경향도 같은 주장을 한다.(최근에 번역 출간된 《촘스키, 절망의 시대에 희망을 말하다》에서 촘스키는 이런 주장을 다시 밝힌다.)
서방 기성 체제 전부와 그들의 미디어 거의 다가 이런 주장을 한다. 학계의 압도 다수도 그렇다(정성진 교수의 우경화는 이런 학계의 지배적 유행을 따른 것뿐이다반대로 레닌주의와 스탈린주의 사이에는 근본적인 단절이 있다는 주장은 매우 적다(불연속성 테제). 레온 트로츠키, 토니 클리프와 국제사회주의경향, 라야 두나예프스카야, C.L.R. 제임스, 핼 드레이퍼 같은 트로츠키주의자들, 랄프 밀리밴드, 마르셀 리브만 같은 일부 마르크스주의 지식인들.
레닌주의가 스탈린주의를 낳았다는 주장이 압도적으로 지배적인 것은 우선 그것이 부르주아 이데올로기의 지원을 받기 때문이다.
부르주아 이데올로기의 핵심 사상은 자본주의가 ‘자연스럽고’ ‘인간 본성’에 부합한다는 것이다. 사회주의는 인간 본성에 반하므로 무력과 독재를 통해 사회에 강요돼야 한다. 그러므로 자유시장 자본주의만이 자유와 민주주의와 양립할 수 있다. 인류 역사에 대한 천박한 이해다. 수십만 년 동안 계급이 없는 평등주의적 수렵·채집 사회들이 존재했다.
부르주아 이데올로기는 레닌주의자들이 권력을 잡았다고 선언한 동유럽·중국·북한·쿠바 등이 모두 일당 독재였거나 지금도 일당 독재라는 사실 덕분에 정당화된다.
그러나 (쿠바를 빼면) 위 나라들에서 정치 지도부는 권력을 잡기 전에 이미 철저하게 스탈린주의적이었다. 레닌과 아주 약간이라도 비슷한 정치 전략을 결코 추구하지 않았다. 제2차세계대전 말엽과 종전 직후 동유럽과 북한에서 ‘공산주의’ 세력은 아래로부터의 노동자 혁명이 아니라 소련 군대의 점령 덕분에 집권했다. 레닌주의가 스탈린주의를 낳은 것이 아니라 스탈린주의가 스탈린주의를 낳은 것이다.
중국과 쿠바에서는 혁명을 농촌에서 중간계급 지도부가 이끈 농민이 주축인 게릴라 군대가 수행했다. 혁명의 계급적 성격과 정당의 계급적 기반은 마르크스주의와 레닌 자신에게 절대적으로 근본적인 문제였다.
혁명적 투쟁과 정당의 사회 기반과 관련해 마르크스와 레닌은 농민이 아니라 노동계급을 가장 중요하게 봤다. 노동계급이 현대 산업과 대도시들에 집중돼 있고, 자본주의를 패퇴시킬 잠재력과 능력을 갖고 있으며, 그들이 국가 권력을 장악해 생산 계급이자 동시에 지배계급이 되면 계급 없는 공산주의 사회로 가는 길을 열 수 있다는 것이 마르크스주의자들의 핵심 전망이다.
이와 달리 농민은 혁명에서 노동계급의 동맹으로 중요한 구실을 하지만, 스스로 해방되거나 사회주의 건설을 지도할 능력이 없다. 중국과 쿠바에서 농민들은 혁명적 게릴라 부대의 병사들이 돼 매우 허약한 국민당(중국)과 바티스타(쿠바) 정권을 무너뜨렸다. 그러나 도시들에 있는 주요 생산력들을 통제해 경제와 국가를 운영할 수는 없었다. 농민의 사회적 위치가 농촌의 농업에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은 새로운 지배계급(국가 자본가)의 맹아가 된 자신의 지도자들에게 사회 운영을 넘겨야 했다. 그래서 중국이나 쿠바 정권의 반민주적 성격을 레닌주의의 적용 탓으로 돌려서는 안 된다.
레닌과 스탈린의 연속성을 정당화하는 또 다른 레퍼토리는 혁명 직후 레닌과 볼셰비키의 통치 행위에서 스탈린주의의 씨앗이 뿌려졌다는 것이다. 1917∼1922년 레닌과 볼셰비키의 행위들을 보면서, 레닌주의/볼셰비즘의 이데올로기와 조직적 실천들이 스탈린주의의 등장을 가능케 하는 데서 중요한 구실을 했다는 주장이다. 반스탈린주의적 마르크스주의자들의 주장이 종종 보수적이거나 자유주의적이거나 아나키스트적인 반마르크스주의자들의 주장과 겹치는 지점이다.
이들이 비난하는 레닌의 ‘범죄 목록’들 중 대표적인 몇 개를 소개해 보자.
(1) 레닌은 처음부터 사회혁명당 우파와 멘셰비키 같은 다른 ‘사회주의자들’과의 광범한 동맹을 거부하고 오직 사회혁명당 좌파와 선명한 볼셰비키 다수파만의 편협한 정부를 지지했다. 그래서 레닌은 다당제 소비에트 민주주의를 거부하고 일당 독재 방향으로 나아갔다.
(2) 볼셰비키는 혁명 전에 제헌의회 소집을 꾸준히 요구했는데도, 레닌은 1917년 가을에 제헌의회 선거 실시를 반대했다. 선거 결과 반볼셰비키 진영이 다수가 되자, 레닌은 1918년 1월에 제헌의회를 강제 해산했다. 그리하여 일당 독재로 더 나아갔다.
(3) 레닌과 공산당 정부는 1921년 3월에 크론시타트 해군 반란을 진압했고, 당내 분파를 금지해 자유로운 논쟁에 마지막 결정타를 날렸다.
이것은 역사적 사실인가?
(1) 사회혁명당과 멘셰비키는 봉기가 일어나자 소비에트에서 뛰쳐나갔다. 그럼에도 10월 혁명을 반대했던 볼셰비키 우파는 이들과의 협상에 착수했다. 그러나 사회혁명당 우파와 멘셰비키는 자신들에게 다수당 지위를 부여하고 레닌과 트로츠키를 정부에서 배제할 것을 요구했다. 이들과의 동맹은 10월 혁명을 원천 부정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11월 18일에 볼셰비키와 사회혁명당 좌파의 연립정부가 구성됐다. 그런데 사회혁명당 좌파가 브레스트-리토프스크 조약(러시아와 독일의 강화 조약) 체결에 반발하면서 연립정부는 붕괴했고, 사회혁명당 좌파는 반정부 무장 투쟁을 시작했다.
(2) 10월 혁명 이후 제헌의회는 반혁명의 결집점이 되고 있었다. 혁명을 지키려면 제헌의회를 해산해야 했다. 그리고 마르크스주의이고 레닌주의적인 관점에서 보면, 소비에트가 부르주아 의회 형태인 제헌의회보다 더 높은 수준의 민주주의, 특히 노동계급 민주주의를 표현했기 때문에 제헌의회 해산은 정당하다.(일부 좌파는 부르주아 민주주의에 비해 월등히 민주적인 소비에트 체제의 장점을 말하지 않은 채, 사회주의 정당들의 공동 정부 수립이 불가능해져 제헌의회 해산이 불가피했다는 점만 지적하는 경향이 있다.)
(3) 1921년 3월 크론시타트 반란은 노동자 국가를 심각하게 위협한 반혁명적 농민 반란이었다.
1917년 7월 트로츠키는 크론시타트 요새를 “혁명의 자부심이자 명예”라고 말했다. 1917년의 해군들은 페트로그라드 지역의 노동자 출신이 많았다. 그러나 1921년의 크론시타트는 더는 1917년의 크론시타트가 아니었다. 1917년 혁명에 참가했던 크론시타트 해군들은 그 뒤 내전에서 가장 위험한 전투에 참가했고, 새로운 해군들이 그 자리를 메웠다. 1921년의 크론시타트 해군은 4분의 3이 농민이었다.
1921년의 해군들은 내전과 제국주의 군대의 개입이 낳은 혼란과 파괴의 결과를 부인했고, 그 모든 책임을 볼셰비키 정부에 떠넘겼다. 또, 그들은 ‘공산주의자 없는 소비에트’를 요구했다. 사회혁명당과 부르주아 자유주의 정당인 카데츠가 이런 요구에 호응했다.
그래서 아나키스트 출신 공산주의자 빅토르 세르쥬는 처음에 크론슈타트 해군의 요구에 공감했지만, “볼셰비키 독재가 실패할 경우 … 또 다른 독재가 나타날 것이다. 그 독재는 반프롤레타리아적일 것”이라는 이유로 정부의 반란 진압을 지지했다.
요컨대, 크론시타트 반란 진압은 전략적으로 페트로그라드의 관문에 위치한 해군 요새의 반란이 막 끝난 내전을 재개해, 병사들의 주관적 의도와 상관없이 반혁명의 손아귀에 놀아날 위험이 있었다는 맥락에서 “비극적 필요”(트로츠키의 표현)였다.
1917∼1921년에 러시아 역사와 레닌의 저작들을 보면, 레닌과 볼셰비키 정부 활동을 결정하는 주된 요인들은 압도적으로 외부 상황들이었다. 이 시기 레닌의 저작을 읽는 것은 그 나라가 직면한 재앙을 완전히 이해하는 어떤 사람을 읽는 것과 한가지다. 그는 노동자들에게 한 연설과 편지에서 “극단적으로 어려운 상황”, “대단히 위험한 상황”, “기진맥진하고 황폐해진 나라” 등을 거듭거듭 지적한다. 그러나 레닌은 그 나라가 처한 재앙을 말할 때면 언제나 저항하고 사력을 다해 혁명을 방어하고 국제 혁명의 지원이 올 때까지 버티겠다는 굽힘 없는 결의를 함께 밝힌다.
국제 혁명이 올 때까지 버티는 것은 모든 볼셰비키 전망의 핵심이었다. 러시아 사회주의 혁명이 유럽 전역, 무엇보다 독일에서 혁명의 확산을 촉진할 거라는 기대였다. 가혹한 내전 조처만이 아니라 10월 봉기 그 자체를 정당화하는 기대였다. 스탈린이 1924년 말에 ‘일국사회주의’ 교리를 공표하기 전까지 러시아 한 나라에서 사회주의 건설은 불가능하다는 것이 러시아 마르크스주의자들의 상식이었다.
따라서 독재적이거나 전체주의적 야심을 가진 매우 권위주의적 인물인 레닌과 그가 창조한 볼셰비키 정당이 스탈린주의 등장의 원인이었던 양 설명하는 것은 아주 노골적인 ‘위인’ 역사 이론일 뿐이다. 20세기 역사에서 가장 중요했던 사건을 한 개인이나 한 조직의 사상과 행동의 결과로 설명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레닌을 그렇게 묘사하는 것도 완전히 틀렸다.
러시아 혁명과 중요한 새로운 사회(소련)의 등장은 세계적으로 중요한 사건이고, 이런 역사적 전개는 사회 세력, 가령 생산력 발전에 영향받는 사회 계급들의 투쟁으로 설명해야 한다. 즉, 혁명 이후 러시아와 국제적 규모로 전개된 객관적인 물질적 조건에서 시작해, 이 조건들이 러시아의 사회 구조와 계급 세력 균형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를 살펴봐야 스탈린주의의 부상과 원인을 제대로 분석할 수 있다.
이렇듯 마르크스주의적 분석은 물질적 조건과 계급 세력 균형에서 출발한다. 그런 분석에 근거해 스탈린주의의 부상과 승리를 이데올로기나 심리의 산물이 아니라 근본적으로 계급투쟁 과정으로 본다.
이것이 이데올로기, 정치 또는 심지어 개인의 구실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이런 점들이 특정 상황에서 경쟁하는 세력 간 균형을 바꾸는 데서 결정적일 수도 있다. 그러나 역사 발전의 원동력이 아니라 설명의 사슬에서 최종 고리로 자리매김돼야 한다.
마르크스주의적 역사유물론에 따르면, 90년 전 스탈린주의 반혁명으로 타락한 상황과 오늘날에는 차이점도 볼 수 있다. 1917년 이후 100년 동안 세계적으로 생산력의 거대한 발전과 어마어마한 부의 축적이 있었다. 혁명을 통해 노동계급이 이를 이용할 수 있다. 오늘날 주요 나라들의 혁명은 러시아 혁명보다 훨씬 더 발전한 경제적 토대 위에서 시작할 것이다.
또, 국제적으로나 거의 모든 개별 나라들에서나 노동계급은 러시아에서보다 규모도 훨씬 크고 강력해졌다는 점이다. 가장 중요한 점이다. 1918∼1921년보다 노동계급을 해체하고 원자화하기가 훨씬 더 어려울 것이다. 따라서 21세기 노동자 혁명이 또다시 새로운 종류의 스탈린주의로 타락할 것이라고 지레 겁을 먹을 까닭은 없다.
소련권 밖 스탈린주의와 한국 스탈린주의
앞에서 살펴봤듯이, 소련에서 스탈린주의는 마르크스주의 미사여구를 사용하지만 실제로는 국가자본주의 지배계급이었던 반혁명적 관료 집단의 이데올로기였다.
반면, 소련권 밖 스탈린주의는 소련 지배 관료의 대리인 구실을 했지만, 해방 운동에 헌신하는 사람들이라는 점에서 소련 국가 관료와는 달랐다. 즉, 소련 국가 관료가 압제자였다면, 소련권 밖 스탈린주의는 억압받는 민중의 옹호자를 자임했다.
레닌 사후 코민테른(공산주의 인터내셔널)을 장악한 스탈린주의 세력은 코민테른을 원래의 목적인 세계 노동자 혁명의 길에서 벗어나게 만들었다. 이런 방향 전환을 매개한 이데올로기는 ‘일국사회주의’론이었다. 한 나라 안에서 사회주의를 확립할 수 있다면 국제 혁명은 선택 사항일 뿐일 것이다.
소련 밖 공산당은 소련의 국경수비대 구실을 하게 됐다. 즉, 소련에 적대하는 자국 지배계급의 대對소련 군사 개입의 위험성을 막는 것이었다. 이를 위해 소련은 각국 공산당이 자기 나라 부르주아지에 대해 개혁주의적 압력 집단을 구실을 하도록 권장했다. 이 정책은 1935년 인민전선으로 나타났다.
‘일국사회주의’론에 따라 한 나라 안에서 사회주의 건설이 가능하다면, 스탈린주의 운동에서 민족주의의 경향이 발전하는 것은 시간 문제였다. 소련권 밖 스탈린주의는 자국 노동운동 진영 관료 집단 일부의 이데올로기로 변모했다.
물론 이 과정은 단기간이 아니라 40여 년에 걸쳐 진행된 것이다. 1935년 인민전선을 핵심 전략으로 채택됐어도, 바로 그 순간에 서유럽 공산당들이 개혁주의 정당이 된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제2차세계대전 동안 스탈린주의 지지자들은 반파시즘 투쟁에 헌신했다.
종전 후 1956년 헝가리 혁명, 1968년 체코 ‘프라하의 봄’ 등으로 스탈린주의의 위기가 시작되고, 1970년에 유러코뮤니즘이 출현했다. 그 시기에 서방 공산당들은 고전적 개혁주의 정당으로 변모하려고 노력했다. 이탈리아 공산당이 이를 선도했다. 이탈리아 공산당은 1973년 칠레 쿠데타에 의한 아옌데 정부의 붕괴에 놀라 기독민주당·사회당과 연립정부를 구성하는 ‘역사적 타협’을 선언했다.
주체주의는 스탈린주의의 북한판이다. 북한은 소련군 탱크에 의해 수립된 국가였다. 김일성도 스탈린의 모델을 따라 한반도 이북에서 급속한 공업화(일국사회주의)를 이루려 했다. 주체 사상은 북한 국가자본주의 건설을 위해 중공업에 투자를 집중하면서 끊임없는 희생과 무자비한 동원을 요구하는 이데올로기로서, 강력한 민족주의에 기반하고 있다. 주체 사상이 강조하는 “사람 중심 세계관”이란 협소한 자원으로 경제 성장을 이루기 위해 인민의 노동력이 절실히 필요하다는 뜻이다. 주체 사상의 핵심 요소인 수령론은 주체주의의 “대중 노선”이 실은 엘리트주의에 지나지 않음을 보여 준다.
그러나 바로 위에서도 지적했듯이, 북한 관료와 남한의 NL 활동가들을 구별하는 게 중요하다. 조선노동당은 지배계급, 즉 군 장성, 보안경찰 수뇌, 기업 경영자의 당이다. 남한의 NL 활동가들도 그런 지위를 갈망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북한 체제에 충성을 보낸다는 점 때문에 그들은 남한의 기성 체제로부터 배제되거나 탄압받는다. 북한 관료는 우리의 동지가 전혀 아니지만, 남한 NL 활동가들은 우리 운동의 일부다.
남한에서 주체 사상은 1980년대 중반에 급속히 성장했다. 주체주의의 가장 커다란 특징은 북한 정권을 지지하고 그 정권의 외교 정책에 종속된다는 점이다. 즉, 남한과 국제 노동계급 운동의 이해관계보다 북한 정권 방어를 더 중요한 일로 여긴다는 것이다. 미국의 대북 압박을 반대하는 활동을 하다가도 북미관계가 부드러워지면 주체주의자들의 태도가 달라진다. 남북관계에서도 남북 경색 국면에서는 남한 정권과 싸우지만, 남북 화해 국면에서는 남한 정권에 대한 비판에 신중해진다. 남한 정권이 노동자 운동을 탄압하고 있을지라도 말이다. 2000년 남북정상회담 국면에서 김대중 정권이 롯데호텔노조와 사회보험노조의 파업을 폭력적으로 진압했을 때, 주체주의자들의 모순이 잘 드러났다.
그런 점에서 주체주의 변혁론은 노동계급의 자기해방에 기초해 있지 않다. 주체 사상의 “자주성”은 노동계급의 자기해방을 뜻하지 않는다. 오히려 무오류의 지도자들, 조선노동당, 북한 핵과 미사일이 사회 변화를 가져다 준다.
북한의 위기가 지속되면서 현재 NL은 1980년대 같은 영향력을 갖고 있지 않다. NL의 운동 통제력이 그때만큼 되지 못한다는 뜻이다. 또, NL 활동가들(‘자민통’ 또는 ‘자주파’로 불리기도 한다) 내에서도 다양한 경향이 발전하고 있다.
그럼에도 NL 경향은 대부분 인민전선 노선을 지지한다. NL에게 인민전선은 불가피한 전술적 타협 같은 게 아니다. NL의 변혁 전략이다. 자민통은 이 노선에 따라 개혁주의적 실천을 하면서 남한 국가의 눈치도 보고 있다. 이것은 개혁주의와 계급 협조 정치로 나타난다.
인민전선은 각자의 이해관계가 180도 다른 노동자 정당과 자본가 정당의 포괄적 정치 동맹이다. 선거에서는 이런 동맹이 실리를 안겨 줄 수 있다. 2012년 총선에서 통합진보당이 그런 혜택을 받았다. 그러나 계급투쟁의 영역에서는 완전히 상반된 효과를 낸다. 서로 다른 계급 배경을 가진 정치적 동맹자들이 반대 방향으로 끌어당기는 분력分力 경향이 있다면 합력合力은 0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계급투쟁에서는 산수 규칙만이 아니라 무엇보다 역학이 중요하다. 혁명적 좌파는 선거적 실리가 아니라 계급투쟁의 전진을 우선하기 때문에 인민전선 전략에 반대한다.
소결
옛 소련이 붕괴하면서 서방 공산당들이 몰락해 전 세계적으로 스탈린주의가 매우 약화됐다. 그럼에도 스탈린이라는 이름과 그가 저지른 범죄는 오늘날에도 사회주의 혁명에 대한 생각을 훼손하는 데 이용된다.
또, 한반도에서는 북한이 위기 속에서도 버티고 있기 때문에 여전히 남한 운동 내에서 자민통 경향이 만만치 않은 세력을 과시하고 있다. 물론 북한의 위기가 해결되지 않고 자민통 경향이 방어할 수 없는 것들을 계속 방어하면서(3대 세습, 핵과 미사일 등) 자민통의 세력이 과거 1980년대만큼 강력하지 못하고 약화됐다는 점도 같이 봐야 한다.
이런 모순된 정치 상황에서 혁명적 좌파는 고전 마르크스주의에 입각해 북한 체제가 사회주의가 아님을, 자본주의의 변형태인 국가자본주의라는 점을 설명해야 한다. 그렇다고 해서 남한 체제의 상대적 진보성을 옹호하는 주장에 눈 감아서도 안 된다.
고전 마르크스주의자들은 남한도 북한도 아닌 노동자 권력과 노동계급의 자력해방을 위해 투쟁해야 한다.
MARX21
주
- John Molyneux, Lenin For Today(Bookmarks Publications, 2017)는 레닌주의가 스탈린주의를 낳았다는 ‘연속성 테제’를 소상하게 반박한다. ↩
- 이정구 2017, ‘학술적 유행을 열심히 따르는 정성진 교수의 우경화’, 〈노동자 연대〉 208호. https://wspaper.org/article/1869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