쟁점 : 현재의 이슈들
유대인과 반유대주의
유대인은 누구인가? 오늘날 유대인을 향한 인종차별과 혐오는 어디에 그 기원을 두고 있는가? 유대인의 역사에 대한 철저한 연구 없이 현대 유대인 문제를 이해하기란 어려운 일이다. 20세기에 유대인이 겪은 고난과 역경은 이들의 역사와 직접적으로 얽혀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오늘날의 반유대주의와 유대인 차별에 대한 이해와 분석은 그 역사적 뿌리에서 출발해야 한다. 마르크스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유대인의 비밀을 그들의 종교에서 찾을 것이 아니라, 그들의 종교의 비밀을 현실 속 유대인에서 찾아야 한다.” 유대인이 민족성과 종교를 지켜올 수 있었던 이유는 오직 “현실 속 유대인”에서만 찾아볼 수 있다. 따라서 이 글에서는 유대인이 역사 속에서 어떠한 사회적·경제적 구실을 수행해 왔는지에 주목하고자 한다.
우선, 이 글은 유대인 문제의 역사적 배경에 대한 마르크스주의적 분석을 발전시킨 아브람 레온Abram Leon의 글을 주되게 참고했다. 1918년 폴란드에서 태어난 아브람 레온은 1920년대 후반 가족과 함께 벨기에로 이주했다. 레온은 1940년 나치 치하의 벨기에에서 트로츠키주의 지하 저항조직을 이끌었고, 24세 때 유대인 억압의 성격과 역사에 대한 특출한 분석을 담은 《유대인 문제 - 마르크스주의적 해석》을 저술했다. 레온은 1944년 체포돼 아우슈비츠 가스실에서 처형됐다. 레온의 분석은 유럽 유대인의 역사에 대한 “감성 팔이”적 접근을 거부한다. 또한, 오로지 고질적인 반유대주의의 결과로 인해 “수세기에 걸친 유대인의 고통”이 생겨났다고 주장하는 시온주의의 관점도 뒤엎었다.
중세 초기까지 유대인의 상업적 번성
레온은 광범한 연구를 통해 유대인이라는 사회적 집단이 처음에는 무역업에, 이후에는 고리대금업에 종사한 경제적 구실을 통해 형성됐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경제 활동을 통해 공통된 종교적 신앙과 언어에 기반을 둔 유대인이 인종적 정체성을 형성할 수 있었다. 이렇게 유대인은 다른 집단과 구별되는 독특한 집단으로 발전했다. 부가 일차적으로 토지로부터 창출되고, 대다수 인구가 농경을 통해 살아가던 시기에 유대인들은 상인이었다. 이들은 소금, 후추, 사향, 장뇌, 계피, 모피, 노예 등 동방에서 유럽으로 거래되는 사치품들을 교역하며 살았다. 물론 유대인들이 농업에 종사하지 않았다는 말은 아니다. 다만 농경에 종사했을 경우에는 대게 토착 사회에 동화돼 문화적 고유성을 상실했다. 이와 반대로, 무역을 주업으로 삼았던 이들은 고유한 유대 문화를 유지할 수 있었다. 즉, 유대인의 특정한 사상과 신앙, 관습이 보존될 수 있었던 물질적 기반이 존재했던 것이다. 유대인들의 역사적 실천이 이들의 신앙을 설명하는 것이지, 신앙이 이들의 실천을 설명해주지는 않는다.
우선, 유대인이 역사 속에서 수행했던 사회적·경제적 구실을 구체적으로 논하기 전에 이들이 자신들의 고향이라 부르는 팔레스타인 지역에 대해 이야기할 필요가 있다. 팔레스타인은 나일강 지역과 유프라테스강 지역을 중간에서 연결하는 다리와 같은 곳에 있다. 이 지역은 정복자들이 지날 수밖에 없는 길목이었고, 이 길을 따라 무역이 번성하고 다양한 사상들이 오갔다. 인구가 밀집해 있었으며 거대한 무역 도시들이 발전했다. 뿐만 아니라 팔레스타인은 주로 언덕과 산악 지대로 이뤄진 척박한 곳이었고, 다양한 집단이 서로 사이좋게 거주할 만큼 여유로운 지역이 아니었다. 이곳의 유대인들은 무역의 통로이던 팔레스타인의 지리적 이점을 활용해 점차 상인으로 활약하며 다른 지역으로 이주하기 시작했다. 팔레스타인의 지리적 조건은 유대인의 이주와 그 상업적 성격을 모두 설명해 준다.
이처럼 유대인은 팔레스타인에서 “추방”된 것이 아니다. 이는 신화일 뿐이다. 최근에 이집트에서 발견된 문헌을 보면, 서기 70년 로마가 예루살렘 봉기를 진압하기 500여 년 전에 이미 카이로에는 유대인 공동체가 존재했다. 또한, 팔레스타인에 대한 고고학 발굴 결과들은 당시 유대인 공동체가 그 지역에 함께 거주하던 여러 종교 공동체 중 일부였다는 사실을 보여 준다.
번성하는 유대인 거류지는 로마 제국과 그 너머에 존재했다. 유대인의 대다수는 로마령 유대(고대 팔레스타인 남부 지역) 밖에서 거주하고 있었다. 이러한 유대인 거류지들이 이미 도시화하고 있었으며, 상인들이 주도하기 시작하며 “상업적 번영”을 누리고 있었다. 고대 세계에서 로마 이전의 가장 위대한 무역항이었던 알렉산드리아에서 50만 인구 중 무려 3분의 1이 유대인이었다. 이 시기에 ‘상인’과 ‘유대인’은 동일한 단어로 쓰였다. 유대인 상인 공동체는 너무나도 번성한 나머지 도시 지역에서는 유대교로의 개종이 촉발될 정도였다. 무역을 하기 시작한 많은 이들이 유대교로 개종했다. 수많은 페니키아인들과 카르타고인들이 유대교로 개종하면서 “자신들의 무역 기술”을 함께 가져 왔다.
유대인들은 이러한 사회적 지위 덕분에 로마 제국 황제들로부터 광범한 자치권을 얻을 수 있었다. 유대인들은 로마 사회 내에서 별도의 공동체를 형성하고, 어느 정도는 스스로 통치도 할 수 있었던 유일한 집단이었다. 카이사르도 알렉산드리아와 로마의 유대인들에게 특별 대우와 특혜를 제공하며 이들의 지지를 얻으려 했고, 유대교 신앙을 유지할 수 있도록 보호했다. 로마 제국의 모든 무역 중심지들에는 다 합쳐서 수백만 명에 이르는 유대교 신자들이 있을 정도로 유대교는 확산됐으며, 수천 킬로미터에 이르는 통신 네트워크를 형성했다. 유대인의 운명은 로마 제국과 분리될 수 없었다. 로마 제국이 몰락하자 유대인들은 지중해를 따라 나중에 아랍 세계라고 불릴 도시국가들에 상인으로 정착했다. 유대인들이 이주와 정착을 통해 연결했던 무역 네트워크야말로 이들이 고유한 문화를 유지할 수 있었던 배경이었다.
한편, 로마 제국이 무너진 유럽에는 봉건제가 들어섰다. 11세기까지 서유럽 봉건제 사회는 상품 생산이 이루어지지 않았다. 로마 제국의 붕괴로부터 살아남은 몇몇 도시들은 기본적으로 행정적·군사적 기능을 수행했을 뿐이었다. 모든 생산은 현지 소비와 영주들의 필요에만 한정돼 있었다. 기본적으로 자급자족 경제였기 때문에 외부 세계와의 연결은 오로지 동방에서 유럽으로 진출한 유대인 상인들의 손을 통해 이뤄졌다. 그렇기 때문에 유럽인들의 상업적 구실은 수동적일 수밖에 없었다. 이 봉건제 사회에서 유대인의 무역과 고리대금업 자본은 거대한 확장의 기회를 발견했다.
봉건제 초기는 유대인들에게는 위대한 번영의 시기였다. 그리고 7세기에 이슬람이 등장해 교세가 지중해 일대 너머로 팽창하자 유대인의 상업적 구실은 더욱 증대될 수 있었다. 유대인 상인들은 이슬람과 기독교로 나누어진 세계에서 중요한 중개인으로 활약했던 것이다. 9세기 무렵 히브리어는 대표적인 국제어가 됐다. 유대인 상인들은 인도에서부터 스페인에 이르는 놀라운 무역망을 건설했다.
9세기 중엽 압바스 왕조의 우정·정보 기관의 수장이었던 이븐 호르다드베흐Ibn-Hurdadbih는 “라다니트Radhanite 유대인”으로 알려진 유대인 국제 무역 상인 집단을 이렇게 묘사했다. 이들은 “프랑크족”의 영토(대략 오늘날 프랑스)부터 카스피 해(오늘날 이란의 북부 해안)에 이르는 어마어마한 거리를 오가며 무역을 했다. 이 북적거리는 무역로를 따라 유대인 거류지들이 곳곳에 있었고, 서역에서 가져온 목재, 말과 가죽, 무기와 노예 등이 이곳에서 동방의 사치품과 거래됐다. 당시 유대인의 부와 정치적 영향력은 하자르족의 왕조[하자르 칸국, 오늘날 우크라이나와 흑해 연안]에까지 영향을 미쳤다. 이곳의 지배층은 실제로 9세기 말에 유대교로 개종을 해 정치적 독립성을 유지하고 유대인 상인 조직에 소속되고자 했다.
중세시대 유대인 상인들은 다른 사회적 집단들은 누릴 수 없었던 부를 손에 넣었다. 그래서 왕들은 군대를 재빨리 모집해야 하는 상황에서 세금을 걷지 못했을 경우, 현금을 가진 유대인을 찾아갔다. 유대인은 왕과 군주들로부터 보호를 받았으며, 다른 계층들과의 관계는 전반적으로 좋았다. 의외의 자료이긴 하지만, 전직 이스라엘 외무장관이자 고전학자인 아바 에반Abba Eban은 자신의 베스트셀러 저서인 《유산, 문명 그리고 유대인》에서, 초기 중세 유럽을 이끈 인물인 샤를마뉴가 “무역과 금융에서 구실을 한다는 이유로 유대인을 보호했다”고 적었다. 이 시기에 “본래의 아슈케나짐[독일계 유대인과 그 후손] 유대인들”은 “경제적 선구자, 위대한 무역사업가로 떠올랐다. 이들은 또한 교육에 대한 열정이 뛰어났다.” 서유럽에서는 11세기까지 이러한 상황이 지속됐다.
중세 경제의 성장과 유대인 박해
유럽이 자급자족 경제체제 하에 있었을 시기에 무역은 동방 출신의 상인, 즉 유대인의 소유였다. 하지만 서유럽의 봉건 사회가 동방과의 교역을 위해 필요한 상품을 생산하기 시작하면서, 토착민 출신의 강력한 계급이 등장했다. 이들은 생산에 관여하지 않았던 유대인들과는 다르게 산업에 기반을 두고 있었으며, 원자재의 분배를 장악하며 주도권을 확보해 갔다. 특히 동방이 주로 필요로 했던 물품들에 특화된 산업이 발전을 했다. 그중에는 대표적으로 동방에서 비싸게 거래됐던 잉글랜드의 양모, 플랑드르의 직물, 베니스의 소금, 디낭의 구리 등이 있었다. 이렇게 특정 상품에 주력한 산업이 발달하면서 토착 경제가 성장했고, 유럽인들의 수동적 구실도 적극적으로 변해 갔다. 길드 수공업이 탄생하고 도시가 성장하면서 부가 급속하게 축적되자, 토착 상인계급이 성장할 수 있는 토대가 생겨났다. 중세 교환 경제의 발달은 유대인의 지위에 치명적인 타격을 줬다. 주로 유럽의 노예를 수출하고 동방의 향신료를 수입했던 유대인들은 도시 산업으로부터 주요 상품을 공급받던 기독교 상인들에 의해 밀려나기 시작했다. 결과적으로 서유럽의 경제 발전은 후진적인 생산체제에 토대를 두고 있던 유대인의 기능을 제거해 버린 것이다.
이 과정에는 유대인 상인에 대한 토착 기독교 상인들의 격렬한 투쟁이 수반됐다. 도시의 상인들이 동방으로 향하는 무역로를 놓으려던 시도의 일환이었던 십자군 전쟁은 유혈 낭자한 유대인 학살을 동반했다. 크리스토퍼 타이어먼은 《신의 전쟁》에서 어떻게 대규모 유대인 박해가 십자군 전쟁과 함께 발생했는지를 주목하고 있다. 유대인들은 11~12세기에 떠오르는 봉건계급으로부터 보호받기도 했지만 배신당하기도 했다. 바로 이 시기에 교황 우르바노 2세가 유대인들을 예수를 살해한 이들로 비난하는 칙령 – 교황청은 1965년에 이르러서야 이를 공식 부인했다 - 을 공포했다. 십자군은 유럽을 가로질러 약탈을 일삼았고, 무슬림과의 전쟁을 위한 자금을 대게는 부유한 유대인 상인들을 강탈하며 조달했다.
물론 이와 같은 경제적 변화가 유럽 전역에서 일시에 발생했던 것은 아니다. 초기에는 일부 주요 도시들을 중심으로 일어났고, 영주들의 장원은 미미한 영향만을 받았다. 이곳에서는 봉건 질서가 여전히 번성하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이곳의 유대인은 지속적으로 향유할 누릴 수 있었다. 영주들이 지배하던 영역은 여전히 유대인에게 중요한 경제적 구실을 부여했던 것이다. 하지만 이전 시기에는 본래 상업적 성격을 띠었던 유대인의 자본은 이제 거의 대부분이 고리대금화 됐다. 유대인은 영주에게 더는 동방의 사치품을 판매할 수 없었지만, 때때로는 영주의 지출을 위해 돈을 빌려 주곤 했다. 과거에 유대인의 동의어가 “상인”이었다면, 이제는 점점 더 “고리대금업자”가 돼 가고 있었다. 유대인은 더는 상업에 종사할 수 없게 되자 아직 교환 경제가 충분히 도달하지 못한 지역에서 고리대금업을 발전시켜 나갔다. 유대인은 잉글랜드와 프랑스에서 상당한 재력을 보유했고, 경제가 더 후진적이었던 스페인에서는 다른 지역들보다 좀 더 오래 살아남을 수 있었다. 12~14세기는 유대인 고리대금업이 발전했던 시대였다.
하지만 교환 경제가 농촌까지 파고들고, 도시의 산업과 상업이 발달하면서 낡은 봉건 질서는 급격한 쇠락의 길을 걷게 됐다. 상업 경제가 성장하고 자본이 모이자 고리대자본의 필요성은 사라졌다. 결국 15세기 스페인을 끝으로 유대인은 서유럽에서의 마지막 근거지를 잃게 된다. 유대인을 밀어내는 과정은 매우 폭력적이었다. 예를 들어, 1290년 잉글랜드에서는 국왕의 공식 은행가들이었던 유대인들이 추방됐다. 뿐만 아니라 스페인의 무슬림 지역이었던 안달루시아에서는 기독교도들이 승리를 거두자 뒤이어 유대인과 무슬림 모두에 대한 대규모 박해인 종교재판이 벌어졌다. 이들은 기독교로 강제 개종을 당했고 결국은 스페인에서 추방됐다. 이 공포스러운 사건은 교환에 기반한 체제가 봉건제를 대체하기 시작한 시기에 벌어졌다. 스페인은 미주 대륙의 “발견”과 함께 새로운 상업주의가 지배했던 나라였다.
완전히 몰락한 유대인들은 중고품 거래상이나 봇짐장수 등으로 전락했다. 또 일부 도시들에서 전당포를 운영하며 가난한 대중과 농노, 수공업자들을 상대로 고리대금업을 했다. 유대인들은 이러한 구실 때문에 유혈 낭자한 반란이 벌어지면 대중적 분노의 초점이 돼 자주 희생됐다. 왕과 귀족들은 유대인을 희생양 삼아 대중의 반감을 완화하기도 했다. 유대인의 전통적인 보호자이던 왕정들도 성장하던 토착 부르주아지들의 유대인에 대한 반감을 눈감아 줬다.
자본주의 탄생과 동유럽의 유대인
신대륙의 발견과 이에 따른 엄청난 양의 화폐 유통은 수공업에 기반한 낡은 봉건제에 사망 선고를 내렸다. 상업경제가 과거 시대의 흔적을 지우면서 더 높은 단계에 도달하자 제조업과 농촌 공업이 발전하기 시작했다. 다시 말해, 산업 자본주의의 토대가 놓인 것이다.
수공업과 중세 무역의 중심지들은 쇠락의 길을 걸었고, 그 자리를 네덜란드의 안트베르펜과 같은 세계 상업의 중심지가 차지했다. 어디를 둘러보더라도 그 형태와 시기는 상이할 수 있지만, 유대인의 사회적 기능은 기존의 가치를 잃어 가고 있었다. 상당수의 유대인들은 박해와 탄압을 피해 아직 자본주의가 침투하지 않았던 동유럽이나 터키 등지로 이주했다. 남은 이들은 개종을 통해 기독교 인구에 뒤섞여 동화됐고, 더는 특수한 경제적 성격을 띠지 않았다. 이 유대인들은 스스로를 동유럽을 비롯한 봉건적 사회에 남아 있는 유대인들과 무관하다고 여겼다.
이렇듯 서유럽에서 자본주의 발전으로 유대인은 동화됐다. 자본주의가 발전하며 농노들을 농촌에서 몰아냈듯이, 유대인들도 자본주의 계급 관계 속으로 편입되기 시작했다. 산업 자본주의 발전의 여명 앞에서, 서유럽의 유대교는 소멸의 길목에 놓여 있었다. 프랑스 혁명은 유대인에 대한 법적 차별을 철폐함으로써 동화를 가속화시켰다.
하지만 서유럽에서 거의 멸종에 다다랐던 유대인 문제는 동유럽에서는 거칠게 타올랐다. 동유럽에서 유대인이 누리던 경제적 지위가 파괴되면서, 이들이 서유럽과 미주 대륙을 비롯해 전 세계로 이주하기 시작한 것이다. 세계 곳곳에서 다양한 양상으로 전개되기는 했지만, 결국 동유럽으로부터의 유대인 이주는 유대인 문제에 다시 불을 지폈다. 그렇기 때문에 현대 유대인 문제에 있어 동유럽 유대인의 역사는 결정적 영향을 미쳤다고 볼 수 있다.
서유럽의 유대인과 마찬가지로, 동유럽의 유대인들도 중세 봉건제에서 무역으로 번영을 누렸다. 이들은 폴란드와 우크라이나의 평원을 통하는 무역로를 장악하고 있었고 막대한 부를 쌓았다. 유대인의 주요 고객이었던 왕들은 이들에게 보호를 제공했고, 그 비호 아래 귀족들의 소유였던 광활한 토지를 차지할 수 있었다. 폴란드에서 유대인의 경제적 상황은 매우 좋았다. 이들은 폴란드 내에서는 억압적인 농노제를 유지하면서, 외부로는 서유럽 중상주의 경제에게 필수적인 요소가 됐다. 서유럽은 폴란드 농노들의 저렴한 노동력으로 생산된 저가의 곡물이 필요했다. 따라서 유대인들은 상대적으로 덜 개발된 폴란드 동부에 정착해 특별 자치권을 누릴 수 있었고, 부재 지주들을 대신해 토지를 경영했다. 일부 귀족들은 끊임없이 왕과 유대인에게 반발했다. 하지만 교환 경제가 성장하며 가져온 부 덕택에 유대인의 고리대금업을 제거하는 데 성공한 서유럽의 귀족과는 달리, 봉건제가 공고했던 동유럽에서의 귀족은 유대인에게 무기력했다. 이제 막 형성되던 도시의 부르주아 계급도 유대인과 투쟁했다. 하지만 이들의 세력은 아직 맹아적 단계였기 때문에 유의미한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이러한 유대인의 번영은 17세기까지 지속될 수 있었다. 하지만 왕권의 약화는 17세기까지 유지됐던 유대인의 자치권을 심각하게 위협하기 시작했다. 왕정의 통제가 약화되면서, 유대인들은 피지배 대중과의 접촉면이 그 어느 때보다도 더 넓어졌다. 왕이나 영주의 집사 노릇을 했던 유대인들은 영주 본인보다도 더 농노들의 증오를 받았다. 그들을 직접 착취했던 자들이 유대인이었기 때문이다. 이 상황은 폴란드의 영토였으나 폴란드보단 통제가 약했던 우크라이나에서 먼저 끔찍한 사회적 폭발을 불러왔다. 1648년에 우크라이나에서 일어난 흐멜니츠키 반란이 끝나자, 유대인 공동체 700여 개는 지도상에서 흔적도 없이 사라져 있었다. 폴란드는 끊임없는 침략과 내분을 겪었다. 학살이 만연했던 나라에서 정상적인 경제 활동은 불가능했다. 18세기 말에 이르자 폴란드의 봉건사회는 내부의 혼란과 무정부 상태, 경제적 후진성, 그리고 외세 침략으로 인해 마침내 무너지기 시작했고, 결국 프로이센과 러시아, 오스트리아가 폴란드를 분할하게 됐다. 이 시기부터 유대인들 앞에 이주와 경제적 구실의 변화라는 문제가 대두되기 시작했다.
19세기가 되자 동유럽에서도 자본주의가 본격적으로 발전하기 시작했다. 러시아와 폴란드 등에서 새로운 상업과 산업 도시들이 나타났고, 토착 부르주아지가 성장했다. 이러한 변화는 압도적으로 소상인과 행상인 등으로 구성된 유대인의 경제적 상황에 결정적 영향을 미쳤다. 유대인들은 무리를 지어 과거 봉건 왕정의 후진적인 지역을 떠나, 더 발달된 도시에서 새로운 직업을 구하기 위해 이주하기 시작했다. 19세기 초가 되자 폴란드를 떠난 유대인 이주민 행렬은 러시아로, 프러시아와 오스트리아에 합병됐던 지역에서는 베를린과 비엔나로 향했다. 이 도시들은 모두 새로운 경제가 성장하고, 산업과 상업의 발달로 인해 넓은 기회의 장이 열리던 곳이었다. 동유럽의 지배계급도 유대인을 “쓸모 있는 시민”으로 만들고자 이들을 수공업과 농업에 종사하도록 독려했다. 이렇게 유대인 대중은 새로운 곳에서 새로운 직업으로 살아가게 됐다. 과거의 경제적 지위에서 쫓겨난 유대인은 이와 같이 광범한 가능성 속에서 자본주의 경제로 통합될 수 있는 기회를 얻을 수 있었다. 공방과 영세 공업이 폭발적으로 증가했다.
도시 중심부로 밀려들어 온 유대인들은 그들이 중세 시대부터 익숙했던 직업인 재단사와 모피 가공사 등과 같은 수공업자로 정착했다. 중세 농노들은 자급자족에 의존했기 때문에, 비유대인 수공업자는 소모품을 생산할 이유가 없었다. 하지만 이들과 달리 유대인 공동체는 교환과 무역, 금융에 종사했기 때문에 언제나 소모품, 즉 소비재를 생산하던 유대인 수공업자가 존재했다. 폴란드 갈리치아 지방의 재단사 중 94.3퍼센트, 모피 가공사 중 70퍼센트가 유대인이었다. 유대인 노동계급이 소비재 산업에 한정돼 노동을 했다는 점은 상당히 주목할 만한 점이다. 유대인의 이 사회·경제적 구조는 결국 유대인 프롤레타리아의 경제적 토대가 취약했다는 점, 그리고 지속적으로 기술 발전에 의해 축소됐다는 점을 보여 준다. 생산수단의 발전은 경공업의 기계화를 불러 왔다. 기계가 유대인들의 영세한 수공업 공방과 치열하게 경쟁하기 시작했다. 유대인 노동자는 수공업 자체가 지니고 있는 사회적 취약성과 같은 단점을 비롯해 계절성 고용, 극심한 착취, 열악한 노동 조건 등으로부터만 고통을 받았던 것이 아니다. 이들은 결국 기술이 발전함에 따라 또다시 자신들의 경제적 지위에서 밀려나게 됐다.
19세기 말이 되자 비유대인 노동자들이 도시로 대거 몰려들었던 것에 비해, 유대인은 인구 증가가 더디거나 아예 멈춰 버렸다. 국내 시장의 팽창 덕분에 발달할 수 있었던 유대인 수공업은 산업의 기계화와 현대화 앞에 무릎을 꿇었다. 유대인들은 오랫동안 고된 육체 노동에 익숙해져 있었고 굉장히 낮은 생활 수준에서 살아온 농촌 출신의 노동자들과 경쟁하기가 어려웠다. 물론 일부는 이런 어려움을 감내하면서도 기계화 산업에서 자리를 찾은 경우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더는 프롤레타리아가 될 수 없었고, 19세기 말~20세기 초에 망명의 길을 택했다. 전前자본주의 유대인 상인이 수공업자로 변모하던 과정 속에는 기계에 의한 유대인 노동자의 퇴출도 있었던 것이다.
자본주의 위기와 근대 반유대주의
한편 서유럽에서는 프랑스 혁명과 나폴레옹의 군대가 중세 시대부터 존재해 온 유대인에 대한 제도적 차별에 종지부를 찍었다. 부르주아지는 유대인을 동화시켜 자본주의로 편입시키고자 했다. 서유럽의 유대인들은 완전한 동화로 향하고 있을 때, 동유럽을 등진 유대인들은 서유럽과 미국 등으로 대규모로 이주하기 시작했다. 자본주의의 성장은 도시의 대규모 확장을 수반했다. 따라서 19세기 중엽부터는 거대한 상업·산업 중심지들은 유대인들 끌어들이는 강력한 자석과도 같았다. 19세기 중반부터 20세기 초에 걸쳐 유대인들은 “세계에서 가장 거대한 도시민 집단”이 돼 있었다. 앞에서 살펴봤듯이, 동유럽에서 자본주의가 발전하기 시작했던 단계에서 유대인은 수공업 분야 등에서 기회를 찾을 수 있었기 때문에, 이주는 기본적으로 국내에서 이뤄졌다. 그러나 19세기 말에 이들이 더는 영세한 수공업 부문에서 노동할 수 없게 되자, 출신 국가를 떠나 대규모로 해외 이주를 하기 시작했다. 이렇게 동유럽을 떠나 서유럽이나 미국 등으로 이주한 유대인들은 빈곤에 떠밀려 과거에는 종사할 수 없었던 직종으로 진출하기 시작했다.
자본주의의 발달은 두 가지 결과를 낳았다. 첫째, 자본주의는 유대인의 경제적 동화와 더 나아가 문화적 동화를 추진했다. 둘째, 유대인을 기존의 위치에서 뿌리 뽑아 도시에 집중시킴으로써 반유대주의의 부상을 자극했고, 이로 인해 유대인 민족주의가 발전했다. 동화됐던 서유럽의 유대인과는 달리, 동유럽의 유대인은 집단으로 거주하며 고유한 언어와 문화를 유지했다. “유대 민족의 부흥”, 즉 근대 유대 문화의 형성과 이디시어[중부 및 동부 유럽 출신 유대인이 사용하는 언어]의 정교화, 시온주의의 탄생 등은 모두 유대인의 도시 집중과 현대 반유대주의의 성장과 맞물려 있다.
그러나 역사는 변증법적으로 발전했다. 유대인의 새로운 민족성을 위한 토대가 정교해지고 있었지만, 동시에 동일한 조건들로 인해 이 토대가 사라질 수도 있는 상황이 형성됐다. 이민 1세대가 종교와 문화에 강한 애착을 보였던 반면에 새로운 세대는 자신들의 고유한 관습과 언어를 급속하게 잃어 갔다. 유대인의 이주는 동화를 가로막는 장애물이자 민족주의를 형성시킨 주된 요인이었지만, 마찬가지로 다른 집단과 융합될 수 있는 조건이기도 했다. 대도시는 온갖 집단의 용광로였고 이들이 가진 민족성은 빠르게 흐려지기 시작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20세기 초에 자본주의는 위기를 겪게 된다. 자본주의가 위기에 빠지자 유대인 문제가 전례 없이 날카로운 갈등 속에 놓이게 됐다. 동유럽에서 갓 성장한 자본주의는 농노들을 대규모로 노동계급으로 만들었지만, 위기 속에서는 대량의 실업자를 만들어냈다. 폴란드에서만 토지 없는 농노 출신 노동자들 700만~800만 명이 거의 무직 상태에 놓였다. 프티부르주아와 농노들은 유대인을 희생시켜 그들의 자리를 차지하고자 혈안이 됐다. 유대인은 특히 경제적 민족주의를 자극해 위기를 타개하려던 폴란드의 도시 프티부르주아와 부농들에게 위협을 받았다. 자본주의가 가장 발달했던 지역에서 비유대인 상공인 계급이 가장 빠르게 형성됐고, 이 지역들은 반유대주의가 가장 극렬했던 곳이었다. 1914년 폴란드 도시의 상점 중 72퍼센트가 유대인 소유였던 것에 반해, 1935년에는 그 비율이 34퍼센트, 즉 절반 이하로 떨어졌다. 이렇듯 자본주의 위기와 만성적 실업으로 인해 유대인 문제가 해결 불가능한 쪽으로 치닫게 했다. 정부의 고위 관료와 대자본가들은 대중의 반유대주의 정서를 선동하고 조직해 진정한 적으로부터 시선을 돌렸다.
동유럽은 봉건제의 붕괴와 자본주의의 위기로 인해 숨막힐 정도로 광란적인 반유대주의 분위기가 팽배해 있었다. 이 상황은 일정 정도 전 세계적으로 파급효과를 불러왔다. 이미 경제 위기를 겪고 있던 서방 국가들은 유대인의 이주를 더는 감당할 수 없었다. 유대인 문제는 동유럽뿐 아니라 이주 수용국가인 서유럽에서도 전례 없이 날카롭게 대두됐다. 이들의 이주는 중서부 유럽 국가 중간계급의 강력한 반유대주의 운동을 촉박했다. 드레퓌스 사건이 대표적인 사례일 테지만, 1차세계대전 때 가장 거대한 유대인 이주 공동체가 있던 오스트리아 비엔나에서 가장 극명하게 드러났다.
독점자본에 의해 파괴당하고 프롤레타리아화를 겪고 있던 중간계급은 전통적으로 프티부르주아지이자 수공업자였던 유대인의 대규모 이주에 격분했다. 1929년의 대공황은 프티부르주아 대중을 절망적인 상황으로 몰아넣었다. 영세 기업과 수공업의 과밀화로 인해 이들은 유대인 경쟁자를 점점 더 커지는 적대감을 가지고 바라봤다. 대자본가들이 반유대주의를 만들었다고 보는 것은 부정확하다. 이들은 프티부르주아 대중의 반유대주의 정서를 부추기고 이용해 이를 파시즘의 요소로 다듬었을 뿐이었다. “유대인 자본주의” 신화는 대자본가들이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대중의 반자본주의적 정서를 분산시키고 통제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다. 진정한 갈등은 대체로 상업 자본가였던 유대인 자본가와 독점 자본가 사이에 놓여 있었다. 독점 자본가들은 프티부르주아 대중과 심지어는 노동계급의 일부에게까지 “유대인 자본주의”에 대한 혐오를 부추겼다. 이처럼 근대 반유대주의는 자본주의가 위기에 빠진 상황에서 지배계급과 국가의 의식적 대응이 결합된 결과였다.
자본주의는 유대인을 사회적으로 구분 짓고, 이들을 경제 활동에 참여시키고, 이주시키면서 유대인 문제의 해결을 위한 토대를 놓았다. 그러나 자본주의는 이를 해결하는 데 실패했다. 오히려, 20세기 자본주의 체제의 무시무시한 위기는 유대인의 고난을 비할 바 없는 수준으로 배가시켰다. 봉건제에서의 경제적 구실로부터 쫓겨난 유대인은 위기에 봉착한 자본주의 경제로도 흡수될 수 없었다. 자본주의는 아직 완전히 동화되지 못한 유대적 요소들마저 경기를 일으키며 토해냈다. 모든 곳에서 자본주의 모순에 질식해 죽어가던 중간계급의 필사적인 반유대주의가 횡행했다. 대자본은 프티부르주아지의 반유대주의 정서를 이용해 인종차별의 기치 하에 대중을 동원했다. 20세기 유대인의 비극은 이들의 극도로 불안정한 사회·경제적 지위로부터 설명될 수 있다. 부패한 봉건제에 의해 가장 먼저 배제된 유대인은 격동의 자본주의에 의해 거부당한 첫 번째 집단이 됐다. 유대인 대중은 “부패한 봉건제라는 모루와 썩은 자본주의라는 망치 사이에 끼이게 된 것”이다. 자본주의는 인류에게 거대한 발전을 가져다 줬다. 그러나 이를 누리기 위해서는 자본주의는 사라져야 한다. 오직 사회주의만이 인류를 문명의 물질적 토대를 누릴 수 있는 수준에 도달하게 해 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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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 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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