쟁점:현재의 이슈들
혁명적 좌파의 전술 공동전선
일상적 시기에 노동자의 다수는 지배자들이 전파하는 사상에 큰 영향을 받고 선진 노동자들조차 개혁주의적 사상을 넘어서지 못한다. 역사적 경험을 보면, 혁명적 상황에서도 노동자의 다수는 자동으로 혁명가들을 지지하지 않는다.
그래서 혁명가들은 어떻게 하면 더 많은 노동자들을 설득해 대중 운동을 건설하고 그들 사이에서 사회주의 정치의 필요성을 설득하고 지지를 얻어 낼지 항상 고민한다. 이 고민을 해결하기 위한 혁명가들의 전술 하나가 공동전선이다.
공동전선의 사전적 의미는 “둘 이상의 단체가 기본적으로 주의·주장을 달리 하더라도 목적이나 이익을 같이할 때 같은 적을 상대하여 함께 대항하는 태도 또는 그 조직”이다(표준국어대사전). 공동전선을 이렇게 느슨하게 규정하면, 두 단체 이상으로 구성된 대부분의 연대체는 공동전선이라는 뜻이 된다. 심지어 노동계급 조직과 부르주아 정당 간 연합도 공동전선으로 규정될 수 있다.
보다 엄밀하게 규정하면, 공동전선은 진보진영이 공감할 만한 요구(가령, 제국주의 전쟁 반대, 철도·의료 등 민영화 저지, 최저임금 개악 저지, 노동유연화 반대 등)를 내걸고 여러 세력(특히 개혁주의 세력)과 협력해 대중 운동을 건설하기 위한 혁명가들의 전술이다.
하지만 공동전선이 여러 세력의 단결과 공동 행동을 중시한다고 해서 ‘서로의 차이는 잊고 대동단결’을 호소하자는 전술은 아니다. 혁명가들이 개혁주의자들과 협력하는 동시에 운동의 향방을 놓고 독자적 의견을 내놓을 수 있어야 진정한 의미의 공동전선이다. 공동전선 전술을 통해, 혁명가들은 개혁주의 세력과 협력해 대중 운동을 건설하면서도 훨씬 많은 노동자들에게 혁명적 정치의 우월함을 이해시키고 궁극으로는 그들이 개혁주의 사상·조직과 갈라서도록 설득할 수 있어야 한다.
그래서 공동전선 전술은 항상 선진 대중의 단결 투쟁과 혁명가들의 정치적 독립성을 결합시켜야 한다. 이 둘의 관계는 변증법적이어서 실천에서는 긴장이 존재하기 마련이다.
혁명가들이 단결만 강조하면 개혁주의자들과 차이가 없이 기회주의로 빠질 수 있고, 정치적 독립성만 강조하면 대중 운동 건설이라는 목표를 잊은 채 종파적 태도를 취할 수 있다.
만일 우리가 공동전선을 일종의 다리라고 생각한다면, 여기엔 두 개의 위험이 도사리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첫 번째는 아예 다리를 놓지 않을 위험입니다. 1921년에 독일 공산당은 자신과 나머지 노동계급 사이에 다리를 놓을 생각을 전혀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만일 우리가 다리를 놓으면 사람들은 두 가지 방법으로 다리를 옮겨다닐 수 있음을 명심해야 합니다. 즉, 우리가 사람들을 이끌어 다리를 건너게 할 수도 있지만, 거꾸로 우리가 사람들에게 이끌려 다리를 건너가게 될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종파주의와 기회주의의 위험을 피해 공동전선을 올바르게 실천할 수 있는 확실한 방법이 있을까요? 안타깝지만 그런 방법은 없습니다.
이와 같은 공동전선을 효과적으로 구사하려면 운동의 역사를 잘 알아야 한다. 만약 혁명가들이 공동전선의 실패와 성공 사례를 잘 알고 있다면, 같은 실수를 반복할 가능성이 크게 낮아질 것이고, 성공 가능성을 극대화할 수 있다.
개혁주의와 동맹 맺기
2 3~4차 대회에서 레닌과 트로츠키가 정식화한 전술이다. 당시 공동전선이 제기된 배경은 혁명적 전망의 후퇴와 깊은 연관이 있었다.
공동전선은 1921~1922년 코민테른
1917년 러시아 혁명은 유럽 전역에서 혁명적 운동이 성장하는 데 기폭제 구실을 했다. 당시 사회주의 혁명은 유럽 전역에서 현실적 가능성이 있었다. 또, 여러 나라에서 공산당이 창당했고 1~2년 사이에 노동계급 속에서 비약적으로 성장했다. 불가리아 공산당은 노동계급 다수의 지지를 받는 대중정당이었다.
그러나 1919년부터 1923년 사이에 헝가리·이탈리아·독일에서 혁명이 패배하고, 혁명 러시아가 고립되면서 혁명적 물결은 가라앉기 시작했다. 반면, 자본가계급의 반격은 본격화했다. 즉, 혁명가들이 혁명을 이룩하기 위해 신속하고 공세적인 대응을 하는 것이 아니라, 방어적 투쟁에 참가해 전열을 가다듬고 노동계급의 단결된 행동으로 반격을 도모해야 하는 시기가 도래한 것이다.
1922년 영국 공산당을 비롯한 서유럽 공산당들의 슬로건은 ‘더 이상의 퇴각을 멈추자’였다. 이렇듯 공동전선은 다수 대중이 더는 물러설 수 없다는 심정으로 단결해 투쟁해야 한다는 객관적 필요성에서 출발한다.
무엇보다도 공동전선 전술은 공산당이 [사민당 등 개혁주의] 정당과 단체에 속했거나 아무런 소속이 없는 모든 노동자들에게 노동계급이 아주 기본적으로 필요로 하는 것을 부르주아지가 빼앗지 못하도록 함께 맞서 싸우자고 제안하는 것이다.(코민테른 4차대회 테제)
그러나 당시 각국 공산당은 탄생한 지 얼마 안 됐고, 개혁주의 정당과 결별(분리)하면서 탄생했고, 개혁주의 정당의 지도자들을 ‘혁명의 배신자’라고 비판해 왔기 때문에, 그들과 동맹하라는 제안은 쉽게 받아들이지 않았다. 새롭게 급진화한 경험 없는 혁명가들은 혁명적 전략·전술을 이해하지 못하고 초좌파적 태도를 취했다.
그래서 당시 레닌은 《좌파 공산주의 ― 유치증》에서 성마른 혁명가들을 질타했다. “아무리 일시적이고 동요하고 우연적일지라도 대중적 동맹자를 얻을 수 있는 모든 기회”를 활용해야 하며 “이것을 이해할 수 없는 자는 마르크스주의와 현대의 과학적 사회주의 일반을 조금도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트로츠키는 공동전선이 개혁주의 세력(지도자)들과 함께하기라는 점을 거듭 강조했다. “우리 자신의 깃발이나 우리의 실천적인 당면 구호로 노동자 대중을 단결시키고 개혁주의 조직들을(정당이든 노동조합이든) 그냥 건너뛸 수 있다면, 그것만큼 좋은 일이 세상에 어디 있겠는가. 문제는 바로 이 점 다시 말해 노동계급의 매우 중요한 일부가 개혁주의 조직에 속해 있거나 개혁주의 조직을 지지”하므로 개혁주의 세력과 동맹하는 공동전선을 통해 “더 많은 대중이 운동에 동참할수록 대중의 자신감이 높아지고 대중 운동의 자신감이 더 높을수록 운동은 더욱 단호하게 전진할 수 있[다]. 그리고 이 때문에 운동의 규모가 커지면 운동이 급진화하는 경향이 있고 공산당의 구호, 투쟁 방법, 일반적으로는 지도적 구실에 훨씬 유리한 상황이 조성되는 것이다.”
우파의 위협
트로츠키는 1917년 러시아 혁명의 경험을 중요한 사례로 들었다. 1917년 2월 혁명으로 차르가 타도된 러시아에서 8월 말 우익 군장성인 코르닐로프가 차르 체제 부활을 위해 반혁명 쿠데타를 일으켰다. 개혁주의자 총리 케렌스키가 이끄는 임시정부뿐 아니라 노동자 운동이 통째로 위협받는 상황이었다.
당시 임시정부는 혁명적 당인 볼셰비키를 혹독하게 탄압했다. 트로츠키를 포함해 볼셰비키 지도부 다수가 구속됐고, 레닌은 숨어 지내고 있었다. 볼셰비키 간행물도 발행이 금지됐다. 그러나 볼셰비키는 코르닐로프 반혁명 쿠데타를 좌절시키기 위해 다른 정당들 (특히, 임시정부를 지지해 온 자들)에게 공동전선을 제안했다. 트로츠키는 감옥에서 풀려나자마자 자신을 수감시켰던 멘셰비키·사회혁명당 지도부와 함께 코르닐로프에 맞설 방법을 논의했다.
트로츠키와 레닌은 임시정부의 수장인 케렌스키를 “4분의 3 정도는 코르닐로프와 공범”이라고 부를 정도로 노동계급의 적으로 여겼지만, 코르닐로프 반혁명 쿠데타를 물리쳐야 한다는 시급한 과제를 위해 이들과 공동 행동을 한 것이다.
트로츠키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도처에서 혁명을 지키기 위한 위원회가 생겨났고, 볼셰비키는 그 안에서 소수파였다. 그럼에도 그 위원회들에서 지도적 구실을 한 것은 볼셰비키였다. 대중의 혁명적 행동을 이끌어 내기 위한 합의에서는 가장 일관되고 대담한 혁명적 당이 언제나 가장 돋보이기 마련이다. 볼셰비키는 최일선에서 움직였고 [임시정부를 지지하는] 멘셰비키와 사회혁명당 소속 노동자 병사들과 볼셰비키 사이의 장벽을 허물었고 그들을 자신의 영향력 안으로 끌어당겼다.”
결국 코르닐로프 쿠데타 시도는 좌절됐고, 그 과정에서 볼셰비키는 러시아 노동자, 병사, 농민들의 전폭적 지지를 얻을 수 있었다. 이 전술의 성공으로 볼셰비키는 10월에 봉기를 성공시킬 수 있었다. 우익 쿠데타를 막기 위한 공동전선은 10월 혁명으로 가는 가교 역할을 한 것이다.
만약 볼셰비키가 케렌스키와 코르닐로프는 ‘똑같은 지배자들일 뿐이다’ 하며 개혁주의 세력과의 동맹을 거부했다면 10월 혁명은 없었을 것이다.
이렇듯 공동전선은 우파의 공격에 맞서거나 방어적 요구를 두고 노동계급의 단결을 호소하는 혁명가들의 전술이고, 노동계급의 단결된 행동을 위해 개혁주의 세력과 동맹하는 전술이다.
2004년 한나라당(자유한국당의 전신)과 우파가 중심이 돼 당시 대통령 노무현을 탄핵하려 한 것도 비슷한 사례다. 군부 쿠데타처럼 위협적이고 급박한 상황은 아닐지라도 노무현이 우파의 공세 때문에 탄핵되면, 우파의 기세가 세지고 이어서 진보진영 전체에 대한 공격이 벌어질 것이 불 보듯 뻔했다. 그래서 노동자연대(당시 다함께)는 공동전선의 원리를 적용해 노무현 지지자들과 개혁주의 세력들과 함께 노무현 탄핵 반대 공동 행동에 적극 참가했다. 당시 노동자연대를 제외한 급진좌파들은 신자유주의자 노무현을 방어할 수 없다며 이 운동에 기권했다.
탄핵 반대 운동은 정점일 때 40만 명이 거리로 쏟아져 나올 정도의 대중 운동이었고, 결국 우파의 탄핵시도를 좌절시켰다. 이는 노무현을 구출한 것이기도 했지만 이를 계기로 민주노동당이 크게 성장했고, 탄핵 반대 운동의 능동적 일부였던 노동자연대도 성장할 수 있었다.
초좌파주의
4 초좌파주의는 파시즘에 맞선 공동전선 구축을 방해했다. 스탈린이 주도한 코민테른은 “강력한 사회민주주의 정당들이 있는 국가에서 파시즘은 사회파시즘이라는 특별한 형태로 나타난다”고 선언했다. 사민당을 ‘사회파시스트’로 규정하고 사민주의를 파시즘의 온건 분파로 봤다. 코민테른은 각국 공산당에게 사회민주주의 정당과의 공동전선을 철저히 거부하라고 지시했을 뿐 아니라 사회민주주의 정당을 집중 공격하라고 했다. 사실상 공산당은 사민주의를 주적으로 삼았다. 심지어 트로츠키가 공산당과 사민당의 반파시즘 공동전선을 제기하자, 이를 “파시스트적 제안”이자 “범죄적 발상”이라고 비난했다. 5
반면, 1930년대 스탈린주의 공산당의 ‘3기’당시의 초좌파주의는 1920년대 초반의 초좌파주의와 달라서 더 큰 재앙을 낳았다.
코민테른 3기 정책은 마르크스주의 운동에서 보통 이야기하는 초좌파주의와 질적으로 다르다. 전자는 새롭게 급진화하는 참을성 없는 노동자들이 혁명적 전략과 전술을 훈련받지 못했을 때 드러내는 초좌파주의인 반면, 스탈린주의 초좌파 노선은 지도부가 당과 노동자들을 조종하는 것이었고 지도부가 일반적으로 우경화하는 도중에 갑자기 좌선회할 필요가 있다고 느낄 때마다 거듭거듭 추진된 것이었다.
트로츠키는 공산당(특히 독일공산당)에게 거듭 개혁주의자들과 함께해 광범하고 단결된 운동을 건설하라고 촉구했다. “사회민주주의를 지지하는 노동자들의 압도 다수는 파시스트에 대항해 싸울 것이다. 따라서 공산당은 파시즘에 대항하는 노선으로 가야 하고 사회민주주의자들과의 연합을 위한 완벽한 준비와 행동에 나서야 한다.”
하지만 이 촉구는 완전히 무시됐다. 당시 세계 정세의 핵심이었던 독일에서 공산당은 나치가 아니라 사민당을 공격했고 노동자 운동에서 고립을 좌초했다. 결국 1933년 나치가 권력을 잡았다. 히틀러는 자신의 표현을 빌자면 “유리 한 장 깨지 않고” 집권할 수 있었다.
코민테른 지도부는 파시즘이 집권한 후에도 “파시즘 승리 후 현재의 침묵은 일시적인 것이다. 파시스트의 테러에도 불구하고 필연적으로 혁명의 흐름은 커질 것이다” 하며 파시즘의 위협을 우습게 봤다. 트로츠키는 히틀러가 권력을 차지하고 나서 몇 주가 지났어도 반격이 가능하다며 공산당에게 재차 사민당과 반파시즘 공동전선을 해야 한다고 제기했다.
히틀러 집권 초기에도 여전히 사민당과 그 계열 노동조합들은 노동자 수백만 명의 지지를 받고 있었다. 그러나 독일 공산당 지도부는 ‘사민당 지도부는 부르주아 정치인들이고 히틀러와 똑같은 놈들’이라며 협력을 거부했다. 결국 파시즘의 권력이 공고화했고 유럽에서 가장 강력했던 독일 노동계급은 절망적 상황에 놓이게 됐다. 1917년 러시아와는 정반대의 상황이 펼쳐졌다.
트로츠키는 “독일 프롤레타리아의 유례없는 패배는 러시아 프롤레타리아의 권력 장악 이후 가장 중요한 사건”이고 “독일의 현재 재앙은 의심할 여지 없이 노동계급이 겪은 역사상 가장 큰 패배”라고 규정했다.
이 비극적 경험을 통해 일반화해야 할 것은 초좌파주의(또는 초강경 비타협주의)는 노동계급과 피억압자들의 단결을 가로막는 장애물이라는 점이다. 그래서 트로츠키는 혁명가 조직이 개혁주의자들과 공동 행동을 기반으로 한 전술을 구사하지 못한다면 “혁명조직이 아니라 일개의 선전종파일 뿐”이라고 했다. 최악의 경우, 독일처럼 파시즘 집권을 도와 주는 결과를 낳을 수도 있다.
7 따라서 공동전선은 지금도 중요한 전술이다.
파시즘의 위협은 단지 1930년대만 해당하지 않는다. 인종차별과 파시즘의 부상은 현재 유럽 정치의 특징이다. “적어도 유럽 수준에서는 인종차별과 우익에 맞선 공동전선과 광범한 운동을 건설해야 한다는 과제”가 분명하다.8 과는 공동전선을 구축할 수 있다.
물론 개혁주의와 함께하기는 구체적 상황과 조건에 따라 달리 적용될 수 있다. 가령, 2000년대 초 이라크 침공을 주도한 토니 블레어의 노동당과 이라크 전쟁에 반대하는 공동전선을 구축할 수는 없었다. 신자유주의 정책을 추진하는 사민주의 정당과 신자유주의 반대 공동 행동을 구축할 수는 없었다. 그러나 이라크 침공에 반발한 영국 노동당 내 좌파, 신자유주의 추진에 반발해 분리해 나온 좌파적 개혁주의 세력한편, 혁명가들은 좌파 개혁주의도 몇 년 사이에 순식간에 우경화할 수 있고 온건 개혁주의도 상황에 따라 항의 행동에 나설 수 있음을 항상 염두해 두며 매 시기 어느 세력과 공동전선을 구축할지 판단해야 한다. “몇 년 전에만 해도 모두가 칭송해 마지 않았던 시리자는 좌파적 사민주의 정당에서 우파적 사민주의 정당으로 바뀌어 트로이카가 요구하는 긴축 정책을 집행”했다. 반면, “우파적 사회민주주의 정당을 가볍게 일축해 버려서는 안 된다” 이들 중 일부는 “신생 극우 정당에 맞서 대규모 시위를 건설”하기도 한다.
한국도 마찬가지다. 2016~2017년 박근혜 퇴진 운동에는 온건 개혁주의인 NGO들도 동참했다. 좀더 거슬러 올라가면, 이명박근혜 정부 9년 동안 대중 운동은 대체로 온건 개혁주의인 NGO들과 함께 했다. 그러나 문재인 집권 이후에는 상황이 좀더 복잡하다. NGO들이 기본으로는 문재인 정부를 지지하기 때문이다. 가령, 지난해 트럼프 방한 반대 운동 때, NGO들은 ‘NO트럼프’ 기조가 문재인에게 부담을 줄 수 있다고 여겨, 자신들의 연대체 참가 조건으로 ‘NO트럼프’ 기조를 삭제하라고 요구했다. ‘NO트럼프공동 행동’이 이를 거부하자 김금옥 전 여성단체연합 상임대표는 트럼프 방한 반대 집회에 여성단체들이 참가하지 못하게 압력을 넣었고 NGO들은 트럼프 방한 반대 집회에 대항하는 별도의 행사를 했다. 사실상 트럼프 방한 반대 운동을 분열시킨 것이다. 이럴 때 이들과 공동전선을 구축하려고 문재인 비판을 삼간다면, 오히려 운동의 전진과 노동계급 단결에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다.
따라서 우파 정부 때와 달리 현 시기에 NGO 등 온건 개혁주의와 공동전선 구축은 불필요한 타협을 부를 수 있다. 그러나 이런 상황이 무한정 지속되지는 않을 것이다. 문재인 정부의 우향우가 본격화하고 이에 대한 기층의 반발이 개혁주의 세력 내 변화를 가져올 수 있다. 이에 따라 특정 사안을 두고 그들과 공동전선을 구축할 수 있음을 염두에 둬야 한다.
요컨대, 혁명가들은 개혁주의와 함께 하는 공동전선의 원리를 이해하고 이를 적용하면서도 객관적 정세, 정부의 성격과 이에 대한 개혁주의 세력의 태도, 좌파의 주관적 조건 등을 고려해 공동전선 전술을 구사할 줄 알아야 한다.
정치적 독립성
혁명가들이 단결을 추구할 때 벌어질 수 있는 하나의 명백한 위험은 그것이 노동자들로 하여금 개혁주의 지도자들과 단절하게 하는 데 이바지하기는커녕, 그 지도자들에 대한 환상을 조장할 수 있다는 점이다. 그래서 혁명가들은 공동전선을 통해 대중 운동을 건설하면서도 혁명가들의 주장이 더 효과적이라는 사실을 실천으로 입증해야 한다. 그러려면 혁명가들은 정치적 독립성을 유지해야 한다.
정치적 독립성은 언제든 동맹 세력을 비판할 자유와 자신의 간행물을 만들어 선전할 자유, 필요하다면 독자적으로 행동할 자유를 뜻한다.
공동전선 안에서 혁명가들은 개혁주의자들과의 정치적 차이를 숨기지 않고 드러내야 운동 참가자들에게 입증받을 수 있다. 만약 혁명가들이 개혁주의자들과의 공통점만 강조하고 차이점을 숨기면 누가 혁명가들의 제안과 주장을 알 수 있겠는가! 트로츠키는 혁명가들이 차이를 숨기면 의도와 무관하게 정치적으로 타락한다고 경고했다.
10 으로 이동했고, 이 단서 조항은 공산당이 급진당에 대해 정치적 무장해제를 하는 명분이 됐다.
한 가지 사례를 들겠다. 1934년 프랑스 사회당과 공산당은 반파시즘 공동 행동 협약을 맺었다. 공동 행동 협약은 파시즘에 맞선 시민적 자유 확대, 파시스트 테러 행위 반대, 노동자 자위대 창설 등을 핵심 요구로 한 전형적인 공동전선이었다. 문제는 협약의 단서 조항으로 “공산당과 사회당은 서로에 대한 정치적 공격과 비판을 하지 않는다”를 넣었다는 것이다. 트로츠키는 “우리가 비판하고 선동할 수 있는 자유를 제한하는 조직적 협약은 절대 하면 안 된다” 하고 비판했다. 이 협약 이후 프랑스 공산당은 부르주아 정당인 급진당을 끌어들여 계급간 동맹인 인민전선물론 이 단서 조항이 없었더라도 인민전선을 추구해 온 스탈린주의 공산당은 부르주아 정당과의 동맹을 위해 스스로 차이를 숨기고 공통점만 강조했을 것이다.
한국의 스탈린주의 친북 좌파인 자민통 경향도 민주노동당 지도부를 장악한 뒤 부르주아 정당인 민주당과의 연립정부 구성을 목표로 한 인민전선을 추진하며 민주노동당을 우경화시켰다. 민주노동당의 사회주의 강령을 삭제했고 민주당과의 정치적 차이점보다 공통점을 강조했다. 당시 이정희 민주노동당 대표는 유시민과의 대담집 《미래의 진보》에서 노무현의 참여정부가 시도한 개혁이 성공하지 못한 것이 진보진영의 과도한 투쟁 때문인 것처럼 주장하기도 했다.
이렇듯 적대 계급과의 동맹인 인민전선은 노동운동을 분열시키는 기회주의로 나타난다(선거에서는 득이 될지 몰라도).
인민전선은 공동전선과 전혀 다른 것이다. 공동전선은 노동자 계급 정당들의 부분적 행동 통일을 위한 전술인 반면, 인민전선은 부르주아 정당까지도 포함하는 종합적인 계급 협력 전략이다. 공동전선은 구체적인 특정 목표를 위해 함께 싸운다는 실용적 합의에 바탕을 두는 반면, 인민전선은 자본주의 정부 수립 강령을 바탕으로 활동한다. 공동전선의 전제 조건은 혁명적 조직의 완전한 정치적 독립성과 비판의 자유인 반면, 인민전선 속의 공산당은 동맹한 다른 정당들을 비판하지 않는다(또는 못한다). 마지막으로, 공동전선은 혁명적 당이 계속 다른 활동을 하면서 병행하는, 당 활동의 한 갈래일 뿐인 반면, 인민전선은 스탈린주의 정당에게 총체적 전략이다.
한편, 인민전선을 추구하지 않아도 공동전선 전술을 활용하는 혁명적 좌파에게 기회주의의 위험성은 항상 있다. 이는 멀리 떨어진 정부나 자본가들에게서 오는 것이 아니라 공동전선 속에서 함께하는 세력(동맹)들에게서 온다.
만약 문재인이 혁명가들에게 “지금 정부에 맞서 투쟁을 호소할 게 아니라 구적폐세력에 맞서라”라고 한다면, 혁명가들은 어떠한 압력도 받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문재인이 NGO들을 설득하고, 이들이 민주노총 지도자들을 설득하고, 민주노총 지도자들이 현장조합원들을 설득해 결국 현장조합원들까지 혁명가들에게 문재인과 똑같은 말을 한다면, 이는 진정한 압력이 될 것이다.
이런 압력을 염두에 둔다면, 혁명가들은 항상 공동전선 안팎에서 논쟁을 하고 자신의 입장을 공공연하게 펼쳐야 한다. 개혁주의자들은 항상 ‘연대 질서를 훼손한다’, ‘정치적 예의가 없다’며 혁명적 좌파에게 침묵을 강요하지만 말이다.
우리는 공동전선이 투쟁의 장이라는 것을 언제나 명심해야 합니다. 공동전선을 점차 건설하는 과정에서 부르주아지나 우익, 파시스트 등의 적에 맞서는 투쟁을 수행하면서도, 공동전선 내부에서 정치적 영향력과 혁명적 조직의 세력을 키우려고 투쟁해야 합니다.
이 점을 놓치면, 개혁주의 세력과 이들의 영향을 받는 현장조합원들의 압력에 밀려 언제든 기회주의적으로 타협할 위험성이 있다.
그렇다고 해서 혁명가들의 정치적 독립성을 혁명적 강령을 늘어놓는 식의 추상적 선전으로 이해되면 안 된다. 가령 노동자연대는 북한 핵을 비롯한 모든 핵무기에 반대하고 원칙적으로 ‘한반도 비핵화’를 지지하지만 사드저지전국행동에서 ‘한반도 비핵화’를 주요 요구로 제기하지 않는다. ‘한반도 비핵화’는 구체적 맥락에서는 ‘북한 비핵화’를 뜻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연대체가 이 요구를 채택하려 하면 북핵에 대한 견해를 통일시키기 위해 논쟁하느라 힘을 소진하게 될 것이고 사드 배치 반대 운동을 제대로 건설할 수 없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실제 사드저지전국행동은 일부 단체들이 ‘한반도 비핵화’를 주요 요구로 제기해 마비돼 있었다.
공동전선의 전제는 특정한 요구와 행동을 둘러싼 단결이다. 따라서 공동전선을 통해 우리가 자신을 어떻게 차별화 할 것이냐가 아니라, 폭넓은 단결과 요구를 쟁취할 수 있는 행동을 어떻게 이끌어 내느냐가 중요하다. 이를 위한 혁명가들의 주장과 제안이 빛을 발하려면 정치적 독립성이 필수적이다. 그리고 이를 정기간행물(신문)로 표현해야 한다.
만약 노동자연대가 박근혜정권퇴진비상국민행동(퇴진행동)에 참가하며 내부에서 벌어진 정치적 논쟁과 주장을 〈노동자 연대〉에 반영하지 않았거나 이 신문을 공개적으로 판매하지 않았다면, 〈노동자 연대〉가 제시한 입장을 퇴진행동 파견자들이 그 내부에서 제기하고 설득하려는 노력이 없었다면, 노동자연대와 같은 혁명적 좌파는 거대한 대중 운동 속에 아무런 존재감 없이 열심히 일하는 단체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을 것이다.
노동자연대는 국면마다 적절하다고 판단되는 전술을 제시했고 이를 퇴진행동 안팎에서 설득하려 노력했다. 〈노동자 연대〉는 이를 위한 매개였다. 그 덕분에 공동전선 속에서 혁명적 좌파의 정치적 위상을 높이고 성장할 수 있었다.
혁명적 좌파의 규모
공동전선은 비슷한 규모의 조직들 사이에 해야 효과적이다. 물론 작은 조직과 큰 조직 사이에 동맹이 가능하지 않거나 필요 없다는 뜻은 아니다. 그보다 최소한 어떤 결과를 내놓을 수 있는 실질적 세력을 공동전선이 포함해야 한다는 뜻이다. 공동전선은 각자 자기들의 입장을 선전하기 위해 모인 것이 아니라 대중 운동을 건설하려는 것이기에 규모는 무척 중요한 요소다.
예컨대, 500여 명 되는 혁명적 좌파가 수십 명 규모의 단체와 공동전선을 구축하는 것은 큰 효용이 없다. 이를 통해 어떤 실질적 운동을 건설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고만고만한 좌파들이 공조를 위해 모인 연대체를 공동전선이라고 부르지 않는다. 또 NGO들이 주축이고 대중행동을 전제하지 않는 소위 기자회견용 연대체도 공동전선이 아니다.
이런 연대체를 공동전선과 혼동하는 것은 혁명적 좌파의 운신의 폭을 줄이고 불필요하게 타협하라는 압력을 받게 만들 수 있다. 때로는 정반대로 초좌파적 압력도 만만치 않게 받을 수 있다.
반대로 500여 명 되는 혁명적 좌파가 수백만 당원을 거느린 개혁주의 정당과 공동전선을 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규모의 차이가 너무 커서 개혁주의 정당의 지도부는 혁명적 좌파의 공동전선 제안을 무시할 것이다.
트로츠키가 살았던 시대에는 공산당이 선진 노동자들의 적어도 3분의 1에서 4분의 1의 지지를 받고 있었기에 사민당 등 개혁주의 세력이 무시할 수 없었다. 지금은 그때와는 다른 조건이다. 소련과 동유럽이 몰락한 이후 스탈린주의 공산당의 몰락, 전통적 사민주의 정당들의 신자유주의 정책 추진과 그에 반발한 좌파 개혁주의 등장 등으로 상황이 변했기 때문에 혁명적 좌파의 규모와 영향력을 단순히 숫자로 측정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공동전선을 구사할 때, 혁명적 좌파 조직의 존재 유무와 규모, 정치적 영향력 등은 무척 중요한 요소다. 알렉스 캘리니코스는 사회주의노동자당SWP이 체급을 뛰어넘어 “가장 중요한 운동 대부분에서 결정적 구실”을 할 수 있었던 것은 “공동전선 정치에 충실”했고, 무엇보다 레닌주의 조직으로서 민주집중주의에 입각해 힘을 핵심 목표에 집중시킬 수 있었기 때문이라고 했다.
노동자연대는 규모와 영향력 면에서 친북 좌파인 자민통계, 사민주의 정당인 정의당, 온건 개혁주의자들보다 작다고 볼 수 있지만 구체적 상황에서 대등한 파트너로 대중 운동을 건설하기도 한다. 2000년대 초 반전운동, 2008년 광우병 소고기 수입 반대 촛불 시위, 2013년 이후 철도·의료 민영화 반대 운동, 2016~2017년 박근혜 퇴진운동 등이 사례일 것이다. 이는 노동자연대가 정치적 분석을 바탕으로 쟁점을 선제했고, 개혁주의자들과 공동 행동을 할 정도로 개방적이면서도 정치적·조직적 응집력을 갖고 있었기에 가능했다.
하지만 노동자연대가 지금보다 2~3배 이상의 규모를 갖추고 선진 노동자들 사이에 꽤 의미 있는 영향력을 갖고 있었다면 여러 운동을 좀더 급진적이고 계급투쟁적으로 이끌 수도 있었을 것이다.
요컨대, 혁명적 조직의 규모가 크면 클수록 공동전선을 통해 얻을 수 있는 성과는 더 크고, 운동을 전진시킬 수 있을 가능성도 높아진다.
맺음말
현재 문재인 정부는 노동자들의 권리를 공격하고 그나마 줬던 알량한 개혁도 회수하고 있다. 무엇보다 장기화하고 있는 경제 침체로 정부는 노동계급에게 거듭 양보를 강요할 것이다. 이를 위해 여성·소수자 차별을 강화하는 이간질 전략을 강화할 것이다.
따라서 혁명적 좌파는 이런 상황에 비춰 노동자들의 권리를 둘러싼 쟁점, 여성·소수자·난민 등 차별 쟁점 등으로 개혁주의 세력과 공동 행동을 건설할 줄 알아야 한다. 특히 노동자들의 저항이 시작됐고, 최근 여성 차별 쟁점으로 기존 주류 운동에서 벗어난 저항이 벌어지고 있기에, 적절한 시점에 효과적으로 공동전선을 구사한다면 운동을 전진시킬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전제조건이 있다. 이데올로기의 명료함, 정치적 응집력, 독자적으로 운동에 개입하는 능력을 갖춘 혁명적 좌파의 존재가 중요하다. 작은 노동조합 투쟁에서도 퇴진운동과 같은 거대한 대중 운동에서도, 능력을 갖춘 혁명적 좌파가 있느냐 그리고 얼마나 있느냐에 따라 커다란 차이가 발생한다. 혁명적 조직을 건설하지 못하면 공동전선이 필요한 시기가 와도 기회를 부여잡지 못할 것이다.
주
- 리즈 2007. ↩
- 러시아 혁명의 지도자 레닌과 트로츠키가 주도해 1919년에 창립됐다. 레닌과 트로츠키가 지도하던 시절 코민테른(1∼4차 대회)은 혁명적 전통의 보고(寶庫)였지만, 1924년 이후 스탈린이 지도한 코민테른은 소련 외교정책의 수단으로 전락했다. 7차 대회를 마지막으로 해산했다. ↩
- 트로츠키 2010. ↩
- 스탈린이 주도한 코민테른이 1928~1934년 실행한 정책이다. 대규모 경제 붕괴가 임박했다고 보고 혁명가들이 개혁주의자들과의 협력을 일절 거부해야 한다는 입장이었다. 파시즘에 맞서 개혁주의자들과 공동 행동하기를 거부했고, 따로 ‘적색 노조’를 만들라는 지령을 내려 노동조합을 불필요하게 분열시켰다. ↩
- 클리프 2018. ↩
- 클리프 2018. ↩
- 캘리니코스 2018. ↩
- 그리스 시리자, 스페인 포데모스, 독일 디링케, 아일랜드 신페인, 프랑스 멜랑숑의 불굴의 프랑스, 제러미 코빈이 이끄는 영국 노동당 등이 이에 해당한다. ↩
- 캘리니코스 2018. ↩
- 인민전선은 1934년 10월 이후 코민테른이 추진한 정책이고 1935년 코민테른 7차 대회에서 테제 형식으로 공식화했다. 인민전선은 부르주아(친자본주의) 정치 세력까지 포함한 모든 ‘민주’ 세력의 대연합이었다. 즉, 계급을 가로지르는 체계적이고 전략적인 동맹이었다. 결국 각국 공산당은 자국의 자유주의 부르주아 정당을 지지하게 됐다. 심지어 미국 공산당은 민주당의 루스벨트를 지지해 독립적인 정당 건설 전망을 포기했다. ↩
- 최일붕 2017. ↩
- 캘리니코스 2018. ↩
- 캘리니코스 2013. ↩
참고 문헌
리즈, 존 2007, ‘다시 듣는 맑시즘 2007 ①: 사회 변혁의 전략과 전술’, <맞불> 54호.
최일붕 2017, ‘민중주의의 고차원적 형태, 인민전선이란 무엇인가?’, <노동자 연대> 204호.
캘리니코스, 알렉스 2013, ‘레닌주의는 끝났는가?’, <레프트21> 98호.
캘리니코스, 알렉스 2018, ‘개혁주의와 관계 맺기와 혁명적 조직 건설하기’, <노동자 연대> 256호.
클리프, 토니 2018, 《트로츠키》, 책갈피.
트로츠키 2010, ‘고전에서 배운다 ― 코민테른에 제출한 트로츠키의 공동전선 테제’, 《마르크스21》 8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