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고전 마르크스주의 관점으로 보는 북한 현대사

북한 여성과 사회변혁(1)

해방 이후부터 1980년대 말까지

MARX21

  1. Trosky 1985, p42.
  2. Trosky 1984, p65.
  3. [결]결혼할 것입니까?/[남]남자친구 있습니까?(결혼할 수도 있겠네요?)/[출]출산도 생각하고 계신가요?(야근을 제대로 시킬 수 있을까요?).
  4. 김석향 2006.
  5. 가부장제는 말하는 사람마다 각양각색의 뜻으로 사용되고, 심지어 그저 여성 차별의 동의어로 사용되기도 한다. 하지만 대개 가부장제는 자본주의와는 구분되는 여성 차별 구조로서 “여성에 대한 남성 지배”를 뜻한다.
  6. 페퍼 2005, pp105-107.
  7. 페퍼 2005, p106.
  8. 박영자 2017, p200.
  9. 모리요·말로비크 2018, p85. 저자인 쥘리에트 모리요는 한반도 문제 전문가로서 북한 사료와 북한 취재 자료를 기반으로 글을 쓴다.
  10. 당시 북한의 토지개혁은 아래로부터 소작농의 투쟁과 운동을 통하지 않았다. 토지개혁으로 소작농들은 형식적으로는 토지 소유하게 됐지만 계약, 매매, 임대차, 저당, 상속은 인정되지 않았다.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는 수확량의 4분의 1을 현물세로 거뒀다. 초과 징수도 많았다. 소작농들은 단지 징수 주체만 달라졌을 뿐이라고 느꼈다. 소작농들로서는 양곡을 싼 값에 팔고, 생활필수품과 비료를 비싸게 사는 강제수매가 시행됐다. 그 결과, 북한의 소작농들은 토지개혁(미쓰히코 2001, p50)에 소극적이었다. 이런 상황은 1945∼1950년 북한 내부 사정을 보여 주는, 미국 국립공문서관에 보관돼 있던 북한 내부 자료에도 다음과 같이 묘사돼 있다. “토지개혁에 대한 소작인의 환희의 태도, 표정이 너무나 희박하다.”(미쓰히코 2001, p51). 북한 소작농들의 의식이 낮기 때문이라는 등 김일성 선집에 등장하는들은 진실과는 거리가 멀다. 토지개혁이 이뤄졌어도 소련군의 징발, 현물세, 관개사용료를 포함한 각종 수수료 등으로 농민들은 새로운 부담에 시달렸다. 하기와라가 발견한 소련군 쌀 징발 자료에 따르면, 1945년 가을부터 1946년까지 강원도에서 수매로 모은 쌀 1만 7580톤이 모두 소련군에게 넘겨졌다. 여러 사정을 고려하면 1946년 북한 전체의 국가곡물징수율은 35~40퍼센트 이상이었다(미쓰히코 2001, p83). 북한 국가자본주의의 성립 과정에 관해서는 김하영 2002를 참고하라.
  11. 김성보 2016, p227.
  12. 박영자 2017, p217.
  13. 김일성, 《김일성 저작집 2권》, 조선로동당출판사, 2017, pp273~279. 박영자 2017, pp209~210에서 재인용.
  14. 김일성, ‘자녀교양에서 어머니들의 임무’, 《김일성 저작집 15》, 조선로동당출판사. 1981, pp348-349. 박영자 2017, pp108에서 재인용.
  15. 박영자 2017, p108.
  16. 《조선녀성》, 1947년 5월호 p46. 박영자 2017, pp231에서 재인용.
  17. 아브트 2014, p195.
  18. 박영자 2017, p265.
  19. 1946년 8월 임시인민위원회 결정 57호로 채택된 ‘공민증에 관한 결정서’는 호적을 대신해 공민증으로 신원을 확인하게 했다. 만 18세 이상의 모든 여성이 남성과 동등하게 공민증을 교부받았다.
  20. 길확실에 관해서는 이세영(2016)을 참고하라.
  21. 내부예비란 중화학공업에서 다 쓰지 않는 자재와 원료 또는 관련 공장에서 쓰고 남은 폐품을 경공업 관련 공장에서 소비재 생산의 재료로 활용한다는 뜻이다.
  22. 이태영 1988, p190. 윤미량 2006, p76.
  23. 박영자 2017, p308. 이 시기는 냉전 등 국제 정세도 관련이 있다. 1960년대 중소분쟁 과정을 지켜보면서 북한은 독자적 군사력 구축에 박차를 가했다. 1967년 갑산파 숙청과 1968년 푸에블로호 사건을 계기로 조성된 전쟁 위기는 북한 정권이 군사력 증강에 더욱 몰입하는 계기가 됐다.
  24. 박영자 2017, p357.
  25. 박영자 2017, p358.
  26. 스미스 2017, p205. 헤이즐 스미스는 심영희, 한상진 등 국내 연구자들의 자료에 근거하고 있지만 북한에서 활동하는 국제기구들과 북한 내부 통계도 반영하고 있다.
  27. 김애실 1997.
  28. 박현선 2003, p199.
  29. 물론 생후 수개월부터의 유아가 갈 수 있었던 탁아소는 주체사상을 교육받는 공간이기도 했다.
  30. 주탁아소는 직장에 다니는 부모가 월요일부터 토요일까지 아이를 위탁했다가 주말에 집에 데려가는 것으로 1961년부터 설치되기 시작해 각 도·시·군에 2∼3개 설치됐다. 월탁아소는 아예 한 달간 아이를 탁아소에 맡기는 것으로 1965년부터 평양·개성·청진 등 주요 도시에 2∼3개 설치됐다(박영자 2006, p79).
  31. 윤미량 2006, p100.
  32. 스미스 2017, p177.
  33. 박영자 2017, p459.
  34. 박영자 2017, pp402-403.
  35. 남녀 간 예절을 다루는 고등중학교 3학년 24단원(민무숙 외 2001, p223).
  36. 스미스 2017, p206.
  37. 이배용 1997, p144.
  38. 홍승하 외 2016, p167.
  39. 커밍스 2001, p613.
  40. 박영자 2017, p402.
  41. 로젠버그 1989, pp16-17.
  42. 로젠버그 1989, p19.
  43. 박현선 2003, p140.
  44. 김병로 2016, pp216-217.
  45. “시장이 개성의 기초이자 전제조건이고, ‘자립’과 ‘자유’를 가치로 규정”(박영자 2010, p342)한다는 전제 하에, 장마당이 북한 여성에게 자유와 자립의 공간을 어느 정도 제공했다는 분석은 문재인 친화적 인사들을 포함해 북한 연구자들에게서 적지 않게 발견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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