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 마르크스주의 관점으로 보는 북한 현대사
북한 여성과 사회변혁(1)
해방 이후부터 1980년대 말까지
문재인 정부 들어 연이은 남북 정상회담으로 북한 사회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고 있다. 리설주와 김여정의 ‘활약’과 북한 여성들의 활기차 보이는 모습은 북한에 대한 편견을 거두는 데 일조하는 듯하다. 과연 북한 여성들은 흔히 ‘가부장적 사회주의’라고 일컬어지는 북한에서 어떤 삶을 살아 왔고 살고 있는가?
1 트로츠키는 다음과 같이도 말했다. “삶의 조건을 변화시키기 위해서 우리는 여성의 시각으로 그것을 보는 방법을 배워야 한다.” 2
여성의 지위가 그 사회의 성격을 보여 주는 중요한 지표 가운데 하나라는 점은 마르크스주의의 인식 중 하나다. 마르크스는 ‘쿠겔만 박사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역사를 조금이나마 알고 있는 사람이라면 여성의 적극적인 참여 없이 사회 대변혁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사회의 진보는 여성의 사회적 지위가 어떠한가에 따라서 정확히 측정될 수 있는 것입니다.” 레닌도 여성의 지위가 어떠한가를 사회 진보나 퇴보의 기준으로 여겼다. 트로츠키가 언급한 다음의 지적은 무릎을 탁 치게 한다. “한 사회의 여성, 어머니, 자녀들을 대하는 태도를 통해서 그 인간 사회를 평가할 수 있다.”3 만 봐도 알 수 있다. 가족 제도가 단지 결혼 제도만을 뜻하지 않기 때문이다. 자본가들에게 노동자 가족이란 돈 안 들이면서도 자본 축적에 필요한 노동력을 매일 새롭게 충전시키는 수단이자 미래의 노동력을 재생산하고 사회화하는 수단이다. 따라서 자본주의는 현재의 핵가족을 유지하기 위해 여성에게 어머니로서 역할과 모성애, 아내로서 내조, 자식으로서 효도 같은 덕목을 강요한다. 그럼으로써 자본가들은 현재와 미래의 노동자들이 생존하는 데 필요한 막대한 비용을 절약한다. 이 때문에 여성은 천대당한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안전한 낙태 시술을 받을 권리, 자신의 의사에 반하는 성적 행위를 거부할 권리 등이 온전하게 보장되지 못하는 까닭이다.
여성은 직장과 가정에서 이중의 억압을 받고 있다. 결혼을 하지 않은 여성일지라도 그녀가 노동계급의 일원인 한, 이중의 굴레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취업 면접장에서 미혼 여성들이 흔히 받는 ‘결남출’ 질문 북한 여성의 삶은 북한 사회의 성격을 보여 주는 시금석이다. 또한 북한 여성의 삶은 남한 여성의 삶을 비추는 거울이기도 하다. 북한 여성의 지위가 남한 여성보다 비교적으로 높았던 시기가 있었다는 증거가 많이 있다. 적어도 제도적 측면에서 비교할 때 말이다.이 글은 기존 연구 결과들을 토대로 하되, 다음의 관점을 견지하고 있음을 미리 밝힌다.
첫째, 북한 사회를 남한 사회보다 열등한 사회라거나 더 나은 사회라고 여기지 않는다. 이는 북한을 자본주의의 한 변종인 관료적 국가자본주의로 보는 시각에서 비롯한 것이다.
5 를 채택한다. 그러나 가족의 기능과 형태는 그 사회에서 생산이 이뤄지는 방식과 매우 긴밀하게 연관돼 있다. 자본주의 이전의 가족과 자본주의의 가족은 완전히 다르고, 자본주의 하에서도 가족은 변모해 왔다. 자본주의는 단지 생산 방식만이 아니라 가족 제도에도 영향을 미쳤다. 북한 사회와 여성을 가부장제의 관점에서 분석할 경우 자본주의적 가족의 특징이 북한 여성들의 삶에 미친 영향을 제대로 분석하기 힘들다. 자본주의 핵 가족은 대가족에 비해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자본주의적 지배에 용이하다. 봉건적 대가족은 배타적이어서 국가 권력이 침투하기가 쉽지 않다. 또한 내부 위계 질서가 방대하고 연계망이 넓기 때문에 공동체의 생활을 관리하는 데 많은 노력과 봉사가 요구된다. 그래서 여성의 경제적·사회적 활동 참여가 어렵다. 북한 정권이 핵가족화를 추진한 중요한 까닭이다. 북한 여성의 삶은 자본주의적 가족에 관한 마르크스주의적 시각으로 조명해야 제대로 분석할 수 있다.
둘째, 북한 사회와 여성의 삶에 관한 적지 않은 연구들은 주된 분석 틀의 하나로 ‘가부장제’셋째, 북한에서의 시장 도입(시장 통제)이 여성의 삶에 부정적 영향을 미쳤다.
·중국 등 제국주의 강대국들의 대북제재가 북한 여성의 삶에 악영향을 미쳤다.
넷째, 미국다섯째, 북한 여성 노동자들이 차별과 억압을 그저 받아들이지만은 않았다.
이를 위해 먼저 이 글은 해방 이후 북한 사회의 변화에 따라 북한 여성의 삶이 어떻게 바뀌었는지를 살펴본다.
크게 다섯 번의 커다란 굴절이 있었다. 첫째는 한국전쟁이었다. 한국전쟁은 남한뿐 아니라 북한 여성의 삶도 뒤흔들어 놓았다.
둘째는 1950년대 중반 이후부터 1960년대까지 지속된 북한 경제의 고도 성장기이다. 이 시기에 북한 여성은 실로 산업 역군이었다. 물론 미래 인재와 산업 역군을 길러 낼 훌륭한 어머니로서 역할도 동시에 강조됐다. 그런데 이 시기 중화학공업 우선 정책은 산업의 위계를 만들었고 그 위계는 여성 노동자에 대한 차별로 이어졌다. 여성의 경제활동 참가를 강력하게 독려하기 위해 탁아소 확대 등 상당 수준의 가사노동의 사회화가 진행됐음에도 가사와 양육의 일차적 책임은 여전히 여성에게 전가됐다. 그 사회가 노동자들을 착취하는 데 전념하는 한, 가족의 역할은 근본적으로 변하지 않는다는 점을 확인할 수 있는 대목이다.
·정치적 지위는 다시 변화를 겪게 된다. 그 전까지는 일과 노동이 좀더 강조됐다면, 1970년대 위기 이후에는 가정을 돌보는 어머니로서의 역할이 더 강조됐다. 여성을 일터에서 가정으로 돌려보내는 일도 잦았다. 우선 해고 대상은 기혼 여성이었다. 김일성의 어머니 강반석과 아내 김정숙이 헌신적으로 가정을 돌보고 ‘혁명 투사’를 길러 내는 북한 여성의 모델로서 전면화된 때도 바로 이 시기였다.
셋째는 1970년대 이후 북한에 찾아온 경제 위기와 1980년대 경제 침체의 시기다. 이 때 북한 여성의 삶과 사회적·금·마그네사이트 등 광석 채굴이 불가능해졌다. 제조업 분야도 타격을 입었고, 일부 공장에서는 노동자들이 설비를 분해하고 중국으로 팔아서 식량으로 교환할 정도였다. 북한 정부의 예산은 거의 40퍼센트 가까이 축소됐고 전체 국민소득은 거의 2분의 1로 줄었다. 6 북한 동포들은 심지어 그들 자신을 밀수출했다. 식량을 구하기 위해 탈북 여성들은 매춘부가 되거나 중국 농부의 아내가 되기도 했다. 7
넷째는 1980년대 이후 더욱 뚜렷해진 경제 위기와 1990년대의 ‘고난의 행군’ 시기다. 이 시기 북한 여성은 가족이 연명할 식량을 구하기 위해 생계의 최전선으로 내몰렸다. 그 전까지 보장되던 배급과 사회 안전망(의료와 교육 서비스)이 무너져 북한 여성의 삶은 실로 고단했다. 이 시기에 북한 경제는 사실상 붕괴하고 말았다. 에너지 공급이 타격을 입자, 석탄다섯째는 김정은 집권 이후 시기이다. 김정은 정권의 등장 이후 북한의 농업 생산성이 높아지는 등 북한 경제가 다시 활로를 찾았다는 평가가 적지 않다. 이는 부분적으로 사실이다. 그러나 대북제재가 엄연한 가운데 북한 여성의 삶은 고난의 행군 시기의 처절함에서는 벗어났을지 모르나 여전히 이중의 굴레에 극단적으로 노출돼 있다.
전체 글의 1부인 이 글은 셋째 시기까지 다룬다. 그런데 해방 이후부터 1970년대까지 형성된 북한 사회의 성격은 그 뒤에 등장할 위기의 씨앗을 잉태하고 있었다.
해방 이후: 자본주의 가족의 시작
·경제 생활에서 남성과 동등한 권리를 약속받았다. 8
해방 이후 북한에서는 여성들의 삶에 커다란 변화가 찾아왔다. 1946년부터 1949년까지 당시로서는 놀랄 만한 법안들이 발표됐다. 1946년 3월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의 이름으로 토지개혁령이 발표되고 3월 23일 ‘20개조 정강’이 발표됐다. 이로써 여성은 남성과 평등하게 토지를 분배받았다. 또한 20개조 정강 제4조에 의해 여성은 남성과 동일한 선거권과 피선거권을, 제5조에 의해 정치 여성은 공부하고, 투표할 수 있었고, 동일노동 동일임금 원칙에 근거해 식량을 배급받았다. 매춘, 정부(‘기생’), 강제 결혼 등은 금지됐다. 1947년에는 여성이 기제돼지 않는 전통 족보인 ‘호적’이 철폐됐고 여성에게 상속권도 열렸다. 이혼은 합법화됐다. 남한에서는 호주제가 2008년에야 폐지된 것을 고려하면 이런 법안들은 진보적이었다. 국제적으로 한반도 문제 전문가로 알려져 있는 쥘리에트 모리요의 말처럼, 해방 이후 북한의 여성 관련 법령은 남한에서는 “2008년에나 완성된 중대한 첫 걸음이었다.”10 토지개혁은 자본주의 이전의 가족 형태를 붕괴시키기 마련이다. 실제로 토지개혁 이후 실시된 농업 협동화는 가족의 대대적 변화를 가져왔다. 가족은 경제 단위로서 기능을 상실하고 가부장이 다른 가족 구성원을 경제적으로 속박하는 것이 불가능해졌다. 역사학자 김성보는 민속학자들의 농업 협동조합을 조사한 결과를 소개하면서 “농업 협동화 이후 대가족 제도가 해체돼 소가족 제도로 바뀌었다”고 지적했다. 11
그러나 이와 같은 변화는 북한 관료가 주도하는 국가자본주의 건설이라는 목표에 종속된 것이었다. 자본주의적 공업화를 위해 봉건적 제도와 관행은 철폐돼야 했다. 토지에 결박된 농민은 노동자가 돼야 했다. 이를 위해 토지개혁은 반드시 필요한 조치였다.또한, 공장의 규율을 감내할 근대적 노동자층의 형성도 관건이었다. 노동계급의 육성, 다시 말해 노동자가 꾸준하게 태어나고 양육되고 체제가 원하는 방식으로 자라나는 것은 북한 국가자본주의에도 절실한 요건이었다. 의식 개혁을 기초로 생활 개혁과 생산 혁신을 추구한 건국사상총동원운동의 전개는 그 일환이었다.
북한 관료층은 1947년부터 추진한 경제계획을 통해 여성 노동자 양성을 본격화했다. 미혼 여성과 젊은 주부들을 생산 노동에 참여시키는 것이 관건이었다. 그 결과 북한 정권은 1947년 인민경제계획을 102.5퍼센트 완수하는 데 성공했다. 이 과정에서 여성 노동자 수는 3만 명이 늘어났다. 1946년를 기준점으로 해서 여성 공장 노동자는 1949년 3월에 약 180퍼센트로, 여성 기술자 수는 약 200퍼센트로 급증했다. 1949년 2개년 계획의 시작과 함께 여성 노동자 수는 1947년 3월을 기준점으로 해서 1950년 3월에 312.1퍼센트로 증가했다.
여성 노동자 증가률 | 여성 기술자 증가율 | ||
연도 | 증가률 | 연도 | 증가률 |
1946 | 100 | 1947 | 100 |
1947 | 117.8 | 1948 | 147.9 |
1948 | 161.3 | 1949 | 198.1 |
1949.3 | 179.1 |
또한, 안정적인 출산과 양육이 보장돼야 했다. ‘혁명의 후비대’ 양성(출산과 양육)이라는 목표 하에 여러 조처가 발표됐다. 김일성은 노동법령에 따른 사회보험제, 무료 치료, 산전산후 휴가 보장 등을 약속했다. 1946년 6월 24일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는 ‘북조선 로동자, 사무원에 대한 로동법령’을 공표했는데, 총 26조로 구성돼 있는 규정 중 여성 관련한 조항은 다음과 같다.
제7조 동일한 노동을 하며 동일한 기술을 가진 노력자에게는 연령과 성별을 불문하고 동일한 임금을 지불한다.
제14조 모든 기업소와 사무소에서 일하는 노동부녀와 여자 사무원이 임신 중에 있을 때에는 해산 전 35일, 해산 후 42일 간의 휴가를 줄 것을 제정한다.
제15조 건강 상태에 의하여 전보다 경한 노동에 넘어가야 할 필요를 느끼는 임신 중의 여자는 임신 6개월부터 시작하여 산전휴가에 이르기까지 경한 노동에 넘어갈 수 있으며 그 동안의 임금은 최근 6개월간의 평균보수금에 의하여 지불된다.
제16조 노동하는 여자로서 만 1세 미만의 유아를 가진 경우에는 1일 2회 30분씩 젖먹이는 시간을 가질 수 있다.
제17조 태모와 유모에게는 제정한 시간 외에 노동과 야간 노동을 금지한다. 제18조 각 기업소, 사무소 및 경제 부문의 노동자, 사무원들에 대한 의무적인 사회보험제를 다음과 같이 제정한다. 이 중 두 번째 조항은 임신 및 해산으로 인한 휴가시의 보조금 지불이다.
탁아소 104개소와 아동공원 131개소도 설치됐다.
사실, 여성에게 출산·양육의 의무를 강조하고 그 사회적 조건을 구비하려는 노력은 여성 노동력을 효율적으로 착취하기 위한 자본주의적 ‘큰 그림’의 일부였다. 1945년 11월 평양에서 발족한 조선로동당의 여성 외곽단체 북조선민주여성동맹(이하 여맹)은 각 지역에서 여성 노동력을 동원하는 구실을 했다. 개간지 수리, 피복 제작, 가축 사육, 응급 구제, 구호품 수집 등 각종 공공사업에 여성 인력이 동원됐다. 공공근로뿐 아니라 근대적 공장에서도 여성 노동자들은 ‘증산’과 ‘열성’을 요구받았다. 로동당의 〈로동신문〉과 여맹의 〈조선녀성〉은 섬유공장의 이분화, 평양 연초공장의 최수란사, 흥남 비료공장의 비운연 등은 작업 능률을 300퍼센트로 올리고 ‘창의고안’으로 혁신적 생산 활동을 했다며 ‘노력영웅’ 대접을 받았다.
남녀평등권 법령 공포 5주년 때 개최된 여맹 총회는 매일 1시간씩 일찍 출근하고 출근율 100퍼센트를 기록하자는 결의를 여성들에게 요구했다. 한마디로, 여성도 남성만큼 평등하게 노동시간을 연장하자는 것이 북한식 남녀평등이었다.
사실 자본주의는 차세대 노동자를 돌보는 데 필요한 막대한 수고를 감내하려 하지 않는다. 경제 상황이 나쁘지 않아 나름 여력이 있을 때조차 그 수고와 비용을 개별 가족으로 떠넘긴다. 가족은 이데올로기적 효과도 낸다. 핵가족으로 노동자들이 파편화·원자화되는 것은 분열 지배에도 효과적이다.
그렇다면 해방 직후 북한은 육아와 가사의 사회화로 여성들이 가정에 얽매이지 않아도 되는, 그래서 여성 해방의 기초가 마련된 사회였을까?
14 ‘어린애들을 잘 거두는 운동’, ‘어린애에게 병이 나지 않도록 하는 운동’, 자체적인 탁아소·유치원 건립 운동, 어머니들과 학교 간의 연계를 강화하는 운동 등이 실시됐다. 15
현실은 그렇지 않았다. 남한에서도 ‘엄마표’가 강요되지만, 북한에서도 체제 유지를 위해 ‘엄마표’가 강요됐다. 북한 정권은 ‘혁명 투사를 길러 낼 어머니의 책임감’이야말로 여성의 최고 미덕이라고 강조했다. 예를 들어 당시 아동용 일상품의 생산이 열악했는데 김일성은 아동의 생명을 보장할 수 있게 할 조치로 ‘어머니들의 성의와 정성’을 유독 강조했다. 여전히 유아사망률이 높은 상황에서 전염병에 쉽게 감염되는 아이들의 위생 문제를 어머니들에게 일차로 책임지웠다. 노동을 이유로 양육을 소홀히 하는 것은 비판 대상이었다. 여맹은, 여성 해방과 남녀 평등을 주장하며 남편에게 “밥도 같이 하고 어린애도 같이” 양육하자고 요구하는 것은 남녀 평등권을 잘못 해석한 행태라고 지적했다. 여성이 가정과 어린애를 돌보지 않으면 “가정은 불행한 파탄”을 맞고 “여성의 사회적 지위는 얻을 수 없게 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심지어 신혼집 가구 마련도 여성의 책임이었다. 결혼할 때 신랑이 집을 장만하고 신부가 가구와 가재도구를 장만하는데, 신랑은 집이 거의 무상으로 제공되거나 아주 적은 임대료만 내고 살 수 있었다. 그래서 결혼할 때 재정적 부담은 주로 신부 쪽에 생겼다. 이 때문에 딸을 둔 부모는 대체로 딸이 십대 초반일 때부터 돈을 모으기 시작했다.요약하면, 해방 직후 북한 정권은 북한 여성에게 근대적 생산 영역에 참여하고 ‘혁명후비대’를 양성할 것을 요구했다. 여성은 봉건적 제도와 악습에서 벗어났지만 노동과 가정이라는 새로운 이중의 굴레에 속박됐다. 북한의 대가족은 근대적 핵가족으로 탈바꿈했고 북한 여성은 자본주의적 가족이라는 바다에 던져졌다.
한국전쟁과 북한 여성
18 북한 여성들은 미국의 폭격으로 관개시설과 저수지 등이 파괴되면 복구와 생산을 동시에 하는, 이른바 출혈 노동을 감수했다.
한국전쟁은 북한 여성 노동자들에게 그야말로 ‘출혈 노동’의 시기였다. 전쟁 기간 동안 여성들은 공장에 동원되고 파괴된 현장을 복구했다. 전선에 나간 남성들을 대신해 노동자가 됐고 계속되는 미군의 폭격 속에서 공장과 논밭을 지키고 생산을 지속했다. 전쟁 발발 직후 10여 일 사이에 함경북도에서만 여성 2300여 명이 제철, 방직, 제유製油 등 주요 부문의 공장에 진출했다는 기록도 있다. 공장에 들어가지 않은 여성들은 ‘로력협조대’와 ‘생산대’를 조직해서 공장 생산을 보조했다.한국전쟁은 해방 이후 북한 여성들에게 보장됐던 법적 자유와 권리가 제약되는 계기였다.
19 종전 이후 북한 정권은 1955년 3월 내각결정 28호를 통해 공민증 내용을 확인하는 절차와 혼인 등록 절차를 강화하기 시작했다. 가정을 안정화시켜 효율적인 통치 구조를 구축하려는 목적으로 이혼을 제한하기 시작했다. 1956년 3월 내각결정 25호는 협의 이혼을 폐지하고 재판상 이혼만 허용하기로 했다. 해방 직후에는 비교적 자유로웠던 이혼에 제동을 걸었던 것이다. 1956년 3월 내각결정 24호는 임신 중이거나 생후 1년 미만의 자녀를 가진 여성은 이혼 소송도 제기하지 못하도록 했다. 이후에는 벌금까지 물리게 했다. 상당한 액수의 벌금을 감당할 수 없어 이혼을 포기하는 경우가 늘어났다.
한국전쟁 발발 직후 북한 정권은 양성평등적 징표로 여겨지던 공민증 발급을 제한하기 시작했다.급속한 공업화 시기: 1950년대 중반부터 1960년대까지
한국전쟁이 끝나자마자 북한은 전쟁 피해를 복구하고 중공업 우선 정책을 추진하면서 급속한 산업화를 추진했다. 북한 정권은 산업화에 필요한 노동력 확보를 위해 여성의 생산 활동 참가를 늘리려 안간힘을 썼다.
·추앙받았다. 길확실과 리명원은 천리마운동을 대표하는 여성 모델이었다. 20
여성들에게도 생산 증대가 강조됐다. 평양 제사공장의 길확실이나 건축업의 리명원 같은 여성 노동자들이 노력영웅으로 칭송21 ‘인민소비품’ 생산공장이다. 기혼 여성의 직장 동원이 늘어나자 여성 노동자 수가 더욱 증가해, 1971년 말에는 전체 노동인구에서 여성이 차지하는 비율이 50퍼센트를 넘었다. 22
중공업 우선 정책 추진으로 생활필수품 생산이 위축되자, 북한 정권은 기혼 여성들을 동원해서 생활필수품 생산부문을 설치했다. 이것이 바로 ‘내부예비를 이용한’그러나 가사와 양육의 책임은 여전히 여성의 몫이었다. 애정과 헌신성으로 노동자들의 생활을 관리하는 “노동자의 어머니” 역할도 강조됐다. 특히 1967년을 기점으로 수령제 하에서 혁명 하는 남편을 보조하고 혁명의 후비대를 양성하고 생활경제를 책임지는 내조형 인간으로서 혁명적 어머니 역할이 강조됐다. 박영자는 이 시기를 양성평등 정책의 2단계 굴절기라고 표현하고 있다.
군사력 증강을 위해 중공업에 몰입한 결과, 중공업 노동자와 경공업 노동자 간의 불평등이 심해졌다. 중공업 공장은 노동력, 자재, 배급 등을 우선 공급받았고 노동자의 사회적 지위도 높았다. 반면, 경공업과 지방산업은 모든 부문에서 열등한 대우를 받았다. 그런데 북한의 중앙 중공업 공장 노동자는 그 다수가 청장년 남성이었고 경공업이나 지방산업 공장 노동자의 다수는 여성이었다. 생산부문에서의 불평등이 여성 노동자들에 대한 차별로 이어진 셈이었다.
1996년 영어로 발간된 북한 인구조사 보고서에 따르면, 북한에서 여성은 전체 노동인구의 절반 이상이었는데, 이것은 경공업 분야에서 여성의 비율이 높은 상황과 관련 있었다. 여성은 소매, 보육, 간호, 교육 등 서비스 직종에서 높은 고용 비율을 차지했다.
24 아예 “중공업 공장 주변에 방직 공장 같은 경공업 공장을 조직해서 중공업 기업소[에서 일하는 노동자]의 부양 가족들과 여성들이 경공업 공장의 생산로동에 참여”할 수 있게 하는 ‘공장 배합배치’를 실행하기도 했다. 25
북한 관료는 이런 노동의 성별 분리를 당연하게 여겼다. “여성은 아이를 낳고 키우며 가사를 책임져야” 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여성 고용이 큰 것 등은 북한의 사회 복지가 [남한보다] 우월했음을 나타내는 것으로 평가받고 있지만, 실제로 ‘여성의 직종’은 ‘남성의 직종’보다 보수가 적고 사회적 지위도 낮았다.27 박현선이 탈북자 165명을 설문조사하고 72명을 심층 면담해 추정한 남녀 임금 비율은 100:84였다. 28
이런 직종별 격차는 여성 노동자들과 남성 노동자들 사이의 임금격차로 이어졌다. 1980년 현재 남녀의 직종별 분리 탓에 여성의 평균 임금은 남성 평균 임금의 84퍼센트였다.29 탁아 시설은 북한의 대표적 사회 복지로 간주된다. 실제로 1960년에 탁아소 수는 1956년의 무려 340배였다. 탁아소는 주탁아소, 일탁아소, 월탁아소 등으로 분화되기까지 했다. 30 윤미량에 따르면, 동구권과 북유럽을 기준으로 하더라도 북한의 탁아소와 유치원 수용 규모는 밀리지 않았다. 탁아소 내 보육원도 상당히 많았다. 탁아소의 유아 10명당 보육원은 1명 정도의 수용 규모를 갖고 있었다. 탁아소에는 취사 담당, 의료 담당, 세탁 담당이 별도로 배치됐다. 31
북한 정권은 탁아소를 대대적으로 설치했다. 북한의 고도 성장 시기에 북한 주민들의 소득은 낮았고 다양한 양질의 소비재를 사용할 기회는 적었다. 하지만 이렇게 확대된 복시 서비스들을 무상으로도 이용할 수 있었다. 한반도 역사상 처음으로 인구 대다수가 의료서비스, 교육, 사회서비스에 근접할 수 있었다. 관련 유엔 통계와 북한의 공식 통계를 종합한 헤이즐 스미스에 따르면, 고도 성장 기간 동안 북한에는 광범한 의료 체계가 수립돼 있었다. 인구 1만 명당 의사 수가 1936∼1940년에는 0.5명이었는데 1986년에는 27명에 이르렀다. 주택의 품질은 좋지 않았지만 무상으로 공급됐다. 이렇게 가사노동이 남한보다 훨씬 높은 수준으로 사회화됐어도 가사와 육아의 일차적 책임은 여성의 차지였다. 1990년대 말 서울대학교 생활과학연구소가 탈북민들을 대상으로 한 ‘북한의 가정생활문화 실태조사’에 따르면, 북한 여성은 하루 평균 3시간 47분, 북한 남성은 1시간 26분을 가사노동에 사용했다. 1960년대를 경과하며 북한 기혼 여성들은 대체로 직장과 가정생활을 병행했다. 그 때문에 기혼 여성들은 일하기 좀더 쉬운 직장을 찾게 됐다. 기혼 여성들은 가사와 양육의 1차 책임자였으니, 혹시라도 승진을 하거나 간부가 되면 생활의 부담은 더 가중됐다. 가정 내에서 담당하는 여성의 역할은 실로 막중했다. 표2는 북한 문헌과 탈북자들의 증언 등을 토대로 재구성한 산업화 시기 북한 여성의 하루 일과이다.기상 | 06:00~06:10 | 주부는 05:00에 기상, 아침 식사 준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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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근 | 06:50~07:00 | 주부 출근 시 유아를 탁아소에 맡김 |
독보회 | 07:00~07:30 | 정기 강연회(07:00~09:00)가 있는 날(수, 금은 생략) |
작업 준비 | 07:30~08:00 | |
오전 작업 | 08:00~12:00 | 주부 유아 수유 30분 |
점심 | 12:00~13:00 | 주부 유아 수유 30분 |
오후 작업 | 13:00~19:00 | 주부 13:00~18:00 유아 수유 30분 |
학습회, 강습회 | 19:00~22:00 | 주부 18:00~19:00 |
귀가 | 22:00~23:00 | 주부 19:30~20:00 주부 퇴근 시 탁아소에서 유아 찾음 |
기상 | 05:00 | 5시면 포탄 껍데기로 만든 종을 치거나 사이렌이 울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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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 조회 | 05:00~05:30 | 지정된 장소에 작업반 또는 분조별 집합 작업반장 또는 분조장 지휘로 아침 조회(보통 15~30분) 내용은 당의 새 정책과 당면 과제, 업무 지시 |
새벽 작업 | 05:30~07:00 | 각종 작업 도구를 가지고 식사 전 작업 실시 남은 작업량은 다음 날로 미룸 |
아침 식사 | 07:00~08:00 | 귀가 후 아침 식사 |
오전 작업 | 08:00~12:00 | 오전 10시경 15분간 휴식/수유 시간 30분 아기 어머니들은 탁아소가 가까우면 가서 수유하고, 멀면 보모가 데고 와서 수유 후 돌려보냄 |
점심 | 12:00~13:00 | 작업장이 가까운 사람은 집에 가서 점심 식사를 하고, 먼 곳에서 온 사람은 도시락을 싸옴 아기 어머니들은 아기를 찾아 수유 독보회, 노래 연습, 주의 사항 듣기 등 진행 |
오후작업 | 13:00~19:00 | 휴식 15분/수유 시간 30분 아기 어머니들은 탁아소가 가까우면 가서 수유하고, 멀면 보모가 데리고 와서 수유 후 돌려보냄 |
작업총화 | 19:00~20:00 | 작업총화 후 귀가 귀가 후 여성들은 탁아소에 들러 아이를 데려옴 |
저녁 시간, 자유시간 | 20:00~22:00 | 저녁 식사와 자유시간 청소와 집안일, 식사 준비 등 |
학습회와 강연회 | 22:00~23:00 | 10시 이후 각종 회의와 강연회 등 회의는 수시 강연회, 수요 학습회, 학습에 관한 수시 시험, 목요 강연회 등 생활총화 중 농장 생활총화는 10일에 1회, 당 생활총화는 3일에 1회, 기타 사로청 생활총화 등 |
한마디로 고된 노동과 함께 육아와 가사를 책임졌고, 게다가 교육도 이수해야 하는 피곤한 삶이었다.
·부드러움·조용함·섬세함 등을 지녀야 한다.” 35 모든 여자아이는 남자아이처럼 학교를 다녔지만, 남자아이는 기초 기계학을, 여자아이는 가정학을 배웠다. 36
북한 교과서에 실린 공식 교육 내용도 성 역할론에 기초한 성별 위계성이 강한 내용으로 채워졌다. “여성은 남성의 거친 면을 다듬어 주고, 주변 환경을 정리하고, 강인함·전기·건축공학·기계제작 등이 대부분이었고 여성들이 많이 배우는 방식공학·염색가공 등을 가르치는 공장대학은 평양공업대학 단 한 곳뿐이었다.
여성이 전문가가 되는 통로는 좁았다. 공장대학 입학은 시험 없이 공장 당위원회의 추천으로 이루어졌는데, 여성의 입학률은 남성보다 훨씬 낮았다. 그도 그럴 것이, 공장대학의 교육과정 전체가 남성 노동분야에 편중돼 있었기 때문이다. 기계한마디로 여성은 일차적으로 어머니로서 중요하다는 여성차별적 관념이 사회 곳곳에 스며 있던 것이다. 공공 세탁소가 설치되고 식량을 집까지 배달해 주는 공공 배급 센터가 확산됐어도 가사와 양육의 1차적 책임이 여성에게 있다는 점은 북한 사회에서도 다르지 않았다. 수재들만 갈 수 있다는 평양 제1중학교에 보내는 것이 아이의 탄탄대로를 닦는 길이라는 인식이 팽배한 가운데, 기혼 여성은 자식을 일류 학교에 진학시킨 어머니의 강연과 교육을 수강해야 했다.
·북한 여성들의 사회적 지위를 비교한 것이다.
그래도 이 시기 북한 여성의 지위는 남한 여성보다 비교적 높았다. 표3은 국제기구들의 통계를 근거로 당시 남남한 | 북한 | |
여성경제활동참가율(%) | 40(1990) | 64(1990) |
여성경제활동인구(남성=100) | 51(1990) | 85(1988) |
의회여성비율(남성=100) | 1.0(1992)˙ | 20.1(1992) |
행정관리직(%) | 4.1(1992) | 3.7(1992) |
전문기술직(%) | 42.5(1992) | 24.6(1992) |
소득구성비(%) | 22.0(1992) | 38.7(1992) |
GEM 순위 | 90(1992) | 50(1992) |
HDI 순위(174개국중) | 31(1992) | 83(1992) |
·경제 분야의 여성 참여 정도를 나타내는데, 남한은 2010년을 전후로 60위로 올라섰다. 그래도 1992년 북한의 순위보다 낮다. 37 남·북한의 여성 지방의원 현황을 보더라도, 남한은 2014년 현재 시·도 의원의 14.3퍼센트, 시군구의회 의원의 25.3퍼센트가 여성이지만, 북한은 2015년 현재 지역인민회의 대의원의 27퍼센트가 여성이다. 38
여성권한척도GEM는 정치그러나 북한 경제가 침체의 늪에 빠지기 시작하면서 북한 여성의 삶은 또 한 번 변화하기 시작했다. 북한 정권이 가족 내에서 여성의 역할을 이전보다 무척 강조했기 때문이다.
북한 경제에 찾아온 위기와 북한 여성 삶의 변화
1970년대부터 북한 경제는 위기를 맞이했다. 제2차 7개년계획(1978∼1984년) 때 경제에 이상 징후들이 발견되기 시작했다. 1954∼1956년 연평균 성장률은 30퍼센트였고 1957∼1960년 연평균 성장률도 20퍼센트를 넘었다. 그러나 1960년대 후반 들어 성장률이 크게 둔화했고 1978∼1984년 경제성장률은 3∼4퍼센트로 뚝 떨어졌다. 소련 붕괴 이전에 이미 북한 경제는 성장 동력을 소진하고 있었다. “1970년대 초반에 이르자 북한은 자체의 기술이나 전쟁 전의 일본 기술이나 소련의 신기술에 기반한 광범한 산업 발전이 분명히 소진”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프랑스·영국·독일 등으로부터 기계와 플랜트를 대량으로 수입했다. 그러나 비철금속(특히 우라늄) 국제 가격의 폭락과 유가 인상으로 외채 상환의 어려움만 가중됐다. 그 결과 1980년대 북한의 경제는 더욱 악화되기 시작했다.
북한은 1970년대부터 설비와 신기술 도입을 위해 해외로 눈을 돌리기 시작했다. 1972년부터 일본북한 사회에서 여성의 경제 활동 참여를 독려하는 분위기는 사라지기 시작했다. 이 때부터 북한 정권은 가족과 어머니의 역할을 더욱 강조했다. 법적으로 보장된 각종 권리들과 현실 사이의 격차는 더욱 커졌다. 탈북자들의 증언에 따르면, 산전산후 77일의 휴가는 반납되는 경우가 부지기수였다. “산모들은 하루라도 휴가를 먼저 받으려고 하지만 병원 측에서는 될수록 안 주려고 승강이를 해서 결국 산전휴가는 15일밖에 받지 못했다.”
41 자본주의 나라 어디에서나 그렇듯 서구와 동구 사회 모두에서 여성은 한결같이 미숙련 작업에는 적합하고 주요 작업에는 그다지 적합하지 않는다는 통념이 존재한다. 소련에서 여성은 전체 노동인구의 절반 이상을 차지했는데도 감독직에서는 7분의 1뿐이었다. 예컨대 교사의 70퍼센트가 여성인데도 여성 교장은 25퍼센트뿐이었다. 42
사실 법으로 보장된 여성의 권리와 현실 사이의 격차는 단지 북한에서만 나타난 일은 아니다. 소련에도 보호법은 있었지만 그것을 감시하고 보장하는 장치는 없었다. 야간노동은 금지돼 있지만 힘겨운 육체 노동과 계획 완수를 위한 자발적인 일요 노동이 강요됐다.43 북한 연구자 김병로는 “북한 정권은 그렇게 함으로써 복지에 대한 책임의 일부를 국가에서 가족으로 돌리려는 의도를 가졌던 것으로 보인다”고 지적했다. 44
자본주의에서 지배계급은 경제 위기 상황에서 가족의 역할과 어머니의 역할을 강조함으로써 노동력 생산과 재생산 비용을 개별 가정으로 더 노골적으로 떠넘긴다. 북한에서도 마찬가지였다. 1974년부터는 김정일의 생모인 ‘김정숙 여사 따라 배우기 운동’이 시작됐고, ‘혁명도 생활도 어머니처럼’이라는 구호가 등장했다. 김일성의 어머니인 강반석과 김정일의 생모인 김정숙은 어머니와 여성의 전형이 됐다. 어머니의 좋은 양육과 아내의 현명한 내조는 자녀와 남편의 성공 이유로 강조됐다. 강반석과 김정숙을 여성의 모범으로 삼은 것은 여성들에게 어머니와 아내로서 역할을 강요해 가족을 안정화시키기 위한 것이었다.급기야 북한 경제가 붕괴되다시피 한 1990년대부터 북한의 여성은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면서 생존의 기로에 놓이게 됐다.
45 북한은 가부장 모습을 한 사회주의 사회인가? 북한 여성들의 해방과 더 나아가 한반도에서의 여성해방은 어떻게 가능할까? 과연 북한 여성들은 자국 지배자들이 저지르는 착취와 차별, 미국 제국주의에 저항할 주체로 설 수 있을 것인가? 이 글의 2부에서는 이런 물음들에 대해 답변할 것이다.
고난의 행군 이후 북한 여성의 삶은 어떻게 변화해 갔는가? 일부 논자들의 주장들처럼 1990년대 이후 ‘장마당’은 여성의 삶과 지위를 개선시켰나? 시장은 혼돈 속의 질서 속에서도 북한 여성의 삶에 위안을 제공했을까?주
- Trosky 1985, p42. ↩
- Trosky 1984, p65. ↩
- [결]결혼할 것입니까?/[남]남자친구 있습니까?(결혼할 수도 있겠네요?)/[출]출산도 생각하고 계신가요?(야근을 제대로 시킬 수 있을까요?). ↩
- 김석향 2006. ↩
- 가부장제는 말하는 사람마다 각양각색의 뜻으로 사용되고, 심지어 그저 여성 차별의 동의어로 사용되기도 한다. 하지만 대개 가부장제는 자본주의와는 구분되는 여성 차별 구조로서 “여성에 대한 남성 지배”를 뜻한다. ↩
- 페퍼 2005, pp105-107. ↩
- 페퍼 2005, p106. ↩
- 박영자 2017, p200. ↩
- 모리요·말로비크 2018, p85. 저자인 쥘리에트 모리요는 한반도 문제 전문가로서 북한 사료와 북한 취재 자료를 기반으로 글을 쓴다. ↩
- 당시 북한의 토지개혁은 아래로부터 소작농의 투쟁과 운동을 통하지 않았다. 토지개혁으로 소작농들은 형식적으로는 토지 소유하게 됐지만 계약, 매매, 임대차, 저당, 상속은 인정되지 않았다.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는 수확량의 4분의 1을 현물세로 거뒀다. 초과 징수도 많았다. 소작농들은 단지 징수 주체만 달라졌을 뿐이라고 느꼈다. 소작농들로서는 양곡을 싼 값에 팔고, 생활필수품과 비료를 비싸게 사는 강제수매가 시행됐다. 그 결과, 북한의 소작농들은 토지개혁(미쓰히코 2001, p50)에 소극적이었다. 이런 상황은 1945∼1950년 북한 내부 사정을 보여 주는, 미국 국립공문서관에 보관돼 있던 북한 내부 자료에도 다음과 같이 묘사돼 있다. “토지개혁에 대한 소작인의 환희의 태도, 표정이 너무나 희박하다.”(미쓰히코 2001, p51). 북한 소작농들의 의식이 낮기 때문이라는 등 김일성 선집에 등장하는 말들은 진실과는 거리가 멀다. 토지개혁이 이뤄졌어도 소련군의 징발, 현물세, 관개사용료를 포함한 각종 수수료 등으로 농민들은 새로운 부담에 시달렸다. 하기와라가 발견한 소련군 쌀 징발 자료에 따르면, 1945년 가을부터 1946년까지 강원도에서 수매로 모은 쌀 1만 7580톤이 모두 소련군에게 넘겨졌다. 여러 사정을 고려하면 1946년 북한 전체의 국가곡물징수율은 35~40퍼센트 이상이었다(미쓰히코 2001, p83). 북한 국가자본주의의 성립 과정에 관해서는 김하영 2002를 참고하라. ↩
- 김성보 2016, p227. ↩
- 박영자 2017, p217. ↩
- 김일성, 《김일성 저작집 2권》, 조선로동당출판사, 2017, pp273~279. 박영자 2017, pp209~210에서 재인용. ↩
- 김일성, ‘자녀교양에서 어머니들의 임무’, 《김일성 저작집 15》, 조선로동당출판사. 1981, pp348-349. 박영자 2017, pp108에서 재인용. ↩
- 박영자 2017, p108. ↩
- 《조선녀성》, 1947년 5월호 p46. 박영자 2017, pp231에서 재인용. ↩
- 아브트 2014, p195. ↩
- 박영자 2017, p265. ↩
- 1946년 8월 임시인민위원회 결정 57호로 채택된 ‘공민증에 관한 결정서’는 호적을 대신해 공민증으로 신원을 확인하게 했다. 만 18세 이상의 모든 여성이 남성과 동등하게 공민증을 교부받았다. ↩
- 길확실에 관해서는 이세영(2016)을 참고하라. ↩
- 내부예비란 중화학공업에서 다 쓰지 않는 자재와 원료 또는 관련 공장에서 쓰고 남은 폐품을 경공업 관련 공장에서 소비재 생산의 재료로 활용한다는 뜻이다. ↩
- 이태영 1988, p190. 윤미량 2006, p76. ↩
- 박영자 2017, p308. 이 시기는 냉전 등 국제 정세도 관련이 있다. 1960년대 중소분쟁 과정을 지켜보면서 북한은 독자적 군사력 구축에 박차를 가했다. 1967년 갑산파 숙청과 1968년 푸에블로호 사건을 계기로 조성된 전쟁 위기는 북한 정권이 군사력 증강에 더욱 몰입하는 계기가 됐다. ↩
- 박영자 2017, p357. ↩
- 박영자 2017, p358. ↩
- 스미스 2017, p205. 헤이즐 스미스는 심영희, 한상진 등 국내 연구자들의 자료에 근거하고 있지만 북한에서 활동하는 국제기구들과 북한 내부 통계도 반영하고 있다. ↩
- 김애실 1997. ↩
- 박현선 2003, p199. ↩
- 물론 생후 수개월부터의 유아가 갈 수 있었던 탁아소는 주체사상을 교육받는 공간이기도 했다. ↩
- 주탁아소는 직장에 다니는 부모가 월요일부터 토요일까지 아이를 위탁했다가 주말에 집에 데려가는 것으로 1961년부터 설치되기 시작해 각 도·시·군에 2∼3개 설치됐다. 월탁아소는 아예 한 달간 아이를 탁아소에 맡기는 것으로 1965년부터 평양·개성·청진 등 주요 도시에 2∼3개 설치됐다(박영자 2006, p79). ↩
- 윤미량 2006, p100. ↩
- 스미스 2017, p177. ↩
- 박영자 2017, p459. ↩
- 박영자 2017, pp402-403. ↩
- 남녀 간 예절을 다루는 고등중학교 3학년 24단원(민무숙 외 2001, p223). ↩
- 스미스 2017, p206. ↩
- 이배용 1997, p144. ↩
- 홍승하 외 2016, p167. ↩
- 커밍스 2001, p613. ↩
- 박영자 2017, p402. ↩
- 로젠버그 1989, pp16-17. ↩
- 로젠버그 1989, p19. ↩
- 박현선 2003, p140. ↩
- 김병로 2016, pp216-217. ↩
- “시장이 개성의 기초이자 전제조건이고, ‘자립’과 ‘자유’를 가치로 규정”(박영자 2010, p342)한다는 전제 하에, 장마당이 북한 여성에게 자유와 자립의 공간을 어느 정도 제공했다는 분석은 문재인 친화적 인사들을 포함해 북한 연구자들에게서 적지 않게 발견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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