쟁점:현재의 이슈들
세속주의, 무슬림 혐오, 마르크스주의와 종교 *
마치 캄캄한 어둠 속에 묻혀 있던 풍경이 번쩍이는 번개 한번으로 낱낱이 드러나 보이는 것 같은 순간이 있다. 2014년 8월 9일 미국 미주리 주 퍼거슨 시에서 흑인 청년 마이클 브라운이 경찰에게 총을 맞아 사망했을 때나, 프랑스 해변에서 무장 경찰이 무슬림 여성에게 부르키니를 벗으라고 요구하는 사진이 찍혔을 때가 그런 순간이었다. 이 두 순간은 단지 지난해만이 아니라 지난 20년 간 프랑스 국가와 정치인이 무슬림을 향해 퍼부은 공세를 압축적으로 보여 줬다.
물론 이런 공세는 프랑스에서만 아니라 미국에서 시작돼 영국과 아일랜드 등 많은 지역에서 위세를 떨치고 있는 국제적 현상이다. 그렇지만 지금은 이런 현상이 특히 프랑스에서 극심하게 일어나고 있다. ‘세속주의’나 ‘프랑스 공화국’이라는 이데올로기적 미명 하에 자행되면서 상당히 급진적이고 정당한 것으로 위장해 ‘좌파’에게 세계의 다른 어느 곳에서보다 더 크게 지지와 묵인을 받고 있다는 점에서 독특하다. 그 이유는 [프랑스에서] 세속주의가 오랫동안 혁명적 사회주의자를 포함한 좌파가 방어하고 옹호해야 할 ‘가치’나 ‘원칙’으로 여겨진 데 있다. 이 글에서는 세속주의, 무슬림 혐오, 인종차별주의, 종교의 정치학 간의 관계에 대해 검토해 볼 것이다.
마침 아일랜드와 아일랜드 역사가 흥미롭고 유용한 시작점이 될 것 같아 그렇게 시작하려 한다.
아일랜드의 사례로 보면
1 폐지와 낙태권을 요구하는 운동에는 다음과 같은 슬로건이 있었다. “교회도, 국가도 아니고 여성이 자신의 운명을 결정해야 한다!”, “교회가 내 자궁을 속박하지 말라!” 막달레나 세탁소 2 , 산업 학교, 잔인한 기독교 형제단 3 에 대한 끔찍한 기억이 여전히 많은 사람들의 기억에 남아 있다. 그리고 교회의 성직자들은 아직까지도 아일랜드의 학교에 과도한 권력을 행사하고 있다.
20세기에 아일랜드 사회에서는 가톨릭 교회가 두드러지게 지배적인 위치를 점하고 있었기 때문에 세속주의 쟁점이 오늘날에도 유효하고 중요하다. 수정헌법 8조이런 문제에서 사회주의자라면 누구나 세속주의 원칙을 전적으로 지지해야 한다. 교회와 국가는 완전히 분리돼야 한다. 사회주의자는 종교의 자유와 종교적 숭배의 자유를 전적으로 지지하는데, 그 이유는 그것이 개인이 선택할 문제기 때문이다. 어떤 종교도 국가로부터 특혜를 받거나 자금을 지원받아서는 안 된다. 마찬가지로 사회주의자 중에는 비종교인이 (전부는 아니겠지만) 상당수고, 카를 마르크스가 말했듯 사람들이 더는 ‘민중의 아편’에 의지하지 않아도 되는 세상이 오기를 고대한다. 그럼에도 종교를 금지하기를 바라지 않는다.
1916년 아일랜드 혁명으로 다시 초점을 돌려 보자. 우리는 다음과 같은 주장에 어떻게 대응해야 할까?
“1916년 봉기는 가톨릭교도, 특히 광신도로 유명한 패트릭 피어스가 이끌었다. [봉기] 자원자 중 가톨릭교도가 단연코 많았고 심지어 아일랜드 시민군의 지도자이자 사회주의자인 제임스 코널리도 가톨릭 부류였다. 게다가 봉기 계획을 담은 선언서에는 ‘신의 이름으로’ 이 선언서가 쓰였고 ‘우리에게 은총을 내려 주시는 지극히 높으신 하느님의 보호 아래 아일랜드 공화국의 대의가 있다’ 하고 적혀 있다. 그러므로 이 봉기는 가톨릭의 한 분파가 주도해 권위주의적인 전통적 가톨릭 국가를 세우려는 의도가 있었다는 사실이 명백하다. 사회주의자라면 이렇게 중세 시대의 종교에서 한 발짝도 벗어나지 못한 무지몽매하고 퇴보적인 운동을 지지해서는 안 된다. 객관적으로 보면 진짜 진보를 상징하는 것은 바로 영국 군대다. 그들이 때로는 거칠었을지 몰라도 자유, 계몽, 그리고 특히 여성 인권을 중요하게 여겼으므로 지지받아야 했다.”
열렬한 무신론자였던 마르크스, 엥겔스, 레닌, 트로츠키를 비롯한 모든 사회주의자가 이런 주장에 뭐라고 대답했을지는 명백하다. 제국주의를 정당화하기 위해 세속주의 원칙을 마음대로 갖다 붙인 주장이라고 했을 것이다. 1916년 봉기는 민족 해방을 위한 투쟁으로 지도자의 종교나 선언문의 단어 선택에서 나타나는 것과 달리 근본에서는 종교와 전혀 관련이 없었다. 가톨릭이냐 개신교이냐가 아니라 영국이 아일랜드를 지배하느냐 마느냐 하는 문제가 중요했다. 따라서 모든 사회주의자(와 모든 민주주의 옹호자와 진보적인 사람들)이 제국주의에 반대하고 억압받는 민족의 자주적 결정권을 옹호하기 위해 아일랜드의 독립과 봉기를 무조건 지지했어야 한다.
이런 관점에서 아일랜드인이나 영국인의 다수가 가톨릭이냐, 개신교냐, 힌두교도냐, 유대인이냐는 완전히 부차적인 문제고 투쟁에서 결정적 요소가 아니다. 독립 아일랜드가 이후에 반동적 정책을 펴고 여성을 억압하는 문제가 있었던 것은 패트릭 피어스 등 [선언서] 서명인이 가졌던 종교적 성향 때문이 아니라 독립 투쟁의 과정에서 나타나 권력을 차지한 사회 세력의 탓이다. 만약 노동계급과 그 지도자인 코널리, 마르키에비츠, 린 같은 사람이 권력을 잡았다면 아일랜드는 혁명 러시아와 함께 성 평등과 여성 해방의 선봉에 섰을 것이다.
시계를 돌려 오늘날로 오면 영국의 미디어에서는 북아일랜드 분쟁에 대한 위와 같은 주장이 다시 맹렬한 기세로 등장하고 있다. 대부분 개신교도인 아일랜드 통일주의자와 대부분 가톨릭교도인 민족주의자 간의 갈등은 주로 종교 때문인 것으로 묘사되고, 종교를 두고 갈등이 벌어진다는 점이 아일랜드의 어리석음과 후진성을 드러낸다고 여겨진다. 어쨌든 ‘문명화된’ 영국인은 이미 18세기에 종교를 두고 싸우길 멈추지 않았는가? 게다가 영국은 이 분쟁에 있어 제3자로서 싸우는 두 비이성적인 종족을 중재하는 한편 사악한 테러리스트(아일랜드 공화국군)를 고립시키고 물리치려 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4 교리나 교황의 무오류성과는 전혀 관계가 없고 북아일랜드가 영국에 지배받을지 아일랜드 공화국에 속할지를 결정하는 문제라는 명백한 사실이 교묘하게 은폐된다. 그리고 민족주의 공동체에 대한 사회적·경제적·정치적 차별로 이것을 더욱 부채질한다. 이런 은폐는 갈등의 진정한 성격을 흐릴 뿐 아니라 실제로는 종파적 국가와 영국의 지배를 유지하는 구실을 하는 영국군을 정당화한다.
‘세속주의’라는 용어가 많이 쓰이지는 않지만, 종교에 대한 널리 퍼진 적대감과 특히 (영국에서의) 종교적 광신 때문에 이 갈등이 성변화聖變化그러나 오늘날에 억압과 영국 지배의 문제가 사라지지 않았음에도 전쟁이 끝났고 신페인당이 민주통일당과 정권을 잡았기 때문에 결혼 평등권, 성소수자 권리, 여성의 낙태권 등 세속주의와 관련된 문제가 더 주목받고 있다.
이런 사례를 통해 사회주의자가 세속주의를 지지해야 하지만 세속주의의 기치는 진보에서 반동까지 여러 목표에 이용될 수 있다는 점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세속주의 슬로건의 구실을 따질 때는 언제나 구체적 상황을 고려해 구체적으로 평가해야 한다. 세속주의는 어떤 역사적 상황에서 노동계급의 이익과 억압에 맞선 투쟁에 어떻게 연관될까?
전체적 시야에서 본 프랑스 세속주의
5 1565~1600년 네덜란드 독립전쟁 시기에 반反종교개혁 기치를 건 스페인을 중심으로 한 합스부르크 제국에 맞서 네덜란드인을 결속하기 위해서 네덜란드에 종교적 관용의 원칙이 세워졌을 때도 세속주의의 요소가 나타났다. 18세기 계몽주의 시대의 철학자들(디드로, 볼테르 등)에 의해 세속주의는 더 발전했고 1789~1794년 프랑스 혁명에서 진가를 발휘했다.
세속주의의 역사는 길고 복잡하다. 유럽에서 세속주의의 기원은 16~17세기에 코페르니쿠스와 갈릴레오가 교회에 도전하고 “교회의 정신적 독재가 산산조각”난 과학혁명 초기로 거슬러 올라간다.1789년 8월 바스티유 습격 직후에 혁명을 통해 제1신분(성직자)과 제2신분(귀족)의 특권과 교회가 거둬들이던 십일조가 폐지됐다. 1789년의 프랑스 인권선언에서는 프랑스에서 종교의 자유를 보장한다고 밝혔다. 10월 10일 제헌국민의회는 가톨릭 교회의 재산과 토지를 몰수해 공개 경매에 부쳤다. 1790년에는 국민의회가 가톨릭 교회를 정부에 공식적으로 종속시켰고 1792년 9월에는 이혼이 합법화됐으며 더는 교회가 아닌 국가가 출생·사망·혼인 신고를 담당하게 됐다. 1791년에 유대인이 해방돼 개인으로서의 완전한 시민권을 보장받게 됐다.(비록 집단적 권리는 인정받지 못했지만 말이다.) 혁명이 절정에 달한 자코뱅의 집권기(1792~1794년)에 비기독교화 운동이 활발히 벌어져 성상과 우상이 파괴됐고 ‘이성 숭배’의 형식을 띤 대안 종교 같은 것이 등장하기도 했다. 또 봉기가 일어나 성직자들이 대량 학살되기도 했다.
미국 독립혁명에서도 토머스 제퍼슨이 미국 헌법에 ‘의회는 종교의 설립에 관계되거나 자유로운 종교 활동을 금지하는 어떤 법도 제정해서는 안 된다’고 정함으로써 세속주의의 특징을 드러냈다는 것에 주목해야 한다. 그래서 미국은 현재까지도 국교가 없다.
프랑스 혁명과 나폴레옹의 권력 장악 이후 미국의 향방과 반대로 프랑스에서는 제국이 부활하면서 교회도 부활했다. 그러나 19세기 내내 세속주의는 공화국의 이상으로 여겨져 지속됐고 노동계급과 사회주의 혁명을 원하는 사람들도 세속주의를 이상으로 여겼다. 1871년 파리 코뮌은 정교 분리, 교회 재산 국유화, 학교의 종교적 관례 폐지를 최초의 법령 중 하나로 채택했다. 이론적으로는 교회가 저녁에는 정치적 모임을 열 수 있도록 공공에 개방해야만 종교 활동을 계속할 수 있었지만, 실제로 잘 이뤄진 것 같지는 않다.
결국 코뮌은 74일 만에 진압됐지만 1881~1882년에 프랑스에서는 가톨릭 성직자가 아니라 국가가 고용한 전문 교사가 가르치는 세속적 무료 교육 체계가 확립됐다. 그리고 1905년에는 국가와 교회를 분리하는 새로운 법이 통과돼 오늘날까지도 프랑스 법 체계의 기본이 되고 있다(라이시테).
이렇게 간단히 살펴보기만 해도 세속주의를 향한 투쟁(과학혁명, 네덜란드 공화국, 계몽주의, 프랑스 혁명과 미국 독립혁명 등)이 부르주아의 등장과 봉건제에 맞선 부르주아의 민주주의 혁명에서 필수적이었음을 분명히 알 수 있다. 이 투쟁의 가장 중요한 적은 봉건 귀족, 절대군주, 봉건 반동 모두의 주요한 경제적·정치적·이데올로기적 동맹인 가톨릭 교회였다. 메디치가의 시대부터 시작해 1789년 프랑스 혁명과 1848년 독일 혁명을 거쳐 스페인 내전에 이르기까지 가톨릭 교회의 반동적이고 반혁명적인 구실 때문에 유럽의 노동운동도 교회에 등을 돌렸다. 이 점에서 세속주의는 그것이 특징이 된 부르주아의 민주주의 혁명처럼 철저히 진보적이었다.
그러나 이것으로 끝이 아니다. 봉건제에 맞선 부르주아 혁명은 진보적이었지만 부르주아는 정치적 권력을 장악한 순간부터 식민지 점령과 세계 정복을 시작했다. 그래서 네덜란드는 아마도 세계 최초였을 민족 독립 전쟁을 통해 합스부르크 제국으로부터 독립을 쟁취하고 당시 유럽에서 가장 진보적인 사회가 됐지만 10년도 안 돼서 아주 잔혹한 방식으로 극동의 바타비아(오늘날의 인도네시아)에서 아메리카의 뉴암스테르담(오늘날의 뉴욕)과 페르남부쿠(오늘날의 브라질)에 이르는 식민 제국을 건설했다. 마찬가지로 영국에서는 부르주아 혁명가 올리버 크롬웰이 1649년 1월 찰스 1세의 목을 치고서는 같은 해 8월에 훗날 전설로 남게 된 아일랜드 정복을 시작했다. 이어 부르주아가 권력을 잡은 영국은 태양이 지지 않고 피가 마르지 않는 세계 제국 건설로 나아갔다.
6 알제리에서 정복 전쟁을 벌였고 그 과정에서 1870년까지 알제리 인구가 3분의 1 감소했다. 이것이 아프리카에서는 머그레브와 모로코에서 세네갈, 말리, 콩고, 마다가스카르까지, 인도차이나에서는 베트남, 라오스, 캄보디아, 태평양에서는 뉴칼레도니아, 그리고 캐리비안까지 걸친 영국에 버금가는 프랑스 대제국 건설의 시작이었다. 이 제국은 제2차세계대전 이후까지 건재했지만 1954년 베트남인들의 저항으로 베트남에서 쫓겨나고 1954~1962년에는 참혹한 알제리 전쟁에서 패배하면서 마침내 막을 내렸다.
1793년 프랑스에서 혁명을 지키기 위한 전쟁이 벌어졌지만 나폴레옹이 정복 전쟁에 나서면서 패배했고, 그 억압성과 흉포함이 고야의 〈전쟁의 참상〉에 충격적으로 기록됐다. 나폴레옹은 이집트와 시리아를 침략하고 아이티에서 노예제를 부활시키려 했다. 1830년에 프랑스는 “문화를 나누”고자영국 제국주의가 ‘백인의 의무’으로 묘사되듯이 프랑스의 식민지 프로젝트도 후진적이고 미개한 민족에게 문명을 선사하는 ‘문명화의 임무’라는 명목을 내세웠다. 이런 맥락에서 세속주의의 의미가 억압에 맞선 진보적 가치에서 민족의 자부심과 우월성의 표지로 완전히 바뀌었다. 그리고 그에 따른 식민주의와 억압을 정당화하는 데 세속주의가 이용됐다.
7 그 결과 당연히도 프랑스로 온 이주자 중 상당수가 무슬림이었다. 8 그리고 이런 상황에서 ‘세속주의’는 인종차별주의자와 인종차별적 기구가 반이민·반무슬림 정서를 결집하는 데 이용한 슬로건이 됐다.
프랑스에서는 ‘영광의 30년’이라고 부르는 제2차세계대전 이후의 경제 호황기에 노동력 부족을 해결하고자 북아프리카에서 노동자가 대규모로 유입됐다. 같은 시기 영국에서도 비슷한 일이 벌어졌다. 두 나라 모두 이주 노동자를 과거의 식민지에서 끌어들였다.이 자체로는 프랑스가 특별할 것은 없다. 영국의 극우파도 할랄 고기나 모스크 건설 등을 인종차별의 구실로 삼으려 거듭 노력했다. 곳곳에서 인종차별주의자들은 이민자가 전에는 어떤 사람이었건 “우리의 가치관에 순응”해야 한다는 생각을 조장해 왔다. 그러나 프랑스 역사의 특수성으로 인해 ‘세속주의’ 개념이 이런 목적에 더 잘 맞아떨어졌다. 세속주의는 과거에 진보적 전통이었기 때문에 프랑스의 자유주의자와 일부 좌파(불행히도 극좌파 일부도 포함됐다)도 이런 생각을 받아들였다. 영국에서는 좌파가 결코 ‘영국적 가치’를 받아들이지 않았던 것과 비교하면 차이가 있다.
9 이런 의류의 착용을 금지하는 운동에 함께했고 1990년대에는 이 문제로 일부 교사들이 실제로 파업에 나섰다. 내가 알기로 이런 일이 다른 나라에서는 벌어지지 않았다.
따라서 1980년대 후반에 학생들이 히잡이나 스카프를 쓰는 것이 쟁점이 됐을 때 좌파 교사들마저세속주의가 ‘진보적’이라는 믿음은 페미니즘이 섞이면서 더욱 강화됐다. 히잡을 비롯한 이슬람교 베일(니캅, 차도르, 부르카 등)은 가부장적 가족과 그들의 후진적이고 여성혐오적인 종교가 강요하는 여성 차별의 상징이라는 주장이 제기됐다. 그래서 여성 해방을 위해 공공기관에서 히잡 등의 착용을 금지할 것을 요구하는 운동이 벌어졌다.
이런 주장이 프랑스에서만 나타나는 것은 아니지만 프랑스에서 특히 강력한데, 여기에는 몇몇 요인이 있다. 첫째로 이런 주장은 히잡에 대한 일차원적 고정 관념에 기반한다. 이 문제에 대한 무슬림 여성들의 생각은 다르다. 역사적으로 여성에게 베일을 씌우는 것이 여성 차별과 관계가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이것이 무슬림 정체성과도 관련이 있다.(1960년대에 ‘아프로’ 헤어스타일이 흑인 정체성과 관련됐던 것처럼 말이다.) 따라서 무슬림 여성들은 자발적으로 베일을 착용하고 이것을 인종차별과 배제에 맞선 저항과 자기 정체성에 대한 자부심의 표현으로 여긴다. 둘째로 이런 주장은 위로부터의 해방 개념에 기반한다. 즉, 무슬림 여성의 해방이 위로부터 주어질 뿐이지 무슬림 여성 스스로 쟁취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셋째로 이런 주장은 누구나 자신이 입고 싶은 것을 입고 종교적 표현을 할 자유가 있다는 아주 기본적인 민주주의 원칙에 위배된다. 넷째로 이런 주장은 진보적 페미니즘과 성장하고 있는 인종차별적 파시스트 우파 세력이 같은 대의를 갖게 만든다. 다섯째로 이런 주장은 미국 국가나 다른 지배자들(힐러리 클린턴 같은 부류)이 제국주의적 개입과 전쟁을 정당화하기 위해 사용하는 페미니즘적 책략을 더욱 강화한다. “우리는 아프가니스탄 여성을 탈레반에게서 해방시키기 위해 아프가니스탄을 침공해야 한다!” 같은 주장 말이다.
불행히도 마지막으로 언급한 점의 엄청난 모순과 위선에도 불구하고(미국의 침략은 단 한번도 여성이든 남성이든 해방시킨 적이 없었고 오로지 경제적·전략적 이익을 추구하기 위한 목적만이 있었다) 실제로 이 책략은 효과가 있다. 그리고 그 효과는 아주 치명적이다. 이런 주장이 세속주의와 페미니즘의 급진적 정서에 호소하기 때문에 프랑스에서 인종차별과 파시즘의 득세에 맞서 가장 선두에서 싸워야 할 진보·좌파·사회주의자가 혼란을 겪고 결집하지 못해서 인종차별과 파시즘이 비교적 쉽게 성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프랑스에만 특수한 것도 아니고 프랑스에서 유래한 것도 아닌 현상, 즉 무슬림 혐오의 세계적 득세 현상과 동시에 일어났기 때문에 정점에 달했다.
무슬림 혐오의 성장
10 그래서 알렉스 캘리니코스가 언급했듯 더 넓게 보면 “인종차별은 역사에서 최근 현상”이다. 11 그러나 인간의 사회적 의식이 발달한 역사 속에서 500년은 긴 시간이다. 그에 비해 무슬림 혐오는 정말 최근에 등장했다. 1980년 판 《간략한 옥스포드 사전》에는 ‘무슬림 혐오’라는 단어가 없었다. 12 1990년의 표준 사회학 교과서 중 하나인 E 캐쉬모어와 B 트로이나의 《인종관계개론》에서는 무슬림 혐오에 대해 다루지 않았고 색인에도 그런 단어를 찾을 수 없다. 알렉스 캘리니코스가 1993년에 쓴 《인종과 계급》에서도 마찬가지다. 물론 지금 무슬림 혐오를 겪는 사람들은 오랫동안 인종차별을 겪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전에는 그들의 피부색, 국적, 민족성이 문제가 됐지 이슬람교나 무슬림으로서의 정체성은 크게 중요하지 않았다. 그들은 ‘아랍인’, ‘파키스탄인’, ‘아시아인’, ‘유색인’, ‘흑인’ 등으로 불렸지 무슬림이라고 불리는 경우는 없었다.
유럽의 백인은 거의 500년간, 즉 세계를 정복하고 노예화하기 시작한 이후로 지금까지 비유럽인과 유색인을 적대감과 경멸이 섞인 눈으로 바라봤다.그렇다면 언제, 어떻게, 왜 무슬림 혐오가 등장했는가?(이 질문들은 서로 관련돼 있다) 널리 퍼진 생각은 무슬림 혐오가 9·11 테러와 뒤이은 부시의 ‘테러와의 전쟁’으로 등장했다는 것이다. 분명히 9·11 테러는 중요한 전환점이었고 무슬림 혐오가 심화되는 계기가 됐다. 그러나 이것이 근원은 아니다. 새뮤얼 P 헌팅턴의 책 《문명의 충돌과 세계 질서의 재정립》은 무슬림 혐오에 대한 중요한 지적 기반을 세운 책이다. 이것은 그가 1992년에 강의한 내용을 1993년에 출판한 책이다. 1993년의 글에서 그는 다음과 같이 적는다.
미래에 가장 중요한 갈등은 문명을 구분하는 문화적 구분선을 따라 벌어질 것이다. 왜 그런가? 첫째로 문명 간의 차이는 단지 사실일 뿐 아니라 근본적이다. 각 문명은 역사·언어·문화·전통 그리고 가장 중요하게는 종교로 서로 구별된다. 이런 차이는 수 세기에 걸쳐 형성됐고 금세 사라지지는 않을 것이다. 이것은 정치적 이데올로기나 정치적 제도의 차이보다 훨씬 본질적이다.
14 그는 하버드 국제문제센터의 소장이고 지미 카터 정부에서 백악관 안보 보좌관이었다. 따라서 그의 ‘이론’은 시작부터 미국 지배계급의 필요를 충족시키기 위해 만들어졌을 것이다. 그리고 그의 이론이 지배계급과 백악관의 대표자들, 미국 국방부와 미디어에서 유용하다고 여겨졌기 때문에 채택되고 전파될 수 있었을 것이다.
이 글은 언제, 어떻게 무슬림 혐오가 가속되기 시작했는지 보여 준다. 바로 1990년대 중반부터다. 나는 헌팅턴의 글이나 책이 무슬림 혐오의 시작점이라든가 그것에 책임이 있다고 주장하려는 것이 아니다. 헌팅턴은 타리크 알리의 말을 빌면 “국가 지식인”이다.이 이론은 9·11 이후에 특히 주목받았고 점점 더 빠르고 강력하게 전파됐다. 미국 부르주아가 이 문제에 있어서 세계적 헤게모니를 쥐고 있었고 영국과 프랑스 등 유럽 제국주의 국가들의 물질적 이해관계에도 부합했기 때문에 이슬람교와 무슬림이 우리 삶의 방식을 위협한다는 관념이 주요 정치 인사의 입에서 나왔을 뿐 아니라 전 세계의 수없이 많은 신문과 텔레비전 뉴스에서 최소한 빈정거림이나 암시로라도 헤드라인으로 다뤄졌다. 몇 년 안 돼 무슬림 혐오는 ‘상식’이 됐다.
‘언제’와 ‘어떻게’를 알았으니 이제 ‘왜’를 물을 차례다. 1979년에 이란 혁명이 벌어지고 그 결과 이슬람교가 강화된 것과 1989~1991년에 공산주의가 붕괴하고 냉전이 종식된 것이 두 중요한 배경이다. 이란 혁명은 중동에서 미국의 중요한 동맹이자 주요 석유 매장량을 보유하고 있던 이란의 왕과 그 왕정을 타도했다. 혁명으로 등장한 아야톨라 호메이니의 이슬람 정권은 중동 지역에서 이슬람 운동을 크게 자극했다. 이전까지 중동 지역에서 우세했고 제국주의에 도전하는 데 도움이 됐던 민족주의와 공산주의(스탈린주의)가 완전히 실패하면서 중동에서 이슬람교와 이슬람 정치의 영향력은 더욱 강해졌다. 냉전기에 서구는 사악한 공산주의자에 맞선 싸워야 했기 때문에 이슬람교도를 잠재적 또는 실질적 동맹이라고 너그럽게 여겼다. 그래서 미국이 소련의 아프가니스탄 점령에 맞서 싸운 탈레반의 전신을 지원했던 것이다. 그러나 냉전이 끝나고 공산주의의 위협이 사라지면서 미국 제국주의는 이슬람 지역, 특히 석유가 풍부한 중동이 미국의 이익을 중대하게 위협한다고 여겼다.
무슬림 혐오가 9·11 테러에 대한 반응으로 등장했다고 보는 견해가 흔하기 때문에 9·11 테러 전에도 무슬림 혐오 경향이 있었다는 사실을 아는 것이 중요하다. 사실 미국 제국주의가 중동에서 벌인 횡포와 더불어 무슬림 혐오도 쌍둥이 빌딩이 공격받은 원인 중 하나다. 그러나 9·11 테러와 뒤이어 ‘테러와의 전쟁’으로 아프가니스탄과 이라크를 침공한 결과 전쟁이 벌어지고, 전쟁이 테러를 부르고, 다시 더 큰 전쟁이 벌어지고, 그 결과 더 많은 테러와 더 많은 인종차별과 증오가 벌어지는 악순환이 생겨났다는 것은 분명하다.
인종차별이 어떻게 작동하는지 보자. 일단 공식 사회에 의해 한 집단이 낙인 찍히고 악마화되면 그 집단은 온갖 편견과 괴롭힘의 대상이 된다. 현실에서는 아이들이 놀이터에서 따돌리고 괴롭히고 겁을 주는 것에서부터 파시스트 정당이 증오를 기반으로 성장하려 하는 것까지 그 양상이 다양하다. 파시스트에게 궁극적인 적은 노동계급 운동과 사회주의지만 노동계급과 좌파를 패배시키기 위해 필요한 지지를 얻기 위해서라면 누구든 속죄양 삼을 것이다. 속죄양은 유대인이 될 수도 있고, 망명 희망자, 폴란드인, 흑인, 집시 등 미디어와 지배계급이 지목한 누구든 희생양이 될 수 있다. 미디어에서 ‘무슬림’이 ‘골칫거리’라고 다루기만 하면 파시스트들은 이에 편승해서 친이스라엘적 입장이라도 기꺼이 취할 것이다.
둘째로 인종차별적 시류가 생겨나면서 ‘쥐만 잘 잡으면 어떤 고양이든 상관 없다’는 식의 태도가 생겨나고 있다. 그래서 떠오르는 주장을 아무거나, 특히 이데올로기적·정치적 상대편을 당황시킬 수 있는 주장을 이용한다. 그래서 예컨대 무슬림 혐오 담론에서는 무슬림이 “우리의 가치관을 공유하지 않는” 증거로 무슬림의 동성애 혐오를 든다. 이들은 마치 성소수자 평등권이 마치 서구의 ‘전통적’ 가치였던 것처럼 말하지만 10~20년 전만 해도 서구에서 대다수가 추잡한 동성애 혐오자였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시치미를 뗀다. 이렇게 무슬림을 고립시키려는 해로운 목적으로 세속주의가 이용되고 있는 것은 분명한 추세다.
두 개의 쿠데타
세속주의 개념을 잘못 사용해서 좌파를 잘못된 방향으로 이끌고 반동 세력을 이롭게 하는 것은 프랑스나 유럽에서만 벌어지는 일이 아니다. 최근 중동에서 일어난 두 개의 주요 사건, 즉 2013년 7월 이집트 군사 쿠데타와 2016년 7월 터키 군사 쿠데타에서도 세속주의 개념 오용이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
세속주의 오용이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중동이 무슬림으로만 이루어진 거대한 하나의 집단이라는 잘못된 생각부터 버려야 한다. 물론 터키를 포함한 중동 지역과 북아프리카의 압도 다수가 무슬림이고 아일랜드인의 압도 다수가 (아주 최근까지도) 가톨릭교도인 것은 사실이다. 그럼에도 20세기에 이들 지역에서 근대화를 위한 세속주의적 정치 운동이 다양한 방식으로 크게 벌어졌다. 이런 운동의 주체는 제국주의를 대리하고 그에 협력하는 우파 부르주아의 운동과 정권에서부터 어느 정도는 반제국주의적인 부르주아의 민족주의 운동과 정권, 그리고 좌파 진영의 공산주의자와 스탈린주의자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다. 지중해 주변을 보면 알제리의 민족해방전선, 이집트의 나세르와 나세르주의, 팔레스타인의 팔레스타인해방기구, 시리아와 이라크의 바트당, 무함마드 모사데그(1953년 CIA의 쿠데타로 전복되기 전까지 이란의 총리였다), 터키 쿠르디스탄의 쿠르디스탄 노동자당, 터키의 케말 아타튀르크와 케말주의 정당, 이집트·수단·이라크·이란·터키의 공산당 등이 이에 속한다.
15 또 공산당은 지도부 대다수가 중간계급이거나 나세르 같은 부르주아 민족주의자에게 스스로를 종속시키는 정책을 추구하는 경우가 많다. 16 그러나 앞서 언급한 세력 모두 자국을 ‘근대화’하려는 열망이 있다는 것과 농민과 노동자를 비롯한 무슬림 대중이 이런 과정에서 ‘후진적’인 장애물이 된다고 본다는 점에서 공통점이 있다. 평범한 사람들을 이렇게 보는 엘리트주의가 중동의 ‘좌파’와 ‘진보’ 세력 대다수에게 깊이 뿌리박혀 있다. 17
그러나 각 세력이 어디에 속하는지 분명하지 않고 때로는 잘못된 낙인이 찍히기 때문에 상황이 더 복잡해진다. 예컨대 케말주의 운동은 어느 정도 반제국주의적인 운동으로 시작했지만 나중에 친제국주의적으로 변질됐다. 그리고 사담 후세인의 부르주아 민족주의 운동 세력인 바트당(과 아사드 일가)은 스스로 사회주의를 지향한다고 말하고 공식 명칭에도 사회주의를 넣지만 조금도 자본주의를 반대하거나 노동계급 해방을 지지하려 하지 않는다.이렇게 접근하면 무슬림 대중에게서 좌파가 고립되고, 그 결과 이집트의 무슬림형제단이나 터키 에르도안의 정의개발당 같은 이슬람주의자들이 그들 자신을 친제국주의 정권과 친서방 군대에 원칙적으로 반대하는 세력인 것처럼 묘사하는 것을 막을 수 없다. 그러나 이들 세력은 결국 2013년 7월 3일 엘시시의 군부 쿠데타를 통해 최후를 맞게 됐다.
이집트 민중에게 무슬림형제단이 호스니 무바라크의 끔찍한 정권에 반대하는 주요 세력으로 여겨졌기 때문에 2011년 초 무바라크에 반대하는 혁명이 성공한 후에 이집트 역사상 최초로 열린 진정한 선거에서 무슬림형제단이 정권을 잡고 무함마드 무르시가 대통령이 될 수 있었다. 그러나 이 정권은 아일랜드 노동당과 여타 우파 개혁주의 정당과 마찬가지로 군부에 협조하고 이집트 국가와 자본주의를 수호하려 했으며 자신을 뽑아 준 대중을 위해서 한 일은 아무 것도 없었다. 사실 경제가 악화되고 국가 기구가 점점 더 제대로 작동하지 않게 되면서 대다수 이집트인에게 상황은 더 나빠졌다. 그 결과 정부에 반대하는 대중 운동이 다시 벌어졌고 6월 30일 거대한 무슬림형제단 반대 시위에서 절정에 달했다.
18 이 사건을 기반으로 엘시시 정권은 반혁명을 공고히 하고 무바라크 독재의 모든 면모를 되살려 놨다.
이 시점에서 쿠데타는 (아마도 CIA의 도움을 받아) 미리 계획된 것이 분명했고, 군부는 대중의 불만을 기회로 활용해 쿠데타를 일으킬 수 있었다. 무슬림형제단은 민주적 합법성의 문제를 제기하면서 쿠데타에 반대해 시위에 나섰고 엘나다 광장과 라바 엘 아다위야 광장에서 두어 시간 동안 연좌시위를 조직했다. 군부는 8월 14일 아바 엘 아다위야 광장에서 800~2000명의 목숨을 앗아간 끔찍한 대량학살로 응답했다. 국제인권감시기구는 이것이 ‘근래 들어 전 세계에서 하루 동안 가장 많은 시위자가 죽임을 당한’ 사건이었다고 말했다.19 그 결과 반혁명 쿠데타에 효과적으로 저항할 수 없었다.
비극적이게도 2011년 이집트 혁명에서 주도적 구실을 했던 정치 세력과 개인 중 많은 수가 이슬람주의보다는 군부가 덜 악하다는 생각 때문에 무슬림형제단을 전복한 쿠데타를 지지하는 태도로 돌아섰다. 그 중 가장 나쁜 사례는 나세르주의 지도자이자 무바라크 정권 하에서 17번이나 투옥됐고 2012년 대통령 선거에서 좌파적 색채를 띤 후보로 출마해 21퍼센트의 득표율로 세 번째로 많은 표를 얻은 함딘 사바히일 것이다. 2011년 거리 시위에서 중요한 구실을 한 4월6일청년운동도 쿠데타를 부분적으로 지지했다.이런 실패의 핵심적 원인은 계급투쟁을 중시하기보다는 ‘현대적’ 가치인 세속주의와 ‘후진적’ 가치인 이슬람주의 사이의 구분이 가장 중요하다는 생각이 광범하게 받아들여지는 것에 있다. 그래서 군부가 아니라 무슬림형제단이 주된 적이라고 생각하게 된다.
20 군부와 무슬림형제단 모두 똑같이 반동적인 반혁명 세력이라고 보고 반대하는 것이다. 21 이런 관점이 사바히의 노골적인 쿠데타 지지 견해보다는 분명히 낫지만 여전히 불충분하다. 군부가 권력을 장악하고 무슬림형제단을 투옥하고 있고, 군부는 지배계급의 대변자이자 자본주의 국가의 화신인 반면 무슬림형제단은 주로 프티부르주아로 이루어져 있기는 하지만 가난한 사람들에게 지지 기반을 두고 있는 상황에서 군부와 무슬림형제단을 똑같이 반혁명 세력이라고 보는 것은 의도와는 상관없이 결국 억압자를 돕는 결과를 낳게 된다. 따라서 엘시시의 독재에 맞서 효과적으로 저항을 건설하기 위해서 사회주의자는 종교를 막론하고 억압으로 고통받는 모든 사람들을(무슬림형제단도 포함해서) 방어해야 한다. 22
이집트 좌파가 흔히 받아들이는 또 다른 관점은 ‘제3광장’처럼[2016년] 7월 15일 터키에서도 쿠데타 시도가 있은 뒤 비슷한 문제가 벌어졌다(쿠데타의 결말은 달랐지만 말이다). 터키 안팎의 좌파는 에르도안의 이슬람주의 정부가 세속적 군부 지배만큼 나쁘다고(또는 더 나쁘다고) 생각해 적극적이고 전적으로 쿠데타에 반대하기를 망설였다는 점에서 이집트의 상황과 비슷했다. [쿠데타의] 전체 상황은 몇 시간도 안 돼 끝났기 때문에 정당이나 활동가들이 공식적으로 의견을 내놓을 시간이 없었다.(학자들은 특히 더 그랬다.) 그럼에도 누가 [반대 시위를 위해] 거리로 뛰어나오지 않았는지, SNS에는 어떤 게시물이 올라왔는지 살펴보면 내가 말한 현상[좌파가 쿠데타에 적극적으로 반대하지 않은 것]이 분명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날 밤 쿠데타에 분명히 반대하는 주장을 한 사람들은 ‘좌파’를 비롯한 수많은 사람들에게 공격을 받았다. 터키에서 1960년과 1980년에 극도로 잔혹하고 억압적인 쿠데타가 벌어진 역사적 경험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말이다.
쿠데타에 반대하지 못한 것을 정당화하기 위해 제기되는 주장 중 하나는 쿠데타가 에르도안이 자신의 지위를 공고히 하기 위해서 꾸며낸 ‘가짜’였다는 것이다. 의회와 대통령의 거처가 폭탄 테러를 당하고 200명이 넘는 사망자가 발생하는 등 사건의 심각성을 생각하면 이런 주장은 허무맹랑하다. 그러나 이런 ‘이론’이 제기된 것(과 이런 주장이 터키에 대해서 제대로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 제기했다는 사실)은 사람들이 쿠데타에 제대로 도전하지 않았다는 것을 분명히 보여 준다.
또 에르도안이 파시스트였거나 파시스트라는 주장도 있다. 아나키스트나 자율주의 집단을 비롯해 많은 사람들이 이렇게 주장하는데, 2013년 반정부 시위 때부터 이런 주장이 제기됐고 쿠데타를 계기로 다시 등장했다. 이런 묘사는 여러 측면에서 잘못됐다. 자본주의 국가의 탄압을 전부 파시즘이라고 부르는 경향이 있는데, 그래서 마거릿 대처가 파시스트였고, 도널드 트럼프가 파시스트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현실에서 파시즘은 부르주아 민주주의와 노동계급(과 노동조합과 좌파 전체)의 운동을 단지 공격하거나 약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파괴하고 제거하려는 반혁명적 대중운동이다. 이것이 무솔리니, 히틀러, 요비크, 황금새벽당, 국민전선이 대처, 트럼프, 부시, 영국독립당, 캐머런, 메르켈 등과 근본적으로 다른 점이다. 에르도안과 그의 정부는 파시즘의 기준에 전혀 부합하지 않는다. 게다가 정의개발당을 파시스트라고 부르는 것은 크리스토퍼 히친스나 닉 코헨 같은 예전 좌파가 조지 부시와 토니 블레어에 대한 지지를 정당화하기 위해서 이슬람 혐오적 용어인 ‘이슬람 파시즘’을 사용한 것과 관련이 있다.
23 그럼에도 이런 주장은 두 가지 측면에서 사실이 아니다. 첫째로 이런 탄압의 범위와 심각성은 군부가 벌인 탄압에 비하면 새 발의 피다. 〈이코노미스트〉에 따르면 “터키 군대는 1960년부터 지금까지 네 차례 정부를 전복했다. 1980년 쿠데타가 가장 피 튀겼는데, 50명이 처형됐고 50만 명이 체포돼 그 중 수백 명이 감옥에서 사망했다.” 24 두 번째로 진보·좌파 세력이 처음부터 쿠데타에 분명히 반대했다면 그들은 이 반민주적인 권위주의 정권에 저항하고 더 강력한 위치에 설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군부 쿠데타에 반대하지 않는 이유를 설명하는 셋째이자 가장 그럴듯한 주장은 에르도안이 자신의 승리를 이용해서 권력을 강화하고 점차 권위주의적인 방향으로 권력을 확장할 것이라는 주장이다. 이런 일은 실제로 벌어졌고 군부 내의 소위 귈렌주의자나 폭동주의자처럼 쿠데타에 실제로 책임이 있는 사람을 탄압하는 것을 넘어 쿠데타에 연루됐다고 보기 어려운 사람까지 탄압받고 있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 없는 사실이다. 에르도안 정부의 법무부 장관 베키르 보즈다가 자기 입으로 지금까지 3만 2000명에 달하는 사람이 체포됐다고 밝혔다.왜 이집트에서는 쿠데타가 완전히 승리한 반면 터키에서는 성공할 수 없었을까? 터키 군대가 결속력이 약했던 탓도 있겠지만 주된 이유는 터키 민중, 특히 주로 노동계급이 7월 15일 밤 쿠데타가 일어난 즉시 대거 거리로 쏟아져 나와 탱크를 가로막고 쿠데타를 중단시켰기 때문이다. 그들은 에르도안의 요청에 따라 이렇게 움직였다.(시위자가 모두 정의개발당 지지자는 아니었지만 말이다.) 그러나 이렇게 할 수 있었던 것은 종교와는 전혀 관계가 없고 전부 경제적 이유 때문이다. 이집트에서는 경제가 침체되고 있었고 이집트의 이슬람주의 정권 지지자들은 크게 실망했다. 터키에서는 경제가 전례 없이 호황을 누렸고, 덕분에 에르도안은 제한적이지만 적절한 개혁으로 노동계급 기반을 늘리고 유지할 수 있었다. 아일랜드에 비유하자면 에르도안의 정의개발당은 1990년대 중반에서 2000년대 중반에 이르는 경제호황기인 ‘켈트의 호랑이’ 시기의 아일랜드 공화당이라고 할 수 있고, 무슬림형제단은 2008년 경제 위기 이후의 아일랜드 공화당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 해도] 두 경우 모두 사회의 주요한 분할이 계급 간의 정치적 투쟁이 아니라 세속주의와 신권정치 간의 구분이라고 여기는 어리석음이 드러나기는 마찬가지다.
마르크스주의와 종교
25 그러나 결론으로 두 가지 점을 언급해야겠다.
이 글은 종교에 대한 기본적인 마르크스주의적 분석을 현대의 사건에 적용하는 글이다. 그리고 종교에 대한 마르크스주의적 분석은 이데올로기에 대한 역사유물론적 분석의 일부다. 이 글에서 역사유물론을 설명할 수는 없다.첫째로는 사람이 종교를 만들지, 종교가 사람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는 간단한 사실을 얘기하려 한다. 모든 종교는 인간에게 주어진 물질적 상황에 대한 반응으로 나타난 사회적 산물이다. 따라서 사회가 바뀌고 물질적 조건이 바뀌면 종교도 바뀌고 사람들이 경전과 교리를 이해하는 방식도 바뀐다. 기독교든, 이슬람교든, 유대교든, 다른 어떤 종교든 다 마찬가지다. 크리스 하먼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26 부르주아 사상가들이나 자유 사상가들도 그렇게 생각한다. 그들은 종교 제도나 반계몽주의 사상에 맞서 싸우는 것 자체가 인간 해방을 위한 투쟁이라고 생각한다.
그런 혼란은 흔히 종교 자체의 힘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데서 비롯한다. 종교인들은 좋든 나쁘든 종교를 하나의 역사적 힘으로 이해한다. 대다수 반성직주의反聖職主意 그러나 종교 제도와 사상이 역사에서 일정한 구실을 하는 것은 분명하지만, 물질적 현실과 동떨어져서 그런 구실을 하는 것은 아니다. 종교 제도는 성직자나 설교자 집단과 함께 특정 사회에서 출현하고 그 사회와 상호작용한다.
둘째로 종교적 색채를 띤 (수많은) 정치적 운동에 대해 사회주의자와 마르크스주의자가 태도를 결정할 때 그 운동의 신학 체계나 교리가 기준이 되어서는 안 되고 운동에 참가하는 사회 세력이나 운동이 대변하는 사회 세력, 그리고 그들이 계급투쟁에서 하는 구실을 봐야 한다. 마르크스주의자는 마틴 루서 킹, 시민평등권 운동, 우익인 도덕적 다수파, 부활절 봉기, 아일랜드 공화국군, 베네수엘라의 차베스를 평가할 때 이런 기준을 보편적으로 적용했다. 이슬람주의 운동의 다양한 형태에 대해서도 같은 기준을 적용해야 한다. 하마스와 헤즈볼라, 알카에다와 ISIS, 무슬림형제단과 정의개발당을 모두 똑같은 이슬람주의로 묶을 수 없다. 각자 구체적인 상황을 고려해 구체적으로 분석해야 한다. 그리고 세속주의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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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John Molyneux, ‘Secularism, Islamophobia and the politics of religion’, Irish Marxist Review Vol 5, No 16 (2016)
↩
- 태아의 생명권을 명시함으로써 사실상 낙태를 헌법으로 금지하는 법안이다 ― 옮긴이. ↩
- 가톨릭 세력이 주도해 세운 시설로 여성들을 수용해 세탁업 등 고된 노동을 시키고 여성들을 억압했다 ― 옮긴이. ↩
- 아동과 청소년에게 복음을 전파하고 그들을 교육하기 위해 만들어졌으나 아동 학대와 아동 성폭력 사건으로 문제가 됐다 ― 옮긴이. ↩
- 성찬의 빵과 포도주가 그리스도의 몸과 피로 변한다는 믿음 ― 옮긴이. ↩
- F. Engels, ‘Introduction to the Dialectics of Nature’, Marx/Engels, Selected Works, Vol II, Moscow 1962, p63. ↩
- 2016년 10월 8일 전 프랑스 총리이자 대통령 후보로 출마한 프랑수아 피용은 “프랑스가 과거에 식민지와 문화를 나누려 했을 뿐이기 때문에 나쁘지 않”다고 말했다. ↩
- 물론 아일랜드는 식민지가 없었고 1950년대와 1960년대에 서구가 누린 경제 호황을 누리지 못했다. 아일랜드에 비유하자면 ‘켈트의 호랑이’ 시기와 비슷하다고 할 수 있겠다. ↩
- 프랑스 인구조사에서는 종교를 기록하지 않기 때문에 무슬림 인구 추정치를 정확히 알 수 없다. 프랑스 내무부가 최근 발표한 보고서에서는 그 수가 415만 명(전체 인구의 약 6.2퍼센트)이라고 했는데 영국의 무슬림이 270만 명(약 4.5퍼센트)인 것에 비하면 많다. ↩
- 불행히도 프랑스의 주요 트로츠키 조직 중 하나인 노동자투쟁당(LO)이 여기에서 부끄러운 구실을 했다. ‘The Islamic veil and the subjugation of women’, http://journal.lutte-ouvriere.org/2003/04/24/foulard-islamique-et-soumission-des-femmes_6495.html와 Chris Harman ‘Behind the Veil’, Socialist Review 180, Nov. 1994. https://www.marxists.org/archive/harman/1994/11/veil.htm을 보시오. ↩
- 나는 여기서 모든 유럽인이 아니라 지배 집단과 지배적 사상의 태도를 말하는 것이다. ↩
- Alex Callinicos, Race and Class, London 1993, p16. ↩
- 1923년 옥스포드 사전에는 무슬림 혐오라는 단어가 포함된 적이 있지만 아주 드문 사례였다. ↩
- http://edvardas.home.mruni.eu/wp-content/uploads/2008/10/huntington.pdf ↩
- ‘State intellectuals are those who have worker for and emerged from the bowels of the US state machine: Kissinger, Brzezinski, Fukuyama and Huntington typify this breed’. Tariq Ali, The Clash of Fundamentalisms, London 2002, p302. ↩
- 특히 당시에는 소련의 원조와 보호를 받기 위해서 사회주의라는 단어를 명칭에 사용하는 경우가 많았다. ↩
- 이 정책은 1920년대 중반 스탈린과 코민테른이 받아들인 ‘단계론’과 1930년대 인민전선 전략에서 나왔다. ‘공산주의’와 제3세계 민족주의의 관계에 대해서는 John Molyneux, What is the Real Marxist Tradition?, London 1985(https://www.marxists.org/history/etol/writers/molyneux/1983/07/tradition.htm) 을 보시오. ↩
- 터키 노동계급에 대한 이런 태도는 Ron Margulies, ‘What are we to do with Islam? The case of Turkey’, International Socialism 151(http://isj.org.uk/what-are-we-to-do-with-islam)을 보시오. ↩
- https://www.hrw.org/news/2014/08/12/egypt-raba-killings-likely-crimes-against-humanity ↩
- 결국 그들은 나중에 이런 견해를 철회했지만 이미 사태는 돌이킬 수 없었다. ↩
- http://www.france24.com/en/20130729-egypt-third-square-activists-reject-army-mohammed-morsi ↩
- 이런 관점이 국제적으로는 질베르 아쉬카르(SOAS 교수이자 프랑스 반자본주의신당(NPA)의 회원)와 그의 책 Morbid Symptoms: Relapse in the Arab Uprising, London 2016에서도 이론화됐다. ↩
- 이집트 혁명과 그 운명에 대한 더 자세한 분석은 John Molyneux, ‘Lessons from the Egyptian Revolution’ Irish Marxist Review 13와 Philip Marfleet, Egypt: Contested Revolution, London 2016을 보시오. ↩
- http://www.rte.ie/news/2016/0928/819767-turkey-arrests ↩
- ‘Erdogan and his generals’, The Economist, 2/2/2013 http://www.economist.com/news/europe/21571147-once-all-powerful-turkish-armed-forces-are-cowed-if-not-quite-impotent-erdogan-and-his ↩
- 이 문제에 대한 나의 의견은 John Molyneux, ‘More than opium: Marxism and religion,’ International Socialism 119 (2008)와 John Molyneux, The Point is to Change it: an introduction to Marxist Philosophy, London 2011에서 볼 수 있다. ↩
- 성직자들이 정치·사회 문제에 영향력을 행사하거나 교리주의를 내세워 특권과 부를 누리는 데 반대하는 주장 ― 옮긴이. ↩
- Chris Harman, ‘The Prophet and the Proletariat’, International Socialism 64 (1994) pp4-5. https://www.marxists.org/archive/harman/1994/xx/islam.htm [국역: 《이슬람주의, 계급, 혁명》(책갈피, 2011)] 내가 이 글에 담은 주장은 대부분 이 선구적이고 뛰어난 글 덕분에 발전시킬 수 있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