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중국 국가자본주의의 모순과 여성의 삶
중국 여성들의 삶은 얼마나 바뀌었는가? *
중국의 경제적 성공은 일부 노동자들의 삶을 개선시켰지만, 성별 격차와 빈부 격차도 확대했다. 샐리 킨케이드가 1949년 중국 혁명 이후 70년 동안 중국 여성들의 삶이 어떠했는지를 살펴본다.
“여자는 아무리 훌륭해도 부엌 아궁이 주위나 배회할 것이다. 남자는 아무리 열등해도 세상을 여행하게 될 것이다.” 혁명 이전 중국에서 흔한 말이었다. 당시에 가정집 문을 두드리는 사람에게 “집에 아무도 없다”고 대답할 때와 같은 의미다. 여기서 “아무도 없다”는 것은 집에 남자가 없다는 뜻이다.
1949년 혁명으로, 중국에서 처음으로 여성들이 집 밖에서 일할 수 있도록 허용하는 법이 통과됐다. 여성은 이혼의 권리와 토지 소유권, 그리고 더는 남성의 재산으로 간주되지 않도록 하는 여러 권리도 보장받았다. 조혼과 정략결혼을 금지하는 법도 통과됐다. 그러나 “여성이 하늘의 절반을 떠받치고 있다”는 마오쩌둥 시대 국가의 미사여구에도 불구하고, 현실은 완전히 달랐다.
혁명은 제국주의 열강, 군벌, 일본 점령자들을 분쇄했다. 수많은 농민들이 이를 환영했다. 하지만 중국 혁명은 사회주의 혁명이 아니라 민족주의 혁명이었다. 또한 노동자와 농민의 필요와 열망은 전 세계 국가들과 경쟁할 수 있는 강력하고 독립적인 경제를 이룩해야 한다는 국가의 목표에 항상 종속됐다. 임산부 보호가 크게 개선됐고, 여성과 아이가 출산으로 사망하는 경우가 줄어들었지만, 여성들은 여전히 아이들을 양육하면서 일도 해야 하는 이중 부담을 안고 있었다.
농업 집산화 시기에 농촌에서 밥을 먹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집단 농장에서 일을 하고, ‘노동 점수’를 얻는 것이었다. 이런 조건 때문에 여성들은 출산 직후 빨리 노동 현장으로 돌아와야 했다. 결국 여성들은 장기간 많은 건강 문제를 갖게 됐다. 대부분의 농촌 사회에서 집단 보육은 결코 현실이 아니었다. 기껏해야 노인들이 ‘노동 점수’와 교환하기 위해 아이들을 돌보는 정도였다. 최악의 경우에는 아이들을, 심지어 갓난아이조차 혼자 내버려 두기도 했다.
도시에 사는 많은 여성들은 국영기업에서 일했다. 이곳의 일자리는 중공업과 경공업으로 구분되고, 숙련직과 비숙련직으로 구분돼 있었다. 중공업의 숙련직 일자리는 대부분 남성에게 배정됐고, 여성들은 흔히 가장 낮은 임금을 받는 직종에 고용됐다. 많은 국영기업들이 민영화되거나 구조조정을 거치면서 노동자들에게 낮은 임금을 강요했던 1990년대에 이런 구분이 특히 중요해졌다. 여성이 도시 노동자의 39퍼센트를 차지하고 있었지만, 이 기간에 해고된 노동자의 약 69퍼센트가 여성이었다.
많은 여성들은 1979년 실시된 한 자녀 정책을 환영했다. 끝없는 임신의 굴레를 끊을 수 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 정책은 국가가 벌금 부과, 일자리 박탈, 낙태와 불임을 통해 가임 여성들을 통제하는 것으로 끝났다. 또한 결혼한 여성은 본가를 떠나 남편의 집에 들어가야 하는 농촌 가정의 구조 때문에, 여자 아이보다는 나이 들어 부모를 모실 수 있는 남자 아이가 선호됐다. 최근 중국 국가는 부부가 두 아이를 갖는 것을 허용하기 시작했는데, 부모와 조부모를 부양할 수 있는 젊은층이 너무 적기 때문이다.
지난 30년간 중국의 경제 성장은 여성의 삶을 크게 변화시켰다. 하지만 농촌에서 도시로 올라온 농민공인지 아니면 도시에서 태어나고 자랐는지에 따라 많은 것이 달라진다. 이는 1958년에 도입된 호구 제도 때문이다. 호구 제도는 기본적으로 내부 이동에 관한 제도인데, 국내 이동을 통제하고 복지와 자원을 분배하는 역할을 했다. 중국인들은 도시 호구를 가진 사람과 농촌 호구를 가진 사람으로 나뉘는데, 이 때 호구는 아이가 어디서 태어났는지와 상관없이 부모 세대에서 자녀 세대로 전해진다.
도시에서 농민공들은 교육이나 의료 서비스 같은 당연한 권리도 보장받지 못한다. 그 때문에 많은 농민공들은 도시로 이주할 때 아이들을 농촌에 남겨 둔다. 그래서 오늘날 아이들 약 6100만 명(중국 전체 아동의 22퍼센트, 농촌 아동의 37퍼센트)은 한 부모나 조부모와 함께 살고 있다. 그 중 약 3퍼센트는 혼자 사는 것으로 추정된다. 도시로 이주할 때 아이를 데려가는 농민공 부부의 약 20퍼센트는 도시 학교에 아이들을 입학시키려 할 때 많은 관료주의적 장벽에 부딪힌다.
예를 들어 주강 삼각주의 광저우 학교에 아이의 입학을 신청한 농민공 부모들은 취업 허가증을 취득해야 하며, 출생지에서 받은 거주 증명서와 가구 등록증을 제출해야 한다. 도시의 많은 학교들은 농민공 가정에 추가 비용을 부과한다. 농민공 자녀들은 도시 학교에 입학하더라도 외톨이가 된다. 한 설문조사에 따르면 농민공 자녀의 86퍼센트 이상은 현지에서 친구 한 명 사귀지 못했다. 도시 학교에 입학하지 못한 농민공 자녀는 결국 혼잡한 무허가 학교에 들어가게 된다. 이 무허가 학교들은 일반적으로 자원이 부족하고, 교사 이직률이 높으며, 정부 당국에 의해 폐교될 위험도 있다.
그래서 엄마가 된 여성 농민공들은 더 나은 조건을 위해 다른 노동자들과 집단적으로 싸우거나 농촌으로 되돌아가는 점점 더 가망이 없는 선택을 해야 한다.
반면에 도시 호구를 가진 여성들, 특히 딸이 있는 여성들은 경제 성장으로 혜택을 입었다. 현재 고등교육을 받고 비교적 보수를 많이 받는 여성들의 수가 점차 늘고 있다. 그러나, 그럼에도 남성과 여성 사이의 성별 임금 격차와 부의 격차는 증가했다. 결혼한 두 사람 사이에도 재산 격차가 벌어졌는데, 그 이유의 하나는 집 소유권 때문이다. 2012년에는 여성의 70퍼센트가 주택 마련 비용을 분담했음에도 여성의 명의가 포함된 주택 증서는 30퍼센트에 불과했다. 30세 이하에서는 남성이 여성보다 2000만 명이나 더 많기 때문에 남성이 결혼할 여성을 찾는 데 어려움을 겪을 수도 있는 현실에서도 말이다.
권위주의와 차별은 장기간 사회 저항 운동의 발전을 방해할 수 있다. 그리고 그것들은 자본주의 사회의 본질에 뿌리 박고 있는 근본 원인을 제거할 수 없다. 역사를 통틀어, 여성의 지위는 분노와 행동을 불러일으켰다. 때로는 불만의 초점 구실을 했고, 반자본주의 운동이라는 더 폭넓은 운동을 촉발시키는 기폭 장치가 되기도 했다.
50년 전 프랑스 1968년 반란을 돌아볼 필요가 있다. 학생들이 오랫동안 억눌린 불만을 표출하자, 사태는 급속히 사회 및 정치 구조의 근본을 흔드는 거대한 운동으로 바뀌었다. 정치는 정확한 과학이 아니며, 우리는 수개월이나 수년 내에 중국에서 벌어질 항의 시위의 형태를 예측할 수는 없다. 하지만 상상은 할 수 있다. 아래에서 언급할 온라인에서의 운동과 청원을 지지하며 국가 탄압의 위험을 무릅쓰는 용감한 여성과 남성들이 항의 시위와 반란의 물결을 시작할 수 있다. 1968년 5월(그리고 그 이후)이 프랑스와 다른 선진국들에서 그랬던 것처럼 이 시위와 반란은 중국에 강력한 영향을 미칠 수 있다.
가정 폭력과 성적 괴롭힘에 맞선 투쟁
중국 여성들의 의료 혜택은 30~40년 전 그들의 어머니와 할머니 세대보다 증가했다. 하지만 가정 폭력과 성희롱은 여전히 중국 사회 전반에 만연하다.
수십 년 동안 활동가들은 중국에서 가정 폭력이 어느 정도인지를 폭로하려 했다. 2011년, 김리는 오랫동안 가정에서 학대를 당했고, 결국 유명한 영어 교육자인 남편 리양과 결혼 생활을 끝냈다. 김리는 단지 친구들에게 사실을 알리고자 하는 마음으로 새 휴대폰을 사용해 구타당하고 멍든 자신의 몸 사진을 소셜 미디어에 올렸다. 하지만 매우 빠르게 그녀에게 조언과 지지를 보내는 팔로어 수천 명이 생겨났다. 그 중 많은 사람들도 가정 폭력의 피해자였다.
김리는 남편의 학대를 경찰에 신고하려 했을 때, 많은 가정 폭력 피해자들이 경찰서에서 ‘기본적인 무관심’을 체감했다는 것을 알게 됐다. 그나마 가장 나은 경찰의 대응은 “당신은 괜찮고, 남편도 괜찮으니 긴장 풀고 집에 돌아가라”는 것이었다. 최악의 경우 경찰은 신분증이 잘못됐다며 신고를 접수할 수 없다는 굉장히 형식적인 절차를 얘기하거나, ‘지정된’ 범죄 담당 병원에서 받은 건강 진단이 아니기 때문에 적절한 증거가 될 수 없다는 식으로 주장한다.
김리는 결국 남편의 접근 금지 명령을 얻어 내기까지 18개월 이상 중국 법률 제도에 맞서 싸워야 했다. 그녀는 마침내 가정 폭력을 사유로 이혼을 승인받았다. 그녀가 법정을 떠날 때, 피로 얼룩진 하얀 웨딩 드레스를 입은 지지자들은 그녀를 안아 줬다.
몇몇 사람들은 여전히 중국이 다른 자본주의 국가와 매우 다르거나, 심지어 사회주의 국가라고 여긴다. 하지만 중국도 다른 국가와 마찬가지로 가족의 사적 영역이 여성 차별의 뿌리로 남아 있고, 공적 영역은 여전히 남성들이 지배하고 있다. 중국 국가는 2016년에서야 가정 폭력을 불법으로 규정했다. 정부 스스로도 결혼한 여성 4명 중 1명이 가정 폭력의 피해자라고 추정하고 있다. 이 수치는 실제 규모보다 훨씬 작을 게 틀림없다. 이런 운동에도 불구하고, 가정 폭력은 여전히 공적인 문제가 아니라, 집안에서 사적으로 해결해야 하는 개인 문제로 여겨진다. 국가는 실질적 지원을 하기보다는 항의하는 사람들을 침묵하게 하고 희생자를 비난하는 데 더 관심이 있는 듯하다.
2015년 국제 여성의 날 직전에 페미니스트 활동가 5명이 체포돼 37일 동안 수감됐다. 성적 괴롭힘 반대 스티커를 배포했다는 이유에서였다. 이 여성들은 아직도 감시를 받고 있다. 이들을 체포한 일은 여성 인권 활동가들이 공개적으로 자신의 입장을 밝히거나 시위에 나설 자신감을 잃게 만들었다. 그래서 온라인 청원이 점점 더 많이 사용됐고, 경찰은 개인을 표적 삼는 일이 더 어려워졌다.
그해 초, 베이징에서 국제 여성의 날 행사가 끝났을 때 온라인 그룹 ‘페미니스트 보이스’의 계정이 웨이보(중국판 트위터)에서 삭제됐다. 다음 날 위챗(중국의 모바일 메신저) 계정도 폐쇄됐다.
1 관련 내용을 웨이보에서 삭제하려는 시도는 공지 후 24시간 만에 사용자 17만 명이 #IAmGay라는 해시태그를 다는 온라인 저항에 부딪쳤다. 중국의 미투 운동 또한 엄청난 수준의 성적 괴롭힘 사건을 폭로하기 시작했다.
이런 탄압과 검열에도, 저항은 계속되고 있다. 최근 LGBT미국의 유명한 영화 제작자 하비 웨인스타인의 성범죄 전력이 처음 알려진 후, 국가가 발행하는 신문 〈차이나 데일리〉는 중국 문화가 뛰어나 성희롱 사건이 비교적 적다고 주장하는 온라인 기사를 게재했다. 이 기사는 소셜 미디어에서 큰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사람들은 그 주장을 비난했을 뿐 아니라 성적 괴롭힘 사건 보도 자체가 적다고 지적했다. 심지어 성적 괴롭힘을 묘사할 때 사용하는 공식어조차 의도적으로 사실을 호도하고 있다. 대학에서는 성적 괴롭힘을 “선생과 학생 사이의 부적절한 관계”라고 언급하고 있다. 2017년 광저우 성교육센터가 진행한 설문조사 결과에 따르면, 중국 대학생의 70퍼센트가 성적 괴롭힘을 경험한다.
올해 초, 국제적인 미투 운동에 영감을 받은 루오시시는 2004년 베이징에서 박사 학위를 밟던 시절 지도교수한테 성폭행을 당한 사건을 폭로하는 공개서한을 웨이보에 올렸다. 24시간 만에 이 게시물은 조회수 300만 건을 기록했다. 그 지도교수는 대학에서 해임됐다. 그 때 이후로 정부 당국은 성적 괴롭힘을 좀 더 심각하게 인지하기 시작했다. 올해 1월 7일 〈인민일보〉는 자신의 피해 경험을 이야기하는 피해자들을 지지해야 한다는 기사를 실었다. 1월 중순, 중국 교육부는 “대학 내 성적 괴롭힘을 막기 위한 장기적인 메커니즘을 구축하기 위해 관련 부처와 협력할” 계획을 발표했다.
그러나 이런 고무적인 조짐들이 있음에도, 정부는 대학 캠퍼스나 온라인에서 운동이 성장하는 것을 막기 위해 신속하게 움직였다. 검열관들은 미투 자체뿐 아니라 “성적 괴롭힘 반대”와 관련된 모든 것을 차단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중앙정부 요원으로 알려진 회색 정장을 입은 사람들이 성적 괴롭힘 사건이 공개되지 않도록 단속하고 있다는 의심이 커지고 있다. 그들 중 다수가 성적 괴롭힘을 저질렀기 때문이다. 또한 이들은 경제가 후퇴하는 이 때 사회가 불안정해지는 것을 두려워한다.
과거에 중국 국가는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운동이란 운동은 모두 탄압하려 했다. 1989년 톈안먼 항쟁부터 2011년 아랍의 봄에 대한 사람들의 지지, 가장 최근에는 홍콩 우산 운동까지 국가가 운동을 진압하는 데 성공할 때마다 또 다른 풀뿌리 운동이 지난 번 운동에서 교훈을 얻으면서 등장한다. 가정 폭력, 성적 괴롭힘, 성차별 등의 지독한 일들이 드러나지 않도록 국가는 금지하고 숨기며 법으로 단속하느라 고군분투하겠지만 결국 아무 소용이 없을 것이다.
MARX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