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 마르크스주의 관점으로 보는 북한 현대사
북한 여성과 사회변혁(2)
1980년대부터 김정은 정권까지
경제 위기 때 구조조정 1순위가 된 여성 노동자
1 에서 지적했듯이, 1970년대부터 북한은 심각한 경제 위기를 맞이했다. 이 위기는 북한 국가자본주의의 모순에서 비롯한 결과였다. 1962년 경제와 국방의 병진노선 이후 이미 소비재 공급에서 위기 징후가 나타났다. 한 사람이 벌어서는 한 가정의 식량과 부식물을 구입할 수 없는 형편이었다. 1970년대 말부터는 북한의 공장과 기업소에서 생산 위기가 본격화돼 자재 부족과 전력난 등으로 ‘생산의 정상화’가 핵심 모토가 될 정도였다. 2 공장 및 기업소에 ‘유휴 노동력’이 급격하게 늘어났다.
전편의 글3 북한 경제가 침체와 하강기로 접어드는 1980년대에 여성 노동력 수요가 줄면서 다시 여성을 가정으로 돌려보내는 정책을 취하게 된다. 특히 북한 정권에게 기혼 여성들 해고는 배급량을 줄이기 위한 것이기도 했다. 1980년대에 북한은 직장인에게 식량을 1인당 70그램 지급한 데 비해, 가두여성 4 은 30그램만 배급받았기 때문이다.
그러자 북한 정권은 가정 주부들의 출근을 더는 강제하지 않기 시작했다. 급기야 공장에 다니는 기혼 여성이 첫 번째 구조조정 대상이 됐다. 1980년대 기혼 여성의 70∼80퍼센트가 직장을 포기해야 했다. 북한 정권은 퇴출된 기혼 여성들이 거주지 지역에서 자체 수입원을 늘려 ‘자력갱생’할 것을 독려하기 시작했다. 북한 당국은 기혼 여성들에게 식량 배급을 축소하는 한편 이들에게 ‘8·3 인민소비품 생산’그러나 가정으로 ‘편하게’ 돌려보내지도 않았다
7 퇴출된 기혼 여성들을 가내 작업반에서 일하게 했고 노동계급 가정들의 일상생활 자립도를 높이게 했다. 1984년 김정일의 지시로 시작된 ‘8·3 인민 소비품 생산운동’이 그것이다.
북한 정권은 기혼 여성들을 직장에서 해고함으로써 복지 부담을 줄이는 한편 이들이 가내 작업반에서 생산활동을 하도록 했다.가내 작업반은 전업주부들로 구성돼 공장에서 원료, 자재 반제품 폐기물을 가져다가 일상 생활용품을 생산하는 생산단위였다. 노동수단은 개인이 소유한 간단한 도구가 대부분이지만 공장에서 가져다 쓰는 경우도 있었다. 반원들이 개별 가정에서 일하거나 공동장소에서 함께 일하기도 했다. 노동시간은 정해져 있지 않았으며 보수는 생산량에 따라 받았다.
8 (줄여서 여맹)의 맹원으로 구성된 조사반 요원들을 조직해서 비공식 부업자들을 가내 작업반에 편입시키고 수입금의 20퍼센트 이상을 납부금으로 내도록 했다. 9 여맹은 모범 가내 작업반 경쟁을 조직하기도 했다. 10
이들은 공장이나 기업소의 재적 종업원 수에 들어가지 않으므로 비공식 노동부문에 속했는데, 역설적이게도 이 부문이 북한 사회가 ‘고난의 행군’이라는 고통의 시간을 견디는 데서 큰 구실을 하게 된다. 식량난을 거치며 이 부분은 더욱 확대돼 북한의 시장 및 생산물 확대에 중요한 일부가 된다. 가내 작업반은 당국에 공식적으로 등록해야 했지만 국가 납부금이 늘어나자 반원들이 등록을 회피하는 사태가 빚어졌다. 그러자 북한 당국은 ‘조선민주여성동맹’경제 위기 시기에 기혼 여성을 1차로 해고시킨 뒤 이들이 소비품을 생산·충당하도록 강제한 것도 모자라 이들에게 다시 일정한 ‘세금’을 납부할 것을 강요한 셈이다. 북한 지배층은 경제 위기의 대가를 알뜰살뜰하게도 평범한 여성들에게 전가했다. 그런데 더 큰 고난이 북한 여성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고난의 행군’이 북한 여성에게 강요한 부양의 책임
1994년 김일성 주석 사망, 1995년 큰 물 난리, 1995~1997년 ‘고난의 행군’은 북한의 큰 비극이었다. 2001년 미 인구센서스국 산하 국제데이터베이스IDB의 로레인 웨스트(그의 통계 산출 방식이 가장 객관적이고 정확하다는 평가를 받는다)에 따르면, 1995∼2000년 북한의 사망자 수는 약 49만 명인데 이는 1950년대 말 대약진운동 당시 중국에서 기아로 사망한 농민들의 인구 비중과 비슷하다.
11 도 문제의 원인 중 하나였다. 김일성 사망 직후 식량을 포함한 국유재산의 보관·운송·분배를 담당하는 관료들의 횡령과 약탈 12 도 기아 사망자 수가 늘어난 부차적인 이유였다.
수해는 막대했다. 1995년 김일성 사망 1주기가 지난 직후 7월 30일부터 8월 18일까지 평균 300밀리리터의 폭우가 북한 전역에 쏟아져 하천이 범람했다. 농업 생산에 막대한 타격을 줬고 관개용 수로와 주택이 파괴됐으며 저장 곡물을 쓸어버렸다. 그러나 단순히 자연재해 때문만은 아니었다. 지력을 지나치게 훼손하는 인공관개법에 의존하는 주체농법 1995년부터 시작된 재앙적 자연재해로 공장과 기업소는 작동을 멈췄다. 그러나 노동자들은 공장이 가동을 멈췄어도 직장에 나가지 않으면 단련대 처벌을 받기 때문에 설혹 월급이나 배급이 나오지 않아도 출근해야 한다. 예를 들어 평남 순천비날론연합기업소는 평남에서 가장 큰 기업소이지만 생산이 정상적으로 이뤄지지 않았으며 기업소 노동자들은 잦은 동원이나 사회 건설 노력으로 동원되는 등 생산과 무관한 일을 해 왔다. 그리고 개근한 노동자들에게만 통옥수수를 15일 분량인 15킬로그램씩 배급했다. 간헐적으로 전달되는 배급과 소소한 임금만을 가정에 가져올 수 있는 상황이었다.이렇게 배급제가 사실상 마비된 상황에서 식량을 구해야 하는 것은 오롯이 여성들의 몫이 됐다. 여성들은 식량을 구하고(쌀시리) 사경제 활동으로 돈을 벌어 가족을 부양해야 했다.
14 “김정일의 인식과 지도 노선 때문에 북한에서는 군수공업이 제일 실속 있는 경제 부문”이었다. 15
한마디로 북한 주민의 삶, 특히 여성들은 가족의 식량과 먹거리를 찾기 위해 사선에 있었다. 그럼에도 북한 당국은 중공업과 군수공업에 더 주력하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나는 당 사업도 보고 군대사업도 보아야 하기 때문에 경제관리사업에서 제기되는 문제를 일일이 다 보아 줄 수 없습니다. 경제사업은 경제 일군들이 맡아 하여야 합니다”라고 할 정도로 경제와 생산 문제에 별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그에 맞춰 여맹은 군대 지원을 위한 노력동원을 강조했다. 여맹 기관지인 《조선녀성》에는 남녀평등에 관한 언급보다는 여성들에게 체제에 대한 충성을 강조하고 노동력 지원 사업에 나서자는 사설이 많이 등장했다. 여맹은 군대 지원 사업을 여맹의 중요한 본분이자 의무라고 강조하기도 했다. 철도 지원, 항만 건설 지원, 탄광 지원 등을 유도하는 사설을 자주 실었다.17 북한 당국이 약간의 보조금을 주는 대가로 부양가족이 없는 고아와 노인들에 대한 부양도 여성들에게 떠넘겼다. 18
식량을 찾아 쌀시리에 나서면서도 동원 사업에 나가야 했던 여성 노동자들의 건강은 망가질대로 망가졌다.2002년 7·1 조치로 북한 여성의 삶은 나아졌는가?
식량을 찾아 헤맨 고난의 행군 시기 이후 1999년 북한 경제는 파국에서 약간 벗어나는 듯했다. 그러자 북한 당국은 2002년에는 물가와 임금 인상, 인센티브제 도입, 배급제 폐지 등을 골자로 한 7·1 조치를 발표하기에 이른다. 이는 북한 당국 스스로도 1946년 토지개혁에 해당하는 사회경제적 파장을 내포한다고 설명할 정도의 전면적인 변화를 가져왔다.
배급제 철폐부터 살펴보자. 배급제는 배급 순번(당 중앙기관, 당 위원회 소속 구성원과 평양 중심 구역 거주 주민들이 1순위였고 일반 노동자들과 농민들은 4순위이다)이 있었을지라도 그 자체로 북한 주민들에게 중요한 복지 혜택이었다. 배급제 폐지가 북한 주민에게 미쳤을 충격을 가히 짐작할 수 있다. 배급제뿐 아니라 ‘명실상부하게’ 각종 보조금 제도도 폐지됐다(해산 보조금, 장례보조금, 의료보조금 등). 2002년 7·1조치 이후 ‘이밥에 고깃국을 먹게 해 주겠다’는 약속은 ‘공짜는 없다’는 표어로 바뀌었다.
북한 당국은 공식적으로 배급제와 사회보장제를 축소·폐지 하는 것이 아니라고 주장했다. 경제개선관리조치를 실시하더라도 “나라가 인민들의 생활을 책임적으로 돌보아 준다는 정책적 립장에는 조금도 변함이 없다”고 강조했다. 〈조선신보〉는 사회보장제가 완전히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무상치료제, 무료의무교육제, 사회보험제와 정휴양제, 영예군인 우대제 등의 시책들은 계속 시행할 방침이라고 보도됐다. 그러나 2002년 7월 25일 북한 외무성 제8국 서종식 부국장은 유럽 국가 대표들을 상대로 한 설명회에서 일부 사회보장제도는 그대로 유지될 수 있겠지만 나머지 국가 의존도는 낮춰 나갈 것임을 시사했다. 무상치료제 등 시책들도 일부는 불합리한 것으로 정리할 필요가 있다고 언급하기도 했다. 이런 일이 대홍수로 불가피했다는 것도 사실이 아니다. 소련 연방이 해체되자 북한 정권은 배급제 중단을 이미 준비하고 있었다. 실제로 많은 탈북자들은 중앙정부가 식량공급을 중단하고 자력갱생을 지시한 시기는 홍수 피해 이후가 아니라 대홍수 이전인 1995년 4∼5월경이라고 주장한다. 그래서 북한의 재난은 자연재해라기보다는 북한 당국의 의도적인 살인이라는 지적도 있다. 배급제뿐 아니라 각종 보조금 정책들이 폐지됐을 뿐 아니라 사회보장 조치들이 가족의 부담으로 전가됐다. 생계비 비중에서 이전 국가보장의 의료와 교육 등 사회보장 조치들이 가족의 부담으로 전가돼 이들 비용이 보통 가정의 지출 내역 가운데 큰 비중을 차지하게 됐다. 북한 정권은 배급제를 폐지하면서 그 대안으로 자력갱생을 강조했다. 물가를 올리지만 가계가 경제적으로 자립하도록 임금도 대폭 올리겠다는 계획이었다. 그러나 7·1조치로 임금이 올랐지만 물가는 더 올랐다. 물가는 25배, 임금은 18배 오른 것으로 추정된다. 특히 소비재 무상급부제도 폐지로 곡물 가격이 급상승했다. 노동자 사무원의 실질생계비에서 식량이 차지하는 몫은 2002년 조치 전에는 3.5퍼센트였다. 그러나 7·1 조치 이후로 그 비중은 50퍼센트로 늘어났다.
23 로 바뀌고 노동 인센티브도 확대됐다. 이는 필시 공장이나 기업소에서 근무하던 노동자들에 대한 착취율 제고로 이어졌을 것이다. 실제로 “긍정적인 물질적 인센티브도 확대 강화됐지만 부정적인 물질적 인센티브도 받게 됐다. 실적에 따라서 기본임금을 훨씬 웃도는 금액을 받을 수도 있지만 반대로 기본임금에 크게 미치지 못하는 액수를 손에 쥐게 되는 경우도 발생할 수 있게 됐다. 24
기업 경영실적에 대한 평가 방법도 ‘번 수입’ 지표무엇보다 주목할 점은 물가 인상을 밑도는 임금 인상조차 직종별로 차등적으로 이뤄졌다는 사실이다. 산업별로 볼 때 중화학공업의 평균 임금이 2329원으로 가장 높고 그 다음이 농림수산업 2162원, 서비스업 1760원, 경공업 1623원 순이었다. 경공업과 서비스업 분야의 평균임금이 가장 낮다.
25 7·1 조치 이전 1998년 기준으로 경공업 노동자의 평균임금이 중공업 노동자의 64퍼센트임을 감안하면 여전히 구조적으로 여성들은 남성들보다 낮은 임금을 감내해야 했다. 임금은 차등 인상되고 물가는 일률적으로 인상됨으로써 평균임금이 낮은 직종에서 종사하는 여성들이 생활 압박에 더욱 노출될 수밖에 없었다.
경공업 노동자 중 여성이 차지하는 비중은 약 70퍼센트이고 경공업의 평균 임금이 전 업종 가운데 가장 낮은 수준임을 감안하면 성별 임금격차는 1990년대 이후에도 결코 개선되지 않았다. 경공업 노동자의 평균임금은 중공업 노동자의 69.7퍼센트에 불과하다(7·1 조치 이전 북한 내부 자료와 한국무역협회 남북교역팀의 자료를 종합한 문헌에 따르면 1998년 기준으로 경공업 노동자의 평균임금은 중공업 노동자의 69.7퍼센트에 불과하다.각종 보조금과 사회보장책이 사라지고 임금보다 대폭 인상된 물가 때문에 여성들은 식량과 소비품을 조달하기 위해서 더욱 동분서주해야 했다. 일반 가정의 여성들이 장마당에 매달리게 된 주된 까닭이었다.
26 이는 생계형 장사를 하지 않으면 먹고 살기 어려운 북한의 보통 가정이 적지 않음을 보여 주는 사건이었다.
그러나 북한 정권은 장마당에 대해서조차 통제와 관리의 끈을 놓지 않으려 한다. 2007년에는 장사 나이를 제한하는 지침을 전국 종합시장까지 확대 적용하려 했다. 북한 당국은 2007년 하반기 들어 30세 이상, 40세 이상, 45세 이상으로 여성들의 장사 허용 나이를 점차 높이다가 2007년에는 50세로 대폭 높였다. 이 때문에 2008년 3월 4일에는 함북 청진에서 1만 명이 넘는 여성들이 집단 항의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5월에도 다시 많은 여성들이 집결하자 청진시는 시 노동국 명의로 시장을 열면서 나이 제한 조치를 해제했다. 노동당은 9일까지도 아무런 지침이 없다가 11일에 나이 제한에 걸린 여성들을 모두 공장이나 기업소에 배치하도록 물러서야 했다.‘장마당 경제’로 북한 여성의 삶은 나아졌는가? 그런데 일부 학자들은 장마당의 확산으로 북한 사회가 시장 중심 자본주의로 변화했고 그 변화로 여성들의 지위가 개선되고 있는 것처럼 분석한다. 실제로 고난의 행군 이후 장마당은 전국적으로 확대돼 2018년 현재 북한의 종합시장은 약 500여 개로 늘었다. 김정일 시대에 1개 군(북한지역의 군은 145개)에 2~3개 종합시장이 설치됐는데 김정은 시대 들어 군 단위에 종합시장 3~4개가 생겨났다. 하나의 종합시장을 둘러싸고 시장 이용료를 내지 않는 ‘메뚜기 시장’과 ‘골목시장’이 확대돼 시장의 규모는 확장됐고 하루 이용객이 수만여 명으로 늘어났다.
28 예를 들어 북한의 건설 노동자들은 사기업에 고용돼 있지 않다. 건물을 짓는 노동자들은 모두 군인들이다. 이 사실은 김정은 정권이 한미연합군사훈련을 그토록 반대하는 주된 이유와도 관련 있다. 한미연합군사훈련이 시작되면 군인들이 건설 현장에서 빠져 나와야 하기 때문에 건설 공사 기간이 늦춰지기 마련이다. 29 생산 부문을 포함한 북한 경제 전체로 보면, 국가가 직접 통제하거나 간접으로 영향력을 행사하는 영역이 여전히 압도적 비중을 차지한다. “1994년 이후 암시장이 확산되면서 비공식 부문이 팽창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암시장의 상품 거래는 주로 소비재 유통에 한정돼 있”다. 30
우선 이런 시장의 확대가 북한 경제의 소유 및 통제권의 변화를 가져왔는지를 살펴보자. 건설, 기계 제작, 금속 가공, 금속 기계, 제철, 전기 전자, 전력, 철도 등은 여전히 국가가 소유 및 운영하고 있다. 2000년대 북한의 〈로동신문〉에 보도된 북한의 업종별 기업체 2258개를 조사한 한 연구에 따르면 여전히 “기업에 대한 법적 소유 구조에는 큰 변화가 없”다.31 이는 북한의 경제시스템이 이중경제적 패턴으로 가고 있다는 일각의 지적 32 에 좀더 신중하게 접근해야 할 필요가 있음을 보여 준다. 유통의 영역에서 시장의 성장만으로 체제의 핵심 특징이 바꼈다고 보기는 힘들다. 생산에 대한 소유와 통제라는 측면에서 경제를 살펴본다면 북한은 여전히 ‘명실상부한’ 국가자본주의 사회라 할 수 있다.
그런데 이조차 북한 당국이 관리와 통제의 끈을 놓지 않고 있다. 최근 서울대학교 통일평화연구원의 북한사회 동향 자료에 따르면, “시장경제와 유사해지고 있다는 북한의 경제체제도 그 위력이 감소하는 것으로 보인다. 소매상에 대한 북한 정권의 관여와 관리가 강화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33 대체로 북한의 노동계급 여성들에게 가장 흔한 장사 유형은 보따리형이다. 장마당에 매대를 설치할 능력도 없는 여성들은 그저 보따리를 등에 짊어지고 전국을 돌면서 조금이라도 싼 물건을 사다가 비싼 지역에서 파는 식으로 생계유지형 장사를 하고 있다. 청진, 신의주, 혜산 등 북한의 도시 여성들에 대한 심층 면접을 바탕으로 한 연구에 따르면 “권력을 행사할 수 있는 계층은 공장 같은 데서 제품을 헐값에 뽑아 이윤을 많이 남기는 등 장사를 쉽게 할 수 있었다. 또한 식량공급이 비정상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는 시점에서도 간부들에게는 식량이 배급되어 이들을 남편으로 둔 여성들은 부업을 하지[도] 않았다.” 34
장사를 하는 여성들의 처지도 결코 평등하지 않다. 물건을 직접 만들거나 지방을 돌아다니며 장사를 하는 여성이 있는가 하면 남편의 지위를 이용해 장사를 하는 경우도 있다.35 서울과 지역 간의 격차만큼 또는 그 이상으로 평양과 다른 지역 간의 격차는 크다. 평양을 북한 사회의 주된 단면으로 이해해서는 곤란하다. “평양 사람들은 북한 체제의 모순을 참고 견디는 데서 얻을 것이 훨씬 더 많다. 수도의 거주민으로서 특권적 지위를 누리기 때문이다. 반면 함경북도와 양강도는 공공 배급제가 무너지기 시작했을 때 배급이 가장 먼저 중단된 곳이다.” 36 한 북한 전문가의 전언에 따르면, “평양과 지방의 차이가 더 벌어졌다. 이승과 저승이라고 해야 할 정도다.” 37 “상류층 주민들은 한국식으로 아파트 내부를 꾸미고, 가스를 취사연료로 사용하며, 다양한 가전제품을 구비하여 놓고 생활한다. 반면, 도시 빈민이 밀집해서 살고 있는 평양시 외곽지역의 단층집 지역은 전기와 상하수도 등 인프라가 매우 취약하다.” 38
같은 여성들이라도 계급적 처지가 달랐다는 얘기다. 이는 지역적 불균형과 양극화로도 나타났다. “혜산시 주민들은 국가에서 전기가 공급되지 않는 상황 속에서 자체적으로 중국산 ‘태양빛판’을 설치하여 개별적으로 태양광 발전을 해서 전기를 만들어서 써야 했다.”요컨대 공식경제에 속한 북한의 여성 노동자들은 성별 임금격차라는 차별에 노출돼 있고 비공식 경제에 속한 평범한 가정의 가내 여성들은 장마당에 매달리고 있다. 이들은 북한 주민들의 삶이라는 짐을 어깨에 짊어지고 있다. 그런데 이 짐을 계속 여성들에게 지우게 하려면 반드시 유지돼야 하는 ‘보루’가 있다. 바로 가족이다. 그리하여 북한 정권은 가족을 극한 고난 속에서도 체제 유지를 하는 데서 꼭 필요한 제도로서 더 강조하기 시작했다. 가족의 유대와 결속을 법적인 차원에서까지 명문화했다.
북한 당국의 조치들: 북한의 가족법 변화
부양의 의무를 가족에 전가하기 위한39 에서 언급한 바 있다. 남한에서 ‘남녀고용평등법’이 1987년 제정됐고 ‘북조선 남녀평등권에 대한 법령’이 1946년에 제정된 것을 감안하면 북한은 고용평등법 관련해서는 남한보다 무려 41년 앞섰다. 그러나 북한 여성의 법적 평등은 여성에 대한 실질적·사회적 평등 대우라기보다는 남성과 동등한 노동력 제공 의무가 있음을 천명한 것이다.
북한 지배층이 가족을 체제 유지에 어떻게 활용했는지는 전편의 글40 초유의 경제난, 식량난에도 불구하고 여성의 노고에 의해 가족의 생계가 가능할 수 있도록 법적 장치를 만든 것이다.
그런데 그 내용조차 1990년대 이후 변화하기 시작했다. 경제난과 식량난 때문에 가정이 해체되는 일이 빈번하게 벌어지자 북한 지배층은 가족법을 제정해 가족의 책임을 강화하기 시작했다. 실제로 주요 공업 도시인 청진과 신의주, 그리고 혜산을 중심으로 여성들의 의식을 분석한 연구에 따르면 경제난 이후 가정이 해체되는 경우가 빈번했다. 북한 당국이 1990년 10월 24일 제정 공표한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 가족법’의 내용은 이렇다. “가족을 사회의 기층생활단위로 인정하고 … 국가는 가정을 공고히 하는 데 깊은 배려를 돌린다”(제3조). 나아가 가정의 중요성을 크게 강조해 “가정을 공고히 하는 것은 사회의 건전한 발전을 취한 중요 담보”이다(제15조). 결혼과 이혼 등 가족의 성립과 해체에 대한 국가의 규제 수준을 강화했다. “결혼등록을 하지 않고 부부생활을 할 수 없다”(제11조). “의식주의 책임을 가족에게 전가하겠다는 북한 당국의 확고한 의지를 반영한다”는 지적이 무색하지 않다.42 개정헌법 제77조의 “녀자는 남자와 똑같은 사회적 지위와 권리를 가진다”는 내용과 “국가는 녀성들이 사회에 진출할 온갖 조건을 지어준다”는 구절은 유지됐다. 그러나 “녀성들을 가정일의 무거운 부담에서 해방하며”라는 문구는 삭제했다! 과거 국가가 보장했던 가사노동과 자녀 양육, 노인 부양 등의 책임이 1998년 헌법 개정에서 약화된 것과 대조적이게도 말이다. 43
1998년에는 아예 헌법을 개정했다. 북한 지배층은 가사노동과 자녀양육의 부담을 오롯이 여성들에게 짊어지게 하겠다는 의도를 법적으로까지 명문화했다.
만능 슈퍼우먼의 삶: 다산 강조와 낙태 불법화
선군정치와 김정은 정권이 강조하는44 에서 언급했듯이 인민의 필요를 상당히 희생시키는 방식일 수밖에 없다. 북한 당국은 인민 대중의 불만에 대해 늘 고심하면서도 기꺼이 이 방식을 고수했다.
1995년부터 시작된 북한의 선군정치는 2000년대 김정일 정권의 생존 전략으로 더욱 구조화되어 북한 체제 전체를 병영화했다. 물론 미국의 북한 고립화 정책(대북 제재)과 군사적 압박은 선군정치를 추진하는 근본 배경이다. 그러나 이를 미국의 압박만으로 설명하긴 곤란하다. 오래 전부터 미국·남한과의 군사 경쟁의 압력 속에 놓여 있던 북한은 건국 초기부터 군사력 증강을 위한 국가자본주의적 발전을 추진해 왔다. 그런데 이는 전편의 글45 특히 북한의 노력 영웅이었던 리순금의 말은 선군정치 시기 북한 여성에 대한 북한 지배층의 생각을 단적으로 보여 준다. “기혼 여성은 자식을 소위 ‘혁명의 3세대, 4세대로 키워 군대로 보내 군인가정화’의 주역이 되어야 하고, 준전시 상황에서 헌신적이고 이악스러운 생활과 노동으로 가족의 생존과 사회 재생산을 책임져야 한다.” 46
그래서 선군정치 시기에 북한 당국은 여성들에게 준전시 상황에 걸맞는 헌신적인 책임을 강요했다. “인민군 군인들이 살림살이 기풍을 본받아 자기가 사는 집과 마을, 공장과 일터를 선군시대의 맛이 나고 정신이 번쩍 들게 꾸려야” 한다.준전시 상황에 걸맞는 책임으로 북한 지배층이 강조한 것은 ‘다산’과 ‘원호 사업’이다. 이 강조점은 《조선녀성》에 잘 표현돼 있다. “오늘 자식을 많이 낳아 훌륭히 키워 조국 앞에 내세우는 것은 선군시대 우리 녀성들의 본분이며 숭고한 의리이다.”(《조선녀성》, 2006년 3월, p34). “모든 어머니들이 그러하듯이 저도 아들 셋을 낳아 어떻게 하나 조국이 바라는 훌륭한 역군으로 키우리라 마음 먹었습니다”(《조선녀성》, 2009년 1월, p41), “저는 앞으로 모든 노력과 정성을 다 기울여 우리 6남매를 당과 수령께 끝없이 충직한 혁명가들로 위대한 김정일 장군님의 참된 병사들로 키워냄으로써 선군시대 어머니의 본분을 다해 나가겠습니다.”(《조선녀성》, 2009년 2월, p40). “낮에는 낮대로 려명위원장 사업을 하고 밤에는 밤대로 쉬지 않고 밭을 일구었고 짬짬이 집짐승도 길러 다섯 자식이 튼튼히 자라도록 애썼다”(《조선녀성》, 2006년 3월, p34). “군대 원호 사업을 잘 하고 있는 가정이 최고의 가정이다”(《조선녀성》, 2004년 4월, p24).
한마디로 선군시대에 가장 바람직한 여성으로 북한 지배층이 강조하는 여성은 될수록 아이를 많이 낳고, 자녀교육에 힘쓰고, 남편 내조와 부모 봉양에 힘쓸 뿐 아니라, 군대 지원 노력봉사에도 열심인 여성이다. 이쯤 되면 만능 슈퍼우먼이다. 이는 김정은 정권에도 이어지는 여성정책의 방향이다. 이런 방향은 2014년 〈로동신문〉 사설에 잘 표현돼 있다. 만능 슈퍼우먼을 북한 당국의 말대로 옮기면 ‘선구자적 여성’이다. 선구자적 여성이라는 표현은 〈로동신문〉이나 《조선녀성》에 정말 자주 등장한다. 〈로동신문〉 7월 30일자의 1면 사설은 남녀평등권 법령 공표 68주년을 맞아 여성이 사회와 가정 모두에서 “선구자적 역할을 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모든 지혜와 열정을 다 바쳐 조국의 힘찬 전진을 위해 기적과 위훈을 창조”할 뿐 아니라 “어머니로서, 아내로서, 며느리로서 가정과 사회 앞에 지닌 도덕적 의무와 책임을 다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게 바로 북한식 슈퍼우먼 여성상이다. 그리고 여성평등과 모성보호라는 이름 하에 여성들에게 부양과 돌봄의 책임을 전가하는 셈이다. 이는 1936년 스탈린 정권이 ‘모성 및 아동보호’ 법령의 이름으로 다산한 어머니들에게 훈장을 주고 독신자들에게 특별세 제도를 도입했던 소련 국가자본주의의 과거를 떠올리게 한다. 트로츠키는 그 법을 “반反여성법”이라고 불렀다. 사회 진보가 여성의 상황에 의해 측정될 수 있다면 그 사회의 퇴보도 똑같은 기준에 의해 측정될 수 있다. 트로츠키는 “소련에서 가족 문제와 관련하여 일어난 잇따른 변화들은 소련 사회의 실제 성격과 지배계층의 변천을 가장 잘 보여 준다”고 지적했다.
48 그러나 당연하게도 식량난 이후 북한 여성들은 더욱 출산을 회피하고 있다.
다산에 대한 강조는 김정은 시대에도 계속 이어지고 있다. 북한 당국은 1970년대까지는 다산을 강조했다. 그러나 경제 위기기 심각해지자 1970년대 중반 이후 출산 억제 정책을 취했다. 1983년에는 잠시 낙태 수술을 공식화하기도 했으나 출산율이 급격하게 감소 추세로 접어들자 1990년대 이후에는 군사력을 유지하기 위해서라도 출산율을 걱정하지 않으면 안 되는 처지가 됐다. 북한 인구는 감소하고 있다. 1998년대 이후부터 0퍼센트대를 나타내고 있다.49 안전하지 않은 낙태 수술로 많은 북한 여성들은 고통 받고 있다. 식량난 및 경제난 악화로 의료품 보급이 안 되고 출산율 향상을 위해 병원에서 피임시술이나 중절수술마저 금지하자 피임기구를 중국에서 몰래 구입해서 중절을 시도해서 심각한 후유증에 시달리는 경우도 많다. 50
김정은 시대에는 어린이를 8명 이상 출산하는 여성에게 ‘노력영웅’ 칭호를 부여했다. 북한 당국은 다산 여성들을 따라 배울 것을 권고하고 가임기 여성들에게 피임과 낙태수술을 금지한다(자녀가 5명 이상이거나 간염이나 결핵 같은 질병을 앓고 있는 환자를 제외하고는!). 북한 당국은 낙태 수술을 하는 의사를 강하게 단속하기 시작했고 위험 부담이 커진 의사는 수술 비용을 크게 올려서 수술을 하고 있다. 의약품 무료 공급이 잘 되는 병원은 중앙당 간부가 주로 이용하는 평양적십자병원과 김만유 병원, 평양 의대병원 정도이다. 중앙당 핵심 간부만 갈 수 있는 봉화진료소는 돈이 아무리 많아도 일반 주민은 갈 수 없다고 한다.51 더 심각한 점은 콘돔 같은 피임 기구를 쉽게 구입하기도 어렵다는 사실이다. 핵 미사일을 만드는 나라에서 있을 법하지 않는 어처구니없는 상황이다. “중국에 가서 콘돔이 있다는 것을 처음 알게 되었다”는 북한 이탈 여성들의 증언은 전혀 새롭지 않다. 52 여성들은 주로 거주지 병원에서 무료로 배급하는 루프를 사용해 피임을 해 왔는데 10년 이상 사용해 심각한 질환을 일으키는 경우가 많다. 〈2002년 재생산건강조사 보고서〉에 따르면 리 단위에서는 피임약을 거의 이용할 수가 없고 콘돔 사용도 1997년 0.4퍼센트에서 5.8퍼센트로 증가한 수준이다.
낙태가 불법화됨에 따라 위험한 수술에 노출되는 여성들이 갈수록 늘고 있다. 역설적이게도 낙태는 북한에서 ‘의료서비스 접근에서의 평등을 다루는 조항’(12조)에 포함돼 있다. “낙태는 산모의 생명이나, 신체적 정신적 건강이 위험하거나 태아 기형인 경우 여성의 요구에 따라 시행된다.”53 섹슈얼리티의 자유도 한층 더 억압되고 있다. 2013년 북한의 게이그룹이 적발돼 이 그룹에 포함된 이들이 사형과 출당, 추방, 노동교화 등의 처벌을 받았다는 증언은 섹슈얼리티 억압이 어느 정도인지를 보여 주는 빙산의 일각일 뿐이다. 54
다산 강조, 낙태 불법화, 가정과 사회에서의 슈퍼우먼 강조는 결국 여성들의 건강권을 침해하고 성적 자유를 억압할 수밖에 없다. 사실 무상의료가 더 이상 북한에서 작동하지 않는 상황에서 북한 여성의 건강권은 더욱 악화되고 있다. 서울대학교 통일평화연구원의 북한사회 동향 자료에 따르면, 북한 지도층을 대상으로 한 무상의료는 70퍼센트 넘게 작동되지만 여성, 장애인, 노인들은 10퍼센트 미만으로 작동되고 있다. 여성, 장애인, 노인들이 의료보장에서 상당히 소외되고 있다는 통계였다.대북 제재가 북한 여성들에게 미친 영향 오늘날 북한 여성의 삶은 제국주의라는 요인을 빼놓고는 설명할 수 없다. 대북 제재는 현재 북한 주민들의 삶의 질을 좌지우지하는 강력한 요인이다. 제재로 인해 군대뿐 아니라 민간에 필요한 ‘겸용’ 제품들이 북한에 들어가지 못한다. 의료의 필요성이 중차대한 나라에서 상당수 화학제품의 수입 금지는 제약 공장의 생산 중지를 뜻한다. 탄도미사일 기술 공장에 사용되는 알루미늄을 추출할 수 있는 몇몇 합금의 수입 금지로 인해 주민들의 주요 이동 수단인 스쿠터 제작이 중단될 것이다.
15년 전부터 북한 결핵 치료를 지원한 미국의 유진 벨 재단은 제재안 결의가 발표된 다음날, 의약품 인도 중지를 규탄하면서 이 조치가 단 2주 만에 환자 수천 명에게 치명적 결과를 낳을 것이라고 경고한 바 있다.
56 북한의 저체중 영유아의 비율은 남한 영유아의 10배에 달하는 수준이다. 이 모든 현실은 대북 제재가 낳고 있는 비극이다. 57
유엔이 13년 동안 단행한 이라크 경제 제재가 이를 입증한다. 경제 제재 기간 동안 총 1백만 명이 넘게 사망했고, 그중 절반인 50만여 명은 아동이었다. 이미 북한은 콜레라·장티푸스·결핵의 증가 때문에 큰 몸살을 앓고 있다. 북한판 직장 어린이집 격인 협동농장 탁아소는 전염병 위험에 노출될까봐 조금이라도 아픈 유아들의 출입을 막고 있다. 미국의 대북 제재 때문에 의약품이 들어가지 못해서 벌어진 결과다. 세계은행이 발표한 2016년 세계개발지수를 보면, 2015년 기준 북한의 신생아 출생 10만 명당 산모의 사망자 수는 82명이다. 한국이 11명인 것을 감안하면 모성보건 수준은 열악하다. 열악한 의료 상황 때문에 부인성 질환 치료에 빙두를 비롯한 마약류가 사용되고 있다는 증언도 많다.미국은 중국을 비롯한 경쟁자들을 압박할 용도로 북한 주민들의 삶을 볼모 삼아 왔다. 대북 제재는 제국주의의 사악함을 증명하는 리트머스 시험이기 때문에 대북 제재 반대에 약간이라도 침묵하는 어정쩡한 태도를 보여서는 곤란하다.
그렇다고 남한이 더 나은 것도 아닌
남한보다 더 나을 것도 없고북한 사회에 대한 ‘사회주의 가부장제’ 규정은 적절한 것이 못 된다. 사회주의가 노동자가 생산을 통제하는 사회를 뜻한다면 북한은 사회주의와는 무관한 사회다. 또한 북한을 가부장 사회라고 표현하는 것 또한 피상적인 분석이다. 가부장제는 자본주의와는 구분되는 여성 억압 구조로서 “여성에 대한 남성 지배”를 뜻하는데, 북한 사회를 가부장 사회로 묘사하면 북한 여성 억압의 뿌리로서 북한 국가자본주의의 동학을 규명하기 어렵다. 남북한 사회에서 가족은 희생과 부양의 공간으로서 자본주의를 유지시키는 구실을 했다. 그 과정에서 여성은 한때는 산업역군으로 그러나 경제 위기 때에는 해고 1순위로 가정으로 다시 돌려 보내졌다. 1980년대 북한에서 그랬고 IMF 위기 때 남한에서 그랬다.
60 동일노동 동일임금의 원칙이 천명되지만 남북한 여성 모두 상대적으로 사회적 평가가 낮은 직장에 배치돼 차별적 지위와 차별적 임금을 감수해야 했다.
남북한의 여성 모두 가정도 돌봐야 하는 압력과 부담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남녘과 북녘의 여성들 모두 취업 곡선에서 M자형을 나타냈다. 오히려 남한의 M 곡선의 낙차폭이 더 크다(남한은 60퍼센트, 북한은 80퍼센트). 그렇다고 북한 여성들이 기뻐할 일도 아니다. 이는 여성들이 생계를 책임지지 않으면 가족 생계가 유지되지 못하는 북한의 현실을 반영한 것이기도 하다.61 교육기회 불평등, 62 높은 이혼 문턱, 63 낙태 불법화, 안전하지 않은 피임, 모자라는 출산휴가 등은 남북한의 평범한 여성들이 부딪히고 있는 한반도 자본주의의 현실이다.
그런데도 가정폭력, 직장 내 성희롱,64 그러나 남녘과 북녘의 많은 여성 노동자들은 이런 현실에서 해방될 미래를 꿈꾸고 있다. 북한 이탈도 북한 체제에 부적응해서가 아니라 고통스런 현실에서 벗어나기 위한 한 몸부림 65 이다. 북한 이탈 주민 가운데 70퍼센트가 여성이고 대부분이 함경도 출신인 까닭이다.
북한의 시장 개혁을 바라는 일군의 학자들은 자본의 입맛에 맞는 북한의 미래를 꿈꾼다.남녘과 북녘 모두에서 국가자본주의와 “시장 개혁”은 평범한 여성들에게 고통이었다. 자본주의의 고통에서 벗어날 더 나은 미래를 바라는 남녘과 북녘의 여성들은 어깨 걸고 함께 투쟁할 자매이자 동지이다. 남북 여성 노동자들의 두 어깨에 지워진 이중의 굴레를 벗겨내려면 남북 노동자들의 단결과 연대, 그리고 진정한 사회혁명이 승리해야 한다.
주
- 김어진 2018. ↩
- 박영자 2017, p507. ↩
- 권수현 2010, p22. ↩
- 전업주부를 북한에서는 가두여성이라고 부른다. 북한에서 가두여성은 25세 이상 여성 가운데 50퍼센트 정도다(김귀옥 2002, p56). ↩
- 8·3 인민소비품은 연로자, 가정주부 등이 폐기 폐설물 등의 원료를 이용해서 만든 생산제품이다. 김정일이 1984년 8월 3일에 지시한 것을 계기로 이와 같은 이름이 붙여졌다. ↩
- 문장순 2010, p141. ↩
- 김일성, 1987, pp173-174. ↩
- 북한 노동당의 외곽 단체인 여맹은 1945년 11월 18일 북조선민주여성동맹으로 창립됐다. 창립 당시 여맹은 당초 18세 이상의 모든 여성이 가입 대상이었지만 1983년 5차 대회 이후 30세 이상의 전업주부 모임으로 바뀌었다. 북한 여맹원들의 활동은 두 차원에서 이뤄진다. 첫째는 정치행사 참여 및 사상 교육이다. 여맹은 주체사상 교양, 강반석 여사 따라 배우기, 집단주의 정신 교양, 어머니 학교를 운영하면서 사상 교육과 동원활동을 전개했다. 둘째 노동력 동원 사업이다. 여맹은 농촌 근로 동원, 도로 보수 공사, 거리 청소 등 소위 공공근로 활동에 무보수 노동력을 조직하고 동원했다. 이는 의무사항이었다. 그래서 시장에 나가느라 동원에 불참하는 일이 발생할 경우 벌금으로 돈을 내야 했다. 여맹은 1983년 이후부터 가입 기준을 바꾼다. 만 18세 이상의 여성이면 모두가 가입해야 하는 조건에서 가두여성과 경제활동을 하지 못하는 여성 노인들로 가입 기준을 바꾼다. 사경제 활동에 참여하는 여성들을 지속적으로 관리하기 위해서였다. 1980년대부터 악화된 경제 상황 때문에 북한 여성들을 동원 관리할 필요성이 중요해졌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여맹은 북한 지배층의 이해관계를 도모하는 일종의 관변단체라 할 수 있다. ↩
- 박영자 2017, pp545-547. ↩
- 김귀옥 2002, pp60-61. ↩
- 북한의 기후와 풍토에 맞게 제한된 경지면적에 최대한의 성과를 거두기 위한 농법으로, 대표적인 것으로는 작물을 심을 때 간격을 촘촘하게 심어 소출을 늘리는 밀식(密植) 농법이 있다. ↩
- 정은이 2011, p218. ↩
- 박희진 2006, p106. ↩
- 박영자 2017, p536. ↩
- 김정일 1996, pp160, 171. ↩
- 문장순 2010, p137. ↩
- 심영희 2006, p167. ↩
- 임혜란·이미경 2009, p365. ↩
- 고려대학교 기초학문연구팀 2005, p199. ↩
- 김병로 2016, p242. ↩
- 양옥경·이미경 2010, p205. ↩
- 양문수 2010, p55. ↩
- 수익을 분명하게 기록하고 보고할 수 있게 하는, 일종의 기업의 재무제표 같은 것이다. ↩
- 양문수 2010, p35. ↩
- 고려대학교 기초학문연구팀 2005, p195. ↩
- 〈연합뉴스〉 2008년 3월 26일 보도(조희원, 2008, p87에서 재인용) ↩
- 박영자 2018a. ↩
- 이석기 2014, p218. ↩
- 진천규 2018. ↩
- 김연철 2001, p403. ↩
- 서울대학교 통일평화연구원 2018, p89. ↩
- “북한의 경제시스템은 지난 20여 년 동안 계획과 시장 경제가 공존하면서도, 군수산업은 계획경제 주민생활은 시장경제라는 식의 이중경제적 패턴을 드러냈다.”“계획과 시장이 공존하던 경제시스템의 질서와 무질서 양상이 동시에 확산되고, 과거의 질서가 요동치며 혼돈상태가 진전되고 있다. 계획시스템의 비효율성 대 시장시스템의 확산, 계획주체의 대중동원 대 시장주체의 자발성, 공적 부조의 결여 대 사적 부조의 강화 등.”(박영자 2015, p342) ↩
- 조영주 2014, pp305-207. ↩
- 이미경·구수미 2004, p195 ↩
- 조정아·최은영 2017, p111. ↩
- 튜터·피어슨 2018, p245. ↩
- 박영자 2018b, p79. ↩
- 조정아·최은영 2017, p194. ↩
- 김어진 2018. ↩
- 이미경·구수미 2004, p175. ↩
- 남성욱 외 2017, pp29-30. ↩
- 조희원 2008, p86. ↩
- 김석향·박정란 2010, p173. 여성들의 부양 책임은 《조선녀성》에서도 매우 반복적으로 등장한다. “늙은 부모들이 여생을 값있게 보대로록 잘 봐주는 것도 녀성들이며 남편이 혁명사업을 잘 하도록 적극 도와주고 받들어 주는 것도 안해이며 녀성들이다”(《조선녀성》 1999년 3월호 p15). ↩
- 김어진 2018. ↩
- 리경림 2006, p43. ↩
- 박영자 2017, p528. ↩
- 로젠버그 1991, p102. ↩
- 최은봉·박현선 2010, pp238-240. ↩
- 주성하 2018, pp258-259. ↩
- 임순희 2006, p355. ↩
- 도경옥 외 2016, p66. ↩
- 한소희 2017, p25. ↩
- 서울대학교 통일평화연구원 2017, p97. ↩
- 같은 책, p298. ↩
- 모리요·말로비크 2018, p166. ↩
- 김아영 2018. ↩
- 서울대학교 생활과학연구소 2007, p131. ↩
- 도경옥 외 2016, p32. ↩
- 임혜란·이미경 2010, p378. ↩
- 이윤진 2016, p8. ↩
- 북한에 ‘간부절단기’, ‘무지개’, ‘깔개’라는 말이 있는데 이는 간부들의 성폭행을 비유한 은어다(한국정치학회 여성정치연구위원회 2001, p181). ↩
- 대학 진학이나 유학 등 고등 교육과정에서 각 대학은 여학생 입학 비율을 30퍼센트 이하로 한정하거나 유학생 선발에서 여성을 제외시키는 등의 방식으로 여성의 교육 기회를 암묵적으로 제한하고 있다(남성욱 외 2016, p34). ↩
- 북한에서는 이혼을 하면 주로 여성이 아이를 맡고 남편은 생활비를 대도록 규정하고 대체로 지켜진다고 한다. 이혼 판결 때 자녀의 양육문제, 부부 합동재산의 분배, 이혼 후 배우자간 부양의무에 관한 문제 등이 재판관에 의해 판시된다. 가족법 제23조는 양측의 합의에 의해 자녀 문제가 합의되지 않을 경우 특별한 사유가 없는 한 3세 미만의 자녀는 어머니가 양육하도록 하고 양육비는 자녀 수에 따라 월수입의 10~30퍼센트 범위에서 지불될 수 있도록 재판소가 정하도록 명시한다. 이혼 후 자녀 양육 권리와 의무 면에서 보자면 남한은 북한에 비해 열등하다(권영경 1999, p112). ↩
- 한 북한 전문가 그룹은 이렇게 말한다. 북한에 대한 투자가 “과도해 북한의 임금을 상승시키고 이로 인해 북한 제품의 가격경쟁력이 약화되는 것을 피해야 하고” 남북한의 “노동이동의 완전 자유화는 북한의 체제 이행이 완료된 이후 실행에 옮”겨야 할 미래의 일도 아니며, “한국 정부는 정확한 판단 아래 사유화 대상 기업과 매각 파산시킬 기업을 선별”해야 한다. ↩
- 탈북 과정에서 많은 북한 여성들이 목숨을 걸어야 하는 이유는 중국 제국주의 때문이기도 하다. 중국은 북한 노동자들이 탈북할 경우 공안이 개입해 직접 색출하고 강제로 북송시키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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