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 혁명 100주년
1918년 11월 9일 독일 혁명을 기억하라 *
1918년 11월 독일을 휩쓸었던 혁명이 일어난 지도 이제 한 세기가 됐다. 영국에서나 혁명이 벌어진 독일에서나 이 사건은 별 언급 없이 지나갈 성싶다. 하지만 마르크스주의자로서 이 사건은 곱씹어 볼 게 많은 20세기의 전환점이었다. 많은 핵심 교훈들 중에서 세 가지를 꼽으면 다음과 같다. 개혁이냐 혁명이냐 하는 문제, 소비에트 러시아의 운명, 그리고 노동자 평의회냐 의회 민주주의냐 하는 문제.
개혁이냐 혁명이냐 1917년 러시아 혁명이 벌어지기 전까지 독일은 전 세계 마르크스주의의 부인할 수 없는 중심이었다. 강력한 독일 사민당SPD은 본받아야 할 조직이었고, 이른바 “마르크스주의의 교황”이었던 카를 카우츠키는 그 당의 주도적인 이론가였다. 또한 독일에서는 진보가 점진적 변화를 통해 성취될 것인가 아니면 자본주의의 전복을 통해 성취될 것인가를 두고 매우 중요한 논쟁이 벌어졌다. 로자 룩셈부르크가 자신의 소책자 《개혁이냐 혁명이냐》에서 에두아르트 베른슈타인의 “수정주의”를 비판했던 1900년에 이 논쟁이 시작됐다.
2 이런 중간주의적 입장은 자본주의가 평화롭고 중단 없는 발전을 이루고 미래의 어느 시점에 사회 변혁이 저절로 벌어질 때까지 사회주의의 초기 세력들(사민당과 그 노동조합들)이 성장할 것이라고 가정한다. 심지어 카우츠키는 이 시나리오대로 사태가 전개될 것임을 입증하는 이론을 발전시키기까지 했다. 자본주의는 “군비 경쟁과 세계 평화에 대한 위협” 단계에서 “그 다음 단계, 즉 초제국주의”로 옮아가고 있다는 것이다. 3 믿기 힘들겠지만 이런 주장을 담은 그의 글이 제1차세계대전이 벌어지기 한 달 전인 1914년 9월에 발표됐다.
베른슈타인도 룩셈부르크도 결정적 승리를 거두지 못했다. 널리 알려진 견해는 카를 카우츠키가 가장 잘 표현했는데, 그는 이렇게 썼다. “독일 사민당은 혁명적 정당이지만 혁명을 일으키는 정당은 아니다. 우리의 목표는 혁명을 통해서만 성취할 수 있다는 점을 알고 있다. 또한 우리는 우리의 적들이 혁명을 막을 힘을 갖고 있지 않듯이 우리도 혁명을 창조할 힘을 갖고 있지 않다는 점을 잘 알고 있다. 혁명에 착수하거나 혁명의 길을 준비하는 것은 우리의 역할이 아니다.”뒤이어 벌어진 전쟁의 대규모 파괴가 전선에서는 대량 살육을 초래했다. 독일 국내에서는 노동자들이 사실상 기계에 묶여 육체적 한계에 이를 때까지 일을 했다. 전쟁이 발발하자, 사민당 지도부는 전쟁이 벌어지면 이에 반대하는 대중파업을 조직하겠다는 약속을 내팽개치고 전쟁에 반대하는 세력을 모두 탄압하는 황제의 모든 조치들(끔찍한 계엄령 같은 것들)을 지지함으로써 경멸스런 역할을 수행했다.
4 폭력은 실패했지만 그는 성공했다.
러시아에서 볼셰비키의 지도 하에 소비에트(노동자 평의회)가 의식적으로 시작하고 준비한 1917년 10월 봉기야말로 카우츠키의 주장들을 논박하는 것이었지만, 그 전에조차 러시아의 사태들은 독일에 영향을 미쳤다. 1917년 2월 러시아에서 차르가 물러난 지 두 달 뒤에 독일 라이프치히의 노동자들이 배급 삭감에 항의하는 파업을 벌였고, 이내 자신들의 노동자 평의회를 세웠다. 뒤이어 베를린에서 노동자 20만 명이 일을 멈췄다. 체포가 불길을 잠재우는 듯했지만 1918년 1월에 다시 불이 붙었다. 물가 상승률이 400퍼센트인데다 참을 수 없는 노동 조건 때문에 베를린에서 숙련 기계공 대략 40만 명이 작업을 중단하고 414명으로 구성된 노동자 평의회(대의원 1명당 노동자 1000명을 대표)를 구성했다. 이들의 요구는 경제적 개선과 평화였다. 이번에는 경찰과 군대가 파업 노동자들의 결의를 분쇄할 수 없었다. 바로 이때 사민당 지도자인 프리드리히 에베르트가 “나라가 망가는 것을 막기 위해 파업을 서둘러 종결시키려는 명확한 의도를 갖고 파업 지도부에 결합했다.”이 사건은 개혁주의와 혁명[적 정치]의 차이를 명확하게 보여 줬다. 1918년 11월 이전까지만 해도, 차르 전제정의 결과로서 러시아에서 벌어진 사태[혁명]가 독일에서는 가능성이 크지 않고 “문명화된 서구”와는 별 관련성이 없는 일이라는 주장이 영 허튼소리가 아닐 수 있었다. 1918년 11월 2일 킬Kiel의 수병들이 반란을 일으키며 대중이 억눌린 불만을 터뜨렸을 때 이런 견해는 산산조각 났다. 그 때부터 봉기가 급속히 확산되면서 곳곳에서 노동자·병사 평의회가 건설됐다. 11월 9일 봉기의 물결이 베를린을 덮쳤을 때 카이저[황제라는 뜻] 정부가 무너졌다. 이 사건은 이틀 뒤 제1차세계대전을 종식시켰다. 독일 혁명은 역사상 가장 성공적인 평화운동이었던 것이다.
변화 과정이 러시아에서 먼저 시작했을지라도 독일[혁명]은 개혁이냐 혁명이냐 하는 문제를 유럽의 주변부에서 중심부로 옮겨 놓았다. 또한 독일 혁명은 혁명가들과 개혁주의자들의 정치적 분리의 기초를 전 세계적 차원에서 확립했다. 볼셰비키는 더는 혼자가 아니었고 공산주의 제3인터내셔널을 세울 수 있는 기초를 얻었던 반면, 제2인터내셔널은 사회민주당들을 계속 대표했다.
소비에트 러시아의 운명
제1차세계대전이 독일에 미친 영향과 1917년의 볼셰비키 혁명이 제공한 영감 덕분에 독일 혁명이 일어났다. 이제는 거꾸로 볼셰비키 혁명의 운명이 독일에서 혁명의 궁극적 성공에 매우 크게 달려 있었다. 1917년 러시아 프롤레타리아는 260만 명 정도였다. 이들 모두는 근대적 생산의 집단적 성격 때문에 사회주의를 성취하는 것에 공통의 이해관계가 있었다. 하지만 러시아를 따로 떼어 내 본다면 노동자 계급은 1억 명이 넘는 농민들에 둘러싸여 있었다. 농민들은 개별 생산자로서 프티부르주아였다. 그래서 볼셰비키의 진보적 목적을 이루려면 유럽의 선진 경제로부터의 지원이 필수적이었다. 〈프라우다〉의 편집자 니콜라이 부하린은 이렇게 지적했다. “러시아 혁명의 궁극적 승리는 국제 프롤레타리아의 승리 없이는 생각할 수조차 없다.”
독일은 이런 점에서 매우 중요했다. 1918년 3월 카이저 정권은 전쟁을 중단하는 대가로 러시아에게 브레스트-리토프스크 조약을 강요했다. 이 때문에 러시아는 78만 제곱킬로미터의 땅, 5600만 명의 인구, 나라 전체 철로의 3분의 1, 철강석의 73퍼센트, 석탄 산출량의 89퍼센트를 잃었다. 더욱이 독일 혁명이 제1차세계대전을 종식시킨 뒤로 러시아는 자본주의 반혁명의 군사적 표적이 됐다. 14개국이 이전의 러시아 지배계급이 시작한 내전에 호응하여 개입했다.
독일에서 사회주의 혁명이 성공한다면 세력균형을 바꿀 수 있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렇게 되지 않았다. 볼셰비키는 살아 남았지만 끔찍한 대가를 치렀다. 1921년 러시아의 수입량은 180분의 1로 수출량은 2000분의 1로 줄어들었다. 안 그래도 인구의 소규모였던 노동자 계급은 절반 이하로 줄어들었다. 내전에서 승리하기 위해 볼셰비키는 위로부터의 엄격한 명령 경제를 실행했다. 이것은 아래로부터의 소비에트 민주주의의 종식을 의미했고, 사기 저하되고 원자화된 산업 프롤레타리아와 농민을 지배하는 500만 명 남짓의 관료로 구성된 거대한 국가를 남겨 놓았다.
헝가리와 중국 같이 러시아에서 좀 떨어진 나라들에서 혁명적 분출이 있었지만 러시아를 고립에서 벗어나게 할 만한 전망이 보인 것은 잠깐뿐이었다. 의심할 여지 없이 최상의 기회는 강력한 산업 노동인구와 선진 경제를 지닌 독일에 있었다. 1929년이 지나서야 스탈린주의 반혁명이 국가자본주의 독재의 행태로 최종 승리했다. 하지만 스탈린주의의 기원은 혁명적 마르크스주의나 레닌주의에서의 내적 오류가 아니라 국제 혁명의 실패에 있었다.
노동자 권력과 의회주의적 민주주의
또 다른 의미에서도 독일은 제1차세계대전 이후 마르크스주의에게 가장 중요한 곳이었다. 트로츠키는 1905년 러시아 혁명 직후에 쓴 《평가와 전망》에서 한 장의 제목을 “러시아 역사 발전의 특수성”이라고 달았다. 이 때 “특수성”은 유럽의 기준에서 본 일탈을 의미했다. 1905년 혁명으로 러시아에서 두마[제정 러시아의 의회]가 설립됐다. 하지만 두마는 부르주아지의 기준으로 볼 때조차 매우 비민주적이었다. 두마는 독일 제국의회가 지닌 상대적 합법성조차 결여하고 있었다. 독일 제국의회는 1871년부터 성인 남성의 보통선거를 실시했다. 독일은 수십 년 동안 합법 노동조합이 있었지만 러시아에서는 혁명이 벌어진 후에야 노동조합이 작동할 수 있었다. 개혁주의인 멘셰비키와 혁명적인 볼셰비키가 비밀리에 활동할 수밖에 없었지만 독일에서 사민당은 1875년부터 존재했고, 1890년부터는 합법적으로 활동했다.
독일에서와 마찬가지로 러시아에서도 대중적 개혁주의(멘셰비키와 사회혁명당)와 의회(제헌의회)가 있었지만, 그것들은 주로 1917년 2월 혁명 이후에 등장했다. 그래서 노동자 계급을 더 급진적인 입장으로 설득하기가 비교적 쉬웠다. 차르의 탄압 때문에 개혁주의의 뿌리는 얕았고 소비에트 조직은 강력했다. 개혁주의 전통의 깊이나 조직적 강력함으로 볼 때 독일 혁명가들이 대중을 설득하기는 더 힘들었다.
1918년 11월을 앞둔 과정에서 그 차이들이 분명해졌다. 사민당이 전시에 정부에 협조하면서 위기를 초래했고, 결국 분열했다. 사민당에서 분열한 다수파는 중간주의 성향의 독립사민당을 창당했다. 카를 리프크네히트는 로자 룩셈부르크와 함께 스파르타쿠스 동맹의 지도자가 됐다. 레닌의 볼셰비키는 1903년 러시아 사회민주당이 분열했을 때 다수파였지만 리프크네히트는 1914년 전쟁 시작에 반대표를 던진 유일한 국회의원이었고, 스파르타쿠스 동맹은 경합하는 세 경향 중 가장 작은 집단이었다는 사실은 독일 혁명가들이 직면한 험난한 투쟁들을 보여 주는 징표였다.
그렇지만 리프크네히트의 전쟁 반대 입장은 결정적이었다. 그는 전국적으로 많은 인기를 얻고 있던 저명한 인물이었다. 하지만 스파르타쿠스 동맹은 신생 조직이었기 때문에, 혁명이 발생하기 전에 투쟁적 노동자 계급과의 두터운 유기적 관계를 발전시킬 기회를 갖지 못했다. 스파르타쿠스 동맹이 1915년에 호소한 두 번의 시위에 각각 150명과 1500명이 참가했다. 하지만 대중이 급진적 행동을 보일 잠재력은 분명히 존재했다. 우리가 보았듯이, 11월 혁명은 개혁주의 정치인들과 노동조합 지도자들을 공공연히 거부하던 일련의 거대한 정치 파업 뒤에 찾아 왔다. 베를린에서 이들은 현장조합원 운동 — 혁명적 오블로이테 — 으로 불렸다. 이런 현장조합원 조직이 러시아에서는 없었는데, 노동조합 관료가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오블로이테의 첫 번째 파업에는 5만 5000명이 참가했는데, 1916년 메이데이 때 전쟁 반대 연설을 했다는 이유로 리프크네히트가 체포된 것에 항의하기 위한 파업이었다. 앞에서 말한 파업들 — 1917년 20만 명, 1918년 1월 40만 명 — 도 모두 오블로이테가 조직했다.
11월 혁명이 베를린에 다다랐을 때 혁명적 정치 지도부와 현장조합원 운동 사이에는 상호작용이 있었다. 11월 혁명 직전에 풀려난 리프크네히트는 오블로이테와 함께 봉기를 계획했다.
즉시 권력 문제가 제기됐다. 11월 9일 리프크네히트는 제국궁전 발코니에서 많은 청중에게 노동자·병사 평의회가 운영하는 사회주의 독일을 촉구하는 연설을 했다. 바로 그 순간 불과 수백 미터 떨어진 제국의회 건물 안에서 사민당 지도자들은 자본주의와 의회 체계를 유지해야 한다고 호소하고 있었다. 노동자·병사 평의회를 촉구하고 자본주의와 의회 체계에 저항할 때 혁명가들이 직면하게 될 문제가 무엇일지는 12월에 개최된 전국 노동자·병사 평의회 대회에서 분명하게 드러났다. 상근 관료인 대의원이 많았다.(노동자인 대의원이 187명인데 견줘 노조 상근 관료인 대의원은 195명이었다), 사민당 소속 대의원 수는 중간주의 독립사민당보다 세 배가 많았으며, 스파르타쿠스 동맹보다는 30배가 많았다. 룩셈부르크와 리프크네히트는 대의원으로 선출되지도 못했다. 대회는 평의회 체제에 대립하는 의회에 힘을 실었다. 하지만 투쟁을 겪으면서 생각이 바뀌는 법이고, 이는 혁명 때 특히 참말이다. 노동자들은 다수가 개혁주의를 지지하면서도, 당면한 필요들 때문에 혁명적으로 행동하게 됐다. 예를 들어 베를린에서 스판다우 국영공장의 노동자들은 위원회를 선출해 기존 경영진을 대체해 버렸다. 다임러 마리엔필드 노동자들은 노조 관료들을 따르라는 지시를 무시하고 여성에 대한 동일임금, 노동시간 단축, 연장근무 폐지, 노동자 평의회에 고용·해고권 부여, 성과급제 폐지 등을 내세운 일련의 요구를 제시했다. 많은 공장들이 이를 본받았다. 언론들은 이렇게 지적했다. “노동자들은 정부가 산업을 집산화하기를 기다릴 때가 아니라고 여겼다.”
당시 분위기는 11월 25일 한 우익 신문에 실린 다음과 같은 설명에 잘 요약돼 있다.
노동자들이 정시에 도착해서는 외투를 벗어 놓고 신문을 읽으면서 천천히 일을 시작했다. 토론과 회의 때문에 일이 중단되곤 했다. 경영자들도 관리자들도 매한가지로 무기력했다. 모든 권력은 노동자 위원회의 수중에 있었다. 평시의 생산을 위한 공장의 재개, 노동의 공급, 제대 군인의 고용, 합의 내용의 실행, 작업 방식과 작업 분담 등을 포함한 모든 문제들에 대해 노동자 위원회가 최종 결정권을 가졌다.
거대한 사회적 격변의 한가운데서는 투쟁의 경험으로 자본주의와 의회의 회복이 유일한 선택이라는 견해를 버리고 혁명적 사상으로 바뀌는 사람들을 설득하는 것이 시간 문제일 수 있다. 하지만 그럴 시간이 항상 있는 것은 아니다.
8 하지만 당원들은 경험이 부족했고, 1919년 1월에 전부 합치더라도 소수였던 베를린의 혁명적 전위는 사민당 정부의 교묘한 도발에 걸려들어 권력 장악에 도전했다. 사민당 지도자인 구스타프 노스케의 명령을 따르고 있던 반동적 의용군인 자유군단Freikorps은 리프크네히트와 룩셈부르크를 포함해 활동가 약 200명을 학살했다.
12월에 스파르타쿠스 동맹은 다른 혁명적 단체들과 합쳐서 독일공산당을 창당했다. 당 강령을 만들면서 룩셈부르크는 “프롤레타리아 대중의 거대 다수가 명확하고 분명한 의지를 갖기 전까지는 혁명가들이 정부 권력을 장악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다. 승리는 “처음에 오는 것이 아니라 혁명의 끝에서 온다.”이것이 혁명의 끝은 아니었다. 역설이게도 그리고 룩셈부르크의 주장을 입증하듯이, 1918년 11월에 사민당은 노동자 평의회 선거에서 61퍼센트의 지지를 받았지만, 학살 2개월 뒤에는 36퍼센트를 얻어 소수파가 됐다. 독일의 투쟁은 분명 끝나지 않았지만 상당한 곤경에 놓였다.
9 그가 옳았다. 14년 뒤에 반혁명적 자유군단의 후예인 나치의 돌격대가 사민당 등 모든 야당을 강제수용소에 보냈다.
사민당의 정치적 보호 하에서 국가 기구들은 재건됐고, 자본주의는 살아 남아 그 상처를 핥으며 보복을 준비했다. 사민당의 한 관료는 그 위험을 감지하고 이렇게 썼다. “본질적으로 우리는 낡은 형식의 국가에 기초해 통치했다. … 나는 역사의 평결이 준엄하고 쓰라릴 것이라고 생각한다.”결론
독일 혁명은 그저 그런 사건도 아니었고 러시아 혁명과 비교해 부차적인 사건도 아니었다. 독일 혁명으로 대중은 제1차세계대전을 끝냈다. 그리고 독일 혁명은 체제가 전복 위기에 직면했을 때 드러나는 개혁주의 지도자들의 진면목을 여실히 보여 준 역사의 결정적 시기였다. 또 독일 혁명은 이런 장애물을 극복하려면 무엇이 필요한지도 보여 줬다. 대중적 노동조합 운동이 있는 상황에서는 관료가 아닌 현장조합원적 대안이 필요하고, 무엇보다 주도성과 정치적 성숙성과 노동자 계급과의 유기적 연계를 가지고 대중을 지도해 노동자 권력으로 이끌 수 있는 혁명적 당이 필요하다.
마지막으로, 독일 혁명은 프랑스 혁명 때의 혁명가 루이 드 생쥐스트의 말을 입증하는 고전적 사례다. “혁명을 반쯤만 하는 사람은 자신의 무덤을 파는 것이다.” 독일이 사회주의로 나아갔다면 스탈린 체제나 나치의 공포는 생기지 않았을 것이고 자본주의는 오랜 기억으로만 남아 있었을 것이다.
주
-
출처: Donny Gluckstein, ‘Remember, remember the 9th of November’, International Socialism No.160.
↩
참고 문헌
Bukharin, Nikolai, 1919, Vom Sturz des Zarismus bis zum Sturze der Bourgeoisie (Verlag Rote Fahne).
Harman, Chris, 1982, The Lost Revolution: Germany 1918 to 1923 (Bookmarks)[국역: 《패배한 혁명》, 풀무질, 2007].
Kautsky, Karl, 1909, “The Road to Power”, www.marxists.org/archive/kautsky/1909/power/index.htm
Kautsky, Karl, 1914, “Ultra-imperialism”, Die Neue Zeit (September), www.marxists.org/archive/kautsky/1914/09/ultra-imp.htm
Luxemburg, Rosa, 1986 [1918], “What the Spartakus League Wants”, in John Riddell (ed), The German Revolution and the Debate on Soviet Power: Documents 1918-1919, Preparing the Founding Congress (Pathfinder).
Luxemburg, Rosa, 2000, “Reform or Revolution”, www.marxists.org/archive/luxemburg/1900/reform-revolution/[국역: 《사회 개혁이냐 혁명이냐》, 책세상, 2002].
Rosenberg, Arthur, 1936, A History of the German Republic (Londo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