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중국 부채 위기와 민족문제
중국 노동자들과 민족문제 *
지난 몇 년 동안 중국에서 민족 간 갈등이 터져 나왔다. 하지만 국가에 맞서 노동계급이 단결할 가능성도 있다.
약 150년 전 카를 마르크스는 “다른 민족을 노예로 삼는 민족은 자신이 찰 족쇄를 만드는 것”이기 때문에, “영국 노동계급 해방의 전제조건”은 아일랜드가 영국 식민 지배에서 해방되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즉, 영국 노동자들이 자력 해방을 성취하기 위해서 지배계급의 이데올로기에서 벗어나 아일랜드 독립을 지지하는 것이 매우 중요했다.
마르크스의 주장은 오늘날의 중국과 부상하는 중국 노동운동에도 비슷하게 적용된다. 중국이 세계 자본주의에 통합되면서 중국 정권은 사회주의에 대한 주장을 대부분 폐기했고, 티베트와 다른 비한족 지역에 대한 억압적 통치를 의미하는 조야한 민족주의에서 체제의 정당성을 찾고 있다.
내몽골, 티베트, 광시, 닝샤, 신장 같은 소수민족 지역들은 공식적으로는 자치구다. 그러나 진정한 자유는 거의 없다. 특히 독립을 열망하는 국경 지역을 지배하려고, [중국은] 비한족 집단을 다채롭지만 다소 후진적인 사촌처럼 여기는 잘난 체 하는 온정주의와 억압을 결합했다. 공식 분류에 따르면 중국 인구는 56개 민족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한족은 [전체 인구의] 약 98퍼센트로 단연 가장 많다. 중국의 다민족 구성은 주로 제국의 역사, 특히 중국 본토를 넘어 광범한 지역을 정복한 마지막 왕조인 청나라(1644~1911년) 시절의 유산이다.
역사적으로, 북쪽과 서쪽 지역 민족들과의 관계는 중국 농경인과 스텝지대[유라시아 온대 초원 지대] 유목민 간의 갈등에 달려 있었다. 만리장성은 집약적 농업이 적합한 영토와 유목에만 적합한 영토의 경계를 대략적으로 보여 준다. 하지만 미국인 중국학자 오언 라티모어가 지적했듯이, 이들 지역 사이에는 농업과 유목 모두가 가능한 중간 지역이 있었는데, 이 지역이 종종 분쟁의 장소가 됐다.
청나라는 초기 수십 년 동안 중국과 카자흐스탄의 현대 국경을 아우르는 영토를 두고, 서부 또는 준가르 [제국의] 몽골인들과 대량 학살에 가까운 장기전을 벌였다. 청 왕조는 지금의 중국 동북 지방에 해당하는 곳에서 온, 반쯤은 유목민인 만주족에 의해 세워졌다. 지금의 몽골과 거의 같은 곳에 살던 동몽골인들이 오랫동안 만주족과 동맹을 맺었다. 그리고 [만주족이] 청 왕조를 세우고 준가르 제국을 멸망시키는 것을 도왔다.
경호원
티베트 불교가 모든 몽골인들에게 영향력을 행사하자 양측[준가르 제국과 청]은 티베트를 장악하기 위해 싸웠다. 청나라가 전투에서 승리했지만, 제국의 통치는 오늘날 강요되는 것보다 훨씬 가벼웠다. [오늘날에는] 중국 군대 약 20만 명이 티베트에 주둔해 있다. [반면에] 당시 청 왕조의 대리인인 암반은 병력 2000명을 이끌었는데, 이것은 개인 경호원 수준에 불과했다. 더 많은 병력은 돈이 많이 들고 불필요했을 것이다. 티베트를 통치했던 봉건 귀족들에게 중국의 통치 방식은 대체로 적절했다. 부족한 경작지를 둘러싼 귀족들 간의 충돌을 제한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를 위해 청 왕조는 최고 종교 지도자 달라이 라마를 세속 권력의 자리에 올려 놓고, 자연스럽게 분권화된 사회에서 중앙집권적인 세력 구실을 하게 했다.
청 왕조는 전투에서 승리한 결과로 신장 또는 “새로운 영토”라고 불리는 거대한 지역을 통치했다. 당시에도 이 명칭으로 알려져 있는 신장은 현재 중국의 북서 지방이다. 옛 실크로드 길에 위치한 이 지역에는 투르크계 무슬림들이 많이 살고 그중에 위구르인이 제일 많지만, 카자흐인, 타지크인, 키르기스인처럼 인접한 옛 소련 공화국 사람들과 같은 민족들도 있다.
남쪽에서 중국의 영토 확장은 [서쪽보다] 더 오래 걸렸다. 한족 농민들이 비옥한 골짜기로 이주하면서 시작됐다. 중국의 농업 방식을 받아들인 토착민들은 이주자들에게 동화됐으며, 그렇지 않은 사람들은 그곳을 떠나 산악 지대에서 더 원시적 형태로 농사를 지었다. 결과적으로 오늘날 윈난성, 구이저우성 및 광시좡족 자치구 지역은 한족과 다른 민족들이 조각보처럼 얽혀 있다.
현대 중국 민족주의는 유럽(이후 일본) 제국주의의 폭력적인 침입에 대한 반작용으로 19세기 말에야 등장했다. 최초의 민족주의자 일부는 중국 한족만을 기반으로, 유럽과 일본 모델인 인종적 민족주의를 옹호했다. 그러나 이것은 비한족인들이 살고 있는 청나라의 거대한 영토를 포기하는 것을 의미했기 때문에 다민족 형태의 민족주의에 찬성하며 인종적 민족주의는 빠르게 폐기됐다. 현대 중국의 다양한 민족은 수천 년에 걸쳐 함께 모여 살았다. 그래서 민족주의 신화는 “대융합”을 통해 단일 민족이 형성됐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이런 신화는 가장 “선진적인 문화”를 지닌 한족이 더 후진적인 동포들을 이끌었다는 것을 내포한다. 이는 영토 대부분을 청나라로부터 물려받은 것과 거의 전적으로 한족으로 이루어진 지배계급의 지배라는 두 가지 점을 정당화한다.
에릭 홉스봄이 말한 것처럼, 모든 민족주의는 이런 종류의 “만들어진 전통”에 의존한다. 이런 전통에서 보면, 근대 국가는 역사 발전의 자연스런 결과로 출현했다. 중국은 역사적 전례를 바탕으로 어느 누구보다 더 괜찮은 주장을 펼 수 있다. 최초의 통일국가인 진나라는 기원전 221년에 세워졌고, 중국의 문화적 요소들은 훨씬 더 거슬러 올라가기 때문이다. 그러나 제국은 [근대 국가와는] 매우 다른 기반 위에서 통치됐다. (특정 민족주의가 아니라) 보편주의적 유교 윤리관에 따라, 충성은 왕조와 황제에게 향했다. 지배 관료층만이 대체로 국가라는 실질적 개념을 가지고 있었으며, 당연히 대다수 농민의 시야는 훨씬 더 지역적이었다. 그리고 현대 국민국가와는 달리, 제국의 국경은 명확히 정해지지 않았다. 중앙의 영향력은 변방으로 가면 사라지는 경향이 있었다.
주창자
1890년대에 제국주의에 대한 대응으로 중국 민족주의 발전을 주장한 최초의 사람 중 한 명인 개혁파 관료 량치차오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지금 우리가 열강들의 민족적 제국주의에 반대하고 재앙에서 중국과 우리 인민들을 구하길 원한다면, 우리만의 민족주의를 추진하는 정책을 채택해야 한다.”
하지만 청 제국을 개혁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다음 세대는 쑨원이 이끄는 혁명적 민족주의로 발전했다. 이들은 쑨원 자신이 속해 있던 좌절한 지식인 계층에 호소했다. 이전 세대들은 과거를 통과해서 공직에 오르는 것을 희망할 수 있었다. 하지만 과거제는 점차 부패해, 1905년 폐지 되기 전에 이미 관직의 문은 굳게 닫혔다. 이런 좌절감 외에도 청 제국이 외세의 지배에 저항할 수 없다는 굴욕감이 더해졌다.
이런 협소한 기반을 넘어 민족주의가 대중화되는 것은 더 어렵다는 게 드러났다. 쑨원은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중국 인민이 숭배하는 것은 가족과 씨족이다. 그러니 중국은 국민국가가 아니라, 가족과 씨족이라는 신념만을 고수한다.” [그러나] 제2차세계대전 당시 일본의 잔혹한 통치를 경험하면서 중국 민족에 대한 대중적 감정이 일어났다. 공산당이 권력을 잡은 1949년 혁명은 마르크스주의적 수사에도 불구하고 본질적으로는 민족주의 성격을 띠었다. 처음으로 중국은 외세의 지배에 저항할 수 있는 정부를 세웠다. 그리고 근대 산업 발전에 전념했다.
1930년대 중국 공산당은 국민당 정부와의 악전고투 속에서 지지를 이끌어내려고 소수민족의 민족자결권을 인정했다. 하지만 공산당은 권력 장악이 가까워지자, 모든 민족 집단을 아우르는 단일 국가를 선호하면서 민족자결권을 조용히 버렸다. 혁명 이후 티베트, 신장, 다른 국경 지역을 철저히 통제하기 위해 인민해방군이 투입됐다. 이 지역 사람들은 이 문제에 대해 어떤 주장도 할 수 없었다.
1960년대 중반 문화혁명 기간은 특히 티베트에 고통을 안겨 줬다. ‘4구四舊; 낡은 사상, 낡은 문화, 낡은 풍속, 낡은 관습’를 타파하자는 요구는 티베트 문화에 대한 광범한 공격의 구실이 됐다. 당시 다수 불교 사원이 파괴됐다. 1980년대 중국 정권은 사원을 더 크게 복구하고 다시 문을 열면서, 과거 범죄들을 속죄하려 했다. 하지만 쓰라림과 분노의 감정은 쉽게 지워지지 않았다. 정부는 저항이 일어날 때마다 사원이 저항의 중심이 되는 것 아닌가 하고 의심한다.
공식 통계에 따르면 티베트 국내총생산은 24년 연속 10퍼센트 이상 성장했다. 이것은 막대한 정부 보조금 덕분이다. 이 보조금에는 인도와 국경을 접한 티베트에 대한 중국의 전략적 이해관계가 반영돼 있다. 하지만 그 혜택은 티베트인과 무관하다. 사회기반시설에 많은 투자가 이루어진다. 그러나 계약을 체결하는 회사는 다른 지역에 있고, 그 기업들은 자기 지역 출신 노동자들을 데려오는 경향이 있다. 티베트인들은 보통 미숙련 저임금 일자리만 구할 수 있다. 더 일반적으로, 한족 이민자들이 도시 고용의 압도적 부분을 차지하고, 현재 티베트 성도인 라사 인구의 절반을 차지한다. 대다수 티베트인들은 중국 전역에서 가장 빈곤한 농촌 인구로 남아 있다.
티베트 북쪽에 있는 신장은 8개 국가와 국경을 접하고 있어, 중국 정권에게 전략적으로도 중요하지만 경제적으로는 훨씬 더 중요하다. 중국 지역의 약 6분의 1을 차지하는 이른바 “자치구”는 원자재, 특히 석유와 가스의 핵심 공급원이다. 경제의 중심에는 특이하게도 신장생산건설병단新疆生產建設兵團이 있다. 마오쩌둥 시대의 유산인 이 거대한 조직은 공산당 국가의 군사 노선에 따라 운영되며, 경제 및 정치적 역할을 한다. 신장생산건설병단은 지역 경작지의 3분의 1을 차지하며, 광범한 산업 분야에도 관심을 갖고 있다. 지역 인구의 13퍼센트인 약 250만 명이 신장생산건설병단의 관할 하에 있다. 이들의 86퍼센트가 한족이다. 이 지역 전체 인구의 약 49퍼센트가 한족이다. 또한 신장생산건설병단은 내부 치안 목적으로 10만 명이 넘는 민병대를 유지하고 있다.
정권은 신장생산건설병단의 도움으로 최근 몇 년 동안 한족 이주를 적극적으로 권장했다. 적대적인 토착민이 “분리주의”적 경향이 있다며 통제를 강화하기 위해서였다. 한족 이주는 더 개발되고 도시화된 북부 지역에 집중됐다. 압도적으로 위구르인이 많은 남부는 여전히 시골이다. 그래서 더 가난하고 상당히 뒤처져 있다. 주로 무슬림인 위구르인은 극심한 탄압을 받는다. 최근 유엔 보고서에 따르면, 100만 명에 이르는 위구르인이 고문이 만연한 “재교육 수용소”에 구금돼 있다고 한다. 다른 소수민족 또한 [한족보다] 더 가난한 편이다.
이점
현대 중국이 청나라 영토에서 물려받지 못한 핵심 지역 중 한 곳은 외몽골이다. 1920년대 [중국] 공화주의 정부의 취약함을 이용해서 중국 지배에서 해방된 외몽골은 현재 몽골 국가를 형성하고 있다. 내몽골은 여전히 중국 통제 아래에 있다. 내몽골 땅 일부는 농업에 적합했다. 청나라가 금지했음에도, 18세기부터 중국 농민들이 이주해서 왕조가 무너질 때까지 인구의 대다수를 차지했다. 게다가 철로가 들어오면서 중국과의 통합이 강화됐다. 오늘날 몽골인들은 내몽골 인구의 20퍼센트도 되지 않는다.
신장처럼 몽골도 광물 자원이 풍부하지만, 중국의 산업 호황을 위한 집중 개발 때문에 환경이 파괴되고 전통적인 목초지가 사라지고 있다. 목축민들도 강제적인 재정착 정책의 대상이었다. 2011년 한 목축민이 새로운 광산 개발에 항의하다가 중국 트럭 운전사 차에 치여 사망하자, 분노가 들끓었다. 수천 명이 항의하며 거리로 나왔다.
[소수민족에 대한] 지배를 굳힌 후에 공산당은 중국의 민족 집단을 체계적으로 분류하기 시작했고, 마침내 56개 민족을 인정했다. 하지만 이 분류는 상당히 자의적일 수 있다. 예를 들어, 좡족으로 분류된 사람들은 광시와 인근 남부 지역에 거주하며, 1800만 명으로 중국 소수민족 중 가장 큰 규모다. 하지만 그들은 이전에는 스스로 [좡족이 아니라] 지역적으로 더 구분되는 여러 집단들에 속해 있다고 여겼다. 이것을 두고 논쟁이 있다. [공산당이 이 사람들을 좡족으로 묶은 이유가] 위구르와 티베트보다 인구는 더 많지만 독립을 위해 노력할 잠재력은 없는 집단을 만들기 위한 목적이었는지, 또는 중앙 통제에 벗어난 집단을 새로운 국가에 통합하기 위한 것이었는지가 쟁점이다.
하지만 정권의 목적이 소수민족을 한족 지배 국가로 통합하는 것이었다면, 그리고 그것이 동화로 가는 첫 번째 단계였다면, 이것은 어느 정도 역효과를 냈다. 지방을 관리하는 소수민족 출신의 하급 간부층은 [공산당이] 규정한 민족성을 사람들이 받아들이도록 하는 데 이해관계가 있다. 그래서 이 분류가 현실에서는 근거가 거의 없어도 그 자체만으로 자생력을 가질 수 있다.
이는 문화적 결과도 낳을 수 있다. 예를 들어, 무슬림인 후이족은 신체적으로 한족과 구분이 안 되며, 중국 전역에 분포돼 있다. 그들은 여러 세대를 거쳐 종교적 관행 일부를 수정하거나 없애며 지역 환경에 적응했다. 예를 들어, 한족이 많이 사는 남동부 지역에서 돼지고기를 먹는 것을 금기하는 [후이족] 습속은 대부분 사라졌었다. 그러나 전국적인 무슬림 집단의 구성원으로 지정되면서 종교 의식을 회복할 수 있었다.
발전
중국의 급속한 경제 발전은 한족과 소수민족의 차이를 악화시키는 경향이 있다. 소수민족은 대부분 농촌에 거주하며, 가장 가난한 농촌 지역에 살고 있기도 하다. 반면 발전은 한족이 우세한 도시에 집중돼 있다. 일부 소수민족 사람들은 일자리를 구하려고 도시로 가지만, 가장 낮은 임금을 받는 직업을 구하거나 실업자가 된다.
중국어의 우세와 종교 박해는 [소수민족이] 분노하는 다른 이유다. 중국 정부는 공식적으로는 토착어를 인정하고, 초등학교에서 이를 가르치도록 한다. 하지만 중등교육, 특히 대학 교육은 중국어로 진행되기 때문에 중국어가 제2언어인 사람들에게는 불리하다. 이와 비슷하게 종교적 관례도 공식적으로는 용인되지만, 현실에선 심각하게 제한된다. 그래서 티베트 사원은 국가가 면밀히 감시하며, 정부 기구에 고용된 위구르인들은 모스크 출입을 꺼리게 된다.
제국주의 경험이 중국 민족주의 탄생을 도왔던 것처럼, 억압적인 공산당 통치는 소수민족들이 민족 의식을 형성하는 것을 도왔다. 티베트와 신장에서 이것은 독립을 요구하는 형태를 취하며, 주되게 망명자들을 통해 표현된다. [소수민족] 사람들이 분산돼 사는 다른 지역에서는 중국 내에서의 평등 확대와 존중이 강조된다.
2009년 광둥성의 한 공장에서 위구르 이주민 2명이 한족 여성을 강간했다는 거짓 혐의로 기소된 후 살해됐다. 일주일 뒤 신장 자치구의 구도인 우루무치에서 폭동이 일어나 적어도 197명이 죽었는데, 대부분 한족인 것으로 밝혀졌다. 이 사건들은 노동계급 내 민족 간 분열 가능성을 끔찍하게 드러냈다. 하지만 단결의 가능성도 있다. 1989년 베이징에서 벌어진 민주주의 운동에서 학생 지도자 중 한 명은 위구르인인 우얼가이시였다. 최근에 부상하는 중국 노동운동은 소수민족의 진정한 자결권을 지지하며 지배계급의 민족주의에 도전해야 한다.
MARX21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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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Simon Gillbert, Workers and national question, Socialist Review Sept.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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