쟁점: 현재의 이슈들
묵은 술, 새 병 그리고 인터넷 *
신적mental노동과정과 객체적objective노동과정을 구분해 개념화하고, 지식이 비물질적이라는 생각에 대한 반론을 제기한다. 2부에서는 앞에서 정립한 개념들을 바탕으로 상호 연관된 세 가지 쟁점들을 다룬다. 정신노동이 가치와 잉여가치를 생산할 수 있는지, 생산적 노동과 비생산적 노동의 구분이 유효한지 그리고 생산과 소비의 구분이 유효한지가 그것들이다. 3부에서는 특히 인터넷과 연관해 지식의 계급적 성격을 검토한다. 글의 말미에서는 이 연구의 몇 가지 결론적 고찰들을 제시한다.
인터넷의 등장으로 현대자본주의는 새로운 모습을 띠게 됐다. 이런 새로운 특징들은 다양한 연구들을 촉발시켰을 뿐 아니라 그 자체로 매우 시사적이고 논쟁적인 쟁점이 됐다. 하지만 대체로 이러한 변화를 다루는 문헌들 중에서 마르크스주의 인식론의 발전을 출발점으로 삼는 연구는 거의 없다. 인식론이 마르크스주의 이론에서 가장 발전이 더딘 분야이다 보니 단언컨대 마르크스의 가치이론에서 마르크스주의 지식 이론을 도출해내지 못했기 때문일 것이다. 기존 문헌과는 달리 이 글은 그러한 시도를 하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이 글의 1부에서는 정1
마르크스주의 인식론의 몇 가지 요소들노동을 살펴보자. 노동은 노동대상을 변형시키는 과정, 즉 변형의 연속이다. 변형에는 두 가지가 있을 수 있다. 하나는 객체적 변형이다. 이는 우리의 인식 바깥에 존재하는 객체적 실체를 변형시키는 과정이다. 비록 변형하기 위해서는 먼저 대상을 인식해야 하지만 말이다. 보다 자세히 정의하면,
(1) OT = (L -〉 MO, OO) = ON
여기서 OT는 객체적 변형을 의미하며, ON은 변형의 결과물, 즉 새로운 객체적 사용가치 혹은 산출물을 뜻한다. L은 노동력을 의미하여, MO은 객체적 변형의 객체적 수단(예컨대 망치 따위)을 나타낸다. 그리고 OO은 객체적 변형의 객체적 대상(예컨대 대리석 따위)을 나타낸다. 기호 ‘-〉’는 변형이 일어남을 뜻한다.
정신적 변형에서는, 노동력이 (책이나 컴퓨터와 같은) 객체적 실재 속에 포함된 지식뿐 아니라 그 자신이 소유한 지식 – 과 그 자신도 - 을 새로운 지식으로 변형시킨다.
(2) MT = (L -〉 KL, KO) = KN 여기서 MT은 정신적 변형을 의미하며 그 결과물은 새로운 지식 KN다. KL은 노동력에 포함돼 있는 지식을 뜻하며, KO은 KL 외부에 존재하는 (책이나 컴퓨터 등의) 지식의 객체적 원천 속에 포함돼 있는 지식을 의미한다. KL은 정신적 변형의 정신적 수단인데, 정신적 변형의 두 정신적 대상 중 하나(그것은 그 자신을 변형시킨다)이고 다른 하나는 KO다. KL은 정신적 변형의 투입물 중 하나로, 그 산출물인 지식 KN과는 다르다. KN은 L과 KL 그리고 KO(투입물)의 결합으로 나온 산출물이기 때문이다. KN은 변형과정이 끝난 즉시 KL로 통합되므로 특정 MT의 산출물인 KN은 그 다음 시기에 이루어지는 정신적 변형과정에 KL로서 투입된다.
이와 같은 정신적 변형과정을 ‘비물질적’이라고 간주하는 것은 잘못일 것이다. 객체적 변형과 정신적 변형 모두 물질적 성격을 지니기 때문이다. 사실 두 과정 모두 인간 에너지의 지출이 발생하며, 인체의 신진대사로 보면 결국 물질적 성격을 지닌 현상이다.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인지과정과 사고 과정에서 생기는 인간 에너지의 지출은 신경계, 즉 뇌의 신경세포들 사이의 상호작용에서 변화를 발생시킨다. 이것을 시냅시스라고 한다. 이런 변화는 사물을 다르게 인식하게 한다. 따라서 지식은 비록 무형이라 할지라도 분명히 물질적이다. 이를 인정하지 않는 것은 신경과학의 성과들을 무시하는 것이다. 무엇보다도 전기와 그 작용이 물질적 현상이라면, 뇌에서 벌어지는 전기적 활동과 그 작용의 결과로 발생한 지식은 왜 물질적 현상이라고 할 수 없단 말인가?
3 ‘비물질’ 노동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다. 물론 시냅시스가 사물에 대한 (새로운) 인식을 가능하게 하지만, 그 인식 내용은 매우 사회적이다. 무수히 많은 사회적 관계와 사회를 구성하는 과정들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이다. 지식은 항상 물질적인 동시에 사회적인 성격을 지닌다.
따라서 노동자주의 경향의 논자들에게는 유감이지만,‘변형’이란 사용가치의 변형이다. 식(1)에서 변형된 사용가치는 객체적 사용가치 MO와 OO이다. 식(2)에서 변형된 사용가치는 정신적 사용가치인데, 이것은 특정한 형태의 지식이 지니는 사용가치이며 그것의 사용은 지식의 형태로 이루어진다. KL과 KO는 노동력에 의해 변형된 정신적 사용가치이다.
이 변형을 두 가지 형태로 구분하는 것은 순전히 분석상의 편의를 위해서이고, 현실에서는 객체적 변형이 정신적 변형을 필요로 하고 또 그 반대이기도 하다. 그런데 노동과정과 노동을 개념화하기 위해서는 이런 구분이 필요하다.
노동과정이란 항상 사용가치, 즉 정신적 사용가치와 객체적 사용가치 모두의 변형이다. 하지만 노동과정에서 어느 유형의 변형이 더 결정적이냐에 따라 객체적 변형 아니면 정신적 변형이 된다. 결정되는 관계에 대해서는 상세한 분석이 필요하다. 여기서 ‘결정적’이라는 것은 결정된 경우의 존재 조건임과 동시에 결정된 경우의 재생산 또는 대체 조건이 된다는 것만 언급하는 것으로 충분하다. 그렇다면 객체적 노동과정은 다음과 같다.
(3) OLP = (OT =〉 MT) = ON 여기서 객체적 생산물인 ON은 객체적 노동과정(OLP)의 결과물이다. 객체적 변형과 정신적 변형의상호작용에서 전자가 후자를 규정한다. 그러므로 객체적 노동(때로는 신체적 노동, 육체적 노동, 물질적 노동으로 불린다)이 정신적 활동과 분리된다고 생각하는 것은 잘못이다.
정신적 노동과정에서는 정신적 변형이 결정적이다.
(4) MLP = (MT =〉 OT) = KN
여기에서 KN은 새로운 지식이다. KN은, 위의 식 (2)의 경우처럼, 1차적 근사로 얻은 정신적 변형만을 통해 얻은 산출물이라고 간주한다. 현실에서 KN은 정신적 변형과 객체적 변형이 모두 이루어지는 정신적 노동과정(MLP)의 결과물이다. 예를 들어 비디오 게임 생산(정신적 노동과정)은 프린터를 통해 백지를 인쇄된 종이로 바꾸는 것과 같은 객체적 변형도 필요로 한다. 이 경우 프린터는 객체적 변형의 객체적 수단이다. 하지만 정신적 노동과정이라는 맥락에서 보면 프린터는 정신적 변형의 객체적 수단이며, 비디오 게임이라는 지식 형태를 (재)생산할 수 있는 조건이다.
5 둘째, 새로운 지식은 반드시 이전의 지식과 다른 지식일 필요는 없다. 이전에 생산된 지식의 복제품일지라도 그 지식은 새로 생산된 지식이다. 셋째, 노동과정이 정신적인지 객체적인지를 구분하는 핵심은 일반적으로 객체적(신발) 내용을 위해 사용됐는지 아니면 정신적(책) 내용을 위해 사용됐는지를 봐야 한다.
이상의 논의에서 도출되는 결론은 크게 세 가지이다. 첫째, 정신적 노동과정에 투입되는 지식은 해당 노동과정의 산출물과 동일한 대상이 아니다.2. 가치와 인터넷
6 그런데 현대적 조건에서도 마르크스의 가치이론이 여전히 유효한가를 둘러싼 논쟁이 있다. 다음의 두 가지를 전제로 삼아야 한다.
여러 컴퓨터를 연결하는 그물망이자 정보 취급의 기술이기도 한 인터넷이 등장한 사회적 배경은 널리 알려져 있듯이 바로 냉전 시대다.7 만일 노동자들이 잉여노동을 제공하는 것을 바람직하다고 생각한다면 그는 자본의 기능을 내면화 한 것이다. 우리가 곧 보게 되겠지만, 오늘날 후자의 선택은 특히 인터넷에서 정신적 노동과정의 특정한 유형에서는 더 쉽게 적용할 수 있다.
첫째, 자본주의 하에서 노동과정(정신적 노동이든 객체적 노동이든)은 한편으로는 생산과정과 다른 한편으로는 잉여가치 생산과정, 즉 착취의 두 측면으로 이뤄져 있다. 잉여가치 생산과정이란 노동자들이 자신들의 객체적·정신적 소비수단을 생산하는 데 필요한 사회적으로 결정된 시간보다 더 많은 시간을 들여 객체적·정신적 사용가치를 변형시키는 과정이다. 전체 노동일 중 일부는 자본가들을 위한 객체적·정신적 사용가치를 생산하는 데 사용될 수밖에 없다. 이런 목적을 위해 노동자들은, 마르크스가 《자본론》 3권에서 지적했듯이, 객체적·정신적 생산수단을 소유하지 않으므로 자본가계급에 속하지는 않지만 자본의 기능(혹은 감독노동과 감시)을 수행하는 대리인들에게도 잉여노동을 전달해야 한다.둘째, 인터넷을 다룰 때 우리는 정신적 생산자와 ‘일차적 근사치’에 따라 정신적 노동자로 불렀던 사람들을 세 가지 범주로 나눠볼 수 있다.
(A) 첫째 집단은 자본에 봉사하는 정신적 생산자들이다. 이들이 바로 정신적 노동자들mental labourers이다.
(B) 둘째 집단은 자본가 계급에는 속하지 않지만 이윤을 위해 인터넷을 사용하는 정신적 생산자들이다. 이들은 정신적 자영업자들mental self-employed이다. 그러나 이 글에서는 이들에 대해 다루지 않는데, 글의 분량 문제가 있고 또 이들은 두 기본적인 계급들의 충돌에서 파생된 집단이기 때문이다.
(C) 셋째 집단은 자본에 봉사하지 않고 다른 목적(여가, 교육, 연구 등)을 위해 자신의 자유 시간에 인터넷을 이용하는 정신적 생산자들이다. 이들은 정신적 행위자들mental agents이다.
정신적 노동자와 정신적 행위자 사이의 구분, 즉 자본에 고용돼 있는 집단과 그렇지 않은 집단 사이의 구분은 여러 글에서 쟁점이 되는 세 가지 문제를 다룰 때 핵심적이다. IIa. 첫째 문제는 인터넷을 매개로 일하는 정신적 노동자가 가치를 생산하는가이다. 가치란 기본적으로 자본주의적 생산관계 하에서 (자본을 위해 노동자가) 지출한 노동을 의미한다. 따라서 지식 생산(정신적 노동)이 자본을 위해 수행된 정신적 노동이라면 그것은 가치와 잉여가치를 생산할 수 있다. 이 경우 정신적 노동과정에서 새롭게 창출된 가치량은 수행된 추상적 정신노동 시간과 강도 그리고 정신적 노동자의 노동력 가치에 의해 결정된다. 그래서 정신적 노동자의 노동력 가치와 그들이 새롭게 창출한 가치 사이의 차이가 착취다. 이 가치는 객체적 사물 속에 포함돼 있을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그 어느 경우든 그것은 무형이지만 물질적 상품으로, 그 가치는 그것을 생산하는 데 필요한 정신적 노동의 양에 의해 결정된다.
9 각각의 비디오 게임은 고유한 개체이고, 비디오게임 관련 기술은 매우 급속히 바뀌며, 그 개발은 고도로 전문화된 인력에 의해 이뤄진다. 비디오게임 개발은 하나의 프로젝트를 통해 이뤄진다. 그런데 테일러주의적 일관공정에서와 같이 가혹한 외적 강제를 통해서 수행되는 자본의 기능은 노동자들의 상대적으로 자생적인 창조성에 기반한 노동과정을 통제하는 데에는 부적절하다. 노동자들을 통제하기 위한 새로운 방식이 필요하다. 그래서 자본가는 노동자들이 자신들에게 할당된 마감시한 내에 작업을 반드시 완수하도록 한다. 프로젝트 관리자는 개발자들의 작업 진행 상항을 감시하면서, 프로젝트가 중요한 지점(이정표)에 도달했을 때 개발자들에게 보수를 지급한다. 이와 같은 제약조건 하에서 노동자들은 스스로 결정할 수 있는 자유를 갖는다. 노동자들은 자본의 기능들을 수용한다. 그래서 통제의 외관은 바뀐다. 하지만 이런 변화가 착취를 없애지도 않고 자본으로부터 노동을 자유롭게 하지도 않는다.
인터넷에서 이뤄지는 정신적 생산은 이런 일반적인 특징들 외에도 고유한 특징들을 갖고 있는데, 말하자면 노동과정, 노동 장소, 착취 형태 등이 새롭다는 점이다. 하지만 이러한 특수성도 이 노동의 자본주의적 속성을 없애지는 못한다. 러고Legault가 연구한 새로운 노동과정인 비디오게임 생산을 예로 들어보자.10 노동강도의 극대화 11 가 숨어 있다. 이것은, 핏츠가 적절히 지적했듯이, 통제된 자율성에 지나지 않을 뿐 아니라, 12 창조성 또한 자본에 의해 형성된다. 자본은 늘 노동자들에게 창조성을 한껏 발휘하라고 말하지만, 이 창조성도 노동자들 자신의 충분하고 전면적인 발전이 아니라 자본의 목적에 부합해야 한다.
그래서 정신 노동자들의 자율성이 크다 할지라도 절대적이지 않다. 유연하고 지적·정서적 보람이 큰 노동도 이면에는 초장시간 노동(아메리카온라인은 전자산업의 초착취공장이다), 장시간의 빈번한 무급 초과노동,한편 새로운 분업도 등장한다. 예를 들어, 검색엔진 회사에서 일하는 일부 노동자들은 블로그를 분석하는데, 방문자 수와 같은 양적 분석과 방문자들이 남긴 코멘트를 통해 그들의 생각과 선호도를 파악하는 질적 분석을 포함한다. 다른 노동자들은 광고 기획에 유용하게 이용할 아이디어를 찾기 위해 웹을 탐색하는데, 예를 들어 전화 대화 서비스를 분석하는 것이 그렇다. 어떤 노동자들은 이렇게 수집한 지식 소재들을 상품으로 변환시켜 광고회사에 판매한다. 자본은 비교적 단순한 과제뿐 아니라 복잡한 과제도 포함하는 관료적 위계질서를 노동과정의 구조에 아로새긴다.
13 어떤 노동자들은 집에서 또는 자유시간에 이메일에 답장을 하거나 블로거들과 의사소통을 한다. 하지만 이 일은 착취가 아니다. 자본이 생산관계라면, 이 관계는 노동자들의 자유시간에는 중단됐다가 다시 업무에 복귀하면 재개된다. 따라서 여가시간에 노동자들이 착취당하지는 않는다. 정신적 노동자가 집에서 자유시간에 예를 들어 한 시간 동안 이메일에 답장을 보냈다면, 이는 그 노동자가 업무시간에 이메일 답장을 보낸 것과 동일한 결과를 낳는다. 그런데 그 노동자가 자본을 위해 일하는 시간, 예를 들면 하루 여덟 시간 노동일은 변함이 없다. 하지만 그가 다시 업무를 시작하는 순간 그의 노동은 더 생산적이게 된다. 그가 업무를 시작할 때 이런 이메일에 답장을 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의 생산성은 증대하지만 그가 생산하는 잉여가치는 여전히 8시간 동안에 창출된다. 이것들은 정신노동의 생산성 문제와 생산성 향상과 수익성 향상 사이의 관계에 대한 추가 논의를 필요로 한다.
어떤 논평가들은 노동시간과 일상 사이의 경계가 허물어지고 있다는 점을 강조한다. 예컨대, 노동자들은 ‘창의성을 발휘해서 해결해야 할 문제들’을 자유시간에 해결하곤 한다.14 객체적 생산에서 생산성은 투하자본 1단위당 산출량으로 측정한다. 이것은 정신적 생산, 예를 들어 비디오게임의 경우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정신적 생산물은 물리적 껍데기(예컨대 DVD)에 담겨 있을 수 있다. 이 때 DVD도 고려해야 한다. 하지만 컴퓨터로 다운로드되는 상품들도 있다. 이 때 다운로드 횟수 역시 고려해야 한다. 단적으로 말해 정신적 산출물도 계산할 수 있는데, 이것이 분자다. 분모를 이루는 투하자본도 계산할 수 있다.
노동가치론 비판가들은 정신적 생산은 ‘비물질적’이므로 그 생산성을 측정할 수 없다고 말한다. 지식이란 십중팔구 “수량화가 불가능한” 영역이라는 것이다.우선 원본의 생산에 자본이 투자된다. 투하자본은 고정 불변자본(컴퓨터, 회사 부지, 설비, 칩 공장, 조립 공장 따위)은 물론이고 유동 불변자본(원재료)과 가변자본(임금)까지 포괄한다. 임금의 경우, 고숙련 개발자들은 꽤 높지만 거꾸로 매우 낮을 수도 있다. 그 외에 행정이나 사전 홍보 비용뿐 아니라 다른 비용도 있다. 이런 모든 비용을 (a)라고 부르자.
이 외에도 원본의 복제품을 생산하는 데에도 추가적인 자본투자가 필요하다. 정신적 노동과정의 전체 주기 동안에 (a) 유형의 추가적 비용 외에도 정신적 생산물을 담는 물리적 껍데기(DVD 따위)를 생산·조달하기 위해 필요한 가변자본과 불변자본이 존재한다. 이런 모든 비용을 (b)라고 부르자. 따라서 총투하자본은 (a)+(b)라고 할 수 있다. 정신적 생산의 생산성 역시 측정 가능하다.
정신적 생산과 관련한 또 다른 신화로는 복제품의 단위가치가 0이거나 0에 수렴한다는 주장이다. 하지만 실제로 복제품의 총가치는 매우 클 수 있다. 복제품의 총가치는 총투하자본 (a)+(b)에다가 정신적 노동과정 전체에서 창출된 잉여가치 (c)를 더하면 나온다. 복제품의 단위당 가치는 복제품 가치 총액을 복제본 수량으로 나눈 것과 같다. 즉 복제품의 단위당 가치는 가치 총액과 정비례 관계에 있고, 복제품 수량과는 반비례한다.
15 판매액이 투하자본에 비해 적을 때 생산이 중단된다면 손실이 생길 것이다. 생산이 그 지점을 넘어서 계속된다면 이윤은 생산된 잉여가치의 실현이 된다. 만일 생산이 더 진행돼 이윤이 증가한다면 그것은 잉여가치를 생산했기 보다는 전유appropriation했기 때문에 생겨난 것이다. 복제품의 가치가 0이 되거나 0에 수렴할 수는 없는데, 왜냐하면 ‘인지 상품’이 비용을 들이지 않고 재생산할 수 있다는 노동자주의자들에게는 미안하게도 산출물의 양이 증대할 때 (b) 유형의 비용이 줄어드는 것이 아니라 고정적으로 들기 때문이다. 16 유형 (a)의 비용을 고려하면, 생산성이 높으면 높을수록 단위당 가치는 낮아지지만 전유된 특별잉여가치는 더 늘어난다.
그런데 복제품의 가치 크기는 가변적이다. 그 크기는 사용된 기술에 달려 있기 때문이다. 복제품 가치 크기의 최대치는 기술의 진부함 여부에 달려 있다. 예를 들어 격심한 경쟁으로 인해 특정 상품에 대한 수요가 감소해 수익이 남지 않을 정도가 되면 해당 복제품의 생산은 중단된다. 비디오 게임 산업이 “높은 부도율”을 자랑하는 이유는 바로 이 때문이다.이를 비판하는 사람들은 어떤 대안을 제시하는가? 몇 가지 사례를 들어보자. 조디 딘(2010)은 “산업 자본주의가 노동의 착취에 기반했듯이, 정보통신 자본주의는 커뮤니케이션의 착취에 기반한다”고 주장한다. 그런데 여기에는 두 가지 문제점이 있다. 첫째, 상이한 사용가치들이 추상적 노동이라는 하나의 공통 요소를 갖고 있기 때문에 합계를 낼 수 있다. 그렇다면 상이한 유형의 정보를 합계할 수 있게 하는 공통의 요소는 무엇인가? 둘째, 정보는 지식이고 지식은 정신적 노동의 생산물이다. 그래서 정보의 착취는 (추상적) 정신적 노동의 착취에 지나지 않는다.
아비드송과 콜레오니(2012)는 마르크스의 가치이론이 인터넷에는 적용될 수 없다고 주장했다. 이들에게 가치란 특정 상품과 브랜드에 대한 정서적 애착이기 때문이다. 아마도 특정 브랜드에 대해 애착을 보이는 소비자들이 많으면 많을수록(따라서 해당 제품을 구매하려는 소비자들이 많아질수록) 상품의 가치가 더욱 커진다고 여기는 듯하다. 그런데 이 주장은 수요를 조작해 가치의 분배에 영향을 줌으로써 시장 점유율을 극대화하려는 자본가 계급의 견해다. 하지만 이 견해는 가치와 잉여가치의 재분배 이전에 가치와 잉여가치의 원천을 발견하는 것에 기본적인 관심을 두고 있는 노동의 관점을 반영하지 않은 것이다. 아비드송과 콜레오니는 정서적 투자의 축적과 파괴가 경제 위기 같은 것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는지를 밝혀야 할 것이다.
말이 나왔으니 말인데, 소위 감정노동 즉 정서를 생산하고 조작하는 노동(잘못되게도 비물질적 노동이라고 여겨진다)에 대해서도 한마디 덧붙여야겠다. 여기서 나는 가사노동을 논의 대상에서 제외하는데, 가사노동은 자본을 위해 수행하는 노동이 아니기 때문이다. 따라서 가사노동에 관해서는 완전히 다른 논의가 필요하다. 그런데 자율주의 저술가들은 광고, 보육 노동, 비행기 승무원, 패스트푸드점 노동자 등을 모두 감정노동으로 묶어서 설명한다. 그런데 이 범주에 속하는 모든 노동은 쉽게 가치 법칙에 포함시킬 수 있다. 광고는 비생산적 정신노동의 사례다. 보육 노동은 객체적이고 생산적인 노동인데, 그것이 (물질적 성격을 지닌) 노동력이라는 상품의 재생산에 기여하기 때문이다. 비행기 승무 업무는 운송의 일부(마르크스는 운송이 객체적이고 가치 생산적이라고 봤다)이며, 따라서 그들의 노동은 객체적이고 동시에 생산적이다. 패스트푸드 노동 또한 고객들에게 이윤을 위해 판매될 상품을 만들기 때문에 객체적이고 생산적인 노동이다. 예를 들어, 어떤 친절한 판매원이 덜 친절한 동료들보다 더 높은 판매 실적을 올린다고 했을 때 그는 동료들보다 더 숙련돼 있고 생산성도 높다고 할 수 있다. 그래서 그의 노동력도 더 많은 가치를 지닌다. 하지만 판매원이 가치를 생산하는 것은 아니다.
IIb. 둘째 쟁점은 생산적 노동과 비생산적 노동 사이의 구분이 정신적 생산과 특히 인터넷에서 유효한지에 대한 것이다.
17 마지막으로 객체적 사용가치를 파괴하는 노동은 가치를 생산한다고 할 수 없는데, 그것은 가치를 담고 있는 특수한 형태(사용가치)를 파괴하기 때문이다.
우선 객체적 노동을 살펴보자. 자본주의 생산관계에 몰두했던 마르크스의 경우, 사용가치를 새로운 사용가치로 변환할 경우 그 노동은 생산적이다. 그래서 다음의 네 가지 경우는 비생산적이다. 첫째, 상업에 고용된 노동이다. 마르크스가 주장한 것처럼, 생산적 노동은 객체적 사용가치를 변환하는 일이고 비생산적 노동은 대상을 다루지만 변환시킨 것은 아니다. 어떤 사람이 객체적 사용가치를 교환했다면 그는 그것들을 변환시킬 수 없다. 둘째, 금융 또는 투기 관련 산업에 고용된 노동 또한 비생산적인 노동인데, 객체적 사용가치를 전혀 다루지 않기 때문이다. 셋째, 마르크스가 《자본론》 3권에서 지적한 것처럼, 자본의 기능으로서 노동을 관리하는 업무를 수행하는 사람들의 ‘노동’도 비생산적이다. 이들은 ‘노동자가 아니라고’ 할 수 있다. 이들이 자본주의 생산과정에서 꼭 필요하다는 사실이 이들을 가치 생산적이게 만드는 것은 아니다. 복잡한 노동과정에서 자본의 기능은 대표이사부터 일선 감독관에 이르기까지 위계적 구조에 의해 수행된다. 하지만 이들이 사용가치를 생산할 수는 없는데, 이들이 다른 사람들로 하여금 그런 변환을 수행하도록 강제할 때 자신들은 사용가치를 변환시킬 수 없기 때문이다.18 따라서 문제는 간단히 말해 지식의 창출이 생산적이냐 아니냐의 여부가 아니다. 19 진짜 문제는 어떤 경우에 지식생산이 가치를 생산하는 활동이 되느냐 하는 것이다. 공식 데이터의 한계라는 문제가 존재한다. 따라서 인터넷을 매개로 이뤄지는 노동의 경우에도 생산적 정신노동과 비생산적 정신노동으로 구분할 수 있다.
이와 마찬가지로 지식의 생산 역시 정신적 사용가치를 변환시키기 때문에 가치를 생산한다. 하지만 위의 분석에 기초해 볼 때, 다음의 네 가지는 가치를 생산한다고 볼 수 없다. (a) 객체적 사용가치의 교환 (b) 금융과 투기 (c) 자본 기능의 수행 (d) 객체적 사용가치의 파괴.20 그들 역시 가치를 생산한다고 볼 수 없지만 그 이유는 위의 사례와는 다르다. 이들은 자본에 고용된 사람들이 아니기 때문에 비생산적이다. 예컨대, 페이스북의 ‘소셜 버튼’에 대해 생각해보자. 페이스북의 소셜 버튼을 누르거나 블로그에서 다양한 이슈에 대해 토론하거나 웹 상에서의 상호교류를 통해 혁신적 기술을 개발하는 정신적 행위자들은 정신적 사용가치를 변환시킨다. 이와 동시에 그들은 창출된 지식을 원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무료로 활용할 수 있게 해 준다. 그런데 이러한 지식이 무료인 까닭은 생산에 비용이 들지 않아서가 아니라(컴퓨터의 마모와 에너지 지출 등을 생각해 보라) 단지 그러한 지식을 누구라도 무료로 이용할 수 있게 공개돼 있기 때문이다. 자본주의에서 정신적 생산의 구체적 형태인 인터넷 검색엔진 노동자들이 하는 업무가 바로 이렇다. 21 이들은 무료로 얻는 지식을 상품성 있는 지식으로 변환시키는데, 즉 인터넷 사용자들의 취향, 욕구, 관심사 등에 관한 데이터를 모은다. 그런 다음 이들은 이 데이터를 자본가들에게 판매하는데, 이를 구매한 자본가들은 판촉 광고나 투자를 계획할 때 혹은 고객의 신용을 평가할 때 이런 데이터를 활용한다. 따라서 정신적 이용자들이 창출한 지식을 이용하는 데 솜씨가 좋은 자본가들은 더 많은 수익을 올릴 수 있다. 자본가 사이에서 이런 새로운 경쟁은 앞으로 그 중요성이 더 커질 전망이다.
이제 정신적 행위자mental agent에 대해 논의해 보자. 이번에는 인터넷을 통해 오픈 소스OS 프로젝트에 자발적으로 기여하는 정신적 행위자들의 사례를 보자. 자본에 고용돼 일하는 경우가 아니라면 이들은 가치를 생산하지 않는다. 그들은 매우 자유롭게 자신들의 창조성을 발휘할 수 있다. 하지만 오픈 소스에서 이들의 개인적 기여는 조정을 필요로 하므로 다소간 형식적인 조직화를 거친다. 프로젝트 개시자 혹은 프로젝트에서 중요한 업무나 기술을 지니고 있는 프로그래머가 그러한 조정 업무를 맡는다. 이 조정자들은 어떤 기여를 수용할지 여부를 결정하고, 프로젝트의 형식과 방향을 설정한다.24 그러나 이러한 조정자의 노동 또한 비생산적이다. 비록 자본에 고용돼 있다 해도 이들은 비생산적인 정신적 노동과정에 참여하기 때문이다. 이 말은 얼핏 모순처럼 보이지만, 이것은 공유 프로젝트에 자기네 노동자들을 ‘빌려 주는’ 기업들이 몇 가지 이득을 보는 것으로 설명할 수 있다. 첫째, 이 기업들은 자신들의 기술과 이해관계에 걸맞은 기여만을 허용한다. 둘째, 해당 기술을 통째로 가져다 쓰면서도 전체 비용 중 일부만을 지불한다. 25 셋째, 이러한 기술로부터 얻는 이득은 경쟁 자본이 얻는 이득보다 훨씬 크다. 넷째, 자본가들은 정신적 행위자들에 대한 통제와 관리가 어떻게 이뤄지는지를 정신적 노동자들을 통해 관찰하면서 자신들이 고용한 노동자들을 통제·관리하는 유용한 기법들을 고안해낼 수 있다.
조정자가 IT기업에 고용되는 경우도 종종 있다.26 은 안토니오 네그리의 주장을 이어받아 정신적 행위자들이 비생산적이라는 점을 기각할 뿐 아니라 착취 개념을 임금노동을 넘어 사회 전체로까지 확장시킨다. 아마도 잉여가치는 재생산과 소비 영역에서도 크게 창출된다고 여기는 듯하다. 그래서 모든 삶이 잉여가치의 원천이 된다. 하지만 이 사람들은 잉여가치 생산을 위한 조건이 실제로 잉여가치를 창출하지 않는다는 점을 간과하고 있다. 모든 노동이 자본의 재생산을 위한 조건이고 그래서 잉여가치 생산을 위한 조건이기 때문에 모든 노동은 생산적일 수 있고, 자본은 인터넷 이용자들을 포함해 사회의 모든 구성원들을 착취할 것이다(op.cit. p188). 하지만 모든 노동이 자본 파괴(위기나 전쟁 등)의 직간접적 요인이기에 모든 노동은 자본 파괴적이라고 주장할 수도 있다. 더욱이 모든 노동이 생산적이라면 왜 자본가들은 노동자들이 자본가를 위해 일하는 시간을 늘리고 노동자들의 자유시간을 줄이지 못해서 안달일까! 27
몇몇 논자들28 그런데 아무런 가치도 지니고 있지 않는 것이 어떻게 가치와 잉여가치를 생산할 수 있다는 말인가? 또한 생산된 모든 가치가 잉여가치라면 인터넷 사용자들은 숨만 쉬면서 생존할 수 있다는 말인가.
푹스는 또한 인터넷 사용자(즉 정신적 행위자)가 무상으로 가치를 생산하므로 그들의 노동력 가치가 0이라고 주장한다. 즉 그들이 창출해낸 가치는 자본으로 가는 잉여가치라는 것이다. 그래서 잉여가치율은 무한대의 값이 된다.현실에서 자본가는 예컨대 하루 8시간의 노동에 대해 노동자들에게 보수를 지불한다. 만약 착취율이 100퍼센트라면 4시간은 임금재 생산에 필요한 (24시간 동안 노동력을 재구성하기 위해 필요한) 노동시간이며 나머지 4시간은 잉여생산물(따라서 잉여가치)을 생산하기 위한 잉여노동시간이 된다. 노동력을 재구성하기 위해 필요한 시간에는 예컨대 하루에 한 시간 정도 인터넷에 접속하기 등 오락 활동도 포함한다. 그런데 하루 8시간 정신 노동자로서 일하는 사람도 1시간 동안 인터넷을 사용할 때는 노동자가 아니라 정신적 행위자가 된다. 정신적 행위자는 자본을 위해 일하지 않기 때문에 착취당하지 않으며 따라서 가치와 잉여가치를 생산하지 않는다. 그래서 정신적 행위자의 착취율 논의는 완전히 의미 없는 말이다. 정신적 행위자가 착취당하는 것은 정신적 노동자로서다.
29 프로슈머라는 용어는 인터넷을 통해 상품을 주문·구매·소비하는 정신적 행위자가 지식 생산을 통해 객체적 상품의 특징을 결정한다는 의미다. 하지만 이것은 같은 사람이 정신적 사용가치의 생산자이면서 동시에 객체적 산출물의 소비자라는 점을 말할 뿐이다. 이로부터 생산과 소비 사이의 구분이 사라졌다는 주장은 또 다른 쟁점이다.
IIc. 마지막이자 세 번째 쟁점인 생산과 소비의 구분에 대해 논의해보자. 어떤 사람들은 인터넷의등장으로 이 구분이 낡은 것이 됐다고 주장하는데, 그 주장의 근거는 소위 프로슈머라는 새로운 존재의 등장이다.정신적 행위자가 생산하는 지식은 정신적 사용가치이다. 이 정신적 사용가치는 자본가의 객체적 노동의 형태를 띠고 생산과정에 들어간다. 이 정신적 행위자는 정신적 노동과정의 설계에 참여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가치와 잉여가치를 생산하는 데 직접 참여하지는 않는다. 자본에 고용돼 있지 않기 때문이다. 자본주의적 생산과정의 산출물에 대한 정신적 행위자의 소비는 시간적으로 그 상품의 생산 이후에 일어난다. 현재 시점의 정신적 생산자(행위자)는 미래의 소비자다. 미래의 소비자가 그 상품의 특징을 자본가에게 제공하고 있다면 그 사람은 비생산적인 정신적 생산자이다. 하지만 그가 상품을 구매하여 소비하는 시점에서는 소비자일 뿐이다. 동일한 인물이 오늘은 정신적 생산자였다가 내일은 객체적 소비자가 된다고 할지라도 생산과 소비의 두 국면은 시간적으로 분리돼 있다. 생산자가 소비자(프로슈머)라는 명제는 시차를 무시하는 잘못을 범한다.
30 다만 프로슈머라는 온갖 호들갑 이면에 정신적 행위자들이 기업의 “경쟁력” 향상을 위한 새로운 원천이 됐다는 주장에는 일말의 진실이 있다. 31 대표적인 사례로 모딩modding을 들 수 있다. 모딩이란 (정신적 행위자인) 비디오 게임 소비자가 게임 생산자가 제공하는 툴을 활용해서 게임의 콘텐츠를 변형하거나 성능을 개선하는 것을 말한다. 모딩은 “게임 산업에서 갈수록 중요해지는 가치의 원천”이다. 32 프로슈머라는 야누스적 이중성 이면에 있는 본질은 소비자가 아니라 자본가에게 어떤 비용도 들이지 않고 효율성과 판매 그리고 수익성을 높이는 신기술을 제공한다는 점이다. 33 그런데 이런 신기술이 대량생산을 대체할 것이라는 주장은 미래의 소비자들이 대량 생산된 상품들에 단지 (제한적인) 개선만 할 뿐이라는 점에서 충분한 의심이 든다. “2011년에 … 인터넷 경제가 유럽연합EU 27개 국의 GDP에 기여한 몫은 고작 3.8퍼센트에 지나지 않았다”. 34
이상의 논의는 ‘사용자’ 즉 정신적 행위자가 여러 분야에서 혁신의 원동력 구실을 한다는 점을 부인하려는 것이 아니다.3. 계급 지식과 인터넷
자본주의의 본질은 근본적인 두 계급인 생산수단을 소유한 계급과 그러지 못한 계급, 즉 잉여가치의 전유자와 생산자 사이의 모순이다. 이러한 모순은 지식의 영역에서도 등장한다. 잉여가치의 전유는 착취와 불평등 그리고 이기심을 합리화하는 세계관을 필요로 한다. 이것이 바로 자본의 합리성이다. 다른 한편 노동은 자본의 지배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그와는 반대되는 합리성을 드러내야 한다. 따라서 노동의 합리성은 협력, 연대 그리고 평등에 기반하고 있다. 자본가들은, 늘 그렇듯이, 다양한 형태의 지식이 지닌 공통된 특징이 자본의 합리성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라는 점을 항상 비밀로 해야 한다. 자본의 지배에 저항하기 위해 노동자들은 그와 반대되는 계급적 내용을 지닌 지식의 형태들을 창출해야 한다.
이러한 인지적 적대는 두 기본 계급에 뿌리 내리고 있고, 다종다양한 개별 지식의 형태들로 확대돼 영향을 미친다. 그 내용 또한 인지적 적대의 영향을 받게 된다. 개인은 각자 나름의 방식대로 서로 갈등을 빚는 두 합리성을 내재화하고 그래서 그 지식 형태는 참으로 다종다양하다. 개인이 내재화하는 지식의 계급적 성격이 적대적이기 때문에 그 지식은 내적으로 모순될 수밖에 없다. 두 합리성은 개인들의 지식에서 서로 갈등하는 방식으로 공존한다. 하지만 두 합리성 중 하나만이 우위를 차지한다. 인지 영역에서 중립적인 영역은 존재하지 않는다.
35 사회 집단과 사회적 지식 형태들이 특정한 개인과 그래서 개별적 의식 형태들의 특수한 특징들과는 무관하게 스스로를 재생산하고 그 계급적 성격을 가질 수 있는 이유는 바로 이 때문이다. 36
개별적인 지식 형태들이 모여 사회적 지식 형태들을 이룬다. 하지만 사회적 지식은 단지 개별적지식 형태들의 산술적 합은 아니다. 개별적 지식은 그 정의상 이질적이고 그래서 더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런 총합을 가능하게 만드는 공통의 요소가 있어야 한다. 그 요소가 바로 개별적 지식 형태의 계급적 성격이다.37 유기적 지식인은 특정 사회 집단에 속하는 구체적 개인들의 다종다양한 지식 형태를 그들 자신의 관점으로 변형시킨다. 이들이 표현하는 것은 집단적 지식의 개별적이고 개인적인 해석이 된다. 그 표현들은 일반성의 구체적 형태가 된다. 유기적 지식인과 이들이 대변하는 지식은 그 집단의 집단적 지성 혹은 집단적 주체성 또는 집단적 지식을 형성한다. 38 유기적 지식인과 그 집단의 구성원 사이에서 지속적인 상호작용이 있을 때 그 집단의 집단적 지식은 유기적 지식인만이 아닌 집단적 지식의 산물이다. 유기적 지식인은 그 집단적 지식에 통일된 형태를 갖추는 데 기여한다. 39
개별적 지식 형태들의 종합은 그러한 종합을 수행하는 행위자가 있어야 한다. 이 글에서는 그 행위자를 그람시를 따라 유기적 지식인이라 부르도록 한다.한 집단 내에서 하나 이상의 유기적 지식인이 등장할 수 있다. 이들 각각은 집단적 지식에 상이한 해석을 제공하며, 각각의 견해는 서로 지배적인 것이 되고자 경쟁한다. 또한 한 집단 내에는 하위 집단이 있을 수 있다. 각각의 하위집단도 낮은 수준의 총체적 능력을 발휘하는 하나 또는 여럿의 유기적 지식인들이 대변할 수 있다. 그래서 한 집단의 집단적 지성은 여러 하위집단들의 집단적 지성과의 상호작용에서 생겨날 수 있다. 하지만 이것이 전부가 아니다. 한 집단의 유기적 지식인은 일반적 지성과 상호작용하며 그래서 다른 집단의 유기적 지식인들과도 상호작용한다. 유기적 지식인은 유기적 집단 지성이 근본적 변화를 겪기 전까지는 다른 계급의 관점에서 도출된 집단적 지식의 요소들을 내재화할 수도 있다. 이들 두 합리성이 개별적 지식 형태뿐 아니라 모든 지식 형태에서 지배적인 지위를 차지하기 위해 벌이는 계속된 투쟁이 인지적 계급투쟁, 즉 지식의 생산을 둘러싼 계급투쟁이다. 개인들이 지식의 형태들을 내면화할 때 사회적 지식 형태들도 내면화한다는 점을 알 수 있다. 사회적 지식의 이런 형태들은 개인들의 내면화를 통해 다시금 개인적 지식 형태로 바뀐다. 개인적 지식 형태는 집단적 지성의 등장을 통해 다시 사회적 지식 형태로 변형된다. 개인 지식은 종합돼 사회적 지식이 됐다가 다시금 개인의 내면화 과정을 통해 개인적 지식으로 변형된다. 따라서 계급의식 이론의 틀로서 개인의 욕구와 선호 그리고 선택 등에 초점을 맞추는 이론들은 잘못된 것일 뿐 아니라 유해하기까지 하다.
노동과 관련해서 이것은 다음을 의미한다. 노동의 합리성을 옹호하고 강화하는 것은 누가 지적 대표자인지에 따라 다른 형태를 취할 수 있다. 그리고 집단적 지성이 자본의 합리성을 막을 수 있는 능력은 집단적 지성의 지적 능력뿐 아니라 계급투쟁을 표현하고 또 영향을 미치는 모든 사회적 관계와 과정들(예컨대 호황 또는 불황의 장기적인 경제적 국면, 정치권력 관계, 가장 작은 것부터 가장 거대한 것에 이르는 노동조합 같은 노동 제도들과 조직들 등)의 다양한 표현 형태들에 달려 있으며 그래서 그 투쟁의 성격에 대한 지식에 달려 있다.
지식이 사회적으로 중립적이지 않고 한 계급의 내용을 갖고 있다는 테제는 심지어 많은 마르크스주의자들조차 거부하는데, 이들은 마치 자연과학을 대하는 것처럼 지식을 대하기 때문이다. 이들은 지식의 내용은 아닐지라도 그 활용은 사회적으로 결정할 수 있다고 여긴다. 하지만 사람들이 특정한 계급적 성격을 내면화한다면 그들이 표현하는 지식 역시 특정한 사회적·계급적 성격을 지닐 수밖에 없다. 바로 이 점만으로도 지식의 계급 중립성 명제는 설득력을 잃는다. 하지만 지식이 계급적 성격을 갖는다고 주장하기 위해서는 많은 설명들이 필요하다.
1부에서처럼 지식의 계급적 성격이라는 개념을 정신적 노동과정에 대한 분석에 적용해본다면 정신적 노동과정의 산출물로서 지식의 계급적 성격은 생성에 참가한 지식(정신적 투입물)의 계급적 내용에 달려 있다. 그래서 산출물의 사회적 내용이 투입물의 사회적 내용에서 어떻게 도출되는가에 대한 분석은 투입물의 사회적 내용에 대한 분석을 해야 한다는 의미다. 그런데 특정 시점의 투입물은 그 이전 시점의 산출물이기 때문에 우리는 무한반복의 함정에 빠지지 않을까?
41 t1시점에서 우리는 KN(t1)의 사회적 내용을 분석할 수 있지만, 그 정신적 투입물, 즉 t0시점에 노동력에 담긴 지식 KL(t0)의 사회적 내용은 분석할 수 없다. 다음 생산기인 t1-t2 시간대에는 KN(t2)가 생산된다. 이 때의 투입물인 KN(t1)은 이전 시간대의 산출물로서 그 사회적 내용은 이미 알려져 있다. 한 시간대의 산출물은 다음 시간대의 투입물이 되므로, t0-t1 시간대의 산출물인 KN(t1)은 동시에 t1-t2 시간대의 투입물인 KL(t1)이다. 그럴 경우 KL(t1)이 KN(t2)의 사회적 내용을 어떻게 결정하는지를 분석할 수 있다. 따라서 t2 시점부터는 정신적 투입물의 사회적 성격이 새로이 창출된 지식의 사회적 내용을 어떻게 결정하는지를 분석하는 것이 가능해진다. 42
분석의 출발점, 예를 들어 t1시점을 t0-t1 시간대의 끝에 있다고 하자. 이 시간대에는 새로운 지식이 생성되는데, 이를 KN(t1)이라고 하자.이와 같은 분석에 바탕을 두고, 비판자들이 애용하는 반박 중의 하나인 2+2는 항상 4라는 비판을살펴보자. 사회적 내용은 변한다는 점과 2+2=4는 불변의 진리라는 점을 전제했을 때 2+2=4라는 사실은 그 어떤 사회적 성격도 포함하지 않는다. 우선 무엇보다도 2+2는 항상 4가 아니다. 이 명제는 우리가 무엇을 어떻게 측정하려 하는지에 달려 있다. 예컨대 하루의 시간을 기록하는 우리의 체계는 0에서 23까지 있으며, 24=0이고 24+2는 26이 아니라 2다. 수학에서는 이것을 24진법에 따라 26≡2와 같이 표기할 수 있다. 0에서 12까지 쓰는 시계를 살펴보자. 그러면 12=0이고, 10+6≡4가 된다. 이번에는 4진법 체계를 상정해보자. 4진법에서는 4=0이 되고 2+2≡0이 된다. 하지만 예를 들어 24진법 같은 진법을 선택한다면 2+2는 항상 4가 된다. 그러면 그 진법의 사회적 성격은 무엇일까?
43 원래 이런 지식 형태는 개인의 인식의 결과물일 수 있다. 하지만 이 지식이 사회적 필요를 충족시키지 못하면 그것은 쓸모 없을 뿐 아니라 집단적 지식이 이론화한 결과물로 전환되지 않는다. 그래서 그 지식은 그 집단 또는 사회에 의해 무시된다. 따라서 사회적 지식은 그 정의상 그것이 충족시키는 공통의 필요라는 사회적 성격을 지닌다. 수학의 경우는 어떠한가? 수학이 만족시키는 사회적 필요, 즉 그 사회적 내용은 구체적 측면들에서 양적인 것을 추상화하여 수량화할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흔히들 생각하듯이 수량화는 항상 필요했던 것은 아니었다. 수량화의 필요성은 생산력 발전이 일정한 수준에 이르러서야 등장했다. 다음의 사례는 이 점을 명확히 보여 준다. 44
많은 사람들이 공유하는 지식 형태인 사회적 지식은 집단적 이익의 방어처럼 사회적 필요를 충족시켜야 한다. 여기서 말하는 사회적 필요는 노동의 합리성에서 비롯할 수도 있고 자본의 합리성에서 비롯할 수도 있다.고대 그리스인들은 세계를 구체적인 사물들이 질서정연하게 배열된 체계로 인식했다. 숫자들의 순서는 흩어져 있는 개체들로 이뤄진 연쇄와도 같았다. 그 당시에 숫자란 항상 특정 사물의 개체 수를 나타내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자연스러웠다. 즉 그들에게 숫자란 순서를 메길 수 있고 셀 수 있으며 흩어져 있는 구체적인 숫자를 의미했다. 흩어져 있는 성격 때문에 숫자들은 점으로 표현할 수 있었고, 그래서 삼각형이나 사각형 또는 다른 도형들로 그 순서를 메길 수가 있었다. 이에 따라 그리스인들은 ‘형상수’ 개념을 발달시켰다(예컨대 삼각수). 그들은 숫자가 늘 가시적이면서 감각적인 형체를 지니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모든 숫자들은 순서를 갖고 있다고 여겼기에 각 숫자의 위치는 그것들의 존재와 본성을 드러낸다고 생각했다. 각 사물은 산술적 특징을 가지고 있고, 그러한 산술적 특징은 해당 사물의 존재와 관련된 것으로 여겨졌다. 숫자를 분류하는 일은 삶의 의미를 깨우치기 위한 수단으로 여겨지기도 했다. 그래서 숫자에 대한 추상적 개념은 고대 그리스들의 존재론과는 양립할 수 없었다.
자본주의의 등장과 더불어 숫자들은 동적이고 활동적인 변화 과정의 속성을 나타내는 새로운 기능을 하게 됐다. 이것은 일반적 관계에 대한 탐색이 필요했고, 이어서 숫자는 그것이 측정하는 사물과는 분리된 추상적 숫자가 돼야 했다. 이는 숫자를 불연속적이고 이질적인 점들의 연속이 아니라 동질적인 실체의 연속적인 직선에 비유할 수 있음을 의미했다. 숫자라는 개념이 자본주의가 등장하면서 잔존할 수 있었던 것은 숫자가 사회적이고 계급적으로 변화하는 현실을 보는 세계관의 한 요소가 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45 이것이 이 수식이 등장한 사회적 결정 요소였다. 인류 역사의 특정한 발전 단계에 이르러서야 측정되는 대상과는 무관하게 양적 측량의 필요성을 수학과 공유하게 됐다는 것이 그 사회적 내용이다. 수학은 시대를 가로지르는 지식의 요소인데, 그 이유는 한편으로는 원래의 사회적 내용이 시대를 가로질러 변하지 않기 때문이고 또 추상적으로 양적으로만 측정해야 할 필요성이 모든 시기와 사회는 아닐지라도 상이한 시기와 사회에서 제기됐기 때문이다. 다른 한편으로는 이런 사회적 내용은 변화하는데, 추상적 수량화의 구체적 이유가 상이한 역사적·사회적 환경에 따라 변화하기 때문이다. 이런 일반적인 사회적 내용은 상이한 시기와 사회에서는 구체적 성격을 지닌다.
다시 2+2=4로 돌아가 보자. 이 개념은 물론 자본주의 등장 이전부터 정립된 것이다. 그러나 고대문명들은 2보다 더 큰 숫자에 대한 개념이 없었다. 그래서 그들은 ‘많은 사람들’과 같은 표현을 사용했다. 수의 체계와 2+2=4와 같은 수식은 교환과 상업이 등장하면서 생겨난 것이다.그런데 자본주의에서 모든 계급은 자신의 합리성을 표현하기 위해 수학을 필요로 하기 때문에 수학은 계급을 넘어서는 지식 요소이다. 따라서 구체적인 사회적 내용을 제거하면 이런 계급적 내용은 보이지 않게 된다. 수학과 2+2=4의 계급적 내용은 사회적 현실의 영역에서 벌어지는 정신적 노동과정에 포함될 때 그래서 하나의 요소로서 정신적 노동과정의 계급적 내용에 포함될 때 비로소 가시적으로 된다. 사물을 추상적 수량으로 측정할 일반적 필요성이 구체적으로 나타나면서 그 계급적 내용도 획득한다. 이것은 2+2=4라는 점을 입증할 때마다 적용된다. 이것의 구체적인 사회적 내용은 사회적 현실의 영역에서 이뤄지는 정신적 노동과정에서 도출된다. 그 증명은 예컨대 학교에서 이뤄지는 수업에 들어 있다. 간단히 말해 수학은 시대와 계급을 초월해서 사용될 수 있는데, 그것은 수학이 사회적으로 중립적이기 때문이 아니라 바로 그 사회적 결정과 내용 때문이다.
46 이것이 바로 인지적 계급투쟁이다. 노동의 ‘허위의식’은 실재에 대한 왜곡된 반영이 아니라 노동이 자본의 합리성을 받아들인 것이다.
지금까지의 논의는 자본주의에서 일반적인 지식 생산을 다뤘다. 이제 자본에 고용된 정신 노동자가 수행하는 정신적 노동과정의 구체적 사례들을 살펴보자. 일반적인 지식 생산이란 이미 존재하는 지식을 자본이 소유한 정신적 생산수단을 통해 새로운 지식으로 변형시키는 과정을 말한다. 이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자본가는 예컨대 사무실 부지나 컴퓨터와 같은 객체적 변환의 객체적 수단들을 소유한다. 정신적 노동과정의 맥락에서 이 수단들은 정신적 변환의 객체적 수단이기도 하다(1부를 보라). 게다가 자본가들은 정신적 노동자들의 노동력을 소유한다. 그래서 자본가들은 어떤 지식을 어떻게 그리고 누구를 위해 생산할지를 결정할 수 있다. 또는 자본가들은 자신들의 목표를 위한 문제들을 정의하고 해결할 힘을 갖고 있다. 이런 의미에서 자본가들은 정신적 변환의 정신적 수단(식2에 나오는 KL)을 소유하고 있다. 정신적 노동자가 생산하는 지식은 노동의 합리성이 아닌 자본의 합리성에 의해 결정된다.일반적으로 자본가들은 정신적 노동과정을 조직하고 관리하는 데 필요한 능력을 지니고 있지 않다. 그래서 이런 일은 자본이 고용한 집단적 지성이 맡는다. 여기서 유기적 지식인은 정신적 노동과정의 구조를 계획하고 집단적 지성에 속하는 다른 인자들이 수행해야 할 업무를 결정하며 그래서 정신적 노동과정의 구조를 형성한다. 정신적 노동과정의 구조는 파편화돼 있어서 집단적 지성이 노동과정 전반을 총체적으로 이해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자본주의에서 노동이 하는 지식 생산의 구조는 자본이 노동을 지배하기 위한 도구다. 이 구조는 마르크스가 처음 분석했고 비교적 최근에는 브레이버먼 논쟁에서 다뤄진 위계화된 구조다. 하지만 이와는 상이한 형태의 노동과정 또한 존재하는데, 정신 노동자가 조정자 같은 자본의 대리인의 궁극적인 승인과 조정에 종속돼 있긴 하지만 자신의 창조성을 다소간 자유롭게 발휘하는 정신적 노동과정이다. 위계구조는 최소한으로 줄어들지만 이들 노동자들이 잉여가치를 생산하도록 하기 위해 그 위계구조는 사라지지는 않는다. 이런 목적을 위해 유기적 지식인들은 자본의 목표를 내면화하고 그것을 그 자신의 목표로 삼아야 한다.
47 하지만 그 지식은 집단적 지성으로 유지된다. 이를테면 자본이 지식의 원본을 전유하지만 그 복제품은 노동에게 돌아간다. 따라서 집단적 지성은 그 자신의 목적을 위해 생산한 지식을 활용할 수 있고, 그래서 자본의 지배에 저항하는 데 이용할 수 있다.
자본의 지배 하에서 이뤄지는 지식생산은 고유한 특징을 갖고 있다. 객체적 생산에서 자본이 잉여 생산물(잉여가치)을 전유해 가면 노동에게는 아무것도 남지 않는다. 정신적 생산에서 자본은 정신적 생산수단을 소유하고 그래서 그 과정의 산출물을 전유해 간다.48 또 노동자들의 집단 내에서 협력을 위해 필요한 지식을 살펴보자. [생산 과정의] 규칙들은 자본의 지배에 도전할 수 있는 노동자들의 잠재력 또는 역량을 최대로 발전시킬 수 있는 것들이 아니라 생산성과 수익성을 증대시키는 것들이다. 노동에서 보여지는 연대는 자본 지배의 무기로 전환된다. 제약회사는 인간의 복지가 아니라 이윤을 극대화하는 약품을 생산한다.
하지만 자본의 합리성은 노동의 합리성보다 우세한데, 정신 노동자들은 결국 자본이 소유한 정신적 생산수단을 이용해 지식을 생산하기 때문이다. 물론 노동은 자본의 지배에 저항할 수 있지만, 그런 저항도 결국 자본의 지배라는 테두리 내에서 이루어진다. 예를 들어 조립라인의 속도를 느리게 할 수도 있다. 또는 자본이든 노동이든 총기를 사용할 수 있지만 그것은 생산을 위해 필요한 지식의 계급적 중립성 때문이 아니라 자본 또는 노동의 계급적 결정 때문이다.49 그런데 지식이 정신적 행위자들에 의해 생산됐다면, 자본주의적(정신적 생산) 관계 내에서 생산된 것이 아니기 때문에, 노동의 합리성이 지배할(반드시 그런 것은 아니지만) 수 있는 모순적인 사회적 내용을 가질 수 있다. 이 지식은 자본의 지배에 맞서 싸우는 데 활용될 수 있다. 인터넷이 중요한 진정한 이유는 바로 이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인터넷에서 지식 생산이라는 문제를 다뤄 보자. 정신적 노동자들이 지식을 생산한 경우라면 앞서 전개한 분석을 모두 적용할 수 있다. 이것은 예를 들어 비디오게임에 내재해 있는 친자본주의적 지식을 설명해 준다.50 는 “공통적인 것은 자본주의적인 것도 아니고 반자본주의적인 것도 아니다. 그것은 무엇보다도 자본주의와 관련 없는 것으로, 미묘한 위치에 있다”는 의견을 제시했다. 하지만 연대에 기반해 이뤄지는 비위계적 지식 생산과정에서 새로운 것이란 없다. 이와 같은 지식생산은 자본주의가 탄생한 이래 자본주의의 특징이었다. 그 이유는 단순한데, 자본주의적 지배가 없으면 그에 대한 저항도 없으며 자본의 지배에 맞서 싸우기 위한 무기인 노동 친화적인 지식들의 생산도 이루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과거와 다른 점이 있다면 그것은 인터넷이 널리 그리고 심도 있게 활용된다는 점과 그로 인해 새롭고 고유한 모순을 지닌 지식 형태가 창출된다는 점이다.
여기서도 지식의 비중립성 명제는 논쟁거리이다. 예를 들어 슈탈더소수의 정신적 행위자가 참여한 지식생산은 처음에는 그 영향이 미미할 수밖에 없다. 소수 사람들의 상호작용을 통해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지식이 갖는 중요성을 결코 과소평가해선 안 된다. 지식의 생산에 참여한 정신적 행위자들은 사회의 나머지 부문들과 상호작용하며, 그들이 생산한 지식 역시 수많은 개인들과 수많은 사회적 지식 형태와 상호작용하기 때문이다. 그와 같은 제한적인 지식생산조차 더 넓은 자본 친화적인 혹은 노동 친화적인 지식 형태가 탄생할 수 있는 조건을 형성한다. 그 지식이 지니는 영향력은 처음에는 상대적으로 크지 않을 수 있지만 나중에는 증폭될 수도 있다. 인터넷에서 지식의 생산은 지식을 둘러싼 투쟁이기도 하다. 이것은 자본 합리성과 노동 합리성 사이에서 다종다양하고 변화무쌍하게 표현되는 더 넓은 인지적 계급투쟁의 일부다.
4 ‘인지 자본주의’라는 환상
51 가 지적한 바처럼, 인지 사회라는 이미지는 “전 세계 노동인구 중 상대적으로 특권적 부문”이 오늘날의 자본주의를 이해하는 방식이다. 하지만 토론을 위해 모든 객체적 노동과정이 소멸하고 오직 정신 노동자들만이 남게 됐다고 하더라도 자본주의의 낡고 쇠약한 특징은 비록 새로운 모습을 할지라도 계속 재등장할 것이다. 이에 대해서는 앞에서 몇 가지 사례를 다뤘다.
인터넷에 대한 자기 변호조의 분석은 정보사회론 혹은 인지 자본주의론과 밀접히 연결돼 있다. 그런데 이 용어들은 매우 이데올로기적 성격을 지니고 있다. 일반적으로 정보라 하면 조작적operational 지식의 교류를 의미한다. 이런 개념은 지식의 계급 중립성 신화를 반영하고 또 재생산한다. 그래서 정보information 대신 지식knowledge이라는 단어를 주로 사용한다. 인지 사회라는 개념도 마찬가지로 이데올로기적인 용어다. 헤닝어인터넷에서 예컨대 IT기업의 프로그래머 같은 일부 정신적 노동자들은 자신의 창조력을 발휘해서 개념적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 이런 작업은 심리적으로 보람 있는 일이고 또 보수도 두둑하다. 그래서 이들은 미래의 노동자계급을 예시하는 것은 고사하고 새로운 형태의 노동귀족으로 취급 받을 수 있다. 그들은 특권적 지위에도 불구하고 자본의 지배에 종속돼 있다. 그들은 자신들의 창조성(매우 숙련된 노동)을 (대체로는 지불받지 못하는) 자유시간에조차 적용해야 한다. 그들이 개발해야 한다는 압력을 받고 있는 기술은 자본이 사용할 수 있는 것이다. 즉 그들의 구상은 자본 합리성의 특징을 지닌다. 그들의 일자리 또한 경기 변동에 종속돼 있다. 객체적 노동과정에서와 마찬가지로 새로 형성된 고도의 숙련된 직무도 탈숙련의 위험에 항상 시달린다. 새로운 형태의 프롤레타리아화가 이뤄진다. 다음 인용문이 이를 잘 보여 준다.
52 즉, 디지털 시대에 성과급 노동을 재탄생시킨 저임금의 가상 노동 현상을 가능하게 한 혁신이었다. 2005년에 아마존이 개발한 이래 메카니컬 터크는 크라우드에 기반한 노동이 매매되는 주요 플랫폼 ― 실제로 시장 ― 중 하나다. “크라우드워커”cloudworker 50만 명이 메카니컬 터크를 이용하고 있고, 그 외에도 수백만(정확한 숫자는 아무도 모른다)이 크라우드플라워crowdflower, 클릭워커clickworker, 클라우드크라우드cloudcrowd나 그보다 작은 십여 개의 유사한 사이트들을 이용한다. 어느 날 어느 시점에 크라우드소싱에 참여하는 노동자들이 크고(트위터 같은 기업을 생각해보라) 작은 기업들을 위해 수백만 가지 자잘한 업무들을 수행하고 있다. 그런데 그들 중 자신이 수행한 노동 생산물이 뭔지를 알고 있는 사람이 거의 없을지라도 그들이 수행하는 작업들이 우리가 당연한 것처럼 여기는 인터넷의 여러 부분들이 원활히 운영되도록 돕는 것이다.
메카니컬 터크Mechanical Turk는 크라우드소싱crowdsourcing 2010년에 크라우드플라워의 루카스 비월드가 신기술에 열광하는 젊은 청중들에게 퉁명스런 어투로 다음과 같이 무심코 말했다. “인터넷이 없었더라면 누군가를 찾아서 딱 10분 동안 앉아서 일을 하도록 한 뒤 10분 후 해고하는 건 불가능했을 것이다. 하지만 기술 발전 덕분에 그런 사람들을 실제로 찾아서 아주 쥐꼬리만한 돈을 주고 일을 시킨 다음 더 이상 필요 없어지면 바로 해고할 수 있게 됐다.”
54 이 크라우드워크를 다루면서 말했듯이, “2005년 이후로 아마존은 어느 누구도 본 적 없는 가장 착취도가 높은 작업장을 만드는 데 기여했다.”
크라우드워커의 착취율은 많은 객체적 생산과정에서보다 더 높을 수 있다(그들이 인식하건 하지 않건 간에). 마빗55 도 제약을 받을 수밖에 없다. 56 하지만 그들의 정신적 생산이 자본의 합리성으로부터 영향을 받지 않으므로 이들은 자본의 합리성이 아닌 대안적인 계급적 내용을 가지는 지식을 만들 수 있다. 대표적인 사례는 ‘프랑스의 민주주의’라는 13분짜리 정치 다큐멘터리인데, 이 다큐멘터리는 2005년 파리 근교에서 일어난 이주민 청년들의 반란을 다룬 것이다. 이 동영상은 “대략 60달러 정도의 제작비로 만들어졌다. 많은 사람들이 이 영화를 무료로 다운로드했으며, 유튜브에도 업로드돼 있다. 이 동영상은 많은 언론의 관심을 받았고, 여러 영화제에서 상영되기도 했다. 그 덕분에 이 동영상은 파리의 교외지역에서 대서양 너머 전 세계로 뻗어나간 가장 효과적인 성명서가 됐다.” 57
정신적 행위자들이 만드는 지식도 자본주의적 합리성의 모습을 띨 수 있다. 이것의 사례는 많은 정신적 행위자들의 기여에 의존하는 오픈소스OS 프로젝트일 것이다. 그들 중 많은 이들이 자본에 고용되기를 바란다. 그들이 개발하는 기술들이 자본의 필요를 충족시키는 것이어야 한다. 따라서 그들의 자유로운 창의력과 자주 언급되는 ‘놀이 노동자’playbor이 글에서 검토한 사례 연구들은 새로운 현상의 등장을 강조해 왔다. 이런 새로움은 결국 묵은술, 즉 자본주의와 그 이중적이고 모순적인 합리성을 담은 새 술병에 지나지 않는다. 더 넓은 그림으로 보면 이 주장은 더 분명하게 지지를 받는다. 〈이코노미스트〉에 실린 기사에서는 “디지털 혁명으로 인해 창출된 부는 압도적 비율로 자본 소유주와 고숙련 노동자들에게 집중됐다. 지난 30년간 세계의 노동소득분배율은 64퍼센트에서 59퍼센트로 감소했다. 반면 미국에서 상위 1퍼센트가 분배에서 차지하는 몫은 1970년대의 9퍼센트에서 오늘날 22퍼센트로 증가했다. 또한 부유한 나라 중 상당수에서 실업률이 치솟아 위험한 수준에 이르고 있는데, 이는 경기적 요인 때문만은 아니다. 2000년에 미국의 노동가능인구 중 65퍼센트가 고용돼 있었다. 그 때 이후로 그 비율은 경기의 호·불황을 가리지 않고 꾸준히 하락하여 오늘날에는 59퍼센트까지 떨어졌다.”(2014) 이것은 바로 마르크스가 예측했을 것들이다. 〈이코노미스트〉가 언급하지 않은 또 다른 중요한 사실은 지난 30년 동안 인지자본주의가 그 이전에 비해 최악의 위기를 포함해 수많은 위기로부터 도전을 받았다는 점이다. 웹2.0으로 알려진 인터넷의 폭발적 성장세를 보였던 15년의 세월이 지나간 이후 세계경제는 1929~1933년의 위기 이래 최악의 상황 하에 놓여 있다. 이 또한 마르크스라면 예측할 수 있었을 것이다. 노동자주의자들의 인지자본주의 이론과 달리 마르크스는 공황론이 있으니까 말이다.
오늘날 사회학 문헌들은 인터넷을 통한 정신적 행위자들의 교류나 이런 교류로부터 생겨나는 지식 형태들이 자본의 지배에 대항한 구체적인 저항 형태뿐 아니라 노동 합리성에 기반한 사회적 구조를 힐끗 보여 줄 수 있는 수많은 사례들을 제시한다. 하지만 이런 시도들이 늘어나면 자본주의 생산관계가 역사의 쓰레기통으로 들어가지 않고서도 근본적 사회 변화를 초래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위험한 환상이다. 인터넷은 자본과 노동 사이의 분할을 없애지도 않고 가치법칙을 바꾸지도 않는다. 인터넷은 그저 전 지구적 규모에서 지식의 교류가 이뤄질 수 있는 독특한 무대를 제공하고 자본-노동의 모순이 표현되는 다양한 인지적 형태들을 다시 만들었을 뿐이다. 이 인지적 형태들을 분석하기 위해서는 마르크스의 가치이론을 버려선 안 된다. 다만 마르크스의 가치이론을 분석에 적용하는 것으로도 충분할 것이다.
주
-
출처: Guglielmo Carchedi, Old Wine, New bottles and the Internet., Work Organisation, Labour & Globalisation Vol.8, No.1 (Summer 2014)
↩
- 보다 완결된 논의로는 Carchedi 2012의 1장과 4장을 참고하라. 또 Carchedi 2005를 보라. ↩
- 이것은 시점을 달리하는 접근법인데, 이 접근법은 이른바 전형문제를 해결하는 데서도 적용될 수 있다. 이에 관해서는 Carchedi 1984, 2001, 그리고 2012를 보라. ↩
- 노동자주의에 대한 총체적인 비판은 이 글의 범위에서 벗어난다. 이에 관련해서는 Carchedi 2012, Henninger 2007, Strosta 2012를 보라. 몇몇 저술가들, 특히 노동자주의 논자들이 사용하는 ‘비물질’ 개념은 이 글에서의 ‘정신’ 개념과 유사해 보일 수 있다. 그럼에도 이 둘 사이에는 결정적 차이가 있는데, 노동자주의 논자들은 마르크스의 노동가치론을 부정하지만 이 글은 노동가치론을 유지할 뿐 아니라 그 바탕 위에 마르크주의 인식론을 건설하기 때문이다. ↩
- Rey 2012, p406는 이러한 견해를 가진 여러 사람 중 한 명이다. ↩
- 정신적 노동과정은 순환적이지는 않지만 연속적이다. 이 점에서 나는 다음의 견해와 다르다. “정보는 투입물인 동시에 산출물이기도 하다는 점에서 순환적 성격을 지닌다. … 따라서 정보의 생산과 분배 그리고 소비를 구분하기가 매우 어려워진다.”(Kostakis 2012, p2) 이는 특정 정보가 동일한 노동과정의 투입물인 동시에 산출물이라고 말하는 것과 다를 바 없다. 이런 오류는 마르크스주의자나 비非마르크스주의자 가릴 것 없이 상당수의 저자들이 범하는 것인데, 특히 가치에서 가격으로의 전형문제를 다룰 때에도 마찬가지다. ↩
- Denton and Restivo 2008, pp160-171 등을 참조하라. ↩
- 정신적 생산수단의 소유권 개념에 관해서는 뒤에서 다룬다. ↩
- Pfeiffer가 정확히 지적했듯이, “지금까지의 연구를 봤을 때 가치창출의 원천이 실질적으로 변화했다는 결론을 내릴 만한 뚜렷한 근거는 존재하지 않는다.”(2013, p19) ↩
- 비디오 게임 생산에 대한 보다 철저한 분석을 위해서는 Dyer-Witheford and de Peute 2009를 참조하라. 비록 이 책이 노동자주의 관점에 입각해 있지만 그럼에도 매우 유용한 저작이다. 특히 이 책은 ‘가상 게임’과 그 게임이 개발된 실재의 사회적 맥락 사이의 상호작용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
- Legault 2013, p79. ↩
- Pitts 2013, p102. ↩
- Pitts 2013, p101. ↩
- Pitts 2013, p95. ↩
- Terranova 2000, p43. ↩
- Dyer-Witheford and de Peute 2009, p64. ↩
- 이 글에서는 간략히 밝혔지만 인지 상품 개념에 대한 비판으로는 Starosta 2012를 보라. ↩
- 물론 어떤 행위자들은 생산적 노동과 자본의 기능을 번갈아 수행하기도 한다. 이해 관련해서는 Carchedi 1977을 참조하라. ↩
- Carchedi 2012, pp220-225를 참조하라. ↩
- Ross(2013)은 이러한 주장을 견지하는 여러 사람들 중 하나다. ↩
- Kostakis 2012, p6에서는 “유저들이 기업을 위해 가치를 창출한다”고 주장한다. 이에 반해 Reveley(2013)는 유저들이 가치를 생산하지 않는다고 주장하는데, 유저들은 데이터를 수동적으로 그리고 무의식적으로 창출해낼 뿐이기에(p515) ‘주요한 생산자’가 아니다.(p.516) ↩
- 몇몇 블로그 사이트에서도 이런 업무를 통해 이윤을 창출한다. 다음을 참조하라. Geert Lovink, Ossessioni collettive, Università Bocconi Editore 2011, p22. ↩
- Ross 2013, p214; Riehle 2007, p30. ↩
- Kostakis 2010. ↩
- Lakhani and Wolf 2005, pp9-10에 따르면, 인터뷰에 응한 개발자 중 40퍼센트가 오픈소스 프로젝트에 참여하는 대가로 임금을 받거나 근무시간 중에 오픈소스에 참여할 수 있었다. ↩
- West and Gallangher 2006, p329. ↩
- Fuchs 2010. ↩
- 이와 관련해서는 Henninger 2007 또한 참조하라. ↩
- Ibid. ↩
- Rey 2012를 참고하라. 하지만 이런 주장을 하는 사람들은 워낙 흔하다. ↩
- Lakhani and Wolf 2005; Banks and Deuze 2009; Prahalad and Ramaswamy 2000. ↩
- Prahalad and Ramswamy 2000. ↩
- Küklich 2005. ↩
- 혹은 ‘창조적 전문가’ 즉 숙련된 정신적 노동자를 고용하는 데 드는 비용으로 프로슈머가 이들을 대체한다. 이에 관하여서는 Banks and Deuze, 2009를 참조하라. ↩
- Pfeiffer 2013, p15. ↩
- 이것은 마르크스가 상품에 대한 개념, 즉 그것들의 공통된 사회적 실체인 추상노동 때문에 교환 가능하다는 것과 비슷하다(Marx 1967, pp28-29). ↩
- 이 쟁점을 충분히 다루려면, 구체적 개인과 추상적 개인에 대한 이론과 그들 사이의 구분 그리고 개인적 현상과 사회적 현상 사이의 구분을 전제해야 한다. 이에 관해서는 Carchedi 2012, 1장을 참조하라. ↩
- 그람시와는 다르게 이 글에서 사용되는 ‘유기적 지식인’은 어떤 사회집단을 위해 견해를 종합하고 이익을 대변하는 사람들을 말한다. ↩
- 여기서 말하는 집단적 지식 개념은 노동자주의자들이 말하는 일반적 지성과는 전혀 다르다. 노동자주의자들은 한번도 진지하게 분석한 바가 없는 신비로운 개념인 정신적 생산의 집단적 과정을 통해 일반적 지성이 지식을 만든다고 주장한다. ↩
- 그래서 집단적 주체성이 개인적 정체성을 제거한다는 주장은 사실과 전혀 다르다. ↩
- 에릭 올린 라이트는 이런 잘못된 접근법의 한 사례다. 이에 관련해서는 Carchedi, 1989를 참조하라. ↩
- KN, KL, KO라는 변수의 표기에 관하여서는 앞의 식 (2)를 참고하라. 식을 단순화하기 위해서 KO는 생략한다. ↩
- ‘이른바 전형문제’와 관련된 무한추론 문제에 대한 해법 역시 이와 유사하다. 이에 관해서는 Carchedi 2012를 참조하라. ↩
- 앞에서 살펴봤듯이, 두 합리성이 동일한 지식 형태 속에서 공존하는 경우는 매우 흔하다. 따라서 핵심은 두 합리성 중 어느 쪽의 영향력이 지배적인가 하는 문제다. ↩
- 다음의 두 문단은 Carchedi 2012, pp258-259에서 가져왔다. 하지만 원문에서는 더 자세하게 논의하고 있다. ↩
- 예컨대 Dirk J Struik 1948을 보라. 또한 Wichita State University를 참조하라. ↩
- 자본가들은 자본 합리성이 지배적인 특정 사회집단의 집단적 이해관계를 방어하는 것을 통해 간접적으로 자신들의 목적을 성취할 수도 있다. ↩
- “지식과 숙련의 축적 그리고 사회적 두뇌가 갖는 일반적 생산력의 축적은 자본에 의해 흡수된다.” Marx 1973, p694. ↩
- 이 문제는 노동의 전략에서 비폭력의 구실과 연관된 쟁점을 제기한다. 하지만 이 쟁점은 이 글의 논의 대상을 벗어난다. ↩
- Dyer-Witherford and de Peute2009는 가상게임의 이데올로기적 본질에 대한 탁월한 분석을 제공한다. 하지만 이들의 연구는 노동자주의적 이론에 기반하고 있으므로 이 논문과는 매우 상이한 방법론을 취하고 있다. ↩
- Stalder 2013, p30. ↩
- Henninger 2007, p173. ↩
- [역자 주] 크라우드 워크는 플랫폼 노동이라고도 한다. 크라우드소싱은 디지털 플랫폼에 기반하여 이뤄지는 군중의 노동을 의미하는데, 고객이 요청하는 서비스를 여러 조각으로 분할하여 복수의 노동자들이 해당 업무를 수행하는 식으로 이뤄진다. 각각의 노동자들이 수행한 업무를 다시 합쳐서 하나의 서비스를 이루게 되면 이를 고객에게 전달한다. 아래에서 언급되는 메커니컬 터크는 크라우드소싱계의 원조격 플랫폼이다. ↩
- Marvit, 2014. ↩
- Marvit 2014. ↩
- [역자 주] Playbor는 놀이play와 노동labor을 합쳐 만든 조어이다. 닉 다이어 위데포드나 그릭 드 퓨터는 노동자주의자들처럼 오늘날의 자본주의에서는 일상의 모든 창조적 활동에서 착취가 이뤄진다고 주장한다. 이들은 놀이나 게임을 하는 와중에도 자본에게 이득이 되는 일, 즉 ‘놀이 노동’을 하게 된다고 주장한다. ↩
- Phoebe and Taylor 2009. ↩
- Dyer-Witheford and de Peute 2009, p187. ↩
참고 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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