쟁점: 현재의 이슈들
1997년 1월 파업 돌아보기
노동자들은 어떻게 싸웠고 지금 어떻게 싸워야 하는가? *
문재인 정부가 추진하는 노동법 개악에 맞선 대응이 주요한 쟁점 가운데 하나인 지금, 과거 노동법 개악에 맞선 파업에 대해 살펴보는 것은 의미 있는 일일 것이다.
1996년 12월 26일 김영삼 정부와 여당인 신한국당은 개악된 노동법을 국회에서 새벽에 날치기로 통과시켰다. 개악된 노동법에는 자본가들이 노동자들을 더 쉽게 해고할 수 있는 정리해고제와 노동자들의 노동조건과 임금수준을 악화시키는 변형시간근로제, 파견근로제를 포함돼 있었다. 또한 노동자들의 연대를 가로막는 대표적인 악법이었던 제3자 개입 금지 조항을 그대로 유지했다. 그리고 교사, 공무원 노동자들의 노동조합도 인정하지 않았다.
노동법과 함께 안기부법도 통과됐다. 안기부에게 국가보안법 7조를 적용할 수 있는 수사권을 준다는 것이었다. ‘국내의 적’(좌파와 노동운동)에 대한 탄압에 사용돼 온 국가보안법 7조에 대한 안기부의 수사권은 1987년 대중파업으로 폐지됐다. 이것을 다시 부활키는 것은 노동운동을 더욱 옥죄겠다는 선언이었다.
개악의 종합선물세트 같았던 날치기 법안은 노동자들의 분노를 자극하기에 충분했다. 민주노총은 즉각 파업을 선언했다. 첫날 노동자 14만여 명이 파업에 들어갔고 이후 연일 수많은 노동자들이 파업과 시위에 참여했다. 김영삼이 파업을 불법으로 규정하고 강경 대응하겠다고 윽박질렀지만 노동자들의 투쟁 열기는 더욱 높아졌다.
1997년 1월 중순에는 투쟁이 절정에 이르러 김영삼과 기업주들을 겁먹게 만들었다. 결국 1월이 지나기 전 김영삼은 노동법 재개정을 약속하며 머리를 숙일 수밖에 없었다.
1996년 말에 시작돼 1997년 1월에 이르는 파업(이하 1996-1997파업)을 통해 한국 노동계급은 1987년 노동자 대투쟁을 통해 역사의 전면에 등장한 이래 10년이 채 지나기 전에 다시 한 번 건재함을 과시했다. 그리고 이 사회를 변화시킬 주도 세력이 누구인지를 1987년에 이어 또다시 분명히 보여 줬다.
대체로 1996~1997파업의 배경은 국내적 맥락, 특히 노동조합 운동을 중심으로 설명한다. 그러나 이 투쟁의 배경을 좀 더 넓은 차원에서 살펴볼 필요가 있다.
국제적 맥락
1990년 전후는 세계사적 격변기였다. 1989~1991년 동구권과 소련이 붕괴했다. 소위 ‘사회주의’를 표방했지만 실제로는 경쟁적 자본축적을 위해 노동자들을 가혹하게 착취해 온 동구권과 소련의 정치 체제가 아래로부터의 저항과 함께 붕괴한 것이다. 학자 출신으로 미국 국무부 정책기획실에 근무하던 프랜시스 후쿠야마는 ‘역사의 종말’이라는 논문을 발표해 자본주의 이후의 대안은 없다고 선언했다.
하지만 이후의 그림은 서구 지배자들이 원하는 방향으로 진행되지 않았다. 국가자본주의에서 시장자본주의로 게걸음치듯 이동한 동유럽과 소련은 1990년대를 거치며 경제 기적은커녕 경제 위기와 대중 삶의 파탄으로 귀결되고 있었다. 이 때문에 1990년대 동구권에서는 대중적인 항의 시위와 파업들이 벌어졌다.
냉전 종식 후 세계는 서구 지배자들이 이야기한 ‘평화’, ‘자유’, ‘민주주의’와는 거리가 멀었다. 1990년대는 미국이 주도한 다국적군이 이라크에 무시무시한 폭격을 가하면서 시작됐다. 이 전쟁으로 어린이를 포함한 이라크인 20만 명이 희생됐다. 미국은 냉전에서 승리했지만 자신에게 도전장을 내밀 수 있는 강대국들이 존재한다는 사실 때문에 힘을 과시해야 했다. 1994년 한반도에서 전쟁이 날 뻔했던 것도 그 때문이었다. 1990년대 내내 세계 곳곳에서 폭탄 세례는 끊이지 않았다.
서구 자본주의 경제는 1990년에 접어들면서 1970년대 이래 장기적 경기 침체가 계속되는 가운데 1974~1975년, 1979~1981년에 이어 세 번째 위기를 겪고 있었다. 계속된 경제 위기와 저성장 때문에 정부의 재정적자가 심각하게 불어났다. 이 때문에 각국 정부는 재정적자를 감축하기 위해 복지 지출을 감축하거나 노동계급의 생활 수준을 깎아내리는 공격을 했다.
당시에 자본주의 시장주의자들이 세계 경기 침체의 영향을 받지 않고 발전하는 경제로 찬미했던 동아시아 경제도 예외는 아니었다. 1997년 타이에서 시작된 위기가 인도네시아·한국·말레이시아·홍콩 등을 거쳐 러시아와 브라질을 휩쓸었다. 이에 동아시아 경제도 노동자들의 생활 수준을 낮춤으로서 떨어지는 이윤을 유지하고자 했다.
이러한 일련의 공격에 대한 노동자들의 반격이 1990년대의 주요한 특징 가운데 하나였다.
1980년대 신자유주의를 표방하면서 영국 노동자들을 공격한 대처 정부는 1990년 주민세 부과에 반대하는 격렬한 투쟁에 직면해 몰락했다. 1994년 이탈리아 노동자들은 복지 삭감에 반대하는 대중투쟁으로 통해 부정부패로 얼룩진 베를루스코니 우파 정부를 몰락시켰다. 1995년 12월 프랑스 노동자들도 복지 삭감에 반대해 거대한 파업을 벌였다. 철도와 버스·우편 서비스 등이 멈췄고 거대한 파업과 시위가 계속되면서 우파 정부를 물러나게 만들었다.
1996년 12월~1997년 1월 파업은 이러한 투쟁의 연장선에 있었다.
요컨대 형태는 달라도 세게 각국의 자본주의는 위기에서 자유롭지 못했고 그 대가를 노동자와 평범한 사람들에게 떠넘기려 했다. 그에 대한 저항이 터져 나오고 있었던 것이다. 주로 노동자들이 주도한 이러한 투쟁들은 자본주의에 의문을 제기하고 때로 반대하는 정서를 확산시켰고 1999년 시애틀 항쟁을 시작으로 벌어진 반자본주의 운동에 영향을 미쳤다.
국내적 맥락
한국 노동계급 운동은 1980년대에 투쟁의 최고 전성기를 지나 1990년대에 지배계급과 일진일퇴의 공방을 벌이며 팽팽한 힘의 균형을 이루는 상황을 맞이했다.
1990년대가 노동운동이 위기라는 주장들은 많았지만 이런 주장들은 현실을 제대로 설명할 수 없었다. 이런 주장들은 투쟁이 최고조에 이르렀던 1980년대 말을 정상적인 시기로 놓고 1990년대를 비교하거나, 1989~1991년 동유럽과 소련 붕괴에 따른 이데올로기 위기를 현실에 투영한 것에 불과했다. 온갖 노동운동 위기론이 잘못되었다는 것은 이 글의 주제인 1996~1997파업을 통해 입증됐다고 할 수 있다.
한국의 지배자들은 1980년대에 노동자들이 투쟁으로 얻은 성과들을 빼앗고 자신감을 억누르고 싶어했다. 특히 1989년 이후로 3저 호황이라는 호재가 사라지고 경기가 후퇴할 조짐을 보이자 이런 필요는 더욱 커졌다. 또한 한국 자본주의 성장의 동력이었던 축적 방식이 더 이상 이전과 같은 성공을 보장해 주지 않을 것이라는 점이 드러나고 있었다. 관대했던 미국 시장은 이제 더는 한국 자본주의의 마르지 않는 샘물 같은 곳이 아니었다. 즉 한국 자본주의는 선진 자본주의와 경쟁해야 했고 자신을 추격해 오는 새로운 신흥공업국들도 따돌려야 했다.
이런 배경 하에서 1990년을 전후로 지배계급과 노동계급 사이에 치열한 공방전이 벌어졌다. 하지만 1989년부터 본격적으로 진행된 지배자들의 공격 시도는 결코 수월하게 진행되지 않았다. 노동계급은 1987년에 획득한 자신감을 바탕으로 지배자들의 공격에 치열하게 맞섰다. 이 과정에서 노동계급은 부분적인 패배를 겪기도 하지만 1997년을 향해 전반적으로 상승하는 과정을 거쳤다.
1997년으로 가는 길
노동자 투쟁의 상승기에 대통령이 된 노태우는 자본가 언론들에게 “물태우”라는 비아냥거림을 받았다. 노동자들을 확실히 제압하지 못하는 현실을 비꼬는 말이었다. 이러한 상황을 극복하기 위한 노태우 정권은 두 가지 노력을 기울였다.
하나는 1990년 1월 22일의 3당합당이다. 노태우 정권은 온건 야당 지도자 김영삼과 5·16 쿠테타의 주역 김종필을 끌어들여 자신의 지배 기반을 확대하고자 했다.
또 다른 한편으로 노동계급 운동을 다방면으로 공격했다. 공격은 단지 경제적인 것에 국한되지 않았다. 정치적·이데올로기적인 것이 모두 있었다. 1989년 문익환 목사의 방북을 핑계로 공안 탄압을 강화한 것도 노동자 운동을 겨냥한 것이고(실제 현대중공업에 경찰을 투입했다) 1990년 10월 ‘강력범죄’를 핑계로 ‘범죄와의 전쟁’을 선언한 것도 사실 노동자 운동을 겨냥한 것이었다.
‘범죄와의 전쟁’은 노동계급 운동을 억누르려고 사회 전반을 냉각시키며 억압을 강화한 것인데, 이에 대한 반발로 터져 나온 것이 1991년 5월 투쟁이었다. 6공화국 들어 최대의 시위가 벌어졌다. 5월 초에 한진중공업 박창수 노조위원장의 죽음이 노동자들의 분노를 더욱 자극했다. 전국노동조합협의회(전노협)는 5월 18일 정부에 항의하는 하루 파업에 나섰다. 정부는 이날 강경 진압으로 맞섰는데 1987년처럼 거리의 대중적 시위가 생산 현장으로 확대되는 것을 두려워했기 때문이다.
며칠 후 노태우는 자신의 뒤를 잇게끔 내정했던 국무총리 노재봉을 사임시켜 대중의 분노를 달래야 했다. 그 결과 김영삼이 집권당에서 차기 대권 유력 주자로 떠올랐다. 이것이 김영삼 정부 탄생의 배경이라 할 수 있다.
노태우 정부 때의 과제를 이어받은 김영삼은 여전히 투쟁의 잠재력을 가지고 있고 1987년 이래로 획득한 조직과 세력을 지켜 온 노동자 운동을 제어하기 위해서는 이전처럼 억압 조처만 취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김영삼은 설득이라는 요소를 첨가하려 했다. 하지만 이 ‘설득’은 너무 소심하고 미미해서 노동자들의 저항을 무마할 수 없었다. 김영삼은 노동자 저항을 억누르기 위해서 거듭 권위주의적 지배 방식을 사용해야 했다. 그리고 이것은 더 격렬한 노동자 저항을 낳게 됐다.
김영삼 집권 초기부터 노동자 투쟁은 끊이지 않았다. 1993년 현대그룹노조총연합(현총련) 투쟁, 1994년 전국지하철노조협의회(전지협)·전국기관차협의회(전기협) 투쟁, 1995년 한국통신 투쟁 등으로 김영삼이 표방한 ‘개혁’의 본질이 확연히 드러나고 대중적 분노가 확산됐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치러진 1995년 6·27 지방선거에서 김영삼의 민자당은 참패했다. 김영삼은 자신의 핵심 기반인 부산에서도 인기가 떨어지고 있음을 확인해야 했다.
1995년 7월에는 검찰이 광주항쟁 학살자들에 대해 “성공한 쿠데타는 처벌할 수 없다”면서 면죄부를 줬다. 학살자 처벌에 대한 목소리가 높아졌다. 학생들은 동맹휴업을 하고 거리로 나섰다. 김영삼의 대선 자금 문제까지 불거지면서 대중적 분노는 더욱 커져갔다. 이대로 가다간 정권 자체에 위협이 될 수도 있었다. 주로 학생들이 중심이 된 투쟁이 노동자 투쟁으로 확대될 수도 있었던 것이다.
실제로 노동자들도 투쟁에 동참하기 시작했다. 그래서 김영삼은 전두환과 노태우를 구속시켜서 대중의 분노를 달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런 투쟁의 승리는 다음해 노동자 투쟁을 고무하는 역할을 했다.
1996년으로 넘어오면서 지배자들에게 정세는 더욱 안 좋아지고 있었다. 1990년대 초반의 불황 이래 잠시 회복기에 있었던 경제가 다시 하강 조짐을 보였다. 기업주들과 정부의 입장에서는 노동자들에게 위기의 대가를 떠넘기기 위한 조처가 시급해지고 있었다.
반면 1996년 상반기 노동자 투쟁은 몇 년 동안의 강압에도 뚜렷한 상승세에 있었다. 1996년 상반기에 파업한 작업장은 1995년에 비해 60퍼센트 이상 늘었다.
김영삼은 노사관계개혁위원회(노개위)를 만들어 민주노총의 합법화를 포함해 정리해고제, 변형시간근로제, 파견근로제 도입을 같이 논의해 보자고 민주노총을 협상 파트너로 끌어들였다. 김영삼은 노개위로 시간을 끌면서 민주노총의 지도자들을 협상 테이블에 묶어두고 노동자들의 힘을 최대한 약화시키려 했던 것이다.
이와 함께 사회 분위기를 오른쪽으로 이동시키려는 오래된 방법들이 동원됐다. 학생운동과 좌파를 탄압함으로써 노동운동을 위축시키려 한 것이다.
1996년 ‘한국대학총학생회연합(한총련) 사태’는 이런 배경으로 일어났다. 김영삼 정부는 노동운동에 연대를 선언한 한총련 산하 연대사업국을 이적단체로 규정했고 8월 13일에서 20일까지 범민족대회에 참가하러 온 학생들을 연세대학교에 가둬 두고 헬기까지 동원해 강제 진압했다.
하지만 1986년 ‘건대사태’가 1987년의 거대한 투쟁을 막을 수 없었듯이 한총련에 대한 마녀사냥은 (얼마 안 가서 증명됐듯) 김영삼에 대한 노동자 대중의 분노를 억누르지는 못했다. 오히려 학생들이 김영삼에 굴복하지 않고 끝까지 저항하면서 김영삼에 대한 대중의 반발감만 키웠을 뿐이다.
9월이 되면서 노개위 파행이 분명해지고 있었다. 한 부르주아 언론조차 노개위 토론이 진행될수록 노사 양측의 입장 차이만 크게 벌어지고 노개위 토론이 계급 간 갈등을 해소하는 데는 별 소용이 없다고 말할 정도였다. 노동자들 사이에서 이제 싸워야 할 때라는 목소리가 높아져 갔다.
김영삼은 ‘한총련 사태’와 곧이어 일어난 북한 잠수함 침투 사건을 이용해 우경화 행보를 계속했다. 집회와 시위의 자유를 더욱 옥죄는 조치를 도입하려 했고 안기부의 대공수사권을 부활시키려 했다. 기업주들은 5년간 임금 동결을 주장하는 등 노동법 개악을 빨리 실시하라고 목소리를 높이고 있었다.
이렇게 양극화하는 두 세력 사이의 충돌은 불가피해져 가고 있었다.
파업이 시작되다
결국 김영삼은 법안 처리가 해를 넘기면 임금 투쟁과 맞물려 파장이 걷잡을 수 없게 될지도 모른다는 우려 때문에 노동법 연내 처리를 강행했다. 하지만 노동자들은 1987년 이후 자신들이 쟁취한 성과들을 빼앗아 가려는 정부와 사장들의 공격에 즉각 저항으로 맞섰다.
기아자동차 노동자들은 날치기 소식을 듣자마자 파업에 돌입했다. 곧이어 현총련과 금속노동자들도 파업했다. 모두 15만 명에 가까운 노동자들이 날치기 첫날인 12월 26일 파업에 나섰다.
다음날인 27일에는 병원 노동자들을 비롯해 20만 6000여 명이 파업에 동참했다. 28일에 지하철 노동자들도 파업에 동참하자 파업의 기세는 더욱 높아졌다. 정부와 언론은 파업이 “진정 국면으로 돌아섰다”는 거짓말을 퍼뜨리면서 파업의 확산을 막아보려 했지만 파업 대열은 줄어들지 않았다. 30일에도 파업 작업장은 22군데 더 늘었다.
신정 연휴 이후에도 파업의 열기는 식지 않았다. 1월 7일 파업 참가 노조 수는 190개가 넘었다. 같은 날 김영삼은 연두 기자회견을 통해 개정된 노동법이 노동자들에게 불리한 것이 아니라고 뻔뻔하게 거짓말을 늘어놓아 노동자들의 분노만 더 샀다.
1월 11일 서울 종묘공원 집회에는 노동자 3만 명 이상이 참여했다. 노동자들은 민주노총의 체계적인 가두행진 조직이 없이도 시청 앞까지 진출해서 경찰과 충돌을 벌였다.
노동자들이 단호하게 싸울수록 파업에 대한 지지도는 높아졌다. 파업 시작 전 50퍼센트 이하였던 지지율은 이제 75퍼센트를 넘어섰다. 이는 노동자들이 국민 여론에 맞추기 위해 투쟁의 수위를 조절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단호히 투쟁을 확대해야 여론의 지지도 확대할 수 있음을 보여 줬다. 조직 노동자들이 힘을 발휘하자 미조직 노동자들도 조직 노동자들이 주도한 거리 행진에 동참하기 시작했다.
1월 15일에는 노동자 37만 명이 파업에 참가했다. 한국노총 노동자들도 부분파업을 벌였다. 이날 집회에는 종묘공원이 생긴 이래로 가장 많은 5만 명이 넘는 노동자들이 모였다. 인도로 평화적 행진을 계획했던 민주노총 지도부의 의사와 달리 노동자들은 집회가 끝나기도 전에 가두로 나가기 시작했다. 주변에 있던 미조직 노동자들도 동참하면서 대열은 순식간에 6만여 명으로 불어났다. 이 날 가두시위는 기아차 노조 등 현장의 적극적인 활동가들이 주도해서 밤늦게까지 벌어졌다.
투쟁이 더 전진할 가능성은 있었다. 새로운 노동조합을 만들려는 움직임도 늘어나고 있었고 정치 파업에 고무 받아 단사 차원의 경제 투쟁들도 늘어나는 분위기였다.
투쟁이 확대되자 지배자들의 분열이 커졌다. 지배자들은 판돈이 커지고 있음을 알고 있었다. 대화를 모색하겠다는 신한국당 대표 이홍구의 발언에 노동부장관 진념은 “이적성 행위”라고 날세워 비난했다.
이즈음 한보철강은 부도나기 일보직전이었다. 김영삼 정부는 한보철강의 극한 상황을 이미 알고 있었다. 1996년 12월 청와대에서 한보 대책회의가 몇 차례 열렸다. 김영삼은 날치기 통과된 노동법에 분노한 노동자들의 파업과 한보 부도가 몰고 올 파장이 결합돼 사태가 걷잡을 수 없이 되는 것을 두려워했다. 그래서 한보 부도를 최대한 미루려고 1996년 12월 이후 이미 가망이 없는 한보철강에 1조 원 이상을 더 쏟아 부은 상태였다.
결국 김영삼은 노동법을 재개정하겠다고 양보안을 내놓은 후 노동자 투쟁이 진정 국면으로 들어간 후에야 한보를 부도 처리할 수 있었다.
파업의 성과
1996~1997파업은 김영삼을 벼랑 끝으로 몰아넣었다. 1997년 2월 리영희 교수가 말했듯 당시 김영삼 정권은 1960년 4월 혁명으로 쫓겨나기 직전 1959년 이승만 정권 말기를 연상케 하는 상황이었다.
한보 비리 문제로 더욱 궁지에 몰린 김영삼은 비유컨대 박근혜 정부 때의 최순실이라고 할 수 있는 아들 김현철을 구속시켜 겨우 정권의 생명을 유지해야 하는 신세가 됐다. 자신을 중심으로 한 정권 연장은 꿈도 꾸지 못하게 됐고 지배 정당의 내분이 심화되면서 수십 년 동안 이 나라를 지배해 온 일당 지배 체제도 결국 무너졌다.
1996~1997파업은 노동자들이 정부를 굴복시키고 사회변화를 강제할 수 있는 힘을 가진 강력한 사회 세력임을 보여 줬다. 1987년 군부 독재를 무릎 꿇린 후 과거로 회귀하려는 시도들을 좌절시키고 민주주의를 전진시켜 온 데는 노동계급의 역할이 결정적이었다. 민주당과 자유주의자들은 자신들이 민주주의의 주도세력인양 주장하며 노동계급의 역할을 감추거나 축소하려 하지만 이것은 사실이 아니다.
1996~1997파업은 노동법 개악에 반대해 전체 노동계급의 이해가 걸린 문제를 가지고 정부에 대항했던 정치파업이었다. 이 파업을 통해 노동자들의 정치의식은 한 단계 발전할 수 있었다. 부르주아 야당에 정치적으로 의존했던 노동운동 안에서 야당에 독립적인 정치적 대안을 추구하려는 움직임이 나타났다. 그래서 이 파업을 배경으로 (파업 3년 후) 민주노동당이 등장할 수 있었다.
파업의 효과로 민주노총이 합법화됐고 민주노총으로 조직되는 노동자들도 늘어났다. 1997년 5월까지 219개 노동조합과 4만 5000명이 민주노총에 새로 가입했다. 은행, 버스, 택시 등 이전에 한국노총 소속 노동자들이 파업으로 자신감을 얻어 한국노총을 탈퇴하고 민주노총에 가입했다.
아래로부터의 투쟁은 노동계급의 조직, 의식이 성장하는 원동력이었다. 그리고 이러한 성과들은 부침을 겪기는 했지만 그 뼈대를 유지하면서 지금에 이르고 있다.
일각에서는 1996~1997파업이 패배했다고 평가한다. 1996~1997파업으로 날치기 통과된 노동법이 폐기된 후 1997년 3월에 여야 합의로 통과된 노동법에서 개악된 내용을 완전히 막아내지 못했고, 결국 1년 후 노사정위원회를 통해 정리해고제 등이 도입됐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는 앞에서 든 이유들 때문에 완전히 틀린 평가라 할 수 있다.
정치적 문제들
물론 파업의 성과뿐 아니라 파업에서 나타난 문제들을 살펴보는 것은 지금 어떻게 싸워야 할지 교훈을 얻기 위해 필수적이다. 파업이 최고조에 이르렀을 즈음인 1997년 1월 17일 갑자기 ‘수요파업’으로의 전환이 정해졌다. 이렇게 파업이 제한적인 모습을 보인 것에는 몇 가지 요인이 상호작용했다.
당시 대표적 야당은 김대중이 이끌던 국민회의였다. 1987년 6월 항쟁과 7~9월 노동자 대투쟁에 힘입어 부르주아 민주주의가 도입되기 시작하면서, 1987년 이전에 탄압받던 정치인이었던 김대중은 정치적 자유를 획득하고 1990년대를 거치며 노골적으로 우경화했다. 그는 5·6공 인사들을 영입하고 보수 우파인 자민련과 연대하면서 자신이 이 체제를 운영하는데 적합하다는 것을 지배계급에게 보여 주려고 노력했다.
노동법 개악에 대해 김대중은 애초에 내용 자체를 반대한 것이 아니라 법 처리 절차에 대해 문제를 제기했을 뿐이다. 당시 국민회의 부총재는 중소기업협회장 출신 박상규였는데 그는 변형시간근로제 도입을 적극 지지했다.
김대중은 노동자 투쟁을 제어함으로써 체제를 안정적으로 유지할 능력이 있음을 보여 주고자 노력했다. 12월 13일 총파업이 예정되어 있을 때 노동운동가 출신 국회의원 방용석을 민주노총 지도부에게 보내서 총파업을 적극적으로 만류했고 연내에 노동법이 통과되지 않을 것이라고 이야기하면서 민주노총 지도부를 방심하게 만들기도 했다.
김대중은 투쟁이 고조돼 노동자들의 자신감이 커지고 투쟁이 더 나아갈 가능성을 보여 주던 1월 15일이 돼서야 황급히 파업 지지를 표명했다. 강해지는 노동자 투쟁에 올라타 자신에게 유리하게 이용하려는 목적에서였다.
1월 17일 민주노총은 수요파업 전환 방침을 정했고, 1월 21일 김영삼과 김대중의 영수회담이 열렸다. 영수회담에서 파업의 전진을 위해 어떠한 역할도 하지 않은 김대중이 김영삼에게서 노동법 재개정 양보를 얻어내는 모양새가 만들어졌다.
2월 초에 김대중은 민주노총 권영길 위원장을 만나 노동법 날치기에 이어 한보사태로 나라가 결딴날 위기에 있는데 총파업까지 겹치면 치유불능 상태에 빠진다면서 파업 재개를 적극 만류하기도 했다.
김대중이 이렇게 할 수 있었던 데에는 노동운동의 약점이 작용했다.
당시 파업에 정치적 지도를 제공하려 했던 대표적인 단체는 ‘민주적 노사관계와 사회개혁을 위한 범국민대책위원회’(범대위)였다. 민주주의민족통일전국연합, 참여연대, 민주사회를위한변호사모임, 민주평등사회를위한 전국교수연구자협의회(민교협) 등 재야 단체들과 민주노총 등 노동운동 단체들이 참여한 범대위는 노동법이 날치기로 통과됐다는 절차적인 문제를 주로 제기하면서 ‘훼손된 의회민주주의’를 방어하는 수준 이상으로 투쟁을 이끌려 하지는 않았다.
범대위는 투쟁이 야당과 함께하는 범국민적 운동이 돼야 한다는 생각에서 노동자들의 계급적 이해관계가 부각되는 것을 막으려 했다.
정치적 성격의 파업에 노동자들의 경제적 요구들이 결합돼야 파업의 저변이 더욱 확대되면서 투쟁이 훨씬 강화될 수 있었다. 그래야 노동자들이 얻고자 하는 것을 최대한 얻어낼 수 있었다. 그러나 노동계급을 민중 (또는 국민) 속에 용해시키려는 생각에 따르면 노동계급의 독립적 요구는 최대한 자제돼야 했다. 대신 정치 협상과 의회를 통한 문제 해결이 중요하게 부각됐던 것이다.
범대위의 파업에 대한 이러한 입장은 민주노총의 파업에 대한 태도와 부합하는 점들이 있었다.
1996~1997파업은 ‘총파업’이라는 말에 걸맞지 않게 진행된 것이 사실이다. 산업 전반이 마비되는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파업이 가장 정점에 이르렀던 1월 15일조차 기간산업 가운데 지하철, 화물, 자동차만이 파업에 참여했다.
민주노총 지도부는 파업을 ‘조절’하기 위해 노력했다. 지하철과 병원의 파업은 시민들의 불편을 이유로 며칠만 파업하도록 했고 한국통신은 단 4시간 부분파업만 벌이도록 했다. 또 기아차나 일부 작업장처럼 오전에는 정상조업하고 오후에는 파업하는 식으로 했다. 이처럼 1996~1997파업은 위로부터의 통제가 강했던 관료적 대중파업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1987년 이후 노동자 투쟁의 상승기에는 현장 노동자들의 자신감이 충만해서 노동자들은 지도부가 자신들의 의사를 제대로 대변하지 못하면 즉시 새로운 지도부로 갈아치우고 자신들을 대변하게 만들었다. 정치적 억압과 경제적 불만이 결합돼 폭발적인 투쟁이 일어나는 것이 이 시기의 특징이었다.
하지만 1990년대를 거치면서 부르주아 민주주의가 진전되고 노동조합들도 어느 정도 안착화돼 산별조직이나 민주노총 같은 상급단체들도 생겨났고, 협상을 주 임무로 하는 관료층도 생겨났다. 비록 서구처럼 안정적이지는 않았지만 자본가 계급과 노동계급 사이에서 중재자 역할을 해야 하는 물질적 조건 때문에 노동조합 지도자들은 투쟁보다 협상에 의존하려 하고, 투쟁할 때조차 투쟁을 협상을 위한 압력수단으로 사용하려는 경향이 나타나게 된 것이다.
민주노총 지도부가 노동자들의 힘을 최대한 끌어올리기보다 여론에 신경 쓰면서 투쟁을 제어하려 했던 것이나 정부에 맞선 정치파업을 진행하면서도 국가와의 충돌은 극구 피하려고 노력했던 것은 위와 같은 맥락에서 나왔다.
실제 민주노총 지도부는 수출과 국가 경제를 우려하며 파업을 조절했다. 기아자동차 정상조업을 추진한 이유는 ‘수출 선적 기한’을 걱정해서였고, 수요파업으로 전환한 이유는 ‘국민 경제의 어려움을 고려’해서였다.
경제 위기가 심화되는 상황에서 국가 경쟁력을 고려하고 국가 권력과의 충돌을 회피한다면 노동자들의 이익을 방어하기 힘들다는 점은 이후에 더 분명하게 드러나게 된다. 1998년 김대중 정부가 들어선 뒤 민주노총은 노사정위원회에 참여했고, 노동자들의 반발 때문에 순탄한 과정은 아니었지만 결국 정리해고제를 수용했다.
혁명적 대안
김영삼은 ‘개혁은 혁명보다 어렵다’는 말을 되뇌며 노동자 투쟁으로 파산했다. 지금 문재인 정부가 추진하는 ‘개혁’도 좌우 모두로부터 인기를 잃어 가면서 오른쪽을 분명히 향해가고 있다. 문재인 정부는 대중이 원했던 ‘진정한 적폐 청산’ 요구를 하나씩 배신해 왔을 뿐 아니라 이제는 노동자들에게 경제 위기의 책임을 떠넘기려는 시도 중 하나로 노동법 개악을 추진하고 있다.
이런 시도를 좌절시키기 위해서는 노사정 대화 같은 것에 기대서는 안 될 것이다. 1996년 12월 날치기로 통과된 노동법에는 민주노총 합법화가 포함돼 있지 않았다는 점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민주노총 지도부는 노개위에서 대화와 협상으로 합법화를 얻어낼 수 있을 것이라 기대했지만 김영삼과 지배자들은 한 치도 양보하려 하지 않았다.
노동자들이 대중파업으로 힘을 과시했기 때문에 김영삼과 지배자들을 물러선 것이다. 지금도 노동자들이 원하는 것을 얻어내기 위해서는 그런 힘이 다시 발휘되도록 하는 것이 관건이다. 이를 위해서는 그때의 정치적 약점들을 극복하기 위한 대안 또한 굉장히 중요하다.
그것은 노동계급을 다른 계급에 종속시키려는 정치가 아닌 노동계급의 이해를 일관되게 옹호하면서 국가 권력에 도전하는 것을 회피하지 않는 정치가 대안이 돼야 할 것이다.
주
- 맑시즘2019 발제문을 조금 수정한 글이다. 이 글은 <노동자 연대>에 실린 과거 기사들을 많이 참조했다. 하지만 글의 내용에서 문제가 있다면 전적으로 필자의 책임이다. ↩
참고 문헌
마오쩌둥 2008, 《모택동 선집》 4권, 김승일 옮김. 범우사.
마오쩌둥 2009, 《마오쩌둥: 실천론·모순론》, 슬라보예 지젝 편집, 프레시안북.
마이스너, 모리스 2004, 《마오의 중국과 그 이후》 1, 이산.
Andors, Stephan 1977, China’s Industrial Revolution, Pantheon Books.
Harper, Paul 1969, ‘The Party and the Unions in Communist China’, The China Quarterly No.37.
Perry, Elizabeth 2002, ‘contradictions under socialism: Shanghai’s Strike Wave of 1957’, Challenging the Mandate of Heaven, M.E. Sharpe.
Sheehan, Jackie 1998, Chinese Workers: A new history, Routledg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