쟁점: 현재의 이슈들
볼셰비키와 이슬람 *
1 유럽 신문들에 실린 인종차별적 만화에 대한 반응은 ‘자유주의자’들의 무슬림 혐오와 좌파들의 혼란의 실태를 극명하게 드러냈다.
이라크에서 재앙에 맞닥뜨린 기성 정치권은 일치 단결해 이슬람을 희생양 삼기로 했다. 2005년 7월 런던 폭탄 테러가 발생한 날, 블레어 정부의 외무장관 잭 스트로는 이슬람 공세 재개 분위기를 조성하면서, 이는 이라크 전쟁과는 무관하다고 극구 잡아뗐다. 우파의 가장 효과적인 동맹자들인 자유주의 좌파 논평가들은 반전 운동이 무슬림과 연대하는 것을 조롱해 왔다.[잘못된] 태도를 비판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영국 사회주의노동자당SWP이 “영국무슬림협회 같은 이슬람 근본주의 조직”과 선거 동맹을 맺었다며 비난했다. 2 그러나 아슈카르는 쿠란[이슬람 경전]은 기독교에서 접할 수 있는 좌파적·‘해방신학’적 해석을 배제한다고 주장함으로써, 이슬람이 다른 종교와는 매우 다르다는 우파의 주장에 크게 타협하는 듯 보인다. 아슈카르는 쿠란 때문에 무슬림들의 사고방식이 반동적이 된다고 보는 것이다. 3
혁명적 좌파들은 히잡에 대한 태도를 중심으로 양분돼 왔다. 혁명적공산주의자동맹LCR의 질베르 아슈카르는 중간적인 입장을 취했는데, 한편으로 히잡 문제에 대한 자기 당내 일부와 프랑스 좌파의[이란 국왕]에 맞선 게릴라 투쟁에서 마르크스주의와 이슬람의 통합을 주장하기도 했다. 동시에 이슬람 국가들의 지배계급은 대중적 인기를 얻기 위해 좌파적 주장들을 하곤 했다. 예컨대 1973년 아프가니스탄의 군부 쿠데타 지도자들이 그런 주장을 했고, 1970년대 중반 파키스탄의 줄피카르 부토가 국유화 과정에서 ‘이슬람 사회주의’를 선언했다.
실제로는 이슬람 신도들 사이에서 좌파 조직이 부상한 사례가 많다. 맬컴 엑스는 1960년대 혁명적인 흑표범당 지도자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으며, 이란의 무자헤딘 지도자들은 샤무슬림들이 혁명적 사상을 가질 수 있다면, 그에 따라 다음과 같은 질문이 떠오를 것이다. ‘원칙적 마르크스주의 단체들이 무슬림들을 사회주의로 끌어들이려 했던 역사적 사례는 어떤 것들이 있을까?’ 이 논의에서, 레닌과 볼셰비키가 1917년 러시아 혁명을 성공시킬 당시 인구의 10퍼센트인 약 1600만 명의 무슬림이었다는 점은 흔히 간과되곤 한다. 이 짧은 글은 그 공백을 메우려는 시도다.
이 글에서 나는 1917년부터 1920년대 중반까지의 볼셰비키 정책이 1927년부터 스탈린이 이슬람에 가했던 마녀사냥과는 근본적으로 달랐고, 초창기 볼셰비키들은 무슬림의 공산당 입당을 환영했고 이슬람 조직들과 대규모 공동전선 활동을 건설했음을 보여 줄 것이다. 그럼으로써 우파의 비방으로부터 레닌의 행적들을 방어하고, 볼셰비키의 경험에서 교훈을 끌어내고자 한다.
4 만약 입는 옷이나 믿는 종교가 다르다는 이유로 노동자들을 제쳐 버린다면, 우리는 한 줌의 종파로 남게 된다. 좌파에게는, 인종차별과 제국주의에 맞서 무슬림과 한편에 서야 할 국제주의적 의무가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는 30년 간의 침체 이후 고립에서 벗어나고 있는 소규모 혁명적 좌파들에게 의미가 크다. 알렉스 캘리니코스가 지적했듯, “히잡 문제는 사실 진정한 문제의 한 표현일 뿐이다. 경제적 착취와 인종차별을 함께 겪는다는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이슬람 신앙에 매달리는 유럽 사회 최하층민들을 우리 운동이 끌어안아 운동을 키울 방법이 핵심으로 중요하다.”이는 또한 매우 개인적인 주제이므로, 나 자신의 신앙에 관해 한 마디 해야겠다. 어렸을 때 나는 성공회 교회의 의식 절차에 매료됐고, 정기적으로 참석했다. 그런데도 나는 20대 초반까지는 진심 어린 종교적 신념을 가졌던 기억이 없었다. 그 이후 나는 내 운명이 더 높은 존재의 손에 달려 있다는 강렬한 느낌을 가지게 됐다. 돌이켜 생각해 보면 이는 아마도 내가 그 당시 경험했던 개인적인 격변과 가난, 절망의 반영이었을 것이다. 나는 사회에 대해 몹시 화가 났고, 그래서 종교 종파와 폭력 또는 종교적 폭력에 이끌렸을 수도 있다. 그 대신 나는 마르크스주의가 세계에 대한 더 효과적인 이해와 세계를 변화시킬 지침을 제공한다는 것을 알게 됐다.
볼셰비키 하의 기독교
[그럴 때] 종교인들은 모든 사회주의자들을 싸잡아 이야기하곤 한다. 그러나 사실 스탈린주의는 레닌 시대 볼셰비키나 러시아를 통치한 초기 볼셰비키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었다.
대부분의 종교인들에게 소련에 관해 물으면, 그들은 스탈린이 모든 종교에 대해 저지른 명백한 범죄의 목록을 줄줄 늘어놓을 것이다.[스탈린 이전의] 볼셰비키의 강령은 명백히 무신론적이었지만 무신론은 당원이 될 조건이 결코 아니었다. 볼셰비키에게 있어 종교는 사생활의 영역이었다. 1905년 레닌은 “자본주의의 사악한 힘에 대항하는 스스로의 투쟁으로 각성되지 않는다면 어떤 소책자나 설교도 프롤레타리아를 깨우칠 수 없다” 하고 주장하면서, 당 강령에 무신론을 집어넣는 것에 반대하는 통렬한 비판글을 썼다. 5
우선,[종교는] 인민의 아편” 격언 바로 앞에서 이렇게 말했다.
그러므로 사회주의자들은 사람들이 사회주의 조직과 처음 접촉할 때는 종교적 신앙이 있더라도,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는 힘을 확신하게 되면서 종교적 신념을 잃게 될 것이라 본다. 마르크스는 종교가 차별의 현실을 이야기하고 그 차별에 저항하는 열망을 표현하는 언어를 제공할 수 있다고 여겼다. 마르크스는 저 유명한 “종교적 고통은 현실의 고통을 표현하는 것이자 현실의 고통에 대한 항의이기도 하다. 종교는 천대받는 사람들의 탄식이요, 몰인정한 세계의 인정이요, 영혼 없는 상황의 영혼이다. 그것은 인민의 아편이다. 6
[수준의] 유물론자”이라고 불렀다.
레닌은 노동자들이 혁명 정당에 입당하기 전에 종교적 믿음을 버리라고 주장하는 것은 정치적 자살행위임을 분명히 했다. 오히려 레닌은 신앙자들의 입당을 독려했다. 레닌은 1909년에 이렇게 썼다. “우리는 그들의 종교적 신념에 조금이라도 불쾌감을 주는 것에 절대적으로 반대한다.” 그렇게 하는 자들을 레닌은 “유치원생오늘날 종교의 가장 깊은 뿌리는 노동 대중이 사회적으로 억눌려 자본주의의 맹목적인 힘에 직면해 뚜렷이 느끼는 완전한 무력감이다. 이 때문에 평범한 노동자들은 매일 매시간 가장 끔찍한 괴로움과 가장 야만적인 고통을 겪는데, 이는 전쟁·지진 같은 특별한 사건들이 주는 고통보다 천 배는 더 가혹하다. 7
8 1903년 당시 러시아에서 1000만 명이 넘는 기독교 종파들의 신자를 대상으로 신문을 발행하자는 레닌의 제안에도 비슷한 통찰력이 깔려 있었다. 1904년에 〈라스베트〉(‘새벽’)가 “실험 삼아” 9호까지 발행됐다. 9
러시아 마르크스주의자들은 노동자들의 급진화가 그들의 종교적 믿음에 반영될 수 있다는 점도 이해했다. 트로츠키는 자서전에서 1890년대 말의 파업 물결에서 우크라이나 노동자들이 러시아 정교회로부터 이탈해 “공식 종교와 전쟁을 벌인” 침례교 같은 다른 신앙을 갖는 것이 사회주의 정치로 가는 길의 첫 걸음, 즉 “혁명을 향한 과정에서 일시적인 국면”인 경우가 많았다고 회상한다.10 가퐁은 러시아 정교회 신부였으며, 교회는 차르 정부부터 최하층 시골 마을까지 탄탄히 조직돼 있었다. 몇몇 신부들은 유대인 집단 학살을 주도했고, 노동자들과 반정부 인사들을 공격한 폭력 조직인 ‘검은 백인단’을 조직했다. 하지만 볼셰비키는 차르 체제가 정교회를 계급 지배의 무기로 사용했지만 많은 평범한 러시아인들이 차르와는 매우 다른 이유로 정교회를 믿는다는 사실을 무시하지는 않았다.
기독교에 대한 볼셰비키의 비종파주의적 접근은 1905년 1월 페테르부르크 총파업 때 시험대에 올랐다. 20만 노동자들이 1월 9일 차르에게 청원하려 행진하며 총파업은 절정에 달했고, 이 행진은 군대의 학살로 끝났다. 경찰 첩자라고 널리 의심받던 신부 게오르기 가퐁이 이 운동을 주도했다. 그럼에도 볼셰비키는 시위에 참가했고, 그 후 레닌은 가퐁을 만나 대화하고 심지어 그를 입당시키기 위해 갖은 애를 썼다.1917년 10월 집권한 볼셰비키는 소비에트 국가를 반反종교가 아니라 비非종교 국가라고 선언했다. 같은 해 12월 러시아 정교회는 국교에서 폐지됐고 재산 소유권을 상실했으며, 출생·결혼·이혼·교육 관련 제반 등록은 국가의 비종교적 활동이 됐다. 교회 건물은 학교·주택·클럽 등으로 이용됐지만, 종교 단체들은 어떤 건물이든 예배용으로 자유롭게 사용하도록 중앙·지방 관리들에게 청원할 수 있었다. 학교는 세속적이지만 반종교적이지는 않았다. 국교를 없앤다는 포고령을 내리는 것과 실제로 폐지하는 것은 별개의 일이었다. 곳곳에서 정교회에 대한 열정이 고조됐고 교회 재산의 통제를 둘러싸고 신자들이 볼셰비키와 충돌하는 일들도 있었다. 그러나 1921년 말 정교회에 대한 대중의 지지는 현저하게 줄었는데, 정교회 총대주교 티콘이 수많은 기근 피해자들을 위해 교회의 귀중품을 팔아서 외화를 마련하기를 거부했기 때문이다. 이것이 트로츠키의 교회 재산 몰수 운동에 조직적으로 저항한 신부 45명이 처형된 배경이었다. 이런 가혹한 정책은 교회에 대한 악의적 공격이 아니라 기근 비상사태라는 맥락에서 봐야 하는 것이다. 실제로 일부 기독교 교회는 볼셰비키 치하에서 번성했다. 침례교, 복음주의 기독교, 오순절파, 제7일안식일파를 포함한 여러 교파 조직으로 구성된 복음주의 개신교 운동은 소비에트 집권 초기 10년 동안 신도가 약 10만 명에서 100만 명 이상으로 늘어났다. 복음주의자들은 소비에트 헌법이 종교적 선전의 자유를 보장하는 것을 이용해 광범하고 활발하게 전도 활동을 했다. 그들은 종교 저작들을 여럿 출판했고, 전도사를 양성하기 위해 성경학교를 운영했으며, 자선 프로그램을 조직했고 농업과 공업 협동조합을 만들었다.
[1917~1926년 — 크라우치] 시기는 침례교 운동에 대한 참여가 크게 늘었던 시기와 일치한다” 13 고 지적했다. 다시 말해, 젊은이들이 군 복무를 피해 복음주의에 가담했다는 얘기다. 그러나 볼셰비키 지도부는 이것이 종교의 자유라는 정치적 원칙을 옹호하기 위해 그들이 치러야 할 대가라고 판단했다.
복음주의가 성장한 이유 중 하나는 1918년 10월 트로츠키의 깜짝 결정 때문이었다. 트로츠키는 종교적 신념으로 인해 군 복무가 금지됐다는 것을 증명할 수 있는 사람들에게 일선 복무를 의료 복무로 대체하게 허용했다.(몇 달 뒤 소비에트 정부가 이를 승인했다.) 이 조처는 내전이 한창일 때 이뤄졌다. 볼셰비키에 적대적인 러시아 복음주의 연구자 폴 스티브스는, 복음주의의 성장과 평화주의 사이에 직접적인 인과관계를 설정하는 것은 불가능하지만 침례교에 특정해서는 “평화주의적 견해가 러시아 침례교연맹 집행부를 지배하던 특정 혁명 이후 볼셰비키가 권력을 장악하자 레닌은 무신론적 선전이 온건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1918년 11월에 레닌은 이렇게 썼다. “우리는 종교적 편견과 싸울 때 매우 신중해야 한다. 어떤 사람들은 종교인들의 감정을 상하게 함으로써 이 투쟁에 많은 해악을 끼친다. 우리는 반드시 선전과 교육을 활용해야 한다. 투쟁에 너무 날을 세우는 것은 대중의 분노만 불러일으킬 것이다.” 1921년 레닌은 당 중앙위원회를 설득해 “어떤 민족 또는 우리의 적들이 우리가 종교적 신념 때문에 사람들을 박해한다고 말할 근거가 되는 모든 행동들을 결단코 피하라”는 자신의 충고를 어긴 당원들을 징계하는 지시를 내리도록 했다.15 더군다나 러시아 내전과 독일 혁명의 패배 이후 혁명적 물결이 사그라들면서 무신론적 선전은 성공하지 못했다. 볼셰비키는 깨끗하고 따뜻하며 건강한 생활 조건, 전기 설치, 선진 농업, 생활 수준의 향상 등 ‘노비 비트novyi byt’[새 생활]를 건설할 때만 종교를 근절할 수 있다고 봤다. 그러나 1920년대 중반 볼셰비키는 7년간의 전쟁이 초래한 재앙적인 결과를 극복하기 위해 여전히 고군분투하고 있었다.
그러나 공산당원들이 종교인들의 감정을 상하게 했던 경우가 있었다. 1923년 1월 6일 청년공산주의자동맹이 조직한 ‘붉은 크리스마스’ 때 학생과 노동계급 청년들이 광대 복장을 하고 인터내셔널가를 부르며 종교적 인물들의 인형을 태우면서 행진을 했다. 그러나 그런 사건들은 예외적인 것들이었고 볼셰비키 지도부의 비판을 받았다. 레닌의 글 ‘전투적 유물론의 중요성에 관해’가 1922년 3월에 출판됐으며, 같은 해 말 최초의 지속적인 대중적 무신론 신문인 〈베즈보즈니크〉(무신론자)가 창간됐다. 하지만 이 신문과 다른 출판물들은 실질적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 편집자들이 기사의 소재를 찾기 위해 여기저기를 뒤적거렸다. 1925년에 사기저하된 소규모 무신론자 그룹이 무신론연맹을 만들었지만, 초창기에는 효과가 없었다. 이들은 스탈린이 사실상 모든 종교 활동을 금지한 1929년이 돼서야 전투적무신론연맹이 됐고, 그제서야 회원이 폭발적으로 늘어났으며 1931년에는 회원을 500만 명 확보했다.이슬람과 제국의 붕괴
[이슬람 국가들에서 여자들이 남자들의 눈에 띄지 않도록 집안의 별도 공간에 살거나 얼굴을 가리는 것] 종식을 결의했다. 이 대회는 러시아의 무슬림이 세계 최초로 그 시대 이슬람 사회의 전형적 제약으로부터 여성들을 해방시켰다는 것을 의미했다. 17
무슬림은 러시아 제국주의의 지배 하에서 엄청난 고통을 겪었다. 그 분노는 제1차세계대전 기간 중앙아시아에 징병제가 도입된 후 표면화됐는데, 1916년 여름의 대중 반란으로 러시아인 식민주의자들 2500명이 목숨을 잃었다. 반란 이후 격렬한 탄압이 이어져 약 8만 3000명이 학살당했다. 1917년 차르에게 위기가 닥치자 급진화된 수많은 무슬림들이 러시아 제국이 인정하지 않았던 종교의 자유와 민족 자결권을 요구했다. 1917년 5월 1일 모스크바에서 제1차 전러시아 무슬림 대회가 열렸다. 대의원 1000명 중 200명이 여성이었다. 격렬한 논쟁 끝에 대회는 8시간 노동일, 사적 토지 소유의 폐지, 대규모 자산에 대한 보상 없는 몰수, 여성에 대한 정치적 권리의 평등, 일부다처제와 퍼다18 중앙아시아의 이슬람 내 지적 조류인 자디드(‘새로운 방법론자’) 운동은 혁명에 커다란 의미를 부여했다. 그들은 러시아의 정복이라는 맥락에서 자신들의 무슬림 유산을 재해석하려 했다.
러시아 제국 치하의 이슬람은 단일체적 신앙과는 거리가 멀었다. 예를 들어 타타르족과 키르기스족은 여성을 베일로 감싸는 전통이 없었다. 중앙아시아에서 베일과 여성의 은둔 생활이라는 관습은 대개 러시아의 식민 통치 이후 생겨났으며 상당히 부유한 가정의 도시 여성들 사이에서 특히 두드러졌다. 자디드 운동은 19세기 말 ~ 20세기 초 중앙아시아 사회를 강하게 비판하면서, 그들 공동체의 ‘쇠퇴’와 ‘타락’을 ‘순수한’ 이슬람의 길에서 벗어난 탓으로 돌렸다. 그러나 자디드들에게 ‘순수한 이슬람’은 경전 텍스트에 대한 합리주의적 해석을 뜻했는데, 그 전제 조건은 국가를 강하고 부유하게 만든 근대적 지식이었다. 자디드 운동의 주요 사상가들은 자신들의 사회를 이슬람의 길로 인도하는 것만큼이나 진보와 기술에 관심이 컸다. 이러한 반反봉건적 중간계급 지식인들은 교육이 종교에서 벗어나고 여성이 사회에서 훨씬 더 적극적인 역할을 수행하기를 원했다.따라서 자디드 운동은 자신들이 ‘진보적’이고 근대적이라 본 서방을 지향했으며, 무슬림 사회의 발전을 방해한다고 여긴 이슬람 성직자들에 반대했다. 그들은 스스로를 러시아 자유주의자들과 동일시했고, 따라서 1914년에 제1차세계대전을 지지했다. 그러나 전사자들이 늘어가자 자디드들은 이전의 이상에서 눈을 다른 곳으로 돌렸다. 1918년 트로츠키가 러시아 제국이 맺은 비밀 조약을 공개해 오스만 제국 분할에 관한 서방 제국주의의 계획을 폭로하자, 자디드들은 커다란 충격을 받았다.
20 모스크바에 있는 무슬림인민위원회가 러시아의 이슬람 정책을 감독했다. 대부분 공산당원이 아닌 무슬림들이 이 기구의 지도적 지위를 차지했다. 21
그때 자디드들은 스스로를 청년부하라당이라 불렀는데, 1908년 터키 혁명을 이끈 청년투르크당에서 따온 것이었다(부하라는 중앙아시아의 종교와 문화 중심지였다). 이 시기 가장 영향력 있는 자디드인 압둘라우프 피트랏은 1919년에 영국을 인도에서 몰아내는 것이 “쿠란이 동물에게 짓밟히는 것을 막는 것만큼 위대하며 … 이슬람 사원에서 돼지를 몰아내는 것만큼 큰 사안”이라고 썼다. 볼셰비즘은 “소비에트 정권이 건설하고 있는 새 정부에 모여들었던” 많은 자디드에게 매력적인 대안이 됐다.[이슬람 율법] 만세!” 22
옛 러시아 제국의 무슬림들 중 볼셰비즘에 이끌린 쪽은 자디드만이 아니었다. 이슬람적 가치와 사회주의 원칙이 유사하다는 이야기가 무슬림들 사이에 널리 퍼져 있었다. ‘이슬람 사회주의’ 지지자들은 무슬림들에게 소비에트를 세우라고 호소했다. 인기 있는 구호는 다음과 같았다. “종교, 자유, 민족 독립!” “소비에트 권력 만세! 샤리아[영어로] 번역됐는데, 꽤 길게 인용할 가치가 있다.
당시의 태도를 엿볼 수 있는 사람은 이전에는 일본에서 교수를 역임했고 1919년에는 영국과의 전쟁을 준비하던 아프가니스탄 군주의 조언자 모하메드 바르카툴라다. 그는 (당시에는 투르키스탄으로 알려진) 중앙아시아를 널리 여행하면서 자신의 소책자 〈볼셰비즘과 이슬람 정치〉를 배포했다. 한 부가 인도의 영국 첩보 기관의 수중에 들어가 페르시아어에서차르의 독재라는 어둡고 긴 밤이 지난 후에, 인간 행복의 날에 빛과 광채를 주는 찬란한 태양인 레닌과 함께 인간 자유의 여명이 러시아 지평선에 나타났다. … 러시아와 투르키스탄의 광활한 영토의 통치가 노동자, 농민, 병사들의 손에 맡겨졌다. 인종, 종교, 계급의 구분이 사라졌다. … 그러나 이 순수하고 특별한 공화국의 적은 영국 제국주의로, 아시아 국가들을 영원한 노예 지위에 묶어두길 바란다. 완벽한 인간의 자유라는 어린 나무가 뿌리를 내리고 힘을 얻기 시작하자 영국 제국주의는 이를 쓰러트릴 생각으로 군대를 투르키스탄으로 이동시켰다. 전 세계의 무슬림과 아시아 민족들이 러시아 사회주의의 숭고한 원칙을 이해하고 이를 진지하고 열정적으로 받아들일 때가 왔다. 그들은 이 새로운 체제가 가르친 중요한 덕목들을 헤아리고 깨달아야 하며, 진정한 자유를 수호하기 위해 볼셰비키 군대에 가담하여 약탈자이자 폭군인 영국의 공격을 격퇴해야 한다. 그들은 지체 없이 아이들을 러시아 학교에 보내 근대 과학, 고귀한 예술, 실용적인 물리학, 화학, 공학 등을 배우게 해야 한다. 오, 무슬림들이여! 이 신성한 외침을 들어라. 레닌 형제와 러시아 소비에트 정부가 당신들에게 제안하는 자유, 평등, 우애에 대한 이 호소에 응답하라. 23
무슬림과 소비에트
옛 러시아 식민지의 억압받던 민족들에게 종교의 자유는 민족 자결권의 핵심 요소였다. 볼셰비키의 정책은 가능한 한 소수민족과 그들의 종교에 대한 차르의 범죄를 보상하는 것을 목표로 했다. 이는 기본적인 정의와 민주주의의 문제였을 뿐 아니라 무슬림들이 자신들 사이의 계급 분열을 전면에 내세울 수 있도록 하는 데 필수적이었다. 따라서 민족 독립과 자치는 소비에트 정책의 핵심이었다. 신생 소비에트 정부는 1917년 11월 24일 발표한 선언문 ‘러시아와 동방의 모든 무슬림 노동자들에게’에 이렇게 썼다.
러시아의 차르와 압제자들에 의해 모스크와 기도원이 파괴되고, 신앙과 관습이 짓밟힌 러시아의 무슬림 여러분께: 당신들의 신념과 관행, 당신들의 민족적·문화적 제도들은 영원히 자유롭고 존중받을 것이다. 당신들의 권리는 러시아 모든 민족의 권리와 마찬가지로 혁명의 강력한 보호 아래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오늘날이었으면 ‘적극적 우대조처’라고 할 만한 조처들이 대대적으로 시행됐는데, 이를 ‘코레니자치야’, 즉 토착화라고 한다. 이 계획은 러시아·코사크계 식민지 개척자들과 러시아 정교회 내 그들의 이데올로그들을 쫓아내는 것으로 시작됐다. 러시아어가 제1언어가 아니게 됐고, 현지어가 학교·정부 출판물에 다시 사용됐다. 현지인들은 국가기구 및 공산당에서 지도적 지위에 올랐고, 고용에서도 우대됐다. 새로운 세대의 비러시아인 지도자들을 양성하기 위해 대학들이 설립됐다.
25 이슬람이 종교적으로 기념하는 날인 금요일이 중앙아시아 전역에서 법적 휴일로 선포됐다. 26
차르가 약탈한 이슬람 성유물과 도서들이 모스크로 되돌아왔다. 1917년 12월 페트로그라드에서 열린 무슬림 대회에서 ‘오스만의 신성 쿠란’을 예를 갖춰 환수 조처했다.샤리아 법 도입은 1917년 2월 혁명 동안 무슬림들의 주요 요구였으며, 내전이 끝나가던 1920~1921년에 따라 중앙아시아와 코카서스에서는 샤리아 법에 의거한 이슬람 법정이 소비에트 법률 기관들과 동등한 위상으로 재판하는 병행 법정 제도가 만들어졌다. 사람들이 종교적 재판과 혁명적 재판 사이에서 선택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 제도를 감독하기 위해 소비에트 사법 인민위원회 산하에 샤리아위원회가 설립됐다. 1921년에는 지역 소비에트 집행위원회 산하에 위원회들을 만들어 미성년 결혼과 일부다처제 같은 문제를 두고 소비에트 법령을 중앙아시아의 조건에 맞춰 타협하도록 허용했다. 돌팔매질을 하거나 손을 자르는 등의 일부 샤리아 형벌은 불법화됐다. 이에 관한 샤리아 법정의 결정은 상위의 사법기관들로부터 승인을 받아야 했다. 일부 샤리아 법정은 아내의 청원에 따른 이혼 판결을 거부하거나 여성 두 명의 증언을 남성 한 명의 증언과 대등하게 여기면서 소비에트 법을 무시했는데, 이에 대해 당사자 중 한 명이 요청하면 소비에트 법정에서 재심을 받을 수 있도록 한 법령이 1922년 12월에 도입됐다. 그래도 법정 소송의 30~50퍼센트는 샤리아 법정에서 해결됐으며, 체첸에서는 그 비중이 80퍼센트나 됐다. 샤리아 법과 소비에트 법 간의 관계가 일방적인 것도 아니었다. 소비에트 관료들이 샤리아 법에 휘둘려 술을 마시거나 베일을 착용하지 않은 여성과 함께 집에 들어간 남성들에게 유죄를 선고한 사례도 있었다. 병행 교육 제도도 확립됐다. 1922년 와크프(이슬람) 자산 일부가 교육에 사용된다는 단서와 함께 자산에 대한 권리가 무슬림에게 돌아갔다. 그 결과 마드라사(종교 학교) 제도가 광범하게 확산됐다. 1925년 코카서스 지역의 다게스탄 주에는 공립학교가 183개뿐이었지만 마드라사는 1500개나 됐고 학생 수가 4만 5000명이나 됐다. 1921년 11월 중앙아시아에는 소비에트 학교가 1000개 이상 있었고 학생 수는 8만 5000명이었지만 등록 가능 연령대 추정치에 비하면 많은 것은 아니었다.
29 그에 따라 볼셰비키는 카자흐 범이슬람 집단인 ‘우쉬주즈’(1920년 공산당 입당), 젱겔리스의 페르시아 범이슬람 게릴라, 신비주의 수피파인 바이시파와 동맹을 맺을 수 있었다. 다게스탄에서는 주로 이슬람 지도자 알리-하지 아쿠신스키의 열렬 지지자들에 힘입어 소비에트 권력이 세워졌다. 체첸에서 볼셰비키는 체첸혁명위원회를 이끌었던 강력한 수피 교단의 우두머리인 알리 마타에프를 같은 편으로 끌어들였다. 30
볼셰비키 정책의 목적은 이슬람 운동을 좌우로 나누는 것이었다. 역사가들은 대다수 이슬람 지도자들이 소비에트 권력 하에서는 종교의 자유가 존재할 가능성이 더 크다고 확신하면서 노동자 국가에 대한 조건부 지지를 표명했다는 데에 동의하는 듯하다.31 비러시아인 군대를 활용했는데, 이들은 타타르·바시키르·카자흐·우즈베크·투르크멘 파견대였다. 적군赤軍 소속 타타르 병사들은 내전 중 동부전선과 투르키스탄 전선 병력 중 절반 이상이었다. 코카서스의 적군에서는 카바르딘인 이슬람 율법학자 카타카노프의 ‘샤리아 기병대대’가 수만 명이나 됐다. 타타르 볼셰비키 지도자 미르-사이드 술탄 갈리에프는 이렇게 썼다.
소비에트 정부는 중앙아시아에서 반볼셰비키 침략자들에 맞서 싸우기 위해 무슬림이 다수인내전 기간 동안 마을과 심지어 산속에 있는 모든 부족들이 단지 종교적인 동기만으로 소비에트군 편에서 비차라호프와 데니킨의 군대에 맞서 싸우는 것을 볼 수 있었다. 그들은 이렇게 말했다. ‘백군보다 소비에트 정권이 우리에게 더 많은 종교적 자유를 준다.’ 32일부 무슬림들은 혁명적 정치를 받아들여 공산당에 직접 입당했다. 트로츠키는 1923년에 남부 공화국들 중 일부에서 당원의 15퍼센트가 이슬람 신자라고 언급했다. 트로츠키는 그들을 “우리의 문을 두드리는 혁명적 신병들”이라고 불렀다. 중앙아시아 일부 지역에서는 공산당 당원 중 무슬림이 70퍼센트를 차지했다. 그들은 자신들의 종교적 관습과 신념의 흔적을 갖고 있었다. 1920년대 중반에 중앙아시아에서는 고위 공산당원의 부인들도 베일을 썼다.
34 하지만 중앙아시아의 러시아 국수주의자들이 1917년 이후 혁명적 시류에 편승한 뒤 ‘노동자 권력’이라는 구호를 빼앗아 그것을 대개 농민인 지역 주민들에 대항하는 것으로 바꿔놓자 자디드들이 이들을 분쇄하기 위한 진정한 투쟁을 벌였다. 2년에 걸친 내전 동안 이 지역은 모스크바와 단절됐고, 이 자칭 ‘볼셰비키’들은 토착민들을 마음껏 박해할 수 있었다. 그 결과 ‘바스마치Basmachi’ 운동(무장 이슬람 반란)이 일어났다. 레닌은 상황을 바로잡는 것이 “엄중한 역사적 중요성이 있다”고 지적했다. 1920년에 레닌은 이렇게 명령했다. “[중앙아시아에서 — 크라우치] 러시아 지배를 영원토록 이어갈 수 있다고 보고 소비에트 정권에 몰려든 경찰, 군대, 보안군, 행정가 등 차르 체제 기구의 옛 구성원들을 전부 러시아 수용소로 보내라.” 35 이 숙청의 일환으로 중앙아시아의 당 정책에는 ‘종교적 편견으로부터의 자유’가 러시아인들에게만 요구된다고 명시됐다. 1922년에 투르키스탄에서 러시아인 1500명 이상이 정교회 신념 때문에 투르키스탄공산당에서 쫓겨났지만, 무슬림은 단 한 명도 쫓겨나지 않았다. 36
역사학자 아디브 칼리드는 이렇게 지적했다. “투르키스탄공산당 창당 후, 자디드들이 가능한 한 빨리 입당하기 위해 몰려들었다는 사료들이 있다.”스탈린의 이슬람 공격
37 러시아에서는 국가가 실업과 적절한 출산권을 보장하지 못하게 되면서 여성이 다시 가정에 귀속됐고, 전통적인 가족이 부활하면서 여성의 지위가 약화됐다.
종교적 자유와 민족 자결권을 보장하려는 볼셰비키의 노력은, 소비에트의 제조업이 약화되고 그로 인해 대중의 가장 기본적인 필요를 충족시키지 못함으로써 점점 빛을 잃었다. 절망적인 가난이 소비에트 정권의 발목을 잡았다. 이미 1922년에 중앙아시아에 대한 중앙정부의 보조금은 삭감됐고 많은 공립학교들이 문을 닫았다. 교사들은 급여를 받지 못해 직장을 버렸다. 지역 공동체가 돈을 대는 이슬람 학교들이 유일한 대안이 됐다. 교육인민위원 루나차르스키는 이렇게 말했다. “빵을 제공할 수 없을 때 감히 그 대용품을 빼앗을 수 없다.” 샤리아 법원에 대한 중앙의 모든 재정 지원도 1924년에 끊겼다. 이런 경제적 요인들 때문에 무슬림들은 자기 고충을 법정에 제대로 제기할 수 없었다. 가령 어떤 소녀가 중매 결혼이나 일부다처제 결혼을 거부한다면, 그녀는 일자리와 살 곳을 얻지 못하게 돼 스스로 먹고 살 가능성이 거의 없었다.중앙집권화하면서 점차 득세하던 스탈린주의 관료들은, 스탈린주의와 차르 체제 간의 연속성을 강조하는 러시아 민족주의가 다수 민족(러시아인)의 노동자들을 정권에 결속시키는 강력한 도구가 될 수 있음을 깨닫게 됐다. 이 때문에 스탈린은 비러시아 공화국들에서 점점 더 ‘민족주의적 일탈’을 공격하고 러시아 국수주의의 부활을 부추겼다. 스탈린은, 군대·국가·경제 전반에 걸쳐 볼셰비키가 의존할 수밖에 없었던 수많은 차르 시절 관료들이 러시아 국수주의의 부활을 지지한다는 것을 알게 됐다. 1922년에 레닌은 볼셰비키가 “대大러시아 국수주의자 쓰레기들의 바다에서 우유 속의 파리처럼 익사”하기 직전이라고 경고했다.
1920년대 중반부터 이러한 경향들이 강해지면서, 스탈린주의자들은 ‘여성의 권리’, 특히 우즈베키스탄과 아제르바이잔에서는 히잡을 겨냥해 ‘관습에 기반한 범죄와의 전쟁’이라는 기치 아래 이슬람에 대한 전면적인 공격을 감행했다. 그런 공격을 하는 자들은 ‘후줌Hujum’, 즉 중앙아시아 언어로 ‘습격’, ‘공격’이라고 불렸다. 대개는 효과가 없던 비방이 2년 동안 이어진 후, 1927년 3월 8일 국제 여성의 날에 후줌은 대중 행동 단계로 접어들었다. 이들은 여성들이 대중 집회에서 히잡을 벗으라고 강요했다. 일부 현지 여성들은 연단에서 자신의 히잡을 모닥불에 던져야 했다.
후줌의 최근 역사를 쓴 어떤 역사가는, 볼셰비키 집권 초기에는 무슬림 여성들에게 히잡을 벗도록 강요하는 것은 고사하고 이를 부추기는 것조차 상상도 할 수 없었다고 지적했다.
요컨대, 1926년 이전에는 이른바 ‘히잡의 사회적 위험과 해로운 영향’은 기껏해야 부차적인 문제였다. 실제로 1926년 이전의 당 정책에서는 [히잡 벗기기가 — 크라우치] 제노텔[여성부]의 중심적인 관심사여서는 안 된다는 점이 분명했다. 사실 그 반대의 경우가 더 많았다. 권위 있는 위치에 있는 많은 볼셰비키들이 히잡을 벗기는 것에 반대하며, 그것이 시기상조이거나 더 나쁘게는 당의 이익을 해치기만 하는 방해물이라고 주장했다. 38
[거의 발끝까지 닿는 무거운 말털 가리개 – 크라우치]는 여러분의 정치 활동에 문제될 것이 전혀 없다.” 사실 내전 동안 파란지는 군사적으로도 유용했는데, 프룬제는 파란지 쓴 대의원들이 투르키스탄 해방에 기여할 수 있다고 분명히 밝혔다. “파란지 쓴 여러분의 가슴에는 명예로운 심장이 고동친다. 당신들은 파란지를 쓰고 혁명에 충실하게 복무할 수 있으며, 용기 있는 정찰병이 적군의 눈을 피하는 데에 파란지가 도움이 되기도 한다.” 39 1923년 중앙아시아의 당 지도자들은 우즈베크 여성들의 히잡을 벗길 것을 요구하는 사람들을 ‘좌익적 일탈’ 죄목으로 엄중 단속했다. 1925년 8월 말 전全 우즈베키스탄 제노텔 회의에서 주요 연설자는 베일 벗기기가 분명 볼셰비키적이지 않다며 이렇게 덧붙였다. “여성의 경제적·물질적 안전을 확보하는 것이 ‘여성 문제’ 해결의 근본적인 길이다.” 한 볼셰비키는 이렇게 주장했다. “파란지를 벗기는 것이 여성 해방이라고 이해하는 자디드들을 비판하며 여성의 완전한 정치적·경제적 독립을 고취해야 한다.” 40
1920년 5월 적군 지도자 미하일 프룬제는, 1차 투르키스탄 여성 대회에 참가한 대의원 118명(모두가 얼굴을 가리고 있었다)에게 이렇게 연설했다. “소비에트 당국이 보기에, 파란지 이와는 대조적으로, 후줌은 마르크스주의적 실천을 철저히 뒤집어 엎을 작정이었다. 후줌은 여성들이 전통적인 가정 밖에서 공부하고 일하며 살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해 여성 해방을 장려하려 하기보다는, 일부다처제·미성년 결혼·신부 매매를 금지하는 선전으로 여성들을 설득하려 했다. 캠페인의 목표는 성적 관계와 가족 생활의 즉각적인 탈바꿈으로 제한됐다. 게다가 스탈린의 공산당은 현지 출신 여성 당원들이 거의 없었음에도 후줌이 조기에 성과를 거둘 것을 요구했다. 1926년 우즈베키스탄 공산당 당원의 93.5퍼센트가 남성이었다. 1927년 7월 당 내에 우즈베키스탄 여성은 426명에 불과했고, 이는 우즈베키스탄 공산당 여성 당원 전체의 4분의 1도 안 됐다. 당시 우즈베키스탄 공화국의 인구는 500만 명 이상이었다.42 무슬림 여성에 대한 관료들의 이런 집착은 고결한 해방 사상과는 거의 관계가 없었고, 여성이 충분히 활용되지 않은 노동력의 원천이기 때문일 가능성이 더 컸다. 43 후줌의 근저에는 중앙아시아 현지인과 러시아인 사이의 뿌리깊은 인종적 긴장이 있었다. 이 시기 민족주의에 대한 매우 유익한 역사를 쓴 한 저술가는 다음과 같이 논평한다.
후줌은 압도 다수의 현지인들에게 이질적인 것이고 러시아 식민주의자들이 강제로 도입한 것으로 여겨질 수밖에 없었다. 이 점을 부각하기라도 하려는 듯 스탈린의 공산당은 후줌의 대변자로 러시아 남성 두 명을 선택했는데, 그들의 전력은 “레닌이라면 대러시아 국수주의자들이라고 불렀던 자들이라고 볼 만한” 정도였다.물론 대부분의 갈등은 폭력적이지 않았다. 더 빈번한 것은 상징적인 폭력 행위였다. 이 문제가 중앙아시아 공화국들의 주인은 누구인가를 둘러싼 갈등임을 감안할 때, 상징적인 문제들이 특히 중요했다. … 지금까지 가장 자주 보고된 상징적 폭력 행위는 러시아인들이 무슬림의 입술에 돼지고기 지방을 문지르거나 돼지고기를 먹도록 강요한 것이었다.
44 우선, 히잡 벗기기는 실패했다. 공개적으로 히잡을 벗었던 여성들 중 대다수는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히잡을 썼음이 거의 모든 당내 문서에서 드러났다. 또, 공포·적대감·폭력의 물결 속에 후줌에 맞선 저항이 벌어졌다. 모스크에서의 기도나 회합에 참석하는 수가 상당히 증가했고, 무슬림 어린이, 특히 소녀들의 소비에트 학교 자퇴 물결이 이어졌으며, 현지 청년들이 청년공산주의자동맹을 탈퇴하는 일이 늘었다. 히잡을 벗은 여성들은 길거리에서 점점 더 많은 괴롭힘과 수모를 당했다. 몇몇 마을에서는 [히잡을 벗었던] 여성들이 청년 패거리에 의해 강간당했고 점점 더 많은 수의 여성들이 대개 친척들에 의해 살해됐다. 1928년 중반까지 폭력은 만연했고, 심지어 ‘문화 혁명’[후줌]과 느슨하게라도 연관이 있으면 남자든 여자든 가리지 않고 희생양이 됐다. 수많은 사람들이 죽었다. 살인 가해자들이 붙잡혀 처벌받더라도 대개는 지역민들 사이에서 순교자 취급을 받았다. 45
스탈린 강제 집산화의 전조인 후줌이 보인 의지주의적 광기는 여성과 공산당에 재앙이었다. 후줌을 다룬 주요 역사가들은 이 공격으로 소비에트 연방에서 이슬람이 강화되는 효과를 낳았다는 데 동의한다. 히잡을 뿌리뽑는 데 6개월의 노력이 예상됐던 것과는 완전히 다르게, 당이 파란지 근절 약속을 이행하는 데는 수십 년이 걸렸다. 중앙아시아 거리에서 히잡이 모습을 감춘 것은 1950~1960년대에 이르러서였다. 1991년 우즈베키스탄이 소련에서 탈퇴했을 때, 국가의 승인이나 권장이 없었는데도 히잡 착용이 다시 민족 독립의 상징으로 유행했다.이론과 실천
종교적 민주주의에 대한 볼셰비키의 역사를 다루는 우익 비평가들은, 레닌이 단지 때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라고, 소비에트 지지가 충분치 않을 때는 진정한 의도를 숨긴 것이며 탄압을 개시할 때를 노리고 있었을 뿐이라고 주장한다. 오히려, 이 분야에 대한 레닌의 저술과 정치적 실천은 혁명 이전과 혁명 직후 사이에 강한 연속성이 있었다. 공산당들은 반反혁명적 반동이 시작된 1920년대 중반에서야 혁명적 전통에서 벗어나기 시작했고, 1920년대 말에 레닌주의에서 결정적으로 등을 돌렸다.
[인 중앙아시아 지방]으로 이동시키는 광범한 ‘적극적 우대조처’ 정책도 마찬가지였다. 만약 볼셰비키가 종교적 신념을 가진 사람들을 탄압하려는 은밀한 의도를 숨기고 있었다면, 1918년부터 종교적 평화주의자들이 군 복무를 하지 않도록 허용한 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
볼셰비키가 종교적 소수자들을 속여서 소비에트 권력을 지지하도록 만드는 데에만 관심이 있었다면, 내전이 끝난 후에는 샤리아 법원과 종교 학교를 허용할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소비에트 정부는 병행 법정 제도와 교육 제도를 확립하는 데에 상당한 자원을 투입했다. 고용에서 현지인들을 우대하고, 키릴 문자 강요를 포기하고, 러시아 식민주의자들을 이 지역에서 쫓아내고, 공장들을 이전 제국의 변방그렇다고 종교에 대한 접근을 두고 볼셰비키 당원들 내에서 논쟁이 없었던 것은 아닌데, 이는 민족 문제를 둘러싼 논쟁과 밀접하게 연관돼 있었다. 지도부를 포함해 상당수의 볼셰비키가 레닌과 트로츠키에 동의하지 않았음에도 레닌과 트로츠키의 정책은 초기에 지배적이었다. 다른 볼셰비키들은 압제자의 민족주의와 피압제자의 민족주의, 혹은 압제자의 종교와 피압제자의 종교를 구분하지 않았다. 그들에게 모든 종교는 적이었다. 하지만 일찍이 레닌은 민족적·종교적 권리에 대한 이런 추상적 반대가 러시아 국수주의의 부활과 결부될 수 있다는 것을 깨닫고 있었다.
47 1923년 6월 모스크바에서 열린 변경 지역 공화국 출신의 볼셰비키 지도자들의 비공개 회의에서 중요하게 다뤄졌다. 종교, 특히 이슬람의 문제가 회의 내내 토론됐다. (스탈린의 입장을 편들던) 오르조니키제를 지지한 초좌파들은 레닌의 민족 정책에 대한 비판을 종교에 대한 당의 ‘자유주의적’ 접근에 대한 비판과 결합시키기 일쑤였다. 예를 들어 크리미아 타타르족 출신인 피르디예브는, 자디드와 함께 중앙아시아에 ‘살아있는 모스크’를 만들자는 투르키스탄 지도자 호드자노프의 말을 비판했다. 그리고 그는 동방의 공산당 관료들이 현지어를 배워야 한다는 볼셰비키의 주장을 다수 민족, 즉 러시아인에 대한 ‘새로운 종류의 억압’이라고 비판했다. 48
민족 문제로 레닌과 스탈린이 사이가 틀어지자 의견 차이가 더 벌어졌다. 이 논쟁은 근본적인 정치적 원칙을 둘러싼 것이었으며호드자노프의 발언은 그 역시 민족 문제에 대한 당의 선언이 원칙의 문제가 아니라 ‘외부적인 정치 게임’에 불과하다는 관념에 영향을 받았음을 분명히 드러낸 것이었다. 속기록에 따르면, 트로츠키가 논의를 바로잡기 위해 즉각 끼어들었다. 그러나 투르키스탄 종교 정책에 대한 호드자노프의 발언은 레닌의 전술을 실행하려는 당의 노력을 반영하고 있다.
자디드 자유주의자들의 도움으로 정상적으로 운영되는 모스크가 생겨나고 있다. 성직자들, 즉 ‘울레미’[이슬람 종교 지도자 — 크라우치]와의 구체적 투쟁은 ‘카지’[또는 ‘카디’, 이슬람 법관 — 크라우치]에 의한 재판 제도를 시행하기 위한 투쟁으로 표현돼야 한다. 여기서 우리 측 자디드는, 성직자가 아니라 자유주의자가 카지가 되도록 돕기도 해야 한다. 우리는 페르가나의 키르기스족 내에 공식적인 ‘인민의 카지’ 제도 확립을 추진 중인데, 이는 보다 좌파적인 인자들이 상황을 주도하고 있다는 뜻이다. 또, 와크프 자산을 관리하고 운영하는 문제도 있다. 이러한 문제에서 우리는 비당원 지식인들 내의 좌파적 인자들, 자유주의자들과 동맹을 맺어야 한다. 49
50 이와는 대조적으로 체첸 출신의 엘데르하노프 는 종교와 민족적 정서를 모욕한 참담한 결과를 지적했다. “노동자들에게는 달콤한 연설을 하고 미소를 보내는 한편 이슬람 율법학자들의 수염을 뽑고 총검으로 세금을 강요했지만, 목표치의 5~6퍼센트밖에 걷지 못했다. 이런 과도한 군사적 조처 때문에, 탈세범들은 야산으로 탈출한 반면 평화적인 주민들만 고통을 겪었다. 결국 이 모든 것이 소비에트 정부에 대한 적대만 키웠다.” 51
이와 비슷하게 아제르바이잔 출신의 아훈도프는, 라마단 기간 동안 무슬림들이 기부금을 낼 때 이전처럼 종교 지배층에게 흘러갈 기부가 아니라 동방의 기근 피해자들을 돕는 기부를 하게끔 하자는 호소문을 무슬림들이 발표하도록 “다소 자유주의적인 이슬람 율법학자들”을 설득함으로써 보수적인 이슬람 엘리트들의 신망을 떨어뜨리자고 주장했다. 아제르바이잔 공산당원들은 이런 전술로 호드자노프의 ‘살아있는 모스크’에 대한 전통적 이슬람 지도자들의 통제를 약화시키기를 바랐다.52 역사적 기록을 보면 이는 레닌과 트로츠키가 했던 일이 아니며, 레닌과 트로츠키에 동의하지 않은 볼셰비키들이 스탈린의 뜻에 따른 것이었음을 알 수 있다. 볼셰비키가 반대자들의 지원이 필요했기 때문에 잠시 원칙을 억눌렀다는 이런 태만한 생각은, 사실상 모든 종류의 공동전선을 구축할 가능성을 배제하는 것으로 이어진다. 공동전선 내에서 혁명가들은 동맹들과의 광범위한 의견 불일치에 관계 없이 특정한 문제를 놓고 함께 싸우는 것에 동의한다. 독립적 정치·조직에 대한 권리를 유지하면서 말이다. 마르크스주의 원칙을 버릴까봐 두려워한 나머지 자기 주장에 동의하는 사람들과만 공동전선을 맺을 수 있다는 생각은 ‘유치원생 유물론자’들이나 할 법한 것이다. 53
오늘날 좌파 중에는 볼셰비키가 내전의 부담 때문에 마르크스주의 원칙에서 후퇴하면서 민족적·종교적 정서에 양보를 했다며 우파들의 말을 되풀이하는 사람들이 있다.54 간단히 말해서, 레닌의 입장은 이런 것이었다. 종교적 믿음에 근거한 모든 차별에 맞서 싸워야 하는가? 물론이다. 어떤 종류의 종교적 발전이나 ‘종교적 문화’ 일반을 위해서 싸워야 하는가? 물론 아니다. 55 마르크스주의자들이 종교의 자유에 대한 요구를 적극적으로 채택해야 하는지는 추상적 슬로건이 아니라 구체적 상황에 달려 있다. 56 볼셰비키가 샤리아 법을 상당 부분 관용한 것은, 이슬람 보수주의에 도전하려면 대러시아 국수주의 정책과 단절하는 한편 모스크를 중심으로 모든 계급을 단결시키는 종교 엘리트들의 능력을 약화시키고 무슬림 사회 내의 계급 분열을 표면화시키는 기초를 놓아야만 한다고 봐서였다.
볼셰비키의 민족 자결권 지지는 분리주의를 전면적으로 표명하는 것과는 거리가 멀었는데, 레닌은 지배계급에 맞선 투쟁에서 서로 다른 민족의 노동자들의 단결을 극대화하기 위해 구체적인 상황의 정치를 살펴봐야 할 필요성을 역설했다. 레닌은 민족 문제에 대한 글에서 종교에 큰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지만, 이는 종교의 자유가 차르 치하 민족 운동의 본질적인 요구라는 것이 너무나도 명백하기 때문이었던 듯하다.57 ‘이슬람 율법학자의 수염을 잡아당긴 것’은 소비에트 법정이 주취자에 벌금을 부과한 것 못지 않게 볼셰비키 중앙의 정책에 어긋나는 것이었다. 그러나 종교적 자유는 소수의 완고한 무리들이 종교의 이름으로 자신들이 좋아하는 것을 하는 자유가 아니기 때문에, 샤리아 법에 대한 상대적으로 극단주의적인 해석에는 제약이 가해졌다. 제노텔의 여성들은 고립된 이슬람 공동체에서 만연한 끔찍한 성차별에 맞서 싸우는 데 자신의 목숨을 바쳤다.
볼셰비키 중앙 지도부의 정책과 먼 지방의 경험 없는 동지들의 실천 사이에는 대개 차이가 있었다. 러시아인들 사이의 국수주의나 현지 활동가들 사이의 초좌파주의 때문에 문제가 계속 벌어졌다.[자신들을] 속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의미 없는 일일 것이다. 같은 연설에서 지노비예프와 라데크는 이 전쟁이 계급 전쟁이기도 하지만 반동적인 이슬람 율법학자들과 싸우는 것이기도 하다는 점을 거듭 강조했다. “당신들은 당신들의 정부가 성전을 호소하는 것을 종종 들었고, 예언자의 녹색 깃발 아래 행군했지만, 그 성전들은 모두 사기였고 이기적인 통치자들의 이익만을 위한 것이었다. 농민과 노동자들인 당신들은 그런 전쟁 후에도 노예와 결핍 상태로 남았다. … 우리는 당신들 자신의 행복을 위해, 자유를 위해, 삶을 위해 성전에 참가할 것을 호소한다!” 58
1920년 9월 바쿠 동방인민회의에서 지노비예프와 라데크는 서방 제국주의에 맞선 ‘성전’(가자바트)을 주장했다. 이 구호가 기회주의적이었는지 아닌지는 당시의 정치적 상황을 감안해야만 판단할 수 있다. 당시 볼셰비키는 여전히 강력했던 초좌파주의 관성과 옛 식민지 지역에 대한 대러시아 국수주의자들의 침투 때문에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볼셰비키 지도부가 대중이 이해할 수 있는 언어로 말하려 애쓰는 상황이기도 했다. 만약 사람들에게 소비에트 정부를 위해 싸우다 죽겠다고 촉구하는 상황이라면, 동시에 많은 이들이 종교적 가치에 기반해 싸우다 죽으려는 결심한 상황이라면, 그런 사람들에게 이 전쟁이 종교적 전쟁이 아니라고 정말이지, 보수적인 무슬림들이 소비에트 정권을 공격하는 반혁명 세력에 가담했을 때 볼셰비키는 한 치의 자비도 보이지 않았다. 이맘 나즈무딘 고친스키가 1920년 9월 다게스탄에서 볼셰비키에 대항하여 무장 반란을 이끌었다. 그의 전임자인 우준 하지는 고친스키의 태도를 이렇게 표현됐다. “나는 기술자들, 학생들,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글을 쓰는 이들(즉 라틴 또는 키릴 문자 사용자) 모두를 교수형에 처하기 위해 밧줄을 만들고 있다.” 1925년 고친스키가 구속되고 대규모 유혈사태가 벌어진 후에야 이 반란이 진압됐다.결론
레닌과 트로츠키의 지도 하에서 볼셰비키 지도부는, 혁명적 정당이라면 실천적 영역이 아니라 주로 주장의 영역에서 무신론자여야 하며, 국가는 반종교적인 것이 아니라 비종교적이어야 한다는 마르크스주의적 이해에 충실했다. 종교 공동체들은 혁명 하에서 두드러지는 자유를 누렸다. 이전 지배계급과의 강하게 연관돼 있는 차르 제국 정교회는 제약을 받기도 했지만 말이다. 스스로를 혁명가로 여겼던 무슬림들 등 여러 종교 신자들은 환대를 받으며 볼셰비키에 입당했다. 혁명을 지지한 비공산주의 종교인들은 국가 기구의 주요 지위를 차지했다. 몇몇 주요한 무슬림 단체들은 공산당에 집단 가입하거나 볼셰비키와 손잡고 혁명을 방어했다.
종교의 자유에 대한 무슬림들의 요구는 민족 자결권에 대한 요구와 밀접하게 연관돼 있었다. 차르, 러시아 식민주의자들, 공산주의 초좌파들에 맞서 볼셰비키와 무슬림은 자결권 쟁취를 위해 함께 투쟁했다. 그런 권리들은 혁명 속에서 함께 쟁취한 것이었지, 종교를 박해할 때만 노리던 반종교적 정권의 양보로 주어진 것이 아니었다. 이전 체제의 러시아 국수주의자들이 종교의 자유와 민족 자결권에 대한 공격을 주도했는데, 그들 중 상당수는 내전 이후 국가 기구에 들어와 점차 스탈린을 반혁명의 지도자로 삼은 군인들이었다. 레닌의 접근법을 거부하고 민족 자결권이나 종교의 자유에 대한 논의를 경멸하는 볼셰비키 내 초좌파 조류가 그런 자들을 도왔다. (그런 볼셰비키들은 거의 모두 스탈린 하에서 비명횡사했다.)
레닌 하의 볼셰비키들에게 히잡은 전혀 문젯거리가 아니었다. 1927년에 러시아 국수주의자와 스탈린주의자들이 히잡을 공격하기 시작했는데, 이는 몇 년 후 강제 집산화라는 재앙을 예고하는 무서운 전조였다. 강제적인 히잡 벗기기는 레닌주의를 뒤집어 버린 스탈린주의의 정책이었다. 따라서 오늘날 사회주의자들이 유럽에서 무슬림 여성들이 히잡을 쓸 권리를 옹호하고, 이라크·팔레스타인·아프가니스탄 점령에 맞서 무슬림들과 함께 행진하며, 제국주의의 무력 점령에 반대하는 무슬림들의 권리를 옹호하고, 공동전선에서 좌파 무슬림과 동맹을 맺는 것이야말로 레닌과 트로츠키로 이어지는 전통을 견지하는 셈이다.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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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Dave Crouch, The Bolsheviks and Islam, International Socialism No.110.
↩
- 런던 폭탄 테러 이후 야스민 알리바이 브라운은 “자기혐오적인 변태 사이코”, “프랜차이즈식 이슬람 파시스트”, “미친 눈”을 한 “살인자들”의 “순수하고 공허한 악”에 관해 썼다(‘Let Us Not Grace these Bombers with a Cause’, Independent, 11 July 2005). 폴리 토인비는 사회주의노동자당SWP을 “원시적 이슬람 극단주의의 길동무”라고 비난한 반면(‘In the Name of God’, Guardian, 22 July 2005), 모욕적인 욕설을 빼먹는 법이 없는 닉 코언은 자유주의 좌파가 “사이코패스 극우의 길동무가 됐다”고 말했다(‘I Still Fight Oppression’, Observer, 7 August 2005). ↩
- International Viewpoint, March 2005, http://www.zmag.org에서 이용 가능하다. ↩
- ‘The Middle East Through the Mirror of Marxism’, 2004년 7월 런던에서 열린 사회주의노동자당의 ‘맑시즘 2014’ 행사에서 한 강연. 여기서 아슈카르는 기독교와 이슬람의 기원은 완전히 다른데, 하나는 박해 받는 종파의 산물이고 다른 하나는 곧장 강력한 제국의 지배자가 되는 집단의 산물이라고 주장했는데, 이런 주장은 쿠란에게는 좌파적 해석의 여지가 없다는 의미였다. “당신이 쿠란에서 발견하는 많은 것들을 급진 좌파적으로 해석하는 것은 매우 힘들 것이다. 왜냐하면 쿠란에 있는 것들은 신이 계급으로서 당신을 창조했고 그래서 사회 계급은 자연스런 것이며 당신은 이를 숨길 수 없다는 사실을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여성 문제에 대해서도 말할 필요가 없다. … 그것은 완전히 반동적인 정책으로 인도한다.” 하지만 이슬람에 대한 마르크스주의적 해석은 쿠란과 같은 경전이 아니라 사회의 물질적 모순에서 출발한다. ↩
- ‘Building on the Success of the London ESF’, IST Discussion Bulletin, January 2005. ↩
- ‘Socialism and Religion’ (1905). 레닌의 글은 모두 www.marxists.org/archive/lenin에서 볼 수 있다. ↩
- K Marx, Contribution to the Critique of Hegel’s Philosophy of Right (1843, 강조는 원문), www.marxists.org에서 볼 수 있다. ↩
- ‘The Attitude of the Workers’ Party to Religion’ (1909). ↩
- L Trotsky, My Life (Harmondsworth, 1984), ch 6. ↩
- T Cliff, Lenin vol I: Building the Party (London, 1986), pp84-86. ↩
- 위의 책, pp157-158. ↩
- W Husband, Godless Communists: Atheism and Society in Soviet Russia 1917-1932 (Illinois, 2000), pp54-57. ↩
- P Steeves, Keeping the Faiths: Religion and Ideology in the Soviet Union (New Jersey, 1991), pp85-86. 1929년 4월 스탈린이 권력을 공고히 하면서, 개신교 복음주의 운동의 성장을 그토록 촉진시켰던 이런 활동들이 모두 금지됐다. ↩
- ‘Russian Baptists and the Military Question, 1918-1929,’ in P Brock and T P Socknat (eds), Challenge to Mars: Essays on Pacifism from 1918 to 1945 (Toronto, 1999), pp21-40. ↩
- Quoted in P Steeves, 위의 책. ↩
- W Husband, 위의 책, pp58-59 ↩
- W Husband, 위의 책, pp59-66을 보시오. ‘종교단체 관련법’ 제17조에 따라 “종교단체는 다음 활동이 금지된다. a) 상호 부조, 협동조합, 산업 협회를 위한 자금 조성, 그리고 일반적으로 종교적 필요의 충족이 아닌 다른 목적으로 처분할 재산의 사용, b) 회원들에 대한 물질적 지원, c) 특별한 어린이·청년·여성 예배와 기타 회합이나 일반적인 성경·문학·수공예·노동·종교 공부 모임, 그룹, 동아리, 부서, 그리고 단체 여행·어린이 놀이터 조직, 도서관·독서실 개설, 요양원·병원 운영 ….” ↩
- A Bennigsen and C Lemercier-Quelquejay, Islam in the Soviet Union (London, 1967), p78; R Pipes, The Formation of the Soviet Union (New York, 1954), p77. ↩
- D T Northrop, ‘Hujum: Unveiling Campaigns and Local Responses in Uzbekistan, 1927’, in D J Raleigh (ed), Provincial Landscapes: Local Dimensions of Soviet Power, 1917-1953 (Pittsburg, 2001), pp125-145. ↩
- A Khaleed, The Politics of Muslim Cultural Reform: Jadidism in Central Asia (Berkely, 1998). ↩
- A Khaleed, ‘Nationalizing the Rev-olution in Central Asia: The Transformation of Jadidism, 1917-1920’, in R G Suny and T Martin (eds), A State of Nations: Empire and Nation-Making in the Age of Lenin and Stalin (Oxford, 2001). ↩
- J Smith, The Bolsheviks and the National Question, 1917-1923 (London, 1999), p131. ↩
- F M Mukhametshii, Musul’mane Rossii (Moscow, 2001), pp48-49. ↩
- 이 글은 앞의 A Khaleed, ‘Nationalizing…’에 실려 있다. 나를 위해 영국도서관의 깊숙한 곳에서 전문을 찾아준 이리나 레스터에게 감사하다. ↩
- 자세한 내용으로는 ‘The Seeds of National Liberation’, International Socialism 94 (Spring 2002), pp115-142를 보시오. 내가 쓴 ‘Levye i prava malykh narodov’, Svobodnaya Mysl’-XX1, no 7, 2004, or at www.postindustrial.net도 보시오. ↩
- A Avtorkhanov, Imperia Kremlia (Vilnius, 1988), p99. ↩
- A Park, Bolshevism in Turkestan, 1917-1927 (New York, 1957), p214. ↩
- 이 문단과 이전 문단은 다음에서 가져왔다. A Park, 위의 책, pp229-234; F M Mukhametshii, 위의 책, pp45-48; V O Bobrovnikov, Musul’mane Severnogo Kavkaza (Moscow, 2002), pp217-234; D T Northrop, Veiled Empire: Gender and Power in Soviet Central Asia (New York, 2004), pp77-78, 274-275; G Massell, The Surrogate Proletariat: Moslem Women and Revolutionary Strategies in Soviet Central Asia: 1919-1927 (Princeton, 1974), pp202-203. ↩
- M Bennigsen Broxup, ‘Russia and the North Caucasus’, in M Bennigsen Broxup (ed), The North Caucasus Barrier: The Russian Advance Towards the Muslim World (London, 1992), p7; T Martin, The Affirmative Action Empire: Nations and Nationalism in the Soviet Union, 1923-1929 (New York, 2001), p130; A Park, 위의 책, pp242-243. ↩
- G Massell, 위의 책; A Bennigsen and S Wimbush, Muslim National Communism in the Soviet Union: A Revolutionary Strategy for the Colonial World (Chicago, 1979); A Khaleed, The Politics…, 위의 책. ↩
- A Bennigsen and S Wimbush, 위의 책, pp222-223; V O Bobrovnikov, 위의 책, p218; M Bennigsen Broxup, 위의 책, p6; A Avtorkhanov, 위의 책, p99. ↩
- 초기 볼셰비키 시기에 관한 많은 문헌에서, 그리고 볼셰비키들의 문헌에서, ‘무슬림’이라는 단어는 종교적 신념에 대한 설명이라기보다는 민족이나 지리상의 약칭으로 사용된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트로츠키조차 ‘무슬림 민족주의’(‘Vospitanie molodezhi i natsional’nyi vopros’, Pravda, 1 May 1923)에 대해 말한다. 이는 당시의 관념과 중앙아시아에서 민족 국가가 새로 생겼음을 반영한다. Bennigsen and Wimbush(위의 책)의 책은 이런 혼란 때문에 심각하게 망쳤다. ↩
- Mir-Said Sultan Galiev, ‘The Tartars and the October Revolution’ and ‘The Methods of Antireligious Propaganda Among Muslims’ (1921), 둘 다 A Bennigsen and S Wimbush, 위의 책, pp138-157에서 발췌. 러시아의 무슬림 지역은 술탄 갈리에프와 같은 몇몇 훌륭한 공산주의 지도자들을 배출했다. 교사의 아들로 태어난 술탄 갈리에프는 1917년 11월 23세의 나이로 볼셰비키에 입당했고, 몇 달 후 무슬림인민위원회의 수장이 됐으며 다작가이자 연설가였다. 우리는 오늘날 스스로를 ‘사회주의자’ 또는 ‘마르크스주의자’라고 칭하는 제3세계 민족해방운동에 익숙한데, 술탄 갈리에프는 이들의 지적 아버지다. (예를 들어 알제리의 아흐메드 벤 벨라는 그의 말을 인용하는 것을 좋아한다.) 술탄 갈리에프는 동양의 민족해방운동은 본질적으로 반제국주의적·사회주의적·혁명적이라고 주장했다. 그가 마르크스주의·민족주의·이슬람을 융합시킨 것은 의심할 여지 없이 볼셰비즘으로부터 중대한 이탈이었지만, 이는 구체적 상황에서 그리고 러시아 혁명 패배의 결과로 나타난 것이었다. 그는 득세하던 스탈린주의 관료들에게 희생된 사람들 중 첫 번째 유명인사였다. ↩
- L Trotsky, ‘Tasks of Communist Education,’ in Problems of Everyday Life (New York, 1994), p118; A Avtorkhanov, 위의 책, p102; D Northrop, ‘Hujum…’, 위의 책. ↩
- The Politics…, 위의 책, p288. ↩
- H Carrère d’Encausse, The Great Challenge: Nationalities and the Bolshevik State, 1917-1930 (New York, 1992), p183에서 인용. Bennigsen and Lemercier-Quelqeujay는 “중앙에서는 소비에트 정부가 모든 정치적 설득으로 무슬림들을 끌어들이기 위해 애쓴 반면, 변방에서는 전혀 그렇지 않았다”고 지적한다. Islam in the Soviet Union, 위의 책, p83. ↩
- A Park, 위의 책, p209. ↩
- 위의 책, p242; G Massell, 위의 책, pp196-198, 258-259. ↩
- D Northrop, Veiled Empire…, 위의 책, p78. ↩
- 위의 책, pp80-81 (강조는 원문). ↩
- 위의 책, p81. 혁명 이전에 여성의 지위를 전반적으로 향상시키기 위한 일환으로 베일 벗기기를 주장했던 사람은 자디드 개혁가들이었다. ↩
- D Northrop, ‘Hujum…’, 위의 책, pp129 and footnote 11. ↩
- G Massell, 위의 책, pp227-228. ↩
- 위의 책, pp165-171. ↩
- The Women’s Liberation Movement in Russia: Feminism, Nihilism and Bolshevism 1860-1930 (Princeton, 1978), p340. ↩
- G Massell, 위의 책, pp275-284; D Northrop, ‘Hujum…’, 위의 책. ↩
- D Northrop은 다음과 같이 쓴다. ‘어떤 면에서 후줌이 베일을 목표로 한 것은 오히려 단기적으로 베일 쓴 여성의 수를 늘리며 베일의 매력을 강화했을 뿐이었다…’—‘Hujum…’, 위의 책, p145. ↩
- 나는 이것을 International Socialism 94, 위의 책에서 자세히 설명했다. ↩
- Tainy Natsional’noi Politiki TsK RKP: Stenograficheskii Otchet Sekret-nogo IV Soveshchaniia TsK RKP, 1923g (Moscow, 1992), pp256-257. ↩
- 위의 책, p113. 호드자노프의 연설에 대해 지노비예프는 4일간의 회의를 요약하는 말미에 칭찬을 했다(p223). ↩
- 위의 책, pp162-163. ↩
- 위의 책, p197. ↩
- 예컨대, Hannah Sell’s article ‘Islam and Socialism’, in Socialist Today, no 87 (October 2004), or the infinitely weaker articles by G Byrne in Solidarity, nos 46, 47, 48 and 50 (2004)를 보라. ↩
- “겉보기에 혁명적으로 보이는 ‘화해’에 대한 두려움 뒤에는 정치적 수동성 … 진지한 정치 투쟁에 대한 환상이 도사리고 있다.”—L Trotsky, ‘On the United Front’, in The First Five Years of the Communist International, vol 2 (New York, 1974), p96. ↩
- 예컨대, 레닌은 폴란드 농민들의 “민족 독립과 종교, ‘폴란드’ 땅을 위한 투쟁”과(‘Critical Remarks on the National Question’, 1913), 초기 자본주의가 “모든 낡고, 중세적이며, 카스트적이고, 편협하며, 소小민족적이고, 종교적인 등등의 장벽들”을 쓸어내면서 영토를 국민 국가로 통합하려는 추동력을 언급했다(‘The Rights of Nations to Self-Determination’, 1914). 트로츠키는 ‘무슬림 민족주의’에 대해 이야기했다(위의 각주 31번을 보라). ↩
- Lenin, ‘Critical Remarks on the National Question’을 쉽게 표현했다. ↩
- 예컨대, SWP’s Pre-Conference Discussion Bulletins, nos 2 and 3, 2005의 종교 학교에 관한 Nick Grant와 Ger Francis 사이의 논쟁을 보라. ↩
- 각주 35번을 보라. ↩
- ‘Manifesto of the Congress to the Peoples of the East,’ in Baku: Congress of the Peoples of the East (New Park Publications, 1977), p172. 그 회의는 온갖 문제에 휩싸여 있었지만, 여기서는 그 문제를 파고들 여유가 없다. 주의: 1922년 코민테른 4차 대회는 2차 대회에서 채택된 정책을 수정하고 제국주의에 대항하는 범이슬람주의와의 일시적인 동맹을 승인했다—E H Carr, The Bolshevik Revolution 1917-1923, vol 3 (Harmondsworth, 1971), p476. ↩
- M Bennigsen Broxup, ‘The Last Ghazawat: The 1920-1921 Uprising’, in Bennigsen Broxup (ed), The North Caucasus Barrier, 위의 책, pp112-145. Bennigsen Broxup의 설명에 따르면, 지역 볼셰비키들의 초좌파적 정책 때문에 고친스키의 봉기에 대한 지지가 늘어났다고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