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동유럽 민주주의 혁명과 신중국 초기 노동자 투쟁
동유럽 민주주의 혁명 30년 ─ 국가자본주의 체제 붕괴의 교훈
1989년은 1917~1918년 러시아 혁명과 뒤이은 독일, 오스트리아-헝가리 혁명 이후 권위주의적 정부들이 가장 많이 무너진 해였다.
심각한 경제 위기와 계급투쟁의 결과 폴란드·동독·체코슬로바키아·헝가리·불가리아·루마니아 등을 수십 년간 강압적으로 통치한 스탈린주의 정부들이 잇달아 몰락했다. 이는 1991년 소련의 붕괴로 이어지며 냉전을 종식시킨 세계사적 사건의 출발점이 됐다.
30년 전 동유럽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이해하려면 오늘날 홍콩을 보면 될 것이다. 노동자들이 파업을 벌였고, 수많은 청년·학생들이 폭력 탄압을 무릅쓰고 거리로 나왔다. 오늘날 중국 정부는 홍콩 시위를 ”서구와 결탁한 음모”라고 비난하지만, 홍콩 시위는 중국 정부의 말과 다르게 진정한 민주주의를 위한 대중운동이다. 30년 전 동유럽도 마찬가지였다. 그런데도 한국의 일부 스탈린주의 좌파는 홍콩 시위와 관련해 억압적인 중국 당국을 편드는 끔찍한 입장을 취하거나, 어정쩡하게 침묵하고 있다. 30년 전에 좌파 운동진영에서 그런 혼란은 훨씬 더 컸다. 옛 소련과 같은 국가자본주의 체제를 사회주의라고 봤던 스탈린주의 좌파들은 1989년 중국 정부의 톈안먼 학살을 지지했다. 1991년에 소련에서 권위적인 국가자본주의 체제를 강화하려고 우익이 쿠데타를 벌였는데, 법무부장관 조국이 몸담았던 사노맹(사회주의노동자동맹)은 이를 지지하는 대자보를 대학들에 붙였다가, 쿠데타가 실패하자 슬그머니 떼냈다.
자칭 “사회주의” 국가들이었던 동구권이 붕괴한 이후 한국에서 스탈린주의적 사회주의를 추구했던 많은 활동가들이 방향 감각을 잃고 사기저하 했다. 그 과정에서 사노맹이나 인민노련(인천지역민주노동자연맹) 같은 스탈린주의 좌파 단체의 주요 활동가들도 자본주의를 혁명적으로 뒤엎으려는 전망을 버리고 개혁주의로 전향했다. 오늘날 정의당의 일부 주요 지도자들이나 포스트마르크스주의 또는 자율주의를 추구하는 사람들 중에도 당시의 충격파 속에서 정치적으로 변신한 사람들이 많다. 일부는 우익으로 전향했고, 더 많은 사람들은 큰 회의감 속에 운동을 포기했다.
이는 사회주의의 진정한 의미를 제대로 아는 것이 왜 중요한지를 보여 준다. 스탈린주의적 ‘사회주의’는 역사의 검증을 이겨내지 못했다. 옛 소련과 동구권 사회들을 사회주의라고 보지 않고 국가자본주의라고 옳게 분석한 사람들은 그런 혼란과 사기저하를 피하고 진정한 마르크스주의의 전통을 지켜갈 수 있었다. 오늘날은 국가자본주의 체제들에 대한 환멸감 때문에 사회주의라는 말까지 함께 매도됐던 30년 전과 달리 사회주의에 대한 관심이 다시 부활하고 있다. 여론조사에 따르면 미국의 10대 후반~20대 초반 중 자본주의보다 사회주의라는 단어를 긍정적으로 보는 사람이 더 많다.
자본주의의 위기가 갈수록 심화하는 상황에서 진정한 사회주의가 무엇이고, 사회주의를 위한 전략이 무엇인지를 분명히 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이를 위해 동유럽의 역사를 이해하는 것은 우리에게 중요한 교훈을 준다.
소련 탱크를 통한 ‘사회주의’ 이식?
1989년 동유럽 민주주의 혁명은 과거 소련의 위성국가였던 (오늘날로 치면) 중부 유럽의 국가들에서 일어났다. 동독, 폴란드, 체코슬로바키아(1993년에 체코와 슬로바키아로 분열), 루마니아, 불가리아 등이 포함된다.
이 지역은 서쪽으로는 독일, 프랑스 등 서유럽 열강, 동쪽으로는 러시아 사이에서 끊임없이 제국주의의 침략과 지배를 받아 왔다. 그런 점에서 어찌 보면 한반도와도 비슷한 점이 많은 지역이다. 1917년 러시아가 혁명 이후 민족자결권을 지지하면서 1918년에 폴란드가 독립하는 등 민족 해방의 가능성이 열렸다. 하지만 히틀러의 독일과 1928년 반혁명 이후 민족주의적 패권 정책을 추진한 스탈린 정권에 의해 다시금 큰 고통을 받았다. 제2차세계대전 이후 미국과 소련의 야합에 의해 한반도에 38선이 그어졌듯, 동유럽도 영국 처칠과 소련 스탈린에 의해 소련의 영역으로 편입됐다. “제2차세계대전의 승자들이 전리품 배분을 논하던 때, 영국 총리 윈스턴 처칠은 소련의 독재자 스탈린에게 동유럽의 미래에 관한 몇몇 제안을 손으로 휘갈겨 써서 전달했다. 처칠의 계획은 기본적으로 영국에게 그리스 공산당을 ‘처분’할 권리를 주면 소련은 불가리아·루마니아·헝가리에서 제 마음대로 할 수 있게 한다는 것이었다.”
제2차세계대전 당시 나치의 폭압에 시달렸던 동유럽 민중은 해방의 기대에 들떠 있었지만, 환상은 금새 깨져 버렸다. 소련은 탱크를 몰고 동유럽을 점령해 헝가리, 폴란드, 동독, 체코슬로바키아 그 밖의 다른 나라들에 소련과 닮은 정부들을 세웠다.
4 그러나 소련은 평의회를 해체하고, 나치 치하에서 노동자들을 박해하던 국가기구를 차지한 후에 정부를 장악하기 시작했다. 동독에서 소련은 히틀러의 정보기관을 거의 그대로 물려받아 운영했다. 소련이 세운 정부들에는 나치의 점령을 지지한 정치인들도 포함됐다. 예컨대 1945년 3월 스탈린의 후원으로 세워진 루마니아 정부의 문화부 장관 미하이 랄레아는 히틀러를 열렬히 칭송한 인물이었다. 5
이는 강압적인 과정이었다. 예를 들어 1944년 불가리아에서는 해방된 노동자들이 자신들의 평의회를 세우고, 파시스트를 체포해 재판하는 조사 위원회를 선출했다. 병사들도 평의회를 선출했다. 이후 사회민주주의 정당들은 강제로 공산당에 통합됐다. 소련에게서 조금이라도 독립하려는 여지가 보이는 사람들은 정부에서 축출되고, 감옥에 갇히고, 종종 처형까지 당했다. 불가리아의 코스토프, 헝가리의 라이크, 체코슬로바키아의 슬란스키가 모두 처형당했고, 폴란드의 고무우카와 헝가리의 카다르는 감옥에 갇혔다. 자신의 입맛에 맞는 정부를 세운 소련은 동유럽 국가들을 자신의 경제적·정치적 이익에 종속시켰다. 헝가리, 체코슬로바키아, 루마니아, 동독은 전쟁배상금을 소련에 지불해야 했다. 그래서 소련은 이들 나라의 공장들을 접수했고, 이 나라들이 자신의 제품을 엄청나게 높은 가격으로 수입할 것을 요구했다. 이 때문에 1940년대 말 헝가리에서는 식량 부족 사태가 아주 심각해서 1인당 평균 칼로리 소비량이 하루 850kcal 이하로 떨어졌고, 루마니아 사람들은 살아남기 위해 풀과 나무껍질 그리고 진흙을 먹으며 지내는 일도 벌어졌다.국가자본주의
이런 사회가 진정한 의미의 사회주의일 수는 없다. 마르크스는 사회주의를 노동계급의 자력해방 과정을 통해서만 이룰 수 있다고 봤다. 노동계급은 스스로 투쟁하는 과정 속에서만 더 큰 단결과 연대를 이루고 의식을 발전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마르크스는 노동계급의 투쟁을 중시했고, 이 투쟁이 전진하는 것을 통해 자본주의를 타도하고 노자계급과 피억압자들의 해방을 이끌어 가는 사회를 건설할 수 있을 것이라고 봤다. 그러나 동유럽에서는 이런 과정이 전혀 존재하지 않았다. 그래서 팔레스타인 출신의 영국 혁명가 토니 클리프는 1947년 옛 소련과 동구권 사회가 사회주의가 아니라 국가자본주의라고 날카롭게 분석하는 책을 썼다.
많은 사람들은 소련과 동유럽 국가들이 생산수단을 개인적으로(사적으로) 가지지 않고 국가가 소유했다는 점에서 이들 사회를 사회주의라고 본다. 그러나 국가의 소유와 사회주의는 결코 같은 말이 아니다. 이 점은 마르크스와 엥겔스도 분명히 지적한 바 있다. 엥겔스는 《공상에서 과학으로》에서 이렇게 썼다.
[산업이] 주식회사나 트러스트로 바뀌어도 혹은 국가의 소유물이 되어도 생산력의 자본으로서의 성격은 폐기되지 않는다. … 근대 국가는 어떤 형태를 취하든 본질적으로 자본주의적 기관이고 자본가들의 국가이며 관념상의 총 자본가이다. 생산력을 그 소유물로 만들면 만들수록, 국가는 더욱더 참된 총 자본가가 되고 더욱더 국민을 착취한다. 노동자는 여전히 노동자이고 프롤레타리아다. 자본주의적 관계가 폐기되지 않고 오히려 극단으로 치닫게 된다. 9
만약 국가가 생산수단을 소유하고 통제하는 것이 사회주의라면 1970년대 박정희 시절이야말로 사회주의적이었다고 해야 할 것이다.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사회주의가 되면 계급 적대가 사라지고, 그 결과 국가가 소멸할 것이라고 봤다. 생산수단의 국가 소유가 아니라 국가의 사멸이 진정한 사회주의의 특징이다.
10 동구권 체제들도 사회주의가 아니었다. 한 사회를 규정할 때 그 체제 지배계급의 이데올로기만을 보면 안 된다. 동구권 체제들이 자본주의적 경쟁적 축적이라는 동학에 따라 운영됐다는 점을 결정적으로 중요하게 봐야 한다. 이런 분석은 이데올로기만이 아니라 그 이면의 체제의 진정한 동학을 중시하는 역사유물론의 방법을 충실하게 적용한 것이다.
또 많은 사람들은 지배계급이 표방하는 이데올로기만 보며 그 나라들을 사회주의라 규정했다. 그러나 “이승만의 자유당이 전혀 자유주의적이지 않았듯이, 박정희의 민주공화당이 전혀 민주적이지도 공화주의적이지도 않았듯이, 전두환의 민주정의당이 전혀 민주적이지도 정의롭지도 않았듯이, 히틀러의 나치, 즉 국가사회주의당이 전혀 사회주의와 관계 없었듯이”자본주의의 핵심 특징은 자본가들의 이윤 경쟁과 노동자들에 대한 착취라고 볼 수 있다. 그런데 소련과 동유럽 국가들은 이윤 경쟁에서 결코 자유로울 수 없었다. 동유럽 국가들은 비록 국내에선 경쟁이 없었지만 국제적으로는 서구 국가들과 경쟁했다. 시간이 갈수록 시장을 둘러싼 경쟁이 늘어나긴 했지만, 압도적으로는 군사적 경쟁이었다. 이는 서방 경제에서 기업들이 경쟁하는 것과는 달라 보이기도 했지만, 체제의 경제적 동학이라는 면에서는 같은 효과를 냈다.
동유럽 지배자들은 노동자들을 최대한 쥐어 짜내 만든 잉여를 산업 발전에 투입해야 이런 경쟁에서 살아남을 수 있었다. 그래서 소련은 1957년 세계 최초로 인공위성을 쏘아 올리는 기술을 가졌지만 노동자들에게는 기본적인 생필품도 제공하지 못했다. 이는 카를 마르크스가 《자본론》에서 묘사한 상황과 정확히 일치했다. 마르크스는 자본가들이 상품 판매 경쟁을 하다 보면, “축적을 위한 축적”을 하게 된다고 설명했다.
이렇게 노동계급을 소외시키는 생산체제를 유지하기 위해 국가 기구를 이용한 강압적 탄압이 일상이 됐다. 생산수단을 소수가 좌지우지 하는 사회에서 극심한 불평등과 부패도 당연히 생길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축적 경쟁은 두 가지 결과를 낳는다. 한편으로 대규모 경제 위기를 낳고 다른 한편으로 지배계급을 무너뜨릴 잠재력을 지닌 노동계급을 만들어 낸다. 제 아무리 억압적이고 전체주의적인 국가도 노동계급을 무한정 통제하지는 못하는 법이다.
국가자본주의론은 옛 소련이나 동유럽 같은 사회를 일면적으로 보지 않고 그 성장과 쇠퇴 모두를 분석할 수 있다. 이는 다른 설명에서는 찾기 힘든 중요한 장점이다.
12 한국에서도 북한을 남한보다 못한 사회로 보는 정의당의 심상정 등과 같은 정치인들은 북핵 문제 등에서 주로 북한을 비판하며 남한 지배계급의 안보 강화론에 타협해 왔다.
옛 소련 사회를 자본주의보다 못한 사회로 보는 것은 기본적으로 사회주의의 이름에 먹칠을 하고 싶어 하는 이 사회 지배계급의 주류적 시각에 부합한다. 진보·좌파 중에서도 옛 소련 사회를 서구 자본주의보다 못한 사회라고 보는 사람들은 결국 서구 지배자들을 지지하는 입장으로 미끄러지곤 했다. 예를 들어 영국의 작가 조지 오웰은 정부에 공산당 지지자 명단을 넘겨 줬고, 미국의 사회주의자였던 샤흐트만은 1961년 미국의 쿠바 침공을 지지했다.그러나 이런 입장들은 옛 소련과 동유럽 사회들이 과거 서구 자본주의보다 더 빠르게 성장했던 시기들을 설명하지 못한다. 경제적으로 후진적이었던 옛 소련 사회는 1960년대까지 30년간 전 세계 어느 나라보다 경제 성장률이 높았고, 1987년까지 경제 규모 세계 2위를 유지했다. 1970년대 초까지 북한의 1인당 국내총생산도 남한보다 컸다.
반면 옛 소련 같은 사회를 서구식 자본주의보다 더 나은 사회로 보는 입장은 그 사회들이 왜 심각한 위기와 체제 붕괴를 겪었는지 설명하지 못한다. 그래서 스탈린주의자들은 옛 소련과 동유럽의 붕괴를 서방의 개입 때문에 벌어진 일쯤으로 취급한다.
그러나 동구권 사회들을 국가자본주의 체제로 보면, 경쟁적 축적 과정에서 벌어졌던 체제의 성장과 위기를 모두 이해할 수 있다.
국가자본주의 체제의 성장과 위기 옛 소련과 동유럽은 국가자본주의가 가장 극단적으로 발전한 형태였다. 그러나 사실 경제 전체를 국가가 통제하는 경향은 이들 나라만의 특징은 아니었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이것은 제1차세계대전부터 1929~1934년 공황을 거쳐 1970년대까지 자본주의 세계 전체에서, 특히 상대적으로 취약한 나라의 경제에서 나타난 경향이었다.
두 번의 세계대전과 1930년대 위기는 선진 자본주의 사회들에서 국가와 거대 기업의 대규모 융합을 초래했다. 이 점을 1916년에 부하린과 레닌이 제국주의를 분석하며 주되게 강조한 바 있다. 국가는 이렇게 규모가 커진 기업들을 해외 경쟁자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관세 등 보호주의 정책을 쓰고, 국내 기업 육성을 임무로 삼았다. 여러 자본주의 국가들이 자국 내에 철강·조선·항공·자동차 산업 등을 육성하며 산업 활동을 창출하고 통제하는 것은 전 세계적 추세였다.
14 1970년대 박정희가 추진한 산업화 과정도 대표적인 사례이다.
특히 토착 산업 발전이 취약한 후발 자본주의 국가들은 이 경향을 두드러지게 추구했다. 후발 자본주의 국가에서 새로운 산업을 건설하려면 국가가 강제력을 사용해 가용 자원을 집중해야 했기 때문이다. “1930년대와 1940년대 무솔리니의 이탈리아, 페론의 아르헨티나, 바르가스의 브라질, 네루의 인도, 장제스와 마오쩌둥 치하 중국의 경제 발전에서 국가가 전면에 나섰다. 그로부터 몇 년 뒤에는 나세르의 이집트, 이라크와 시리아의 경쟁적 바트당 정권들, 부메디엔의 알제리, 버마의 군사정권 등 다양한 나라에서 그랬다.”소련은 1917년 러시아 혁명으로 탄생했지만, 독일, 중국 등의 혁명이 패배하며 고립되는 상황 속에서 혁명의 대의를 버린 스탈린이 권력을 장악했다. 스탈린은 1928년 경제발전 5개년 계획을 통해 서방과의 경쟁을 위해 국가자본주의적 축적을 폭력적으로 밀어붙였다.
동유럽은 1929년 대공황과 뒤이은 제2차세계대전 시기 독일 나치의 점령을 겪으며 산업이 매우 황폐해진 곳이었다. 예를 들어 폴란드는 나치 점령 기간에 인구의 16퍼센트가 죽었고, 자산의 20퍼센트가 파괴됐다. 그래서 전후 동유럽에서는 국가가 나서서 생산을 재조직해야 한다는 것이 당연시되는 분위기였다. 사적 자본주의 기업체들의 방해도 거의 없었다. 초기 국가자본주의적 축적 과정에서 소련과 동유럽 국가들은 급격한 경제 성장을 경험했다. 특히 농업 부문에서 공업 부문으로 급속하게 노동계급을 빨아들이던 ‘시초축적’ 기간에는 국가의 폭력적인 억압 조처들이 효과를 발휘했다. 스탈린은 농민에 대한 강제 집산화, 강제 노동 수용소, 파업 노동자와 시위대 총살, 거미줄 같은 보안경찰 정보망 등을 이용해 시초축적을 진행했다. 이를 통해 영국 자본주의가 3세기에 걸쳐 이룩한 것을 겨우 20년 만에 달성했고, 그 과정에서 1000만~2000만 명, 많게는 3000만 명이 죽임을 당했다.
축적 과정에서 노동계급은 급속하게 성장했다. 1928년경 소련은 노동인구의 80퍼센트가 농민이었지만, 1953년 스탈린이 죽었을 때는 인구의 거의 절반이, 1985년에 이르면 3분의 2가 도시에 살았다. 전쟁 전의 동유럽 국가들도 오직 14퍼센트만이 노동자였지만, 1980년에는 그 비율이 60퍼센트로 늘었다.
그런데 경제가 성장할수록 초기의 착취 방식은 한계에 부딪혔다. 산업화 초기 국면에는 가장 원시적인 방법을 사용해 미숙련 농민 출신 이주자들이 일을 하도록 강요할 수 있었다. 농촌을 떠나 새롭게 노동자로 편입되는 사람들은 대규모로 존재했고, 이들의 노동생산성이 낮은 것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았다. 그러나 산업이 발전할수록 노동 예비군과 원료는 바닥나기 시작했다. 노동과 원료를 더 효율적으로 사용해야 했고, 그러려면 노동자들에게 더 나은 음식과 휴가, 교육 등을 제공해야 했다. 그러나 이는 서방과의 경쟁을 위해 축적을 늘리고, 군비 투자를 늘려야 할 필요와 충돌했다. 소련과 동유럽의 지배자들은 소비재를 늘리겠다는 약속을 반복했지만, 실제 체제의 우선 순위는 바뀌지 않았다. 민중의 생활 수준이 상승하긴 했지만, 서방 선진국 수준만큼 생산성을 향상시키기에 충분한 정도는 아니었다. 그래서 소련의 생산성은 서방에 비해 크게 뒤처졌다. 클리프는 이렇게 지적했다.
소련의 제조업 노동자 계급은 미국보다 3분의 1가량 더 많다. 소련의 제조업 기술자의 숫자는 미국의 두 배이지만, 생산량은 미국의 절반이다. 전체 인구 중에서 농업에 종사하는 비율은 미국이 4퍼센트인데 소련은 30퍼센트이다. 하지만 그 4퍼센트가 미국 내에서 필요한 식량을 넉넉히 생산함은 물론 수출까지 하고 있다. 그에 비해서 소련은 소비 수준이 훨씬 낮은데도 식량을 수입하고 있다. 16
게다가 자본주의적 축적은 그 자체의 특성상 결국 경제 위기로 이어진다. 잉여가치를 기계 등의 불변자본으로 투여하는 과정에서 실제 가치를 생산하는 살아 있는 노동력에 대한 투자가 줄어들어 이윤율이 저하하기 때문이다.
17 그 결과 이윤율은 떨어졌다. 이는 경제 성장률이 시간이 갈수록 추락한 것에서도 드러난다. 소련의 공식 발표를 보더라도 소련의 연평균 성장률은 제1차5개년계획 동안에 무려 19.2퍼센트였지만, 1950년대에는 10.3퍼센트, 1971~1975년에는 5.7퍼센트, 1981~1985년에는 3.6퍼센트로 줄어들었다.
소련에서 총 생산물 중 소비로 가는 비중은 1928년에 60.5퍼센트였지만 1940년에 39퍼센트, 1985년에는 25퍼센트에 지나지 않았다. 반면 기계 등에 대한 투자 비율인 축적률은 상당히 높은 수준으로 유지했다. 동유럽 국가들의 경우 축적률은 약 40퍼센트에 달했다.그래서 흔한 오해와 달리 소련과 동유럽에서도 경제 부침과 갈수록 헤어나오기 힘든 불황이 존재했다. 소련에서 이윤율 저하는 계획한 것에 비해 생산량이 빠르게 증가하지 못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계획은 실행되지 않기 일쑤였고, 제한된 생산 능력은 군비와 같은 곳에 우선해서 투입됐다. 그래서 소비재는 더욱 부족해졌다. 서구에서는 불황이 만들어 놓은 생산물을 살 사람이 없는 과잉생산의 형태로 나타나지만, 소련에서는 생산물이 부족해서 사람들이 소비재를 사기 위해 긴 줄을 서야 하는 형태로 나타났다.
이에 더해 1960년대 말 이후 세계 자본주의 체제 내부에서 생산이 국제화되는 경향이 갈수록 커지면서 옛 소련과 동유럽 경제는 더욱 뒤처지게 됐다. 세계 자본주의는 국가자본주의 단계를 넘어서 크리스 하먼이 “다국적 자본주의”라고 부른 형태로 발전해 갔다. 자본의 집적과 집중이 심화하면서 기업들은 한 국가를 넘어 세계적으로 생산의 조직망을 넓혀 나갔다. 현재 미국의 보잉과 유럽의 에어버스가 세계 민간 항공기 생산의 90퍼센트 이상을 차지하고, 메모리 반도체 시장의 대부분을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마이크론이 장악하고 있듯 거대 기업들은 세계 시장을 두고 경쟁하고 있다. (이 과정에서 국가는 약해지거나 사라진 것이 아니라 자국에 주요 기반을 둔 기업들의 성장을 뒷받침하는 구실을 해 왔다.)
상대적으로 고립된 생산을 하며 군비를 통해 간접적으로 경쟁했던 상황에서는 뒤처진 생산성의 문제가 잘 드러나지 않을 수 있었다. 그러나 생산의 국제화와 무역이 발달할수록 문제를 가리기는 더욱 힘들었다. 옛 소련에 비해 무역의 중요성이 더욱 컸던 동유럽의 경우에는 이 문제가 더욱 심각하게 여겨졌다. 게다가 이렇게 동구권 경제가 부진한 상황에서, 경제 규모가 가장 컸을 때조차 미국의 절반 수준이었던 소련에게 군비 경쟁은 상당한 부담이었다.
이런 국가자본주의적 축적 체제의 심각한 위기 상황에서 노동계급의 거대한 저항이 거듭 분출했다. 1953년 동독 노동자들의 항쟁, 1956년 폴란드 포츠난의 노동자 봉기, 노동자 평의회를 탄생시켰던 헝가리 혁명, 1968년 학생과 노동자들이 함께 들고 일어섰던 체코슬로바키아의 봄, 1970~1971년 폴란드 항쟁 등. 1953년 동독, 1956년 헝가리, 1968년 체코슬로바키아의 반란은 소련의 탱크를 통해서야 진압됐다.
친 시장 개혁 시도와 폴란드 연대노조 체제가 부딪힌 문제에 대처하기 위해 폴란드와 헝가리 등의 지배계급은 서방 시장에 기대는 방향으로 성장을 도모하려 했다. 외채를 빌려 수출 산업 투자를 강화하고, 서방 기업들과 합작을 강화하며 생산성을 높이려 했다. 헝가리에서는 서방 기업들과의 합작 회사가 수백 개 생겨났고, 폴란드 정부도 다양한 서방 기업들의 투자를 끌어들였다. 다른 동유럽 국가들은 더 조심스러운 태도를 취했지만, 그럼에도 그들도 서방과 거래를 늘렸다. 소련도 북러시아에서 서유럽에 이르는 대규모 가스관 건설을 1980년대 초에 진행했다. 1989년 10월 중순 무렵에 소련, 헝가리, 폴란드, 체코슬로바키아, 루마니아, 불가리아에 등록된 합작회사는 2090개였다.
그러나 친 시장적 방향은 또 다른 문제를 낳는 씨앗이었다. 이들은 수출이 진척되면 외채를 상환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1974~1976년과 1980~1982년의 세계적 경기 후퇴의 여파로 1979~1980년에 폴란드는 경기 침체에 빠져들고, 헝가리는 외채 문제로 몸살을 앓는다.
그래서 1980년대 초에 동유럽 지배자들은 폐쇄 경제로 돌아가지도, 그렇다고 경제 개방을 강화하지도 못하는 딜레마에 직면했다.
이런 상황에서 1980~1981년 벌어진 폴란드 연대노조의 거센 투쟁은 동구권 지배자들의 간담을 서늘하게 했다. 당시 폴란드 지배계급은 외채 위기가 심각해지는 상황에서 물가를 인상해 경제 위기의 고통을 노동자들에게 전가하려 했다. 1980년 7월 물가 인상 정책이 알려진 날 전국 곳곳에서 항의 파업이 시작됐다. 몇몇 공장에서 경영자들은 임금을 인상해 주겠다며 노동자들의 분노를 무마하려 했지만 파업은 오히려 확대됐다. 조선소 노동자들은 공장 점거 파업을 벌였고, 다른 분야로도 파업이 확대됐다. 파업 노동자들은 지역의 연대파업위원회를 꾸렸고, 이 조직은 새로운 독립노조인 연대노조로 발전했다. 노동자들의 요구도 임금 인상, 연금의 확대, 언론 개방, 그리고 독립노조 결성의 권리, 반 부패 문제 등 경제적인 동시에 정치적인 것으로 확대됐다.
연대노조는 급속하게 성장했다. 단 두 달여 만에 당시 폴란드 인구 3500만 명 중 1000만 명이 연대노조에 가입했다. 노동자들의 강력한 파업 투쟁은 체제를 뒤흔들었다. 투쟁은 학생들의 점거 농성과 감옥 수감자들의 소요 등으로도 발전했다. 1981년 한 해 동안 폴란드의 146개 감옥 중 109곳에서 소요 사태가 벌어졌다. 가난에 찌들어 살던 농민들도 농민연대를 결성하고 점거 시위 등을 벌였다.
소련의 지배자들은 저항을 분쇄하기 위해 군대 투입을 준비했고, 폴란드 국경에 소련군을 배치하며 위협했다. 그러나 소련은 이번에는 군대를 투입하지 못했다. 폴란드는 동유럽에서 가장 큰 나라인데다, 저항의 수준이 너무 높았고, 군대를 투입했을 때 기층 군인들이 이반할 위험성도 있었기 때문이다.
정부는 심각한 위기에 빠졌고 연대노조는 사실상 정부에 맞선 대안적 권력 기구 구실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오히려 그 상황에서 연대노조의 지도부는 정부와 협상을 추구하며 자중지란에 빠졌다. 그 핵심적인 이유는 연대노조 지도부가 작업장에서는 매우 전투적으로 싸웠지만 운동이 나아가야 할 정치적 대안을 제시하는 측면에서는 약점이 컸기 때문이다.
19 신디컬리스트들은 전투적으로 투쟁할 수 있지만 노동조합을 중심으로 사고하기 때문에 자본주의 체제의 대안을 건설하려는 준비가 돼 있지 못하다. 1919년 영국의 노조 지도부나, 1936년 스페인 혁명 당시의 전국노동조합총연맹CNT의 지도부도 권력 장악을 회피하고 부르주아 권력을 유지시켜 주는 구실을 했다. 당시 폴란드에서는 노동계급의 권력 장악이라는 문제가 당면한 선택지에 놓여 있는 상황이었다. 당시 연대노조를 소비에트와 같은 기구로 발전시키며 국가 타도를 위한 봉기를 준비해야 할 필요가 있었던 때 지도부는 방향 감각을 상실해 버린 것이다. 당시 폴란드에서 운동을 더욱 발전시키려면 아래로부터 사회주의를 건설하려는 목적 의식이 분명한 볼셰비키와 같은 혁명적 조직이 필요했다.
이는 고전적인 신디컬리즘(노동자들의 문제는 국가 권력 문제에 관심을 두지 않고도 노동조합 조직을 강력하게 건설해 해결할 수 있다는 믿음)의 한계를 보여 주는 사례였다.연대노조는 15개월 동안 폴란드 사회를 뒤흔들었지만, 결국 정부는 군대를 동원해 폭력적으로 연대노조를 해산하고, 계엄 통치를 벌였다. 그럼에도 정부는 지하에서 활동을 이어가는 연대노조 활동가들을 사라지게 할 수는 없었다. 또 그 운동을 성장시킨 기저의 동인들도 제거할 수 없었다. 폴란드 연대노조의 도전은 동구권 전체에 큰 파문을 던졌다.
페레스트로이카, 글라스노스트
폴란드 연대노조 운동은 소련의 고르바초프가 위로부터 개혁을 추진하는 데 영향을 미쳤다. 고르바초프는 1985년 집권했다. 그의 집권은 전 서기장이었던 안드로포프의 도움이 컸다. 안드로포프는 1956년에 헝가리 대사를 지냈고 1980~1981년 폴란드에서 소련 공산당의 국가보안위원회KGB 위원장을 지내면서 경제 위기 때 무슨 일이 일어날 수 있는지 목격했다. 안드로포프처럼 고르바초프도 폴란드 같은 경제적·사회적·정치적 위기가 벌어지기 전에 위로부터 개혁을 통해 체제를 구하고 싶어했다.
고르바초프가 추진한 페레스트로이카는 경제 위기가 더 심해지기 전에 경제 구조조정을 하려는 정책이었다. 고르바초프는 비효율적인 공장들을 폐쇄하고, 노동자들을 해고하고, 산업을 통제하는 관료 기구의 규모를 축소하고, 관료적 명령 대신 시장을 통해 경제를 운영해 나가려 했다. 이는 영국의 대처와 미국의 레이건 등이 추진한 신자유주의 정책과 유사했다. 고르바초프가 제출한 구조조정 계획에 따르면 노동자 1600만 명이 해고돼야 했다.
페레스트로이카를 추진하기 위해 글라스노스트(개방)도 필요했다. 글라스노스트는 선거와 언론의 자유, 집회 시위의 자유 등을 매우 제한적으로 확대하는 정책이었다. 고르바초프는 자신의 개혁에 반대하는 관료들을 고립시키기 위해 이런 정책을 제한적으로 시행할 생각이었다.
그러나 오랜 정치적 억압에 짓눌려 살던 사람들은 이 기회를 이용해 행동하기 시작했다. 1987년 말 소규모 비공식 단체 수천 개가 조직됐다. 지역 공장으로 인한 환경오염, 핵 발전소의 위험, 지역 정치 거물들의 부패, 소수민족 언어에 대한 억압, 스탈린 시대 지방 주민의 운명 등의 쟁점을 둘러싸고 시위들이 벌어졌다.
이제까지 억압받아 온 민족들의 시위와 소요 사태도 거세게 벌어졌다. 아르메니아, 카자흐스탄, 발트해 국가들, 그루지야, 우크라이나, 벨라루스, 아제르바이잔 등 비러시아계 소수민족 공화국들에서 벌어졌고, 사회적 조건들에 대한 불만이 소수민족의 권리를 위한 투쟁과 결합됐다.
20 파업이 확대되면서 이 요구들은 좀 더 광범한 불만의 초점이 됐다. 경제적 요구와 정치적 요구가 결합된 구호들, 즉 ‘관료들을 타도하라!’, ‘철야근무 수당 40퍼센트 인상, 야간 근무 수당 20퍼센트 인상!’ 등이 제기됐다. 곧이어 연금 인상, 추가 휴일, 출산 휴가 연장 등의 다른 요구들도 추가됐다. 21
무엇보다 1989년 여름 소련의 광산에서 파업 물결이 거세게 벌어졌다. 고르바초프는 이 파업이 “체르노빌 발전소의 사고보다 더 심각하고 가장 어려웠던 문제”라고 했다. 파업이 시작된 메즈두레첸스크의 시비야스코프 탄광에서 제기된 최초의 요구는 경제적인 것이었다. 물통을 충분히 보급하고, 겨울에 좀 더 따뜻한 옷을 배급하고, 한 달에 비누 800그램을 제공하라는 것이었다. 소련에서는 비누와 분말세제가 너무 부족해 “더러운 얼굴을 한 사회주의”라는 표현이 있을 정도였다.많은 사람들은 처음에 고르바초프의 개혁 정책에 기대를 걸었다. 그러나 저항이 터져 나오는 상황에서 고르바초프는 파업 금지 법안을 발의하는 등 억압적 본질을 드러냈다. 기대는 환멸로 바뀌어 갔다. 이런 상황에서 소련은 1989년 벌어진 동유럽 정부들의 격변에 개입할 여력이 없었다.
1989년: 동유럽의 일당 독재가 무너진 해
1989년 6월 4일은 상징적인 날이었다. 그날 중국 정부는 톈안먼에 탱크를 보내 학생, 노동자 수천 명을 학살했다. 고르바초프의 개혁에 모종의 기대를 가졌던 학생과 노동자들이 5월 14일 고르바초프의 중국 방문을 계기로 개혁을 요구하며 톈안먼에서 단식 농성을 시작했고, 시위는 완강하게 이어졌다. 중국 정부는 이를 잔혹하게 짓밟았다.
그러나 동유럽의 스탈린주의 정부들은 중국과 같은 방식을 택할 수 없었다. 중국처럼 하기에는 동유럽 정부들의 힘이 너무 약해져 있었기 때문이다. 같은 날 폴란드에서는 선거가 벌어졌고 연대노조 “바웬사의 후보들”이 투표에서 압승을 거뒀다.
22 1988년 파업은 1980~1981년만큼 강력하게 확산되지는 않았지만, 폴란드 지배층 내에서는 이 파업에 어떻게 대응할지를 둘러싸고 큰 논쟁이 벌어졌다. 결국 지배층은 연대노조 전국 지도부가 노동자들에게 파업을 중지하도록 호소하는 것을 대가로 반대파와 원탁회의를 하기로 했다. 기층의 활동가들 중에는 노동자 투쟁을 중시하며 연대노조가 원탁회의에 참가하는 것에 비판적인 전투적 투사들이 있었다. 그러나 그 세력은 충분히 강력하지 못했고, 민족주의적이고 친 시장적인 방향에 기울어 있었던 연대노조 지도부는 지배계급과 협조하며 지배자들이 옆걸음질 칠 공간을 열어 줬다.
변화는 1988년 봄과 여름 두 번의 파업 물결에서 시작했다. 당시 폴란드의 광부들은 지하 600미터 광산 점거 투쟁을 벌였다. 광산에서 화재가 발생했고, 메탄가스 폭발 위험이 컸지만 노동자들은 물러서지 않았다.[특권층]들은 기업의 경영자로 자리를 옮기며 자신들의 부와 권력을 이어갔다. 거의 비슷한 변화들이 다른 나라들에서도 벌어졌다.
원탁회의에서 민주적 권리를 확대하려는 조처가 결정됐고, 반쯤 자유로운 선거에 대한 합의도 이뤄졌다. 그러나 연대노조는 노조 측 자문위원이 IMF와 협정을 거쳐 명령 경제를 개혁하고 광범한 사유화를 실시할 정부의 총리가 돼야 한다는 데도 합의했다. 폴란드 지배계급은 일부 권력을 양보했지만 기업, 경찰, 군대와 같은 핵심적인 부분은 전과 같은 사람들이 운영했다. 연대노조를 지지했다는 이유로 해고됐던 기자들이 복직했지만, 신문사와 방송국에서 그 밖의 인사 상 변화는 거의 없었다. 권위적 일당 독재는 끝났고 노조를 결성할 권리 등 민주적 권리들은 확대됐다. 이는 분명 작은 성과가 아니다. 그러나 여전히 옛 노멘클라투라헝가리에서의 변화는 위로부터 시작했다. 헝가리의 국제수지는 날로 악화했고 심각해지는 경제 위기를 보며 지배층 내 분열이 커졌기 때문이었다. 보다 완전한 시장경제를 밀어붙이기를 원했던 일단의 소수 고위 지도자들은 노쇠한 당 지도자 야노시 카다르를 축출하기로 공모했다. 지배층 내 노선 대립이 심각해지는 상황 속에서 집권당에 반대하는 정치 집회는 수십만 명이 모일 정도로 커졌다. 결국 헝가리에서도 정부는 반정부 세력들을 상대로 폴란드와 비슷한 원탁 협상을 벌이기로 합의한다.
헝가리의 변화는 동독의 변화를 촉진했다. 심각한 위기에 처해 있던 헝가리 정부는 관광객을 가장해 헝가리에 들어온 동독인들이 서방으로 넘어가는 것을 막을 수 없었다. 1989년 5월 헝가리와 오스트리아 사이에 있었던 철조망이 사라졌다.
대규모 이민이라는 방식으로 표출된 동독 체제에 대한 불만은 동독 정부의 위기로 이어졌다. 이런 상황에서 동독의 저항 세력들이 성장하기 시작했다. 9월 초 노동자 밀집지역인 라이프치히에서 시작된 시위는 10월 전국적으로 확산됐다. 참가자들은 “우리는 여기에 남겠다”며 민주주의를 요구했다. 경찰은 시위를 폭력적으로 공격했는데 그 때문에 다음 날 더 많은 사람들이 거리로 나섰다. 결국 보안경찰의 총수가 노쇠한 당 지도자 호네커를 축출하고 개혁을 약속했다. 이후 11월 4일 100만 명이 참가한 시위가 벌어졌고, 독일 정부는 자신들의 개혁 약속이 진지하다는 것을 보이기 위해 베를린을 동·서로 갈라놓았던 베를린 장벽을 철거할 수밖에 없었다.
체코슬로바키아에서는 학생들의 시위가 출발점이었다. 다른 곳의 사건들을 보며 자극을 받은 학생들이 11월 17일 시위를 벌였다. 정부는 이 시위를 강경 진압했는데, 대개 10대 후반이었던 시위대가 경찰에 짓밟히는 것을 보면서 훨씬 더 많은 사람들이 행동에 나서게 됐다. 체코슬로바키아 전역의 학생들이 동맹휴업을 했고, 프라하의 모든 극장이 토론과 저항운동의 중심으로 변했다. 수십만 명이 시위에 가담했다. 앞선 나라들에 비해 체코슬로바키아에서는 혁명적 요소들이 많이 생겨났다. 반대파 그룹인 시민포럼위원회의 지방위원회는 900개가 넘었고, 7200개 공장에서 파업위원회가 생겨났다. 결국 지배 세력은 반대파와 연립정부를 구성해 자유선거를 치뤘고, 정치수였던 바츨라프 하벨이 대통령에 선출됐다.
루마니아에서는 동유럽 혁명 중 유일하게 폭력 혁명이 일어났다. 루마니아에서는 차우셰스쿠라는 권력자 1인에게 다른 어느 나라보다도 심하게 권력이 집중돼 있었다. 그는 저항을 잔인하게 탄압했다. 1987년 12월 브라소프에 있는 붉은별 트랙터 공장의 노동자들이 난방 감축 조처에 항의하며 파업하자, 차우셰스쿠는 보안경찰을 보내 파업 노동자들을 쏴 죽였다. 1989년 12월 티미쇼아라의 주민들이 폭압 정치에 반대해 거리에 나섰을 때에도 차우셰스쿠는 마찬가지 방법을 썼다. 그러나 티미쇼아라의 노동자들이 석유화학 공장을 폭파하겠다고 위협하자 군대는 하는 수 없이 철수했다. 그 직후 차우셰스쿠는 친 정부 관제 시위를 조직했다. 시위 참가자들은 처음에는 차우셰스쿠에게 환호를 보내는 듯했지만 이내 환호는 야유로 바뀌었고, 저항의 노래인 ‘티미쇼아라 찬가’가 울려 퍼졌다. 이 장면은 텔레비전으로 생중계됐고, 방송으로 이 장면을 본 수십만 명이 집회에 합류하며 차우셰스쿠는 타도됐다. 차우셰스쿠는 헬리콥터를 타고 도망을 가다가 붙잡혔고, 결국 크리스마스에 자기 휘하의 장군들에게 총살당했다. 이후 권력의 공백기를 메운 군대와 보안경찰은 자유 선거, 식품 공급 개선, 노동일 단축 등 양보 조처를 취해야 했다.
진정한 대중 운동, 미완의 혁명
1989년 동유럽에서 벌어진 일들을 두고 당시 좌파 내에서는 서방의 개입에 따른 친서구 자본주의적 시위로 치부하는 경향이 많았다. 얼마 전 민중당이 올해 벌어지고 있는 홍콩 시위가 미국의 지원에 힘입은 것이라는 입장을 발표했듯 말이다.
그러나 서방 지배계급은 동구권 체제의 위기를 서방 체제의 우월성 선전을 위해 이용하려 했을 뿐, 진정한 대중 투쟁이 성장하는 데는 아무 관심이 없었다. 미국은 톈안먼 광장에서 대학살이 벌어지던 그 날에도 중국 공산당과 긴밀한 협조 관계를 멈추지 않았다. 루마니아의 차우셰스쿠 정부는 시오니즘 국가 이스라엘과 아주 긴밀하게 협력했고, 동독의 권위주의적 통치자 호네커도 서독 제국주의로부터 막대한 원조를 받았다.
[1981년 폴란드 군부의] 쿠데타가 발생하기 한 달 전에 폴란드 관료 집단이 연대노조에 대한 반격을 어떻게 준비하고 있는지 개인적으로 상세하게 알고 있었다는 사실을 폭로하고 있다. 그런데도 미국 정부는 연대노조 지도부에게 경고하지 않았다.” 23
당시 동유럽 시위 참가자들 중에도 이런 비판을 한 활동가들이 있었다. “미국 정부는 1940년대에 우크라이나 민족주의 게릴라들에게도, 헝가리 혁명의 투사들에게도 무기를 공급하지 않았다. 헝가리 혁명을 연구한 영국의 우익 역사가 데이빗 어빙은 이 점을 충분히 밝히고 있다. 오늘날 〈워싱턴 포스트〉 지는 로널드 레이건이동유럽 노동자와 민중의 투쟁은 노동자·민중을 착취·억압해 온 국가자본주의 체제에 맞선 진정한 아래로부터 대중 투쟁이었다. 경쟁적 축적 과정에서 벌어졌던 체제의 위기와 임금 인상, 처우 개선, 민주주의 확대 등을 요구한 노동자·민중의 투쟁이 분출하는 과정은 동구권 사회들이 사회주의와는 아무 관련 없는 자본주의였다는 것을 무엇보다 분명히 드러냈다.
동유럽의 저항을 폄하하는 사람들 중에는 시위에 참가한 사람들의 의식을 근거로 그렇게 보는 경향이 있다. 시위대 중 다수가 옛 지령 경제에 대한 대안으로 시장 도입을 지지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난생 처음 대중 운동에 참가하는 사람들이 온갖 모순적 의식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거의 모든 대중 운동 과정에서 볼 수 있는 일이다. 1987년 한국의 민주화 운동과 노동자 대투쟁도 결국은 조금 더 민주적인 자본주의를 요구하는 운동이었고, 2016~2017년 박근혜 퇴진 운동도 마찬가지였다. 1989년 당시 소위 사회주의라고 불리던 사회에서 극심한 불평등과 억압을 경험했던 사람들이 서방 자본주의에 모종의 환상을 가지며 민주주의 확대를 요구한 것은 어느 정도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그러나 대중의 모순된 의식은 운동이 성장하는 과정에서 경험을 통해 변화할 가능성이 있다. 1905년 러시아에서 혁명이 시작된 계기도 전제 군주였던 차르에게 기대를 가지고 청원하러 가던 대중 시위였다. 1989년에도 고르바초프의 개혁에 대한 기대를 가지고 “고르비”(고르바초프의 애칭)를 외치며 거리에 나왔던 사람들이 금새 고르바초프에게 환멸을 느꼈다. 시장이 불평등과 빈곤을 해결할 대안이 아니라는 사실도 투쟁 과정에서 더 빨리 깨칠 가능성이 있었다. 대중의 의식을 탓하며 운동과 거리를 둔다면 오히려 더 온건한 세력에게 운동의 지도권을 내맡기게 될 뿐이다.
1989년 동유럽의 노동자·민중이 이룬 성과는 결코 작은 것이 아니다. 우리가 한국에서 1987년 운동의 성과를 소중히 여기듯, 자유 선거와 노동조합 결성 권리 등 제한적일지라도 민주적 권리들이 확대된 것은 중요한 성과이다. 그럼에도 당시 운동이 가장 발전한 곳에서도 구 정부를 붕괴시키는 ‘정치혁명’은 있었지만 진정으로 자본주의를 분쇄하는 사회혁명은 벌어지지 않았다. 따라서 사회 전체의 진정한 권력 변화는 일어나지 않았고, 구 체제의 권력자들은 사기업의 사장이 돼 계속 노동자들을 착취했다. 즉, 혁명이 더 나아가지 못한 것이 문제였던 것이다. 이 시기에 일어난 거대한 정치적 변화는 분명 계급 투쟁을 통해 가능한 것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빗나간 계급 투쟁으로서, 노동자평의회 같은 피착취 계급의 민주적인 대중 조직들을 창출하는 데까지 나아가지 못했다. 1989~1991년 격변의 잠재력은 컸지만 온갖 정치적 혼란 와중에 노동자 권력의 그림자조차 용납하지 않으려고 작심한 사람들에게 운동의 지도권이 돌아갔기 때문이다. 바로 옛 지배 관료들의 틈바구니에서 출세한 사람들이 결정적인 순간에 제한된 개혁 강령을 내세워 반대파 지식인들과 연합했고, 그렇게 선수를 침으로써 진정한 혁명을 미연에 방지할 수 있었다.
따라서 당시 동유럽에서 개혁주의적 지도부가 운동을 엉뚱한 방향으로 끌고 가지 못하도록 하려면 진정한 혁명적 지도력이 필요했다.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1848년 유럽의 혁명적 격변을 거치며 1850년에 이렇게 쓴 바 있다.
혁명적 노동자 당과 소부르주아 민주주의자들과의 관계는 이렇다 : 혁명적 노동자당은 타도해야 할 분파들에 맞서서 그들(소부르주아 민주주의자들)이 그들의 이익을 위해 공고히 하려 하는 모든 것에 반대한다.
소부르주아 대중은 될 수 있는 한 머뭇거리고 우물쭈물대면서 행동에 나서지 않고 있다가 상황이 결정되자마자 승리를 독차지하려 할 것이고 노동자들에게 평온을 유지하고 일터로 돌아가라고 요구할 것이며 이른바 과도한 행위를 경계하고 프롤레타리아가 승리의 열매에 가까이 가지 못하도록 막을 것이다.
민주주의적 소부르주아는 혁명을 될 수 있는 한 빨리 마무리짓기 바라는 반면에 … 크든 적든 모든 소유계급들이 그들의 지배적 지위로부터 추방될 때까지 혁명을 영속적으로 추구하는 것은 우리의 관심사이자 과업에 속한다 …
노동자들의 투쟁 구호는 ‘영구혁명’이 돼야만 한다!
결론
1989년에 스탈린주의 좌파들이 겪었던 혼란에서 보듯 진영논리에 빠져 스탈린주의 체제를 옹호하는 것은 결국 동유럽과 소련에서 착취·억압받아 온 노동자 투쟁을 적대시하는 것으로 이어졌다. 이는 진정한 현실을 눈감고 보지 않는 지독히 종파적인 태도이자, 역사의 검증에 걸려 넘어지고 만 재앙적 정치였다.
이런 경험은 국가자본주의론과 아래로부터 사회주의 사상에 기반한 혁명정당이 결정적으로 중요하다는 것을 분명히 보여 준다.
1989년 투쟁은 관료적 국가자본주의 체제의 본질을 드러내며 스탈린주의로 왜곡되지 않은 진정한 사회주의 전통의 씨앗을 뿌리는 중요한 계기였다는 점에서도 의미가 있다. 1989년의 격변을 계기로 동유럽에서뿐 아니라 남한에서도 아래로부터 노동계급의 자력해방 사상에 충실한 국제 사회주의 전통이 시작될 수 있었다.
1989년 동유럽 붕괴 이후 서구 지배계급은 시장의 승리를 말했지만, 그 말이 틀렸다는 점이 지난 30년 간 입증됐다. 그래서 오늘날 홍콩 시위에 참가한 수많은 사람들 사이에는 서구 자본주의에 대한 환상이 1989년보다 훨씬 적다.
오늘날 세계 곳곳의 지배계급은 1989년 동구권 체제들이 부딪혔던 것과 비슷한 문제에 직면해 있다. 장기적 이윤율 하락 추세 속에 헤어나오기 힘든 경제 위기와 불평등을 견디고 싶어하지 않는 노동자들의 계급 투쟁이 존재하는 상황 말이다. 홍콩의 시위는 오늘날 위기의 심화를 보여 주는 상징적인 사건이고, 어쩌면 중국과 세계 곳곳에서 벌어질 격변의 예고편일 수도 있다. 이런 기회들을 유실하지 않으려면 혁명적 조직이 세계 곳곳에서 더욱 굳건하게 성장해야 한다.
주
- 최일붕 1991, p88. ↩
- http://news1.kr/articles/?3535061, http://www.hani.co.kr/arti/international/america/860208.html ↩
- 풋 & 드레이퍼 2019, p77. ↩
- 같은 책, p77. ↩
- 같은 책, p79. ↩
- 하먼 2004, p689. ↩
- 최일붕 1991, pp197-198. ↩
- 클리프 2011. ↩
- 엥겔스 2006, p98. ↩
- 최일붕 2011. ↩
- 하먼 2009a. ↩
- 같은 글. ↩
- 하먼 2009b, p79. ↩
- 같은 책, p81. ↩
- 같은 책, p78. ↩
- 클리프 2018, p156. ↩
- 같은 책, p73. ↩
- 하먼 2009b, p104. ↩
- 하먼 1994, p372. ↩
- 로젠버그 1991, p34. ↩
- 하먼 2009b, pp168-169. ↩
- 편집부 1990, p222. ↩
- 편집부 1990, p204. ↩
- 하먼 2004, p750. ↩
참고 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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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일붕 2018, ‘61시간 천하로 끝난 ‘사회주의’ 쿠데타 ─ 소련 민중의 승리’, 《국제주의 전통 자료집Ⅳ. 국가자본주의》, 책갈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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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리프, 토니 2011, 《소련은 과연 사회주의였는가?》, 책갈피.
클리프, 토니 2018, ‘소련 붕괴 10주년 – 동구의 대변동’, 《국제주의 전통 자료집Ⅳ. 국가자본주의》, 책갈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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풋, 폴&드레이퍼, 핼 2019, 《사회주의의 진정한 의미를 찾아서》, 책갈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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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먼, 크리스 2004, 《민중의 세계사》, 책갈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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